온조왕릉`단서포착 주장 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회장
기사입력 2003-01-18 11:51 최종수정 2003-01-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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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의외로 많다. 트로이 유적지
를 발견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은 어릴적 ‘호메로스’를 읽
고 꿈을 키운 상인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유적지를 찾아낸 오스틴
헨리 레어드는 영국인 외교관으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꿈을 꾸었다.
인류 최고(最古)의 서사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견하고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가 실제로 있었음을 증명한 조지 스
미스는 지폐 조판공이었다. 이들은 고고학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
를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위대한 고고학자라 불린다.
21세기 한국 고고학계에도 아마추어들의 거센 돌풍이 불고 있다.
학문적 편견과 선입관이 없는 이들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새로
운 발견이 가능하다. 순수한 열정과 불굴의 모험정신은 아마추
어들의 최대 강점이다.
백제건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인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60)
회장. 어찌보면 그는 무모한 일에 도전하는 우리 시대 돈키호테
를 연상시킨다. 80년대초 급격한 도시개발로 파괴되던 하남시 유
적보호에 앞장선 것을 계기로 백제 첫수도인 한성백제 도성 유적
지를 찾아다닌 지 20년. 학계와 지방공무원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냉대와 무관심으로 대했다. 최근에야 그는 하남시 문화
재 전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회장은 묵묵히 발로 뛰며 8
9년 ‘한강서부와 백제건국’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하남 위례성
과 관련한 논문 3편을 발표해 92년 ‘서울시민대상’‘향토문화
대상’을 받는 등 학계에서 무시못할 존재로 자리 잡았다.
책상머리에 앉은 고고학 박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경기도
하남시 고골(춘궁동과 교산동)일대와 서울 도봉구 방학동, 남양
주시 등 초기 백제 유적지가 있는 산천을 쉬지 않고 발로 뛰며
고대도시의 형체를 밝히고 있는 그의 성과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
다. 백제문화연구회 전문위원인 오순재(명지대)교수와 함께 고골
일대가 가장 유력한 한성백제 도성이라는 학설을 제기한 한회장의
계미년(癸未年) 포부는 무엇일까.
그는 “우리 고고역사학계의 최대 미스터리인 백제시조 온조왕릉
의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온조왕보다 훨씬 시대
가 앞선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릉이나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릉은
발굴, 보존돼 있다. 올해는 고구려 장수왕의 피의 보복에 의해 4
75년 왕도가 철저히 유린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비운의
왕도 한성백제의 비밀이 풀리는 해가 될까. 초기백제가 부족국
가에 불과했다는 한·일 고고역사학계의 통설을 뒤집고 백제가
초기부터 강력한 왕권국가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동아시아 역사
는 다시 쓰여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학계는 한반도 서남
쪽의 마한이 4∼5세기까지 지탱했다고 주장한다. 일본학계는 초
기백제가 약체였다는 것을 근거로 한반도 남단에 임나일본부를 건
설했다고 강변한다.
한회장은 “왕권국가였던 부여에서 남하한 초기 백제가 강력한
왕권국가였고, 한반도에서 여지껏 발견된 적이 없는 부여(지금의
만주일대)족과 연관된 유물, 유적에 대한 유력한 단서들이 하남
일대 유적조사결과 서서히 확보되고 있다”고 운을 뗐다.
―한성백제 발굴등 백제건국사 연구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80년대초 제가 살던 서울 양천구 신정동 토성보존을 위해 경인
지역 유적을 조사해나가던 중 고대의 소금 유통로가 하남 위례성
과 연계됐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철과 소금은 고대국가가 가
장 중요시한 전매품이었지요. 한반도 중심 한강권을 500년간 통
치하고 가야까지 연합한 강력한 왕권국가로 한성백제를 볼 근거
는 많습니다. 백제는 중국 일본등 해외 진출과 관련돼 있을 만큼
강성했습니다. 정사 기록에 남아있는 500년 왕도를 찾지 못한 나
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우리 학계의 직무유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훼손이 심각한 하남시 춘궁동 고골 능너머고분을 한번 답
사한 문화재청 관계자가 그것이 단순한 구릉일 뿐이라고 폄하하
고, 문화재연구소측은 ‘토기 굽는 가마터’일 가능성을 제기하
고 있습니다.
“92년 지표조사때 무덤에만 있는 호석(護石)이 발견됐고 물이
묻으면 접착제 역할을 해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하는 검은 주물사
도 능 표면에 입혀 있는 것이 발견됐는데 10년째 방치되는 바람
에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이르면 오는 3월중순부터 세종대박물관측이 고분주변 지표조사
등 발굴을 위한 본격 준비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능너머고분
이 백제왕릉, 특히 백제시조인 온조왕릉일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근거가 있습니까.
“공주의 무령왕릉과 마찬가지로 이 고분도 교산동 왕궁추정지로
부터 서쪽으로 200m에 있고, 지하탐사결과 아치형 석실로 추정
됩니다. 고대의 도성안 왕릉은 해가 지는 서쪽에 있는 게 공통점
입니다. 지하자원탐사업체 지오테크코리아의 최근 2차례 탐사결
과 고분내 석실 2군데에서 금동관과 금혁띠 추정 물체가 70∼80c
m 간격으로 정북 방향으로 놓여있는 것을 포착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나 신라에게는 변방에 불과했고, 고려의 왕족이 무덤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고골일대 선법사 사찰에는
온조왕의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고, 임금이 마셨다는 ‘어용샘
’도 있습니다. 교산동왕궁추정지 남쪽 배후성이 지금의 남한산
성입니다. 백제 때 처음 축조된 남한산성에는 조선 인조임금의 지
시로 지었다는 온조왕 사당이 있습니다. ”
―교산동건물지에서 4차 유적발굴을 해온 경기문화재단부설 기전
문화재연구원은 이 일대를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 유적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3000여평에 이르는 교산동건물지의 대형 초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 초석입니다. 통일신라이후 건물유적지의 초석은 모두 잘 다
듬은 인공 초석이지요. 능너머고분 일대에서 백제초기, 부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교산동
건물지 서쪽의 이성산성과 남쪽의 남한산성은 처음 성을 쌓을때
어디선가 화강암을 가져와 쌓았습니다. 남한산 일대에서는 화강암
이 나오지 않습니다. 고골일대와 주변 미사리에서 백제 삼족토기
등 유물이 발굴되는데 교산동건물지는 분명히 백제와 연관이 있
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만한 규모의 목조건축물이 있었다면 기록
에 남아있지 않을 턱이 없지요. 이것은 군사용 건물이 아닙니다.
”
―그동안 백제 건국사 연구의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고대 왕도는 제정일치 사회에 부합되는 도시구조를 형성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남시 고골일대가 도시의 ‘신성(神聖)라인’을
갖춘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실제 신성라인에 부합되는 유적을
찾아내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신성라인이란 왕궁을 중
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사찰등 비중있는 건물이 배치된 구조이지요
. 모든 왕도는 이러한 도시구조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제가 서울 도봉구 방학동으로 추정한 하북 위례성의 단서도 드
러날 것입니다.”
―공무원, 향토사학자로서 발로 뛰면서 느낀 학계의 문제점과 정
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수직으로 계열화되어 있는 우리 고고학계는 개인의 희생이 없
으면 기존의 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기 힘든 연구 환경입니다.
더구나 발로 뛰는 현장학자가 드물지요. 하남시 역시 사유재산
침해를 우려하는 지역유지들 탓에 유적지대로 제한하기를 꺼립니
다. 시민단체의 건의대로 하남시문화재보호특별법을 제정해 국가
의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최근 일본 관광객들은 자신의 뿌리인
부여와 공주의 백제유적을 찾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일본에 문
화를 전해준 한성백제 유적이 본격 발굴될 경우 하남은 일본인이
가장 많이 찾는 수도권 관광명소로 떠오를 것으로 확신합니다.
”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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