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운평리 2호분 금제이식(좌)과 고령 지산동 40호 석곽묘 금제이식(우)이 닮았다.
▲ 서면 운평리 현장
순천 여수 광양지역 고대사의 비밀이 풀리고 있다. 순천시 서면 운평리 고분이 발굴되면서 출토된 토기와 장신구등 유물이 그 열쇠다.
지난 14일 순천대학교에서는 이런 가야의 역사 유물로 새롭게 조명된 "전남 동부지역의 가야 문화" 세미나가 열려 전남동부지역의 가야문화에 대해 사학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18일엔 운평리 발굴 현장에서 출토 유물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그동안 전남지방에서 가야계 토기가 부분적으로 출토되었지만 소홀히 취급되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가야를 영남지방으로 한정하여 보려는 선입견이 있었고 전남 지방의 가야계 토기를 일시적인 교류나 교역의 소산으로 접근하려는 시각 때문이었다.
다만 고대사나 고고학의 일각에서 섬진강 하류역을 포함한 전남동부지역에 대하여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대가야 연맹체)과 관련지어 견해(박천수 1996, 김태식2002)가 개진된 경우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고고학 자료로서 뒷받침되지 못했다.
전남 동부지역에서 가야계 고분이 확인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특히 2005년과 2008년 2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순천 운평리 유적은 가야계 고분군으로서 전남 동부 지역의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다.
"교수님, 제가 사는 곳에 자주 토기가 발견 돼요."
순천 박물관 이동희 학예연구사에 의하면 2003년 무렵 순천대학교 한 학생의 말에 옛 무덤이 있겠다 싶어 학생, 교수 몇 분과 가 보니 세월이 흘렀지만 봉분이 큰 게 수장급 같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 주변에 있는 토기를 보니 분명 가야 토기였다.
육안으로 봉분이 확인되는 고분이 모두 7기로 능선 상에 있고 10-20미터, 높이 1-3미터로서 중형급 고총이었다.
규모가 큰 2.3호 분은 주능선에 자리하고 비교적 작은 1호분은 가지능선에 있었다. 순천시 운평리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2005년과 2008년에 2차례 이루어졌다.
남호현 순천대 박물관장을 조사단장으로 자문위원에 곽장근(군산대학교 교수),이희준(경북대학교) 임영진(전남대학교 교수), 조영제(경상대학교 교수), 최성락(목포대학교 교수),최몽룡(서울대학교 교수), 손병헌(성균관대학교 교수)과 책임조사원으로 이동희(순천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사원으로 이순엽(순천대학교 박물관 조교) 최권호(순천대학교 박물관 보조 연구원)등이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전남 동부권 지역은 그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등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의 일부이고 백제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 기원전 18년 고대국가로 등장한 백제는 512년에 순천등 동부권지역을 점령, 전남 동부권을 지배 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마한의 일부에서 백제로 바로 이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순천대 박물관이 발굴한 서면 운평리 고분발굴은 순천 여수 광양의 고대사를 풀어주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 되었다.
"마한-가야-백제 이행"
결론부터 말하면 운평리 고분으로 순천지역의 옛 지명이 확인되었다. 운평리 고분의 출토유물은 이 지역이 대구북부 고령지방에 기반을 둔 대가야로부터 50~60년간 영향을 받은 사실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순천일원의 고대사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시대인 5세기 이전에는 마한에 속해 있다가 5세기 중엽부터(450년경) 6세기초(510년경)까지 가야의 영역권으로 들어가 순천 현지 수장을 통한 간접 지배를 받다가 512년에 백제에 편입되고 백제가 660년 신라에 패하면서 순천일원 전남 동부권도 통일신라시대로 들어가는 것으로 정리된다.
2005년 1차 발굴(1호분 고분)에 이어 2007~8년 2차로 발굴(2호,3호분 고분)한 서면 운평리 고분은 백제가 전남지역을 영역화(512년)하기 이전의 5세기~6세기 초엽의 가야계 고분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올초까지 발굴한 2호분고분은 중형으로 이지역 최고 우두머리계층의 무덤을 판단돼 운평리 고분의 성격규명과 5~6세기 전남 동부지역 고대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지역은 매봉산(해발 271m)에서 내려오는 능선하단부로 주민들에 따르면 해방이후에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석곽묘와 토기들이 확인되었고 고분군이 위치한 능선이 말단에는 지석묘군이 있어 오랜기간 중심지배집단이 살았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2005년 발굴한 1호분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류로 대가야계의 토지로 현지에서 제작된것으로추정되며 대가야인 경북고령 지산동 44~45호분의 단계로 5세기말~6세기 초엽으로 추산된다.
2호분고분은 주석실1기에 석곽묘12기, 토광묘 3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2호분 이전에 만들어진 묘로 전남동부지역에 가야의 영향이 있기 이전 토착 지배층 묘제이다. 2호분 출토토기도 1호분과 같이 대부분이 대갸야계다. 12기의 주변석곽은 동시 매장이거나 후에 추가매장의 흔적으로 신라계 토기가 출토되어 연구대상이다.
이렇듯 2호분에는 전남동부지역에서 한 유적지안에 4~6세기 시대의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등 함께 있는 최초의 경우로 이 시대에 순천지역을 지배하던 최고 수장세력의 묘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장묘제의 변천상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백제가 영역화(512년)하기 이전에 이미 대가야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이 시기에 운평리 고분이 규모가 고총화되고 대가야토기의 출현은 전대와 다른 것으로 전남 동부지역과 대가야 세력이 신라세력에 서쪽으로 밀리면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이나 후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운평리 출토 자료들은 일본서기 繼體記 6년(512년)條에 나오는 任那(대가야) 四縣(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가운데 순천이 '사타'였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임나4현의 실제지명과 영역은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다. 실제지역과 영역을 일본의 극우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야지역뿐 아니라 영산강지역에서 충청지역까지 최대한 확대하면 한반도 남부지방은 왜국 지배권임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5년 원광대 전영재교소는 순천이 옛 이름이 사평에서 착안한 사료연구만을 통해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타와의 유사성으로 순천지역일원이 임나4현'이라는 가설을 내놓았었다. 그런데 이곳 순천 운평리 고분에서 대가야계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 가운데 사타가 순천이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임나4현이 가야 땅이고 순천이 가야의 영향권에 있었고 이름도 '사타'이니 임나4현이 순천지역이다는 결론이다. 결국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본의 지배했다는 영역은 순천여수광양해안으로 줄어든다. 즉 한반도 남부를 관장하는 넓은 지역이 아니라 여수순천광양의 해안가 정도가 임나4현의 실제 지역이고 영역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2006년 운평리 고분발굴은 한줄기 빛으로 '이곳이 가야인 임나4현'이라는 기존의 가설을 증명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며 충남이나 영산강 유역이 아닌 섬진강의 서쪽이 임나4현이라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순천의 옛 지명이 '사타'라는 백제이전의 여수 순천 광양의 옛 지명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임나는 대가야의 옛 지명. 이번 발굴을 통해 임나4현(대가야의 네 고을)은 순천과 여수 광양을 말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동희 순천대학교 박물관 학예사는 "그동안 백제이전에 이 지역의 지명을 알 수 없었다.
이번 발굴을 통해 임나4현의 사타는 지금의 순천, 모루는 광양, 상다리와 하다리는 각각 여수와 돌산이라는 견해에 일치했습니다."라고 말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고대에는 영산강 권역권과 낙동강권역의 중간에 섬진강과 지리산권역의 문화권이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습니다. 추가발굴이 꼭 필요합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운평리 고분은 임나4현의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을 반박하는 중요한 유물이라는 점이다.
그 와중에 임나4현으로 일본의 지배를 200년이나 받은 뒤에 왜국이 백제에 떼어주었다는 것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다. 왜의 지배를 200년이나 받았다면 당연히 왜국 지배계층의 각종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번 발굴에서는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 남해안 일대에서 왜국의 유물들이 드문드문 나온다. 여수 죽림지구나 고흥등의 고대고분발굴에서는 왜국이 갑옷이나 토기류들이 나오는 데 이것은 지배를 뜻하는것이라기보다 당시 해상을 통한 교류가 많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 특별취재반 / 염정금기자 >
▲ 2호분에서 나온 토기류 (사진 위), 2호분 주석실 (사진 아래)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후반부터 정한론등 한반도침략을위한 구실을 찾던 일본의 극우사학자들이 서기 70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서기의 임나4현을 백제에 할양했다"는 뜻의 한 구절을 확대해석해서 마치 고대에 왜국이 3~5세기동안 한반도 남부지방을 점령한 것으로 왜곡한 주장이다. 이들은 그동안 임나4현의 영역을 낙동강유역은 물론 영산강유역과 충청권까지 확대해서 고대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사회를 왜국이 점령하여 식민지를 만들고 그 곳에 군정기관인 '일본부'를 두었다고까지 주장, 식민지화의 논리로 활용하려 했었다.
즉 가야6연맹 가운데 임나가야를 왜국이 점령하여 그 땅을 기반으로 한반도를 200여년이나 식민지화했다는 역사왜곡으로 지금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에서는 그대로 싣고 가르치고 있어 여전히 한일 갈등의 씨앗으로 남은 사안이다.
그러나 그동안 삼한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에는 이러한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어떤 자료도 발굴되지 않았고 오히려 삼한사회가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특히 고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이 섬진강 서쪽의 전남 동부지역이었다는 학설이 잇따라 제기되었고 이번 서면 운평리 고분은 임나4현의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닌 순천 여수 광양일대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 고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일부 일본학자들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당시 왜국과 교류가 있었다면 지배기구라기 보다 교역창구 정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일본에서도 극우적인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한국 고대사학자들의 주장에 긍정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2006년 운평리 고분발굴은 한줄기 빛으로 이곳이 가야인 임나4현이라는 기존의 가설을 증명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며 충남이나 영산강 유역이 아닌 섬진강의 서쪽이 임나4현이라는 주장이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