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동사강목(東史綱目)--지리고(地理考)

吾心竹--오심죽-- 2008. 12. 3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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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하건대 역사를 읽는 자는 반드시 먼저 강역(疆域)을 정해놓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점거(占據)한 상황을 알 수 있고, 전벌(戰伐)에서의 득실을 살필 수 있고, 분합(分合)의 연혁을 상고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보는 데 어둡게 된다.
삼국 시대에 반드시 고사(故事)를 맡은 관원이 있었을 터이나, 한(漢)과 당(唐)이 침략하고 거란(契丹)과 말갈(靺鞨)이 난을 일으키고 진 훤(甄萱)과 궁예(弓裔)가 분멸(焚滅)하여, 수천 년의 비서(秘書)와 도적(圖籍)이 하나도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김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때에는 고대(古代)와의 상거가 그리 멀지 않으니, 고적(古籍)을 널리 상고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다만 신라의 잔여 문자에 의하여 구차하게 책을 만들었을 뿐이고, 정하동(鄭河東 하동은 정인지(鄭麟趾)의 봉호(封號)이다)도 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고려사(高麗史)》를 만들었으므로, 국읍(國邑)과 산천(山川)을 고거(考據)할 데가 없게 하였을 뿐더러, 심한 경우에는 원근(遠近)을 전도하고 남북(南北)을 바꾸어 놓았으니, 믿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전기(傳記)에 의거, 이 책을 서로 증험(證驗)하여 지리고를 만든다.
병자년(영조 32 1756) 겨울에 정복(鼎福)은 기록한다.

[주C-001]지리고(地理考) : 본 지리고는 순암(順庵)이 여러 문헌을 들어 변증(辨證)하는 한편, 종래 주장의 잘못들을 지적하고 자기 의견을 내세운 것인바,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틀린 글자라고 생각되는 것도 매우 분명한 상식적인 것 외에는 원문대로 번역하고 주를 달았다. 단 ‘盖馬’(본문에서는 ‘盖’자와 ‘蓋’자를 혼용하였다)의 ‘盖’자 경우, 본 ‘盖馬大山考’에서 ‘蓋通典音合’이라 하였으니, 순암은 ‘盖’의 음을 합으로 하였는지도 모르나, 본 번역에서는 통상음인 개로 하였다.

 

 

단군강역고(檀君疆域考)


단군의 강역은 상고할 수 없지만, 기자(箕子)가 단씨(檀氏)를 대신하여 왕 노릇하였는데 그 제봉(提封 제후(諸侯)의 봉지(封地))의 반이 곧 요지(遼地)였으니, 단군의 시대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고기(古記)》에,
“북부여(北夫餘)는 단군의 후손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니, 아마 단씨 세대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기고 옛 강역이 이내 기자의 봉지에 흡수된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세속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다.’ 하고, 전등산(傳燈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 고 전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쪽은 또한 한수(漢水)로 한계를 해야 할 것이다.


 

[주D-001]《고기(古記)》 :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약한 것이다.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인 듯하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는 《단군본기(檀君本紀)》로 되어 있다.

 

 

 

태백산고(太伯山考)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태백산(太伯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이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은 모두 그 설을 따랐다. 태백산이 묘향으로 변한 것은 그 어느 시대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모든 산 이름은 대부분 중들이 지었으니 묘향이란 이름 또한 불가의 문자이리라.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의 호)의 묘향산기(妙香山記)에,
“산은 압록강(鴨緣江) 남쪽에 있는데, 요지(遼地)와 경계가 되고 장백산(長白山)의 분맥(分脉)이다. 그 산에는 향나무가 많다.”
하였다. 그렇다면 묘향산이란 이름은 향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단군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하강하였고 단(檀)은 바로 향나무인 까닭에 후인이 그 임금을 단군이라 칭하고, 그 산을 묘향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있는 태사(太師)에게 올린 장(狀)에,
“고구려의 잔민(殘民)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고 국호를 발해(渤海)라 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 것이요, 위에 말한 장백산이 바로 그것인데 단군이 하강하였던 지역이다.
【안】《여지승람》에는, 강동현(江東縣)에 대박산(大朴山)이 있고 그 아래에 큰 고총(古塚)이 있는데 세속에는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고 기록되고, 지금 그 지방 사람들이 대박산을 태백산이라고 하나, 또한 믿을 수 없다.


[주D-001]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 순암(順庵)이 주(註)한 것이다. 이하도 같다.

 

 

백악고(白岳考) 부(附) 아사달(阿斯達)


《삼국유사》에,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고,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하고, 또,
“아사달은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 지금의 배천(白川)이다. 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 백악궁(白岳宮) 지금은 미상 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으나, 모두가 확정되지 않은 말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에 있는 백아강(白牙岡)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서경(西京)평양(平壤) 을 거기에 해당시켰다. 신지(神誌)는 단군 때 사람이라고 세속에서 전한다. 권남(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주(註)에 보인다.
이른바 백아강이란 곧 백악(白岳)이다. 단군이 도읍을 옮긴 것이 마치 고구려가 평양(平壤)에서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기고, 신라가 금성(金城)에서 월성(月城)으로 옮긴 것 같은 것이 아닐까?
《고려사》 지리지에,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을 세속에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전하고 장장평(庄庄坪)은 세속에서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하는데, 곧 당장경(唐藏京)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는 “장장평이 문화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기지(基址)가 지금도 있다.” 하였으니, 백악은 바로 이 땅이다. 방언으로 아사(阿斯)는 구(九)에 가깝고 달(達)은 월(月)에 가깝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나라 지명은 모두 방언으로 불렀으니, 이것 또한 그랬으리라. 혹자는 “그 산에 궁궐의 옛터가 있기 때문에 세속에서 궐산(闕山)이라 칭하는데, 와전되어 구월산이라 한 것이다.” 한다.

 

 

기자강역고(箕子疆域考)


《한서(漢書)》에는,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하고, 《당서(唐書)》에는,
“배구(裴矩)가 ‘요동은 본시 기자의 나라다.’ 하였다.”
하고,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요동은 본디 조선(朝鮮)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놓자 조선으로 갔는데, 그대로 기자를 거기에 봉하였다.”
하고, 《요동지(遼東志)》에는,
“요동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
하고, 《일통지(一統志)》 요동명환(遼東名宦)에도 기자가 실려 있고, 《성경지(盛京志)》에서는 심양(瀋陽)ㆍ봉천부(奉天府)ㆍ의주(義州)ㆍ광녕(廣寧) 지경이 모두 조선과 경계했다고 하였으니, 요동의 태반이 기자의 제봉(提封)이 되었었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광녕성(廣寧城) 북쪽 3리에 기자정(箕子井)이 있고, 그 곁에 기자묘(箕子廟)가 있으며, 후관(冔冠)을 씌운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병화(兵火)에 탔다.” 하였다. 기자는 또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무릇 도읍이란 국중(國中)에 정하는 것이고 보면, 오운(吳澐)이 ‘요하(遼河) 이동, 한수(漢水) 이북이 다 기자의 땅이었다.’ 고 한 것이 옳다.
후손에 이르러 연(燕) 말기에 서쪽 지경 1천여 리를 잃고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곧 《한서》 지리지에 보인 요동군(遼東郡) 동부(東部) 속현(屬縣) 반한(潘汗)이다. 이때에 요지가 중국에 홉수되었던 것이다.
《괄지지(括地志)》에는,
“조선(朝鮮)ㆍ고구려(高句麗)ㆍ예(濊)ㆍ맥(貊)ㆍ동옥저(東沃沮) 등 5국(國)의 땅은 동서가 1천 3백 리, 남북이 2천 리이며,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4백 리, 서쪽으로 영주(營州) 지경까지는 9백 20리, 남쪽으로 신라국(新羅國)까지는 9백 20리, 북쪽으로 말갈국(靺鞨國)까지는 1천 4백 리이다.”
하였으니, 그것 또한 방증(傍證)이 될 만하다.


[주D-001]반한(潘汗) : 《한서》 지리지에는 반(潘)이 ‘潘’자로 되어 있고, 응소(應劭)는 “음이 반(盤)이다.” 하였다.

 

 

위씨강역고(衛氏疆域考)


위만(衛滿)이 기씨(箕氏)의 나라를 빼앗았으니, 그 영토는 서북으로는 만반한에 경계하고, 또 곁에 있는 작은 읍(邑)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침략하여 항복시켰으니, 지금 동북 새외(塞外)와 북도 영동(嶺東)의 땅이 바로 그것이다.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청제(靑齊 청주(靑州)와 제주(齊州) 지역)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한수(漢水)에 이르러 삼한(三韓)과 접하였었는데, 뒤에 망하여 한(漢)에 흡수되니 한에서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창해군고(滄海郡考)


《사기(史記)》에,
“장량(張良)이 한(韓)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동쪽으로 와서 창해군(滄海君)을 보고 역사(力士)를 얻었다.”
하고, 그 주(註)에,
“창해군은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다.”
하였으니, 창해라는 이름이 생긴 지 이미 오래다. 한 무제(漢武帝) 원삭(元朔) 원년(B.C. 128)에 예(濊)의 임금 남려(南閭)가 항복하자,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으니, 아마 옛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리라. 예고(濊考)와 관련시켜 보기 바란다. 잡설(雜說) 삼한 조에 또 보인다.


삼한고(三韓考)


삼한 땅은 지금의 한수(漢水) 이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한(馬韓)은 한수 이남 경기ㆍ충청ㆍ전라도 땅이며, 서쪽은 바다를 건너 청제양월(靑齊揚越 청주ㆍ제주ㆍ양주(揚州)ㆍ월주(越州) 지역)과 통하고, 동남은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과 통하고, 북쪽은 한수를 한계로 조선과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ㆍ변한(弁韓)과 연하였는데, 뒤에 백제가 그 땅을 차지하였다.
○ 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洛東江) 이동의 지역으로,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연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서쪽 지경은 대부분 변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동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服屬)되었다가 뒤에 신라가 되었다.
○ 변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 이서의 지역으로, 서남쪽은 지리산(智異山)을 걸쳐 지금 전라도 동남 지역에 이르고, 동쪽은 진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동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되었다가 뒤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변한 땅은 또 나뉘어 5가야(伽倻)의 땅이 되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가야금(伽倻琴)을 변한금(弁韓琴)이라 하였으니, 그것 또한 증거가 된다. 지리산 서쪽에 있는 땅은 백제에 흡수되었다.
상고하건대 삼한(三韓)은 소소한 지방의 연혁에 비할 것이 아닌데, 우리 나라 문헌에 증빙할 만한 것이 없어, 수천 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제 여러 설을 아래에 인용하여 그 옳고 그름을 나타낸다.
○ 《후한서(後漢書)》에서 비로소 삼한전(三韓傳)을 두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韓)에는 3종이 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 국(國)은 군(郡)과 같다)으로 되었고, 북쪽은 낙랑(樂浪)과 연하고, 남쪽은 왜국과 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으로 되었고,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접하였다. 변진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국과 접하였다. 모두 78국인데, 동서는 바다로 한계하였다. 삼한 땅을 합하면 사방 4천 리가 된다.
【안】 4천 리라는 설은, 먼데서 들었기 때문에 사실과 틀린다.
○ 《북사(北史)》의 백제전(百濟傳)에는 ‘마한의 무리이다.’ 하였고, 신라전(新羅傳)에는 ‘진한 종족이다.’ 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근사하다.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舊唐書)》 같은 데에는 모두 ‘변한의 묘예(苗裔 후손)가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떠도는 이야기이다. 낙랑은 옛날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니, 계림(鷄林 신라)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
○ 고려 중 무극(無亟)의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요, 변한은 백제다.’ 하였으니,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 벌써 마한을 병합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을 백제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 원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한 것이다. 《당서(唐書)》에 ‘변한의 묘예가 낙랑에 있다.’ 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의 출신으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서로 대치했다고 하는 것은, 온조왕 이전에 있었을 터이니, 도읍한 곳이 낙랑의 북쪽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아 또한 변나산(卞那山)이라 불렀던 까닭으로 고구려를 변한이라고도 하나,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 최치원을 가리킨다)의 말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 고려 말기 김경숙(金敬叔)의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삼한(三韓)을 서술할 적에는,
“고구려는 낙랑과 변한을 병합하고, 백제는 마한과 대방(帶方)을 병합하였다.”
하고, 삼국(三國)을 서술할 적에는,
“고구려는 곧 마한이고, 백제는 곧 변한이다.”
하고, 또 고려 세조(世祖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아버지)가 ‘대왕(大王)께서 만일 조선(朝鮮)ㆍ숙신(肅愼)ㆍ변한(弁韓)의 땅에 왕 노릇을 하려 하신다면, 송악(松岳)을 먼저 점령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궁예(弓裔)를 설득한 말을 기록하고, 주(註)에,
“지금 서경(西京)이 옛날 변나경(弁那京)이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다.”
하였다.
○ 권근(權近)은 이렇게 적었다.
삼한에 대한 설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는데, 백제 온조가 서게 되자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 익산(益山))에 옛 성(城)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도 그것을 기준성(箕準城)이라고 일컬으니,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진한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난 땅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변한이 낙랑 땅에 있었다.’ 하고 또 ‘평양(平壤)은 옛 한(漢)의 낙랑군이다.’ 하였으니,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한서》에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변한이 남쪽에 있다.’ 한 것은, 대개 한(漢)의 지경인 요동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리라.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은 잘못이다.
○ 본조(本朝) 서거정(徐居正) 등이 《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삼한에 대한 설은 최치원에게서 이미 정론이 내려졌다. 고려 중엽에 와서, 금마산(金馬山)이 백제의 지경에 있고 평나산(平那山)이 고구려의 지경에 있으니, 평(平)자와 변(卞)자가 음이 저로 가깝다 하여,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은 고구려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지적해서 말한 사람은 없었다. 김경숙(金敬叔)의 말은 스스로 모순되니 따질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권근(權近)이 곧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은 고구려가 되었다고 단정하여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설을 착란시켰으니, 웬말인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상고하건대, 삼한 때에는 마한이 가장 커서 54국을 거느렸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거느렸으니 지금 익산(益山) 이남에 54국을 수용할 땅이 없다.
생각건대, 마한의 왕도(王都)가 남쪽은 변한에 아주 가깝고, 동북쪽은 낙랑(樂浪)ㆍ옥저(沃沮) 등과 서로 인접하였으며, 뒤에 고구려 동명왕이 낙랑에서 일어나 마한 동북쪽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후인이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후한서》에 ‘변진(卞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 하고, 또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하였으니, 변한과 진한이 서로 인접하였었다는 것 또한 알 수가 있다.
신라 혁거세 19년에 변한이 와서 항복하였고, 백제가 이미 마한을 멸한 다음, 신라를 잠식하여 변한의 옛땅인 지리산(智異山)의 서쪽을 모두 병합하였으니, 후인이 백제를 변한이라고 칭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권근은 금마(金馬)ㆍ평나(平那)의 설에 미혹되어, 마한이 백제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결국 백제라고 했는가?
또 《당서》에 이른바 ‘변한의 묘예가 낙랑 땅에 있다.’ 한 것은, 아마 변한의 계통이 낙랑으로부터 나왔음을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권근은 그것을 이끌어 증거하면서 곧 묘예라는 두 글자를 빼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그의 말에 ‘《후한서》에 「변한이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대개 한(漢)의 경계인 요동 지방을 기준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의 말과 같다면, 그가 말한 마한이 서쪽에 있다는 것 또한 요동의 서쪽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관육익》에는 ‘서경이 옛날 변나경이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거짓되고 허망한 말이다. 변한을 서경으로 삼는다면, 조선(朝鮮)은 다시 어느 땅을 가리킨 것인가? 후일에 궁예가 나주(羅州)에서 용병(用兵)하기 시작하였으니, 세조가 말한 변한은 백제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땅에 원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하고, 백제 땅에 원래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했다.’ 하였는데, 지금 평양부(平壤府)에 마읍산이 있고, 부안현(扶安縣)에 변산(邊山)이 있으니, 《삼국유사》의 말이 혹 증거가 있는 듯하다. 그런 때문에 최치원의 구설(舊說)에 따라 경기도ㆍ충청도ㆍ황해도 등을 마한의 옛 영역에 해당시키고, 전라도를 변한의 옛 영역에 해당시켰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 동방은 옛날에 저절로 남북이 나뉘어졌다. 북쪽은 본디 삼조선(三朝鮮)의 땅이요, 남쪽은 곧 삼한(三韓)의 땅이었다. 《후한서》에 삼한 지역을 가리킨 것이 또한 명백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 육부(六部)의 추대를 받자 신라가 비로소 생겼고, 온조(溫祚)가 마한을 멸하자 백제가 일어났다. 변한은 전사(前史)에서 비록 어디로 전했는가를 말하지 않았으나, 수로왕(首露王)이 가락(駕洛)에 나라를 세우고 진한 남쪽 지역을 차지했으매, 가야산(伽倻山) 남쪽과 지리산(智異山) 동쪽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가 뒤에 신라에 흡수되었으니, 아마 이 지대가 곧 변한의 땅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남쪽은 어디까지나 남쪽이고 북쪽은 어디까지나 북쪽이니 본디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다. 그 한계는 분명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한수(漢水)가 남북을 한계하는 천참(天塹)이 되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비로소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다.’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착오요, 권근은 마한이 백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고구려가 변한이 아니라는 것은 역시 알지 못하고 혼동해서 말하였으니, 이것이 둘째 착오다.
삼한 때 본국에는 비록 문자가 없었으나, 《전한서》와 《후한서》에 모두 열전(列傳)이 있으니, 연대(年代)의 상하와 지계(地界)의 원근을 가지고 구한다면 백대토록 멀더라도 눈 앞에 있는 듯 역력하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 땅을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한 소제(漢昭帝)가 그것을 합쳐서 이부(二府)로 만들었는데, 주몽(朱蒙)이 일어나서 이내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세웠으니, 어느 시기에 변한이나 또는 마한이 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써 사군과 이부는 어디까지나 사군ㆍ이부였고 삼한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후한서》에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고 또한 왜국과 접했다.’ 하였고, 또 ‘진한과 변한은 섞여 살았으므로 의복ㆍ거처ㆍ풍속이 동일하다.’ 하였고, 또 ‘마한은 54국을 거느리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거느렸다.’ 하였으니, 진한과 변한은 합해도 겨우 24국으로 마한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이것으로 보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합쳐서 마한이 되고, 영남(嶺南) 1도(道)가 나뉘어 진한과 변한이 되었다는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상고하건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삼한의 강역은 천고의 미결안이다. 다행히 전적(典籍)이 남아 있고 선유(先儒)의 논변(論辨)이 있어서 참험(參驗)할 수는 있지만, 여러 설의 이동(異同)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없는데, 자네 또한 말할 것이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동방에는 이미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중국의 역사 책을 가지고 논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한서》에 ‘마한은,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왜국과 접했다.’ 하였으니, 한강(漢江) 이남에서 남해(南海)까지가 그 땅이 아니겠는가? 또 ‘삼한은, 동서는 바다에 닿았는데, 진한은 동북에 있어 예ㆍ맥과 접했다.’ 하였으니, 예ㆍ맥은 지금 강원도이므로, 진한은 지금의 영남(嶺南)이란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또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또한 왜국과 접했다.’ 하였으니, 지금 낙동강 이서 지리산 서남쪽의 제군(諸郡)과 양남(兩南 호남(湖南)ㆍ영남(嶺南))의 연해(沿海) 등지가 바로 그 땅이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진(辰)ㆍ변(弁) 제국(諸國)은 국명이 서로 같은 것이 많기 때문에 진변(辰卞)이란 두 글자를 더해서 구별하였으니, 진한과 변한의 지역이 섞여 있던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북사(北史)》에 ‘백제는 마한의 무리요 신라는 진한의 종족이다.’ 하였으니, 그 설이 옳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溫祚)가 강역을 정할 때 남쪽은 웅천(熊川)까지 한계를 삼으니, 마한왕이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를 건널 때 내가 동북 1백 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 했다.’ 하였으니, 웅천은 지금 공주(公州)이다. 마한은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였는데,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益川)이니, 이것은 양호(兩湖 호서(湖西)ㆍ호남(湖南))가 마한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이것으로 논한다면 삼한의 강역이 저절로 의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분분하게 각기 신설(新說)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하였다. 또,
“그렇다면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그 설 또한 옳다. 고운은 당시 사람인데, 마한이 고구려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가 말한 마한이 고구려라 한 것은 고구려가 일어난 땅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뒤에 고구려가 마한 동북쪽 땅을 병합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스승(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가리킨다)의 말에 “최치원이 마한을 고구려라고 한 것은, 기준(箕準)이 비록 도망하여 남쪽으로 갔지만 고구려를 가리켜 마한의 옛땅이라 하므로 아마 그랬을 것 같다.” 하였다. 그가 말한, 변한이 백제라고 한 것은 마한이 백제의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변한의 반면(半面)이 또한 백제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삼한을 삼국에 분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설이 이와 같은 것이니, 착오라고 할 수 없다. 후인이 그의의를 궁구하지 않고 망령되이 비방을 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고운의 문장은 박아(博雅)하여 가장 고고함에 가까우니, 무사(誣辭)가 아닐 것이다. 대개 이같은 유는 마땅히 시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근거를 삼아야 하니, 나는 고운의 설로 정설을 삼는다.”
하였다. 또,
“여러 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므로,
“《삼국유사》가 고운의 설을 따른 것은 옳으나, 고구려의 마읍산(馬邑山)을 들어 마한산이라 하면서 금마산(金馬山)을 들어 마한이라 한 것을 배척한 것은 잘못이다.
《주관육익》의 실착을 《여지승람》에서 반박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말한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에 왕 노릇 하려거든……’ 이라고 한 것은, 우리 나라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려 했던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숙신은 북에 있고, 변한은 남에 있고, 조선은 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니, 궁예가 나주로부터 비로소 용병한 것으로 변한의 증거를 삼은 것은 불가하다.
권근은 ‘변한이 남쪽에 있다는 것은, 한(漢)의 지경인 요동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여 변한이 고구려라는 것을 실증하였으나, 대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변한은 남쪽에 있다.’ 는 것은 곧 《후한서》에 그대로 기재된 글로서 ‘진한은 동쪽,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한 것은 우리 나라의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인데 ‘변한은 남쪽에 있다.’는 것만으로 중국의 경계를 말했다는 것은, 문리(文理)가 어긋나 서로 접속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진퇴에 근거가 없게 된다.
《여지승람》은 최치원의 설을 따랐으니 대체로 옳으나, 《삼국유사》에서 말한 마읍산으로 마한을 삼았으니, 그것은 잘못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말한 변산(卞山)을 지금 부안현(扶安縣)에 있는 변산(邊山)이라고 한 것도 옳지 않다. 변한 건국이 과연 변산(邊山)에 있었다면, 이때 마한이 금마(金馬)에 도읍하였는데, 어찌 마한에 속하지 않고 진한에 속하였겠는가? 또한 그 뒤에 하필 마한을 지나서 신라에 투항했겠는가? 이로 보아 그의 설이 잘못이다.
한구암(韓久庵)의 ‘남쪽은 어디까지나 남쪽이고 북쪽은 어디까지나 북쪽이다.’ 하는 설은 정론이라고 할 만하다. 오히려 고운이 ‘마한은 고구려다.’ 라고 말한 뜻을 모르고 결국 양촌(陽村 권근의 호)의 투식으로 돌아갔으니 애석하다. 어떤 사람이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계고편(稽古篇)》에서 ‘옛 사책에 「변한은 변산(卞山) 아래에 나라를 세웠다.」 한다.’ 하고 지금 부안의 변산으로 해당시킨 것은 잘못이다.
지금 호남(湖南) 장흥부(長興府)에 천관산(天冠山)이 있는데 그 봉우리가 마치 관변(冠弁)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아마 변(弁)은 천관(天冠)의 한 이름일는지도 모른다. 장흥 곁에 있는 보성군(寶城郡)에 군왕(君王)이 파천(播遷)한 유기(遺基)가 있고, 또 모후산(母后山)이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 나라가 망하자 모후(母后)가 이 산으로 피해 들어왔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하니, 이것도 변한의 유적일는지 모른다.”
하였다.
【안】 변한이 고구려라는 설은 비록 근거는 없지만, 의심할 만한 것이 한 군데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의 발해전(渤海傳)에,
“그 나라는 부여ㆍ옥저ㆍ변한ㆍ조선 등 여러 나라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옛 지경이다. 《통감(通鑑)》에도 또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권근이 이것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이것도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혹 변한의 별부(別部)가 북쪽으로 옮겨가서 그 구호(舊號)를 그대로 사용한 것인가? 이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삼한의 본계(本界)로 말하면, 마한이 서쪽, 진한이 동쪽, 변한이 남쪽임은 무설(誣說)이라고 할 수 없다.


 

[주D-001]5가야(伽倻) : 아라가야(阿羅伽倻)ㆍ고령 가야(古寧伽倻)ㆍ대가야(大伽倻)ㆍ성산 가야(星山伽倻)ㆍ소가야(小伽倻).
[주D-002]낙랑은 …… 떨어졌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양한지(兩漢志 《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后漢書)》의 지리지)를 상고하건대 ‘낙랑군은 낙양(洛陽) 동북과의 상거가 5천 리이다.’ 하고, 그 주에 ‘유쥬(幽州)에 속하고, 옛날 조선국이다.’ 하였으니, 계림 땅과는 멀리 떨어진 것 같다.” 하였다.
[주D-003]《위지(魏志)》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사군고(四郡考)



낙랑고(樂浪考)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 낙랑을 양이(良夷)로 삼았으니, 곧 조선(朝鮮)을 가리킨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위씨(衛氏)를 멸하고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치(樂浪郡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우거(右渠)가 도읍한 곳을 군치로 삼았다.”
하였고, 응소(應劭)는,
“낙랑은 옛 조선국(朝鮮國)이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도,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안】《괄지지(括地志)》에 ‘조선 남쪽 지경은 6백 리이다.’ 하였는데, 조선은 곧 낙랑군 치이니, 지금 펑양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는 5백 50리이다.
속현(屬縣) 아래에 보인다. 의 호수는 6만 2천 8백 22, 인구는 40만 6천 7백 48이다. 이것은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의 호구이다.
《후한서》 지리지에,
“소제(昭帝)가, 경토(境土)가 광원(曠遠)하다는 이유로 영동(嶺東)의 7현(縣)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고, 광무(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도위관(都尉官)을 없애고 따라서 영동의 땅을 떼어내서 그 땅에는 그 우두머리 옥저(沃沮)와 예(濊)ㆍ맥(貊)을 가리킨다. 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고, 모두 세시(歲時)에는 낙랑군에 나와서 조하(朝賀)하게 했다.”
하였다. 낙랑군에서 낙양(洛陽) 동북까지의 거리는 5천 리이며, 속현은 18이다. 아래에 보인다. 대개 영동의 7현을 떼어냈기 때문에 그 수가 반고(班固)의 《한서》지리지에 적힌 수에 미치지 못한다. 호수는 6만 1천 4백 92, 인구는 25만 7천 50이다. 이것은 순제(順帝) 영초(永初) 5년의 호구이다.
또 화제(和帝) 때 최인(崔駰)이 장잠장(長岑長)이 되었다 하였는데, 장잠(長岑)은 곧 낙랑의 속현이다.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지금 동쪽으로는 낙랑(樂浪)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돈황(燉煌)에 달한다.”
하였는데, 부(符)는 순제 때 사람이다. 또,
“질제(質帝)ㆍ환제(桓帝) 연간에 고구려가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노획하였다 하고, 태조왕(太祖王) 94년 헌제(獻帝) 초평(初平) 연간에 관동(關東)의 여러 장수들이 낙랑태수 장기(張岐)에게 제호(帝號)를 싸 보내어 유우(劉虞)에게 올렸다.”
하고, 《위지》에는,
“삼한은 한(漢) 때 낙랑군에 속하여 사시로 조알(朝謁)하였다.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 한(韓)ㆍ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제어할 수가 없었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요동(遼東)에 의거하여 낙랑의 속현인 둔유(屯有) 지금은 미상 이남의 황폐한 땅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서 유민(遺民)을 거두어 모았다. 위 명제(魏明帝) 경초(景初) 2년에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멸하고 요동ㆍ현도(玄菟)를 평정하였다.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서 그 군(郡)을 정하게 했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공손씨(公孫氏)에게 병합되었기 때문에 사마의는 육로로, 두 사람은 수로로 나아가 일시에 함께 쳐서 평정한 것이리라. 또,
“제왕(齊王) 정시(正始) 6년(243)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 준(弓遵)이 영동예(嶺東濊)가 소속인 고구려에 복속했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쳐서 항복시킨 다음, 군치(郡治)에 나와서 조알하게 했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면, 양한(兩漢) 및 조위(曹魏) 시대에는 낙랑이 항상 중국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진지(晋志)에,
“낙랑군은 한(漢) 때 설치한 것인데, 진 무제(晋武帝) 함녕(咸寧) 2년에 평주(平州)를 두어 낙랑군을 소속시켰다. 속현은 6, 아래에 보인다. 호수는 3천 7백이다.”
하였으니, 아마 7현은 대방군(帶方郡)에 분속시켜졌을 뿐더러 또 덜어내기도, 더 붙이기도 한 차이와 이맥(夷貊)이 침탈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 수가 양한 때에 미치지 못한 것이리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진 민제(晋愍帝) 건흥(建興) 원년에 장통(張統)이 낙랑ㆍ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와 여러 해 동안 서로 침공하다가 통(統)이 모용외(慕容廆)에게 돌아갔다.”
하였으니, 낙랑의 땅은 아마 이때 고구려에 흡수되었으리라.
“외(廆)가 낙랑군을 두어 통(統)으로 태수(太守)를 삼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별도로 요계(遼界)에 두어, 옛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를 마치 후세의 요령(遙領)하는 예와 같이 한 것이지 한 나라 때의 옛 군은 아니다.
《후한서》 군국지(郡國志)에 ‘낙랑은 18현(縣)이다.’ 하였는데, 아마 속군(屬郡)으로 여겼던 것이고, 위(魏)ㆍ진(晋) 때에도 오히려 ‘낙랑은 6현이다.’ 하였으나, 잠깐 얻었다 금방 잃었으니, 판도(版圖)만을 두었을 뿐이다. 평양(平壤)은 곧 낙랑군치인데, 위(魏) 때부터 이미 고구려의 도읍이 되었던 것이다. 낙랑의 동남 지경은 또한 삼국(三國)이 번갈아 점령한 바 되었으니, 낙랑태수는 어느 땅에 기우(寄寓)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성경지(盛京志)》에,
“낙랑군치는 지금의 봉천부치(奉天府治)의 동남이다.”
한 것은, 모용외가 두었던 것을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통전(統典)》에도
또한,
“낙랑군은 후한 말에 공손씨(公孫氏)에게 점령당하였고, 위(魏)ㆍ진(晋)이 또 그 땅을 얻었으며, 서진(西晋) 영가(永嘉) 이후에는 함락되어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장통이 모용외에게 돌아가던 때와 서로 맞는다. 진지(晋志)는 아마 그 처음을 의거해서 말한 것이리라.
동사(東史)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신라기(新羅記)에는,
“시조(始祖) 30년 한 성제(漢成帝) 하평(河平) 원년 낙랑이 변경을 침범하고, 남해(南解) 2년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낙랑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또 11년 왕망(王莽) 천봉(天鳳) 원년 낙랑이 금성(金城)을 치고, 유리(儒理) 13년 광무(光武) 건무(建武) 12년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고 그 이듬해 고구려가 낙랑을 멸하니,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고, 기림(基臨) 2년 진 혜제(晋惠帝) 영강(永康) 원년 낙랑ㆍ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하고, 이 후에는 낙랑이 신라기에 나타나지 않으며, 진흥왕(眞興王) 26년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6년 에 이르러,
“북제(北齊)가 왕을 책봉하여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삼았다.”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는데, 지금 영동(嶺東) 땅으로 또한 대부분이 신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 봉호(封號)가 이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기(高句麗記)에는,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 광무(光武) 건무(建武) 8년 낙랑을 습격하여 그 왕 최리(崔理)를 항복시켰다.”
하였으니, 낙랑이 중국의 군(郡)이었다면 어찌 왕이라고 칭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 삼국의 사이에 섞여 살아서 그 형세가 마치 한 나라와 같았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고 칭했으리라. 또,
“20년 건무(建武) 13년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하고, 또,
“27년 건무 20년 한(漢)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은 한(漢)에 속했다.”
하였는데, 살수는 지금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이다. 고구려가 북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북쪽은 고구려에 속하였고 남쪽은 한(漢)이 된 것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남(南)을 북(北)으로 고친 것은 잘못이다.
“태조(太祖) 때 그 지역이 동쪽은 창해(滄海 동해(東海)이다)에 닿고, 남쪽은 살수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남쪽이 한(漢)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동천왕(東川王) 20년 위 제왕(魏齊王) 정시(正始) 7년 관구검(毌丘儉)이 와서 환도(丸都)를 함락하고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하였으니, 관구검이 출군(出軍)할 때에는 현도(玄菟)로부터 하고, 퇴군(退軍)할 때에는 또 낙랑의 지경을 따라 돌아가는데, 평양(平壤)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평양이 이에 앞서 고구려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해에,
“왕은 환도가 잔파(殘破)하였기 때문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하였으니, 이때부터 평양이 이내 고구려에 소속되고 낙랑군치는 필시 또 이전해서 동쪽으로 옮겼으리라.
“미천왕(美川王) 14년 진 민제(晋愍帝) 건흥(建興) 원년 낙랑군을 침격하여 2천여 구(口)를 노획했다.”
하였으니, 이때부터 낙랑의 땅이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던 것이다. 《통전》에 이른바,
“영가(永嘉) 이후 낙랑이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뒤로는 낙랑이 다시 고구려기에 보이지 않고, 고국원왕(故國原王) 25년 진 목제(晋穆帝) 영화(永和) 11년 에 이르러,
“모용준(慕容雋)이 왕을 책봉하여 낙랑군공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아마 그 땅이 이미 고구려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봉작(封爵)의 호를 한 것이리라.
백제기(百濟記)에는,
“시조(始祖) 4년 한 성제(漢成帝) 영시(永始) 2년 에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였다.”
하고, 또,
“8년 원연(元延) 2년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우니, 낙랑태수가 사신을 보내어, 국경에 바싹 대어 성을 쌓는다고 나무랐다.”
하고, 또,
“11년 유화(綏和) 원년 낙랑이 말갈(靺鞨)을 시켜서 병산책을 깨뜨리니, 왕이 독산(禿山)ㆍ구천(狗川) 2책(柵)을 설치하여 낙랑의 길을 막았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마수산(馬首山) 이하 지방은 자세히 알 수가 없는데,
“다루(多婁) 3년 동부(東部)의 흘우(屹于)가 말갈(靺鞨)과 마수산에서 싸웠다.”
한 글을 보면, 백제 동부의 변두리 땅에 속한 것이리라. 또,
“13년 왕이 이르기를 ‘국가가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으므로 「조금도 편할 날이 없다」.’ 하고, 결국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하였으니, 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낙랑이 지금의 양서(兩西 황해도ㆍ평안도)이니 백제의 서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동(東)’이라 한 것은 아마 지금의 경기(京畿)가 동에 가깝고 강원도의 땅이 모두 낙랑의 소속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17년 원수(元壽) 2년 낙랑이 와서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직산(稷山) 을 침범하였다.
하고, 또,
“이듬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 지금의 춘천(春川) 을 습격하였다.”
하고, 또,
“고이(古爾) 13년 위(魏) 정시(正始) 7년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함께 고구려를 치자, 왕이 그 허점을 타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어〉 습격하여 낙랑의 변두리 백성을 탈취하니, 유무가 그 소식을 듣고 노하매, 왕이 두려워하여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
하고, 또,
“분서왕(汾西王) 7년 진 혜제(晋惠帝) 초흥(初興) 원년 낙랑의 서현(西縣 서쪽 현)을 습격해 탈취하니, 낙랑태수가 자객을 보내어 왕을 살해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서현이라 하였으니, 낙랑이 평양을 떠나 동쪽으로 옮겼음을 알 수가 있다.
이후로는 낙랑이 백제기에 나타나지 않고, 개로왕(蓋鹵王) 18년 송 명제(宋明帝) 태예(太豫) 원년 에 왕이 위 효문(魏孝文)에게 올려서 고구려를 정벌하기를 청원한 표(表)에,
“낙랑 제군(諸郡)이 수구지심(首丘之心)을 품고 있다.”
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땅이 고구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복할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때에 해당한다.
이상의 여러 설에 의해 관찰하면, 그 땅이 한 무제(漢武帝)가 처음 설치할 때에는 지금의 양서(兩西)와 한북(漢北)의 지대였다.
한 소제(漢昭帝) 이후에는 〈지금의 함경남도인〉 옛 현도군치(玄菟郡治)와 〈지금의 영동(嶺東)〉 임둔군치(臨芚郡治)가 낙랑에 병합되었다.
한 광무(漢光武) 이후에는 영동의 7현(縣)을 떼어냈는데, 살수(薩水) 이북이 또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한(漢)ㆍ위(魏) 적에는 또 그 땅을 나누어서 대방군(帶方郡)을 두었다. 낙랑군치는 마침내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장통(張統)이 고구려에 핍박당하여 모용씨(慕容氏)에게 투신할 때에 이르서는 낙랑이란 호칭도 따라 폐지되었다.

낙랑제현고(樂浪諸縣考)
《한서》를 주본으로 하고 여러 책을 참고 인용하여 자세히 밝힌다.
《한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낙랑군은 한 무제 원봉(元封) 3년에 설치하고, 왕망(王莽)은 낙선(樂鮮)이라 하였는데, 유주(幽州)에 속하였다.
25현(縣)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후한(後漢) 때에는 18현이었고, 진(晋) 때에는 낙랑군이 평주(平州)에 소속, 6현을 관할하였다.
조선(朝鮮) 응소(應劭)는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하였다.
○ 곧 낙랑군치이다. 한(漢)이 우거(右渠)를 멸하고 그 도읍을 격하하여 현(縣)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평양(平壤)이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같았다.
○ 《자치통감》 진(晋) 함강(咸康) 4년 조의 조선령(朝鮮令)이라 한 그 주에 ‘조선은 수(隋)의 요서(遼西) 유성현(柳城縣) 지경에 있다.’ 하였으니, 아마 낙랑이 고구려에 흡수된 뒤에 중국이 요(遼)에 옮겨 설치하고, 또 조선현(朝鮮縣)을 설치하였는가보다.
남감(䛁邯) 음은 남감이라 하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晉) 때에는 없었다.
패수(浿水) 물이 서쪽으로 증지(甑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왕망은 망선정(望鮮亭)이라 했다 한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 패수고(浿水考)에 보인다.
함자(含資)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으나 대방 제군(帶方諸郡)에 속하였으니, 마땅히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이남, 한강(漢江) 이북의 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점제(黏蟬) 음은 점제라 한다.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다.
수성(遂成) 《통전(通典)》에 ‘좌갈석산(左碣石山)이 한(漢)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의 장성(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했다. 지금 증험하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가로질러서 고려(高麗)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尙書)》에 「우갈석(右碣石)을 끼고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는데, 이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된다.’ 하였다.
【안】 이것에 의거하면, 낙랑 지경의 서북은 또한 요계(遼界)에 들어가 견아(犬牙)처럼 서로 연했었던가? 이 설은 끝내 의심이 간다. 갈석산(碣石山)으로 말하면, 《성경지(盛京志)》에 ‘봉황성(鳳凰城) 서쪽 1백 70리에 갈석산이 있다.’ 하였으니, 아마 이 산인 듯하다.
○ 이 장성은 전국(戰國) 말에 연(燕)이 쌓은 것이다.
증지(增地) 패수(浿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하는데,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대방(帶方) 대방고(帶方考)에 보인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별도로 군(郡)을 삼았다.
사망(駟望) 상고할 수가 없다. 후한 때나 진 때나 같았다.
해명(海冥)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대방(帶方)에 속하였다.
요지(遼志)에 ‘흥주(興州)는 본래 한(漢) 때의 해명현(海冥縣)으로 동경(東京) 서남쪽 3백 리에 있다.’ 하였는데, 동경은 지금의 요양(遼陽)이니, 착오인 듯하다.
열구(列口) 《자치통감》의 주에는 ‘열수(列水)의 어구에 있으므로 열구라고 이름했다.’ 하였다.
○ 열수고(列水考)에 보인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대방에 속하였다.
장잠(長岑)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대방에 속하였다.
【안】《성경지》에는, 《요사》지리지에 ‘숭주(崇州)는 본시 한(漢)의 장잠현(長岑縣)인데, 동경(東京) 동북 1백 50리에 있다.’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이 설은 잘못이다. 장잠이 만일 요지(遼地)에 있다면, 뒤에 어떻게 대방에 속하였겠는가?
둔유(屯有)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나 진 때나 같았다.
【안】 《삼국지(三國志)》에 ‘공손도(公孫度)가 둔유(屯有) 이남을 나누어서 대방군(帶方郡)을 만들었다.’ 하였다.
소명(昭明) 남부도위(南部都尉)의 소재지이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누방(鏤方) 《수경(水經)》에 ‘패수(浿水)는 누방(鏤方)에서 나온다.’ 하였으나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나 진 때나 같았다.
○ 《성경지》에는 또 《요사》에 ‘자몽현(紫蒙縣)은 본시 한(漢)의 누방현계(鏤方縣界)이다.’ 한 것을 인용하여 지금의 개원계(開原界) 안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수경》에 어찌 ‘패수는 누방에서 나온다.’ 하였겠는가?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니, 《요사》가 잘못이다.
제해(提奚)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대방에 속하였다.
혼미(渾彌)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나 진 때나 같았다.
탄열(呑列) 분려산(分黎山)과 열수(列水)가 나온 곳이다.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거리가 8백 20리이다.
【안】 열수는 지금의 한강(漢江)이니, 분려산은 오대산(五臺山)인가, 금강산(金剛山)인가?
○ 후한 때나 진 때나 다 없었다.
동이(東暆)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이하 7현(縣)은 모두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였다.
○ 후한 때나 진 때나 모두 없었다. 이하도 같다.
○ 한구암(韓久庵 구암은 한백겸(韓百謙)의 호)은 ‘현도(玄菟)를 옮겨 설치한 뒤에 단대령(單大嶺) 이동을 모두 나누었다. 낙랑 경토(境土)가 광원(廣遠)하므로 영동의 7현(縣)을 나누어서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건무(建武) 6년에 도위관(都尉官)을 없애고 따라서 영동의 땅을 떼어내어 거기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았으니, 동이(東暆) 이하 7현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불이(不而)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소재지이다.
○ 불내고(不耐考)에 자세히 보인다.
잠태(蠶台)
화려(華麗) 화려고(華麗考)에 보인다.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이상 7현은 모두 임둔고(臨屯考)에 보인다.

상고하건대 전한(前漢) 적에는 낙랑군이 25현(縣)이었는데, 후한(後漢) 적에는 영동 7현을 떼어 냈기 때문에 18현이었으며, 낙도(樂都)가 있고 탄열(呑列)이 없으니, 아마 연혁이 있었는 듯하다.
수 양제(隋煬帝)가 군사를 출동할 때 모두 한(漢)의 옛 지명을 그대로 불렀으니, 고구려에 오히려 한대(漢代)의 지명이 있었던가보다. 그러나 그 제장(諸將)들이 나온 길이 대부분 남북이 서로 틀리고 원근이 맞지 않으니, 아마 그 땅에서 나왔다고 떠들어대기만 했을 뿐 실지로는 그 길로 나오지 않았던가보다.
대방(帶方)은 지금의 경기도ㆍ창해도의 땅인데, 대방(帶方) 길에서 나온 자가 있고, 동이는 지금의 강릉(江陵)인데 동이 길에서 나온 자가 있으니, 이것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다시 《통전》ㆍ《요사》ㆍ《성경지》 등을 상고하면, 낙랑 땅이 또한 성경(盛京)의 관내에 들어간 것이 있었다. 과연 그렇다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은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곳으로 한계하고, 현도의 서개마(西蓋馬)는 압록강 상류로 한계하니, 낙랑이 또한 어찌 그 사이에 섞여들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낙랑의 제현(諸縣)은 마땅히 압록강 동남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둔고(臨芚考)
○ 임둔(臨芚)은 《한서》에,
“위만(衛滿)이 그 곁에 있는 소읍(小邑)인 진번(眞番)과 임둔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하였으니, 그 임둔이란 이름이 있은 지 오래다. 무제(武帝)가 사군(四郡)을 두었는데 임둔이 그 중 하나이다. 아마 국(國)을 격하시켜 군(郡)으로 만든 것이리라. 신찬(臣瓚)의 주에,
“《무릉서(武陵書)》에 ‘임둔군치(臨芚郡治)는 동이현(東暆縣)으로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6천 1백 38리인데, 15현(縣)을 관할한다.’ 했다.”
하였다. 또 《후한서》에,
“소제(昭帝)가 임둔을 낙랑에 병합하고, 단대령(單大嶺) 이동 옥저(沃沮)ㆍ예(濊)ㆍ맥(貊)을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경토가 광원하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의 ‘낙랑 25현’은 임둔 속현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7현을 나누어 동부(東部)에 소속시켰기 때문에 《후한서》에는 낙랑의 현이 18뿐이니, 이른바 7현은 임둔 15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명주(溟州)는 본시 예국(濊國)인데, 한 무제 때 임둔으로 만들었다.”
하고, 《여지승람》에는,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인데 딴이름으로는 임둔ㆍ예국ㆍ창해군(滄海郡)ㆍ동이현(東暆縣)이다.”
하였으며, 《한서》를 상고하면,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남녀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와서 내부(內附)하니, 무제가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다가, 얼마 안 가서 없애버렸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군을 정하기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임둔과 예국은 모두 한때에 있었다. 또 예국 인구가 28만이었음을 볼 때 그 땅이 작지 않는데, 강릉 1읍(邑)이 어떻게 두 나라를 수용하였겠는가? 임둔은 이미 작은 읍(邑)이라 칭하였으니, 아마 부락(部落) 추장(酋長)의 호에 불과한 것이고, 당시 예국이 이미 한(漢)에 항복하여, 그 땅이 아울러 임둔에 소속되고 예국의 도읍인 동이현으로 임둔치(臨芚治)를 삼았던 것이리라.
단대령은 지금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보다. 이것에 의하면 지금 함경도와 강원도 영동의 땅이 모두 임둔의 관할 지역이었을 것이다.

현도고(玄菟考)
○ 현도(玄菟)는 ‘동방(東方) 구이(九夷)에 현이(玄夷)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 무제 원봉(元封) 3년에 조선(朝鮮)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 동옥저(東沃沮)의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홍씨(洪氏 : 홍만종(洪萬宗)을 가리킨다)의 《동국총목(東國摠目)》에 “혹은 군치(郡治)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함안부(咸安府)이다.” 하였다.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에 대한 반씨(班氏 반고(班固)를 가리킨다)의 자주(自註)에,
“한 무제 원봉 4년에 개설하였다. 고구려를 왕망은 하구려(下句麗)라고 하였다.”
하고, 《후한서》 옥저전(沃沮傳)에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하고, 예전(濊傳)에는,
“소제(昭帝) 원시(元始) 5년에 임둔과 진번을 없애 낙랑과 현도에 병합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겼다.”
하였다. 이에 의하면, 현도군치가 처음에는 옥저에 있었고, 뒤에는 고구려로 옮겼던 것이다.
고구려현고(高句麗縣考)와 연관해서 보기 바란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현도군이 3현(縣)을 관할하였는데, 아래에 보인다. 호수는 4만 5천 6, 인구는 22만 1천 8백 45이다.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현도군이 낙양(洛陽) 동북쪽 4천 리에 있는데, 요동군(遼東郡)의 고현(高顯)ㆍ후성(候成)ㆍ요양(遼陽)이 와서 소속되었으므로 6현을 관할하였다. 아래에 보인다. 호수는 1천 5백 94, 인구는 4만 3천 1백 63이다.
《진서(晋書)》 지리지에 의하면, 현도군은 한(漢)이 설치하였는데, 3현을 관할하였다. 아래에 보인다. 진 무제(晋武帝) 함녕(咸寧) 2년에 평주(平州)를 설치하자 현도군이 거기에 소속되어 3현을 통솔하였는데, 아래에 보인다. 호수는 3천 2백이다.
역사적으로 상고하면, 한(漢)에서 위(魏)까지 이르는 동안 비록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으나 중국의 땅이 되어 있었고, 진(晋)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현도가 모용씨(慕容氏)에게 소속되기도 하고, 또는 고구려에 침탈되기도 하였다. 진 효무(晋孝武) 태원(太元) 10년 고국 양왕(故國讓王) 2년 고구려가 요동과 현도를 함락하니, 모용농(慕容農)이 와서 2군(郡)을 바쳤다. 안제(安帝) 의희(義熙) 원년 광개토왕(廣開土王) 14년 연왕(燕王) 희(熙)가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연(燕)도 또한 얼마 뒤에 망하였으니, 2군이 함락되어 고구려로 흡수된 것은 이때였다. 광개토왕의 시호는 아마 영토를 개척하여 넓힘으로 해서 떨어진 것이리라.
《후주서(後周書)》에,
고련(高璉)이 비로소 후위(後魏)에 사신을 보냈다. 그의 땅은,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수(遼水)를 건너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에 닿았는데,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요동ㆍ현도 등 수십 성(城)에 모두 관사(官司)를 두어 서로 통섭(統攝)하게 했다.” 하였으며, 연(璉)은 곧 광개토왕의 아들이니, 또한 서로 증거가 될 만하다. 《한서》지리지에서 이른 상은태(上殷台)와 서개마(西蓋馬)가 진(晋) 때에 이르러서는 나타나지 않고, 또 군치(郡治)를 망평(望平)으로 옮겼다. 망평은 요수(遼水)의 서쪽에 있으니, 지금 광녕현(廣寧縣) 지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상은태현과 서개마현 등은 한(漢)ㆍ위(魏) 연간에 아마 고구려에 흡수되었던 것이리라.
《성경지》에,
현도군은 대부분 성경(盛京)의 동북과 영길주(永吉州)의 경내에 있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으나, 또 해성(海城)ㆍ복주(復州)ㆍ봉황성(鳳凰城) 등의 땅을 모두 한(漢)의 현도군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요동 18현(縣)이 어느 곳에 분포되어 있었는가?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이,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 요동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다른 경계가 거기에 끼어들 리가 있었겠는가?
아마 낙랑ㆍ현도의 이름이 양진(兩晋 동진(東晋)ㆍ서진(西晋)) 연간에 혹 지금의 요지(遼地)에 교치(僑置)된 것인데, 후인이 그것을 분변하지 못하고 결국 사실로 여겨서 그런 것일까? 현도의 땅은 고구려가 망하니 당(唐)에 흡수되고, 뒤에는 발해 대씨(渤海大氏)에게 병합되었으며, 그 뒤로는 제이(諸夷)들이 서로 침탈하다가, 요(遼)ㆍ금(金)을 거쳐 청(淸)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소속되었다.

현도 제현고(玄菟諸縣考)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다.
현도군은 한 무제 원봉 4년에 개설하였다. 고구려현을 왕망은 하구려라고 하였는데, 유주에 속하고 3현(縣)을 통솔하였다.
《후한서》에는, 다시 요동의 3현이 소속되었기 때문에 6현으로 되어 있다. 진(晋) 때에는 평주(平州)에 속하고 3현을 통솔하였다.
고구려(高句麗) 반고의 주에 ‘요산(遼山)ㆍ요수(遼水)가 나온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가고,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 하였다.
○ 고구려현고(高句麗縣考)에 자세히 보인다.
○ 후한(後漢) 때나 진(晋) 때나 다 같았다.
상은태(上殷台) 상고할 수가 없다. 현도고(玄菟考)에 보인다.
○ 후한 때에는 같았고 진 때에는 없었다.
서개마(西蓋馬) 현도고에 보인다.
○ 《진서》지리지에는 이상 2현이 없고, 군치를 망평(望平)으로 옮겼으니, 한(漢)ㆍ위(魏)ㆍ연간에 이미 고구려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 반고의 주에 ‘서개마현(西盖馬縣)에 마자수(馬眥水)가 있어 서북으로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가고 서남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군을 지나 1천 1백 리를 흐른다.’ 하였다. 마자(馬眥)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옛이름이 개마태산(盖馬太山)이고, 개마국(盖馬國)이 또 그 아래에 있었으니, 이 산(山 현(縣)의 뜻인 듯함)은 아마 개마태산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리라. 이에 의하면, 지금의 흥경(興京) 주변 땅인 듯하다.
○ 후한 때에는 같았고, 진 때에는 없었다.
고현(高顯) 후한 때에 후성ㆍ요양을 병합하였다. 이 2현은 요동에서 와서 소속된 것인데 그 지역은 상고할 수 없으나, 아마 요동 북쪽의 땅인 듯하다.
○ 진 때에는 같았다.
후성(候成) 요동제현고(遼東諸縣考)에 자세히 보인다.
○ 진 때에는 없었다.
요양(遼陽) 요동제현고에 자세히 보인다.
○ 진 때에는 없었다.
망평(望平) 《진서》지리지에는, 요동의 속현이 와서 소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진번고(眞番考)
진번(眞番)이란 이름은 이미 위만전(衛滿傳)에 있었다. 《사기》에,
“연(燕) 때에 진번과 조선을 얻어 소속시켰는데, 만(滿)에 이르러 진번ㆍ임둔 등의 땅을 쳐서 항복시켰다.” 《한서》에 보인다.
하였다. 《한서》에 또,
“요동이 동쪽으로 진번의 물건을 무역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땅은 요동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한 무제가 사군(四郡)을 정할 때 진번군을 두었는데, 신찬(臣瓚)은,
“진번군치는 잡현(霅縣)으로서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7천 6백 40리이며, 15현을 통솔했다.”
하였으나, 《한서》 주에 있는 잡현은 상고할 데가 없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진번군을 없앴는데, 그것은 그 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후한서》에,
“진번을 현도에 병합했다.”
하였으니, 자세히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가령 병합했다고 한다면, 현도와 진번이 통솔한 것은 15현으로 그 수가 매우 많은데, 지금 현도가 통솔한 것은 어찌 3현 뿐일까? 그 땅이 장안과의 거리가 이처럼 먼 것은 아마 한무제가 동쪽을 정벌할 때 군사의 위엄이 멀리 떨치므로 숙신(肅愼) 등 제부(諸部)가 풍문을 듣고 항복하였기 때문에 진번을 군으로 삼고, 온 동북의 지경에 현읍(縣邑)을 개설한 때문이리라. 반고의 서설(叙說)에,
“진번의 이점(利點)은 연(燕)과 서로 접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동북 제이(東北諸夷)가 중국과 통하려면 반드시 먼저 연에 가는 것을 말한 것이지, 지경이 서로 접했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註) 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사고(師古)는,
“진번은 연과 서로 접하였다.”
하고, 응 소(應劭)는,
“현도는 옛 진번의 나라이다.”
하였으니, 다 잘못된 말이다. 만일 현도가 곧 옛 진번이라면, 군(郡)을 설립할 때 어찌 진번이라 칭하지 않고 현도라고 칭했겠는가? 생각건대, 진번의 진(眞)은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으로, 후세 여진(女眞)의 진(眞)도 진번을 답습한 것이리라.
《전한서》에는 진번은 있고 옥저(沃沮)는 없으며, 《후한서》에는 옥저는 있고 진번은 없으니, 진번과 옥저가 혹시 전후의 다른 이름인가?
《성경지》에,
“한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진번과 임둔을 고쳐 요서군(遼西郡)과 요동군(遼東郡)으로 만들고, 현도와 낙랑은 그전대로 두었다.”
하였으니, 요서군과 요동군은 진(秦) 때부터 이미 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이처럼 근거 없는 말을 하여 한갓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안】 김륜(金崙)은 이렇게 적었다.
《한서》의 주에,
“진번은 장안과의 거리가 7천 6백 리요, 임둔은 장안과의 거리가 6천 1백 리이다.”
하였으니, 진번이 임둔보다 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아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평주고(平州考)
《삼국유사》에,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에 조선의 옛땅인 평나군(平那郡)과 현도군(玄菟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았다.”
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그 설을 인용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어떤 서책을 따랐는지 모르겠다. 평나(平那)는 여러 서책을 보아도 상고할 수가 없다.
《여지승람》에,
“우봉현(牛峯縣)의 성거산(聖居山)은 일명 구룡산(九龍山)이요, 일명 평나산(平那山)이다.”
하였으니, 설자(說者)들은 결국 우봉(牛峯)을 평나(平那)로 삼고, 지금의 평산부(平山府)를 평주(平州)로 삼았다. 그렇다면 임둔군치는 지금의 영동이고 낙랑군치는 지금의 평양이며, 우봉과 평산이 그 사이에 옆으로 끼어 있는데, 임둔과 낙랑이 어떻게 땅을 건너서 서로 병합하였겠는가?
《삼국유사》에 또,
“지금 평나는 있고 진번은 없으니, 아마 땅은 하나인데 이름이 둘이리라.”
하였는데, 이 말도 억설이다. 평나는 반드시 따로 그 땅이 있었을 것이다. 대저 군현(郡縣)의 병합은 서로 가까운 것끼리 하는 것이니, 그 땅은 반드시 현도와 상접하였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을 상고하건대, 위(魏)ㆍ진(晋) 연간에 평주(平州)를 두었는데, 지금의 영평부(永平府)로서 옛 요서(遼西) 땅이니, 이것과는 서로 관련이 안 된다. 한(漢)의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 웅거하여 평주목(平州牧)이라 자호하였고, 《성경지》에 “평주는 지금 요양주(遼陽州) 동쪽 45리에 있는데, 토보(土堡)가 있으므로 평주라 이름했다.” 하였다. 《진서》지리지에는,
“무제 함녕(咸寧) 2년에 창려(昌黎)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대방(帶方)ㆍ낙랑(樂浪)을 나누어 평주(平州)를 두었는데, 소속된 현(縣)이 26, 호수가 1만 1천 6백이다.”
하였다. 군현의 이름이 대부분 옛이름 그대로였으니, 그렇다면 평주는 바로 옛이름이며, 평나의 땅은 혹 요동ㆍ현도의 경계에 있었던가?
다시 《여지승람》을 상고하니,
“본조 태조 2년 영흥진(永興鎭)을 부(府)로 고치고 진(鎭)을 고쳐 평주진(平州鎭)이라 했다.”
하였으니, 평주는 곧 옛이름이므로 그대로 따른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현도의 옛 군치는 지금의 영흥 등지이고, 뒤에 북쪽으로 옮겼으니, 그 경계가 접해져서 서로 합하였으리라.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금(金)의 시조(始祖) 금준(今俊)은 평주(平州) 사람이다. 평주는 곧 영흥(永興) 땅이지, 평산(平山)이 아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평주라는 칭호가 있은 지는 이미 오래다. 대저 이부(二府)에 대한 설은 모두 의심스럽다. 《전한서》나 《후한서》를 상고해도 한 군데도 보이지 않으니, 웬일일까? 이 설은 단지 《삼국유사》에서 나온 것인데, 《동국통감》에서 그 설을 따랐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비록 오래된 일이기는 하나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대방군고(帶方郡考)
대방(帶方)은 한(漢)의 낙랑군 속현이다. 대수(帶水)가 여기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또한 대방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후한서》 지리지에도 대방이 또한 낙랑에 속하여 있고, 《삼국지》에는,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도(公孫度)가 낙랑군의 둔유(屯有)ㆍ유염(有鹽) 이남 황지(荒地)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으니, 왜(倭)ㆍ한(韓) 모든 나라가 다 소속되었다.”
하였다. 대개 중국이 변군(邊郡)을 둔 것은 모두가 외국을 끌어매기 위한 심산에서였으니, 낙랑은 예(濊)ㆍ옥저(沃沮) 등을, 대방은 왜(倭)ㆍ한(韓) 등을 위해 설치한 것이리라.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대방군은 공손연(公孫淵)이 설치하였고 위 무제(魏武帝)가 패권을 차지한 뒤에 이어 군치(郡治)인 대방현(帶方縣)을 두었으며, 진 무제(晉武帝) 함령(咸寧) 2년에 평주를 설치하니, 대방군이 소속되었는데, 소속된 7현(縣)은 〈대방군을 포함해〉 열구(列口)ㆍ남신(南新)ㆍ장잠(長岑)ㆍ제해(提奚)ㆍ함자(含資)ㆍ해명(海冥)이고, 호수는 4천 9백이었다 하였는데, 모두 한의 낙랑 속현으로서 나뉘어 온 것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 남부도위(南部都尉) 소재지는 소명현(昭明縣)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소명이 없고 남신(南新)이 있으니, 아마 연혁이 있었는 듯하다.
《후한서》에,
“질제(質帝)ㆍ환제(桓帝) 연간에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노획했다.”
하였다. 혹자는 이 말을 가지고 대방이 요동 경계에 가까울 것이라고 의심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때 고구려의 침략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미 서안평을 치고 또 낙랑을 습격하고 대방에 이르는 등 군사를 내는 것이 본시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기록하는 자가 아울러서 일컬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방이 요동에 가까울 것이란 의심을 하게 된다.
화려성(華麗城)은 낙랑동부(樂浪東部)의 속현이니 현도와 아주 먼데, 《후한서》도,
“고구려가 현도를 침범하고 화려성을 쳤다.”
하였으니, 그 필법이 이와 동일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멸하니, 낙랑 사람은 대방(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하고, 신라기에,
“기림왕(基臨王) 때에 낙랑과 대방이 와서 항복했다.” 하였으니, 그 땅이 신라와 접하였던 것이다.
백제기에,
“책계왕(責稽王) 때에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이 백제에 구원을 청하자 왕은 ‘대방은 우리 구생(舅甥)의 나라이다.’ 했다.”
하였으니, 또 백제와도 멀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기에,
“미천왕(美川王) 때에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남쪽으로 대방을 침공했다.”
하고, 또 신라기에 의하면,
“문무왕 11년, 당(唐)의 고간(高侃)이 평양에 이르러 대방을 침공했다.”
하였으니, 그 땅은 분명 평양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진수(陳壽)의 《위지(魏志)》에,
“대방군에서 왜(倭)에 이르자면, 해안을 따라 한국(韓國)을 경유한다.”
하였다. 한국은 지금의 양호(兩湖)이니, 이에 의하면, 그 땅이 한수(漢水) 이북 경기ㆍ황해 연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대방과 낙랑은 시종을 같이하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요동(遼東)을 평정하고, 위 명제(魏明帝)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바다를 건너 보내어 2군(郡)을 정하였는데, 이때 2군이 공손씨(公孫氏)에게 병합된 바 되었기 때문이다.
또 위(魏)의 정시(正始) 6년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영동(嶺東)의 에(濊)가 고구려에 속했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치니, 예(濊)와 불내후(不耐侯)가 항복하자, 2군에 나와서 조알(朝謁)하게 하였으니, 이때는 바로 관구검(毌丘儉) 등이 환도(丸都)를 함락할 때이다.
진(晋)의 초기에도 오히려 중국에 속하였기 때문에 《진서》에 그에 대한 지(志)가 있다. 그리고 서진(西晋)의 말기에 낙랑은 고구려에 흡수되고 대방도 고구려와 백제에 분속(分屬)되었다. 그러므로 진 효무(晋孝武) 태원(太元) 10년에 연주(燕主)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왕 안(安)을 책봉하여 대방왕(帶方王)으로 삼고, 북제(北齊) 무평(武平) 연간에 백제왕 창(昌)을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삼았다.
대개 봉작(封爵)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거주지를 가지고 하니, 대방이 분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개 북쪽은 고구려에 흡수되고, 남쪽은 백제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당(唐)이 백제를 평정하고 유인궤(劉仁軌)에게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를 시켰다 하였는데, 그것은 옛이름을 차용한 것이지, 한(漢)ㆍ위(魏) 적에 설치한 대방이 아니다.

남대방주고(南帶方州考)
남대방(南帶方)은 당(唐)의 이적(李勣)이 설치한 것인데, 지금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이 바로 그곳이다. 대방군은 본시 왜(倭)와 한(韓)을 붙잡아 매려고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백제를 평정하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깊이 상고하지 않고 지금의 남원부(南原府)를 대방이라 하니, 잘못이다. 그 설은 대개 《삼국유사》와 《고려사》에서 시작되고 《여지승람》 역시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그 잘못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남대방(南帶方)은 조위(曹魏) 때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 하고, 《고려사》 지리지에도,
“남원부는,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는 대방군이라 하고, 조위 때에는 남대방군이라 했으며, 당 고종(唐高宗)이 유인궤에게 검교대방주자사를 시켰다.”
하고, 《여지승람》도 그대로 따랐다. 잘못을 답습함은 모두 《삼국유사》에 근본한 것이다.

참으로 그 설과 같다면, 후한 때에 백제는 양호(兩湖)에 웅거하고, 고구려는 북방(北方)에 웅거하였는데, 중국이 어떻게 남의 나라를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군을 설치하였겠는가?
조위 때에 불내와 예를 평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대방에 나와서 조알하게 하였다 한다. 불내와 예는 지금의 영동 지방이고 이때에 신라와 백제가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두 나라가 어떻게 그 중간에 있는 나라를 넘어와서 조알할 수 있었겠는가? 당(唐) 이전에는 본시 한남(漢南)을 경략(經略)한 일이 없었으니, 남원으로 대방을 삼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원을 대방이라 칭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유인궤(劉仁軌)가 대방자사(帶方刺史)가 되고 인궤가 쌓은 옛성이 남원에 있기 때문에 후인들이 결국 남원을 대방으로 여긴 것이리라. 지금 지역으로 보면, 남원은 3도(道)가 모이는 곳에 위치하여 형승지지(形勝之地)가 되므로 인궤가 비록 회진(會津)으로 대방주치를 삼았으나 군사를 여기에 주둔한 것은 북쪽으로 당병(唐兵)을 접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연하고,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안무(安撫)하기 위한 계책이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있는 이적(李勣)의 주문(奏文)을 상고하면, 백제의 땅을 나누어 군현(郡縣)을 만들었는데, 대방주(帶方州)는 그 중 하나로 6현(縣)을 통솔하였으며, 주치(州治)인 죽군성(竹軍城)은 본시 백제의 두힐(豆肹)이니, 지금의 나주 회진현은 곧 백제의 두힐현이다.
《삼국유사》에도,
“북대방(北帶方) 소재지는 죽군성이다.”
했는데, 이것은 죽군성이 남쪽에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잘못 북대방이라 한 것이다.

기타 연혁된 것을 알 수 있는 속현으로는, 반나현(半那縣)은 본시 백제의 반내부리(半奈夫里)로 지금 나주의 반남현(潘南縣)이고, 도산현(徒山縣)은 본디 백제의 추산(抽山)으로 지금 진도(珍島)의 가흥현(嘉興縣)이며, 군나현(軍那縣)은 역시 백제의 굴내(屈奈)로서 지금의 함평현(咸平縣)이다. 이것은 매우 명백한 일인데 오류를 답습한 지가 오래라, 사람들의 인식이 거기에 젖어서 〈나의 주장을〉 옳게 여기지 않으니, 애석하다.


[주D-001]진지(晋志) : 《진서(晋書)》지리지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주D-002]요령(遙領) : 멀리서 다른 지방의 일을 감독하는 것.
[주D-003]신라기(新羅記) : 《삼국사기》에 있는 신라본기(新羅本紀)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주D-004]고구려기(高句麗記) : 《삼국사기》에 있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주D-005]백제기(百濟記) : 《삼국사기》에 있는 백제본기(百濟本紀)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주D-006]수구지심(首丘之心) :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이란 말. 《예기》 단궁상에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원래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 하였다.
[주D-007]조선령(朝鮮令) : “조선령창려손영솔중거조(朝鮮令昌黎孫泳帥衆拒趙)”라고 보인다.
[주D-008]증지(甑地) : 《한서》에는 증지(增地)로 되어 있다.
[주D-009]망선정(望鮮亭) : 《한서》에는 낙선정(樂鮮亭)으로 되어 있다.
[주D-010]좌갈석산(左碣石山)이 된다 : 이 말은 고구려(高句麗) 조에 보이는데, 대만(臺灣) 신흥서국(新興書局) 발행본에는 좌갈석산이 갈석산으로 되어 있고, ‘이것이 좌갈석이 된다.’는 부분은 “우갈석은 곧 배가 하수로 나가 바다에 뜨는 곳인데, 지금 북평군(北平郡) 남쪽 20여 리에 있으니 고구려 중간이 좌갈석이 된다. [左碣石 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고 되어 있다.
[주D-011]요지(遼志) : 《요사(遼史)》 지리지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주D-012]해명현(海冥縣) : 대만 개명서점(開明書店) 간행본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요지에는 해의현(海宜縣)으로 되어 있다.
[주D-013]동경(東京) : 개명서점 간행본 《요지》에는 동(東)자가 없다.
[주D-014]동방(東方) …… 있다 :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 보인다.
[주D-015]교치(僑置) : 딴 이름을 빌어 세우는 일. 이를테면 딴 지방 이름을 그대로 옮겨 세우는 것이다.

 

 

요동군고(遼東郡考)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제 환공(齊桓公)이 산융(山戎)을 치려 할 때에 관중(管仲)의 말에 따라 요수(遼水)를 건넜다.”
하였으니, 요(遼)라는 이름이 있은 지 오래다. 먼 옛날에는 동이(東夷)의 땅이었기 때문에 우(禹)의 발자취가 우갈석(右碣石)에 이르렀으며,
“도이(島夷)는 피복(皮服)을 바쳤다.”
하였는데, 도이는 우리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이므로 그 형상이 섬[島]과 같기 때문이다. 《한서》에 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의 상(象)이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순(舜)의 덕교(德敎)가 퍼짐에 이르러 동이(東夷) 중에 귀화한 자가 더욱 많았다. 그러므로 기주(冀州) 동북의 땅으로 유주(幽州)를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가 바로 그곳이요, 청주(靑州) 동북 바다 건너의 땅을 영주(營州)로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 이동이 바로 그곳이다. 2주(州)를 설치한 것은 대개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상(夏商) 적에 구이(九夷)가 점점 성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는 자가 있자, 이때부터 유주와 영주 땅은 다시 동이가 사는 곳이 되었다.
주(周)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서(遼西)인 지금의 의주(義州)ㆍ광녕(廣寧)으로부터 요동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그 강역이었다. 중국의 지리지를 상고하면 알 수가 있다.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동북을 유주(幽州)라 하는데 그 산은 의무려(醫巫閭)요, 그 산물은 어염(魚鹽)이다.”
하였으니, 주(周)의 시대에는 지금의 요하 이서가 중국의 봉내(封內)에 있고 영주는 기자의 조선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기씨(箕氏)가 쇠하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조선의 서쪽 땅 천리를 탈취하여 만번한(滿潘汗) 지역으로 경계를 삼고 장성(長城)을 쌓았으며 조양(造陽) 상곡(上谷)에 있다. 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에 비로소 요동군(遼東郡)을 두었더니, 연(燕)이 망하자 진(秦)에 병합되었다. 〈진에서는〉 요수 동서를 나누어 2군을 만들고, 한(漢)의 초기에는 진(秦) 때의 것을 따르다가 무제(武帝) 때에 동부교위(東部校尉)를 세워 동이(東夷)를 거느렸고 이어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었으며, 소제(昭帝) 때에 진번(眞番)을 없애고 현도(玄菟)를 요동 동북의 땅에 옮겼는데, 왕망(王莽) 때에 와서는 요서가 오환(烏桓)에게 점거되어 요동의 경지가 날로 줄어들었다.
동한(東漢) 때에 다시 속국도위(屬國都尉)를 두고, 헌제(獻帝) 때에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의 서쪽땅을 점유하고 스스로 요동후(遼東侯)와 평주목(平州牧)이 되니, 동방 제국(東方諸國)이 많이 붙었는데 3세(世) 50년 만에 망하였다.
위(魏)에 와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고 양평(襄平)에 있게 하고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쳐서 유주(幽州)를 만들었는데, 진씨(晋氏) 곧 진(晋) 나라이다. 도 그대로 따랐다. 얼마 뒤에 모용씨(慕容氏)에게 점거되었고, 자주 고구려와 싸워 서로 침탈하였다. 모용씨가 쇠하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모용보(慕容寶)는 일찍이 고구려왕 담덕(談德)을 봉하여 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았으며, 후위(後魏)에 와서 받은 봉작(封爵)에는 모두 요동이란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이 동쪽을 정벌하여 요동성(遼東城)을 탈취하고,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더니, 뒤에 이갈(夷鞨)이 교대로 침범하므로 그를 없앴다. 현종(玄宗) 초년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당시 신라가 미약하여 고구려의 옛 강토를 복구하지 못하고 말갈과 발해에 붙도록 내버려 두었다.
발해가 왕 노릇한 지 2백 35년 만에 망하니거란(契丹)에 흡수되었다.
거란이 옛 요동성을 수축하고 거주하면서 동평(東平)이라고 부르더니, 얼마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또 동경(東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요계(遼界)를 찾으려고 요(遼)의 사신을 귀양보내 절교하면서 발해를 잔멸(殘滅)하였다고 이유를 들었으니, 대개 군사를 내는 데 명분을 세워 군사가 활발하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갑자기 붕어(崩御)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와서 고구려의 옛땅을 요구하자, 서희(徐熙)가,
“거란의 동경(東京)은 본시 모두가 우리의 땅인데, 어찌 잠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소손녕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금(金)은 동북여진(東北女眞)에서 일어나 요(遼)를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요의 동경을 그대로 따랐으며, 원(元)의 초기에는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으로 고쳐 제로(諸路)를 통솔하였고, 명(明)은 요동도사(遼東都司)를 두었으며, 청(淸)은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으로 삼고, 봉천부(奉天府) 건주(建州)를 두어 흥경(興京)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요동 득실의 시말이다.
명(明)이 일어났을 때 우리 태조가 동녕부(東寧府)를 쳐서 빼앗아 이때 이미 군사의 위력이 떨쳤으니, 그 형세로 보아 마땅히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거두어 옛 강토를 복구하였어야 할 터인데, 국내에 사고가 많아 밖을 경략할 겨를이 없었다.
북원요양행성 평장(北元遼陽行省平章) 유익(劉益)이 요양은 본디 조선 땅이라 하여, 사신을 보내와 분부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회답이 없자, 유익은 결국 명(明)에 귀부(歸付)하였다. 아, 요동을 복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압록강(鴨綠江)이 하나의 큰 철한(鐵限)이 되어 끝내 천하의 약국(弱國)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주D-001]월(越) : 여기서는 무(戊)자와 통하니 별 이름이다.
[주D-002]왕 노릇한 지 2백 35년 만에 망하니 :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세운 해가 699년이고, 14대 애왕(哀王) 26년(926)에 망하였으니, 모두 228년 간인데 235년 간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주D-003]요(遼)의 …… 들었으니 :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낙타 50필을 선사하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별안간 의심을 내어 맹약(盟約)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매우 무도(無道)하므로 화친을 맺어 이웃을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교빙(交聘)을 거절하며 그 사자(使者) 30명을 해도(海島)에 유배하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놓아 다 굶어 죽게 했다.” 하였다. 《高麗史 世家卷2 太祖 25年》

 

 

요동 제현고(遼東諸縣考)


《전한서》로 주본을 삼은 다음 《성경지》로 주해(注解)하고 여러 책을 잡다하게 인용하여 보익(補翼)하며, 미상인 것은 궐한다.
《한서》 지리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요동군(遼東郡)은 진(秦)이 설치하였는데, 유주(幽州)에 속하고 속현이 18이다. 후한(後漢) 때에는 속현이 10이었고, 진(晉) 때에는 평주(平州)에 속하고 현(縣)이 8이었다.
양평(襄平) 바로 요동군치이니,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같았다.
○ 《당서》에 의하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옛 양평성(襄平城)인데, 동남쪽으로 평양(平壤)에 이르는 거리가 8백 리라 한다.
신창(新昌)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경내인데, 진(晉)의 모용황(慕容皝)이 양평(襄平)에 흡수시켰다.
○ 후한 때이나 진 때에는 같았다.
무려(無慮) 지금 광녕현(廣寧縣) 동남쪽이다. 사고(師古)는 ‘곧 의무려(醫無閭)이니, 한(漢)의 서부도위(西部都尉) 소재지이다.’ 하였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망평(望平) 지금의 광녕현 동남쪽이다.
○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대요수(大遼水)가 있어 새외(塞外)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거리가 1천 2백 50리라 한다.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현도에 속하였다.
방(房) 지금의 해성(海城) 경내인데, 동진(東晉) 때에는 양평에 흡수되었다.
○ 《수경(水經)》에 의하면, 요수(遼水)는 양평의 서쪽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방현(房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안시현(安市縣)을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한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다.
후성(候成) 후한 때에는 현도에 속하고, 진 때에는 없었다. 지금의 철령현(鐵嶺縣) 남쪽인데, 한(漢)의 중부도위(中部都尉) 소재지이다.
요수(遼隧) 지금의 해성현(海城縣) 우장(牛庄)이다. 《수경》에 의하면, 소요수(小遼水)는 서남쪽으로 또 요양현에 이르러 대요수에 들어간다 하고, 그 주(注)에 ‘남쪽으로 흘러 요양현을 지나 대량수(大梁水)와 합한다.’ 하였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다.
【안】 소요수는 곧 혼하(渾河)인데, 지금의 승덕현(承德縣) 남쪽 10리에 있고, 대량수는 곧 태자하(太子河)인데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북쪽 15리에 있다.
요양(遼陽) 후한 때에는 현도에 속하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대량수가 서쪽으로 요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다.
험독(險瀆)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다. 지금의 승덕현성(承德縣城) 동남쪽 땅으로 요집주(遼集州)이다.
거취(居就) 후한 때에는 없고 진 때에는 같았는데, 지금의 요양주성(遼陽州城) 서쪽 80리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실위산(室潙山)과 실위수(室潙水)가 나온 곳인데, 실위수는 북쪽으로 양평(襄平)에 이르러 양수(梁水)로 들어간다 한다.
고현(高顯) 상고할 수가 없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으며, 현도에 속하였다.
안시(安市)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개평현(盖平縣) 동북 70리이다. 안시고(安市考)에 보인다.
무차(武次) 한(漢)의 동부도위(東部都尉) 소재지이다.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다.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평곽(平郭)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개평현 경내이다.
○ 《당서》에 의하면, 안동부(安東府) 서쪽에서 건안성(建安城)에 이르는 3백 리로 옛 평곽현(平郭縣)이라 하였는데, 건안(建安)은 고구려의 고을 이름이다. 또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치면서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安市)는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안시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西安平)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같았다.
○ 《당서》에 의하면, 안동부 남쪽에서 압록강 박작성(泊汋城)에 이르는 7백 리인데, 옛 안평현(安平縣)이라 한다.
【안】《한서》 지리지에 ‘현도군(玄菟郡)의 마자수(馬眥水)가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마자수는 바로 압록강이니 《당서》가 옳고, 요사(遼史)에, 호주(壕州)는 본디 서안평 옛땅인데 현주(顯州) 동북쪽 2백 20리에 있다 하였는데, 현주는 지금의 광령(廣寧) 지경이니 《요사》가 잘못이다.
○ 《후한서》 주에 ‘고을 북쪽에 작은 강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니, 고구려의 별종(別種)이 이것을 따라 소수맥(小水貊)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문(文) 상고할 수 없다.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같았다.
번한(番汗)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개평현 경내이다.
○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패수(沛水)가 서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한다.
답씨(沓氏)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원년에 오(吳)의 육모(陸瑁)가 공손연(公孫淵)을 치려는 것을 간하는 소(疏)에 ‘답저(沓渚)에서 연(淵)에 가자면 길이 매우 멀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요동군에 답씨현(沓氏縣)이 있는데, 서남쪽으로 해저(海渚)에 다다랐다.’ 하고,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의하면, 위(魏)의 경초(景初) 3년에 요동의 동답현(東沓縣)의 이민(吏民)을 바다를 건너 제군(齊郡)의 지경에 살게 하고, 〈고종성(故縱城)으로〉 신답현(新畓縣)을 삼았는데, 곧 답저(畓渚)의 백성이었다 하였으니, 지금 성경(盛京)의 영해(寧海) 등지인 듯하다.
낙취(樂就) 진 때에 설치하고 양한(兩漢)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역성(力城) 진 때에 설치하고 양한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불내 화려고(不耐華麗考)


불내(不耐)와 화려(華麗) 2현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동부(樂浪東部)에 속하고, 불이현(不二縣)은 도위(都尉)의 소재지였다. 불이(不二)는 또한 불내라고도 칭한다. 이른바 영동(嶺東) 7현(縣)이란 바로 지금의 철령(鐵嶺) 내외의 땅이니, 불내ㆍ화려 2현은 아마 옛날 이추(夷酋)의 호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강등시켜서 현(縣)으로 만든 것이리라.
한 광무(漢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동부도위를 없애고 영동의 땅을 떼어 그들의 괴수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았으므로 이에 예후(濊侯)와 불내후(不耐侯)란 칭호가 생겼다.
신라기에,
“유리왕(儒理王) 17년 건무(建武) 16년 화려와 불내 사람이 북쪽 지경을 침범하자 맥국(貊國)의 괴수가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그를 깨뜨렸다.”
하였으니, 그 땅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서》에,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 고구려 태조왕 66년 고구려가 현도를 침범하고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하였다.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화려(華麗)가 요계(遼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화려는 낙랑 동부이고 현도는 요동의 동부에 있으니, 남북이 절연(截然)한데, 어찌 서로 가까울 리가 있겠는가? 《후한서》에서 운운한 것은 현도를 침범하고 또 화려를 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위(魏)의 정시(正始) 연간에 불내후(不耐侯)와 예후(濊侯)가 항복하였으며 위(魏)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치고, 동천왕(東川王) 20년 숙신(肅愼)의 남쪽 지경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功)을 기록하고, 환도성(丸都城)과 불내성(不耐城)에도 공을 새겼다.

 

 

고구려현고(高句麗縣考)


《주서(周書)》에,
“고이(高夷)는 곧 고구려다.”
한 말이 있으니, 그 이름이 생긴 지 이미 오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에 현도군 소재지인 고구려현을 설치하였는데, 고구려는 아마 오랑캐 나라라 해서 현(縣)으로 강등하고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리라.
현도군 아래에 반고(班固)는 자주(自註)하기를,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다.”
하고, 응소(應劭)는 주하기를,
“옛 진번(眞番) 조선호국(朝鮮胡國)이다.”
하였으며, 고구려현 밑에 응소는 또 주하기를,
“옛 구려호(句麗胡)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현도군 땅은 곧 고구려국인데 한 무제가 멸망시킨 것이다. 사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반고가 오랑캐의 나라라 해서 약하였던 것이다. 구(句)는 구오(句吳)ㆍ구월(句越)이란 구와 같다. 그러므로 중국사람은 더러 고려(高麗)라 칭하고 구(句)를 말하지 않기도 한다.
《후한서》 부여전(夫餘傳)에,
“처음에 북이(北夷) 고리국왕(藁離國王)의 시아(侍兒)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동명(東明)이 라 하였다.”
하였고, 고이(考異)의 부여(扶餘) 조와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 《통전(通典)》에는 《수사(隋史)》를 인용하여,
“고리국은 곧 고려국이다.”
하였으며, 《성경지》에는,
“요(遼)의 한주(韓州)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서북쪽에 있고, 봉주(鳳州)는 한주 북쪽 2백 리 밖에 있는데 2주(州)는 본래 고리국이며, 고리는 바로 고려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고구려가 처음 요계(遼界)의 북쪽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확신할 만하다.
《후한서》 고구려전에도,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로 현(縣)을 삼아 현도에 붙이고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주었다.”
하고, 《북사(北史)》에는,
“주몽(朱蒙)이 부여(扶餘)에서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살면서 고구려라 호칭하고 고(高)를 성씨(姓氏)로 하였다. 주몽이 죽으니 아들 여율(如栗)이 서고, 여율이 죽으니 아들 막래(莫來)가 서서 곧 부여를 병합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한 다음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붙였다. 한 소제(漢昭帝)가 의적(衣幘)ㆍ조복(朝服)ㆍ고취를 주매, 항시 현도군에 나가서 받았는데 뒤에 점점 교만하여 현도군에 나가지 않았다.”
하였고, 《통전》에도 같다.
《삼국사기》에서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주몽이 한(漢) 건소(建昭) 2년에 북부여(北夫餘)에서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흘승골성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지금 《통전》을 상고하건대 ‘한 건소 2년(漢建昭二年)’이란 다섯 글자가 없으니, 아마 김부식이 덧붙인 것이리라. 그의 의사는, 1대(代)의 역사를 만들려 하나 증빙할 만한 사실이 없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옛날 기록한 단편적인 글을 가지고 중국의 기록에 억지로 꿰맞추려 했던 것이니, 그 정상이 또한 민망하다.

이상 여러 설에 의하면, 고구려국은 저 멀리 건소 2년 전에 있었던 것이다. 잡론(雜論)의 삼국 시기(三國始起) 조와 연관해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주몽(朱蒙)에서부터 보장왕(寶藏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이 자세히 기록된 것은 곧 중국인의 전문억설(傳聞臆說)이니 혹 다 믿지 못할 것이 있을 것이고, 현도 속현인 고구려도 아마 주몽 이전의 이국(夷國)일 성싶은데, 주몽이 또 그 경내에서 일어났고 그 후예(後裔)였기 때문에 또한 고구려라고 칭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우리 나라 역사에 밝지 못하여 이미 경험한 일을 가지고 억측한다. 그러므로 삼국(三國)이 처음 일어날 적부터 정치(鼎峙)의 형세를 이룬 것으로 생각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고구려가 처음 일어날 때에는 매우 미약하였으므로 현도에 붙기를 마치 옛날 홀온(忽溫) 아조(我朝) 선조 때의 야인(野人) 부락 이 요동도사(遼東都司)에 붙은 것과 같이 하였다. 수백년 동안 이처럼 하면서 점차로 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뒤에 강대국이 되었다.
신라나 백제도 점차로 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뒤에 커져서 바야흐로 정치의 형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보는 자는 이런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설이 될 만하다. 모든 사책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보건대, 고구려가 도읍한 곳과 현도군치인 고구려현은 각기 구별된다.
고구려기에 의하면, 유리왕(琉璃王) 33년 왕망(王莽) 천봉(天鳳) 3년 에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하고 군사를 전진시켜 한(漢)의 고구려현을 엄습하였는데, 고구려현은 현도군에 속했다 하였으니, 고구려와 고구려현이 같지 않음은 분명하다.
《한서》 지리지에,
“고구려현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소요수(小遼水)가 시작하는 곳이다.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대요수(大遼水)에 들어간다.”
하였는데, 소요수는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승덕현(承德縣) 남쪽에 있는 혼하(渾河)가 바로 그것이다.
혼하는 백두산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흘러들어 흥경(興京) 경내를 경유하고, 성경(盛京) 동남을 감돌아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한 다음 서쪽으로 요하(遼河)에 들어가 삼차하(三汊河)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자치통감》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원년 조에,
“현도(玄菟)는 요동(遼東) 동북 2백 리에 있다.”
하였다. 당시 요동군(遼東郡) 소재지인 양평현(襄平縣)은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었다.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심양(瀋陽) 중위(中尉) 소재지 동북쪽 80리에 귀덕주(貴德州)가 있다. 혹은 옛 현도군이라고도 하는데, 곧 무순현(撫順縣)의 천호소(千戶所)다. 남쪽으로 요동과의 거리는 1백 20리, 동남쪽으로 압록강과의 거리는 7백 리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성경지》에,
“지금 요양(遼陽)이 요동도사(遼東都司)이고 지금 봉천부치(奉天府治)가 심양 중위 땅이다.”
하였으니, 그 글의 위치를 대략 알 수가 있다.


[주D-001]정치(鼎峙) : 솥발처럼 셋이 대치하여 있는 것.

 

 

 

안시성고(安市城考)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 아래에 반고는 자주하기를,
“대요수(大遼水)가 새외(塞外)로 나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 지경이 바로 그 땅이다. 《일통지(一統志)》에,
“안시폐현(安市廢縣)은 개주위(蓋州衛)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한(漢)이 설치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이 쳤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하였다. 개주(蓋州)는 지금의 개평(蓋平)이고, 해성(海城)은 개성(蓋城) 북쪽에 있으니, 안시는 아마 두 현(縣)의 지경에 있었을 것이다. 여러 책에기록된 것이 동일하지 않다.
《여지승람》에는,
“용강현(龍岡縣)에 안시성이 있다.”
하고, 김시습(金時習)의 《관서록(關西錄)》에도 또한 안주(安州)로 안시성을 삼았는데, 두 설은 다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있는 이적(李勣)의 주문(奏文)에 의하면,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중에 안시성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요동 땅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김부식이,
“안시는 일명 환도(丸都)이다.”
한 것은 옳지 못하다. 환도고(丸都考)에 보인다.
후인들은 또 봉황성(鳳凰城)을 안시성에 해당시키는데, 아마 우리 나라 사람의 옛날 방언에 봉황을 아시조(阿是鳥)라 불렀으니, 아시의 음이 안시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역사책으로 상고하면 《자치통감》에,
“당(唐)이 고구려를 칠 때 이적(李勣)은 ‘안시(安市)가 북쪽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建安)을 치다가, 적이 우리 양도(糧道)를 끊으면 어찌하겠는가?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장손 무기(長孫無忌)는 ‘만일 안시를 버리고 오골(烏骨)을 친다면, 건안과 신성(新城)이 우리 뒤를 밟을 것이니,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취한 뒤에 휘몰아 나아가야 한다.’ 했다.”
하였다.
오골성(烏骨城)은 요동 남쪽 지경 바다 가까운 땅에 있다. 그리고 《성경지》를 상고하면 건안은 개평 지경에 있고, 신성은 영해(寧海) 지경에 있으며 안시는 또 두 성의 뒤에 있으니, 지금 봉황성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 당 태종이 〈19년(645) 9월〉 계미일에 안시로부터 군사를 철수하고, 을유일에 요동에 이르고 병술일에 요수(遼水)를 건넜다. 명(明)의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지금 요양(遼陽)에 있고 요양은 곧 옛 요동군치인 양평현(襄平縣)이다. 요양에서 안시폐현에 이르는 잇수는 1백 70리요, 봉창성에 이르는 잇수는 3백여 리가 넘는데, 천자가 행군할 때 어떻게 3일도 채 못 되어서 3백 리가 넘는 거리를 갔겠는가?


 

패수고(浿水考)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樂浪郡)ㆍ패수현(浿水縣) 아래에 반고는 자주하기를,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후세의 사전(史傳)이 증거가 없으므로 언자(言者)들의 주장이 한결같지 않다. 혹은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이라 주장하고, 혹은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이라 주장하고, 또는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중에는 삼패설(三浿說)이 있게 되었으니,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두루 상고해서 갖추 논하겠다.
저탄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백제기에,
“온조(溫祚) 13년 강역(疆域)을 정할 때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에 이르렀다.”
하고, 《고려사》에,
“평주(平州) 저천(猪淺)을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하고, 《여지승람》 평주 저탄(猪灘) 조에도,
“평양(平壤) 패강(浿江)은 고구려 도성 곁에 있는데, 어떻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패하(浿河)는 아마 저탄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고려사》에,
“김관의(金寬毅)가 ‘당 숙종(唐肅宗)이 천보(天寶) 12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쪽 포(浦)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포는 곧 전포(錢浦)요, 전포는 지금의 개성부(開城府) 서쪽 벽란도(碧瀾渡)에 있고 벽란도는 곧 저탄의 하류이니, 이를 패강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이 동쪽에 왔다는 설은 비록 황탄(荒誕)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어찌 지명까지 아울러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고구려기에,
“평원왕(平原王) 13년에 패하(浿河)의 언덕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그것이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백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패수 가에서 많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패수가〉 양국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
“성왕(聖王)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매, 왕이 장수를 보내 출전하여 그를 물리쳤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 세 가지 증거 외에도 《수경(水經)》에,
“패수는 낙랑(樂浪)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다. 역도원(酈道元)의 주가 아래에 보인다.
상고하건대, 임패현이란 이름은 어느 때 정해졌는지는 모르나 《여지승람》을 보면, 우봉현(牛峯縣) 흥의역(興義驛)의 옛이름이 임패(臨浿)이니, 《수경》에서 칭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또한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방증(旁證)이 될 만하다.
대동강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하니, 만일 패수가 동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 내가 번사(番使)에게 물었더니, 성(城) 상고하건대 평양성(平壤城)을 가리킨다. 이 패수는 북쪽에 있다 한다. 그 강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을 경과한다. 그러므로 《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수경》이 착오다.”
하였으니, 이 주는 《수경》에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착오라 하였으니, 이 주가 옳다.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당서》에,
“평양성은 한(漢)의 낙랑군인데, 산세를 따라 굽게 성곽을 쌓고 남쪽으로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을 따라가 남쪽으로 해연(海壖)을 끼고 패강(浿江) 어구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이른다.”
하였다. 초도는 지금 풍천부(豊川府) 북쪽 40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신라가 당(唐)과 함께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쪽 경계를 정하였는데 현종(玄宗) 개원(開元) 23년, 성덕왕(聖德王) 34년에 당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으므로 이에 신라의 땅은 비로소 북쪽으로 지금 중화(中和)ㆍ상원(祥原)의 땅을 한계로 하였고, 진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준 글에,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 掛弓平壤樓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인다 / 飮馬浿江水
한 글귀가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상 두 설은 각기 증거한 바가 있고 증거도 어긋나지 않으나 두 패수는 다 평양 이남에 있다. 그런데 평양은 조선의 도읍지이고, 《한서》에서는,
“조선과는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
하였고, 또,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塞)를 빠져나가 패수를 건넜다.”
하고, 또,
“한(漢)의 사신 섭하(涉何)가 조선으로부터 돌아와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순체(荀彘)가 요동(遼東)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조선 패수 서쪽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고, 또,
“조선 태자(太子)가 입조(入朝)하려다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체(彘)가 패수 가의 군사를 깨뜨리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한 것은, 모두 패수를 건넌 뒤에야 조선의 왕도(王都)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여지승람》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는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설을 의심하고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였는데, 후인들도 또한 그 설을 많이 따른다. 그러나 그 설도 착오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馬眥水)가 있으니,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패수와 마자수가 만일 한 강이라면 어찌 나누어 말하였겠는가?
상국(相國)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도,
“《한서》 지리지 요동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水)가 있으니, 패(沛)와 패(浿)는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음이 같으니, 아마 한 강인 듯하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패(沛)와 패(浿)를 비록 혼용한다 하더라도 《사기》와 《한서》두 책에서 누차 패(浿)라 칭하고 끝내 패(沛)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모두 착오로 그랬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성경지》에는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요양현(遼陽縣)은 한(漢)의 패수현(浿水縣) 북쪽에 있다. 패수는 어니하(淤泥河)라고도 하고 점우락(蔪芋濼)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일통지》에서도 그것을 따라,
“지금은 어니하라고 칭하는데 해성현(海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은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다.”
하였으니, 압록강 이북은 모두 요동에 속하였는데, 낙랑의 여러 현(縣)이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겠는가? 대저 《요사》 지리지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요사》 지리지에,
“숭주(崇州)는 본래 한(漢)의 장잠현(長岑縣)인데, 지금 요영(遼陽)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장잠(長岑)은 뒤에 대방(帶方)에 속하였으니, 그 땅이 평양이남에 있었는데, 어찌 요양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을까? 또,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의 누방현(鏤方縣)인데, 지금의 개원(開原) 지경 안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개원은 압록강 북쪽 1천 리쯤에 있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이 그 중간에 가로 놓여 있는데, 낙랑이 어떻게 그 땅을 가졌겠는가? 이것은 비록 중국의 책이지만, 전연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뒤에 요동 땅에 교설(僑說)되고 그때 또한 옛날
고을 이름을 설치하였는데, 후인들이 그릇 한(漢)이 설치한 것으로 알았던가?
어떤 이가,
“참으로 자네 말과 같다면, 여러 설들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 혹시 따로 그 땅이 있다는 말인가?”
하기에 나는,
“여러 설이 남김없이 밝혔으니 다시 어떻게 별도의 의논을 제기하겠는가? 어리석은 나의 견해로는 여러 설 중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따로 칭한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은 과연 어찌해서인가?”
하기에 나는,
“《사기》와 《한서》의 문세(文勢)를 가지고 말하겠다. 그 말에 ‘조선(朝鮮)이 관리(官吏)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는데, 진(秦)이 요동(遼東)의 변경에 소속시켰다.’ 하고, 또 ‘노관(盧綰)이 연(燕)이 쌓은 요동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변방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옛 진(秦)의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을 구해 살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일반 문세이다.
그 ‘변경’이라느니 ‘연이 쌓은 장새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느니 ‘옛 진의 공지를 구해 살았다느니’ 한 것은 모두 지금의 해서(海西) 지방인 것 같고, 그 중간을 비어둔 것은 지금 서북 두 나라의 경계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平壤)은 기자(箕子)의 도읍지인데, 지금의 한양(漢陽)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기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이 자립하여 평양에 도읍하였다.’ 하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모두 지금의 한양을 가리킨 것이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건대, 전국(戰國)의 말기에 기씨(箕氏)가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에 옮기고서 옛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는 모두가 당시 전벌(戰伐) 및 강역을 경계지을 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踏驗)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 들은 것이 아니다.
열수(列水)는 지금의 한강(漢江)인데, 열구현(列口縣)은 열수가 바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라 하니, 지금의 강화(江華) 지방이다. 강화를 옛날 혈구(穴口)라 칭하였으니, 아마 열구(列口)의 잘못인 듯하다. 열수고(列水考)에 보인다.
전후 제유(諸儒) 중에 패수를 논한 것은 하나뿐이 아닌데, 누구나가 지금의 평안(平安)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또는 지금의 평양을 위씨(衛氏)의 도읍지로 삼고서는, 별도로 패수를 찾으니, 이는 그 실지를 얻지 못하고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교설(僑設) : 교치(僑置)와 같다. 딴 이름을 빌어 세우는 일. 이를테면 딴 지방 이름을 그대로 옮겨 세우는 것이다.

 

 

열수고(列水考)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 분려산(分黎山)이 있고 거기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수로의 길이가 8백 40리라 한다.
우리 나라 내지(內地)에 수원(水源)이 8백 리 가량 먼 것이 없는데, 한수(漢水)의 수원이 가장 멀어 그 잇수가 8백여 리가 충분히 되니, 열수는 바로 지금의 한수인 것이다.
한구암(韓久庵 구암은 한백겸(韓白謙)의 호)은 이렇게 적었다.
한강(漢江) 외에 8백 리 되는 큰 강이 없으니, 아마 한강이 열수인 듯하다. 한강의 수원이 하나는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용진(龍津)과 합하여 한강이 된다. 이른바 탄열(呑列)이란 것도 아마 이 지방을 벗어나지 않은 듯하고, 열구(列口)도 또한 한강 어귀에 있었는 듯하다.

또 열구현(列口縣)이 있는데, 호삼성(胡三省)은,
“열수가 바다에 들어가는 어귀에 있다.”
하고, 《사기》에,
“한 무제가 조선을 칠 때 양복(楊僕)이 제병(齊兵) 7천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우거(右渠)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치니 양복의 군사는 패주(敗走)하여 산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을 평정한 뒤에 한 무제는, 양복이 열구(列口)에 이르러서 마땅히 순 체(荀彘)를 기다려야 하였을 것인데, 저 혼자 지레 군사를 풀어 치다가 망실(亡失)한 것이 많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인(庶人)을 삼았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위에서는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하고, 아래에서는 ‘열구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거리가 멀지 않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혈구현(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
하였으니, 혈구(穴口)는 아마 열구(列口)의 잘못일 것이며 한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가 있다. 어떤 이는 대동강을 열수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옳지 않은 듯하다.
한(漢)의 말기에 낙랑(樂浪)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열구를 대방으로 옮겨 붙였다. 지금의 평양이 낙랑군치(樂浪郡治)이고 열구가 〈한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에 있었으나, 군치(郡治)의 지척지지(咫尺之地)를 어찌 다른 군에 떼어 붙였겠는가? 이것으로 열구가 강화(江華)임을 더욱더 믿겠다.
《산해경(山海經)》에,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열양은) 열수의 이름이다.”
하였고, 양웅(揚雄)의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의 사이이다.”
하였고, 《사기》 장안(張晏)의 주에는,
“습수(濕水)와 산수(汕水)가 합쳐서 열수가 된다.”
하였고, 색은(索隱)에는,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강의 근원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정선(旌善)ㆍ평창(平昌) 영월(寧越)ㆍ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충주(忠州)ㆍ여주(驪州)를 거쳐 흐르니 그것은 남강(南江)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회양(淮陽)의 말휘령(末暉嶺)에서 나와 낭천(狼川)ㆍ춘천(春川)ㆍ가평(加平)을 거쳐 흐르니 그것은 북강(北江)이라 하는데, 합류하여 한강이 된다. 이런 까닭에 습수와 산수를 구별한 듯하다.


 

대수고(帶水考)


《한서》지리지에,
“함자현(含資縣)의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고, 백제기에,
“비류(沸流)는 온조(溫祚)와 함께 패수(浿水)와 대수 두 강을 건너서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하고, 또 백제기 온조 37년에,
“가뭄으로 기근(饑饉)이 들어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部落)이 고구려로 도망해 가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이 지금의 저탄(猪灘)을 패수라 하였으니, 대수는 아마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인 듯한데, 《한서》 지리지에,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대방은 아마 지금의 송경(松京) 풍덕(豊德)의 땅인 듯하다. 대방에 군(郡)을 설치한 것은 대개 왜국(倭國)과 한국(韓國)을 붙잡아매기 위한 의도에서였으니, 바닷길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바다 곁에 설치한 것이다. 미추홀은 바로 지금의 인천(仁川)이기 때문에 혹은 한수가 대수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렇다면 열수는 지적할 만한 것이 없다.


마자수고(馬眥水考)


《한서》지리지에,
“현도군(玄菟郡)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가고,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군(현도군ㆍ요동군)을 지나며 그 거리는 1천 1백 리이다.”
하고, 《통전》에는,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한다. 그 수원이 동북말갈(東北靺鞨)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과 거리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한 강과 합하니 곧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크므로 특히 천참(天塹)을 삼는데, 평양 서북쪽 4백 50리, 요수(遼水)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개마산(盖馬山)이 곧 백산(白山)이니, 지금의 백두산이다. 마자수는 지금 의주(義州)의 압록강을 가리킨다. 《한서》 지리지에는 마자수와 패수가 같지 않은데, 오운(吳澐)은,
“압록강을 또한 패수라 한다.”
하였으니, 아마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패수를 해당시킬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염난수(鹽難水)는 지금의 파저강(婆猪江)으로 일명 동가강(佟家江)이다.
《성경지》에도,
“동가강은 곧 염난수이다.”
하였다. 패수고(浿水考)와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 압록수(鴨綠水)에 대해서는 옛날 언자(言者)의 주장이 동일하지 않다. 고구려기에는,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해모수(解慕漱)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 가의 집 속으로 유인하여 간음하였다.’고 하였다.”
하고, 《응제시주》에는, 《고기(古記)》에 ‘부여성(扶餘城)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는데 그 하백(何伯)의 딸이 유화(柳花)이다.’한 것을 인용하여,
“청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하였는데, 잘못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압록강은 일명 청하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에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잘못을 답습해서 그런 것이다. 청하는 부여성 북쪽에 있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지금 압록강과는 남북이 판연하게 갈려 있다.
《성경지》에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옛 부여(扶餘) 지경에 청하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아마 이 강은 옛이름이 오히려 있었는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요수(遼水)는 일명 압록강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하고, 호 삼성(胡三省)은,
“지금 사람은 압록강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한다.”
하고, 주자(朱子)는,
“여진(女眞)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는데, 또한 혼동강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대개 옛날 동북쪽의 물은 압록(鴨緣)으로 이름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주자는 또 압록강을 천하 3대강(江)의 하나로 삼아 황하(黃河)와 함께 칭하였는데, 지금 압록강을 보건대 어찌 황하와 비견할 수가 있겠는가? 동북쪽의 모든 강은 다 흑룡강(黑龍江)으로 들어가 동해(東海)에 쏟아지는데, 더불어 비할 수가 없이 크니, 주자가 칭한 것은 아마 이것을 가리킨 듯하다.
압록이란 이름이 중국 책에 나온 것은 수(隋)ㆍ당(唐)이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비로소 보이는데, 대개 한(漢)ㆍ위(魏) 때에는 고구려가 요동 동북 지경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항상 동북 지경에서 시작하였으니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로 나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ㆍ당 때에는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동남쪽으로 해서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개마대산고(盖馬大山考)


개(蓋)자는 《통전》에 음이 합이라 하였다. 개마대산은 바로 지금의 백두산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면, 고구려 초기에 개마국(蓋馬國)이 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개마대산이라 칭한 것이다. 대개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중국에서 개마의 대산(大山)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한서》 지리지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는데, 그 산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서개마현에 마자수(馬訾水)가 있는데, 곧 후일의 압록강으로서 그 수원(水源)이 백두산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개마대산이 백두산이란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조위(曹魏) 시대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칭하였으니, 《삼국지》 읍루전(挹婁傳)에,
“(읍루(挹婁)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隋)ㆍ당(唐) 시대에는 백산(白山)이라 칭하였으니, 《통전》 물길전(勿吉傳)에,
“백산부락(白山部落)이 있다.”
하고, 또,
“압록강 수원이 동북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칭하였으니, 《문헌통고》 발해전(渤海傳)에,
“무후(武后) 때 말갈의 걸사 비우(乞四比羽)와 고구려의 여종(餘種)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遼水)를 건너서 태백산 동북쪽을 확보하고 욱루하(奧婁河)를 막았다.”
하고,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고구려의 잔얼(殘孽)이 태백산 밑에 웅거하여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였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은 장백산(長白山)이라 칭하니, 《성경지》에 이른바 ‘장백산’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곧 우리 나라 사람이 칭한 것이다.
대저 산천(山川)과 군읍(郡邑)의 이름에는 옛날 이름과 지금 이름이 다르고 저들이 부른 이름과 우리가 부른 이름이 다른 것이 있으며, 혹은 오랑캐의 말을 번역해 옮길 때 갑자기 구별해 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지만, 이 산이야말로 명칭과 내력이 너무도 분명하여 알기 쉬운 것이다. 《후한서》에,
“동옥저(東沃沮)는 개마산에 있다.”
하였는데, 동옥저의 땅은 본래 철령(鐵嶺) 이북 삼갑(三甲 삼수(三水)ㆍ갑삼(甲三)임) 이남의 땅이 모두 그것이다.
《고려사》 윤관전(尹瓘傳)에 있는 임엄(林彦)이 지은 구성기(九城記)에,
“여진(女眞)은 본디 고구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하고, 또,
“구성(九城)은 그 땅이 사방 3백 리인데,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대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2주에 접하였다.” 하였는데, 2주는 다 지금의 정평(定平) 지경이고 지금의 함경도 삼수(三水)ㆍ갑산(甲山) 2부(府)가 다 백두산 동남쪽 기슭이니 ‘서북쪽은 〈개마대산에〉 끼였다.’는 말을 믿겠다.
《일통지》에서 조선의 산천을 기재하면서,
“개마대산이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고 그 동쪽은 곧 옛날의 동옥저국(東沃沮國)이다.”
하였는데, ‘동쪽이 옥저이다.’는 말은 옳으나 ‘펑양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후한서》의 주를 상고하면, 개마현(蓋馬縣)은 현도군에 속하고 그 산은 지금 펑양성 서쪽에 있는데 평양은 지금 왕검성(王儉城)이라고 되어 있으니, 《일통지》의 잘못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여지승람》에서도 또한 《일통지》를 따라 펑양조에 기재하되, 소재처를 지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부득이 고적(古蹟) 조 밑에 기입하고 임언의 구성기를 인용하여,
“구성은 지금 함경도에 속하였고, 그 서북은 여진의 땅이니, 평양의 지경이 아니다. 이 산은 아마 압록강 밖 서북 경계에 있었는 듯하다.”
하였는데, 반계(磻溪) 유씨(柳氏)는 그 말을 반박하기를,
“이 말은 잘못이다. 소위 개마산이란 것은 지금 평안도와 함경도 두 도의 경계이니, 곧 영원(寧遠)ㆍ맹산(孟山)ㆍ함흥(咸興)ㆍ영흥(永興)의 사이에 있는 큰 영(嶺)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유씨도 오히려 《한서》 지리지에,
“마자수(馬訾水)의 수원이 개마산에서 나온다.”
한 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또 《한서》 지리지에 현도군의 속현이 셋으로 되어 있는데, 개마현이 그 중 하나인 것이다. 이전 역사책에서 이미,
“현도군치인 고구려현은 요동 양평(襄平)의 동북에 있다.”
하였으니, 거기에서 유씨가 말한 함흥ㆍ영원 등까지는 1천 리가 넘는다. 중국이 현(縣)을 설치할 때 폭원(幅員)을 비록 크게 했다 하더라도 어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처럼 멀게 깊숙이 들어왔겠는가?


[주D-001]걸사 비우(乞四比羽) : 말갈(靺鞨) 추장(酋長)의 이름.

 

 

예고(濊考)


예(濊)는 동이(東夷)의 옛 나라이니 《주서(周書)》에서 말한,
“예인(濊人)은 전아(前兒) 짐승 이름이다. 인데, 원숭이처럼 생기고 서서 다니며, 어린애와 같은 소리를 낸다.” 지금은 미상
한 것이 그것이다.
【안】 지금 울릉도(蔚陵島)에 가지어(嘉支魚 인어(人魚)를 말한다)가 있는데 바위 밑에 굴을 파고 살며 비늘이 없고 꼬리가 있으며 어신(魚身)에 네발이 달렸는데 뒷발이 매우 짧다. 육지에서는 잘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는 나는 듯이 다니며 소리는 어린애와 같은데, 그 기름은 등유(燈油)로 쓸 만하다 하니, 전아라는 것은 아마 그런 유인가?
《후한서》에서 비로소 예(濊)에 대한 전(傳)을 두었는데, 《후한서》에 의하면, 예(濊)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와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는데, 본시 조선의 땅이다.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임금 남려(南閭)가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인구 28만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았다가 수년 만에 이를 혁파하였다.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添沮)ㆍ예(濊)ㆍ맥(貊)을 다 낙랑에 소속시키고, 낙랑 7현(縣)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렸다 하고,
이민구(李敏求)의 《독사수필(讀史隨筆)》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단단대령의 동서는 지금의 관동(關東)과 관서(關西)이다. 남려가 28만의 인구를 거느렸다는 그 수는 비록 관동ㆍ관서의 인구를 통틀어서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폐(凋弊)한 나머지 현재의 인구가 매우 적은 것으로 볼 때, 고금 인구의 다과가 현격함을 알 수 있다.

광무(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도위(都尉)를 없애고 결국 영동(嶺東)의 땅을 떼어내서 그 땅에는 모두 그 우두머리를 봉해 현후(縣侯)로 삼은 다음 세시(歲時)에 조알(朝謁)하게 했다 한다.
그리고 예는 뒤에 고구려에 붙었더니 조위(曹魏) 정시(正始) 6년에 불내(不耐) 등과 함께 위(魏)에 항복했다 하였고, 이 뒤로는 예가 중국 역사책에 나타나지 않는데, 《삼국사기》 김인문전(金仁問傳)에,
“당 고종(唐高宗)이 ‘지금 고구려가 그 지세(地勢)의 험고(險固)를 믿고 예ㆍ맥과 함께 악한 짓을 같이한다.’ 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그 추장[酋帥]은 오히려 남아 있었던가?
그리고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동옥저(東沃沮)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을까?
고구려기에,
“태조왕이 예ㆍ맥과 함께 한(漢)을 침범하였다.” 안제(安帝) 때이다.
하고,
“양원왕(陽原王) 4년에 예의 군사 6천 명을 이끌고 백제의 독산성(獨山城 지금의 충주(忠州))을 쳤다.” 양 무제(梁武帝) 태청(太淸) 2년이다.
하였으며, 이 뒤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기 지리지에는,
“명주(溟州)는 본시 고구려의 아슬라주(阿瑟羅州)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溟州)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에서 부여(夫餘)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 했다.”
하였다.
【안】 이전 사책이란 《후한서》와 《삼국지》를 가리킨다. 《삼국지》 부여전에,
“위(魏)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국중에 옛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ㆍ맥의 땅이다.”
하였는데, 가탐은 이것을 가지고 잘못이라 한 것이니 이 설이 옳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
하고, 《여지승람》에는,
“강릉(江陵)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성이 있으니, 대개 그 국도(國都)이다.”
하고, 신라 남해왕 16년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 바쳤다.”
하였으니, 이것들이 그 증거이다.


[주D-001]고구려 …… 이르렀다 : 《고려사》 태조 4년 조에 보인다.

 

 

 

맥고(貊考)


맥(貊)도 동이(東夷)의 옛 나라이다. 《주관(周官)》의 맥예(貊隸)에 대한 주에,
“동북 오랑캐를 정벌해서 노획한 것이다.”
하고, 또,
“직방씨(職方氏)는 구이(九夷)와 구맥(九貊)을 관장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서〉 정지(鄭志)는 조상(趙商)의 물음에 답하기를,
“구맥(九貊)은 곧 구이(九夷)이다.”
하고, 《이아(爾雅)》의 주에는,
“예맥(濊貊)은 오적(五狄)의 하나이다.”
하고, 《맹자(孟子)》에,
“백규(白圭)가 ‘세(稅)를 거둘 때 20분의 1을 거두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그대의 세법은 맥(貊)에서나 하는 세법일세. 맥에는 성곽(城郭)ㆍ궁실(宮室)ㆍ종묘(宗廟)나 제사지내는 예절이 없고, 제후(諸侯)에게 폐백(幣帛)과 음식 대접하는 일이 없으며, 백관(百官)ㆍ유사(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20분의 1을 거두어도 충분하다.’ 했다.”
하였는데, 그 집주(集註)에,
“맥은 북방 이적(夷狄)의 나라이다.”
하고, 《공양전(公羊傳)》에는,
“10분의 1은 천하에서 중정(中正)한 세법이다. 10분의 1보다 많으면 대걸(大桀)이나 소걸(小桀)이요, 10분의 1보다 적으면 대맥(大貊)이나 소맥(小貊)이다.”
하였다. 맥이 경전(經傳)의 글에 섞여 나온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유래가 아마 오랜 모양이다. 《한서》 고제(高帝) 4년에,
“북맥(北貊)과 연(燕) 사람이 효기(梟騎 강한 기병(騎兵))를 보내와 한(漢)을 도왔다.”
하고, 《후한서》에,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소제(昭帝)가 이맥(夷貊)이 침략한다고 하여 현도군을 고구려로 옮기고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ㆍ예ㆍ맥을 다 낙랑(樂浪)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경토(境土)가 너무 광원(曠遠)하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嶺東) 7현(縣)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는데, 광무(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도위를 없애고 결국 영동 땅을 떼어내서 그 땅에 모두 그들의 괴수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고 세시(歲時)에 조알(朝謁)하게 하였다.”
하고, 또,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 고구려 태조왕 때이다 에 맥이 고구려ㆍ예를 따라 현도를 침범하였다. 건광(建光) 원년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새(塞)를 나가서 예ㆍ맥의 괴수를 쳐 베었다. 고구려가 마한과 예ㆍ맥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범하였다.”
하고, 신라기에,
“유리왕(儒理王) 17년에 화려(華麗)와 불내(不耐)가 북쪽 지경을 침범하매 맥국(貊國)의 괴수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맞아 격파하니,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년에 맥국의 괴수가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 광무 건무(建武) 때이다.
맥국은 아마 나라는 작고 군사는 강한데 예에 붙여서 고구려에 소속된 것이리라. 그 강역은 상고할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고구려의 동남쪽과 예의 서쪽이 옛날 맥의 땅이다.’ 한 것을 인용하였으니, 《고려사》 지리지에,
“교주도(交州道)는 본시 맥의 땅이고, 춘주(春州)는 맥국이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춘주는 옛날 우수주(牛首州)이니, 옛날의 맥국이다.”
하였고, 《여지지(輿地志)》에는,
“맥국의 옛날 도읍은 지금의 춘천부(春川府) 북쪽 13리 소양강(昭陽江) 북쪽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백제기에,
“책계왕(責稽王) 13년에 한(漢)이 맥국 사람과 함께 쳐들어오므로, 왕이 막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진 혜제(晋惠帝) 원강(元康) 7년이다. 이후 4년은 신라 기림왕(基臨王) 3년에 해당되는데, 〈신라기에〉,
“왕이 비열홀(比列忽)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을 순행할 때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맥국이 없어진 시기는 이미 이때였던 것이다. 이후로는 역사책에 나타나지 않는데, 신라 태종왕(太宗王) 8년에 당 고종(唐高宗)이,
“고구려가 맥국과 함께 악한 짓을 한다.”
하였으니, 혹시 남아 있는 부락이 있었던가? 맥을 흔히 고구려라 칭하고 고구려를 또한 맥이라 칭하였다. 《한서》에,
“왕망(王莽) 때 전담(田譚)이 ‘맥 사람이 법을 범하였다.’ 했다.”
하였고, 또,
“맥 사람이 더욱 심하게 변방을 침범했다.”
하였는데, 여기의 맥은 다 고구려를 가리킨 것이다. 아마 옛날 맥이 요지(遼地)에 있고 고구려가 요계(遼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설이 이와 같은 것이리라.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맥은 연(燕)과 접경했다고 한다.
맹자가,
“오곡(五穀)은 나지 않고 오직 서(黍)만이 난다.”
한 서(黍)는 아마 촉서(蜀黍 수수)를 가리킨 듯하다. 지금 요지에 심는 것은 모두가 이 촉서이다. 토질은 고금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서직(黍稷)의 서(黍)라면 이 서(黍)는 바로 오곡의 하나인데, 어찌 ‘오곡이 나지 않는다.’ 고 하였겠는가? 이에 의하면, 옛날에는 요지를 통칭 맥이라 하였던 것이다.
또 양맥(梁貊)ㆍ소수맥(小水貊)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별종이다.
고구려기에,
“유리왕이 양맥을 멸하고 군사를 전진하여 고구려현을 습격하였다.”
하고, 두씨(杜氏)의 《통전》에,
“한(漢)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작은 강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그 작은 강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므로 소수맥이라 한다. 고구려현은 현도군 소재지로서 요동 북쪽 2백 리에 있고, 서안평현은 압록강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에 있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상상할 수가 있다.
《문헌통고》 발해전(渤海傳)에, 예ㆍ맥의 옛날 땅으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를 삼았는데, 지금 《성경지》를 상고하면 봉황성(鳳凰城)이 곧 대씨(大氏) 용원부이니, 그렇다면 고구려가 아직 일어나기 전에는 요지가 예ㆍ맥의 점령지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대개 후에 여러 나라가 서로 난을 일으키고 부락이 흩어져 끝내는 지금의 강원도에 귀속되고 영영 없어진 것이다.


옥저고(沃沮考)


동옥저(東沃沮) 경계는 지금 함경남도의 고원(高原)ㆍ영흥(永興) 등에서 경성(鏡城) 이남에까지 이르렀다.
《후한서》에 처음으로 동옥저전(東沃沮傳)을 실었는데 거기에,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盖馬大山)의 동쪽에 있어,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에 접하고, 남쪽은 예ㆍ맥에 접하였는데,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어 그 길이가 1천 리쯤 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였다.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소제(昭帝) 때에 이맥(夷貊)이 침범한다는 이유로 현도군을 고구려 현(縣) 이름으로 현도군치(玄菟郡治)인데 한(漢)의 양평(襄平) 북쪽 2백 리에 있다. 로 옮겼다. 다시 옥저를 현(縣)으로 삼아 낙랑동부도위에 소속시켰더니, 광무(光武)가 도위를 없애고 그 우두머리를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그 땅은 매우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었는데, 결국은 고구려의 신하 노릇을 하였다.”
하였고, 신라 시조 53년에 동옥저가 좋은 말을 바쳤다 하니, 또한 남쪽으로는 신라와 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태조왕 4년 한 광무(漢光武) 중원(中元) 원년 에 동옥저를 취하여 성읍(城邑)을 삼았다 하니, 이때에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滄海)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북옥저(北沃沮)는 지금의 함경북도와 야인(野人)의 땅이다. 《후한서(後漢書)》에,
“북옥저는 일명 매구루(買溝婁)인데, 남옥저(南沃沮)와의 상거가 8백 리이며, 북쪽으로는 읍루에 접하였다. 읍루 사람이 배를 약탈하기를 좋아하니, 북옥저 사람은 그들을 무서워하여 매년 여름이면 바위 구멍에 숨어 수비했다.”
하였다. 고구려 시조 11년 한 성제(漢成帝) 하평(河平) 2년 에 그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았다한다. 《북사》에,
“한(漢)이 고구려에게 의책(衣幘)과 조복(朝服)을 주면 고구려는 항시 현도군에 가서 받았는데,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 현도군에 나가지 않고 동쪽지경에 작은 성을 쌓고 거기서 그것을 받았으므로 결국 그 성 이름을 책구루(幘溝婁)라 하였다. 구루라는 것은 고구려에서 성을 일컫는 말이다.” 하였다.
【안】 책구루는 곧 매구루이다. 매(買)자가 어떤 본(本)에는 치(置)자로도 되었는데, 치자와 책(幘)자는 한(漢)의 음이 서로 같다.
○ 남옥저는 지금 어느 땅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후한서》에,
“북옥저는 남옥저와의 상거가 8백 리이다.”
하였으니, 아마 북옥저의 남쪽에 있었던 것 같다. 또 백제기에,
“시조 43년 한 광무 건무 원년 남옥저 사람이 부양(斧壤)에 와서 귀의(歸依)했다.”
하였다. 부양은 지금의 평강현(平康縣)이니, 이에 의하면 아마 부양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리라.
임상덕(林象德)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비류수(沸流水 혼강(渾江) 상류) 위에서 싸우고 또 양맥(梁貊)에서 싸웠으며, 압록원(鴨綠原)으로 달아나고 남옥저로 달아났다 한다. 사서(史書)에 상고하면, 비류수는 환도(丸都)의 동북쪽에 있고, 양맥은 비류수의 서쪽, 환도의 동북쪽에 있고, 압록원은 환도의 남쪽에 있고, 남옥저는 마땅히 또 압록의 남쪽에 있을 것이니,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지금의 삼수ㆍ갑산ㆍ위원(渭源)의 사이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 설의 고증이 정밀한 것 같다.
【안】 《삼국유사》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인용하여,
“옥저(沃沮)는 장성(長城) 남쪽에 있다.”
하고, 《성경지》에는,
“해성현(海城縣)은 본시 옛날의 옥저국(沃沮國)인데, 동한(東漢)이 도위(都尉)를 설치하고 이내 옥저를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하고, 또,
“《후한서》에는 ‘옥저가 개마산 동쪽에 있다.’ 하고 《일통지》에는 ‘개마산은 조선에 있다.’ 하였으니, 해주(海州)는 그 외읍(外邑)이다.”
하고, 또,
“옥저는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서쪽에 있다.”
하였다.
지금의 해성(海城)은 곧 한(漢)의 안시현(安市縣) 지경이고, 지금의 영해(寧海)는 곧 한의 답씨(沓氏) 지경이다. 서한(西漢)이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할 때 그 영역이 요해(遼海)에까지 이르렀고, 서안평현(西安平縣)이 또 압록강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 요계(遼界)는 아마 압록강으로 한계를 했으리라. 동한에 와서도 또한 그랬다. 또 한이 도위를 설치하고 옥저를 봉하여 후로 삼았다는 등의 일은 모두 낙랑군(樂浪郡) 영동(嶺東)에 있었던 일인데, 《성경지》에서는 그를 이끌어 요동의 일로 다루었으니, 고증이 상세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의 해성을 옛날의 옥저국이라 칭한 것은 또한 반드시 유전된 말일 것이다. 혹 한 무제가 사군(四郡)을 정할 때 옥저의 투항자(投降者)를 이곳으로 옮겨서 그런 전설이 있게 된 것일까?
윤동규(尹東奎)는,
“남옥저는 곧 동옥저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 《후한서》에 분명 셋이 있으니 동일시할 수는 없다.


 

부여고(扶餘考)


《사기》 화식전(貸殖傳)에,
“연(燕)이 북쪽으로 오환(烏桓)과 부여(扶餘)에 인접했다.”
하였으니, 부여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는 오래되었다.
《후한서》에,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 리에 있어 남쪽은 고구려에 접하고, 동쪽은 읍루(挹婁)에 접하고, 서쪽은 선비(鮮卑)에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땅이 사방 2천 리인데, 본시 예(濊) 땅이다. 당(唐)의 가탐(賈耽)은 “잘못이다.” 하였는데, 예고(濊考)에 보인다. 동이(東夷)의 땅이 매우 평창(平敞)하므로 오곡(五穀)을 심기에 알맞다.”
하였다. 진(晋)의 초기 모용씨(慕容氏)에게 패망된 뒤에는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 《북사》에는,
“두막루국(豆莫婁國)은 옛날의 부여국이다.”
하고, 《성경지》에는,
“부여국은 지금 개원현(開原縣) 소재지 경내가 모두 그 땅이다.”
하고, 또,
“그 왕성(王城)은 개원현성(開原縣城) 서남쪽에 있는데, 요(遼)에서 통주(通州)로 고쳤다.”
하였다.
《성경지》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를 상고하여 도로의 이수(里數)를 가지고 계산하면, 부여에서 한(漢)의 요동군과의 거리는 오히려 1천 4~5백 리가 된다. 지금 개원(開原)은 요양(遼陽)과의 거리가 겨우 3백여 리이고 붉은 옥과 아름다운 구슬이 지금 흑룡강(黑龍江) 경내에서 난다고 전하니, 부여부(扶餘府)는 마땅히 변외(邊外) 영고탑(寧古塔) 흑룡강 지경에 있었을 것이다.


 

 

신라강역고(新羅疆域考)


신라는 맨 처음 진한(辰韓)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지금의 경주(慶州)가 바로 그 창업(創業)의 기지이다. 이때 진한과 변한이 거느린 여러 작은 나라들의 존망 여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사서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낙동강(洛東江) 이동에는 이서국(伊西國) 유리왕(儒理王)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청도군(淸道郡)이다.ㆍ압량국(押梁國) 압독국(押督國)이라고도 한다. 지미왕(祗味王)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경산현(慶山縣)이다.ㆍ골화국(骨火國) 조분왕(助賁王)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영천군(永川郡)이다. ㆍ소문국(召文國) 벌휴왕(伐休王)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의성현(義城縣)이다.ㆍ창녕국(昌寧國)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ㆍ장산국(萇山國) 지금의 동래현(東萊縣)이다. 이 있고, 음변벌국(音汴伐國) 경주(慶州) 지경에 있다. 이 있으며, 낙동강 이서에는 감문국(甘文國) 조분왕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개령현(開寧縣)이다.ㆍ사벌국(沙伐國)첨해왕(沾解王)이 그를 취하였는데 지금의 상주(尙州)이다. 이 있고, 또 가락국(駕洛國)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이다. 과 다섯 가야국(伽倻國)이 있어 나누어 다스렸으니, 대가야국(大伽倻國)은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고, 소가야국(小伽倻國)은 지금의 고성현(固城縣), 벽진가야국(碧珍伽倻國)은 지금의 성주(星州), 아나가야국(阿那伽倻國)은 지금의 함안군(咸安郡), 고령가야국(高靈伽倻國)은 지금의 함창현(咸昌縣)이다. 신라가 맨 처음 일어날 적에는 그 땅이 매우 적었는데 후에 다른 땅을 병합하여 국토를 개척하였다. 서쪽은 지리산(智異山)에 이르러 백제와 접하고, 서북쪽은 한강에 이르고, 북쪽은 정천군(井泉郡)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에 이르러 고구려와 접하고, 동남쪽은 바다에 이르러 왜국(倭國)과 통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그러나 서로들 침탈하여 득실이 일정하지 않았으니, 서쪽 경계로 말하면 흘해왕(訖解王)이 벽골제(碧骨提) 지금의 김제군(金堤郡)이다. 를 개설하고, 진흥왕(眞興王)이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부(全州府)이다. 를 설치하였으니, 백제의 동남쪽 군읍(郡邑)이 대개 신라에 많이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진흥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지금의 한양부(漢陽府)이다. 를 설치하고, 선덕왕(善德王) 때 고구려가 와서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다. 을 침략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남쪽이 또한 많이 신라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함에 이르러서는 3면은 바다에 닿고 서북쪽은 다만 고구려의 남쪽 지경을 얻었을 뿐이다. 선덕왕 34년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23년 에 당의 임금이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 땅을 칙명으로 주었으므로 당악(唐岳) 지금의 중화부(中和府)이다.ㆍ토산(土山)지금의 상원부(祥原府)이다. 으로 경계를 삼았다. 뒤에 와서는 패강 북쪽의 땅은 당(唐)에서도 가지지 못하고 발해(渤海)ㆍ말갈(靺鞨)의 점거한 바가 되었다. 동북 예ㆍ맥의 땅이 일찍이 신라에 흡수되매 경계가 정천군(井泉郡)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북쪽 경계는 정천군에 그치고 만 것이다. 경덕왕이 쌓은 탄항관문(炭項關門)은 아마 지금 덕원부 철관(鐵關)의 땅인 듯하다.
《통고》에,
“발해는, 남쪽은 신라에 접하여 이하(泥河)로 경계를 하였다.”
하니, 이하도 아마 덕원부 경내에 있었던 것 같다. 《남사》에,
“신라는 백제 동남쪽 5백 리에 있어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쪽은 고구려에 접하였다.”
하고, 《통전》에는,
“백제ㆍ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어 동쪽은 바다에 닿고, 뒤에 강성하여 서북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들쑥날쑥하였다.”
하고, 《신당서》에는,
“동남쪽은 일본이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인데, 가로는 1천 리, 세로는 3천 리이다.”
하였다.
【안】 이것은 통일된 뒤의 강토를 가지고 말한 것 같으나 너무 과장하였다.


고구려강역고(高句麗疆域考)


위의 고구려현고와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
고구려는 맨 처음 요동 졸본(卒本)의 땅 즉 발해(渤海)의 솔빈부(率賓府)에서 일어나 화주(華州)ㆍ익주(益州)ㆍ건주(建州)를 두었다. 명(明) 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를 두었으니, 지금 심양(瀋陽) 봉천부(奉天府) 흥경(興京)의 땅이 바로 그것이다. 뒤에 국내 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산부(理山府) 강북(江北) 올랄산성(兀剌山城)이 바로 그것이다.
또 환도성(丸都城)이 있어 국내성과 서로 접하였다.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옛땅에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를 두어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환주는 바로 환도의 옛땅이다.
뒤에 도읍을 평양에 정하였으니, 《삼국사기》에,
“맨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 웅거하다가 점점 동쪽으로 패수(浿水)의 곁에 옮겨갔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현고와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동북은 말갈에, 동쪽은 옥저에, 동남쪽은 예ㆍ맥에, 남쪽은 낙랑에, 서쪽은 요동과 현도에, 북쪽은 부여에 접하였다.
그 땅은 양한(兩漢) 때에 비류(沸流)ㆍ행인(荇人)ㆍ개마(盖馬)ㆍ구다(句茶) 네 나라는 모두 지금의 백두산 안팎에 있었다.ㆍ북옥저(北沃沮) 지금의 경성(鏡城) 이북 육진(六鎭) 땅이다.ㆍ동옥저(東沃沮)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永興)ㆍ함흥(咸興) 등의 땅이다. 등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또 북쪽으로 부여의 남쪽 지경을 빼앗고, 낙랑을 침략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이다. 로 경계를 하였으며, 뒤에 또 부여ㆍ낙랑ㆍ대방ㆍ현도ㆍ요동 등의 땅을 병합하여 요서(遼西)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 때에 많이 하였다. 동진(東晋) 말기에 광개토왕이란 묘호(廟號) 또한 영토를 확장한 이유로 얻어졌다. 맨 처음에는 백제와 패수 지금의 평산부(平山府) 저탄(猪灘)이다. 로 경계를 삼았다.
《북사》에,
“위 태무(魏太武) 때 이오(李敖)로 하여금 고구려에 가게 하였는데, 그 땅이 남쪽은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의 부여에 이르고, 인민의 호수는 전위(前魏) 때보다 3배가 된다.”
하였다. 소해는 지금 해주(海州) 이남의 소해인데, 곧장 건너면 충청도 내포(內浦) 등지에 이르게 된다. 《남사》에 또,
“백제는 소해 동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소해란 바로 그것이다. 패수의 하류가 지금의 벽란도(碧瀾渡)로서 소해로 흘러 들어가니, 패수가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뒤에 또 백제를 침략하여 한수(漢水) 이남, 충청도 동북 일대 직산(稷山)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ㆍ괴산(槐山)ㆍ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충주(忠州)ㆍ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영춘(永春) 등 읍(邑)과 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청송(靑松)ㆍ진보(眞寶)ㆍ영해(寧海)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순흥(順興)ㆍ안동(安東)의 임하현(臨河縣)이다. 를 차지하고, 신라를 침략하여 그 북쪽 땅을 빼앗았다.
《북사》에,
“왕은 평양성(平壤城)에 거한다.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지금의 경도(京都)이다. 은 별도(別都)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를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하였다. 이어 그 땅은 동서쪽은 바다에 닿고, 동남쪽은 영(嶺)을 넘어 신라에 접하고, 남쪽은 한수를 건너 수백 리에 뻗쳐서 백제에 연하고, 북쪽은 옛날의 부여에 이르고, 동북쪽은 말갈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넜으니, 강역이 이때에 가장 광대하였다.
쇠망할 무렵에는 수(隋)의 동침(東侵)을 당하고, 신라는 그 빈틈을 노려 5백 리의 땅을 빼앗았으니, 곧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다.ㆍ북한산주(北漢山州)지금의 경도(京都)이다. 등의 땅이 신라에 흡수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요동은 당(唐)에 흡수되더니 곧 망하고 그 땅은 중국에 소속되었는데, 현종(玄宗) 때에 지금 대동강 이북 동북의 땅은 다 발해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그 남쪽 지경을 얻어 한주(漢州)ㆍ명주(溟州)ㆍ삭주(朔州)를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덕원(德原)ㆍ중화(中和) 이남이 바로 그것이다.
《동사찬요(東史纂要)》에,
“그 땅은, 동서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漢江)에 이르고, 북쪽은 요하(遼河)에 이른다.”
한 것은 그 대략을 말한 것이다.
《후한서》에는,
“요동의 동쪽 1천 리에 있어 남쪽은 조선ㆍ예ㆍ맥과 접하고, 동쪽은 옥저와 접하고, 북쪽은 부여와 접하며, 땅은 사방 2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다.”
하고, 《북사》에는,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遼河)를 건너 2천 리에 이르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에 접하여 1천 리나 뻗쳤다.”
하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주몽(朱蒙)의 후손 연(璉)이 비로소 후위(後魏)와 우호를 맺었으며, 그 땅은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를 건너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ㆍ요동ㆍ현도 등 수십 성(城)을 인접하여 모두 관사(官司)를 두었다.”
하고, 《수서(隋書)》에는,
“동서는 2천 리, 남북은 1천 리이며, 수(隋) 때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 리였다.”
하고,
【안】 6천 리는 먼 데서 들은 관계로 사실에 어긋났다.
《당서》에는,
“동쪽은 신라에 접하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서북쪽은 요하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했다.”
하였는데,
【안】 당(唐)의 영주는 지금의 성경(盛京)인 금주(錦州)이다.
《성경지》를 상고하면,
“의주(義州) 광녕(廣寧) 이동, 개원(開原) 이남의 요동 전역이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하였다.
【안】 고구려는 맨 처음 중국의 동북에서 일어났다. 한(漢)은 애제(哀帝)ㆍ평제(平帝) 이후로 호령이 약해지고 거기다 왕망(王莽)과 경시(更始)의 난리 때문에 고구려는 그 틈을 타서 전 강역을 얻었던 것이다. 또 부여는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격파되었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兇奴)인데, 흉노는 오선우(五單于)와 남북선우(南北單于)의 난을 겪고 도망하여 그 땅이 비자, 고구려는 이때를 틈타서 남북으로 침벌(侵伐)하니 국토가 날로 확장되었다. 건무(建武) 때에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을 침략하였다. 이상 4군은 다 한(漢)의 북새(北塞)인데, 흉노의 침공과 고구려의 침략을 당하면 이 4군을 경유한다 하였으니 고구려가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여 점점 서쪽으로 뻗어서 4군과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때문에 고구려가 호(胡)라고 칭하였는데 그 땅은 실로 북쪽에 가까워서 지금의 압록강 동쪽 지대와 처음에는 서로 멀리 막혀 있었다. 뒤에 비록 동방에 군사를 투입시켜 살수(薩水)로 경계를 하였지만 또한 그 나라의 변방이 되는 데에 불과하였다. 그후 삼국(三國)이 중토(中土)와 대치하였는데, 공손강(公孫康)은 해외(海外)에 세력을 떨치고 관구검(毌丘儉)은 환도(丸都)를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결국 약해졌다. 《통전》에,
“고구려가 조위(曹魏) 시대에 이르러 남북의 땅이 점점 줄어들어서 겨우 1천 여리에 불과하였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그 뒤에 모용씨(慕容氏)가 요(遼)의 북쪽에서 일어나 근공술(近攻術)을 사용하매, 고구려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읍하니, 드디어 동방의 나라가 된 것이다. 또 그 뒤에 모용씨가 잔멸하고 풍씨(馮氏)가 와서 투항하고 두 위(魏)가 서로 다투어 중국이 전쟁에 피폐하니, 고구려가 다시 강성하게 되어 이에 국토가 확장되었다. 《통전》에 또,
“수(隨) 때에 이르러 점점 커져서 동서의 땅이 6천 리였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D-001]근공술(近攻術) :

인근(隣近)의 나라를 공격하는

 

고구려제현고(高句麗諸縣考)


아래에 있는 안동도호부고(安東都護府考)와 연관해서 보기 바란다.
○ 지금 《성경지》와 기타 여러 책 중에 참고할 만한 것을 적어서 우리 나라 지리(地理)의 결함을 보충한다.
정주(定州)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도 그대로 따랐는데, 지금의 흥경(興京) 경내이다.
정동현(定東縣) 고구려가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흥경 지경이다.
당산현(當山縣)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는 철리군(鐵利郡)의 땅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승덕현(承德縣) 서남쪽 70리이다.
상암현(霜巖縣) 한(漢) 때의 험독(險瀆)을 고구려가 요집주(遼集州)로 개명하여 봉집현(奉集縣)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승덕현 동남쪽에 봉집보(奉集堡)가 있다.
백애성(白崖城) 당 태종(唐太宗)이 빼앗아 암주(巖州)로 고쳤다. 지금의 요양 주성(遼陽州城) 동쪽 57리에 있는 석성산(石城山) 위에 보루(堡壘)가 있다.
필사성(畢沙城) 지금의 해성현(海城縣) 땅이다.
개소둔(盖蘇屯) 개소문(盖蘇文)이 살던 곳인데, 지금의 해성(海城) 북쪽 30리에 있다.
안시성(安市城) 한(漢) 때의 안시현(安市縣)인데, 지금의 개평현(盖平縣) 동북 70리에 있다.
개모성(蓋牟城) 지금의 개평(盖平) 지경인데, 당(唐)의 이적(李勣)이 쳐서 깨뜨렸다.
개갈모성(蓋葛牟城) 당 태종이 개주(蓋州)로 고치고 발해도 그대로 따르다가 뒤에 진주(辰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개평현 땅이다.
건안현(建安縣) 한(漢) 때의 평곽현(平郭縣)인데, 지금의 개평현 서남쪽에 있다.
【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이적(李勣)이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安市)는 북쪽에 있으니, 지금 안시를 넘어서 건안을 친다면 적이 우리의 양도(糧道)를 끊을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한 것이 곧 이 현(縣)이다.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땅이다. 《통감》에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칠 때 군사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한데 대한 주에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인데, 남쪽은 산동(山東)에 닿고 북쪽은 남소성ㆍ목저성(木底城)에 접했다.’ 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7년 하4월에 왕이 신성에 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하였고, 김씨(金氏 김부식(金富軾))는 ‘신성을 어떤이는 「 나라의 동북에 있는 큰 진(鎭)이다.」한다.’ 하였고, 《성경지》에는 ‘소정방(蘇定方)이 신성에 이르러 크게 무찔렀는데, 지금의 광녕현(廣寧縣) 경내에 있다.’ 하니,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남소성(南蘇城)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땅에 있으니, 《한서》 지리지에 보인, 현도군 고구려현 남소수(南蘇水)와는 같지 않다. 《통감》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를 쳐 남소를 빼앗았다.’ 하고 그 주에, ‘남섬(南陝)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 어떤이는 ‘지금의 금주(金州)에 있다.’ 하였다.
목저성(木底城)ㆍ창암성(蒼巖城) 두 성은 다 지금의 금주(金州) 경내인데, 금주는 곧 영해현이다.
막힐부(鄚頡府) 막주(鄚州)와 고주(高州)를 관할하였다. 발해도 그대로 따랐는데,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서북 땅에 있다.
동산현(銅山縣) 요(遼) 때에는 함주(咸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철령현(鐵嶺縣)이다.
영녕현(永寧縣) 요 때에는 영창현(永昌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철령현 남쪽 경계에 있다.
경주(慶州)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인데, 발해 때에는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를 삼았다.
○ 지금 봉황성(鳳凰城) 산위에 옛성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석성(石城)에서 싸웠다는 곳이 바로 이 땅이다.
박작성(泊汋城) 《당서》 지리지에 ‘안동부(安東府) 남쪽에서 압록강 박작성에 이르는 7백 리는 옛날의 안평현(安平縣)이다.’ 하였다.
오골성(烏骨城) 《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군신(郡臣)들이 「오골성을 뺏은 다음 압록강을 건너서 곧장 평양을 취하자.」 청하니, 장손 무기(長孫無忌)가 「만일 오골성으로 향하면 건안현(建安縣) 신성(新城)의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밟을 것이니, 먼저 안시성과 건안현을 취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하고, 그 주에 ‘등주(登州) 동북쪽 바다로부터 가서 해연(海壖)을 지나 오골강(烏骨江)에 이른다.’ 하였다.
【안】 지금의 봉황성 연해 지경인 듯하다.
대행성(大行城) 《통감》에 ‘이적(李勣)이 대행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나아가 압록책(鴨綠柵)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요성(遼城) 지금의 요양(遼陽)인 듯하다.
가물(哥勿)ㆍ대나(代那)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제북(諸北)ㆍ배한(拜漢) 다 자세히 알 수 없다.
식리(識利) 철리(鐵利)로서 곧 지금의 승덕(承德) 등의 지경인 듯싶다.
불날(拂涅) 지금의 개원(開原) 등의 지경이다.
월희(越喜) 지금의 철령현 지경이다.
【안】 철리ㆍ불날ㆍ월희는 모두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 말갈고(靺鞨考)에 보인다. 《성경지》에는 ‘요동 땅에 있다.’ 하였는데, 상고한 것이 자세하지 못한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제부(諸部)를 평정한 다음 그곳 사람을 요동 땅에 옮기고 그대로 옛날의 이름을 칭했으며, 발해 또한 그대로 불렀던가? 이것은 알 수 없다.
위락(衛樂)ㆍ사리(舍利)ㆍ거소(居素)ㆍ거차(居且)(《당서(唐書)》에는 차(且)가 단(旦)으로 되어 있다)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부고(安東府考)에 보인다.
책성(柵城) 《삼국사기》에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발해국(渤海國)의 남해(南海)ㆍ압록(鴨綠)ㆍ부여(扶餘)ㆍ책성의 4부(府)는 다 고구려의 옛땅이다. 신라 정천군(井泉郡)에서 책성부(柵城府 지금의 훈춘(琿春)이다)까지 대범 39역(驛)이다.」 했다.’ 하였다. 정천(井泉)은 지금의 덕원(德源)이다. 당(唐)의 제도에서는 30리를 1역(驛)으로 하였다.
【안】 책성은 바로 발해의 용원부(龍原府)로서 지금의 봉황성이다. 고구려 태조왕 46년에 동쪽으로 책성에 순행했다 하였으니,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인데, 동쪽으로 순행했다 하였으매, 책성은 따로 그 땅이 있었던 것 같다.
부여성(扶餘城) 옛날 부여의 왕성(王城)이다. 고구려는 왕성을 부여성으로 고치고 요(遼)는 통주(通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개원현성(開原縣城) 서남쪽에 있다. 당의 설인귀가 고구려를 금산(金山)에서 깨뜨리고 승세(勝勢)를 타서 부여성을 쳐 빼앗았다.
○ 부여고(扶餘考)에 보인다.
노양산(魯陽山)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있다. 《통전》에는 이하가 모두 같다.
○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노성(魯城) 노양산(魯陽山)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위산(葦山) 노성 서남쪽 20리에 있어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대요수(大遼水) 수원(水原)이 말갈국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는데, 지금의 요하(遼河)이다.
소요수(小遼水) 요산(遼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홀러 대요수와 합치는데,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대량수(大梁水) 나라의 서쪽에 있다.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소요수ㆍ태자하(太子河)로 흘러든다.
마자수(馬訾水)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하며, 수원이 동북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다. 요동과의 상거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경과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커서 너비가 3백 보(步)나 된다. 그 나라는 이것을 믿어 천참(天塹)으로 삼았는데, 평양성 4백 50리, 요수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 염난수는 지금 동가강(佟家江)이라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는 파저강(婆猪江)이라 칭한다.


백제강역고(百濟疆域考)


온조(溫祚)가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하자, 마한(馬韓)이 동북쪽 1백 리의 땅을 떼어 봉해 주니, 위례성(慰禮城) 《삼국유사》에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이다.” 하였다. 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얼마 후에 한산(漢山) 밑 지금의 광주부(廣州府)이다. 으로 옮기고 드디어 강역을 정하였는데, 남쪽은 마한에 접하여 웅천(熊川)지금의 공주(公州) 지경이다. 에 이르렀고, 서쪽은 대해(大海), 동쪽은 주양(走壤),
【안】 주양은 모든 사서에 다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상고하면,
“신라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일명 질암성(迭巖城)을 쌓았다.”
하였다. 수약주는 지금 춘주(春州)이니 그 땅을 상상할 수가 있다.

북쪽은 패하(浿河)지금 평산부(平山府)의 저탄(猪灘)이다. 에 이르렀더니, 뒤에 또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동쪽은 신라에 접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경계를 하였다. 그리고 지금 진주(晋州)가 일찍이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었던 것으로 볼 때 신라의 서남쪽 읍(邑)이 또한 백제에게 흡수되었던 것이다.
북쪽은 처음에 패하로 경계를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23년, 즉 비유왕(毗有王) 9년에 위(魏) 나라의 사신 이오(李敖)가 고구려에 이르러 그 땅을 돌아볼 적에, 남쪽은 소해(小海)에 이르렀다 하였다. 소해는 곧 패수가 들어가는 바로 그 바다이니, 이때 패수 남쪽은 오히려 백제의 땅이었던 것이다.
뒤에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지금의 한양부(漢陽府)이다. 을 쳐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매 태자인 문주왕(文周王)이 남쪽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때부터 한성의 남북쪽이 고구려에게 흡수된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武寧王)이 다 한성에 행행하였고, 성왕(聖王) 때 고구려가 예(濊)와 함께 한성 북쪽의 독산성(獨山城)을 치기를 꾀하였으며, 또 고구려가 군사를 내어 패수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아마 서로 번갈아 침탈하였던 모양이다. 백제가 망하자 신라가 그 땅을 병합하여 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 등 3주(州)를 두었으니, 지금의 양호(兩湖)가 바로 그것이다. 《동사찬요(東史纂要)》에,
“그 땅이 동쪽은 지리산(智異山)에 이르고, 서남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북쪽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한 것은 그 대략을 말한 것이다. 《북사》에,
“백제는 마한의 무리로서 비로소 나라를 대방(帶方)의 옛땅에 세웠으니, 동쪽은 신라에 닿고, 서쪽과 남쪽은 대해(大海)에 닿고, 소해(小海) 남쪽에 처하였으니, 동서는 4백 50리, 남북은 9백여 리이다.”
하였다.
【안】 소해는 지금 충청도 당진(唐津)ㆍ면천(沔川) 등의 북쪽으로, 소해를 건너면 곧장 황해도 해주(海州)ㆍ장연(長淵) 등지에 이르게 된다. 그 바다가 작기 때문에 소해라고 칭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북사》를 인용하여,
“북쪽은 한강에 닿다[北際漢江].”
하였으나, 지금 《북사》를 상고하면 이 네 글자가 없으니, 아마 김씨가 자기 생각으로 덧붙인 것인 듯하다. 《통전》에는,
“남쪽은 신라에 접하고 북쪽은 고구려와 상거가 1천여 리이다.”
하고, 《당서》에는,
“서쪽은 월주(越州)에 경계하고 남쪽은 왜국(倭國)이니, 서쪽과 남쪽은 국경이 모두 바다를 건넜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하였다.
【안】 지금 서호(西湖)ㆍ영척(嶺脊)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호서(湖西)의 보은(報恩)ㆍ청산(靑山)ㆍ황간(黃磵)ㆍ영동(永同)ㆍ옥천(沃川)은 바로 신라의 땅이고, 청안(淸安)ㆍ진천(鎭川)ㆍ충주(忠州)ㆍ괴산(槐山)ㆍ연풍(延豊)ㆍ음성(陰城)ㆍ단양(丹陽)ㆍ영춘(永春)은 바로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다툰 지대이고, 호남(湖南)에서 운봉(雲峯)ㆍ무주(茂朱)와 그 소속의 폐현(廢縣)인 무풍(茂豊)이 또한 신라의 땅이며, 그 나머지는 백제의 땅이다.


졸본고(卒本考)


졸본(卒本)은 곧 발해 대씨(渤海大氏)의 솔빈부(率賓府)이다. 솔빈부는 화주(華州)ㆍ익주(益州)ㆍ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성경지》에,
“솔빈부와 화주ㆍ익주는 다 봉황성의 관할 경내에 있고, 익주는 봉황성 동남쪽 1백 20리에 있으며, 조선 지역 의주(義州)의 압록강을 또한 익주강(益州江)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상상할 수가 있다. 《성경지》에 또,
“건주(建州)는 명(明)이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였으니 지금 흥경(興京)이 바로 그곳이다.”
하고, 또,
“영길주(永吉州)는 요(遼)가 솔빈부를 설치하였으니, 본래는 솔빈국(率賓國)이며, 금(金)에서는 휼품로(恤品路)로 고쳤는데, 지금 흥경 동남쪽 변방에 있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영길주의 남쪽 지경으로부터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옛날 졸본국(卒本國)의 지역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통전》에 ‘주몽(朱蒙)이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보술수(普述水 지금의 혼강(渾江) 지류(支流)이다)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 지금의 환인(桓仁) 지방이다)에 이르러 도읍하였다.’ 하고, 《북사》에도 같다. 《고기》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한 곳인 것 같다. 《한서》 지리지에는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에 무려(無慮)가 있다.’ 하였는데, 무려는 《주례(周禮)》에서 말한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요(遼)가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현도군의 속현 중의 하나이니, 〈주몽이 도읍하였다는 흘승골성과 졸본은〉 대개 한(漢) 때 현도군의 경내요, 요국(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니, 《한서》 지리지에 말한 현도군의 속현인 고구려가 혹시 이것인가?” 김씨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고구려현은 요동 동북쪽 즉 지금의 무순(撫順) 지역에 있으니, 여기서 ‘요국의 서쪽에 있다.’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하물며 졸본과 고구려현은 본래 서로 같지 않음에랴?
《삼국유사》에,
“졸본을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천(成川)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은 요동(遼東) 현도(玄菟)의 지경에 있는데, 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한다.”
하고, 또,
“흘승골성은 대요(大遼)의 의주(醫州)에 있다.” 《삼국유사》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화주는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요, 영흥부에는 비류수(沸流水)가 있으므로 아마 이것을 가지고 졸본이라 한 것이리라. 성주(成州)는 지금의 성천인데, 성천을 졸본이라 한 것을 《삼국유사》에서는 잘못이라 하였다. 《여지승람》에서도 지리에 대해서는 흔히 《삼국유사》를 따랐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성천을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하고, 비류강(沸流江)을 졸본강(卒本江)이라 하였다. 또 흘골산성(紇骨山城)이 있는데,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쌓았다.’ 하였으니, 그 설은 아마 《고려사》를 따른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에 “성주는 본시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하였다.
한번 성천이 졸본이란 말이 있게 되면서부터 산천 이름을 모두 비슷하게 지어서 그 일을 사실화시켰는데, 후인들은 다시 상고해보지 않고 그대로 잘못을 전하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졸본이 요동 현도의 지경에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사실을 얻은 것이요, 동진(東眞)은 고려 고종 때 북방에서 일어나 그 땅이 백두산 안팎을 포괄하였으니, 지금의 흥경 등지가 다 그 경내이다.
흘승골성이 의주에 있다고 한 것은 김씨의 설이 잘못을 이어받은 것인데, 그 말이 또한 모순된다. 한(漢)ㆍ위(魏) 때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항시 현도를 경유하고, 고구려가 중국에 품명(禀命)할 때도 항상 현도를 경유하였으니, 그 지역이 서로 가까웠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지금의 성천을 졸본이라 한다면, 이때 한(漢)의 낙랑군치가 평양에 있어, 성천과의 거리가 1백 리도 못되었으니, 고구려가 어찌 낙랑에 속하지 않고 현도에 속하였으며, 낙랑 또한 어찌 남으로 하여금 지척의 땅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겠는가?
지금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이 바로 옛날의 살수(薩水)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한 광무가 살수 이남은 한(漢)에 속하고, 이북은 고구려에 속하게 했다. 태조왕(太祖王) 때 지계(地界)를 논하되 남쪽은 살수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고구려가 살수 북쪽 땅에 있었음이 더욱 명백하다.


국내위나암성고(國內尉那巖城考)


유리왕(瑠璃王)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 지금의 동구산성자(洞溝山城子)이다)을 쌓았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는,
“이산군(理山郡) 북쪽 2백 70리에 올랄산성(兀剌山城)이 있다. 압록(鴨綠)ㆍ파저(婆猪) 두 강 사이, 큰 들 가운데 있는데 사면이 벽처럼 높이 솟았다.”
하고,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19년 조에,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올오첩목아(李兀吾帖木兒)가 올랄산성에 의거하였다.”
하고 유계(兪棨)는,
“이것이 옛날의 위나암성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음(漢音)에 ‘兀剌’과 ‘尉那’가 음이 같으니 그 말이 근리하다. 《삼국사기》에 보인 이적(李勣)의 주문(奏文)에,
“압록강 이북의 항복한 성(城) 중에 국내성(國內城)이 그 하나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여기까지는 17역(驛)이다.”
하고, 《통전》에도,
“압록강은 국내성 남쪽을 경과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한다음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 지금의 안평하(安平河) 유역)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두 설에 의하면, 그것이 압록강 북쪽에 있어 올랄성(兀剌城)으로 전하였음이 분명하다. 염난수는 곧 파저강이니,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국내(國內)라고 한 것은 아마 졸본 기내(畿內)의 땅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리라. 교시(郊豕)가 놓여 달아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얻었으니, 돼지가 아무리 달려서 도망했다 한들 능히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천 리나 백 리의 먼 거리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국내 위나암성이 졸본과 서로 가까웠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인주(獜州)를 국내라 한 것은 아마 후에 따로 둔 것이리라. 《삼국사기》에,
“《괄지지(括地志)》에 국내를 불내성(不耐城)이라 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의 낙랑 동부(樂浪東部)에 있는 불이현(不而縣)은 딴 이름이니, 이것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주D-001]교시(郊豕)가 놓여 달아남으로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조에 “교시(郊豕 :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놓여 달아나매, 왕이 희생(犧牲)을 맡은 설지(薛支)를 시켜 뒤를 쫓아가게 하여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잡았다.” 하였다.

 

환도고(丸都考)


《고구려기》의 주(注)에서 《괄지지》를 인용하여,
“환도(丸都)와 국내성은 서로 접하였다.”
하고, 《당서》 지리지에도,
“압록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간 다음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汋口)곧 옛날의 안평현(安平縣)이다. 에 이르면 발해(渤海)의 지경이고, 또 5백 리를 거슬러올라가면 환도에 이른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안시(安市)를 환도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위(魏) 정시(正始) 7년(244)에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부터 군사를 출동하여 비류수(沸流水)를 건너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한다. 비류는 지금의 파저강인 듯하니, 그것이 국내성과 서로 접했음을 믿겠으며, 지금의 강계(江界)ㆍ이산(理山) 등 강북의 땅에 있었던 것이다. 《요사》지리지에,
“녹주(淥州)는 본래 고구려의 고국(故國)인데, 발해가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라 불렀으며,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환주가 곧 환도이기 때문에 고국이라 한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영변부(寧邊府)의 검산(劒山)이 곧 옛날의 환도이다.”
하였는데, 대개 방언에 칼을 환도(環刀)라 칭하므로 또한 억측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비류수고(沸流水考)


《고구려기》에,
“주몽(朱蒙)이 졸본천에 이르러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상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는데, 곧 송양(松讓)의 옛 도읍이다.”
하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성주(成州)는 본래 비류국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하고, 《여지승람》도 그대로 따랐으니, 모두 잘못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북쪽으로 부여를 칠 때 비류수 위에 주둔했다 하고, 또 위(魏)의 관구 검이 현도로부터 군사를 출동하여 고구려를 비류수 위에서 무찌르고 드디어 환도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한다. 관구 검이 올 때 먼저 비류수를 건너고 그 다음 환도에 이르렀으니, 비류수가 환도 북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환도가 이미 이산ㆍ강계 등 강북의 땅이고 보면 비류수는 바로 지금의 파저강인 듯하다.
【안】 《요사》에,
“정주(正州)는 녹주(淥州) 서북쪽 3백 80리에 있는데, 발해 때의 압록부로서 본래 비류국왕의 옛 도읍이다. 비류수가 있으므로 발해 때에 비류군(沸流郡)을 두었다.”
하였는데, 한구암(韓久庵 구암은 한백겸(韓百謙)의 호)이,
“비류수는 지금의 적강(狄江)인 듯하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동국병감(東國兵鑑)》에는,
“관구 검이 비류수에서 싸웠다.”
한 데 대한 그 주에,
“지금의 영흥부(永興府) 정변사(靜邊社)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 또한 잘못인 듯하다.

파저강이 《성경지》에는 동가강(佟家江)으로 되어 있고, 《당서》에는,
“압록강이 서쪽으로 염난수와 합하여 남쪽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백두산의 여러 냇물이 남쪽으로 흘러 모아 큰 강이 된 다음 다시 동가강과 합하여 5백여 리를 흐른 뒤에 봉황성 동남쪽을 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동가강은 분명히 염난수이다.


행인 개마 구다국고(荇人蓋馬句茶國考)


고구려 동명왕 6년에 태백산 남쪽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대무신왕 9년에 개마국(蓋馬國)을 취하니, 구다왕(句茶王)이 두려워서 항복했다 한다.
상고하건대, 태백산은 곧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니, 지금의 백두산이다. 개마대산이란 칭호는 아마 그 나라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에 있는 서개마현(西蓋馬縣)도 또한 이 산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으리라. 구다(句茶)도 개마국의 이웃이다. 《여지승람》에는 묘향산(妙香山)을 태백산, 성천을 졸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상고할 수 없는 지명을 모두 부기(附記)하니, 이 책을 보는 자는 상고하기 바란다.


 

황룡국고(黃龍國考)


황룡국(黃龍國)은 요지(遼地) 동북쪽 지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졸본은 지금 흥경 등지이고 황룡국과 졸본은 이웃 나라라고 칭하였으니,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용강(龍崗)은 옛날의 황룡국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도 그대로 따랐다. 무릇 지명이 서로 같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억지로 이렇게까지 부회(傅會)하여 실지로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은 무엇 때문인가?
《통전》에,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칠 때 군사들이 많이 병에 걸렸으므로 황룡으로부터 동쪽에 해골이 연달았다.”
하였으니, 요계(遼界)에도 이미 황룡이란 이름이 있었다. 지금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을 또한 황룡부(黃龍府)라 칭하니, 요(遼)가 발해를 칠 때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금사(金史)》에,
“태조(太祖)가 요를 칠 때 황룡성(黃龍城)을 정복하였다.”
하고, 악비(岳飛)가 이른바,
“황룡주(黃龍酒)를 잔뜩 마셨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황룡국과는 다른 것이다.


살수고(薩水考)

고구려기에,
“한 광무가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살수 이남은 한(漢)에 붙였다.”
하였다.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는 한 광무의 말기에 해당하는데, 그 국토가 동쪽은 창해(滄海)에, 남쪽은 살수(薩水)에 이르렀으니, 아마 고구려는 북쪽에 있고 낙랑은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살수로 경계를 했으리라.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살수 이북이 한에 속하였다.”
하여 남(南)을 북(北)으로 고쳤으니, 세밀히 상고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고친 것이리라.
수(隋)가 우리 나라를 침략할 때 우문술(宇文述)이 압록강으로부터 전진하여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진영(陣營)을 설치했다〉 하고, 그 하문(下文)에 또,
하였으니, 살수가 평양의 북쪽에 있어 지금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임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청천강은 옛날 살수라 칭하였는데, 곧 을지 문덕(乙支文德)이 수 나라 군사 1백만 명을 깨뜨렸던 땅이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살수를 지분 미상(地分未詳)의 항목에 넣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는 다만 신라의 기록만 의거하였는데, 신라의 땅은 다만 고구려의 남쪽 지경만을 얻었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것은 모두 약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살수를 어떤 이는 지금의 대동강이라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삼국유사》는 고려 중엽의 중 무극(無極 일연(一然)의 호)이 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도 살수에 정해진 이름이 없었는데, 지금 청천강을 살수라 한 것은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국초(國初) 조준(趙浚)의 청천강(淸川江) 시에,
수의 군사 백만이 물고기로 화했구나 / 隋兵百萬化爲魚
하였으니, 고려 말기부터 이미 그랬던 것이다. 신라기 소지왕 16년 조에,
“고구려와 살수의 원야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와 견아성(犬牙城)을 지켰다.”
하였다. 견아성은 곧 구아(狗牙)로 지금의 삼등현(三登縣)인데 대동강 상류에 위치한다. 이에 의하면 대동강을 또한 살수라고도 칭했으니 《삼국유사》의 말이 혹 옳은 듯하다.

[주D-001]우문술 …… 쳤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조에 보인다.

 

 

가라 임나 모한 휴인 주호고(加羅任那慕韓休忍州胡考)


《통전》에,
“신라가 가라(加羅)ㆍ임나(任那) 등의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하였고, 《북사》에,
“신라가 가라국(迦羅國)에 부용(附庸)했다.”
하였고, 《남사》 왜전(倭傳)에,
“송(宋)ㆍ제(齊) 때에 다 왜왕(倭王)을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로 봉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진한은 진한(辰韓)을 가리키고, 모한은 마한(馬韓)을, 가라는 가락(駕洛)을 가리키니 음이 비슷해서 잘못 전한 것이고, 임나는 가야(伽倻)를 가리키니 글자가 서로 비슷해서 잘못 분간한 것이리라.
다시 상고하건대 《삼국사기》 강수전(强首傳)에,
“신(臣)은 본래 임나 가량(加良) 사람이다.”
하고, 사서(史書)에서는 또 강수(强首)를 중원경(中原京) 사량(沙良) 사람이라 하였다. 중원경은 지금의 충주(忠州)이니, 그렇다면 임나국은 곧 충주라 하겠다.
휴인국(休忍國)은 《일통지》에,
“휴인은 신라 동쪽에 있으니, 또한 삼한의 무리이다. 동진 때에는 연(燕)에 속했더니, 진(秦)이 연을 멸망하자 결국은 진에 속하였다. 부낙(苻洛)이 반역할 때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휴인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했다 한다. 그 뒤에 휴인은 백제에 병합되었다.”
하였는데, 지금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다.
주호국(州胡國)은 《후한서》에,
“마한(馬韓) 서쪽 해도(海島) 위에 주호국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키가 단소하고 대머리이며 갈대로 만든 옷을 입는데, 웃옷은 있어도 아래 옷은 없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배타고 왕래하며 한(韓)에서 무역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다.


 

말갈고(靺鞨考)


정안국(定安國)에 대한 것을 붙인다.
말갈(靺鞨)을 옛날에는 숙신(肅愼)이라 하고, 한(漢)ㆍ위(魏) 때에는 읍루(挹婁), 남북조(南北朝) 때에는 물길(勿吉), 수(隋)ㆍ당(唐) 때에는 말갈이라 하였다. 《통전》에,
“물길과 말갈은 음이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오대(五代) 이후에는 비로소 여진(女眞)이라 하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비록 같으나 종락(種落)이 교대로 일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중국에서 그를 칭하는 것도 이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세 나라는 양한(兩漢) 시대에 해당하는데, 그를 말갈이라 한 것은 생각건대, 세 나라의 역사 편찬이 후세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칭한 것에 따라 말한 것이리라.
《문헌통고》에,
“읍루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으니, 곧 부여(扶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어 동쪽은 대해(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는데, 그 북쪽의 국경이 끝난 곳은 알 수가 없다.”
하였는데, 불함산은 지금의 백두산이다. 《북사》에는,
“물길은 고구려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읍락(邑落)에 각각 장(長)이 있어 서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 나라에 큰 강이 있어 넓이가 3리쯤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速末水)라 하였다. 그 부족에는 7종(種)이 있는데, 1. 속말부(粟末部)는 고구려와 접하고 2. 백돌부(伯咄部)는 속말 북쪽에 있고 3. 안거골부(安車骨部)는 백돌 동북쪽에 있고, 4. 불날부(拂揑部)는 백돌 동쪽에 있고 고려 현종 때 여진(女眞) 편에 토산물을 바쳐 왔다. 5. 호실부(號室部)는 불날 동쪽에 있고 6. 흑수부(黑水部)는 안거골 서북쪽에 있고 7. 백산부(白山部)는 속말 동남쪽에 있다. 불날 이동은 화살이 모두 석촉(石鏃)이니, 곧 옛날의 숙신씨(肅愼氏)이다.”
하였는데, 속말은 곧 지금의 혼동강(混同江)이고, 백산은 곧 백두산이다.
당(唐) 때에는 흑수(黑水) 서북쪽에 또 사모부(思慕部)가 있고, 약간 북쪽에 나리부(那利部)가 있고, 그 동북쪽에 굴설부(窟說部)가 있고, 약간 동남쪽에 막예부(莫曳部)가 있었는데, 모두 능히 중국과 통교하지 못했고, 또 우루(虞婁)ㆍ월희(越喜)《통전》에 “안동부(安東府) 소재지는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 하면서 “동쪽으로 월희 부락에 이르는 거리는 2천 5백 리이다.” 했으니, 그 땅은 아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동쪽에 있었는 듯하다.ㆍ철리(鐵利) 고려 현종 때 세 차례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고, 덕종 때 또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으니, 그 땅이 아마 여진 동북쪽에 있었던 것 같다. 등 여러 부락이 있다. 그 땅은 남쪽은 발해에 닿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에 임하고, 서쪽은 실위(室韋)에 이르렀으며, 남북이 2천 리요, 〈동서가 1천 리인데〉 수시로 중국과 통교하였다. 발해가 강성할 때에 이르러서는 말갈이 다 발해에 예속하였다 하였는데, 상고하건대 중국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말갈의 부락들은 모두 북쪽 땅에 있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일어났으니 국경이 서로 접하여 있었을 터이고,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한수 남쪽 삼한(三韓)의 땅에 있었으니 남북이 현격하게 달랐다. 또 고구려ㆍ낙랑ㆍ옥저ㆍ예ㆍ맥이 중간에 있었는데, 말갈이 어떻게 여러 나라를 넘어와서 〈신라와 백제를〉 침범하였겠는가? 사서가 비록 궐문(闕文)된 것이지만 혹 여러 나라에서 그것을 인용해서일까, 아니면 그 부락들이 매우 많아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그 종락이 하나뿐이 아니었으므로 마치 맥국(貊國)이 지금의 강원도에 있고 또한 양맥(梁貊)ㆍ소수맥(小水貊)의 한 종락이 변방 지경에 있는 것과 같았던 것일까?
《삼국사기》를 상고하면, 백제가 가장 그 화를 입었으니, 온조(溫祚)가,
“말갈은 우리 북쪽 지경에 연해 있다.”
하였다. 신라도 자주 그 해를 입었으므로 일성왕(逸聖王)이 일찍이 가서 치려고 하였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는 지경이 말갈에 연했다.”
하였는데, 만일 그 땅이 현격하게 떨어져 있었다면 어찌 지경이 연했다 할 수가 있겠는가?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일찍이 말갈을 습격하여 석문성(石門城)을 취하였으니, 그 땅을 나눈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중국으로 말하면 춘추 때에 회(淮)ㆍ서(徐)의 오랑캐도 있고, 이락(伊洛)ㆍ육혼(陸渾)의 오랑캐도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그것과 같다. 지금 홍천현(洪川縣) 북쪽 50리의 춘천(春川) 지경에 말갈산(靺鞨山)이 있고, 우리 나라 촌리(村里)의 이름에 또한 말갈이란 것이 더러 있으니, 모두 옛날 말갈이 살았던 까닭으로 칭한 것일까? 최씨(崔氏)가 이른바,
“혹 한 종족이 옥저와 예ㆍ맥의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한 것이 또한 그럴듯하다.
상고하면, 《후한서》에,
“읍루 사람은 배 타고 약탈하는 일을 좋아한다.”
하고, 《통전》에,
“읍루는 배를 잘 타고 도둑질을 좋아하므로, 이웃 나라가 그를 걱정했다.”
하고, 또,
“당(唐)이 일찍이 말갈을 시켜 바다를 건너 신라의 남쪽 지경을 침략했다.”
하고, 또 《고려사》에,
“현종 9년에 동여진이 청하(淸河)ㆍ연일(延日)ㆍ장기현(長鬐縣)을 침략하고, 18년에 평해(平海)ㆍ고성(高城) 등지를 침략했다.”
하였으며, 그후 배를 타고 침략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 보면 바다를 건너 전쟁하는 것은 또한 그들의 가장 능한 재주로, 그 속도는 철기(鐵騎)가 삽시간에 왔다갔다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바다를 방비하는 계책(計策)은 왜(倭)만을 위해서 할 것이 아니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 정안국(定安國)은, 고려 현종 9년에 정안 사람 골수(骨須)가 도망쳐 왔다 하였는데, 이 말은 현종기(顯宗紀)에 보인다. 그 땅은 아마 옛날 부여의 동남쪽 땅에 있었는 듯한데,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다. 삼한후설(三韓後說)에 자세히 보인다.


 

[주D-001]불날부(拂揑部) : 《북사》 물길전(勿吉傳)에는 날(揑)자가 날(涅)로 되어 있다.
[주D-002]그 땅은 …… 예속하였다 : 《당서(唐書)》 흑수발해전(黑水渤海傳)에 보인다.

 

발해국 군현고(渤海國郡縣考)


《문헌통고》에,
발해는 바로 고구려의 옛땅 곧, 영주(營州)의 2천 리인데,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여 이하(泥河)로 경계를 하였으며 -아마 지금의 덕원(德源)인 듯하다.-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이다.”
하였다.
○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에는,
“발해국의 남해(南海)ㆍ부여(扶餘)ㆍ책성(柵城)ㆍ압록(鴨綠)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이다. 신라의 정천군(井泉郡)-지금의 덕원(德源)-으로부터 책성부(柵城府)에 이르는 거리는 대범 39역(驛)이다.”
하였다.
【안】 당의 제도에서 30리에 역을 두었으니 39역은 곧 1천 1백 70리가 된다. 지금 《당서》로 주본을 삼고 《성경지》로 주를 달되, 《당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성경지》로 보충하고, 그 중에 미상한 것은 궐하였으니 그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그 나라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있었다.
○ 숙신(肅愼)의 옛땅으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지금의 혼동강 서쪽에 있다. 를 삼아 용주(龍州)지금은 미상ㆍ호주(湖州)ㆍ발주(渤州)이상 2주(州)는 모두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땅이다.
○ 주 안에는 또 무창(武昌)ㆍ정무(定武) 등 2현(縣)이 있는데 발해(渤海)가 설치한 것이다.
등 3주(州)를 거느렸다.
○ 그 남쪽으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지금의 광녕(廣寧)ㆍ의주(義州) 지경이다. 를 삼아 노주(盧州)지금의 개평(蓋平)ㆍ영해(寧海) 지경이다.
○ 지금 웅악현(熊岳縣)이 개평현 서쪽 60리에 있어 곧 발해의 삼로군(衫盧郡) 땅인데, 산양(山陽)ㆍ노주(盧州)ㆍ한양(漢陽)ㆍ백암(白巖)ㆍ상암현(霜巖縣)을 거느렸다.
○ 백암현(白巖縣)은 고구려의 백애성(白崖城)으로 당 태종이 암주(巖州)로 고쳤는데, 지금 요양주성(遼陽州城) 동쪽 57리에 있다. 석성산(石城山) 위에는 옛날 보루(堡壘)가 아직도 남아 있다.
○ 상암현(霜巖縣)은 한(漢) 나라 때의 험독(險瀆)인데, 고구려(高句麗)가 상암(霜巖)으로 고치고, 발해(渤海)가 또 집주(集州)로 고쳐 봉집(奉集) 1현(縣)을 거느리게 하였다. 봉집현에는 혼하(渾河)가 있다. 상암현은 지금의 승덕현(承德縣)에 있다.
○ 또 진주(辰州)는 고구려의 개갈모성(盖葛牟城)인데, 당 태종이 개주(蓋州)로 고치고, 발해도 그대로 따르다가 또 진주로 고쳤다.
○ 장녕현(長寧縣)은 한(漢)의 평곽현(平郭縣)이다. 대인수(大仁秀)에 이르러 흥요현(興遼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개평현(盖平縣) 지경에 있다.
현주(顯州)지금의 광녕현(廣寧縣)이다.ㆍ철주(鐵州) 한(漢)의 안시(安市) 땅인데, 발해가 주(州)를 두어 위성(位城)ㆍ하단(河端)ㆍ창산(蒼山)ㆍ용진(龍珍) 등 4현을 거느리게 했으며, 지금의 개평현(盖平縣)이다.ㆍ탕주(湯州)한(漢)의 양평(襄平) 경계인데, 요동경(遼東京) 서북쪽 1백 리에 있다.ㆍ영주(榮州) 지금은 미상ㆍ흥주(興州)지금의 철령현(鐵嶺縣) 남쪽 의로참(懿路站)인데, 요(遼)가 읍루현(挹婁縣)을 두었다. 등 6주를 거느렸다.
○ 예(濊)ㆍ맥(貊)의 옛땅으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 지금의 봉황성(鳳皇城)이다.-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를 삼아, 경주(慶州)고구려가 두었다. 발해도 그대로 따르고 경(京)을 두었는데, 지금의 봉황성이다. ○ 용원(龍原)ㆍ영안(永安)ㆍ오산(烏山)ㆍ벽곡(壁谷)ㆍ웅산(熊山)ㆍ백양(白楊) 등 6현을 거느렸다.
ㆍ염주(鹽州) 용하군(龍河郡)을 두어 해양(海陽)ㆍ접해(接海)ㆍ격천(格川)ㆍ용하(龍河) 등 4현을 거느렸다. 지금의 봉황성 지경이다.ㆍ목주(穆州)회농군(會農郡)을 두어 회농ㆍ수기(水岐)ㆍ순화(順化)ㆍ미현(美縣) 등 4현을 거느렸다. 지금의 봉황성 지경이다.ㆍ하주(賀州)길리군(吉理郡)을 두어 홍하(洪河)ㆍ송성(送誠)ㆍ길리(吉理)ㆍ석산(石山) 등 4현을 거느렸다. 지금의 봉황성 지경이다. 등 4주를 거느렸다.
○ 옥저(沃沮)의 옛땅으로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다. 를 삼아 옥주(沃州) 옥저(沃沮)ㆍ취암(鷲巖)ㆍ용산(龍山)ㆍ빈해(濱海)ㆍ승평(昇平)ㆍ영천(靈川) 등 6현을 거느렸는데, 지금의 해성(海城) 지경이다.ㆍ청주(晴州)천청(天晴)ㆍ신양(神陽)ㆍ연지(蓮池)ㆍ낭산(狼山)ㆍ선암(仙巖) 등 5현을 거느렸다. 요(遼) 때에는 빈주(嬪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해성(海城) 지경이다.ㆍ초주(椒州)초산(椒山)ㆍ초령(貂嶺)ㆍ시천(澌泉)ㆍ첨산(尖山) 등 4현을 거느렸는데, 지금의 해성 지경이다. 등 3주를 거느렸다. 또 발해 영풍현(永豐縣)은 한(漢)의 요수(遼隋) 땅인데 지금의 해성현 서쪽 60리에 있다.
○ 고구려의 옛땅으로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아마 지금의 압록강 상류, 우리 나라의 갑산(甲山)ㆍ삼수(三水) 이하 강외(江外) 등지인 듯하다. 를 삼아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모두 미상 등 4주 《요사(遼史)》 지리지에 “정주는 녹주(綠州)-발해 때의 압록부 등-서북쪽 3백 80리에 있는데, 본래 비류왕(沸流王)의 옛땅이다. 비류수(沸流水)가 있어서 발해 때에 비류군(沸流郡)으로 삼았다.” 하였다. ○ 또 ‘환주는 녹주 서남쪽 2백 리에 있다. 고구려왕 쇠(釗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휘(諱))가 그곳에 궁궐을 세웠는데, 진(晋) 때에 모용황(慕容皝)에게 분탕(焚蕩)되었다.’ 한다. 를 거느렸다.
○ 장령 부(長嶺府)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지경이다. 는 하주(瑕州)ㆍ하주(河州) 모두 미상 등 2주를 거느렸다.
○ 부여(扶餘)의 옛땅으로 부여부(扶餘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지경으로 부여고(扶餘考)에 자세히 보인다. 를 삼아 부주(扶州)ㆍ선주(僊州)모두 미상 등 2주를 거느리고 항시 강한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막게 하였다. 또 영평(永平)ㆍ장평(長平)은 요(遼)가 황룡현(黃龍縣)으로 고치고, 영녕(永寧)은 요가 천민현(遷民縣)으로 고치고, 현의(顯義)는 요가 안원현(安遠縣)으로 고치고, 강수(强帥)는 요가 귀인현(歸仁縣)으로 고쳤다. 5현은 다 지금의 개원 지경에 있었는데 지역 분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막힐부(鄚頡府) 지금의 개원현성(開原縣城) 서북쪽에 있다. 는 막주(鄚州)ㆍ고주(高州) 등 2주 모두 미상 를 거느렸다.
○ 고구려가 두었고, 발해도 그대로 따랐으며, 요(遼)가 한주(韓州)와 봉주(鳳州)를 두었는데, 다 옛날의 고리국(藁蘺國)이다. 봉주는 곧 발해의 안녕군(安寧郡)인데 한주 북쪽 2백 리인 지금 변외(邊外)의 땅에 있다.
○ 읍루(挹婁)의 옛땅으로 정리부(定理府)지금의 흥경(興京) 지경 내에 있다. 를 삼아 정주(定州)흥경 땅에 있는데, 요(遼)는 보령군(保寧軍)으로 고치고, 고구려는 정동현(定東縣)을 두었다.ㆍ심주(瀋州)지금의 승덕현성(承德縣城) 성내이다. 등 2주를 거느렸다.
○ 또 숭주(崇州)는 발해가 두어 숭산(崇山)ㆍ규수(潙水)ㆍ녹성(綠城) 등 3현을 두었다. 숭주는 지금의 요양(遼陽)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
○ 읍루의 옛땅에는 안정군(安定郡)을 두었다. 요에서는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을 두었는데 지금의 철령현(鐵嶺縣)이고, 또 안이현(安彛縣)을 두었는데 지금의 철령현 서남쪽 60리에 있다.
○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ㆍ경주(瓊州)모두 지금은 미상 등 2주(州)를 거느렸다.
○ 솔빈(率賓)의 옛땅으로 솔빈부(率賓府)졸본고(卒本考)에 자세히 보인다. 를 삼아 화주(華州)ㆍ익주(益州)2주는 다 봉황성의 지경 내에 있다. 익주는 압록강변에 있기 때문에 압록강을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부른다.ㆍ건주(建州)흥경에 있고, 명(明)에서 건주위(建州衛)를 두었으며, 청(淸)이 일어난 땅이다. 등 3주를 거느렸다.
○ 불날(拂揑)의 옛땅으로 동평부(東平府)아마 지금의 개원 동쪽 지경인 듯하다. 를 삼아 이주(伊州)미상ㆍ몽주(蒙州)요(遼)가 기주(棋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개원(開原)ㆍ광녕(廣寧)의 접경에 있다.ㆍ타주(沱州)ㆍ흑주(黑州)ㆍ비주(比州)모두 미상 등 5주를 거느렸다.
○ 철리(鐵利)의 옛땅인데 철리부(鐵利府) 지금의 승덕현(承德縣) 지경이다. 를 삼아 광주(廣州)한(漢)의 양평(襄平) 땅이요, 고구려의 당산현(當山縣)이다. 발해에서는 철리군(鐵利郡)을 두었는데, 지금의 승덕현성(承德縣城) 서남쪽 지경에 있다.ㆍ분주(汾州)ㆍ포주(蒲州)모두 미상ㆍ해주(海州) 지금의 해성(海城) 땅이다.ㆍ의주(義州) 미상ㆍ귀주(歸州)지금의 복주(復州) 북쪽 90리에 있다. 등 6주를 거느렸다.
○ 월희(越喜)의 옛땅으로 회원부(懷遠府)지금의 철령현(鐵嶺縣) 땅이다. 를 삼아 달주(達州)ㆍ월주(越州)ㆍ회주(懷州)회원군(懷遠郡)은 발해가 두었는데, 본래 월회의 옛 성(城)이다. 요(遼)는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으로 고쳤다.ㆍ기주(紀州)미상ㆍ부주(富州)요(遼)는 은주(銀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철령현성(鐵嶺縣城)이다. 발해는 또 부수현(富壽縣)을 두었다.ㆍ미주(美州)흑산(黑山)ㆍ녹천(麓川) 등 2현을 거느렸다. 요는 수주(遂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철령현 땅이다.ㆍ복주(福州)ㆍ사주(邪州)ㆍ지주(芝州) 모두 미상 등 9주를 거느렸다.
【안】 불날ㆍ철리ㆍ월희는 모두 고구려제현고(高句麗諸縣考)와 말갈고(靺鞨考)에 보인다. 세 나라는 다 여진(女眞)의 맨 동쪽 땅에 있었고, 또 발해가 국토를 5천 리나 개척하였으니, 세 나라는 마땅히 내부(內附)하였을 것이며 그곳에 군현(郡縣)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지금 《성경지》에는 모두 요동땅에 편록(編錄)해 놓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ㆍ미주(郿州)ㆍ모주(慕州)ㆍ상주(常州) 등 4주를 거느렸다.
○ 또 영주(郢州)지금의 영길주(永吉州) 경내이다.ㆍ동주(銅州)미상ㆍ속주(涑州) 지금의 혼동강 좌우의 땅이다. 등 3주를 독주주(獨奏州) 미상 로 삼았다.
○ 용원부(龍原府)는 동남쪽이 바다에 닿았으니 일본(日本)을 통하는 길이요, 남해부(南海府)는 신라(新羅)로 통하는 길이요, 압록부(鴨綠府)는 조공(朝貢)하는 길이요, 장령부(長嶺府)는 영주(營州)로 통하는 길이요, 부여부(扶餘府)는 거란(契丹)으로 통하는 길이다. 경사(京師) 당(唐)의 도읍인 장안(長安)이다. 와의 상거는 8천 리이다.


 

부 고적(古蹟)


발해성(渤海城) 지금의 요양주성(遼陽州城) 동북쪽에 있는데, 요(遼)에서 동경(東京)을 두었다.
조어대(釣魚臺) 요양주성 남쪽 30리에 있는데, 발해 대씨(渤海大氏)가 유관(遊觀)하던 곳이다.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승덕현(承德縣) 동쪽 20리에 천주산(天柱山)이 있는데, 곧 대씨가 웅거한 동모산(東牟山)이다.
【안】《통감》에 ‘고구려가 이미 망하니 그 별종(別種)인 대조영(大祚榮)이 영주(營州)에 살았는데, 이해고(李楷固)가 격파하니, 대조영은 드디어 동모산에 웅거했다.’ 하고, 그 주에 ‘읍루(挹婁)에 있는데 바로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이다.’ 하였다.
○ 《통전》에 ‘수(隋)ㆍ당(唐) 때의 영주 소재지인 유성현(柳城縣)은 지금 요서(遼西) 서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요하(遼河)까지 4백 80리이다.’ 하였으니, 요하는 지금의 승덕현 서쪽 1백 리에 있으므로, 《성경지》의 기록이 잘못된 듯하다.
홀한성(忽汗城) 당(唐) 개원(開元) 초기에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고 그가 거느린 땅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았다. 보응(寶應) 원년(762)에 대흠무(大欽茂)가 상경(上京)으로 옮겼으니, 곧 국도 북쪽 3백 리,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 발해의 상경인데, 바로 지금의 영길주(永吉州)이니, 그 땅을 추측할 수 있다.

○ 상고하건대, 신라의 경계는 지금의 덕원(德源)ㆍ중화(中和)에서 끝났다. 지금의 함경도ㆍ평안도는 다 발해에 흡수되었었다. 그러나 요가 발해를 멸한 뒤의 통치 지역은 압록강 이북이었을 뿐이다. 압록강 남쪽은 오직 보주(保州)와 정주(定州) 2주였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여진의 점거한 바 되었다.
《요사》 지리지에 기록된 것은 압록강 이북에 국한하였다. 그러므로 압록강 이남의 발해군현 연혁을 《요사》와 신라기에 모두 빠뜨렸으므로 상고할 수가 없다.
또 상고하건대, 발해가 망한 뒤에 거란의 통치 지역은 압록강ㆍ두만강 남쪽에 미치지 못했고, 고려가 처음 복구하였을 때도 또 평안도의 강계(江界)ㆍ위원(渭原)ㆍ폐사군(廢四郡)과 함경도의 철령(鐵嶺) 이북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여진이 들어와 점거하여 정안(定安) 등의 나라와 함께 나누어 점령하였다.

 

웅진도독부고(熊津都督府考)


《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에 백제를 평정하고 76성(城)을 얻어 나누어 5도독부(都督府)로 삼았으니, 곧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이다.ㆍ마한(馬韓) 지금의 익산(益山)이다.ㆍ동명(東明) 지금의 부여(扶餘)이다.금련(金連)미상ㆍ득안(得安) 지금의 은진(恩津)이다. 아래에 보인다. 덕안(德安)이라고도 한다. 이다. 아울러 대방주(帶方州)지금의 나주(羅州)이다. 아래에 보인다. 를 두었더니, 인덕(獜德 당 고종(高宗) 연호) 이후에 폐지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도독부의 13현(縣)은 다음과 같다. 당(唐)이 백제를 평정한 다음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군현(郡縣)을 개설하였다.
우이현(嵎夷縣)ㆍ신구현(神丘縣) 모두 미상ㆍ윤성현(尹城縣)본시 열기(悅己)인데 지금의 정산(定山)이다.ㆍ인덕현(獜德縣) 본시 고량부리(古良夫里)인데 지금의 청양(靑陽)이다.ㆍ산곤현(散昆縣)본시 신촌(新村)인데 지금의 보령(保寧)이다.ㆍ안원현(安遠縣)본시 구시파지(仇尸波知)이다.ㆍ빈문현(賓汶縣)본시 비물(比勿 : 비인(庇仁))이다.ㆍ귀화현(歸化縣)본시 마사량(麻斯良)이다. ㆍ매라현(邁羅縣)ㆍ감개현(甘蓋縣)본시 고막부리(古莫夫里)이다.ㆍ내서현(奈西縣)본시 내서혜(奈西兮)인데 지금은 미상이다.ㆍ득안현(得安縣) 본시 덕근지(德近支)인데 《삼국사기》 백제지(百濟志)에는 덕근군(德近郡)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은진(恩津)이다.ㆍ용산현(龍山縣). 본시 고마산(古麻山)인데 지금은 미상이다. 지금의 남포(藍浦)는 백제의 마산(馬山)이다. 마(馬)와 마(麻)는 음이 같으니, 아마 이것인 듯하다.
○ 동명주(東明州)의 4현은 다음과 같다.
웅진현(熊津縣) 본시 웅진촌(熊津村)인데 지금의 공주(公州)이다.ㆍ노신현(鹵辛縣)본시 아로곡(阿老谷)인데, 백제지에는 아로곡현(阿老谷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안로현(安老縣)은 나주(羅州)에 속하였으니 이것은 별도의 땅인 듯하다.ㆍ구지현(久遲縣)본시 구지(仇知)인데 지금 전의(全義)이다.ㆍ부림현(富林縣). 본시 벌음촌(伐音村)인데 백제지에는 벌음지현(伐音支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신풍현(新豊縣)은 공주(公州)에 속하였다.
【안】 최치원(崔致遠)이 시중(侍中)에게 올린 편지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무찌르고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었다.’ 하였다. 당이 백제를 무찔렀으면 반드시 옛 도읍에 1부(府)를 두었을 것이니, 유인원(劉仁願)이 옛 도읍을 지킨 것으로 보아 징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명부는 곧 지금의 부여현(扶餘縣)이다. 백제가 일찍이 동명(東明)을 제사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동명부에 소속된 여러 현(縣)으로 보면 모두 부여의 곁에 있는 읍(邑)들이니, 더욱 증명할 수 있다.
○ 지심주(支潯州)의 9현은 다음과 같다.
사문현(巳文縣)본디 금물(今勿)인데 지금의 덕산(德山)이다.ㆍ지심현(支潯縣)본시 지삼촌(只彡村)인데 지금은 미상이다.ㆍ마진현(馬津縣)본시 고산(孤山)인데 백제지에는 오산(烏山)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고산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예산(禮山)이다.ㆍ자래현(子來縣)본시 부수지(夫首只)인데, 백제지에는 벌수지(伐首只)로 되어 있다. 부지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당진(唐津)이다.ㆍ해례현(解禮縣)본시 개리이(皆利伊)이다.ㆍ고로현(古魯縣)본시 고마지(古麻只)인데 지금은 미상이다.ㆍ평이현(平夷縣)본시 지류(知留)인데 백제지에는 지륙(志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지곡현(地谷縣)은 서산(瑞山)에 속하였다.ㆍ산호현(珊瑚縣)본시 사호살(沙好薩)인데 지금은 미상이다.ㆍ융화현(隆化縣). 본시 거사물(居斯勿)인데 백제지에는 거사물현(居斯勿縣)으로 되어 있다.지금의 거령현(巨寧縣)은 진안(鎭安)에 속하였으니 이것은 별도의 땅인 듯하다.
○ 노산주(魯山州)의 6현은 다음과 같다
노산현(魯山縣)본시 감물아(甘勿阿)인데 지금의 함열(咸悅)이다.ㆍ당산현(唐山縣)본시 구지지산(仇知只山)인데 백제지에는 구지산(仇智山)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금구(金溝)이다.ㆍ순지현(淳知縣)본시 두시(豆尸)인데, 백제지에는 두시이(豆尸伊)로 되어 있다. 지금의 금산(錦山) 폐현 부리(富利)이다.ㆍ지모현(支牟縣)본시 지마마지(只馬馬知)이다.ㆍ오잠현(烏蠶縣)본시 마지사(馬知沙)이다.ㆍ아착현(阿錯縣). 본시 원촌(原村)이다.
○ 더 이상은 상고할 길이 없다.
○ 고사주(古泗州)본시 고사부리(古沙夫里)이다. 의 5현은 다음과 같다.
평왜현(平倭縣)본시 고사부촌(古沙夫村)인데, 백제지에는 고사부리(古沙夫里)로 되어 있다. 지금의 고부(古阜)이다.ㆍ대산현(帶山縣)본시 대시산(大尸山)인데 지금의 태인(泰仁)이다.ㆍ벽성현(辟城縣)본시 벽골(辟骨)인데 지금의 김제(金堤)이다.ㆍ좌찬현(佐贊縣) 본시 상두(上杜)인데 백제지에는 상칠현(上漆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흥덕(興德)이 아마 이것인 듯하다.ㆍ순모현(淳牟縣)본시 두내지(豆奈只)인데, 백제지에는 두내산(豆乃山)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만경(萬頃)이다.
○ 사반주(沙泮州)본시 고시이성(古尸伊城)이다. 의 4현은 다음과 같다.
모지현(牟支縣)본시 고시이촌(古尸伊村)인데 백제지에는 촌(村)이 현(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장성(長成)이다.ㆍ무할현(無割縣)본시 모량부리(毛良夫里)인데 지금의 고창(高敞)이다.ㆍ좌로현(佐魯縣)본시 상로(上老)인데 지금의 무장(茂長)이다.ㆍ다지현(多支縣)본시 부지(夫只)인데, 지금은 미상이나 아마 동복(同福)인 듯하다.
○ 대방주(帶方州)본시 죽군성(竹軍城)이다. 의 6현은 다음과 같다.
지류현(至留縣)본시 지류(知留)인데 지금은 미상이다.ㆍ군나현(軍那縣)본시 굴내(屈奈)인데 백제지에는 굴내현(屈乃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함평(咸平)이다.ㆍ도산현(徒山縣)본시 추산(抽山)이다. 지금의 가흥현(嘉興縣)인데 진도(珍島)에 속하였다.ㆍ반나현(半那縣)본시 반내부리(半奈夫里)이며 지금의 반남현(潘南縣)인데 나주(羅州)에 속하였다.ㆍ죽군현(竹軍縣)본시 두힐(豆肹)이며 지금의 회진현(會津縣)인데 나주에 속하였다.ㆍ포현현(布賢縣). 본시 파로미(巴老彌)인데 지금은 미상이다.
○ 분차주(分嵯州)본시 파지성(波知城)인데 지금의 낙안(樂安)이다. 일본(一本)에는 분사(分沙)로 되어 있다. 지금의 낙안군 북쪽 5리에 분사현(分沙峴)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의 4현은 다음과 같다.
귀단현(貴旦縣)본시 구사진혜(仇斯珍兮)인데 백제지에는 구(仇)가 구(丘)로 되어 있다. 지금의 진원(珍原)이다.ㆍ수원현(首原縣)본시 매성평(買省坪)이다.ㆍ고서현(皐西縣)본시 추자혜(秋子兮)이며 지금의 담양(潭陽)이다.ㆍ군지현(軍支縣) 지금 낙안군(樂安郡) 남쪽 25리에 군지부곡(軍知部曲)이 있으니 아마 이것인 듯하다.
상고하건대, 이상은 1부(府), 7주(州), 51현(縣)이다. 웅진(熊津)ㆍ동명(東明)ㆍ득안(得安)은 《당서》 지리지와 같은데, 마한(馬韓)과 금련(金漣)이 없으며, 주현(州縣)을 고친 곳에는 모두 본명으로 주를 달았으나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많으니, 아마 이어(夷語)를 전역(傳譯)할 때 틀리기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지, 증빙할 문헌이 없어서는 아니었으리라.
지금 그 중에서 알 만한 것을 상고하고 지금의 지명으로 주를 달아 후인들이 연혁의 사실을 알려고 할 때 상고하게 하였다. 《여지승람》과 동국의 지지(地志)에는 모두 그것을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결점이라 하겠다.
《북사》 백제전(百濟傳)에도,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 하고, 그 밖에 또 5방(方)이 있는데,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라 한다.”
하였다. 지금 득안ㆍ웅진 외에는 상고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록하여 옛 사실을 보충한다.
백제의 땅은 뒤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원년(676)에 웅진도독부를 요동(遼東)의 건안(建安)으로 옮겼는데, 발해가 일어나자 이내 폐지되었다.


[주D-001]금련(金連) : 《당서》에는 금련(金漣)으로 되어 있다.

 

안동도호부고(安東都護府考)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 고종(唐高宗) 총장(總章) 2년(669)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백 76성(城)을 얻어 나누어 9도독부(都督府)로 만들었으니, 곧 신성주(新城州)ㆍ요성주(遼城州)ㆍ가물주(哥勿州)ㆍ위락주(衛樂州)ㆍ사리주(舍利州)ㆍ거소주(居素州)ㆍ월희주(越喜州)ㆍ거단주(去旦州)ㆍ건안주(建安州)이다.
【안】 9도독부 중에 신성주ㆍ요성주ㆍ월희주ㆍ건안주는 《일통지》에 보이고 나머지 다섯은 실리지 않았으니, 아마 이것은 압록강 이동이었으리라.
그리고 42주(州), 1백 현(縣)을 만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平壤)에 설치하여 통할하였다. 의봉 원년에 고구려 잔여 민중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故城)으로 옮기고, 2년에 또 신성(新城)으로 옮겼으며,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2년(714)에 평주(平州)로 옮기고,
【안】 당(唐)의 평주 소재지는 노룡현(盧龍縣)이다.
천보(天寶 당 현종의 연호) 2년에 또 요서(遼西) 고군성(故郡城)으로 옮겼다가 지덕(至德 당 숙종(唐肅宗)의 연호) 이후에 폐지하였으니, 그것은 발해가 강성하여 요지(遼地)를 모두 병합하였기 때문이다.
《당서》 지리지에 나타난 주(州)에는 다만 남소(南蘇)ㆍ개모(蓋牟)ㆍ대나(代那)ㆍ창암(倉巖)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목저(木底)ㆍ안시(安市)ㆍ저북(諸北)ㆍ식리(識利)ㆍ불날(拂揑)ㆍ배한(拜漢) 등 14주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지》에는,
“원(元) 때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두고 또한 14주로 나누었으니, 즉 신성ㆍ요성(遼城)ㆍ가물(哥勿)ㆍ건안(建安)ㆍ남소ㆍ목저ㆍ개모ㆍ대나ㆍ창암ㆍ마미ㆍ적리ㆍ여산ㆍ연진ㆍ안시 등이다.”
하였으니, 《당서》와 대략 서로 같은데, 고구려 사람으로 그 직(職)을 갖게 하였으니, 요(遼)의 지경은 아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총장 2년 2월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고종에게〉 아뢰기를,
‘고구려의 모든 성(城)에 도독부(都督府)와 주군(州郡)을 설치하는 일은 마땅히 남생(男生 당에 투항한 연 개소문(淵蓋蘇文)의 큰 아들)과 상의해서 작성하여 주문(奏聞)하라는 칙명(勅命)을 받들었습니다.’ 하니, 칙서(勅書)에 ‘주청(奏請)에 의해서 그 주군은 중국에 예속시켜야하므로 요동도안무사(遼東道安撫使) 유인궤(劉仁軌)에게 위임하라.’ 하매, 유인궤가 분할하여 모두 안동도호부에 예속시켰던 것이다.
○ 압록수(鴨綠水) 이북의 아직 항복하지 아니한 11성(城)은 다음과 같다.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 본시 조리비서(助利非西)이다.ㆍ절성(節城) 본시 무자홀(蕪子忽)이다.ㆍ풍부성(豐夫城) 본시 초파홀(肖巴忽)이다.ㆍ신성주(新城州)본시 구차홀(仇次忽)이다. 주(註)에 “혹은 돈성(敦城)이라 한다.” 하였다.ㆍ도성(䄻城) 본시 파시홀(波尸忽)이다.ㆍ대두산성(大豆山城) 본시 비달홀(非達忽)이다.ㆍ요동성주(遼東城州) 본시 오열홀(烏列忽)인데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ㆍ옥성주(屋城州)ㆍ백석성(白石城)아마 백애성(白厓城)인 듯하다.ㆍ다벌악주(多伐嶽州)ㆍ안시성(安市城). 옛 안촌홀(安寸忽)이다. 주에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 한다.” 하였다.
○ 압록수 이북의 항복한 11성은 다음과 같다.
약암성(掠巖城)ㆍ목저성(木底城)ㆍ수구성(藪口城)ㆍ남소성(南蘇城)ㆍ감물주성(甘勿主城) 본시 감물이홀(甘勿伊忽)이다.맥전곡성(麥田谷城)ㆍ심악성(心岳城) 본시 거시압(居尸押)이다.ㆍ국내주(國內州) 주에 “불내(不耐)라 하기도 하고 위니암성(尉那巖城)이라 한다.” 하였다.ㆍ설부루성(屑夫婁城)본시 초리파리홀(肖利巴利忽)이다.백악성(栢岳城)본시 골시압(骨尸押)이다.ㆍ자목성(紫木城).
○압록 이북의 도망한 7성은 다음과 같다.
연성(鉛城) 본시 내물성(乃勿城)이다.ㆍ면악성(面岳城)ㆍ아악성(牙岳城) 본시 배시압홀(背尸押忽)이다.ㆍ취악성(鷲岳城) 본시 감미홀(甘彌忽)이다.ㆍ적리성(積利城). 본시 적리홀(赤里忽)이다.ㆍ목은성(木銀城)본시 소시홀(召尸忽)이다.ㆍ이산성(梨山城). 본시 가시달홀(加是達忽)이다.
○ 압록 이북의 공취(攻取)한 3성은 다음과 같다.
혈성(穴城)본시 갑홀(甲忽)이다.ㆍ은성(銀城)본시 절홀(折忽)이다.ㆍ사성(似城). 본시 사홀(史忽)이다.
【안】 당(唐)이 백제를 평정하고 5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평정하고 9도독부를 설치하였는데, 이적의 장계 가운데는 1부(府)만 보이고, 42주(州) 중에 7주만 보이고, 1백 현(縣) 중에 46현만 보이는데, 거기 보이는 주현(州縣)은 모두 백제의 땅이다. 고구려의 전 강역으로서 압록수 남쪽에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압록수 이북의 창암(蒼巖)ㆍ대행(大行) 등과 같은 성은 《당서》와 고구려기에 보이고 모두 이적 등이 빼앗은 것에 해당시켰는데, 이것은 다 실리지 않고 다만 ‘공취한 성 셋’이라고 하였을 뿐이니, 이 장계는 탈락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 전문(全文)이 아닌 것 같다.
상고하건대, 이상 32성(城)은 다 압록강 이북에 있다 하였으니 모두 요성(遼城)인데,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많고, 압록강 이남과 대동강 이북의 땅은 더욱 증빙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무릇 신라가 통일할 때에는 고구려의 패수(浿水) 남쪽의 땅만을 얻어 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洲) 등 3주를 두고 평양 이북은 신라의 도적(圖籍)에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부식(金富軾)이 역사를 찬할 때 능히 고적을 널리 상고하지 않고 남아도는 땅을 주워 모아서 고구려 지지를 만드니, 다만 신라가 얻은 땅에 대해서는 자세히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궐하였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지지에도,
“북계(北界)는 본시 조선의 옛땅인데,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하였을 뿐, 군읍(郡邑)에는 모두 고구려 때의 이름이 없다. 북계는 지금의 평안도이다.
《여지승람》을 상고하면, 평양 외에는 하나도 언급한 것이 없고, 용강(龍岡)ㆍ성천(成川)ㆍ영변(寧邊) 등에 대한 기록은 모두 틀렸으니, 사실을 취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함경도에 대해서도,
“고구려의 땅이다.”
하였을 뿐, 이름이 탈락되었다. 강역의 연혁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우리 나라 사람의 소홀함이 이 지경이니, 애석하다. 지금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역사를 쓰는 자로 하여금 상고하게 한다. 고구려ㆍ발해 군현고와 함께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
【안】 고구려 지명에 홀(忽)자로 말끝을 맺는 것이 많으니, 아마 방언으로 칭한 것이리라. 이것은 신라 사람이 지명을 불(弗)로 칭한 것이 많음과 같다. 불(弗)이 변하여 화(火)로 되었으니, 화의 방언이 불이기 때문이다. 불(弗)이 또 바뀌어 벌(伐)이 되는 등 변칭(變稱)이 일정하지 않았으니, 천년 뒤에 무엇을 좇아 믿겠는가?
○ 《삼국사기》의 틀리고 소략한 점은 하나둘이 아니다. 난산현(蘭山縣)과 같은 것은 본시 우수주(牛首州)에 속하였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하면, 신라본기 애장왕(哀莊王) 5년에,
“우두주(牛頭州) 난산현에서 자빠져 있는 돌이 일어났다.”
하였으니, 그것은 우수주에 관계됨이 분명하다. 지지에는 또,
“삭정군(朔庭郡)에 속했다.”
하였으니, 대개 우수가 뒤에 삭주(朔州)로 고쳐졌기 때문에 김씨가 두 삭(朔)자를 잘못 상고해서 그런 것이리라. 또 주양성(走壤城)을 미상 지분(未詳地分) 항목에 넣었는데, 신라본기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을 쌓았다.”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만일 세밀히 상고한다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이다. 동방 지승(地乘)의 오류는 김씨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여지승람》은 더욱 오류가 많다. 지금의 재령군(載寧郡)은 본시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인데, 신라가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치고, 고려가 안주(安州)로 고쳤으며, 뒤에 또 재령으로 되었다. 지금의 안주(安州)는 본시 고려 초기의 팽원군(彭原郡)인데, 뒤에 안동부(安東府)를 설치하고, 뒤에 또 영주(寧州)로 되고 뒤에 또 안주로 되었다. 《고려사》지리지가 너무도 명백하므로 아예 의심할 나위도 없는데, 《여지승람》에는 한 사항을 양읍(兩邑)에다 중첩으로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아마 안주라는 이름 때문에 그랬으리라. 이밖에도 오류가 매우 많은데, 우선 그 중 하나만을 드니, 보는 자는 자세히 상고해야 한다.


 

[주D-001]약암성(掠巖城) : 《삼국사기》에는 약(掠)자가 경(椋)자로 되어 있다.
[주D-002]맥전곡성(麥田谷城) : 《삼국사기》에는 맥(麥)자가 능(夌)자로 되어 있다.
[주D-003]거시압(居尸押) : 《삼국사기》에는 압(押)자가 압()자로 되어 있다.
[주D-004]백악성(栢岳城) : 《삼국사기》에는 백(栢)자가 오(杇)자로 되어 있다.
[주D-005]골시압(骨尸押) : 《삼국사기》에는 압(押)자가 역시 압()자로 되어 있다.
[주D-006]내물성(乃勿城) : 《삼국사기》에는 성(城)자가 홀(忽)자로 되어 있다.

 

구성고(九城考)


두만강(豆滿江) 이내의 땅은 본시 북옥저(北沃沮)에 속하였는데 뒤에 고구려에 병합되고 고구려가 망하매 발해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고려가 일어나서 동북쪽의 경계를 비로소 철령(鐵嶺)으로 하였더니, 뒤에 점점 개척하여 정주(定州)ㆍ원흥(元興)지금의 정평부(定平府) 남쪽 50리에 있다.ㆍ선덕(宣德) 지금의 함흥부(咸興府) 서쪽 1백 20리에 있다. 등 3관문(關門)을 두고 도련포(都連浦)지금의 함흥부 남쪽 30리에 이다. 로 경계를 하였다.
숙종(肅宗)이 옛 강토를 수복하려다 하지 못하였는데, 예종(睿宗)이 선인의 뜻을 이어 즉위한 지 3년(1108)되던 해 2월에 윤관(尹瓘)을 보내 여진(女眞)을 쫓고 함주(咸州)ㆍ영주(英州)길주(吉州)에 있다.ㆍ복주(福州)지금의 단천(端川)이다.ㆍ웅주(雄州)길주 남쪽에 있다. 와 공험진(公嶮鎭)을 설치하고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으며, 3월에 의주(冝州) 지금의 덕주(德州)이다.ㆍ평융(平戎)ㆍ통태(通泰)모두 미상 등 3성(城)을 쌓았으니, 통틀어 북계(北界)의 9성이 되는 것이다.
여진이 꾸준히 항쟁하매 관군(官軍)이 누차 패전하였고, 여진이 구성을 돌려주기를 간청하므로 다음해에 그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7월 17일(신유)에 비로소 길주로부터 철수하여 차례로 〈9성의 전구(戰具)를〉 내지(內地)로 거두어들이고, 18일(임술)에 숭녕(崇寧) 지금은 미상이다.ㆍ통태(通泰) 2진(鎭)을 철수하고, 21일(갑자)에 영주(英州)ㆍ복주 2진(鎭)과 진양진(鎭陽鎭)지금은 미상 을 철수하고, 22일(을축)에 함주(咸州)ㆍ웅주(雄州) 2진과 선화진(宣化鎭)길주에 있다. 을 철수하였다.
무릇 여진에게 돌려준 것도 또한 9성이었는데, 21년에 쌓은 9성 중에 같은 것이 여섯, 같지 않은 것이 셋이다. 의주(冝州)는 본시 내지이니, 지난해 성 쌓을 때 함께 쌓은 것이기 때문에 통칭 9성이라 한다. 이해에 철수한 9성과는 비록 그 수는 같으나 땅은 같지 않다. 지금 철수한 숭녕ㆍ진양ㆍ선화 등 3진은 지난해에 쌓은 성 가운데 들어 있지 않으니, 아마 성을 쌓은 뒤에 점차로 개설한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혹시 뒤에 개칭한 것일까?
성을 철수할 때에는 당연히 먼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주가 맨 북쪽이기 때문에 먼저 철수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은 모두 길주이내 서남쪽의 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매양,
“9성은 마땅히 두만강 안팎의 땅에 있다.”
하니, 이것은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의 공험진에 대한 설에 의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설대로 한다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1천 8백여 리나 멀다. 대저 성읍(城邑)을 창건하는 목적은 변경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처럼 1천 8백 리나 먼 땅에다 9성을 설치하였다면 어떻게 능히 성원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로 증거하면,
하였으니, 그것이 길주 서남쪽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여진이 개마산 동쪽에 모여사는데, 지방이 3백 리로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을 끼고, 남쪽은 장주(長州)ㆍ정주(定州)에 접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이 또한 3백 리 안팎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종(睿宗)이 윤관에게 준 교서(敎書)에,
“1백 리의 땅을 개척하여 9주(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으니, 만일 땅을 개척하여 두만강 북쪽 1천 8백 리나 먼 땅에 이르렀다면, 어찌 1백 리의 땅을 개척했다고 말하였겠는가?
공민왕 5년에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永興)이다. 을 격파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한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지금의 단천(端川) 동쪽 66리, 길주(吉州)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으로 단주(端州)ㆍ길주(吉州) 사이에 있다. 여기에 말한 입석이란 필시 윤관이 세운 것이리라. 공험진이 이미 길주의 서남쪽에 있으니, 그가 세운 비가 틀림없이 이 사이에 있을 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말한 ‘선춘령비(先春嶺碑)’는 혹 윤관이 승세(勝勢)를 타고 패주하는 적을 뒤쫓아 여기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적을 기록하기를 마치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돌에 공적을 새긴 따위와 같이 한 것이고, 거기까지 국토를 개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땅에 이른바 공험진이란 필시 후에 국토를 개척하고 옮겨 설치한 것일 터인데 사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대저 고려 시대에는 국토를 두만강까지 개척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공민왕이 비록 동쪽 지경을 복구하였으나 그 복구한 8주(州)ㆍ5진(鎭)은 모두가 바로 함주(咸州) 이남이니, 또한 9성의 땅을 다 복구하지는 못하였다. 우리 태조 때에 와서 비로소 두만강 이서의 땅을 차지하였으니, 김종서(金宗瑞)가 이른바,
“태조께서 동방 대국을 동북으로 두만강까지 소유하시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 등 7주를 설치하셨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말한,
“그 사방은 동북쪽은 선춘령으로 경계를 삼았다.”
한 것은 대개 상세하지 못한 점이 있다.
【안】 공양왕 4년에 여진의 알도리(斡都里)가 내조(來朝)하매 이필(李必)을 차출해 두만(豆萬) 등처에 보내 그들을 불러서 타일렀는데, 그들의 소유인 속빈(速頻)ㆍ실적(失的) 등의 땅은 원래 공험진 경내에 속하였다. 알도리가 또,
“옛날 시중(侍中) 윤관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를 세워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했다.”
하였으니, 두만(豆萬)이란 바로 두만강의 땅인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가 너무도 소략하여 후인들이 상고할 길이 없으니 애석하다.


[주D-001]여진이 …… 엄습하였다 : 《고려사》 예종 4년 조에 보인다.

 

합란부고(哈蘭府考)


《고려사》 지리지에,
“함주가 원(元)에 흡수되매 합란부(合蘭府)라 칭하였다.”
하고, 《여지승람》에는,
“합란부의 옛 소재지는 지금의 부(府 함흥부(咸興府)임) 남쪽 5리에 있다.”
하였는데, 또한 잘못이다. 어떻게 그 잘못임을 아는가 하면, 《고려사》 조돈전(趙暾傳)에,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ㆍ홍헌(洪獻) 지금의 홍원(洪原)이다.ㆍ삼살(三撒) 지금의 북청(北靑)이다. 의 땅은 본시 우리의 강토이다.”
하였으니, 합란부는 별도로 함주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우(辛禑) 11년(1385)에 왜(倭)가 함주의 홍원ㆍ북청ㆍ합란 등을 침략하였다.”
하였으니, 또한 방증(傍證)이 될 만하다. 《원사(元史)》 지리지에,
“개원의 서남쪽은 영원(寧遠)이고, 더 서남쪽은 남경(南京) 오라(烏喇) 남쪽 지경에 있다. 이며,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더 남쪽은 쌍성(雙城)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합란부는 별도로 그 땅이 있었다. 아마 지금 함흥(咸興)이 바로 그 경내이리라.
합란(哈蘭)은 합라(合懶)이다. 《성경지》에,
“금(金)이 혼동강(混同江) 남쪽 고려에 가까운 땅을 합라로(合懶路)로 삼고, 서쪽은 휼품로(恤品路)로 삼았으니, 지금 영길주(永吉州)곧 오라(烏喇)이다. 의 남서쪽이 곧 합라로와 휼품로였던 것이다. 원(元)이 합란부와 수달달로(水達達路)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두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그 지역을 대개 상상할 수가 있다. 강토의 경계에 대해서는 나라에서 반드시 자세하게 해야 할 것인데, 우리 나라 사람은 거기에 너무도 어두워서 잘못 다룬 것이 많으니, 이런 역량을 가지고 만일 사변(事變)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개탄할 노릇이다.


강역 연혁(疆域沿革) 고정(考正)


《여지승람》과 《고려사》 지리지에 의심난 것이 많기 때문에 이제 전기(傳記)를 상고하여 그 대략을 아래와 같이 다시 정한다.

경기도(京畿道)
고조선(古朝鮮)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낙랑(樂浪)의 남쪽 지경으로 삼았고, 후한 말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의 남쪽 땅을 나누어서 대방군(帶方郡)을 두었으니, 지금의 한수(漢水) 이북이 다 낙랑군에 속하였다. 한수 남쪽은 곧 마한(馬韓)의 땅으로 뒤에 백제에 흡수되고, 그 중 동쪽의 가까운 땅과 서북쪽의 땅은 대부분이 신라와 고구려에 침탈되었으며, 백제가 망하자 신라에 병합되어 한주(漢州)가 설치되었고, 신라 말기에는 궁예(弓裔)가 점거하였다가 이내 고려에 귀속되었다.

충청도(忠淸道)
옛날의 진국(辰國)이며 마한 땅이다. 뒤에 백제가 되었는데, 당이 백제를 멸하고 1도독부(都督府), 2주(州)를 두었더니, 웅진도독고(熊津都督考)에 보인다. 얼마 후에 신라에 병합되어 웅주(熊州)가 설치되었다.

전라도(全羅道)
옛날의 진국이며 마한 땅이다. 지금 지리산(智異山) 서남쪽 근해에 있는 모든 군(郡)들이 또한 이에 속하였다. 변한(弁韓)은 뒤에 백제에 흡수되었다. 당(唐)이 백제를 멸하고 군현(郡縣)을 두어 5주(州)를 설치하였더니, 웅진도독고에 보인다. 얼마 후에 신라에 병합되어 전주(全州)ㆍ무주(武州)의 2주가 설치되었다.

경상도(慶尙道)
옛날의 진국이며 진한(辰韓) 땅이다. 신라가 그 땅에서 일어났다. 지금 낙동강(洛東江) 이서 근해에서 지리산까지의 지역은 변한에 속하였다. 뒤에 6가야(伽倻)의 땅이 되었더니, 멸망해서 신라에 흡수되매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 등 3주가 설치되었다.

강원도(江原道)
고조선 땅으로 예(濊)ㆍ맥(貊)이 웅거하였다. 한 무제 때 낙랑의 동쪽 지경을 삼았다. 지금의 영동(嶺東)이 곧 예의 땅이요, 한(漢)의 임둔군(臨芚郡)이다. 영서(嶺西)는 맥의 땅인데 뒤에 나누어져 신라ㆍ고구려에 흡수되었더니, 고구려가 망하매 신라에 병합되어 삭주(朔州)ㆍ명주(溟州)의 2주가 설치되었다

황해도(黃海道)
고조선 땅이다. 한 무제 때에 낙랑의 속현을 삼았고, 공손강이 낙랑의 남쪽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니 근해 지방이 많이 이에 속하였다. 삼국 때에는 고구려에도 속하고 백제에도 속하는 등 여기저기에 침탈되다가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자 신라에 병합되었다.

평안도(平安道)
고조선 땅이다. 한 무제 때 낙랑군을 설치하였고, 광무 때 살수(薩水) 이북은 고구려에 속하고, 살수 이남은 한(漢)에 속하였는데, 뒤에 고구려가 그 땅을 병합하였고, 당(唐)이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가 얼마 후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당 현종 때 지금 대동강 이북이 발해에 많이 속하였다. 신라 말기에 궁예(弓裔)가 패서(浿西)지금의 대동강을 가리킨다. 13진(鎭) 지금은 미상이다. 을 설정하고 평양(平壤)을 항복시켰다. 대씨(大氏)가 망하자 변방에 가까운 땅은 여진(女眞)에게 점거한 바 되었더니, 고려가 일어나 그를 다 수복하여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함경도(咸鏡道)
고조선 땅이다. 지금 북도(北道)는 북옥저(北沃沮)였고 남도 근해는 동옥저(東沃沮)였으며, 남옥저(南沃沮)는 북옥저 남쪽에 있었는데, 아마 지금의 삼수(三水)ㆍ갑산(甲山) 등지인 듯하다. 한 무제 때 현도군을 삼았더니 한 소제 때 현도군을 요동 지경으로 옮겼다. 옥저(沃沮)가 그 땅을 나누어 점거하였고, 뒤에 고구려에 속하였다가 당이 고구려를 멸하매 당에 속하였더니 얼마 후에 발해 대씨의 점거한 바가 되었는데, 지금 문천(文川) 이북이 바로 그 땅이다. 그 남쪽은 신라가 되었고, 대씨가 망하자 북에 가까운 땅은 여진의 점거한 바가 되었더니 고려가 일어나 그를 수복하여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요동(遼東)
맨 처음에는 구이(九夷)의 땅이었는데, 순(舜)이 유주(幽州)ㆍ영주(營州) 등 2주를 두어 동이(東夷)를 얽매었고, 하(夏)ㆍ상(商) 시대에는 동이에 속하였으며, 주 무왕(周武王) 때에는 기자(箕子)를 단군 조선 옛땅에 봉하였으니 지금 봉천부(奉天府)의 의주(義州)ㆍ광녕(廣寧) 이동이 모두 그 봉지(封地)이다.
전국 시대 말기에 연(燕)이 쳐서 그를 취하였더니 얼마 후에 진(秦)에 흡수되고 뒤에 한(漢)에 속하였으며, 한의 말기에는 공손씨(公孫氏)의 점거한 바 되고 공손씨가 망하자 위(魏)에 흡수되었으며, 진(晋)의 초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군현(郡縣)이 되었다. 또 모용씨(慕容氏)의 점거한 바가 되면서부터는 고구려와 서로 침탈하였고, 모용씨가 쇠약하자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며, 당(唐)이 고구려를 멸하니 따라서 중국에 속하였다. 뒤에 발해의 땅이 되고, 발해가 망하니 요(遼)에 병합되었으며, 금(金)ㆍ원(元)을 거쳐서 명(明)에 편입되었다.

영고탑(寧古塔)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서쪽 지경은 진번(眞番) 오랑캐의 점거한 바 되어 조선에 속하였는데,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진번군(眞番郡)을 두었으니, 아마 지금의 영주(永州)ㆍ길주(吉州) 등의 땅이 바로 그것인 듯하다. 한 소제(漢昭帝) 때에 진번군을 없앴다. 뒤에 말갈(靺鞨)의 백산부(白山部)가 되어 고구려에 속하고, 고구려가 망하니 발해 대씨에 속하고, 대씨가 망하니 요(遼)에 병합되었다.


분야고(分野考)


《한서》 지리지에,
연지(燕地)는 미(尾 별이름)ㆍ기(箕) 분야(分野)이다. 곧 석목(析木 : 별이름)의 성좌(星座)이다. 낙랑과 현도도 마땅히 그에 속한다.”
하고, 《진서(晋書)》 천문지에,
“발해는 기(箕)의 1도(度)에 해당하고, 낙랑은 기의 3도에 해당하고, 현도는 기의 6도에 해당한다.”
하였다. 이러므로 후인들이 우리 나라를 기의 분야에 해당시킨다. 일찍이 스승에게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의 봉지(封地)는 남기(南箕 성좌(星座) 이름. 남방 7수(宿)의 하나)의 땅에 있다.
홍범(洪範)에 설명한 것은 곧 낙서(洛書)를 펴서 만든 것이다.
낙서의 위치는 이(二)와 팔(八)이 그 위치가 바뀌었다.
【안】 음양(陰陽)의 수는 자(子)ㆍ오(午)에서 시작한다. 양수(陽數)는 자(子)에서 시작하여 바로 세어가기 때문에 일(一)이 감(坎)에, 이(二)가 간(艮)에, 삼(三)이 진(震)에, 사(四)가 손(巽)에 위치하고, 음수(陰數)는 오(午)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세어가기 때문에 구(九)가 이(離)에, 팔(八)이 곤(坤)에, 칠(七)이 태(兌)에, 육(六)이 건(乾)에 위치한다. 지금 낙서의 수는 이가 곤에, 팔이 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위치가 바뀌었다 한 것이다. 이와 팔이 위치가 바뀌었다 한 것은 이오사(二五事)의 숙(肅)ㆍ예(乂)ㆍ철(哲)ㆍ모(謀)ㆍ성(聖)이 팔서징(八庶徵)의 우(雨)ㆍ양(暘)ㆍ욱(燠)ㆍ한(寒)ㆍ풍(風)과 서로 대응하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이다.
곤(坤)과 간(艮)이 마주 대하여 위로 은하(銀河)에 응한다. 은하는 본래 도는 것인데, 지금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간(艮)에서부터 곤(坤)에 이르기까지일 뿐이다. 간(艮)은 기(箕)ㆍ미(尾)의 성좌에 해당한다.
지금 압록강 이동의 물은 모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 홍범의 글과 꼭 맞으니, 그 일은 마치 귀신이 도운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기(箕)의 분야에 해당하니 천문ㆍ지리가 이처럼 꼭 맞다.
《한서》 지리지에 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의 상(象)이요, 북방(北方)에 있으니 호(胡)의 상이다.”
하였으니, 월의 상이 있기 때문에 또한 두(斗)의 분야로 해당시킨다. 당(唐)의 일행(一行)은,
“기(箕)와 남두(南斗)가 서로 가까우니 요수(遼水)의 양지쪽이 된다. 조선 삼한의 땅은 모두 오(吳)ㆍ월(越) 동쪽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지금의 삼남(三南)이 곧 옛 삼한 땅이니, 오ㆍ월과 서로 마주 대하였다. 그렇다면 한수(漢水) 남쪽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마땅히 두(斗)의 분야로 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 만국전도경위선(萬國全圖經緯線)으로 우리 나라 전도(全圖)를 그리면, 이적도이북(離赤道以北) 37도(度)의 기처(起處), 이복도이동(離福島以東) 1백 63도 1백 50리(里)가 바로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본 위치이다.
경도의 서단(西端)인 황해도 풍천부(豐川府)의 이복도 1백 61도 89리는 북으로 여진(女眞)의 백도눌(白都訥) 동쪽 지경에 닿고, 동단(東端)인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이복도〉 1백 65도 1백 90리는 북으로 여진의 흑룡강(黑龍江) 동쪽 지경에 닿는데, 〈서단에서 동단까지가〉 4도 1도는 2백 50리이다. 1백 2리가 된다.

남단(南端)인 전라도 해남현(海南縣) 북신출지(北辰出地) 31도 2백 44리는 서쪽으로 중국 절강성 북쪽 지경에 닿고, 또 해남현에서 바다를 건너면 제주도 남쪽 지경에 닿는데, 바로 그곳의 북신출지 27도 1백 97리는 서쪽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남쪽 지경에 닿고, 북단(北端)인 함경도 온성부(穩城府) 북신출지 44도 91리는 서쪽으로 여진의 길림(吉林) 북쪽 지경에 닿는데, (남단에서 북단까지가) 16도 1백 58리가 된다.
경도(京都)는 산동성(山東省)과 위(緯)가 같으면서 조금 북쪽으로 치우치고 길림 땅과 경(經)이 같다. 대저 위광(緯廣)은 여진과 대략 같으나 좁고, 경장(經長)은 중국과 대략 같으나 짧다.
《천관서(天官書)》로 상고하면, 함경ㆍ평안 2도 및 황해ㆍ강원 2도의 북쪽 지경은 중국 순천부(順天府)와 위가 같으니, 마땅히 기(箕)ㆍ미(尾)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경기도 및 황해ㆍ강원 2도의 남쪽, 충청ㆍ경상 2도의 북쪽 지경은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허(虛)ㆍ위(危)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전라도 및 경상ㆍ충청 2도의 남쪽 지경은 중국 강남성(江南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두(斗)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제주는 중국 복건성(福建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우(牛)ㆍ여(女)의 분야에 속해야 한다. 그림을 상고하면 볼 수가 있다.


[주D-001]연지(燕地) : 《한서》 지리지에는 지(地)자가 속(屬)자로 되어 있다.
[주D-002]이오사(二五事)의 …… 풍(風) : 《서경》 홍범에 보이는데, 이오사는 사람에 해당하고 팔서징은 하늘에 해당한다.
[주D-003]이적도이북(離赤道以北) : 적도(赤道)를 떠나 북으로라는 말이니, 곧 북위(北緯)를 가리킨다.
[주D-004]기처(起處) : 일어나는 곳이란 말이니 곧 영처(零處)와 같다.
[주D-005]이복도이동(離福島以東) : 복도를 떠나 동으로라는 말이니, 곧 동경(東經)을 가리킨다.
[주D-006]북신출지(北辰出地) : 북신이 땅에 나온다는 말이니, 곧 북위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