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해동역사--백제,고구려,신라

吾心竹--오심죽-- 2008. 12. 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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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온조(溫祚)는 고구려(高句麗)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한 성제(漢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한수(漢水)의 남쪽에 나라를 세웠다. 초기에는 십제(十濟)라고 하였다가 다시 백제로 고쳤으며, 마한(馬韓)에 대하여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뒤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문주왕(文周王) 초년에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 원휘(元徽) 3년(475) 이르러서 지금의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기었고, 성왕(聖王) 16년에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4년(538) 또다시 부여현(扶餘縣)으로 도읍을 옮겼다.
○ 백제는, 그 선조가 마한(馬韓) 54국으로,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였다. 《양서》 ○ 살펴보건대, 백제(百濟)는 본디 백제(伯濟)로 되어 있다. 《후한서》에는, 삼한은 78국으로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라고 하였고, 《삼국지》 위서에는, 마한은 54국인데, 그 가운데 한 나라를 백제(伯濟)라고 한다고 하였다.
○ 백제의 선조는 부여 동명왕(東明王)의 후손으로, 동명왕의 후손 가운데 구태(仇台)란 자가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어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그러자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가 그에게 딸을 보내 아내로 삼아 주었다. 점차 강성해져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으므로 인하여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10여 대를 내려오면서 대대로 중국을 신하로서 섬겼다. 《수서》 ○ 《후주서》에는, “백제의 선조는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다. 부여의 별종(別種) 가운데 구태(仇台)란 자가 있어서 비로소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 하였다.
백제는 위(魏)나라 때부터 조공을 바치면서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진(晉)나라 이후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점거하였으며, 진나라 때부터 대대로 번작(蕃爵)을 받았다. 《문헌통고》
○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 근초고왕(近肖古王) 27년 정월에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 6월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 왕 여구(餘句)에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제수하였다. 《이상 모두 진서》 ○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사(百濟史)에는 온조왕으로부터 12대를 전하여서 근초고왕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에 태원 원년으로 근구수왕(近仇首王) 3년(377)이다. 백제 왕 여수(餘須)가 사신을 보내어 생구(生口)를 바쳤다. 《송서》 ○ 살펴보건대, 《일본기(日本紀)》에는 백제의 구수왕(仇首王)이 귀수왕(貴須王)으로 되어 있으니, 수(須)는 바로 구수왕(仇首王)이다.
○ 11년 진사왕(辰斯王) 2년 4월에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를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으로 삼았다. 《진서》
○ 안제(安帝) 의희(義煕) 12년 전지왕(腆支王) 12년 백제 왕 여영(餘映)을 살펴보건대, 여영(餘映)이 《문헌통고》에는 여전(餘腆)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전지왕으로, 영(映)이 전(腆) 자와 글자가 비슷하여서 잘못 와전된 것이다.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으로 삼았다. 《송서》
○ 송(宋)나라 고조 영초(永初) 원년 전지왕 16년 7월 갑진에 진동장군 백제왕 부여영(夫餘映)에게 조서를 내려 호를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올리고 지절도독(持節都督) 및 왕공(王公)은 예전대로 두었다. 《상동》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 구이신왕(久爾辛王) 4년 부여영이 장사(長史) 장위(張威)를 파견하여 대궐에 나아가 조공을 바쳤다. 《상동》
○ 문제(文帝) 원가(元嘉) 2년에 구이신왕 6년 알자(謁者) 여구은자(閭邱恩子)와 부알자(副謁者) 정경자(丁敬子) 등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위로하게 하였다. 그 뒤로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방물을 바쳤다. 《상동》
○ 7년에 비유왕(毗有王) 4년 백제 왕 여비(餘毗)가 다시 공물을 바치자 여영의 작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27년에 비유왕 24년 여비가 글을 올려 방물을 바치고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와 서하 태수(西河太守)를 통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역림(易林)》과 식점(式占), 요노(腰弩)를 보내 주기를 요구하니, 태조(太祖)가 모두 주었다. 여비가 죽고 아들 여경(餘慶)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상동》
○ 세조(世祖) 대명(大明) 원년에 개로왕(蓋鹵王) 3년 여경(餘慶)이 사신을 보내어 벼슬을 제수해 줄 것을 요구하니,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상동》
○ 2년에 개로왕 4년 여경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렸는데,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인의 관직을 추인하여 제수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위 효문제(魏孝文帝) 연흥(延興) 2년 개로왕 18년 8월 병진에 백제 왕 여경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기를,
“삼가 본국에서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 배를 띄워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와 대대로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그 선조 고쇠(高釗)에 이르러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신의 경계를 짓밟았습니다. 이에 신의 선조 여수(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전격적으로 나가 싸워 고쇠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그 이후로 원한이 쌓이고 전화가 이어진 것이 3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장수 한 명을 보내어서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표문은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현조(顯祖)는 백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험한 길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는 이유로 예우를 매우 정중하고 후하게 하였으며, 사자(使者) 소안(邵安)을 파견하여 백제 사신과 함께 백제로 가게 하고,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내려 여경에게 잡물(雜物)을 하사하였다. 또 고구려 왕 고련(高璉)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 등을 호송하게 하였는데,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고구려 왕 고련이 여경과는 숙원이 있다고 하면서 백제로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에 소안 등이 모두 되돌아오자, 고구려 왕에게 다시 조서를 내려 심하게 꾸짖었다. 《후위서》
○ 5년에 개로왕 21년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서 뱃길로 백제로 가서 여경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그의 정성과 지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마침 폭풍을 만나 끝내 백제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후위서》
○ 여경이 죽고 그의 아들 모도(牟都)가 즉위하였다. 《양서》
○ 남제(南齊) 고조(高祖) 건원(建元) 원년 삼근왕(三斤王) 3년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리기를,
“모도가 대대로 동쪽 변경에서 울타리가 되고 먼 외방에서 공물을 바치니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을 제수한다.”
하였다. 모도가 죽고 그의 아들 모대(牟大)가 섰다. 《남사》 ○ 살펴보건대, 백제의 여러 왕 가운데는 모도란 이름이 없다. 그리고 《남제서》에는 “영명(永明) 8년에 모대를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뒤를 이어서 왕으로 책봉하였다.” 하였다. 《남사》에 의거하면 모도의 아들이 모대이고, 《남제서》에 의거하면 모도의 손자가 모대로서 서로 어긋난다. 우선은 이를 기록하여 후세의 고증을 기다린다.
○ 무제(武帝) 영명(永明) 8년(490)에 모대가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파견한 장사(長史) 고달(高達), 사마(司馬) 양무(楊茂), 참군(參軍) 회매(會邁) 등 세 사람에 대해서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예문지에 상세히 나온다.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태수(太守)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모대에 대해서는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으로 삼고, 겸알자 복야(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사신으로 보내어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이해에 위(魏)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경내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沙法名)ㆍ찬수류(贊首流)ㆍ해예곤(解禮昆)ㆍ목간나(木干那)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오랑캐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 ○ 살펴보건대, 원본에는 연도가 빠져 있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위나라 건무(建武) 2년(495)에 백제왕이 표문을 올리면서 “지난 경오년에 위나라가 백제를 정벌하였다.”고 하였는바, 여기에서 ‘이해’라고 한 것은 바로 경오년을 말하는 것이다. 경오년은 바로 영명(永明) 8년으로, 백제 동성왕(東城王) 12년이다.
○ 명제(明帝) 건무(建武) 2년에 동성왕 17년 모대가 표문을 올리기를,
“지금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행장군(行將軍)이 되게 하였으니, 삼가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표문은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장군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상동》
○ 양(梁)나라 고조 천감(天監) 원년 무령왕(武寧王) 2년 4월 무진에 진동대장군 백제 왕 여대(餘大)의 호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고 올렸다. 살펴보건대, 동성왕이 제(齊) 화제(和帝) 중흥(中興) 원년(501)에 이미 훙하였는데, 미처 중국에 통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호를 올린 것이다. 얼마 있다가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쇠약해 진 채 여러 해를 지나 남쪽 한(韓)의 지역으로 옮겨 갔다. 《양서》 ○ 살펴보건대, 백제는 문주왕(文周王) 때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겼다.
○ 11년 무령왕 12년 4월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동》
○ 보통(普通) 2년 무령왕 20년 11월에 백제 왕 여륭(餘隆)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통호하였다 하였으니,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된 것이다. 조서를 내려서 여륭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에 제수하였다. 《상동》
○ 5년에 성왕(聖王) 2년 여륭이 죽었다. 이에 다시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여명(餘明)을 지절 독백제제군사 유동장군 백제왕(持節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으로 삼았다. 백제는 도성(都城)을 고마(固麻)라고 하고, 읍을 담로(檐魯)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이란 말과 같다.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이 나누어 살고 있다. 《상동》
○ 대동(大同) 7년에 성왕 19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열반경(涅槃經)》 등에 대한 주석서와 모시 박사(毛詩博士) 및 공장(工匠))과 화사(畫師) 등을 청하니, 칙명을 내려 모두 주었다. 《상동》
○ 양(梁)나라 때 백제가 또 표문을 올려서 강례 박사(講禮博士)를 구하니, 조서를 내려서 육후(陸詡)로 하여금 가게 하였는데, 육후는 어려서 최영은(崔靈恩)의 《삼례의종(三禮義宗)》을 익혔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자 급사중(給事中)을 제수하였다. 《진서(陳書)》
살펴보건대, 육후가 백제로 온 것이 어느 해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우선은 이곳에다가 기록하였는데, 마땅히 천감(天監)과 대동(大同) 연간에 왔을 것이다. 대개 백제의 왕호(王號)는 대부분 방언(方言)을 취하여 붙였는데, 성왕(聖王) 원년(523) 계묘에 비로소 시호법(諡號法)을 제정하여 그의 부왕에게 무령(武寧)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 뒤로는 계속해서 시호를 올렸는바, 성왕(聖王)ㆍ위덕왕(威德王)ㆍ혜왕(惠王)ㆍ법왕(法王)ㆍ무왕(武王)의 왕호가 있었는데, 이는 모두 육후가 예(禮)를 강습한 효과이다. 그러나 상세한 것을 상고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 태청(太淸) 3년에 성왕 27년 백제에서 양나라의 서울이 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양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사신이 양나라에 이르러 성과 궁궐이 황폐된 것을 보고 모두 통곡하자, 후경(侯景)이 이를 듣고는 노하여 잡아 가두었다. 《자치통감》에, “백제의 사신이 단문(端門) 밖에서 통곡하자, 후경이 노하여 이들을 잡아 사실을 조사해 장엄사(莊嚴寺)로 보내었다.”고 하였다. 후경의 난이 평정되자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양서》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3년 위덕왕(威德王) 9년 2월 기유에 백제 왕 여명(餘明)을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으로 삼았다. 《진서》
○ 북제 후주(北齊後主) 무평(武平) 원년 위덕왕 17년 2월 계해에 백제 왕 여창(餘昌)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대방군공(使持節侍中驤騎大將軍帶方郡公)으로 삼고 왕호는 예전대로 두었다. 《북제서》
○ 2년 위덕왕 18년 정월 무인에 또다시 여창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 《상동》
○ 후주 무제(後周武帝) 건덕(建德) 6년 위덕왕 24년 제(齊)나라가 멸망하자, 백제 왕 여창이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 나라는 동쪽 끝은 신라와 닿아 있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로 막혀 있다. 동서의 거리는 4백 5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9백여 리이다. 도성은 고마성(固麻城)이고, 그 이외에 다시 5방(方)이 있는데,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라 한다.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로서 《북사(北史)》에, “백제 왕의 성은 여씨(餘氏)이다.” 하였다.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말로는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왕의 아내를 어륙(於陸)이라고 하는데, 중국말로는 왕비라는 뜻이다. 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나라가 강좌(江左)에 웅거하고 후위(後魏)가 중원을 차지할 때부터 모두 사신을 보내와 번국(藩國)을 자칭하여 봉작(封爵)을 받았으며, 제씨(齊氏)가 중국의 동쪽을 차지하였을 때에도 백제 왕 여륭(餘隆)이 사신을 보내었다. 《후주서》
○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원년 위덕왕 28년 10월 을유에 백제 왕 여창(餘昌)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자, 여창에게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을 제수하였다. 《수서》
○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하던 해에 개황 9년(591)으로, 바로 위덕왕 36년이다. 전선(戰船) 한 척이 표류하여 해동(海東)의 담모라국(牟羅國)에 살펴보건대, 바로 탐라(耽羅)이다. 이르렀는데, 그 배가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백제를 경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창이 노자를 아주 후하게 실어 보내 주었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서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이에 고조(高祖)가 잘 대우하면서 조서를 내려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해마다 별도로 조공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니, 사신이 기뻐 춤을 추면서 돌아갔다. 《상동》
○ 18년에 위덕왕 45년 여창이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뒤이어 마침 요동(遼東) 정벌하는 일이 있었는데,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군사를 앞장서서 인도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수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지난해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지 아니하므로 명령을 내려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왕 고원(高元)과 그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복종하기에, 짐은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다. 그러니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사신을 후하게 대접한 다음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여창이 죽고 그의 아들 여선(餘宣)이 즉위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여선은 바로 법왕(法王)의 이름으로 혜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의 손자이다. 여선이 죽고 그의 아들 여장(餘璋)이 즉위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위덕왕은 개황 18년에 훙하고, 그의 아들 법왕 여선이 즉위하였으며, 그다음 해에 또 법왕이 훙하고 그의 아들인 무왕(武王) 여장(餘璋)이 즉위하였으니, 바로 개황 20년(600)이다.
○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에 무왕 7년 여장이 사자(使者) 연문진(燕文進)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해에 또 사자 왕효린(王孝隣)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양제가 허락하고는 여장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여장은 속으로는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한 채 속이면서 중국을 넘보았다. 《상동》
○ 7년에 무왕 12년 양제가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여장이 그의 신하인 국지모(國智牟)를 보내어 군사를 출동시킬 날짜를 알려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내려 주고 상서 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로 보내어 서로 알리게 하였다. 《상동》
○ 8년에 무왕 13년 육군(六軍)이 드디어 요수(遼水)를 건넜다. 여장 역시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겉으로는 군사를 보내어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은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뒤에 신라와 틈이 벌어져 매번 서로 싸우게 되었다. 뒤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사신의 왕래가 끊어졌다. 《상동》
○ 당(唐)나라 고조 무덕(武德) 4년 무왕 19년 10월에 백제 왕 부여장(夫餘璋)이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백제국은 본디 마한의 옛 땅에 있으며, 경사(京師)에서의 거리가 6천 2백 리이다. 《구당서(舊唐書)》
○ 7년에 무왕 21년 백제 왕이 또 대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조공을 바치니, 고조가 그 성의를 가상하게 여기어 사신을 보내어서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을 책봉하였다. 이해부터 매년 조공을 보내자 고조가 어루만지고 위로함이 아주 후하였다. 이를 인하여 백제가 고구려에서 길을 막고 중국에 조공하지 못하게 한다고 호소하자, 조서를 내려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어 가서 화해시키게 하였다. 또 신라와 더불어서 서로 대대로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자주 침공하였다. 《상동》
○ 태종(太宗) 정관(貞觀) 원년에 무왕 28년 태종이 새서(璽書)를 내려 예문지에 자세히 나온다. 이르기를,
“신라는 짐의 번국(藩國)이고 왕의 이웃 나라이다. 짐이 이미 왕의 조카인 신복(信福)과 고구려ㆍ신라의 사신에게 서로 화친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니 왕은 모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어 짐의 본뜻을 잘 알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부여장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사죄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황제의 명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서로 원수로 지내었다. 《상동》
○ 11년에 무왕 38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철갑(鐵甲)과 조부(雕斧)를 바치자, 태종이 융숭하게 대접해 주고, 채백(綵帛) 3천 필과 금포(錦袍) 등을 하사하였다. 《상동》
○ 15년에 무왕 42년 부여장이 졸하자 그의 아들 부여의자(扶餘義慈)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부음을 고하였다.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증직하고, 부의(膊儀) 2백 단을 주었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신당서》에는 “사부낭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파견하였다.” 하였다. 부여의자를 책봉하여 주국(柱國)으로 삼고,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에 봉하였다. ○ 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하여 행실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었고, 형제들에게 우애스럽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고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6년에 의자왕 2년 백제의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입해 40여 성을 취하고, 또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지켰다. 그러고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당항성(黨項城)을 탈취해 신라에서 입조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고하고는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사농 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가 고구려와 백제에게 유시하면서 어느쪽이 유리한가를 말하면서 달래게 하였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함에 미쳐서 백제가 두 마음을 품고 있다가 빈틈을 타 신라의 10성을 습격해 격파하였다. 《상동》
○ 22년에 의자왕 8년 또 신라의 10여 성을 격파하였다. 몇년 동안에 조공이 드디어 끊어졌다. 《상동》
○ 고종(高宗) 영휘(永徽) 2년에 의자왕 11년 백제가 사자를 파견하였다. 돌아갈 때 황제가 의자왕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해동의 세 나라가 건국한 지 이미 오래인데, 그 강역이 견아(犬牙)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서로 틈이 벌어져 싸우는 탓에 편안할 날이 거의 없다. 신라에서 큰 성과 중요한 진을 다 왕에게 병탄당하여 짐에게 이를 되찾아 달라고 청하여 왔으니, 왕은 이 땅을 되돌려 주기 바란다. 옛날에 제나라 환공(桓公)은 일개 제후인데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보존하여 주었다. 더구나 짐은 만방의 주인인데 번국(藩國)의 위태로움을 돌보아 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왕이 병탄한 신라의 성은 의당 되돌려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신라에서 잡아간 백제의 포로들 역시 되돌려 주게 할 것이다. 왕이 조서에서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왕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장차 거란과 여러 나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요수(遼水)를 건너 깊이 쳐들어가게 할 것이니, 왕은 깊이 생각해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구당서 및 신당서》
○ 6년에 의자왕 15년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또 표문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ㆍ말갈의 군사와 더불어서 북쪽 국경을 침입하여 이미 30여 성이 함락당하였다고 하였다. 《구당서》
○ 현경(顯慶) 5년 의자왕 20년 3월 신해에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병도 행군대총관(神兵道行軍大摠管)으로 살펴보건대, 신병도(神兵道)가 《자치통감》에는 신구도(神邱道)로 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이 맞다. 삼은 다음 살펴보건대, 《구당서》의 소정방열전과 신라열전에는 모두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해의 실록(實錄)과 《신당서》의 본기(本紀)와 소정방열전에는 신병도 총관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통감고이(通鑑考異)》에는 “《구당서》 본기와 《당력(唐曆)》에는 모두 ‘4년 12월 계해에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을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소정방이 이때에는 도만(都曼)을 토벌하느라 신구도총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구당서》와 《당력》은 모두 틀린 것이기에 지금 《실록》을 따른다.” 하였다.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를 거느리게 하고,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를 정벌하였다. 《신당서》
○ 8월에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成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웅진(熊津)의 강어귀에 이르렀다. 백제는 강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소정방이 동쪽 강 언덕으로 올라가서 산을 타고 진을 친 다음 백제군과 크게 싸웠는데, 후군이 배를 타고서 잇달아 나왔다. 백제군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 조수(潮水)가 밀려오자 이 조수를 타고서 배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소정방이 강 언덕에 진을 치고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한꺼번에 진격하였는데, 노를 젓고 북을 울리면서 곧장 백제의 도성을 향해 진격하였다.[直趣其都]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곧장 진도성을 향해 진격하였다.[直趣眞都城]”고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도성에서 20여 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백제에서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항거하였다. 크게 싸워서 백제군을 격파해 1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뒤 도망치는 백제 군사를 추격해 성 밖에 이르렀다. 그러자 백제 왕 의자와 태자 부여융(扶餘隆)이 북쪽으로 도망쳤다. 소정방이 진격해 도성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백성을 거느리고서 굳게 지켰다. 그러자 의자의 적손(嫡孫)인 부여문사(扶餘文思)가 태자 부여융의 아들이다.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비록 성을 나가기는 하였으나 아직 건재하신데 숙부께서 병마를 모두 주관하면서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에 당나라 군사가 물러갈 경우 우리 부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가까운 사람들을 거느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자, 백성들이 그를 따르니, 부여태가 이를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으로 뛰어 올라가서 깃발을 꽂게 하니, 부여태가 성문을 열어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대장 예식(禰植)이 또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고, 태자 부여융이 여러 성의 성주들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에 소정방이 의자와 태자 부여융 및 소왕(小王) 효(孝)ㆍ연(演), 추장(酋長) 58명을 포로로 하여 경사로 보내고 백제를 모두 평정하였다.
○ 백제는 본디 5부(部)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군(郡)이 37개, 성(城)이 2백 개, 호구가 76만 호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백제를 나누어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 등 5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신당서》에, “웅진ㆍ마한ㆍ동명ㆍ금련(金漣)ㆍ덕안(德安)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하였다. 각각 주현(州縣)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추장들을 뽑아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으로 삼았다. 《이상 모두 구당서》
○ 11월 무술에 살펴보건대, 《신당서》 본전(本傳)에는 9월로 되어 있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포로들을 황제에게 알현시키었다. 황제가 측천문루(則天門樓)에 나아가 포로들을 받고 백제 왕 의자 이하를 모두 석방하였다. 의자는 서울에 이르른 지 며칠 만에 졸하였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특별히 그의 옛 신하들에게 나아가 곡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손호(孫晧)와 진숙보(陳叔寶)의 묘 곁에 장사 지내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으며, 아들 부여융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책부원귀》
○ 용삭(龍朔) 원년(661) 3월이다. 당초에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백제의 부성(府城)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나머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는데,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병이 나 졸하였다. 백제의 승(僧)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福信)이 《신당서》에, “복신은 여장(餘璋)의 조카이다.” 하였다. 백성들을 이끌고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신을 왜국(倭國)으로 보내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맞아와 왕으로 세웠다. 그러자 서부(西部)와 북부(北部)가 모두 성을 들어서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부성(府城)에서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서 유인궤(劉仁軌)를 다시 기용하여 살펴보건대, 《구당서》 유인궤열전을 보면, “유인궤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요동을 정벌할 때 약속한 날짜에 군사를 이끌고 오지 못한 죄에 걸려 면직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명해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한 것이다.”고 하였고, 《통감고이》에는, “유인궤가 종군한 것은 백제를 정벌할 때였지 요동을 정벌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를 삼았다. 《자치통감》 주에, “대방주(帶方州)를 백제에 두었는데, 이는 옛 지명을 인하여 주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하였다. ○ 《통감고이》에,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이르기를, ‘유인원이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본전(本傳)을 따른다.” 하였다. 유인궤는 왕문도(王文度)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힘을 합해 유인원(劉仁願)을 구원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가면서 싸웠다. 유인궤가 군사를 엄정히 제어(制御)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시켰다. 백제의 도침 등이 웅진의 강어귀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관군(官軍)을 막으니, 유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도망하여 목책으로 들어가려고 서로 다투었는데, 물에 가로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강에 떨어져 죽거나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도침 등이 이에 유인원을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에 머물렀다. 《자치통감》 주에, “임존성은 백제 서부 임존산(任存山)에 있다.” 하였다. ○ 《통감고이》에, “실록에는 혹 임효성(任孝城)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지금은 이에 많이 나오는 것을 따른다.” 하였다. 신라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그때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유민(流民)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불어났다. 도침이 사자를 인궤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을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죽이고 나서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이 때문에 백성들을 끌어 모아 굳게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유인궤가 글을 지어 어떻게 하는 것이 유리한지를 두루 말하고는 사신을 보내어 달래었다. 그러나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는 교만을 부리면서 유인궤가 보낸 사신을 외관(外館)에 머무르게 한 다음 전하는 말로, “사신은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 함께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기 때문에 유인원의 군사와 합친 다음 사졸을 쉬게 하였다. 《구당서》
○ 황제가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이에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조서를 받들고는 그의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궤 등을 구원케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렀을 때 고사는 지명으로 백제의 국내에 있다. 복신이 김흠의 군사 숫자가 적은 것을 알고는 요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에서 도망하여 오자, 신라의 군사들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자치통감》
○ 얼마 뒤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니, 부여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祭祀)만 주관할 뿐이었다. 《구당서》
○ 용삭 2년이다. 처음에 유인궤 등이 군사를 합쳐 주둔하여 지키고 있었다. 《자치통감》에, “웅진성에 주둔하였다.” 하였다. 이때 소정방이 조서를 받들고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진격해서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에 고종(高宗)이 유인궤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평양의 군사가 되돌아왔는바, 한 성을 혼자 고수(固守)할 수 없을 것이다. 신라로 옮겨 가 신라의 군사와 함께 둔수(屯守)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김법민(金法敏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경들의 유진(留鎭)을 의뢰해 오거든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지만, 만약 원하지 않거든 바로 바다를 건너 돌아오라.”
하였다. 이에 장사들이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무릇 《춘추》의 의리는 대부(大夫)가 국경 바깥을 벗어났으면 사직을 안정케 하고 국가를 편안하게 하여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넓고 푸른 바다 밖에서 이리와 같은 자들과 바짝 붙어 있는 경우이겠는가. 그리고 인신(人臣)은 나아가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법이며, 나라에 이롭다는 것을 알면 무슨 일이든 다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주상(主上)께서 고구려를 멸하고자 먼저 백제를 치고 군사를 남겨 두어 지키게 하여 그들의 심복(心腹)을 제어하게 하신 것이다. 비록 남은 도둑이 많고 수비가 매우 엄밀하나, 창을 갈고 말을 잘 먹여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를 틈타서 공격할 경우, 그들이 이에 대비하고 있지 않으니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이기고 나서 사졸들의 마음이 편안해진 뒤에 군사를 나누어 험지(險地)를 점거하여 형세를 펼치고 글을 올려 다시 군사를 더 보내 줄 것을 요구하면, 조정에서는 성공한 것을 알고 반드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 줄 것인바, 성원(聲援)이 있으면 남은 흉추(兇醜)들은 저절로 섬멸될 것이다. 이것은 곧 성공을 버리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실로 길이 해외(海外)를 맑게 하는 것이다. 지금 평양의 군사가 이미 되돌아갔는데 웅진에 있는 군사마저 철수한다면 백제의 남은 무리가 곧 다시 흥기할 것이니, 고구려를 언제 멸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우리는 성 하나만을 차지한 채 적의 한가운데 있으니, 혹 잘못 움직이기만 하면 곧바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또한 나그네 신세가 되는 것으로, 만일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그때는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복신(福信)은 흉패하고 잔학하며 여풍(餘豐)은 투기심과 의심이 많아 겉으로는 친한 척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벌어져 있는바, 이 둘이 함께 있으면 반드시 서로 해칠 것이다. 그러니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그들의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서 그들을 취해야지,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랐다. 《구당서》
○ 이때 백제 왕 부여풍과 복신 등이 유인원 등이 후원군도 없이 외롭게 성을 지키는 것을 보고는 사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대사(大使)들은 언제 중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때는 나가서 전송하겠다.”
하였다. 《자치통감》
○ 7월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진에 남아 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 웅진의 동쪽에서 복신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ㆍ대산(大山)ㆍ사정(沙井) 등의 성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어 군사를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있고 험준하며 또 요충지라고 하여 군사를 더해 지켰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에 다가가 사면에서 성첩(城堞)에 기어 올라가 새벽에 그 성을 점거한 다음 8백 명을 참살하였다. 이에 드디어 신라와의 향도(餉道)가 뚫렸다. 유인원이 이에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주청하니, 고종이 조서를 내려 치주(淄州)ㆍ청주(靑州)ㆍ내주(萊州)ㆍ해주(海州)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한 다음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파견해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손인사를 웅진도총관(熊津道摠管)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으로 가서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이때 복신이 이미 병권을 장악하고는 부여풍과 점차 서로 반목하였다. 복신이 병이 났다고 하면서 굴실(窟室)에 누워 부여풍이 문안 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습격해서 죽이려고 꾀하였다. 부여풍이 사전에 이 사실을 눈치 채고는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쳐 죽였다. 또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를 막아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손인사가 중간에서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런 다음 드디어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구당서》
○ 3년 8월에 여러 장수들이 모여 회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가림성(加林城)은 수륙(水陸)의 요충지이니 먼저 이곳을 공격하자.”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급히 공격하면 사졸이 상하게 되고 그들이 굳게 지키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근거지로, 백제의 군사가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다. 악을 제거하려면 근본을 제거하여야 하는 바, 모름지기 그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한다. 만약 주류성을 함락시키면 그 나머지 여러 성은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 및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이 육군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별장 두상(杜爽) 및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양선(粮船)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白江)으로 들어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무오에 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왜병을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는 그들의 배 4백 척을 모두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어 백제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부여풍이 몸을 빼내 달아나자 그의 보검(寶劍)을 노획하였다. 그러자 위왕자(僞王子)인 부여충승(扶餘忠勝)ㆍ부여충지(扶餘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국 군사, 탐라(耽羅) 사신 등을 거느리고 한꺼번에 모두 항복하였고, 백제의 여러 성들이 모두 귀순하였으며, 오로지 별수(別帥)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백제의 수령(首領) 사타상여(沙吒相如)ㆍ흑치상지(黑齒常之)가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간 뒤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 각각 험지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은혜와 신의로 그들을 달래고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제를 거느리고 임존성을 취하게 하고, 또 군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도우려고 하였다. 그러자 손인사가 말하기를,
“사타상여 등은 짐승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믿기가 어렵다. 만약 병기를 그들에게 준다면, 이는 도적에게 무기를 대 주는 꼴이 된다.”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사타상여와 흑치상지 두 사람은 충성스럽고도 지모가 있으며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따르면 성공하고 우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으로, 기회를 틈타 공을 세우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으니, 의심할 것 없다.”
하고, 드디어 군량과 병기를 대 주고, 군사를 나누어 그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들이 드디어 임존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가 유인원 등과 함께 철군하여 돌아왔다. 고종이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유인원을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하게 하였다.
당초에 백제는 복신의 난을 겪은 나머지 온 국내가 잔폐되고 시체가 들판에 깔렸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을 거두어 묻게 하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고, 호적을 정비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고, 도로를 닦고, 촌락을 정리하고, 교량(橋梁)을 세우고, 제방을 보수하고, 방죽을 복구하고, 농사를 장려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보살펴 주고, 종묘(宗廟)의 기휘(忌諱)를 반포하고,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니, 백제의 남은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편안히 종사케 되었다. 이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양곡을 저장하고 사졸을 훈련시켜 고구려를 칠 계획을 하였다. 이에 고종이 유인궤를 여섯 자급이나 올려서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에 제수하였다. 《상동》
○ 인덕(麟德) 원년(664) 10월 경진에 유인궤가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폐하께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백제를 평정한 다음 군사를 남겨 두어 지키게 하고, 고구려를 칠 계획을 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만약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신다면 백제 땅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부여풍(扶餘豐)이 현재 북쪽에 있고, 부여용(扶餘勇)이 남쪽에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는 예전부터 서로 응원을 하고, 왜국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역시 백제와 서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백제에 군사를 남겨 두지 않는다면 백제는 도로 나라를 부흥시킬 것입니다. 이미 백제를 진압하고서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적군의 군사들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병사들에게 이미 이의(異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바다를 건너 원정한 데 대한 관훈(官勳)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러 간 데 대한 공훈을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별도로 포상하고 칙서를 내려 위로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흥기시켜야만 합니다.”
하였는데, 고종이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부여용이란 자는 부여융(扶餘隆)의 동생으로 이 당시에 왜국으로 달아나 있으면서 부여풍을 응원하고 있었으므로 유인궤가 표문을 올리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동》
○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유인원을 비열도 총관(卑列道摠管)으로 삼고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로 건너가 먼저 있던 군사들과 교체해 지키게 하고, 먼저 있던 군사들은 유인궤와 함께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인궤가 말하기를,
“상께서 각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또 고구려를 경략하고 있다. 현재 농사철이 한창인데 관리와 군사들을 모두 교체하면 새로 온 자들이 일에 익숙하지 않을 것인바, 만일에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킬 경우 누구와 함께 막겠는가. 예전에 지키던 군사들을 남겨 두는 것이 낫다. 나는 남아 있어야 하니 떠날 수 없다.”
하고, 이어 표문을 올려 그에 대한 편의를 진달하면서 남아서 지키기를 원하니, 고종이 조서를 내려 그러라고 하였다. 유인궤가 또 표문을 올려서 부여융(扶餘隆)으로 하여금 남은 백성들을 달래게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삼은 다음 살펴보건대, 《통감》에는 웅진도위(熊津都尉)로 삼은 것으로 되어 있다. 《통감고이》에 이르기를, “유인궤가 검교웅진도독(檢校熊津都督)으로 있는데 어찌 다시 부여융을 도독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다음 해의 실록에는 부여융의 관직을 웅진도위라고 하였는바, 지금 그에 따른다.” 하였다. 그로 하여금 귀국해서 신라와의 숙원을 풀고 유민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신당서》
○ 2년 8월에 부여융이 웅진성에 도착하여 신라 왕 김법민과 함께 백마(白馬)를 잡아 놓고 맹세(盟誓)하였는데, 먼저 천지 산천(天地山川)의 신에게 제사 지낸 후에 피를 마시고 함께 맹세하였다. 맹세한 글에 이르기를,
“지난날 백제의 선왕(先王)들이 순역(順逆)을 제대로 몰라서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돈독히 하지 아니하고 또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아니했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통호하여 함께 잔학한 짓을 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해 고을을 파괴하고 성(城)을 도륙하여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께서 한 백성이라도 제 살 곳을 잃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무고한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자주 사자(使者)를 보내 화친할 것을 효유하시었다. 그런데도 지세가 험하고 중국에서 멀다는 것을 믿어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모멸하였다. 이에 황제께서 노하여 폭군을 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일을 한번 거행하시니, 천자의 군사가 나가는 곳에 한 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을 헐어 못을 만들어 후예의 경계를 삼게 하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손의 교훈을 삼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를 품어 주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전왕(前王)들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 주는 것은 지난 현철(賢哲)들의 통상적인 규범으로,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옛일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역사책에 실려 전해 오고 있다. 이에 전의 백제 태자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융(扶餘隆)을 책립하여 웅진 도독으로 삼아 선대의 제사를 지키고 고국을 보전하게 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신라와 의지하여 길이 동맹국이 되어 각자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으며, 공손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길이 번방(藩邦)으로 복속할지어다. 이어 사인(使人) 우위위장군 노성현공(右威衛將軍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파견하여 친히 그 회맹에 임해 타이르고 깨우침과 동시에 나의 뜻을 널리 반포하며,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써 다짐하게 한다.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시종(始終)토록 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인 바, 재앙은 나누어 갖고 환란은 서로 구제하여 은의(恩義)를 형제같이 하라. 공경히 윤음을 받들어 감히 저버리지 말고, 맹세를 한 뒤에는 송백처럼 어느 때나 변함없이 지키라. 만일 신의를 저버리고 두 마음을 품어 군사를 일으켜 상대방의 변경을 침범하면, 신명(神明)께서 굽어보시고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이 끊기고 사직도 무너져 제사는 물론 종족도 보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금서(金書) 철권(鐵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여 두니, 자손만대토록 어김없도록 하라. 신명께서는 이 맹약을 들으시고 흠향(歆饗)하여 복을 내리소서.”
하였다. 유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셔서 맹세하는 의식을 마치고 제단 아래에 깨끗한 곳을 골라 폐백(幣帛)을 파묻고, 맹세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였다.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중국으로 돌아오자, 부여융이 신라가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얼마 뒤에 경사(京師)로 귀순해 왔다.
○ 천자가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 유인궤가 신라ㆍ백제ㆍ탐라ㆍ왜 네 나라의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달려와 조회하였다. 《이상 모두 구당서》
○ 의봉(儀鳳) 원년(676) 2월 갑술에 웅진도독부를 건안(建安)의 옛 성으로 옮긴 다음 앞서 서주(徐州)와 연주(兗州) 등으로 옮겼던 백제의 호구(戶口)를 모두 건안으로 옮겼다. 《자치통감》
○ 2년 부여융을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光祿大夫太常員外卿兼熊津都督帶方郡王)에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백제로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하게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해져서 점차 신라의 소유가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신당서》에는 부여융이 감히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부쳐 살았다고 하였다. 부여융이 마침내 감히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손자인 부여경(扶餘敬)이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대방군왕에 습봉(襲封)되어 위위 경(尉衛卿)을 제수받았다. 백제 지역은 이로부터 점차 신라 및 발해(渤海)ㆍ말갈(靺鞨)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어 백제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졌다. 《구당서》


 

[주D-001]백제의 시조 온조(溫祚) :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온조설(溫祚說)과 비류설(沸流說)이 있는데, 이병도는, 온조설은 온조를 수장(首長)으로 한 위례부락(慰禮部落) 계통의 전설이며, 비류설은 비류를 수장으로 받들던 미추부락(彌鄒部落) 계통의 전설인 듯하다고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1쪽ㆍ353쪽 주》
[주D-002]한 성제(漢成帝) …… 세웠다 : 이병도는, “이때에 온조가 건국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온조가 실재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는 북방으로부터 부여씨족단(扶餘氏族團)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한 유이부락(流移部落)을 건설한 수장(首長)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3쪽 주》
[주D-003]십제(十濟) : 이병도는, “처음에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후일의 조작이다. 초기의 국명은 국도명(國都名)에 따라 ‘위례(慰禮)’였을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3쪽 주》
[주D-004]창오왕(蒼梧王) : 송나라 후폐제(後廢帝)를 가리킨다.
[주D-005]당초에 …… 불렀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백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으므로 백제(百濟)라고 하였다는 설은 모두가 후일 백제인들의 부회(附會)에 지나지 않는다. 백제란 이름이 백제국(伯濟國)에서 유래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3쪽 주》
[주D-006]정월에 …… 바쳤다 : 《동사강목》 제2에 “이것이 백제가 중국과 교통한 시초이다.” 하였다. 근초고왕은 이때 대방(帶方)과 마한을 병합하는 동시에 동진(東晉)ㆍ일본 등과 외교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이해에 일본으로 보낸 칠지도(七枝刀)가 지금 남아 전한다.
[주D-007]여구(餘句) : 근초고왕의 이름으로, 여(餘)가 성이고 구(句)가 이름이다. 백제 왕족의 성씨는 본디 부여씨(扶餘氏)인데, 흔히 여씨(餘氏)로 약칭한다. 이하 번역문에서는 부여씨로 나오는 곳은 그대로 부여씨로 표기하고, 나머지는 여씨로 통일시켜 표기하였다.
[주D-008]소제(少帝) …… 바쳤다 : 부여영은 전지왕의 이름으로, 이때에는 이미 3년 전에 죽었다. 그런데도 중국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 측 사서(史書)에 종종 보인다.
[주D-009]역림(易林)과 식점(式占) : 《역림》은 한(漢)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지은 책으로 총 1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흉을 점치는 법을 기술하였다. 식점은 육임(六壬)ㆍ태을(太乙)ㆍ뇌공(雷公) 등 세 종류의 점치는 법을 말한다.
[주D-010]이해에 …… 들어가니 : 이에 대해 《국역중국정사조선전》에는 “여기에서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경내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위나라가 직접 바다를 건너서 백제 본토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백제의 영역을 침입한 것을 말한다.” 하였으며,《국역중국정사조선전, 국사편찬위원회, 1986, 71쪽》 이병도는 “《동사강목》의 찬자(撰者) 안정복(安鼎福)의 설과 같이 위주(魏主)가 백제에서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해로(海路)로 군사를 보내어 침공하다가 패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99쪽 주》
[주D-011]여륭(餘隆) : 무령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사마(斯摩)’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으며, 공주(公州)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왕명인지 모르겠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03쪽 주》
[주D-012]도성(都城)을 …… 하는데 : 이병도는 이에 대해, “고마(固麻)는 ‘고마’ㆍ’곰’이니, 웅진(熊津)을 가리키는바 지금의 공주(公州)이고, 담로(檐魯)는 ‘담로(擔魯)’로 대읍성(大邑城)을 말하는 백제어(百濟語)인 ‘다라’의 음을 베껴 쓴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05쪽 주》
[주D-013]최영은(崔靈恩) : 양(梁)나라 동무성(東武城)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독실하여 오경(五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삼례(三禮)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모시주(毛詩注)》ㆍ《주례집주(周禮集註)》ㆍ《삼례의종(三禮義宗)》 등이 있다.《梁書 卷48》
[주D-014]양나라의 서울 : 이 당시의 양나라 서울은 건강(建康)으로, 지금의 남경(南京) 동남쪽의 강녕(江寧)이다.
[주D-015]여명(餘明) : 위덕왕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창(昌)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명(明)이라고 하였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삼국유사》 왕력편에 위덕왕의 이름을 명(明)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성왕의 이름인 명농(明穠)과 혼동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09쪽 주》
[주D-016]5방(方) : 백제에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내(都內)의 5부(部)와 지방의 5방(方) 제도가 있었다. 지방에 있었던 5방의 위치에 대하여 이병도는 “동방 득안성(得安城)은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恩津) 부근이고, 서방 도선성(刀先城)은 미상(未詳)이고,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은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長興)이고, 북방 웅진성(熊津城)은 지금의 공주(公州)이고, 중방 고사성(古沙城)은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沃溝)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563쪽》
[주D-017]어라하(於羅瑕)라고 …… 건길지(鞬吉支) : 이병도는 “어라하(於羅瑕)는 당시 치자계급(治者階級)인 부여 계통(夫餘系統)의 사람들이 왕을 부르는 칭호이고, 건길지는 피치계급(被治階級)인 마한 계통(馬韓系統)의 사람들이 왕을 부르는 칭호이다. 어라하(於羅瑕)는 종래 무가(巫歌)에서 ‘어라하 만수(萬壽)’라 하는 곳의 ‘어라하’에 해당하는 말인 듯하다. 건길지의 건은 국어의 ‘큰[大]’의 사음(寫音)이고, 길지(吉支)는 길사(吉師)와 같이 귀인(貴人)에 대한 존칭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1쪽 주》
[주D-018]어륙(於陸) : 이병도는 “어륙은 왕실에서 왕비를 부르던 칭호로, 후세어에 남동생의 아내를 칭하는 ‘올케’로 변한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51쪽 주》
[주D-019]과하마(果下馬) :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키가 작은 말의 이름으로, 일찍부터 중국에 이름이 알려져서 중요한 조공품이 되어 왔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예조(濊條)의 배송지(裴松之) 주(註)에 “과하마는 높이가 3척으로, 말을 타고서 과수나무 밑을 지나갈 수가 있으므로 과하마라 한다.” 하였다.
[주D-020]신복(信福) : 《삼국사기》에는 복신(福信)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27 百濟本紀 第5》
[주D-021]해동증민(海東曾閔) : 백제의 제31대 의자왕을 말한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말하며, 증민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효자로 이름 높았던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킨다. 의자왕이 태자 시절에 효와 형제애가 뛰어나서 붙인 별명이다.
[주D-022]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23]태자 부여융(扶餘隆) : 부여융은 태자가 아니라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다. 태자는 부여효(扶餘孝)였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당나라 측 사서에서 부여융을 태자라고 한 것은, 사비성 함락에 솔선하여 항복해 온 그를 의자왕의 후계자로 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21쪽 주》
[주D-024]5부(部) : 백제의 수도인 부여(扶餘)의 행정 구역으로, 상부(上部)ㆍ중부(中部)ㆍ전부(前部)ㆍ후부(後部)ㆍ하부(下部)를 말한다. 이 5부에는 각각 5항(巷)을 두었으며, 부에는 군사 5백 명을 배치하여 달솔(達率)로 하여금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주D-025]손호(孫晧)와 진숙보(陳叔寶)의 묘 : 손호는 삼국 시대 오나라 손권(孫權)의 손자로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진(晉)나라에게 사로잡혀서 낙양에 잡혀 와 있다가 죽었다. 진숙보는 진 후주(陳後主)로 주색에 빠져 나라를 그르쳤으며, 수(隋)에 포로로 잡혀 와 있다가 낙양에서 죽었다.《三國志 卷48》 《陳書 卷6》
[주D-026]주류성(周留城)을 …… 일으키고는 : 주류성은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복신(福信)ㆍ도침(道琛) 등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로, 661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물리치고 한때 전세가 유리하기도 하였으나, 내부의 알력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663년에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병도는 “복신과 도침이 처음에 점거한 곳은 주류성이 아니라 임존성(任存城) 즉 지금의 충청남도 대흥(大興)을 점거하여 흑치상지(黑齒常之) 등과 함께 거병한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27쪽 주》
[주D-027]부여풍(夫餘豐) :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부여풍은 그 뒤 복신을 살해하고 병권을 잡았으나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 군사에게 잡혀가 당나라의 오령(五嶺) 남쪽으로 귀양 갔다.
[주D-028]신라의 …… 돌아갔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신라군이 철군한 것은 사비성의 포위가 해제되기 이전이었고, 양식이 다 떨어져 퇴군한 것이 아니라 패전의 결과였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29쪽 주》
[주D-029]고사(古泗) : 지금의 충청남도 고부(古阜)이다.
[주D-030]지라성(支羅城) : 지금의 충남 대덕군 진잠(鎭岑)이다. 또는 주류성(周留城)의 별칭이라는 설도 있다.
[주D-031]진현성(眞峴城) : 진현(眞峴)은 지금의 진잠(鎭岑)인데, 이곳은 강을 끼고 있는 험고한 곳이 아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진잠에는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 없으므로 이는 잘못인 것 같다. 이것은 유성산성(儒城山城) 즉 내사지성(內斯只城)으로 정정하여야 할 것이다. 유성산성은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31쪽 주》
[주D-032]가림성(加林城) : 지금의 충청남도 임천(林川)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이다.
[주D-033]부여융을 …… 하였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당나라에서 백제 유민을 위무하는 한편 신라의 백제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여 백제의 옛 영토에서 당의 지배를 확립시키려는 목적에서 부여융을 웅진 도독에 제수한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431쪽 주》
[주D-034]부여융이 …… 맹세하였는데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제6에, “8월에 왕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 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화친을 맹세하였다.” 하였다. 취리산의 위치는, 《여지승람(輿地勝覽)》 권17 공주고적조(公州古跡條)에, “취리산은 주의 북쪽 6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지금의 공주 금강 북안에 솟은 연미산(鷰尾山)으로 비정된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95쪽 주》
[주D-035]인친(姻親) : 동성왕 15년에 백제에서 신라에 청혼하자 신라에서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로 시집보낸 적이 있으므로, 백제와 신라는 인친의 관계에 있었다.《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주D-036]백제 지역은 …… 되어 :

이 기사는 사실과 다르다. 백제의 영토는 문무왕 11년(671)에 완전히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바, 고구려와 말갈이 백제의 지역을 점유한 적은 없었다.

 

 


 

고구려(高句麗) 1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高句驪)는 혹 고려(高驪)라고도 되어 있으며, 동사(東史)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되어 있다. 대개 구려(句驪)라는 칭호는 고주몽(高朱蒙)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진한(秦漢) 시대에 이미 그 나라가 있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군에 예속시켰다.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갑신에 이르러서 고주몽이 비로소 옛 구려(句驪)의 땅에다가 나라를 세우고 이어 고구려(高句麗)라고 이름 하였다. 그렇다면 동방에 전후로 두 개의 구려란 나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해동의 여러 오랑캐와 구려(駒驪)의 족속들이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尙書傳)》
주이존(朱彜尊)이 말하기를,
“공안국(孔安國)이 《서전》 ‘뇌숙신지명(賄肅愼之命)’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해동의 구려(駒驪)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들이 무왕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서(周書)》 왕회편(王會篇)에는 ‘북쪽으로는 직신(稷愼)이 있고 동쪽으로는 예량(穢良)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구려나 부여란 명칭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구려 왕 주몽이 한 원제 건소 2년에 비로소 나라를 세웠는데 그 국호가 《동국사략(東國史畧)》에 실려 있다. 그러니 공안국이 조서를 받들고 《서전》을 지을 때에는 아마도 구려나 부여란 칭호의 나라가 중국에 통하지 않았을 듯한데, 하물며 무왕이 상을 이겼을 때이겠는가.”
하였다. 《경의고(經義考)》 ○ 삼가 살펴보건대, 죽타(竹垞 주이존의 자(字)임)가 두 개의 구려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잘못 변증한 것이다.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북방대(北方臺)는 정동쪽의 고이(高夷)로 겸양(嗛羊)이었다. 《급총주서》
고이(高夷)는 동북쪽의 오랑캐로 고구려(高句驪)이다. 《급총주서주》
○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조선ㆍ예ㆍ맥(貉)ㆍ구려의 만이(蠻夷)에 설치하였다. 《한서》 ○ 응소(應劭)의 주에는, “현도군 고구려현은 옛 구려호(句驪胡)이다.” 하였다.
○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1천 리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ㆍ예ㆍ맥(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인접하였으며, 땅이 사방 2천 리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데, 백성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동이(東夷)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그러므로 언어와 법칙이 부여와 많이 같다. 무릇 다섯 부족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ㆍ절노부(絶奴部)ㆍ순노부(順奴部)ㆍ관노부(灌奴部)ㆍ계루부(桂婁部)가 있다. 본래는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점차 미약하여져서 뒤에는 계루부가 대신 왕이 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는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한 다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 주었다. 사람들의 성품은 급하고 기력(氣力)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이들에게 예속되었다. 《후한서》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말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부여 왕이 하백의 딸을 붙잡아 실내에다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치므로 몸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가서 비추었다. 그 뒤 얼마 후에 임신되어 닷되들이 만한 큰 알 하나를 낳았다. 부여 왕이 이를 내다 버려 개에게 주니 개가 먹지 아니하였고, 돼지에게 주니 돼지도 먹지 아니하였으며, 길바닥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갔다. 그 뒤 들에다 내다 버리니 뭇 새가 날아와 깃털로 그 알을 품어 주었다. 부여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그 어머니가 물건에 싸서 따스한 곳에 두었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 아이가 자라나자 자(字)를 주몽(朱蒙)이라 하였는데, 당시 고구려의 속언에 주몽이란 활 잘 쏘는 자를 이른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반드시 이심을 품을 것이라 하여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치게 하였다. 주몽은 말을 치면서 남몰래 말의 좋고 나쁨을 시험하여, 준마는 먹이를 줄여 파리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그러자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을 주었다. 그 뒤에 들에 나가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짐승 한 마리에 화살 한 개만을 쓰도록 주었는데, 주몽은 비록 화살 수가 적었으나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이에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죽이기를 꾀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죽이려고 한다. 너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멀리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주몽은 곧 오인(烏引)ㆍ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서 큰 강 하나를 만났는데,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은 매우 급히 추격하고 있었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지금 도망치는 중인데 추격하는 군사가 쫓아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 물을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곧바로 어별(魚鼈)이 물 위로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이 무사히 그 강을 건너게 되었다. 주몽이 다 건너자 어별이 흩어져 추격하던 기병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살펴보건대, 《후주서(後周書)》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으로 되어 있다. 가서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후위서》 ○ 삼가 살펴보건대, 흘승골성은 바로 동사(東史)에서 말하는 졸본부여(卒本夫餘) 땅이다. 그 땅은 강계부(江界府)의 폐현(廢縣)인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있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나온다.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왕(東明王)으로부터 나왔는데, 동명왕은 본디 북이(北夷) 고리왕(橐離王)의 아들이다. 고리왕이 출행(出行)하였는데, 고리왕의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서는 죽이고자 하니, 시아가 말하기를, “앞서 하늘 위에서 무슨 기운 같은 것이 계란처럼 크게 뭉쳐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 시아를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아니하였다. 왕이 신기하게 여겨 그 어미에게 데려다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나면서 활을 잘 쏘므로 왕이 그 용맹을 꺼려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이에 도망쳐 남쪽으로 가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어별(魚鼈)이 떼를 지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동명은 이를 타고 건넜다. 이어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 뒤에 후손의 한 지파(支派)가 고구려의 종족이 되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의 현도군으로, 요동에서의 거리가 1천 리이며, 나라 가운데는 요산(遼山)이 있어서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나온다. 《양서(梁書)》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명왕에 대한 일은 《후한서》 부여열전(夫餘列傳)에 이미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대개 동명왕은 고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부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주몽(朱蒙)은 부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서 살았다. 이들이 난을 피하여 도망을 치면서 물을 건널 때 어별이 다리를 놓아준 일은 서로 맞으나, 동명은 부여의 임금이고 주몽은 고구려의 임금이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이 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구려본기(句麗本紀)에는 이에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휘가 주몽(朱蒙)이다.”라고 하여 비로소 동명과 주몽을 합하여서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시는 부여의 동명왕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양서(梁書)》에서 “동명이 처음에 부여에서 왕이 되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줄기가 별도로 고구려의 종자가 되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성종조 때 시사(試士) 김천령(金千齡)이 고구려부(高句麗賦)를 지으면서 “동명이 혁혁한 기업을 열었고, 주몽이 그 여파를 계승하였네[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명확하다.
○ 고구려는 한나라 때에는 항상 현도군에 나와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 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나아와 받아 가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 지역에다가 작은 성을 쌓고서 그 안에다가 조복과 의책을 놓아둔 다음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이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한다. 《삼국지》
○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임신하였다. 주몽이 도망친 뒤에 한 아들을 낳았는데, 자(字)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성장한 뒤에 주몽이 도망가서 왕이 되었음을 알고는 그 길로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랏일을 그에게 맡겼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인 여율(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인 막래(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막래의 자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宮)에 이르렀다. 《후위서》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세차(世次)가 동사(東史)와는 많이 어긋난다. 《삼국사기》 구려본기에 말하기를,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임신을 하였을 때 주몽은 고구려의 왕이 되어 있었다. 그 뒤에 예씨가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유리(類利)라고 하였다. 장성함에 미쳐 주몽에게 가서 태자가 되었다. 주몽이 졸하자 유리가 왕이 되었는데,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왕이 되었다. 이가 바로 유리왕(琉璃王)이다.” 하였으니, 여달(閭達)은 바로 유리(類利)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유리가 졸하자 아들 무휼(無恤)이 왕이 되었으니, 이가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신망(新莽) 천봉(天鳳) 5년(18)에 왕이 되었다. 5년에 부여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무휼이 졸하자 그의 동생 해읍주(解邑朱)가 왕이 되니, 이가 민중왕(閔中王)이다. 한 광무제 건무(建武) 20년(44)에 왕이 되었다. 해읍주가 졸하자 대무신왕의 아들 해우(解憂)가 왕이 되니, 이가 모본왕(慕本王)이다. 건무 24년에 왕이 되었다. 해우가 졸하자 유리왕의 손자인 궁(宮)이 왕이 되니, 건무 29년에 왕이 되었다.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하였다. 이른바 여율(如栗)이니 막래(莫來)니 하는 이름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는데, 막래는 모본(慕本)이란 글자가 잘못된 것인 듯하다.
○ 구려는 큰물에 의지하여 나라가 일어났다.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작은 강이 있어서 남해로 흘러들어 가는데, 구려의 별종이 이 작은 강에 의지하여 나라를 일으켰으므로 인하여 소수맥(小水貊)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지》
○ 왕망(王莽)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왕망이 억지로 보내니,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와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그들에게 죽으니, 주군(州郡)에서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게 살펴보건대, 추(騶)가 《삼국지》에는 도(騊)로 되어 있다. 그 허물을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맥인(貉人)들이 법을 어기는 것은 추(騶)로 인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군(州君)으로 하여금 위안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대죄(大罪)를 가할 경우 그들이 드디어 배반할까 두렵고, 부여의 족속들 가운데 반드시 부화뇌동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흉노(凶奴)를 이기지 못한 상황인데 부여와 예ㆍ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들을 위안하지 않았다. 이에 드디어 예ㆍ맥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망이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서 이들을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를 꾀어서 국경 안으로 오게 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전하였다. 그러자 왕망이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맹장(猛將)을 파견해 함께 천벌(天罰)을 행해 오랑캐를 주멸한 다음 그곳을 12부(部)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혹 오른팔을 자르기도 하고 왼쪽 겨드랑이를 베기도 하였으며, 혹 배를 가르기도 하고 혹 양쪽 어깨쭉지를 뽑기도 하였다. 금년에는 형(刑)이 동방(東方)에 있음에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이해는 임신년으로, 형이 동방에 있었다.” 하였다. 먼저 맥(貊)의 부족을 치는 것이다. 오랑캐의 왕 추(騶)를 쳐 죽여 동방을 평정해 오랑캐들을 모두 멸망시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천지(天地)와 군신(群神), 사직(社稷), 종묘(宗廟)가 보우하신 복이며, 공경과 대부, 사민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장수들이 용감하게 싸운 힘인 것이다.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이름을 고친 다음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게 하라.”
하였다. 이에 맥족(貊族) 사람들이 더욱더 변경을 침범하였으며, 동북쪽과 서남쪽의 오랑캐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한서》 ○ 《삼국지》에는, “고구려는 이때에 후국(侯國)으로 있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를 보면, 여러 왕 가운데 추(騶)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없다. 이는 유리왕(瑠璃王)으로, 유리(類利) 31년의 일이다.
○ 광무제 건무 7년 대무신왕 14년 12월에 고구려의 건(建)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후한서》
○ 8년 대무신왕 15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가 그의 왕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상동》
○ 23년 민중왕(閔中王) 4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이 1만여 구를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내속하였다. 《상동》
○ 25년 모본왕(慕本王) 2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을 침입하였다. 살펴보건대, 본기(本紀)에는 이 일이 맥인들이 한 일로 기록하였다. 대개 소수맥(小水貊)과 구려가 같은 종족이므로 구려와 맥인을 매번 통칭한다.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부르니 모두 다시 통호(通好)하였다.
○ 선비(鮮卑)ㆍ만리(滿離)ㆍ고구려가 잇달아 와서 통호하면서 갓옷과 좋은 말을 바쳤는데, 광무제가 배나 되는 물품으로 상을 내려 주었다. 영평(永平) 연간에 제융의 위엄이 북방에 널리 퍼져 동쪽으로 현도ㆍ낙랑이 모두 와서 내부하여 들판에는 전쟁이 없었다. 이에 변경의 둔병(屯兵)을 모두 혁파하였다. ○ 그 뒤에 구려 왕 고궁(高宮)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사물을 보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미쳐서 용맹스럽고 튼튼하여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 태조왕 53년 봄에 고구려 사람들이 다시 요동에 침입하여 6개의 현을 노략질하자, 요동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를 베었다. 《상동》
○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 태조왕 59년 고궁(高宮)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현도에 소속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3월에 고궁이 예ㆍ맥과 함께 현도를 침입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 원초 5년 태조왕 66년 고구려가 다시 예ㆍ맥과 함께 현도를 침입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후한서》
○ 건광(建光) 원년 태조왕 69년 정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으로 가서 격파하였다. 《삼국지》에 “채풍과 요광이 고궁(高宮)이 끝내 두 군(郡)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강화(講和)하기를 청하자, 두 군이 진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궁은 몰래 군사를 파견하여 현도성을 공격해서 후성(侯城)을 불살랐다.” 하였다. 예ㆍ맥의 거수(渠帥)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노획하였다. 고궁이 이에 아들 고수성(高遂成)을 보내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니, 고수성이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고수성이 이를 인하여 험한 곳에 웅거해 한의 대군을 차단하는 동시에, 몰래 3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해 성곽을 모두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었다. 이에 광양(廣陽)ㆍ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탁군(涿郡) 등 속국(屬國)의 군사 3천여 기를 징발하여 함께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맥인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 4월에 고궁이 다시 요동의 선비(鮮卑) 8천여 명과 요대(遼隊)요동의 속현(屬縣)이다.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채풍 등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신창(新昌)에서 전사하였다. 공조(功曹) 경모(耿耗), 병조연(兵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다가 함께 진중(陣中)에서 전사하니,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 《자치통감》 주에는, “이때에 선비가 이미 흉노의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도와 군사를 연합해 화란을 일으켰으므로 몰살된 것이다.” 하였다. ○ 12월에 고궁이 드디어 마한(馬韓)ㆍ예ㆍ맥의 군사 수천 기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주군(州郡)의 군사와 힘을 합해 토벌하여 격파하고, 고구려 군사 5백여 급을 참수하였다. 이해에 고궁이 죽고 아들 고수성(高遂成)이 즉위하였다. 요광(姚光)이 상언하여, 상(喪)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아뢰기를, “궁이 생전에 악독하였는데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공격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사절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은 다음 죄를 용서해 주어, 앞으로 그들이 착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안제(安帝)가 그 의견에 따랐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高句麗史)에는, 태조왕(太祖王) 고궁은 한나라 광무제 건무(建武) 29년 계축에 즉위하여 환제(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에 모제(母弟) 고수성(高遂成)에게 선위하여 94년간 재위하였으며, 이 일은 고궁이 재위한 지 69년이 되는 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사(漢史)에는 “이해에 고궁이 죽고 아들 고수성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한사와 동사(東史)에 기록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연광(延光) 원년(122) 동사(東史)의 연조(年條)는 상고할 수가 없다. 7월에 고구려가 항복하였다. ○ 고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들을 송환하고 현도군에 나아와서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수성 등이 포학무도한 짓을 하였으니 그의 목을 자르고 젓을 담가 백성들에게 조리돌려 보이는 것이 마땅하나, 요행히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진 때를 만나 죄를 빌며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나 선비ㆍ예ㆍ맥이 해마다 침입해 노략질하면서 백성들을 잡아간 숫자가 번번이 천 명이 넘었는데, 지금 겨우 수십 명만 돌려보내었으니, 이는 우리의 교화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 고수성이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귀순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속전(贖錢)을 지급해 주되, 한 사람당 40필을 주고 어린이에 대해서는 반으로 쳐주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차대왕(次大王) 고수성은 본초(本初) 원년에 즉위하였으니, 연광 원년과는 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 이해의 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 질제(質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현(西安平縣)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 영(帶方令)을 죽였으며,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하였다. 《삼국지》
○ 환제(桓帝) 연희(延憙) 8년(165)에 고수성이 죽고 아들 고백고(高伯固)가 즉위하였다. 그 뒤에 예ㆍ맥이 모두 복속하여 동쪽 변경에 소요가 줄어들었다. 《후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를 보면, 차대왕 고수성은 환제 연희 8년에 그의 신하인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되고, 그의 동생 고백고가 즉위하니, 이가 신대왕(新大王)이다. 그러니 한사(漢史)에 고백고를 고수성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연조(年條)가 맞지 않으므로 동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 환제(桓帝) 말기에 선비와 고구려의 후계자 고백고(高伯固)가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여 노략질하였다. 사부(四府)가 모두 교현(橋玄)을 천거하여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고는 황월(黃鉞)을 주었다. 교현이 진(鎭)에 이르러서 군사들을 휴식시킨 다음 여러 장수(將守)들을 독려해 고백고 등을 토벌하니, 모두 격파되어 흩어져 달아났다. 직에 있은 지 3년 만에 변경이 안정되었다.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 신대왕 5년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급을 참수하니, 고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예속되었다.
○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 웅거하자 고백고가 견가(犬加)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어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삼국지》 ○ 삼가 살펴보건대, 이 조목에 대해 《삼국지》에는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고구려사에는 신대왕 5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금 이에 의거하여 그해의 일로 기술하였다.
○ 희평(熹平) 연간에 고백고가 현도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광화(光和) 2년(179)에 고백고가 죽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고발기(高拔奇)이고 둘째 아들은 고이이모(高伊夷模)였다. 고발기가 불초하자 나라 사람들이 고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침입하고 또 망호(亡胡) 5백여 가를 받아들였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에, “한나라 광화 2년에 신대왕(新大王)이 훙하자 둘째 아들 고이이모(高伊夷謨)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하였다. 《삼국지》에는 연차(年次)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동사(東史)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살펴보건대, 건안 원년(196)은 바로 고국천왕 18년이다.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출동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고발기(高拔奇)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견가(犬加)와 더불어서 각각 하호(下戶) 3만여 구를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와서 항복하고 도로 비류수(沸流水)에 거주하였으며, 항호(降胡)들 역시 고이이모에게 반란하였다. 이에 고이이모가 다시 새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의 고구려가 있는 곳이 그곳이다. 고발기가 드디어 요동으로 갔는데, 구려국에 아들을 남겨 두고 갔는바, 바로 지금의 고추가(古雛加) 고교위거(高駮位居)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침입하자 현도가 요동과 힘을 합해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상동》
○ 고이이모가 아들이 없자 관노부(灌奴部)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위궁(高位宮)이라 하였다. 고이이모가 죽자 고위궁이 왕이 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구려 왕 고궁(高宮)이다. 그의 증조인 고궁(高宮) 역시 나면서부터 능히 눈을 떠서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쳐서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마침내는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지금의 왕 역시 날 때 땅에 떨어뜨리자 눈을 떠서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位)’라고 하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비슷하므로 위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위궁은 용력(勇力)이 있었고 말을 잘 탔으며 사냥을 잘 하였다. 《상동》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에는, 고국천왕의 이름은 고남무(高男武)이며, 일명 고이이모라고도 한다. 한나라 건안 2년(197)에 훙하자, 그의 동생인 고연우(高延優)가 즉위하였는데, 일명 위궁이라 하며, 바로 산상왕으로, 한나라 후제(後帝 촉한(蜀漢)의 후주(後主)를 말함) 건흥(建興) 5년(227)에 훙하였다. 처음에 산상왕이 아들이 없다가 뒤에 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우위거(高憂位居)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여 동천왕이 되었다. 《삼국지》에 손권(孫權)이 선우(單于)로 삼은 것과 관구검이 환도(丸都)를 도륙한 것이 모두 동천왕에 있었던 일로, 왕의 이름을 분명하게 궁(宮)이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위궁(位宮)은 바로 동천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사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손권(孫權) 가화(嘉禾) 2년에 동천왕(東川王) 7년 공손연(公孫淵)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공손연이 이에 앞서 백성들을 나누어 요동의 여러 현에다 두고, 중사(中使) 진조(秦朝) 등을 현도군에 안치하였는데, 진조 등이 현도 태수 왕찬(王贊)을 모살(謀殺)하려다가 도리어 왕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모두 성을 넘어서 달아나 고구려로 도망쳤다. 인하여 고구려 왕 고궁과 주부(主簿)에게 오왕(吳王)의 조서(調書)를 선포하면서 거짓으로 속이기를, “하사한 물품이 있었는데 요동에서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궁 등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조명(詔命)을 받았다. 그해에 고궁이 조의(皀衣) 25인을 보내 진조 등을 오나라로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칭신(稱臣)하며 초피(貂皮) 1천 매(枚)와 갈계피(鶡鷄皮) 10 구(具)를 공물로 바쳤다. 《상동》
○ 3년에 동천왕 9년 손권이 사자(使者)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을 시켜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고 의복과 진보(珍寶)를 더 하사하였다.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여 먼저 교위(校尉) 진봉(陳奉) 등을 보내어 미리 고궁을 알현하게 하였다. 그런데 고궁이 위(魏)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의 밀지(密旨)를 받고는 오나라의 사신으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봉이 이 사실을 듣고는 도로 되돌아왔다. 이에 고궁이 주부(主簿)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을 보내어 안평(安平)으로 가서 사굉과 만나 보게 하였는데, 사굉이 즉시 30여 명을 포박하여 인질로 삼았다. 고궁이 사죄하면서 말 1백 필을 바쳤다. 사굉이 이에 착자와 대고 등을 돌려보내고 조서와 하사 물품을 받들어서 고궁에게 주었다. 이때에 사굉이 탄 배가 작아서 말 80 마리만 싣고서 돌아왔다. 《상동》
○ 위 명제(明帝) 청룡(靑龍) 4년에 동천왕 10년 손권이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어서 고구려와 내통하여 요동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궁이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 등의 수급을 참수하여 보내고 유주(幽州)로 나아왔다. 《상동》
○ 경초(景初) 2년에 동천왕 1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고궁이 주부(主簿)와 견가(犬加)를 파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3년에 동천왕 16년 고궁이 서안평(西安平)을 침입하였다. 《상동》
○ 5년에 동천왕 18년 유주 자사 관구검이 고구려가 자주 침입하여 배반한다는 이유로 제군(諸軍)의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독려하여 현도로 출병하였다. 그러고는 제도(諸道)를 따라 나가면서 토벌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 고궁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나아가 주둔하여 갈구(梁口)에서 양(梁)의 음은 갈(渴)이다. 크게 싸웠다. 고궁이 잇달아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였다. 살펴보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추격하여 정현(頳峴)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관구검이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丸都城)에 올라가 고구려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여 1천여 급을 참획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의 패자(沛者) 득래(得來)가 여러 번 고궁에게 간(諫)하였으나 고궁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득래가 탄식하기를, “곧바로 이 땅이 쑥밭이 되는 것을 보겠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어질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그 묘를 헐지 못하게 하고 그곳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냈다. 고궁은 단신으로 처자식만을 데리고 도망쳤다. 관구검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상동》
○ 6년에 동천왕 19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고궁이 제가(諸加)만을 거느리고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치구루(置溝漊)이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추격하였다. 왕기가 옥저(沃沮) 땅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놓았다.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새겨 놓았으며, 불내성(不耐城)에도 명(銘)을 새겨 놓았다. 여러 곳에서 죽이거나 항복받은 것이 8천여 구(口)였고, 공을 논하여 상을 받음에 후(侯)로 봉해진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상동》 ○ 《진서(晉書)》에는, “강통(江統)이 말하기를, ‘정시 연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형양(滎陽)의 부락에 그의 여종(餘種)을 이사시켜 놓았는데, 지금 1천여 명이나 되니, 몇 대가 지난 뒤에는 반드시 크게 불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 그 뒤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양서(梁書)》
○ 진 회제(晉懷帝) 영가(永嘉) 연간에 발해(渤海) 사람 고무(高撫)와 형 고고(高顧)가 난을 피하여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후위서(後魏書)》
○ 처음에 영가 연간의 난리에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가 창려(昌黎)의 대극성(大棘城)을 차지하자 원제(元帝)가 평주 자사(平州刺史)를 제수하였다. 구려 왕 고을불리(高乙弗利)가 요동을 자주 침입하였는데, 모용외가 제압하지 못하였다. 《양서》
○ 원제(元帝) 태흥(太興) 2년 미천왕 20년 평주자사 동이교위(平州刺史東夷校尉) 최비(崔毖)가 백성들을 끌어 모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망(流亡)하는 자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최비는 모용외가 이들을 구류(拘留)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와 우문(宇文)ㆍ단국(段國) 등과 교결해 모용외를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나누어 가지기로 모의하였다. 삼국이 모용외를 치자,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맞서 싸우지를 않으면서 우문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소와 술을 보내어 대접하였다. 그러면서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말하기를, “최비가 어제 사신을 보내왔다.” 하였다. 이에 두 나라는 우문씨를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이 혼자서 자신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모용외의 성을 공격하였다. 모용외가 드디어 우문실독관을 대파하고는 그의 군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최비는 모용외가 자신을 원수로 여길 것을 두려워하여 형의 아들 최도(崔燾)를 시켜 모용외에게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세 나라 사신도 또한 이르러 강화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라 최 평주(崔平州)가 시킨 것이다.”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가 포위해서 공격한 지점을 보여 주며 병기로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숙부가 세 나라를 사주해서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거짓으로 와서 나를 축하하는가.” 하자, 최도가 두려워서 모두 자백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최도를 돌려보내었다. 그러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뒤를 쫓으니, 최비는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남아 있던 그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진서》 ○ 고구려의 장수 여노자(如奴子)가 하성(河城)에 웅거하니,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불의에 습격해 이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1천여 호를 포로로 하였다. ○ 고구려가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치니,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ㆍ모용인(慕容仁) 살펴보건대,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친 뒤에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인을 시켜 요동을 진무하게 하였다. 등을 보내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고을불리(高乙弗利)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화평을 청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마침내 돌아갔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3년에 미천왕 21년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였는데, 모용인(慕容仁)이 그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부터는 감히 모용인의 국경을 범하지 못하였다. 《상동》
○ 성제(成帝) 함화(咸和) 6년(331) 고구려 왕 고을불리가 죽고 고쇠(高釗)가 대신 왕이 되었다. 《양서》 ○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에는 “미천왕 고을불리가 진 성제 6년 신묘에 훙하자, 태자 사유(斯由)가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국원왕이다.” 하였다. 쇠(釗)는 사유의 절음(切音)인 듯하다. 고국원왕이 즉위한 해를 《양서》에서는 드러내어 적지 않았으므로 지금 동사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에 “고구려 왕 고위궁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昭列帝)라 하는데,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파되었다.” 하였는데, 고국원왕의 이름을 소열제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 함강(咸康) 2년 고국원왕 6년 2월 경신에 고구려 왕이 진(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진서》 ○ 《설수원경전(薛收元經傳)》에는, “고구려가 방물을 바쳤다. 동이가 배를 타고 온 것이다. 이때에 모용외가 요동에서 선우(單于)라고 칭하면서 동이 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최비가 고구려와 함께 모용외를 정벌하였으나 모용외에게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다. 고구려가 와서 조공을 바친 것은 모용외를 두려워해서 중국에 붙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연(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모용인(慕容仁)을 평곽(平郭)에서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모용인의 장수 동수(佟壽)ㆍ곽충(郭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자치통감》
○ 3년 《자치통감》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 고국원왕 7년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군사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 고쇠가 동맹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다음 해에 고쇠가 세자를 보내어 모용황에게 조알하였다. 《진서》
○ 4년에 고국원왕 8년 조왕(趙王) 호(虎)가 연을 정벌하니, 연나라 사람들이 두려워서 떨었다. 연의 거취 영(居就令) 유홍(游泓), 동이 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송황(宋晃) 등이 모두 호(虎)에게 내응하였다. 그러나 조나라 군사가 크게 패함에 미쳐서 연왕 모용황이 군사를 나누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성을 토벌하였다. 이에 봉추ㆍ송황ㆍ유홍 세 사람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 조왕 호가 배 3백 척으로 곡식 30만 곡(斛)을 운반하여 고구려로 찾아갔다. 그러고는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서 둔전(屯田)을 일으키게 하여 연을 칠 것을 꾀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7년에 고국원왕 11년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고 평곽(平郭)을 진무하게 하였다. 모용각이 백성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여러 차례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자, 고구려가 두려워서 감히 국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상동》
○ 8년 고국원왕 12년 10월에 연왕 모용황이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옮겼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慕容翰)이 모용황에게 말하기를,
“우문씨가 강성해진 지 오래여서 누차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가 나라를 찬탈하여 백성들이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 만약 이들을 공격할 경우 백 번 치면 백 번 다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항시 기회를 엿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고구려에서 우문씨가 이미 망하여서 화가 장차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알 경우, 반드시 빈틈을 노려 나라 깊숙이 쳐들어와 우리나라에서 방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 습격할 것입니다. 군사를 국내에 조금만 남겨 둘 경우에는 나라를 지킬 수가 없고, 많은 군사를 많이 남겨 둘 경우에는 정벌할 군사가 부족할 것이니, 이는 뱃속에 든 우환거리로, 먼저 이를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세력으로 볼 때 일거에 이길 수가 있으며,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고 있는 우문씨의 군사들은 반드시 멀리까지 와서 이익을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다시 우문씨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입니다. 두 나라가 이미 평정되어 동해(東海)의 이익을 모두 우리나라에서 독차지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가 강해져서 뒤를 돌아다볼 걱정이 없어진 다음에야 중원(中原)을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모용황이 말하기를,
“좋다. 고구려를 치겠다.”
하였다.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북쪽 길은 북치(北置)에서 나가고, 남쪽 길은 남협(南陜)으로부터 목저성(木底城)으로 들어간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평탄한 북쪽 길을 따라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모용한이 말하기를,
“고구려에서는 일반적으로 헤아려 보고는 반드시 대군이 북쪽 길을 따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병을 이끌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여 그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치면 환도(丸都)는 취하려고 애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구려 왕이 환도에 있었다. 그런 다음 따로 일부의 군사를 북쪽 길로 내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졌으니 사지(四肢)를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친히 경병(勁兵) 4만 명을 거느리고 남협으로부터 침입하니,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파견하여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쇠는 과연 아우인 고무(高武)를 파견하여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弱卒)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비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이르러 고구려 왕 고쇠와 교전하였는데, 모용황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뒤를 이어 왔다. 좌상시(左常侍) 선우량(鮮于亮)이 말하기를,
“신이 포로로서 왕께서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로 신이 목숨을 바칠 날입니다.”
하고는, 혼자서 몇 기(騎)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진으로 쳐들어가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고구려 진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군사들이 이를 틈타서 쳐들어가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몰아 추격해서 드디어 환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쇠가 단기(單騎)로 달아났다. 경거장군(輕車將軍) 모여니(慕輿埿)가 추격하여 고구려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처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때 마침 왕우(王寓) 등이 북쪽 길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끝까지 추격하지 아니하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즈음에 한수(韓壽)가 말하기를,
“고구려의 땅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왕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고 있으나, 대군이 떠나고 나면 반드시 다시금 한데 모여 남은 무리들을 수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후환거리가 될 것이니, 그 아비의 시체를 싣고 그 생모(生母)를 포로로 잡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몸을 묶고 스스로 귀복하여 오기를 기다린 연후에 이를 돌려주고 은혜와 신의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그 말을 따라 고쇠의 아버지인 고을불리(高乙弗利)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를 싣고, 부고(府庫)에 있는 누대(累代)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궁성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파괴한 뒤 돌아갔다. 《상동》
○ 강제(康帝) 건원(建元) 원년 고국원왕 13년 2월에 고구려 왕 고쇠가 그의 동생을 보내어 연나라에 대해 신하라고 칭하면서 연에 조알하였는데, 진기한 물품 1천여 가지를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보내었으나 어머니 주씨를 머무르게 해 볼모로 삼았다. 《상동》
○ 위나라 건국(建國) 7년에 고국원왕 14년 모용황이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를 정벌하였다. 우문일두귀가 모용황에게 패하고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났다가 드디어 고구려로 달아났다. 《후주서(後周書)》
○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원년 고국원왕 15년 10월에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남소(南蘇)남소성은 남협(南陜)의 동쪽에 있는데,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 남소주(南蘇州)를 두었다. 함락하고 수병(戍兵)을 두고서 돌아갔다. 《자치통감》
○ 5년에 고국원왕 19년 고구려 왕 고쇠가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으로 송환하니, 연왕 준(雋)이 송황을 사면하고 이름을 고쳐 송활(宋活)이라고 한 다음 중위(中尉)를 제수하였다. 《상동》
○ 11년 고국원왕 25년 12월에 고구려 왕 고쇠가 연에 사신을 보내 볼모를 바치고 조공을 보내면서 어머니 주씨를 석방해 줄 것을 간청하니, 연왕 준(雋)이 이를 허락하고는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勺龕)을 시켜 고구려 왕 고쇠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고쇠를 정동대장군 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에 제수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하였으며, 왕의 칭호는 전대로 두었다. 《상동》
해서공(海西公) 5년에 고국원왕 40년 부견(苻堅)이 업성(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모용위(慕容暐)가 도망치자, 부견의 장수 곽경(郭慶)이 이를 잡아 보내었고, 남은 무리들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곽경이 이를 추격하여 요해(遼海)에 이르니, 고구려에서 모용평을 포박하여 보내었다. 《진서》
○ 모용원진(慕容元眞)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환도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위의 함강(咸康) 8년 기사에 보인다. 이 뒤로부터 고구려 왕 고쇠가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였으나, 원수에게 가로막혀서 직접 오지는 못하였다. 고쇠는 그 뒤에 백제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위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고국원왕 41년에 백제가 침공해 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훙하였다.” 하였다.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 고국양왕 2년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해서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이로부터 연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였다. ○ 11월에 모용농(慕容農)이 용성(龍城)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공격해 다시 요동과 현도 두 군을 수복하였다. 그전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많이 고구려에 들어가 살았는데, 모용농이 표기사마(驃騎司馬) 범양(范陽)ㆍ방연(龐淵)을 요동 태수로 삼고 그들을 불러 안무(安憮)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이해의 사실은 사군사실조(四郡事實條)에 상세하게 보인다.
○ 모용보(慕容寶)가 즉위하여 고구려 왕 고안(高安)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ㆍ대방 두 나라 왕에 봉하였다. 고안이 비로소 장사(長史)ㆍ사마(司馬)ㆍ참군(參軍) 등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뒤에는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양서》 ○ 살펴보건대, 모용보는 진 효무제(晉孝武帝) 태원(太元) 21년(396)에 참호(僣號)를 써서 즉위하였으니, 바로 광개토왕 5년이다.
○ 위(魏)나라 태조 천흥(天興) 원년 광개토왕 7년 정월에 고구려의 잡이(雜夷)를 옮겨 경사(京師)를 채웠다. 《후위서》
○ 진나라 안제(安帝) 융안(隆安) 4년에 광개토왕 9년 고구려 왕 고안이 연을 섬기는 태도가 거만하자, 2월 병신에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스스로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하였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煕)로 선봉(先鋒)을 삼아 신성(新城)과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으로, 서남쪽으로는 산동(山東)과 가까이 있고, 북쪽은 남소(南蘇)ㆍ목저(木底) 등의 성과 접하였다. 남소 두 성을 빼앗은 다음, 7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여 5천여 호를 이주(移住)시키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원흥(元興) 원년 광개토왕 11년 5월에 고구려가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상동》
○ 3년 광개토왕 13년 12월에 고구려가 연을 침입하였다. 《상동》
○ 의희(義煕) 원년에 광개토왕 14년 고구려가 연의 군(郡)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였다. 연왕 모용희(慕容煕)가 고구려를 쳤는데 황후(皇后) 부씨(苻氏)를 따라오게 하고는 충거(衝車)와 지도(地道)를 만들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였다. 성이 거의 함락될 무렵에 모용희가 말하기를, “원수의 성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서 짐(朕)이 황후를 데리고 연(輦)을 타고 들어가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지 못한 장사들이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성안에서 굳게 방비한 탓에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눈이 크게 내려서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진서》
○ 2년에 광개토왕 15년 연왕 모용희가 거란(契丹)을 습격하였다. 정월에 경북(陘北)에 이르렀는데, 거란의 군사가 두려워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황후 부씨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무신(戊申)에 드디어 치중(輜重)을 버리고 경병(輕兵)으로 고구려를 습격하였다. 2월에 연나라 군사가 3천여 리를 행군하였는데, 군사와 말이 피로해지고 얼어 죽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4년 광개토왕 17년 3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북연(北燕)에 조빙하였으며, 또 종족(宗族)의 의를 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그에 보답하였다. 처음에 연왕 모용보(慕容寶)가 고운(高雲)을 건위장군(建威將軍)으로 삼고 석양공(夕陽公)에 봉한 다음 양자로 삼았는데, 고운은 고구려의 지속(支屬)이다. 《진서》에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지서(支庶)인데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하므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를 격파한 다음 청산(靑山)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대대로 연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고운은 신중하고 말수가 적어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풍발(馮跋)만은 그의 뜻과 기국을 기이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서 친구가 되었다. 연왕 모용희가 음탕하고 잔학하자 풍발이 고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모용희를 잡아 죽였다. 고운은 천왕(天王)의 자리에 올라 성씨를 다시 고씨로 고쳤다. 《상동》
○ 9년에 장수왕 원년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치었다. 고구려 왕 고련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 왕 낙랑공(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송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중국에서 책명(册命)을 받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10년에 장수왕 2년 연왕 풍발(馮跋)의 동생 풍비(馮丕)가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에 있었는데, 풍발이 불러서 좌복야(左僕邪)로 삼고 상산공(常山公)을 봉하였다. 《자치통감》
○ 송(宋) 영초(永初) 원년에 장수왕 8년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 왕 낙랑공(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麗王樂浪公) 고련(高璉)이 바다 바깥에서 의리를 지키면서 멀리까지 와 공물을 바쳤다. 정사를 새로 펴면서 연호를 제정하였으니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삼고, 지절 도독(持節都督) 및 왕공(王公)의 칭호는 그전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송서》
○ 3년에 장수왕 10년 고련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가하고 평주제군사(平州諸軍事)를 더하였다. 《상동》
○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에 장수왕 12년 고구려 왕 고련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보내 대궐에 나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송나라에서도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어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내려 위로하였다. 《상동》
○ 위 세조(魏世祖) 때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이때는 바로 세조 태연(泰延) 원년(435)으로 장수왕 23년이다. 고구려 왕 고쇠(高釗)의 증손자 고련이 비로소 사신을 안동(安東)으로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방물을 올렸으며, 아울러 국휘(國諱)도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위(魏)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어 황제의 세계(世系)와 국휘를 기록하여 그 나라로 보내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어 고련에게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 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제배하였다. 이오가 고구려 왕이 있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탐방하고는 말하기를, “요동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작은 바다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른다. 백성들의 호구 수는 전위(前魏) 때에 비해 3배에 이르며, 지역이 동서는 2천 리이고, 남북은 1천여 리이다.” 하였다. 그 뒤로는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서로 잇달아 해마다 황금 2백 근, 백은(白銀) 4백 근을 바쳤다. 《후위서》
○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12년 장수왕 23년 6월 무신에 위나라에서 낙평왕 비(樂平王丕),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도하(徒何), 굴원(屈垣) 등에게 명하여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연나라가 날로 위태로워지자 태상(太常) 양민(陽㟭)이 다시 연왕에게 속히 태자를 보내어 입시하게 하라고 권하니, 연왕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 만약 일이 급하게 될 경우 동쪽으로 가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양민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신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잘 지내지만 끝내는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고구려에 보내 자신을 맞이해 주기를 청하였다. 《자치통감》
○ 13년 장수왕 24년 2월에 연왕이 위에 들어와 조공하면서 시자(侍子)를 보내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위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다. 임진에 사자 10여 명을 파견하여 동방의 고구려 등 여러 나라로 가서 고유(告諭)하게 하였다. 연왕의 죄를 고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나라와 통하지 못하게 하고, 혹 도망칠 경우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 3월 신미에 위나라 평동장군(平東將軍) 아청(娥淸)과 안서장군(安西將軍) 고필(古弼)이 정예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 4월에 고구려가 장수 갈로(葛盧)와 살펴보건대, 갈로는 《위서(魏書)》 본기(本紀)에는 갈만로(葛蔓盧)로 되어 있으며, 《북사》에는 갈거로(葛居盧)로 되어 있다. 맹광(孟光)을 보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陽伊)와 함께 화룡(和龍)에 이르러 연왕을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임천(臨川)에 주둔하였다. 연의 상서 영(尙書令) 곽생(郭生)이 백성들이 옮겨 가는 것을 꺼림을 인하여 성문을 열고 위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는데, 위나라 군사들이 의심하고서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연왕을 공격하였다. 이에 연왕이 고구려의 군사를 이끌고 동쪽 문으로부터 들어가 궁궐 아래에서 곽생과 싸웠는데, 곽생이 유시에 맞아 죽었다. 갈로와 맹광이 성안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떨어진 옷을 갈아입도록 하고 연나라 무기 창고에서 날카로운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고는 성안을 크게 노략질하였다. ○ 5월에 연왕이 용성(龍城)에 있는 호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열흘 동안 꺼지지 아니했다. 부인들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서 중간에 있게 하고, 양이 등이 정예로운 군사를 정돈하여 밖에 있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뒤에 있게 한 다음 잇따라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에 뻗쳤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북사》 고필열전(古弼列傳)에는, “고필의 부장 고구자(高苟子)가 적군(賊軍)을 치려고 하자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 중지시켰으므로 풍홍(馮弘)이 달아날 수가 있었다.” 하였다. ○ 풍문통(馮文通)이 요동에 이르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께서 멀리 야차(野次)에 나오시느라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로하셨습니까?” 하니, 풍문통이 부끄럽고 화가 나 ‘제(制)’라 칭하면서 답하여 사양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북풍(北豐)으로 옮겨 있게 하였다. 풍문통은 본시 고구려를 업신여겼으나, 고구려의 정사와 형법 및 상주고 벌주는 것이 자기 나라와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시종하던 사람들을 빼앗고 그의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데려다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풍문통이 분하게 여겨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도모하였다. 《후위서》 ○ 무오(戊午)에 위나라 임금이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연왕을 잡아 보내라고 하였다. ○ 9월에 고구려가 위나라로 연왕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위나라 임금이 고구려 왕이 조명(詔命)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치기로 의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다. 이때 낙평왕(樂平王) 비(丕)가 말하기를, “화룡(和龍)이 새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여 군비를 풍부히 한 뒤에 나아가 취하면 고구려를 일거에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위나라 임금이 출병을 중지하였다. 《자치통감》
○ 15년이다. 장수왕 26년 이에 앞서 의희(義煕 동진 안제(安帝)의 연호임) 초에 모용희(慕容煕)가 그의 부하인 풍발(馮跋)에게 살해되었는데, 풍발이 스스로 서서 임금이 되고는 스스로 연왕이라고 칭호하였다. 풍발이 죽자 그의 아들 풍홍(馮弘)이 즉위하였는데, 태조(太祖) 때에 매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 뒤 색로(索虜)에게 공격당하자 풍홍이 패하여 고구려 북풍성(北豐城)으로 달아나서 표문을 올려 맞아 주기를 구하니, 태조가 사자 왕백구(王白駒)ㆍ조차흥(趙次興)을 보내 풍홍을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로 하여금 풍홍을 도와서 보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련은 풍홍을 남조(南朝)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장수 손수(孫漱)ㆍ고구(高仇) 등을 보내어 풍홍을 습격하여 죽였다. 살펴보건대, 《후위서》에 “태연(太延) 4년(438) 3월에 고구려가 풍문통의 자손들을 살해하였는데, 한꺼번에 죽은 자가 10여 명이었다.” 하였고, 《통감》에는 “고구려에서 풍홍의 시호(諡號)를 소성황제(昭成皇帝)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에 왕백구 등이 거느리고 온 군사 7천 명으로 손수 등을 엄습해서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고구려 왕 고련이 왕백구 등이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붙잡아서 송에 보내니, 송나라 임금이 멀리 있는 나라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풀어 주었다. 《송서》
○ 16년에 장수왕 27년 고구려 왕 고련이 매년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태조가 북방을 토벌하고자 하여 고련에게 조서를 내려 말을 보내라고 하니, 고련이 말 8백 필을 바쳤다. 《상동》
○ 세조 효건(孝建) 2년에 장수왕 43년 고구려 왕 고련이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보내어 국상(國喪)의 2주기를 조문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상동》
대명(大明) 7년 장수왕 51년 7월 을해에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내려 고구려 왕 고련에게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를 가하고, 지절ㆍ상시ㆍ도독(持節常侍都督) 및 왕공(王公)의 칭호는 예전대로 하도록 하였다. 《상동》
○ 명제(明帝) 태시(泰始) 3년에 장수왕 55년 위(僞)나라의 동래 태수(東萊太守) 국연승(鞠延僧)이 그의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웅거하여 공물을 바치러 오는 고구려의 사신을 억류하였다. 이때에 유회진(劉懷珍)이 동해(東海)에 있으면서 영삭장군(寧朔將軍) 명경부(明慶符)와 용양장군(龍驤將軍) 왕광지(王廣之)를 보내어 국연승을 쳐서 항복시키고 고구려의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었다. 《남제서》
○ 태종 태시(泰始) 연간과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연간에는 공물을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송서》
○ 위 효문제(魏孝文帝) 연흥(延興) 원년 장수왕 59년 9월에 고구려 백성 노구(奴久) 등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자, 각각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후위서》
○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구려 왕 고련에게 조칙을 내려 딸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고련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나의 딸은 이미 출가하였기에 동생의 딸 중에서 골라 보내어 조칙에 응하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파견하여 국경까지 가서 예물을 고구려에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고련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지난날에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뒤에 풍씨의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은감(殷鑑)이 멀지 않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어 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고련이 이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동생의 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가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여 또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어 심하게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만약 동생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다시 종친의 딸 가운데서 뽑아 보내어도 된다.” 하였다. 그러자 고련이 “만약 천자께서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다.” 하였다. 그런데 마침 현조가 붕어하여 그 일이 중지되었다. 《상동》 ○ 《북사》에는, “정준(程駿)이 연흥(延興) 말기에 사신이 되어 고구려 왕의 조카딸을 맞이하러 고구려로 갔다. 정준이 평양성에 이르자 어떤 자가 고구려 왕 고련에게 권하기를, ‘위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을 맺고서도 얼마 있다가 연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사신이 연나라의 험하고 평탄함에 대해서 낱낱이 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조카딸을 보내면 아마도 풍씨(馮氏)가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련이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준이 한 해가 넘도록 고구려 왕과 왕복하면서 의리를 들어 책하자, 고구려 왕이 분을 못이겨 정준의 부하들에게 내리는 주식(酒食)을 끊어 핍박하고자 하였으나, 위나라를 꺼려서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헌문제(獻文帝)가 죽어 정준이 돌아왔다.” 하였다.
○ 태화(太和) 원년에 장수왕 65년 물길국(勿吉國)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의 숙신국(肅愼國)이다. 이해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열 부락을 격파한 다음 비밀히 백제(百濟)와 모의하여 수도(水道)를 따라서 서로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취하고자 합니다. 이에 을력지를 파견하여 대국에 사신으로 보내니, 그에 대한 가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칙을 내리기를,
“세 나라는 모두 우리의 번국(藩國)이니 서로 잘 지내면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을력지가 이에 돌아갔다. 《문헌통고》
○ 3년에 장수왕 67년 고구려에서 몰래 유유(蠕蠕)와 더불어서 모의해 지두간(地豆干)을 취하여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다. 거란(契丹)에서는 그들의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부락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內附)하였다. 《후위서》
○ 제(齊) 태조 건원(建元) 2년 장수왕 68년 4월 병인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高璉)의 칭호를 올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하였다. 《남제서》
○ 위 고조 때 고구려 왕 고련이 바치는 공물이 전에 비해 배로 늘었고, 그에 대해 보답으로 내리는 것도 점점 불어났다. 이때에 광주(光州)의 관리가 고구려 왕 고련이 숙도성(肅道成)에게 파견한 사신 여노(餘奴) 등을 바다에서 잡았다. 이에 고조가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내려 고련을 꾸짖었다. 《후위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장수왕 68년 4월에 남제에서 왕에게 표기대장군을 책봉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어 들어가서 사례하게 하였는데,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러서 위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하였다.
○ 제 건원(建元) 3년에 장수왕 69년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사신이 항상 왕래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서쪽으로 위(魏) 오랑캐의 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위 오랑캐의 나라에도 역시 사신을 보내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위 오랑캐 나라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 위 오랑캐 나라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묵는 관저를 지었는데, 제나라 사신의 관저가 가장 크고, 고구려가 그다음이었다. 《남제서》
○ 무제(武帝) 영명(永明) 7년에 장수왕 77년 평남 참군(平南參軍) 안유명(顔幼明)과 용종복야(冗從僕射) 유사효(劉思斅)가 위 오랑캐의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위 오랑캐 나라의 초하룻날 조회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에 안유명이 위 오랑캐 나라의 주객랑(主客郞) 배숙령(裴叔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중국 천자의 명을 받고 경의 나라에 왔다. 우리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위나라가 있을 뿐이다. 그 나머지 외방 오랑캐들은 우리나라에 비해 하찮은 존재이다. 더구나 저 동쪽 오랑캐인 소맥(小貊)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 섬기고 있다. 그런데 지금 감히 우리와 나란히 앉게 한단 말인가.”
하고, 유사효도 위나라 남부 상서(南部尙書) 이사충(李思沖)에게 말하기를,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위나라의 사신을 대우함에 있어서 일찍이 작은 나라와 나란히 서게 한 적이 없었음을 경 역시 잘 알 것이다.”
하니, 이사충이 말하기를,
“사실 그 말이 맞다. 다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전(殿) 위로 오르지 못할 뿐, 이 자리도 매우 높은 데이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였다. 이에 유사효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도고(李道固)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바로 의관(衣冠)으로 간격을 두었다. 위나라의 사신이 필시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올 것이니, 어찌 쫓겨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안유명이 또 위 오랑캐 나라의 임금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어금버금하기로는 오로지 제나라와 위나라가 있을 뿐인데, 변경의 작은 오랑캐가 감히 신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였다. 《상동》
○ 위 태화(太和) 15년에 장수왕 79년 고구려 왕 고련이 죽었는데, 나이가 1백여 세였다. 고조가 동쪽 교외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자치통감》에, “위나라 임금이 장수왕을 위하여 소식(素食)을 하고 현관(玄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거애하였다.” 하였다. 그러고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파견하여 책명(策命)으로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또 대홍려(大鴻臚)를 파견하여 고련의 손자 고운(高雲)에게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제수하고, 의관(衣冠), 복물(服物), 거기(車旗) 등의 장식을 내려 주었다. 또 고운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를 입조(入朝)시켜서 교구(郊邱)의 제사에 참여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고운이 글을 올려서 세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로 사양하면서, 그 대신 종숙(從叔)인 고승우(高升于)를 보내어 사신을 따라 대궐로 나아가게 하니, 고조가 엄하게 꾸짖었다. 이 뒤로는 해마다 공물을 바치었다. 《후위서》
○ 제 울림왕(齊鬱林王) 융창(隆昌) 원년에 문자왕 3년 고려왕 낙랑공 고운(高雲)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남제서(南齊書)》
○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원년 문자왕 11년 4월 무진에 거기장군 고구려 왕(車騎將軍高句麗王) 고운의 호를 올려 거기대장군으로 삼았다. 《양서(梁書)》
동이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조선이 가장 강대하였는데, 기자의 교화를 받아 그 기물(器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위나라 때 조선 동쪽에 있는 마한ㆍ진한 등의 족속이 대대로 중국에 통하였다. 진(晉)나라가 양자강을 건너간 뒤부터 바다를 건너 온 동이의 사신으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 송(宋)ㆍ제(齊) 시대에도 항상 직공(職貢)을 통하였고, 양(梁)나라가 흥기하여서는 또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다. 《상동》
○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살펴보건대, 정시 원년은 바로 문자왕 13년이다. 세조가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인견하였다. 그러자 예실불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고구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위나라를 섬기면서 여러 대에 걸쳐 충성을 다하여, 저희 나라에서 산출되는 물품을 빠짐없이 조공하였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산출되고 가(珂)는 섭라(涉羅)에서 산출됩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는데, 국왕인 신 고운(高雲)은 오로지 끊어진 나라를 이어 주는 의리를 생각해서 이들을 모두 경내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위의 두 가지 물품을 왕부(王府)에 바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백제와 물길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시경》에 ‘술병이 비는 것은 오로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지난날 공물을 빠뜨린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연수(連帥)에게 있다. 경은 마땅히 짐의 전지를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서, 위압하고 회유하는 방도를 잘 써서 못된 무리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쪽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두 읍(邑)으로 하여금 다시 옛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후위서》
○ 양(梁) 천감(天監) 7년 문자왕 17년 2월 을해에 거기대장군 고려왕 고운(高雲)을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撫軍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삼았다. 《양서》
○ 11년과 15년에 고운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위나라 효명제(孝明帝) 희평(煕平) 원년에 문자왕 25년 유유(蠕蠕)의 임금 배노(配奴)가 용병을 잘하여 서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강역이 넓어져서 동쪽으로는 옛 조선 땅의 서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서 한해(瀚海)에까지 다달았고, 남쪽으로는 대적(大磧)에까지 이르렀다. 《문헌통고》
○ 신귀(神龜) 2년에 문자왕 28년 고운(高雲)이 죽었다.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내려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또 그의 아들인 세자 고안(高安)을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후위서》
○ 양(梁) 보통(普通) 원년 안장왕 2년 2월 계축에 고구려 세자 고안을 영동장군 고려왕 지절 독영평이주제군사(寧東將軍高麗王持節督營平二州諸軍事)로 삼았다. 《양서》
○ 위 정광(正光) 원년에 안장왕 2년 광주(光州) 해상에서 또 소연(蕭衍)이 고안에게 주는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의관과 칼, 패물(佩物) 및 사신으로 가던 강법성(江法盛) 등을 잡아 경사(京師)로 보내었다. 《후위서》
○ 양 보통 7년에 안장왕 8년 고안이 졸하고 그의 아들 고연(高延)이 즉위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연에게 작위(爵位)를 승습하게 하였다. 중대통(中大通) 4년과 6년, 대동(大同) 원년에 여러 차례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양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 “안장왕은 13년간 재위하였으며, 양나라 중대통 3년에 훙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보통 7년에 졸하였다고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 위 출제(出帝) 초에 살펴보건대, 출제 원년은 바로 안원왕(安原王) 2년(532)이다. 조서를 내려서 고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 왕(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가하고 의관과 의복, 수레, 깃발 등을 하사하였다. 《후위서》
○ 효정제(孝靜帝) 천평(天平) 연간에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천평 원년은 바로 안원왕 4년(534)이다. 고구려사에는 이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서를 내려 고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侍中驃騎大將軍)을 가하고 나머지 직위는 예전대로 하게 하였다. 고연이 죽자 그의 아들 고성(高成)이 즉위하였다. 무정(武定) 연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상동》
고구려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이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으뜸이었고, 경사(慶事)와 애사(哀事)에 중국에서 내려 주는 것도 역시 가장 넉넉하였다. 《상동》
○ 서위 문제(西魏文帝) 대통(大統) 12년에 양원왕 2년 고련(高璉)의 5대손 고성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후주서(後周書)》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양원왕의 이름이 고평성(高平成)으로 되어 있다.
○ 양 태청(太淸) 2년 양원왕 4년 3월 갑진에 무동장군 고려왕(撫東將軍高麗王) 고연(高延)이 졸하였다. 그의 아들을 영동장군 고려왕 낙랑공(寧東將軍高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양서》 ○ 살펴보건대, 안원왕 고보연(高寶延)은 양 대동(大同) 11년(545)에 훙하였는데, 대개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한 것이다.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 천보(天保) 원년 양원왕 6년 9월 계축에 산기상시 거기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려왕(散騎常侍車騎將軍領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麗王) 고성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로 삼고 나머지 관작은 예전대로 하였다. 《북제서》
○ 3년에 양원왕 8년 문선제(文宣帝)가 영주(營州)에 이르렀다. 박릉(博陵) 최류(崔柳)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나라 말기에 고구려로 유망하여 들어간 사람들을 송환시키기를 요구하였는데, 최류에게 칙명하기를,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처하라.” 하였다. 최류가 고구려에 이르러 이를 허락받지 못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고구려 왕 고성을 주먹으로 쳐서 용상 밑으로 넘어뜨렸다. 그러자 고성의 좌우에 있던 고구려의 신하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면서 사죄하였다. 최류가 5천 호를 이끌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북사》
○ 4년 양원왕 9년 문선제가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자, 거란은 1만여 가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부쳐 살았다. 《문헌통고》
○ 후주 명제(後周明帝) 무성(武成) 원년(559)에 고성이 죽고 아들 고탕(高湯)이 즉위하였다. 《후주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평원왕(平原王) 고양성(高陽成)이 무성 원년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니, 《후주서》에서 이름이 고탕(高湯)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연차를 드러내어 적지 않았으므로 동사에 의거하여 바로잡는다.
○ 북제 폐제(北齊廢帝) 건명(乾明) 원년 평원왕 2년 2월 을사에 고구려 왕의 세자 고탕을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으로 삼았다. 《북제서》
○ 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3년 평원왕 4년 2월 기유에 고구려 왕 고탕을 영동장군(寧東將軍)으로 삼았다. 《진서(陳書)》
○ 후주 무제(後周武帝) 건덕(建德) 6년에 평원왕 19년 고탕이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고조가 고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개국공 요동왕(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開國公遼東王)으로 삼았다. 《후주서》


 

[주D-001]겸양(嗛羊) : 양이면서 뿔이 네 개 나 있어서 양 같으면서도 양은 아닌 동물이다.
[주D-002]부여의 별종(別種) :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음을 말한다. 이들은 예맥족(濊貊族)이라고 부르는데, 백제의 지배층 및 동예(東濊) 등이 이에 포함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27쪽》
[주D-003]소노부(消奴部) : 《삼국지》에는 연노부(涓奴部)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소노부가 맞다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359쪽》
[주D-004]주몽(朱蒙) : 주몽은,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추몽(鄒蒙)’이라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記)》 천지기(天智紀)에는 ‘중모(仲牟)’라 하였고, 호태왕비(好太王碑)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추모(鄒牟)’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혹은 상해(象解)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병도는 “상해는 중모(衆牟)의 와오(訛誤)이다.” 하였다.《이병도, 國譯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213쪽 주》
[주D-005]하백(河伯)의 딸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에는 이름이 ‘유화(柳花)’라고 하였다.
[주D-006]오인(烏引)ㆍ오위(烏違) 등 두 사람 :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는 조이(鳥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주D-007]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엄사수(淹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개사수가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다는 설은 주몽의 본국(本國)을 동부여(東夫餘)로 잘못 안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북부여(北夫餘)의 위치가 지금의 농안(農安) 부근이었으므로, 여기의 대수(大水)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17쪽 주》
[주D-008]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주D-009]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0]고구려 군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이는 신흥 고구려국의 군사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흥경(興京) 노성(老城)으로 옮겨 간 한(漢)의 제2 현도군의 치현(治縣)인 고구려현의 군사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27쪽 주》
[주D-011]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 : 왕망(王莽)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한 것은 유리왕(琉璃王) 31년이기 때문에 일단 유리왕을 생각할 수 있으나, 앞뒤를 재어 볼 때 이는 설득력이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엄우(嚴尤)가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참수하였다.”고 되어 있어 중국 측 사서(史書)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이병도는 이에 대해 “이는 물론 신흥 고구려국의 왕을 말한 것이나, 이때 고구려 왕의 이름은 추(騶) 즉 추모(鄒牟)가 아니라 다음 왕인 유리왕 때에 해당되는 바, 유리왕이 즉위한 사실을 모르고 전왕이 그대로 재위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2]엄우가 …… 전하였다 : 이 부분이 《삼국사기》에는 “아장(我將) 연비(延丕)를 꾀어 목 베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엄우에게 살해된 것은 고구려 왕이 아니라 고구려 왕이 보낸 장수로, 그 이름이 꼭 연비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당시 한에서 그를 고구려후 추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면 과장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3]하구려(下句麗) : 고구려에 대해 멸시해서 붙인 칭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백제에 대해 ‘백잔(百殘)’이라고 칭하였다.
[주D-014]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제2에는 ‘잠우락부(蠶友落部)의 대가(大家)’로 되어 있다.
[주D-015]고궁(高宮) : 제6대 태조왕(太祖王)의 이름으로,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雛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三國史記 卷15 高句麗本紀 第3》
[주D-016]고구려가 …… 공격하였다 : 이에 대해 이병도는, “화려성은 낙랑의 동부 도위(東部都尉)가 관할하는 현(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영흥(永興)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현도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즉 ‘현도를 침입하였다.’는 기사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를 각각 별개의 기사로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후자를 어떤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41쪽 주》
[주D-017]아들 고수성(高遂成) : 《삼국사기》에는 ‘아우 고수성’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15 高句麗本紀 第3》
[주D-018]요대(遼隊) : 지금의 해성(海城) 서쪽이다.
[주D-019]신창(新昌) : 요동의 속현(屬縣)으로, 요양의 서북쪽에 있는 듯하다.
[주D-020]공조(功曹) : 한나라의 관명으로 서사(書史)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주D-021]병마연(兵馬掾) : 병마는 군사를 맡은 하급 관리를 말하고, 연(掾)은 보좌관, 또는 속관(屬官)을 뜻하는 바, 바로 지방 군현의 군사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주D-022]마한(馬韓) :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70년 조 기사의 소주(小註)에,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27년(9)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고 하니, 혹 이미 멸망한 뒤에 다시 부흥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마한이 멸망한 것은 실상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 생각되므로 이때 넉넉히 그 존립을 유지하였을 것이나, 고구려와 마한은 지리상이나 정치상으로 동떨어진 관계에 있었는바, 이는 오전(誤傳)일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43쪽 주》
[주D-023]견가(犬加) : 《삼국지》에는 대가(大加)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 따라 견가로 번역하였다.
[주D-024]주부(主簿) : 일명 울절(鬱折), 오졸(烏拙)이라고도 하는 고구려의 관직으로, 국가의 기밀, 법의 개정, 군사의 징발 등의 일을 맡았다. 이 주부에 대해서 김철준(金哲俊)은 ‘중국의 영향으로 된 명칭으로 왕권(王權)을 배경으로 하여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거나 대로(對盧)나 패자(沛者) 아래서 직접 국사를 총리(總理)한 관직’으로 보고 있으며, 이종욱(李鍾旭)은 ‘우태(于台)와 함께 국왕 직속의 통치 기구에 편입된 자들에게 준 관등(官等)’으로 보았으며, 신형식(申瀅植)은 이를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에 대비하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ㆍ272쪽》
[주D-025]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D-026]고추가(古雛加) : 김철준(金哲俊)은 이를 고구려의 왕족,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嫡統大人), 왕비족(王妃族)에게 준 칭호로, 대부족장(大部族長)이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기백(李基白)은 신라의 갈문왕(葛文王)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고추가는 역시 하나의 관직으로서 시대에 따라서 그 성격도 조금씩 변하여졌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70쪽》
[주D-027]환도(丸都) : 고구려의 옛 도성으로 지금의 통구(通溝)이다. 서기 2세기경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 도읍한 이후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300년간의 수도였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그 위치와 양자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종래에는 양자를 별개의 도성으로 보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국내는 환도의 한역명(漢譯名)이라 생각하고 국내성과 환도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28]조의(皀衣) : 고구려 초기의 중앙 관직으로, 국가의 기밀, 법령 제정, 군사의 징발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고 생각되며, 중국의 종3품관에 해당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29]사마선왕(司馬宣王) :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주D-030]갈구(梁口) : 이병도는 갈구(梁口)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이 합류되는 곳인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3쪽 주》
[주D-031]정현(頳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2]패자(沛者) : 고구려 때 최고 집정관(執政官)의 하나로, 기록에는 패자의 직능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로(對盧)와 함께 왕을 보좌한 좌우상(左右相)의 하나로서 국정을 총리하는 관직으로 추측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33]매구(買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大武神王條)에, 30년(대무신왕13) 7월에 매구곡 사람 상수(尙須)가 그의 동생 위수(尉須),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고구려에 내투(來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구를 매구루(買溝漊)ㆍ매구곡과 동일한 지명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위치는 함경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34]왕기가 …… 이르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위지(魏志)》에 나오는 ‘옥저 땅 1천여 리를 지나서’란 부분은 위나라 군사가 환도 방면에서 척량산맥(脊梁山脈)을 넘어 함흥 지방을 거쳐 원산(元山)ㆍ안변(安邊) 방면의 불내성(不耐城)에 이르는 과정을 추산한 숫자로, 이는 동천왕의 행방과 위나라 군사의 추격을 북옥저(北沃沮)로 알고 잘못 말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5]환도산(丸都山)에 …… 새겨 놓았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환도산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환도를 함락시킨 뒤에 관구검이 환도성의 북쪽, 곧 지금의 소판분령(小板岔嶺)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고, 불내성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왕기의 별견대(別遣隊)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여 낙랑 방면으로 철수한 뒤,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그 뒤를 이어 고구려군이 점거하였던 동예(東濊) 지방의 불내성을 쳐서 항복받고 그곳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6]대극성(大棘城) :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금현(錦縣)이다.
[주D-037]신성(新城) : 신성은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에 수축되어 고구려의 서방 요충이 되었고, 수(隋)ㆍ당(唐)과의 항쟁 때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에서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이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 이병도는 지금의 만주 봉천(奉天) 무순성(撫順城) 뒤편의 북쪽 산 위에 남아 있는 고구려산성지(高句麗山城址)로 비정하였고,《國譯三國史記 269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신성은 요하와 살이허산성 사이에 있는 무순(撫順)의 고이산성이 틀림없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93쪽》
[주D-038]용성(龍城) :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조양(朝陽)이다.
[주D-039]고구려로 …… 좁았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북쪽 길은 지금의 흥경(興京)에서 통화현(通化縣)을 거쳐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로 나오는 길인 듯하고, 남쪽 길은 흥경에서 부이강구(富爾江口)를 거쳐 하천 골짜기를 따라 통구에 이르는 길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77쪽 주》
[주D-040]남협(南陜) : 《동사강목》 제2에 “남협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통원보(通遠堡)에서 봉성(鳳城)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하였다.
[주D-041]목저성(木底城)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목기(木奇)이다.
[주D-042]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 《동사강목》에서는 “가(加)는 고구려의 관명에 상가(相加)ㆍ대가(大加)ㆍ소가(小加) 등의 관명이 있다.”고 하여, 아불화도(阿佛和度)를 이름으로, 가(加)를 직명으로 보았다. 《자치통감》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았다.《東史綱目 第2上》
[주D-043]남소(南蘇) : 신성(新城)과 함께 연(燕)과 접경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중진(重鎭) 가운데 한 성이다. 남소성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하여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요령성(遼寧省) 무순현(撫順縣) 동북쪽에 있는 살허이성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봉천(奉天) 경현(京縣)의 경계에 있다.” 하였는바, 이로 보면 지금의 심양(瀋陽) 부근의 신성(新城)과 가까운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3쪽》
[주D-044]해서공(海西公) : 진(晉)나라의 폐제(廢帝) 사마혁(司馬奕)의 봉호(封號)이다.
[주D-045]고안(高安) :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이다. 담덕(談德)이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7년(392)에 즉위하였다.
[주D-046]고구려가 …… 도망쳤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고구려의 이 원정은 연나라의 수도 가까이 깊이 쳐들어갔던 것이므로, 그간 실지(失地) 회복은 물론이요, 전날 연에 대한 큰 보복전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기백을 한껏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3쪽 주》 숙군성(宿軍城)은 《동사강목》 제2에 “숙군성은 용성(龍城) 동북쪽에 있는데, 연나라 평주 자사(平州刺史)의 관할지이다.” 하였다. 이병도는, “연의 수도 용성(龍城)은 지금의 조양(朝陽)이거니와 그 동북쪽이라면 지금 어느 곳일까?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광녕(廣寧)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3쪽 주》
[주D-047]경북(陘北) :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 서북쪽 구주산(句注山)의 북쪽 지역이다. 구주산의 남쪽은 경남(陘南)이다.
[주D-048]고화(高和) : 이병도는, “고화는 앞서(고국원왕 12년 12월) 전연의 왕 모용황이 고구려의 국도인 환도성을 무찌르고 남녀 5만여 구를 노략하여 갔을 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대로 연의 신하가 된 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5쪽 주》
[주D-049]고련(高璉) : 장수왕의 이름으로, 거련(巨連)이라고도 한다. 413년에 즉위하였다.
[주D-050]자백마(赭白馬) : 도화(桃花)의 색깔을 띤 말로, 준마(駿馬)를 뜻한다.
[주D-051]책성(柵城) : 발해에서 예(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은 다음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불렀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주D-052]화룡(和龍) : 위진남북조 시대 때 용성현(龍城縣)의 별칭으로,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주D-053]색로(索虜) : 위진남북조 시대 때 남조 사람들이 북조 사람들을 천시해서 부르던 칭호이다. 색두(索頭)ㆍ색두노(索頭虜)라고도 하는데, 북조 사람들이 변발(辮髮)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북조에서는 남조를 도이(島夷)라고 칭하였다.
[주D-054]대명(大明) 7년 장수왕 51년 : 이 부분의 원문은 ‘七年 長壽王四十八年’이다. 효건(孝建)의 연호는 3년까지 밖에 없는데, 편찬자가 대명(大明)의 연호를 빠뜨리고 기록하여, 효건 7년으로 보아 장수왕 48년이라 하였다. 이는 대명 7년으로, 대명 7년은 장수왕 51년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5]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개부(開府)는 관사(官司)를 설치해 속관(屬官)을 둘 수 있다는 뜻이고, 의동삼사(儀同三司)는 의장(儀仗) 등 모든 위의(威儀)를 천자국의 삼사(三司) 즉, 삼공(三公)과 동일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의 제도로, 이후 중국에서 우리나라 왕들에게 관직을 제수할 경우 이 칭호가 붙었다.
[주D-056]위(僞)나라의 …… 억류하였다 : 이 부분은 원문이 ‘沈文秀爲東萊太守鞠延僧數百人據城劫留高麗獻使’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문리가 연결되지 않기에 《남제서(南齊書)》 권27 열전 제8에 의거하여 ‘沈文秀爲’를 ‘沈文秀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위(僞)는 송(宋)나라에서 북위(北魏)를 지칭할 때 붙이는 글자이다.
[주D-057]육궁(六宮) : 천자를 모시는 황후와 다섯 부인을 말한다.
[주D-058]물길국(勿吉國) : 물길은 말갈(靺鞨)의 별칭이다. 물길은 숙신족(肅愼族)의 하나로 고구려 북쪽 송화강(松花江) 하류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5세기 말에는 부여를 공략하는 등 강력한 팽창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6세기 말에 말갈에 흡수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D-059]유유(蠕蠕) : 북방에 있는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다. 처음에는 유연(柔然)이라 칭했고, 송나라와 제나라 때에는 예예(芮芮)라고 칭하였으며 그 뒤에는 유유라 칭했다.
[주D-060]지두간(地豆干) : 실위(室韋)의 서쪽에 있는 나라 이름이다.《東史綱目 第2下》
[주D-061]숙도성(肅道成) : 남제(南齊) 태조(太祖)의 이름이다.
[주D-062]위(魏) 오랑캐의 나라 : 남제(南齊)에서 북위(北魏)를 천시해서 부르는 말이다.
[주D-063]심의(深衣) :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옷으로, 흰 비단으로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깃을 두른 옷이다.
[주D-064]고운(高雲) : 21대 왕인 문자왕(文咨王)의 이름으로, 고나운(高羅雲)이라고도 한다.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가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인 고운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문자왕은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주D-065]섭라(涉羅) : 탐라(耽羅)를 말하는바, 지금의 제주도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탐라는 동성왕(東城王) 20년(498)에 백제에 복속하였다.
[주D-066]술병이 …… 부끄러움이라 : 《시경》 소아(小雅) 요아편(蓼莪篇)에 나오는 시로, 자식이 불민한 것은 부모의 수치란 뜻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에서 방물을 바치지 못하는 것은 그 책임이 실제로는 고구려의 지방관에게 있다는 뜻이다.
[주D-067]두 읍(邑) : 부여와 섭라를 가리킨다.
[주D-068]한해(瀚海) : 사막(沙漠)을 가리키기도 하고 북해(北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사막의 이름으로, 지금의 몽고 대사막을 말한다.
[주D-069]고안(高安) : 22대 왕인 안장왕(安藏王)의 이름이다. 고흥안(高興安)이라고도 한다.
[주D-070]소연(蕭衍) :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이름이다.
[주D-071]고연(高延) : 23대 왕인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은 13년간 재위하였으며,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3년(531)에 훙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안원왕의 휘는 고보연(高寶延)으로, 안장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는바,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三國史記 卷19 高句麗本紀 第7》
[주D-072]영주(營州)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이다.

 

 

고구려(高句麗) 2


○ 수(隋)나라 고조(高祖) 개황(開皇) 원년 평원왕 23년 12월에 고구려 왕 고탕(高湯)에게 대장군 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을 제수하고 고려 왕(高麗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 고조가 선양을 받자 고탕이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다. 신라와 더불어서 매번 서로 침략하여 쳤는데, 개황 초년에는 자주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였다. 그러다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고탕이 크게 두려워해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쌓으면서 항거할 계책을 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隋書)》
○ 10년 영양왕(嬰陽王) 원년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본디 17년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사에 “개황 10년에 평원왕이 훙하고 영양왕 고원(高元)이 즉위하였다.”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면, 이 조서를 내린 것은 마땅히 10년에 있었으므로, 동사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황제가 고탕에게 새서(璽書)를 내리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와 예의가 미진하다.”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보인다. 고탕이 새서를 받고는 황공하여서 장차 표문을 올려 사죄하려 했는데, 마침 병이 나 졸하고, 그의 아들 고원(高元)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에 고조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원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제수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을 세습받게 하고, 옷 한 벌을 내려 주었다. 그러자 고원이 표문을 받들어 사은하고,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고조가 고원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수서》 ○ 《요사(遼史)》에는, “개황(開皇) 8년에 거란(契丹)의 별부(別部)로 고구려에 붙어 살던 출복(出伏)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부(內附)하였다. 이에 앞서 원위(元魏) 말기에 기수(寄首) 팔부(八部)가 고구려와 유유(蠕蠕)의 침입을 받아 겨우 1만여 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와 남녀 10여 만 구(口)를 포로로 잡아갔다. 계속해서 돌궐(突厥)의 핍박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쳐 가 붙어산 자가 1만 호에 불과하였으며, 부락이 흩어져서 다시는 옛날의 팔부(八部)가 되지 못하였다. 개황 말기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자, 출복 등이 고구려를 두려워해 내부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갈해나안(渴奚那顔)의 북쪽에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 18년 영양왕 9년 2월에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말갈(靺鞨)의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하니,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물리쳤다. 수(隋)나라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대노하였다. 을사에 한왕 양(漢王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고는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熲)을 한왕(漢王)으로, 장사(長史) 주라후(周羅㬋)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았다. ○ 6월 병인에 수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 왕 고원의 관작을 삭출(削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에 이르러 장마를 만나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여 군사들이 먹을 것이 떨어진 데다 역질(疫疾)까지 걸렸고, 주라후는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壞城)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대부분 뒤집혔다.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행군총관(行軍摠管) 장윤(張奫)의 군사만 살아났다.” 하였다. ○ 9월 기축에 수나라의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고구려 왕 고원 역시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글을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원(元)’이라 칭하니, 수나라 임금이 이에 군사를 파하고 그 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고원 역시 해마다 조공을 보내었다. 《수서》
○ 수 양제(隋煬帝)가 즉위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돌궐(突厥)의 계인가한(啓人可汗)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공물을 바쳤다. 이에 고원을 불러 들어와 조회하게 하니, 고원이 두려워서 번국으로서의 예를 자주 빠뜨렸다. 《상동》
○ 대업(大業) 3년 영양왕 18년 8월에 수나라 황제의 거가(車駕)가 유림(楡林)을 출발하여 돌궐의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帳幕)에 행차하였다. 이때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먼저 돌궐과 통하였는데, 계민이 감히 이를 숨기지 못하고 사신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나라 임금을 만났다. 배구(裴矩)가 이를 인하여 수나라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땅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에게 봉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나라에서도 역시 요동에서 통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제(先帝)께서 이를 미워하여 정벌하려 한 지 오랩니다. 다만 양양(楊諒)이 어리석어서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재위한 때를 당하여 어찌 이를 취하지 않아 문명국을 오랑캐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자가 돌궐에 조회하면서 친히 계민(啓民)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감화된 것을 보고서는 반드시 황제의 위엄이 멀리까지 펴져 나간 것을 두려워하고, 뒤늦게 복종했다가는 먼저 망할까 염려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틈을 타서 그를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면 고구려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양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배구가 말하기를,
“직접 고구려의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고구려로 돌아가서 고구려의 왕에게 ‘즉시 와서 알현을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돌궐을 거느리고 가서 즉시 주벌하겠다.’고 전하게 하소서.”
하니, 양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고구려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곧바로 와서 알현하게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나라로 가서 칠 것이다.”
하였다. 《상동》
○ 7년 영양왕 22년 2월 임오에 양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고구려 왕 고원이 번국의 예를 제대로 지키지 않기에 장차 요동 동쪽으로 가 그 죄를 물어 승략(勝畧)을 펴려고 한다. 비록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쪽 지방도 순시하겠다.” 하였다. 《상동》
○ 양제가 조서를 내려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유주 총관(幽州摠管) 원홍사(元弘嗣)에게 칙명을 내려 동래해구(東萊海口)에 가서 선박 3백 척을 만들게 하였는데, 관리들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주야로 쉬지 않았으므로 죽은 자가 열에 서넛은 되었다. 4월 경오에 거가(車駕)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서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집하였는데,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모두 탁군에 모이게 하고, 또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의 수수(水手) 1만 인과 노수(弩手) 3만 인, 영남(嶺南)의 배찬수(排鑹手) 3만 인을 징발하였다. 5월에 하남(河南), 회남(淮南), 강남(江南)에 명령하여 병거(兵車) 5만 승(乘)을 만들어서 옷과 무기를 모두 싣게 하고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케 하였다. 7월에 강남과 회남의 백성과 배를 징발해서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의 여러 창고에 있는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배가 1천여 리나 이어졌다. 그리고 무기와 공격하는 도구 등을 싣고 오가느라 길 위에 있는 자가 항상 수십 만 명이나 되어 길을 꽉 메워 주야로 끊이지 않았으며, 죽은 자가 줄을 지어 온 천하가 요란하였다. 《자치통감》
○ 8년 영양왕 23년 정월 신사에 사방의 병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양제가 합수 영(合水令) 유질(庾質)을 불러 묻기를,
“고구려의 군사들이 우리 한 군(郡)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인데, 이제 짐이 이 많은 군사로 치니, 경은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못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치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폐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자, 양제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기를,
“짐이 지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물러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위엄을 손상할까 염려됩니다. 만약 거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고 용맹한 장수와 강한 군사에게 명하여 지시를 받은 다음 속히 달려가게 해, 고구려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가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일은 신속히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때를 놓칠 경우에는 성공치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양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우상방서 감사(右尙方署監事) 경순(耿詢)이 봉사(奉事)를 올려 간절히 간하자, 양제가 몹시 노해서 좌우에 명하여 참수하게 하였는데, 하조고(何稠苦)가 구원하여 참수를 면하였다. 임오에 조서를 내렸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 도(道)로 나오고, 양제가 여러 군이 진격할 길을 지시하면서 한나라의 옛 현명(縣名)을 썼는데, 《한지(漢志)》를 보면, 누방ㆍ장잠ㆍ조선현은 낙랑군에 속하였고, 개마는 현도군에 속하여 개마대산(蓋馬大山)과 요동(遼東)이라는 한나라 군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명해는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해명현(海冥縣)이고, 건안, 남소,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서 성을 쌓아 지키던 곳이며, 옥저 역시 옛 지명인데, 이때에는 그 지역이 이미 신라의 경계 안으로 속하여 있었다. 우(右) 12군은 점제(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瀰)ㆍ임둔(臨屯)ㆍ후성(侯城)ㆍ제해(提奚)ㆍ답돈(蹋頓)ㆍ숙신(肅愼)ㆍ갈석(碣石)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 도로 나왔는데, 《한지》를 보면, 점제ㆍ함자ㆍ혼미ㆍ제해ㆍ동이ㆍ대방 등의 현은 낙랑군에 속하고, 후성ㆍ양평은 요동군에 속하고, 임둔 역시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군의 이름이며, 답돈은 바로 한나라의 요서(遼西)로 오환 답돈(烏丸蹋頓)이 사는 곳이며, 숙신은 옛날 숙신씨의 나라로 그 지역에 이때에는 말갈(靺鞨)이 살고 있었으며, 갈석은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갈석이다. 두우(杜佑)는 이 갈석이 고구려에 있다고 여겨 “갈석산(碣石山)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을 살펴보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하였다. 각군(各軍)이 잇달아서 길을 따라 나와 평양에 총집결하였다. 군사가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 만이라 호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군사 수의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의사(宜社)하였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께 제사 지내었으며,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었다. 그런 다음 양제가 친히 절도(節度)를 주었으며, 매 군마다 대장과 아장(亞將) 각 1명을 두고, 기병 40대를 두었는데, 각 대는 1백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0대를 단(團)으로 삼았다. 그리고 보졸 80대를 4단으로 나누고 각 단에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갑옷과 장식과 깃발을 각 단마다 서로 다른 색으로 하였고, 수항사자(受降使者) 한 사람이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대장의 규제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치중(輜重)과 산병(散兵)들 역시 4단으로 만들어 보졸이 감싸고서 나아가게 하였다. 진격하고 멈추며 진영을 치는 데 있어서 모두 차서와 법도가 있었다.
계미에 제1군을 출발시키고 날마다 한 군씩 출발시켰는데, 서로 간에 40리의 간격을 두고 영(營)을 잇달아서 차츰차츰 나아가게 하였다. 40일 만에야 군사들이 모두 출발할 수 있었는데, 앞뒤가 서로 이어져 북을 치고 각(角)을 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이 9백 60리에 뻗쳐 있었다. 어영(御營) 안은 모두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가 있어, 내외, 전후, 좌우의 6군(軍)을 여기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본대(本隊)의 뒤에 출발시켰는데, 이 군사 역시 80리를 뻗쳤는바, 출전하는 군용의 성대함이 근고에 없이 성대하였다.
○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 대장군(左侯衛大將軍)으로 삼아 남소(南蘇)의 길을 따라 진격하게 하였는데, 단문진이 중도에 병이 심하여 표문을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요동의 자그마한 오랑캐가 엄한 형벌에 복종치 않아 멀리 6군의 군사가 출동하고 황제께서 직접 출동하시게끔 하였습니다. 다만 오랑캐들은 속임수를 잘 쓰는바, 이에 대해 잘 방비하여야만 하니, 그들이 입으로 항복한다고 말하더라도 성급하게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합니다. 지금 장맛비가 내리고 있으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제군(諸軍)을 엄하게 절제해서 성화같이 속히 진격하되, 수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해서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진격한다면, 외로운 평양성쯤은 곧바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의 근본 뿌리인 평양성이 넘어간다면 그 나머지 성들은 저절로 무너져 곧바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가을장마를 만날 경우에는 몹시 곤란할 것입니다. 군량은 다 떨어지고 강적인 고구려가 앞에 있고 말갈(靺鞨)이 뒤에 있는데, 머뭇거리면서 결정짓지 못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3월 신묘에 단문진이 졸하니, 양제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 계사에 양제가 비로소 군사들을 절제하였다. 진격해서 요수(遼水)에 이르러 모든 군사가 다 모여 물가를 따라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들이 요수를 막고 굳게 지키었으므로 수나라 군사들이 요수를 건너지 못하자,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이 선봉장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양제가 공부 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부교(浮橋) 세 개를 만들게 하였다. 부교가 다 만들어지자 이를 끌어다가 요수 동쪽 언덕에 걸치게 하였는데, 부교의 길이가 짧아서 언덕에 1장 가량 미치지 못하였다. 고구려 병사들이 크게 이르자 수나라 군사 가운데 용맹한 자들이 앞을 다투어 물로 달려가 접전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높은 곳에 올라가 이들을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많았으며, 맥철장이 강 언덕에 뛰어올랐다가 호분 낭장(虎賁郞將) 전사웅(錢士雄), 맹금차(孟金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수나라에서는 군사를 거두고 부교를 끌어들여 다시 서쪽 강안에 모였다. 그러고는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부교를 잇게 하였다. 이틀 뒤에 부교가 완성되자 제군이 서로 잇달아서 계속해 나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고구려 병사가 대패하였는데, 전사자가 1만 명 정도되었다. 수나라의 제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한(漢)나라 때 요동군의 치소(治所)였던 양평성(襄平城)이다. 《수서》에 “여러 군사가 성을 포위하였다. 양제가 염비(閻毗)에게 명하여 성 아래로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쇠뇌와 화살을 마구 쏘아 대어 염비가 탄 말이 유시에 맞았다. 그런데도 염비는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였다.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양제가 형부 상서 위문승(衛文昇), 상서 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에게 명하여 요좌(遼左)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조세와 부역을 10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군현을 설치하여 서로 통섭(統攝)하게 하였다.
○ 5월에 여러 장수들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양제가 이들에게 친히 경계하기를,
“지금 백성들을 위로하고 고구려 왕의 죄를 묻는 것은 공명(功名)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여러 장수들이 혹 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경병(輕兵)으로 엄습해 외로운 군사로 혼자 싸워서 일신의 공명을 드날려 상을 받고자 한다면, 이는 대군이 진격하는 법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대들은 진군(進軍)하되, 세 길로 나누어 가고, 공격하게 되면 반드시 세 길이 서로 알아야 한다. 절대로 경병으로 혼자서 진격하여 군사를 잃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모든 군사가 진군하거나 정지하거나 모두 상부에 알려서 회보를 기다려 행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양제가 요동성에 군영을 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내보내었다. 각군(各軍)이 성 아래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거하였는데, 싸움이 불리해졌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성안에 머무르면서 굳게 지켰다. 양제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칙령을 내려 이르기를, “고구려가 만일 항복해 오면 즉시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군사를 풀어 치지 말라.” 하였다. 성(城)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고구려에서 항복을 청하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은 대로 감히 시기를 틈타 달려 나가지 못하고, 먼저 달려가서 상부에 알렸다. 그런데 회보(回報)가 올 무렵에는 고구려에서 다시 전과 같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서 수시로 나와 항전하였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양제는 끝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군량은 다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쳤으며, 군수품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다.
○ 6월 기미에 양제가 요동성의 남쪽에 와서 성지(城池)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고 인하여 여러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기를,
“공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세신(世臣)임을 믿고는 나를 어둡고 나약한 임금으로 대하려 하는가. 서울에 있던 날에 공들은 모두 내가 직접 출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공들의 못남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왔으니, 공들이 하는 짓을 보고 공들을 참수하겠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온 힘을 다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실색하였다. 양제가 인하여 성의 서쪽 몇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고구려의 성과 서로 대치하였다. 양제가 한밤중에 육합성(六合城)을 쌓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쌓음에 바라보면 마치 진짜 성같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아침에 이를 보고는 귀신이 쌓은 것으로 여겼다.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처음에 하조(何稠)가 행전(行殿)과 육합성을 지어 이때에 이르러 다 만들었는데, 그 성은 주위가 8리 가량 되었고, 성과 여원(女垣)의 합한 높이가 10길 가량 되었다. 위에다가는 갑사(甲士)들을 늘어세우고 의장과 깃발을 세웠으며, 또 서쪽 모퉁이에는 궐(闕)이 있고, 각 면별로 하나의 관(觀)을 세웠다. 관 아래에는 세 개의 문을 열어 두었고, 그 안에다 행전(行殿)을 지었는데, 전 위에는 시신(侍臣)과 삼위장(三衛杖)을 합해 6백 명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였다.
○ 관덕왕 웅(觀德王雄)이 검교좌익위대장군(檢校左翊衛大將軍)이 되어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 노하진(瀘河鎭)에 주둔하였다가 병에 걸려 훙하였다. ○ 토만서(吐萬緖)가 선봉이 되기를 청하니, 양제가 가상히 여겨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에 제수하였다. 마병과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개마도(蓋馬道)로 나아갔다. ○ 번자개(樊子蓋)가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에 징발되어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 ○ 사상(史祥)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에 제수되어 답돈도(蹋頓道)로 나아갔다. ○ 주법상(周法尙)이 주사(舟師)로서 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갔다. ○ 육지명(陸知命)이 동이도수항사자(東暆道受降使者)가 되었다. ○ 이경(李景)이 혼미도(渾濔道)로 나아가 고구려의 무려성(武厲城)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원구후(苑邱侯)에 봉작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각각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왔는데, 배가 수백 리에 뻗쳤다.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浿水)로 들어갔다. 평양(平壤)과의 거리가 60리 되는 곳에서 고구려군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취하려고 하자, 부총관 주법상이 이를 저지하면서, 여러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진격하기를 청하였다. 내호아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정예군 4만 명을 선발하여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나곽(羅郭) 안의 빈 절에 복병을 매복해 놓고 나와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하자, 내호아가 그들을 추격하여 성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약탈하게 하면서 대오를 다시 편성하지 않아 모두 흩어졌다. 이때 매복해 있던 고구려의 군사들이 일어나서 공격하였다.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건졌고 사졸들은 살아 돌아온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 살펴보건대, 《수서》 내호아열전에는, “고원(高元)의 동생 고건무(高建武)가 결사대 5백 명을 모집하여 요격하였다.”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배가 있는 곳까지 추격했으나 주법상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기하고 있자, 고구려 군사들이 이에 물러났다. 내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해포(海浦)로 돌아와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감히 다시는 평양성과 가까운 외곽에 머무르면서 제군(諸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못하였다. ○ 살펴보건대, 《북사》 내호아열전에, “내호아가 평양도행군총관 겸 검교동래군태수(平壤道行軍摠管兼檢校東萊郡太守)가 되어 누선(樓船)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패수(浿水)로 들어갔는데,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이다.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경내(境內)를 치우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는데, 군진(軍陣)이 수십 리에 뻗쳐 있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인 주법상(周法尙)과 군리(軍吏)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디 고구려에서 성을 튼튼히 지키고 들판을 깨끗이 비운 채 우리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그들 스스로가 죽을 곳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을 멸망시키고 아침을 먹겠다.’ 하였다. 고원의 동생 고건(高建)은 효용이 뛰어나 결사대 수백 명을 이끌고 도전해 왔다. 이에 내호아가 무분낭장(武賁郞將) 비청노(費靑奴)와 여섯째 아들인 좌천우(左千牛) 정(整)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그의 목을 자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군사를 풀어 도망치는 고구려 군사를 추격해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는데,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인하여 고구려의 성곽(城郭)을 깨뜨리고 성 바깥에 주둔하여 제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고구려에서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는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통감고이(通鑑考異)》에는, “이제 《수서》와 《혁명기(革命記)》를 따른다.” 하였다. 대개 고건무는 바로 뒤에 영류왕(榮留王)이 되었는바, 이곳에서 ‘달려가서 목을 자르게 하였다.’고 한 것은 심하게 속인 것이다. 《수서》와 《통감》이 옳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夫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익위장군(右翊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成道)로 나가고, 살펴보건대, 《수서》 최홍승열전에는 평양도로 나갔다고 하였다. 검교우어위호분낭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살펴보건대, 《수서》를 보면 위문승의 이름은 위현(衛玄)이고 문승은 그의 자(字)이다. 증지도(增地道)로 나가서 모두 압록강(鴨淥江)의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에게는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서부터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치의 양식을 주고, 또 갑옷과 창 등의 무기와 의류, 병기, 천막 등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군중의 사졸들에게 “군량을 버리는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하고 명령을 내리자, 사졸들이 모두 천막 아래에다 구덩이를 파고 이를 묻어 버렸다. 이에 겨우 중간쯤 갔을 때 이미 군량이 다 떨어지게 되었다. 《자치통감》
○ 우중문(于仲文)의 군사가 오골성(烏骨城)에 주둔하였다. 우중문이 파리한 말과 노새 수천 마리를 뽑아 군대 뒤에다가 놓아두었다. 얼마 뒤에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고구려에서 군사들을 출동시켜 치중(輜重)을 습격하였다. 우중문이 뒤돌아서서 이들을 쳐 크게 격파하였다.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자치통감》의 주(注)에, 《혁명기(革命記)》에는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수서》와 《북사》에 따른다.” 하였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중문 진영으로 들어왔다. 우중문이 이에 앞서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그 밀지에, “고구려 왕 고원이나 을지문덕이란 자가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 하였다.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잡으려 할 때 상서 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 있으면서 이를 굳이 제지하니, 우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에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을지문덕에게 속여 말하기를, “다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에 우중문이 기병을 뽑아 압록수를 건너 추격하였는데, 싸울 때마다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을지문덕이 시(詩)를 지어 우중문에게 보내니,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유시하였는데, 을지문덕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이때 우문술(宇文述)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였다. 이에 우중문이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하니, 우문술이 굳게 저지하였다. 그러자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서 적은 적군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그리고 나 우중문은 이번의 출정이 성공치 못할 것임을 알겠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옛날에 성공한 양장(良將)은 군중의 일에 대한 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각 사람마다 딴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였는데, 이때 황제가 우중문에게 계획이 있다고 하여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그에게 여쭈어 절도(節度)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따라 드디어 동쪽으로 행군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서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는 우문술의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문득 도망쳤다.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기자, 승첩을 믿고 또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몰려, 드디어 동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고원(高元)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조회하겠다.” 하니, 우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고하여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을지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철군하였다. 《수서》 ○ 《자치통감》 주에는, “가령 내호아(來護兒)의 군사가 패하여서 먼저 물러나지 않았다면 평양성의 바깥에 진영을 치고서 우문술 등의 제군과 달려와 응원하면서 호응하여서 살수에서의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또 《통감고이》에는 이르기를, “《혁명기(革命記)》에 ‘허공(許公)이 즉시 평양성 첫머리에 이르자, 고구려에서 즉시 항복하는 깃발을 성 위에 꽂고는 5일이 지난 뒤에 고구려의 지도와 호구 문서를 들고 성문을 열고서 명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5일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에 허공이 자주 재촉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 뒤 또 10일이 지나서 고구려에서 말하기를, 「배와 양식이 모두 패몰되어 수나라 군사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공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비로소 항거하는 깃발을 세우고는 굳게 성을 지키면서 군사를 나누어 험고한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이에 허공이 비로소 고구려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날마다 방진(方陣)을 치면서 후퇴한 탓에 사면에서 한꺼번에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살상된 자가 아주 많았으며, 양식마저 다 떨어져서 요수를 건너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양제는 교만하고 흉포하니, 고구려에서 만약 분명하게 항복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면 우문술 등은 반드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수서》를 따른다.
○ 우문술 등이 방진(方陣)을 치면서 철군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출동하여 사면에서 습격하자,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철군하였다. 7월 임인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후군(後軍)을 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괴멸되는 것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장사들이 다투어 도망쳐 하루 낮 하루 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를 행군한 셈이다. 천수(天水) 사람인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後軍)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직 위문승(衛文昇)의 군대 하나만 온전하였다. 처음에 구군(九軍)이 요수(遼水)를 건넜을 때에는 30만 5천 명이었는데, 돌아가서 요동성에 이른 군사는 2천 7백 명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모두 잃어버려 탕진되었다. 이에 양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가두었으며, 계묘일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출정에서 단지 요수 서쪽의 고구려 무려라(武厲邏)를 고구려에서 요수의 서쪽에 순찰군을 두고서 요수를 건너는 자를 감시하였다. 함락시키고,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9월 경인에 거가가 동도(東都)에 이르렀다. ○ 11월 갑신에 우문술ㆍ우중문 등을 모두 직명을 삭제하고 일반 백성으로 만들었으며, 유사룡(劉士龍)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 위문승(衛文昇)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삼았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살수(薩水)의 싸움에서 패하였을 때 설세웅(薛世雄)이 돌아오다가 백석산(白石山)에 주둔하였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1백여 리나 포위하여 사방에서 비가 내리듯이 화살을 쏘아 대었다. 이에 설세웅은 파리한 군사들을 모아 방진(方陣)을 만든 다음 날랜 기병 2백 명을 뽑아 앞장서서 치자, 고구려 군사가 조금 물러났다. 이 틈을 타 휘몰아쳐 드디어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서 돌아왔다. 그러나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기에 좌죄(坐罪)되어 면직되었다. ○ 양의신(楊義臣)이 군장(軍將)이 되어 숙신(肅愼)의 길로 나아갔다가 압록수에 이르러 을지문덕과 싸울 때 매번 선봉장이 되었는데, 하루에 일곱 차례를 싸워 이겼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군사들과 함께 패하였으므로 좌죄되어 면직되었다. ○ 유원(游元)이 영좌효위장사(領左驍衛長史)로서 개모도감군(蓋牟道監軍)이 되었는데, 우문술 등 구군(九軍)이 고구려에 패하자, 양제가 유원에게 그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9년 영양왕 24년 정월 정축에 조칙을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해서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군(驍果軍)을 만들었으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이래로 요동성은 모두 양평(襄平)에다가 쌓았는데, 모용씨가 비로소 평곽(平郭)에다가 진을 설치하였다. 앞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고 한 데에서 말한 요동성은 바로 한나라의 양평성을 말한 것이다. 지금 다시 옛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 것은 대개 성곽을 옮긴 것이다.
○ 2월 임오에 조칙을 내리기를,
“우문술은 군량을 계속해서 지급받지 못하여 드디어 군대를 패하게 하였는바, 이는 군리(軍吏)가 군량을 제대로 대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지, 우문술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라.”
하였다. 양제가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구려가 작은 오랑캐로서 상국을 모욕하고 있다. 지금 바다를 막고 산을 옮기는 일도 능히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까짓 오랑캐쯤이겠는가.”
하고는, 다시금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기를,
“융적(戎狄)이 예(禮)를 잃은 것은 신하의 일이며, 천균(千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하여는 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만승(萬乘)의 몸으로서 작은 적과 대적하십니까.”
하였으나, 양제가 듣지 않았다.
○ 4월 경오에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넜다. 임신에 우문술과 상장군(上將軍) 양의신(楊義臣)을 보내어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우효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수군을 거느리고 창해도(滄海道)로 나와 동래(東萊)에 주둔하고는 평양으로 가려고 하였다. ○ 우후위장군(右候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이 답돈도(蹋頓道)로 나아가 오골성(烏骨城)에 이르러서 주둔하였다. ○ 이경출(李景出)이 요동도로 나갔다. ○ 어구라(魚俱羅)가 갈석도군장(碣石道軍將)이 되었다. ○ 양언광(梁彦光)이 영무분낭장(領武賁郞將)으로서 노룡도군부(盧龍道軍副)가 되었다. ○ 방언겸(房彦謙)이 어가를 따라서 요동에 이르러 부여도(扶餘道)의 군사를 감독하였다. ○ 좌광록대부 왕인공(王仁恭)이 전군(前軍)이 되어 부여도로 나갔다. 양제가 그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는 제군이 모두 패하였는데, 공만이 홀로 일군(一軍)으로 적을 격파하였다. 이제 공에게 전군을 맡기니,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 하였다. 왕인공이 드디어 진군해서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자치통감》 주에, “신성은 남소성(南蘇城)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 수만 명이 성을 등지고 진을 쳤다. 왕인공이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니, 고구려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는데, 왕인공이 사방으로 포위하였다. 양제가 이를 듣고는 몹시 기뻐하면서 사인(舍人)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양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각자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종사하게 하였다. 이에 비루(飛樓)당거(撞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일제히 진격하여 밤낮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이에 임기응변으로 항거하니,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수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 가운데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운제의 장대 높이가 15장이나 되었는데, 효과군(驍果軍)으로 있던 오흥(吳興) 사람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에 바짝 붙어 고구려 군사와 싸웠다. 짧은 칼로 접전하여 고구려 군사 수십 명을 죽이자, 고구려에서 앞 다투어 그를 쳐 떨어뜨렸다.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심광이 마침 장대 끝에서 늘어진 줄을 잡고서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는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를 제수하였다.
○ 6월에 요동성을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양제가 포대 1백여 만 장을 만들어 보내 흙을 가득 담아 이를 쌓아서 어량(魚梁) 모양으로 대도(大道)를 만들되, 너비가 30보에 높이는 성(城)과 같게 쌓은 다음 전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팔륜누거(八輪樓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어량 대도를 끼고 성을 굽어보면서 성안으로 활을 쏘려고 하였다. 시기를 정하여 공격하려 할 적에 성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위축되었는데,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모반하였다는 소식이 이르니, 양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 고관들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이 있는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더 걱정하였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평소 양현감과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여겨 무진에 고구려로 도망쳤다. 경오일 밤 2경에 양제가 몰래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였다. 군사 자재와 무기, 공격하는 기구는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며, 영루와 장막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아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갔다. 군사들은 두려워 술렁거려 대오를 분별하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고구려 군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성 밖으로 나와서 싸우지 못하고, 성안에서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다음 날 오시(午時)에야 차차 밖으로 나와서 사방으로 정탐군을 내보냈다. 그런데도 오히려 수나라 군사들이 속이는가 의심스러워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추격했는데,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쫓지 못하고, 항상 8,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추격하였다. 요수에 이르게 되어서야 양제가 이미 강을 다 건너간 것을 알고는 후군(後軍)을 핍박하였다. 이때 후군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뒤따라와 습격하여 가장 뒤에 쳐져 있던 노약한 군사 수천 명을 죽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로 도망치자, 양제가 염비(閻毗)에게 명령하여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으나 붙잡지 못하였다. 곡사정이 고구려의 박애성(拍崖城)에 웅거하여 있자 염비가 2일 동안 공격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염비를 불러들였다. 이에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쳐 모든 사실을 고하였으므로 고구려에서 모든 정예병을 동원하여 추격해 왔다. ○ 고구려가 후군(後軍)을 치자, 우무위대장군 이경(李景)에게 칙명을 내려 뒤에서 고구려 군사를 막게 하였다. 고구려의 추격하는 군사가 크게 이르자, 이경이 이를 쳐서 격퇴시켰다. 《이상 모두 수서》
○ 10년 영양왕 25년 2월 신미에 조서를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무자에 조칙을 내려 다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든 길을 따라 모두 나오게 하였다. 《수서》에, “신묘에 조칙을 내렸다.”고 하였다. ○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나온다. ○ 3월 임자에 양제가 탁군(涿郡)에 행차하였는데, 도중에서 도망치는 사졸이 줄을 이었다. ○ 7월 계축에 거가가 회원진(懷遠鎭)에 주둔하였다. 이때에는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한 군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기일에 맞춰 오지 못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병란에 시달려 피폐하였다.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바로 비사성(卑沙城)으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바닷길에서 평양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비사성을 거쳐야 한다. 당나라 정관(貞觀) 말에 정명진(程名振) 역시 이 길을 따라 나왔다. 이르자, 고구려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내호아가 이를 격파하고, 장차 평양성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두려워서 갑자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면서 곡사정을 잡아 보내었다. 살펴보건대, 곡사정은 지난해에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이에 양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내호아를 소환하게 하였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모아 놓고서 말하기를, “대군이 두 번이나 출동하여 적을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번에 돌아갈 경우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인바, 수고만 하고 공이 없음을 나는 몹시 수치스럽게 여긴다. 지금 고구려는 실제로 지쳐 피폐해 있는 상태다. 그러니 이 틈을 타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한다면 며칠 안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격하여서 곧바로 평양성을 포위해 고원을 죽이고 승리해 돌아오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하면서 조서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장사(長史) 최군숙(崔君肅)이 굳게 만류하자, 비로소 조서를 받들었다. ○ 8월 기사에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하였다. ○ 10월 기축에 서경(西京 장안(長安)을 말함)으로 돌아왔다. 고구려의 사신과 곡사정을 끌고 가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이어 고구려 왕 고원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고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이에 장수들에게 군장을 엄하게 하도록 신칙하여 다시 거병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다시 거병하지 못하였다. 《수서》에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거병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당초 개황(開皇) 말기에 국가가 부강하여 조야(朝野)에서 모두 고구려를 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유현(劉炫)만이 홀로 이를 불가하게 여기면서 무이론(撫夷論)을 지어 이를 풍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그 말이 비로소 맞아떨어졌다. 11월에 금광문(金光門) 밖에서 곡사정을 죽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호관록(壺關錄)》에는, “이밀(李密)이 조군언(祖君彦)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해 양제의 죄 열 가지를 열거해 천하에 포고하였는데, 그 일곱 번째에 말하기를, ‘요수(遼水)의 동쪽 조선(朝鮮)의 지역에 대해서 우공(禹貢)은 황복(荒服)으로 삼았고, 주왕(周王)은 버려두고서 신하로 삼지 않았다. 그러고는 기미책을 쓰면서 성교(聲敎)가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고자 한 것이지 영토를 넓히자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 쇠뇌라도 쏘지 않으면 이치상 얇은 비단도 뚫을 수 없는 법이고, 폭풍의 마지막 힘으로는 어찌 가벼운 깃털인들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돌밭은 차지해 보았자 쓸모가 없는 법이고 닭갈비는 버려두는 것이 제대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많고 군사가 강한 것을 믿고는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는바, 이는 오로지 병탄하는 데만 뜻이 있고 장구한 계책은 하지 않은 것이다. 무력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저절로 불타는 법이다. 이에 드디어 억만의 군사들을 몰살시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부차(夫差)가 나라를 잃은 것은 실로 황지(潢池)의 싸움으로 인해서였으며, 부견(苻堅)이 자신을 멸망시킨 것은 참으로 수탕(壽湯)의 싸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앞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잡으려다가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자를 알지 못하였다. 패전하여 돌아 오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고 과부를 조문하는 자들이 줄을 이루었으니, 의부(義夫)가 이를 갈며 장사(壯士)가 팔을 걷어붙이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위(魏)나라부터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네 나라가 바뀌면서 때마침 서로 다투느라 외국을 정벌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개황(開皇) 말기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요동 동쪽을 정벌하였는데,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군사들이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 양제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해서는 천하를 포용할 뜻으로 자주 삼한(三韓)의 땅을 짓밟고자 여러 번 중국의 군사를 동원하니, 고구려에서는 망할까 두려워 궁한 쥐가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이 하였다. 이에 싸워도 이기지 못하여 천하가 소란해졌으며, 드디어는 흙더미가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려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덕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창성하고 땅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요동의 지역은 중국의 군현(郡縣)에 들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 제국(諸國)의 자격으로 조회하면서 해마다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다. 수 양제는 위엄이 진동하자 자만심에 빠져 남들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이에 문덕(文德)으로 감싸 주지 못하고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여 안으로는 부강한 것을 믿고 밖으로는 영토를 넓혔다. 교만함으로써 원망을 취하고 분노로 인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로부터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사이(四夷)에 대한 경계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북사》
고구려는 본디 미천하여서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은 모두 이 고구려와 관계가 된다. 수 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그 당시에 돌궐(突厥)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帳幕)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啓民)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裴矩)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드디어 이 화를 일으켰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해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천하 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하였다. 《도서편(圖書編)》


[주D-001]기수(寄首) : 거란의 선조인 기수가한(寄首可汗)을 가리킨다. 기수가한은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그 뒤에 점차 번성하여 팔부(八部)로 나뉘어져 송막(松漠)의 사이에 거주하였다.《遼史 卷32 志第2 營衞志中》
[주D-002]팔부(八部) : 거란의 여덟 부족을 말한다. 부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초기의 여덟 부족은 실만단부(悉萬丹部)ㆍ하대하부(何大何部)ㆍ복불욱부(伏弗郁部)ㆍ우릉부(羽陵部)ㆍ일련부(日連部)ㆍ필혈부(匹絜部)ㆍ여부(黎部)ㆍ토륙우부(吐六于部)이다.《遼史 卷32 志第2 營衞志中》
[주D-003]남녀 …… 잡아갔다 : 원문은 ‘晏十餘萬口’이다. 《요사》 권32에 의거해 ‘虜男女十餘萬口’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말갈(靺鞨) : 주대(周代)에는 숙신(肅愼), 한대(漢代)와 위대(魏代)에는 읍루(揖婁),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勿吉)이라고 불렸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 말갈이라 불리어졌다. 숙신계(肅愼系)의 종족으로 고구려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구려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말갈 민족은 모두 7종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속말부(粟末部)와 흑수부(黑水部)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0~161쪽》
[주D-005]임유관(臨渝關) :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서북쪽, 영평(永平) 동남쪽이다.
[주D-006]동래(東萊)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내주(萊州)이다.
[주D-007]고창국(高昌國) : 옛 나라의 이름이다.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지역에 있었던 토번(吐蕃)으로, 당나라 이정(李靖)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08]가한(可汗) 계민(啓民) : 돌궐(突厥)의 추장 사발략(沙鉢畧)의 아들로 이름은 염간(染干)이다. 동돌궐(東突厥)의 추장으로 있으면서 수 양제에게 청혼하자, 수 양제가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었으며, 도람가한(都藍可汗)의 침입을 받아 밤중에 도망쳐 중국으로 들어와 조회하자, 수 양제가 삭주(朔州)에 주둔하게 하였다가 다시 하남(河南)으로 옮겨 있게 하였다. 도람가한이 죽은 뒤 달두가한(達頭可汗)과 싸워 이겨 돌궐족을 모두 병합하였다. 가한(可汗)은 돌궐ㆍ흉노(凶奴)ㆍ회흘(回紇) 등 종족들의 군주의 칭호로, 왕(王)이라는 뜻이며, 가한(可寒)ㆍ합한(合罕)ㆍ합안(合安) 등으로도 표기한다.
[주D-009]고죽국(孤竹國) : 현재의 황해도 해주(海州)라는 설이 《삼국유사》 등에 나와 있으나, 이는 고죽국의 왕자라고 하는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곳과 동명(同名)인 수양산(首陽山)이 해주에 있기 때문에 부회(附會)된 것이라 함은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백이조(伯夷條)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죽수양산조(孤竹首陽山條) 등에서 지적된 바가 있다. 천관우(千寬宇)는 이 고죽국을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 곧 난하(灤河)와 대릉하(大凌河) 사이, 특히 그 수부(首府)를 난하 하류의 지금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지역으로 보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9쪽》
[주D-010]배찬수(排鑹手) : 창을 쓰는 군사를 말한다.
[주D-011]좌(左) 12군(軍)은 …… 총집결하였다 : 이에 대해 이병도는, “누방(鏤方) 이하 각 12도의 지명 가운데는 간혹 당시의 것도 들어 있으나, 대부분은 옛날 한(漢)ㆍ위(魏) 시대의 동방 군현이나 민족(民族)의 칭호를 빌어 잡다하게 나열한 데 불과한 것이거니와, 이들 지명이 반드시 당시 행군(行軍)의 실지적인 목표로 정해진 것은 아니요, 또 각군(各軍) 진행 방향에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각 부대를 표시하기 위해서 나열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09쪽 주》
[주D-012]상건수(桑乾水) : 지금의 북경(北京) 남쪽에 있는 영정하(永定河)이다.
[주D-013]의사(宜社) : 군사가 출정(出征)하기 전에 사(社)에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4]마조(馬祖) : 천사성(天駟星)의 별칭이다. 천사성은 말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는 별로, 출정(出征)하기 전에 이곳에다 제사 지낸다.
[주D-015]맹금차(孟金叉) : 원문에는 맹차(孟叉)로 되어 있으나, 《수서》 권4 제기(帝紀) 제4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맹차(孟叉)로 되어 있다.
[주D-016]육합성(六合城) : 육합판성(六合板城)이라고도 하며, 사방 6자 되는 판목(版木)을 여섯 개 이어서 만든 행궁판성(行宮板城)이다.
[주D-017]노하진(瀘河鎭) : 요서(遼西) 지방에 있던 진으로,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주위의 의주(義州)에 있었다.
[주D-018]무려성(武厲城) : 이곳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상세치 않으나 지금의 봉천성(奉天省) 신민부(新民府)가 봉천과 요양(遼陽)에 통하는 요하(遼河) 서편의 중요한 지점인 것으로 보아 이 부근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15쪽 주》
[주D-019]평양(平壤)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여기에 나오는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하였다. 즉 이때 고구려에서는 수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원수도인 지금의 평양에서 부수도인 평양, 즉 봉황성으로 수도를 옮긴 다음 그곳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전쟁을 지휘하였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33쪽ㆍ239쪽》
[주D-020]압록강(鴨淥江)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이곳의 압록수는 오늘날의 압록강이 아니라 태자하 하류였다. 태자하 남쪽 기슭에 있는 요동성은 고구려 때의 이름이 오렬홀이었으며, 태자하는 《금사》 지리지와 《만주원류고》에 오륵호 또는 올로홀로 불렸던 강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때에도 오열수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열수는 압록수와 음이 비슷하다. 그러므로 원래 수나라 측 전쟁 기록에는 오열수를 건너 봉황성으로 갔다고 쓰여 있던 것을 당나라 때 《수서》를 편찬하는 자들이 당시 자신들의 지리 지식에 따라 오열수를 압록수로 고쳐 놓은 것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38쪽》
[주D-021]오골성(烏骨城)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오골성의 위치에 대해 종전에는 봉황성이나 그 부근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러나 봉황성은 그 당시에 고구려의 부수도(副首都)였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그러한 견해들은 맞지 않는 것이다. 오골성은 지금의 요령성 수암현에 있는 수암성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3쪽》
[주D-022]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면서 “살수는 평양성과 오골성 사이에 있었다. 오골성의 위치는 수암이며, 평양성은 봉황성으로, 그 사이에 있는 강은 소자하이다. 그리고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에서 패배해 도망칠 때 하루에 4백 50리를 도망쳐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소자하 하류에서 태자하 하류까지의 거리가 4백 50리이다. 또 소자하라는 강 이름의 소자(小子)는 살수(薩水)의 살(薩)이 음이 변한 것이며, 지금의 소자하 하류에는 사리채와 같이 ‘살’과 관련되는 지명도 있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23]백석산(白石山) : 어느 곳인지 미상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백석산이란 지명은 후세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면 해성(海城)과 수암(秀巖) 사이에는 백산ㆍ활석령ㆍ백사산 등 백석산과 관련되는 산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백석산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산으로는 해성과 수암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백사산이다. 청천강과 의주 사이에는 백석산이 없다. 이것은 침략군이 오늘날의 압록강 이남으로 온 일이 없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8쪽》
[주D-024]비루(飛樓) : 적의 성안을 바라볼 때 쓰이는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주D-025]당거(撞車) : 수레 위에 쇠를 덮어씌운 다음 당목(撞木)을 세우고 횡목(橫木)을 묶어 앞 끝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수레로, 성이나 성문을 격파하는 데 쓰이는 도구이다.
[주D-026]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로, 성을 공격하는 도구이다.
[주D-027]지도(地道) : 성을 침입하기 위해 땅굴을 파는 것을 말한다.
[주D-028]팔륜누거(八輪樓車) : 밑에 바퀴를 여덟 개 달아 만든 누거(樓車)를 말한다.
[주D-029]양현감(楊玄感)이 …… 소식 : 양현감은 수 양제의 총애하는 신하로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군수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수나라의 군사가 고구려에게 계속해서 패하는 것을 보고는,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들고 나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대업(大業) 9년(613) 9월에 패하여 죽었다.
[주D-030]비사성(卑奢城) : 지금의 대련만(大連灣) 북쪽 해안에 있는 대화상산(大和尙山)이다.
[주D-031]이밀(李密) : 수나라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 양제가 고구려 침략을 위해 출병하였을 때 양현감(楊玄感)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 후 다시 적양(翟陽) 등과 함께 하남(河南)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장안(長安)의 이연(李淵)에게 투항하였다.

 

 

고구려(高句麗) 3


○ 당 고조 무덕(武德) 2년 영류왕(榮留王) 2년 고구려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건무는 바로 전왕 고원(高元)의 이모제(異母弟)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5천 1백 리 떨어져 있다. 《구당서》
○ 5년 영류왕 5년 고조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戰士)들이 고구려에 많이 함몰하였음을 생각해서 고건무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보인다.
“수나라 말년에 연이어 군사를 발하여 각자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骨肉)이 서로 헤어지도록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이제 두 나라가 화의를 통하였으니 의리에 있어서 서로 막힐 것이 없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조사하여 찾는 즉시 돌려보내라고 영을 내렸으니, 고구려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왕은 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고건무가 중국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는데, 전후로 돌아온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자,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상동》
○ 7년 영류왕 7년 2월 정미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고구려로 가서 고건무를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 천존상(天尊像)도사(道士)를 데리고 고구려로 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하니, 왕과 도가(道家), 속가(俗家)들 가운데 청강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명분과 실제 사이에는 이치가 서로 부합되어야만 하는 법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해 신하를 칭하였으나 마침내 양제(煬帝)에게 맞섰으니, 이 어찌 신하를 칭하였다고 하겠는가. 짐(朕)은 만물(萬物)에 대해 경건히 대하여 교만을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다만 국토를 지켜 사람들을 편안케 하기에 힘쓸 뿐이다. 그러니 어찌 고구려에게 칭신하라고 하여 스스로 존대한 체하겠는가. 즉시 짐의 이러한 뜻을 조서로 지으라.”
하였다. 시중(侍中) 배구(裴矩), 중서 시랑(中書侍郞) 온언박(溫彦博)이 아뢰기를,
“요동(遼東) 땅은 주(周)나라가 기자(箕子)의 나라로 삼았고, 한(漢)나라의 현도군(玄菟郡)이었으며, 위진(魏晉) 이전에는 가까이 봉역(封域)의 안에 있었으니, 신하를 칭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랑캐에 대해서 중국은 열성(列星)에 대한 태양의 지위와 같은바, 이치상 존귀한 지위를 낮추어 번복(藩服)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치었다. 《상동》
○ 9년 영류왕 9년 신라와 백제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고건무를 헐뜯으면서, 고구려에서 길을 막아 입조할 수가 없으며 또 서로 틈이 벌어져 자주 침략해 온다고 하였다. 이에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에게 조칙을 내려 가서 서로 화해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건무가 표를 올려 사죄하고 신라와 더불어 사신끼리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상동》
○ 태종 정관(貞觀) 2년에 영류왕 11년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자,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고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 《상동》
○ 5년 영류왕 14년 광주도독 부사마(廣州都督府司馬) 장손사(長孫師)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로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자의 해골을 거두어 파묻고 고구려에서 세운 경관(京觀 적의 시체를 한 데 높게 쌓아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임)을 헐어 버리게 하였다. 이에 고건무가 고구려를 칠까 두려워하여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천여 리였다. 《상동》
○ 14년에 영류왕 23년 고구려에서 태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어 입조하고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그러고는 사자(使者) 진대덕(陳大德)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실정을 살피게 하였다. 진대덕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서는 이르는 성읍(城邑)마다 지키는 관리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고구려의 실정을 자세히 파악하였으며, 수나라 때 종군하였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중국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존망(存亡)에 대해 말해 주자, 그를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을 메우고서 그를 보았으며, 고건무는 성대히 군용(軍容)을 펼치고 사자(使者)를 만나 보았다. 진대덕이 돌아와서 모든 사실을 진달하니, 황제가 몹시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또 아뢰기를,
“고구려에서 고창(高昌)이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가 세 번이나 숙소로 찾아와서 예를 베풀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지역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발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면 나머지 여러 성들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그때 내가 별도로 주사(舟師)를 보내 동래(東萊)에서 바닷길을 따라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면 참으로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천하가 겨우 태평해졌기에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하였다. 《신당서》 ○ 《자치통감》 주에는, “태종의 이 말을 보면 이미 고구려를 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 16년에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섭직(攝職)을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니,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비밀히 의논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다 불러 모으고는 열병한다고 하면서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대신들을 불러 참관하게 하니, 대신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군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고는 창고를 불태우고 궁궐로 쳐들어가 고건무를 죽이고 고건무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고장(高臧)을 왕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막리지는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중서령(中書令)을 겸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연개소문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태종이 고건무가 죽었다고 듣고는 거애(擧哀)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해 조제(弔祭)를 지냈다. 《구당서》 ○ 《규염객전(虬髥客傳)》에는, “규염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에는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일을 성사시킨 때이다.’ 하였다. 정관(貞觀) 10년에 공(公 이정(李靖)을 말함)이 좌복야 평장사(左僕射平章事)로서 남만(南蠻)에 갔는데, 그곳 사람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배 1천 척과 군사 10만 명이 부여국(扶餘國)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나라가 이미 안정되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규염이 일을 성공한 것을 알았다.” 하였다.
○ 17년 보장왕 2년 6월 정해에 태상 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의 수병(戍兵)을 증원하여 고구려를 핍박하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먼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할 것이다. 1, 2백 명의 수병으로 능히 먼 곳에 있는 나라를 위협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 윤달에 황제가 이르기를,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하니, 참으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오늘날 병력으로 고구려를 취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내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신당서》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사졸들이 용감하고 힘이 남아도는데도 이를 억제하고 쓰지 않으시니, 이는 이른바 전란을 쉬어 무기의 사용을 그치는 것이 진정한 무공(武功)이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개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국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수비를 엄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우선은 더 참고 계십시오. 저들이 스스로 편안함을 얻으면 반드시 다시 교만해져서 그 포악함을 더욱 방자히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들을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당서》에, “장손무기가 ‘고구려가 일찍이 한 번도 어려움을 호소해 온 적이 없으니, 조서를 내려 위로하면서 그들의 환난을 불쌍히 여기고 생존한 자를 어루만져 준다면, 그다음부터는 중국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태종의 웅대한 뜻이 일찍이 하루도 고구려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무진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 왕 고장(高藏)을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으로 삼고는, 사신을 보내어 절부를 가지고 가서 책봉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어떤 자가 황제에게 고구려를 토벌하라고 권하였는데, 황제는 상을 당한 틈을 타 정벌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에 장을 왕으로 제수한 것이다.” 하였다.
○ 9월 경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침입해 올 것 같기에 삼가 천자께 귀명(歸命)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어떻게 하면 그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사신이 답하기를,
“계책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내가 약간의 군사를 보내어 거란과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갈 경우, 그대 나라가 한 1년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내가 그대 나라에 강포(絳袍)와 단치(丹幟) 수천 개를 주어 그들이 올 때 진열하여 세우게 하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 군사가 온 것으로 여기고 반드시 다 달아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가 바다가 험한 것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수군 수만 명을 이끌고 습격하고, 그대 나라가 여인을 임금으로 삼은 탓에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내가 친척을 한 사람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고 그 뒤에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이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어떠한 계책을 쓰겠는가?”
하니, 사신이 답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 황제가 사농 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새서(璽書)를 싸 가지고 가 고구려에게 주게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 당나라에 인질을 맡기고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치고 있다. 그러니 그대 나라는 백제와 함께 각기 병기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침공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하였다. 《자치통감》
○ 18년 보장왕 3년 정월에 상리현장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격파하였는데, 고구려 왕이 그를 불러들이도록 하여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달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지난날 수(隋)나라가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침략한 땅을 돌려주지 아니하면 싸움은 중지할 수 없다.”
하였다. 상리현장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추론(追論)한단 말이오. 지금 요동(遼東)의 모든 성은 본래 다 중국의 군현(郡縣)인데도 고구려의 땅은 한나라나 위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며, 진씨(晉氏)의 난리에 비로소 중국과 단절되었다. 지금 중국은 오히려 아무말 않고 있는데, 고구려는 어찌하여 반드시 옛 땅을 찾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나 막리지는 마침내 따르지 않았다. 2월 초하루 을사에 상리현장이 돌아와서 그 상황을 모두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대신을 해치고 그 백성에게 잔학하게 하면서 이제 또 조서를 어기고 이웃 나라를 침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지휘하시면 중국이 평안하고 뒤돌아보시면 사이(四夷)가 습복하니, 위엄과 명망이 아주 대단합니다. 지금 바다를 건너 원정할 경우 작은 오랑캐를 즉시 쳐부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길 경우 위엄과 명망이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킬 경우 안위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이세적(李世勣)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설연타(薛延陀)가 침입해 왔을 적에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토벌하고자 하다가 위징(魏徵)이 간하자 그만두어 지금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폐하의 계책대로 하였더라면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그렇다. 그 일은 참으로 위징이 잘못한 것으로, 짐이 몹시 후회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을 진달하는 것을 막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황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저수량이 상소하기를,
“고구려가 큰 죄를 지었으니 참으로 토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지 두서너 명의 맹장에게 명하여 4,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폐하의 위령(威靈)이 떨치게 하면 고구려를 취하기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더 쉬울 것입니다. 이제 천하의 임금으로서 가벼이 원정길을 떠나는 것이 신으로서는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이때 신하들 가운데 고구려를 정벌하기를 간하는 자가 많았다. 황제가 이르기를,
“아무리 많은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있더라도 겨울철에 씨를 뿌려 싹트게 할 수는 없으나, 들판에 사는 농부나 나이 어린아이라도 봄철에 씨 뿌려 싹트게 할 수 있는 법이니, 이는 제때에 알맞게 해서 그런 것이다. 무릇 하늘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고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공이 있는 법이다. 지금 개소문이 위를 능멸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적당한 시기이다. 의논하는 자들이 분분하게 떠들어 대는 것은 이러한 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상동》
○ 7월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함에 신라가 자주 사신을 보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신묘에 칙령을 내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괄주 자사(括州刺史) 조원해(趙元楷),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王波)에게 명하여 홍주(洪州)ㆍ요주(饒州)ㆍ강주(江州) 등으로 나아가서 군량을 싣고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전선(戰船) 4백 척을 만들어 오게 하였다.
갑오에 조서를 내려 영주 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수좌종위솔(守左宗衛率) 고리행(高履行) 등을 보내어 유주도독부(幽州都督府)와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의 병마 및 거란(契丹)ㆍ해(奚)ㆍ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그 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 경(太常卿) 위정(韋挺)을 하북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징발해 영주(營州)에다가 저장하게 하였으며, 《구당서》에, “황제가 사람을 뽑아 군량을 저장하게 하려 하니, 마주(馬周)가 위정(韋挺)을 천거하였다. 황제가 위정에게 ‘유주 북쪽은 요수(遼水)가 2천 리를 흐르면서 주현들을 아우르고 있어서 군대가 행진할 때 군량을 취해 올 곳이 없다. 경이 이번에 나가서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만 해도 그 공이 작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민부시랑(民部侍郞) 최인사(崔仁師)를 시켜 그를 돕게 하였다. 또 태복 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를 하남도(河南道)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싣고 바다로 오게 하였다.
8월에 소예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고대인성(古大人城)은 서쪽으로는 황현(黃縣)에서 23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까지 4백 70리입니다. 섬 안에 샘물이 많고 산과 섬이 잇닿아 있어서 군량을 저장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다. 이에 하남도로부터 군량을 운반해 왔는데, 육로와 수로로 잇달아 실어와 모두 이곳에다가 저장하였다. 《책부원귀》
○ 9월 을미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사신을 보내어 백금(白金)을 바쳤다. 저수량이 태종에게 아뢰기를,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구이(九夷)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장차 이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을 위해 그들 임금이 욕을 당한 수치를 갚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할 때 역적이 보내는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송독(宋督)이 노(魯)나라 임금에게 고정(郜鼎)을 보내자, 환공(桓公)이 이를 태묘(太廟)에서 받으려고 하였는데, 장애백(臧哀伯 장손달(臧孫達)을 가리킴)이 받지 말라고 간하였습니다. 무릇 《춘추》라는 책은 모든 왕이 법받아야 할 책입니다. 만약 신하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나라에서 보내는 선물을 받는다거나 임금을 시해한 자의 조공을 받으면서 그를 허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를 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고구려의 막리지가 보낸 것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구당서》
○ 고구려의 사신이 또 아뢰기를,
“막리지가 관인(官人) 50명을 보내어 숙위(宿衛)하려 합니다.”
하니,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다 고무(高武)를 섬겼으면서도 절의를 지켜 그를 따라 죽지 못하였고 지금 또다시 시역한 자를 위해 꾀를 내고 있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는 모두 하옥하였다. 황제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몸소 출정하지 말 것을 권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으로 가는 것, 이 세 가지의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인데,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였으므로 온 고구려 사람들이 내가 와서 도와주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바, 의논하는 자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신당서》
○ 10월 계묘에 옹주(雍州)의 부로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황제가 이르기를,
“요동의 몇몇 성은 중국의 옛 땅이며,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리와 같은 야심으로 제 임금을 시해하였다. 짐이 고구려를 보존해 주고 고구려의 백성들을 위로해 주고자 한다. 이에 장차 낙양(洛陽)으로 가 경략(經畧)에 나서서 삼한 지역을 안정시키고 한두 해 뒤에는 돌아올 것이기에, 부로들을 불러서 이별하는 것이다. 출정에 따라가는 아들과 손자들은 짐이 잘 돌보아 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책부원귀》
○ 11월 임신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이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정원숙은 수나라 때 벼슬하여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따라 갔었다.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도록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을 운반하기가 어려우며, 동이(東夷)들은 성을 잘 수비하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오늘날은 수(隋)나라 때와는 비교가 안 되니, 공(公)은 나의 명령대로만 하라.”
하였다. 황제가 말한 것은 국가가 크고 군사가 강성하며, 승리를 취할 계략이 충분함을 믿고 적에게 성대함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장검(張儉) 등이 요수(遼水)가 넘쳐서 오랫동안 건너지 못하고 있자, 황제가 겁을 내어 건너지 않고 있는 것이라 여겨,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장검이 낙양에 이르러서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이한 것과 수초(水草)의 좋고 나쁨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 갑오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을 부총관으로 삼았으며, 염인덕(冉仁德), 유영행(劉英行), 장문간(張文幹), 방효태(龐孝泰), 정명진(程名振)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장량에게 예속시킨 다음 강회(江淮)와 영협(嶺硤)의 강한 군사 4만 명,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모집한 병사 3천 명, 전함(戰艦)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으로 부총관을 삼았으며,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강덕본(姜德本)ㆍ국지성(麴智盛)ㆍ오흑달(吳黑闥)을 모두 행군총관으로 삼아 이세적에게 속하게 한 다음, 보기(步騎) 6만 명 및 난주(蘭州)ㆍ하주(河州) 두 주의 항복한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 두 군(軍)이 합세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경자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지나가는 곳에는 진영(陣營)을 꾸미지 말고 음식도 사치스럽고 풍성하게 하지 말라. 쉽게 건널 수 있는 물에는 다리를 놓지 말고, 행재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현에서는 학생과 노인들을 보내 영알(迎謁)하는 것을 하지 말라. 짐이 지난날 직접 창을 잡고 난을 평정할 적에는 한 달 먹을 양식조차 없었지만 가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지금은 다행히도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다. 이에 단지 군량을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있을까만이 염려되므로, 소와 양을 몰고 가서 군사들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출정에서 짐이 반드시 승리할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역리를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나라로써 어지러운 나라를 치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적을 치는 것이고, 다섯째는 백성들이 반기는 군사로 원망하는 군사를 치는 것이 그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신당서》
○ 12월 신축에 무양공(武陽公) 이대량(李大亮)이 졸하였는데, 죽으면서 표문을 올려 고구려를 정벌하는 군사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 갑인에 조서를 내려서 제군 및 신라ㆍ백제ㆍ해(奚)ㆍ거란에게 길을 나누어 진격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19년 보장왕 4년 2월 경술에 황제가 몸소 제군을 거느리고 낙양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을묘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摠管)으로 삼아 따라오게 하였다. 이달에 이세적의 군사가 유주(幽州)에 도착하였다. 낙양에서 유주까지는 1천 6백 리이다. 3월 정축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낙양에서 정주까지는 1천 2백 리이다. 정해에 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隋氏)가 네 차례 출병을 하였으나 차지하지 못하였다. 짐이 지금 동정(東征)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짐이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남은 힘을 써서 취하려는 것이다. 짐이 낙양을 출발할 때부터 오로지 맨밥만 먹으면서 채소조차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은 번거롭게 할까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황제가 병든 군졸을 보고는 어탑(御榻) 앞으로 불러서 위로하면서 주현(州縣)에 맡겨 치료하게 하니, 사졸들이 모두들 감격해 하면서 기뻐하였다. 임진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는데, 황제가 몸소 활과 화살을 차고 손수 안장 뒤에 우의(雨衣)를 매달았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우복(雨箙)으로 되어 있다. 이세적(李世勣)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영주(營州)의 치소(治所)이다. 출발해 형세를 크게 펼치고 회원진(懷遠鎭)으로 영주에 회원수착성(懷遠守捉城)이 있다.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북쪽으로 용도(甬道)를 따라 군사들을 몰래 나가게 해, 고구려가 생각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나가려 하였다.
4월 초하루 무술에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통정진은 요수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 대업(大業) 8년에 요동을 정벌할 때 설치하였으며, 용도(甬道)는 수나라가 부교(浮橋)를 만들어 요수를 건너면서 쌓은 것이다.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에서는 몹시 놀라서 성읍(城邑)이 모두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채 굳게 지켰다. 임인에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고, 《통감고이》에, “당력(唐曆)에, ‘장검(張儉)이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하왕 도종이 몇백 기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적군의 형세를 살펴보고 오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면서 며칠이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가는 데 10일, 살펴보는 데 10일, 돌아오는 데 10, 합하여 한 달이 지나서는 돌아와 폐하를 알현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군사들을 단속하여 험난한 길을 거쳐 곧바로 요동성의 남쪽으로 나아간 다음 지형의 험이와 진영을 친 곳을 살펴보았다. 돌아올 때 고구려의 군사들이 귀로를 차단하였는데, 도종은 이들을 격파하여 모두 죽이고 장수를 목 벤 다음 돌아와 처음에 약속한 날짜에 맞춰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에 황제가 탄복하면서 「맹분(孟賁)과 하육(何育)의 용맹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하고는 금 50근과 비단 1천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달려드니, 성중이 놀라 동요되어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상동》
○ 계묘에 황제가 군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먹였다. 그런 다음 유주(幽州)의 성 남쪽에 장막을 쳤다. 조서를 내려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서사(誓師)하게 한 뒤,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신당서》
○ 영주 도독(營州都督)인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검(張儉)이 여러 번병(藩兵)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의 전봉(前鋒)이 되었다. 이때에 어떤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사로잡았는데, 막리지(莫離支)가 장차 요동으로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장검에게 조서를 내려 신성(新城) 길에서 맞아 치게 하니, 막리지가 마침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장검이 이 틈을 타서 진격해서 요수를 건너 곧장 건안성(建安城)으로 《자치통감》 주에,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3백 리를 가면 건안성에 이르는데, 한나라 때 평곽현(平郭縣)의 지역이다.” 하였다. 달려들어 가 고구려 군사를 궤멸시키고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임자에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蓋牟城)《자치통감》 주에, “개모성은 요동성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가 그 성을 취하고는 개주(蓋州)로 삼았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요양부로(遼陽府路)에 개주요해절도(蓋州遼海節度)가 있어서 건안(建安)ㆍ양지(陽地)ㆍ웅악(熊岳)ㆍ수암(秀巖) 네 현을 거느렸다.” 하였다. 공격하였다.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강확(姜確)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졸하였다. 계해에 이세적 등이 개모성을 함락하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0만 석의 양곡을 노획하였다. ○ 위정(韋挺)이 면직되었는데, 황제가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전군(前軍)이 개모성을 격파함에 미쳐서 조서를 내려 위정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위정은 개모성이 대군(大軍)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가깝게 접해 있어 밤낮없이 전투를 벌여 북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걱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상 모두 구당서》
○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에 이르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오직 서쪽 문만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에 아장(亞將)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야밤에 습격하였는데, 부총관 왕문도(王文度)가 먼저 성 위에 올라가고 사졸들이 계속해서 진격하니, 성안이 궤산되었다. 5월 기사에 드디어 그 성을 함락하고 남녀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총관(摠管) 구충효(邱忠孝) 등을 나누어 보내어 압록수(鴨綠水)에서 유격 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날 이세적이 진군해서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책부원귀》
○ 경오에 거가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뿌려 다리를 놓으니,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진에 요택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 《자치통감》
○ 황제가 요택을 건너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수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널 적에 시기를 잘못 타서 출정 나온 군사들이 모두 죽어 해골이 들판에 널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통하고 한탄스럽다. 해골을 파묻어 주는 의리가 무엇보다도 급하니, 모두 찾아서 파묻어 주라.”
하였다. 을해에 고구려에서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출동해서 요동성을 구원케 하니,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의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다. 고구려 군사와 마주쳤을 때 군사의 숫자가 너무나 차이 나자, 군사들이 모두 참호를 깊이 파고 험준한 곳에 의지해 있으면서 황제의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서서히 진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종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된다. 적은 먼 길을 급히 달려왔으니, 군사들이 반드시 피곤할 것이며, 숫자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깔볼 것인바, 이때 공격하면 반드시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경엄(耿弇)은 임금에게 적들을 남겨 주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전군(前軍)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마땅히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어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니, 이세적(李世勣)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과의도위(果毅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도종에게 말하기를,
“이 장사(壯士)가 강한 적병을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호걸임을 뽐내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너짐에 군사들이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미 싸움이 전개되었는데,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해 도망쳐서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졸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가 고구려 군진(軍陣)이 어지러운 것을 바라보고는, 장사 수십 명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여 좌우로 넘나들었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퇴각함에 드디어 다리를 빼앗았다. 이때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쳐서 크게 격파하여 1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구당서》
○ 장군예를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정축에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였다. 황제가 몸소 요동성 아래에 내려가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무거운 것을 진 자의 짐을 친히 나누어 말 위에 실어 옮기니, 뭇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앞 다투어 흙덩이를 날랐다. 《신당서》
○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면서 밤낮 12일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포거(抛車)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성 위에다 나무를 쌓아 전루(戰樓)를 만들고 새끼줄로 엮어 날아오는 돌을 막았다. 이세적이 포거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 성을 공격하니, 돌에 맞는 곳마다 모두 무너졌다. 또 충거(衝車)로 누각을 때려 부수니 누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때 백제에서 금휴개(金髹鎧)를 올렸으며, 또 현금(玄金)으로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이를 군사들에게 입혀 따르게 하였다. 황제가 친히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이세적과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갑옷의 광채가 빛나 눈이 부시었고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갑신에 남풍이 세차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충차(衝車) 끝의 장대에 올라가서 서남루(西南樓)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이 성안으로 번지어 붙어 집이 모두 불탔으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성을 오르니 고구려 군사가 방패를 들어 막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긴 창으로 쳐서 이를 떨구었다. 돌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으며, 성이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4만 구(口)를 포로로 잡고, 창고에 있는 곡식 50만 석을 획득하였으며, 그 성을 요주(遼州)로 만들었다. 당초에 황제가 정주(定州)로부터 수십 리마다 봉수(烽燧) 하나씩을 설치하여 요동까지 이어지게 하고는 요동성을 격파하면 봉화를 올리기로 태자와 약속하였는데, 이날 봉화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책부원귀》
○ 을미에 군사를 백애성(白崖城)에 주둔시키고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화살에 맞았는데, 황제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사들이 그 사실을 듣고는 모두들 감격해 하며 흥기하였다. 백애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를 임해 있어 사면이 아주 험하고 가파랐다. 이세적이 충거(衝車)로 때려 부수면서 돌과 화살을 성안으로 비 오듯 퍼부었다. 《신당서》
○ 고구려의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白巖城)을 성원하니, 계필하력(契苾何力)이 8백 기(騎)로 이들을 쳤다. 계필하력이 몸을 날려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허리에 창을 맞았는데, 상련봉어(尙輦奉御) 설만비(薛萬備)가 단기로 달려가서 구원해 고구려 군사가 우글거리는 틈에서 계필하력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더욱 분발하여 창을 꼬나 잡고 나아가서 싸웠는데, 기병을 따라 돌진하여 드디어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수십 리를 추격해서 1천여 급을 목 베었으며, 마침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 6월 정유에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의 서남쪽을 치고 황제가 서북쪽에 임하니, 성주(城主)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심복(心腹)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면서, 성 위에서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노(奴)가 항복하려고 하나 성중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깃발을 사자(使者)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
하였다. 손벌음이 그 깃발을 세우자 성중 사람들이 당병(唐兵)이 벌써 성에 오른 것으로 알고 모두 그의 뜻을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을 함락하고 나자, 백암성이 항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얼마 뒤에 후회하였다. 이에 황제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성을 얻으면 사람과 물건들을 다 전사(戰士)들에게 상으로 주겠다.”
하였다. 이세적이 황제가 장차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사(甲士)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사졸들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앞 다투어 나가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서입니다. 지금 성이 함락되려는 때에 어찌 다시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다. 장군 휘하에 있는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주겠으니,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속(贖)하여 주라.”
하니, 이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성중의 남녀 1만여 구와 군사 2천 4백 명을 획득하였다. 황제가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 음식을 주고 80세 이상된 사람에게는 포백(布帛)을 차등 있게 주었다. 백암성에 와 있던 다른 성의 군사들도 다 위로하고 양곡과 병기 등을 주어 그들 마음대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들에게 죽었는데, 그의 성사(省事)가 성사는 이직(吏職)이다. 장사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달아나 있었다. 황제가 그 의리를 측은히 여겨 포백 5필을 준 다음, 장사를 위하여 영여(靈輿)를 만들어 주어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삼고 손벌음을 자사(刺史)로 삼았다. 계필하력의 상처가 깊어지자, 황제가 몸소 약을 발라 주었으며, 계필하력을 찌른 자인 고돌발(高突勃)을 찾아내어 계필하력에게 보내 직접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아뢰기를,
“그는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찌른 것이니, 바로 충성스럽고 용감한 용사입니다. 그와 신과는 애당초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니, 원수가 아닙니다.”
하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처음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이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이들이 종군하여 자신들의 죄를 씻게 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너희들의 집은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들이 우리 편이 되어 고구려와 싸운다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자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짓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무술에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준 다음 모두 놓아 보냈다. 기해에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삼았다. 정미에 거가가 요동을 출발하여 병진에 안시성(安市城)에 안시성은 한나라의 옛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하였다. 《구당서》 설인귀열전(薛仁貴列傳)에는 안지성(安地城)으로 되어 있다. 도착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였다. 정사에 고구려의 북부 누살(北部耨薩)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북부 누살 고연수, 남부누살 고혜진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와 말갈(靺鞨)의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고연수를 위한 계책에는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을 연하여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한 곳에 웅거한 다음, 성중의 식량을 날라다 먹으면서 말갈의 군사를 풀어 우리의 우마(牛馬)를 약탈하여 갈 경우,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여도 빨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고자 하더라도 진흙 수렁에 막히게 되어, 가만히 앉아서 우리 군사를 곤궁에 빠뜨릴 수 있으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 만약 고연수가 이 상책을 쓰면서 나왔다면 태종이 어떻게 대응했을지 모르겠다. 오로지 강하왕 도종의 계책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중의 군사를 빼내어 그들과 함께 밤중에 도망치는 것이 중책이요, 지모와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하책이다. 경들은 두고 보라.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히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에 나이가 많고 매사에 익숙한 대로(對盧)가 있었는데, 설거정(薛居正)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관직 가운데 높은 자를 대대로(大對盧)라 하는데, 1품직으로 국사를 총괄한다.” 하였다. 그가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베어 없애고, 밖으로 이적(夷狄)들을 굴복시켜 홀로 황제가 되어 우뚝 섰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중국의 모든 군사를 몰아 왔으니, 맞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은 채 오래도록 날짜를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돌아갈 길이 없어서, 곧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 태종이 말한 상책(上策)이다. 그러나 고연수가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전진하여 안시성 40리 지점까지 갔다. 황제는 그들이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에게 명하여 돌궐(突厥)의 군사 1천 기를 거느리고 이들을 유인하도록 하였다. 아사나사이가 싸움이 시작되자 거짓 도주하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서로 상대하기가 쉽다고 하면서 다투어 달려 나와 안시성 동남쪽 8리까지 와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그러자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적군과 마주쳐 싸우려 할 때에는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군영을 돌아다니면서 사졸들의 기색을 살펴보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싸우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묶으면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돌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이길 군대입니다. 오늘의 싸움은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에 장손무기 등과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산천의 형세에 있어 복병하고 출입할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다. 《수당가화(隋唐嘉話)》에,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아뢰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 왕사(王師)에 대항하니,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정예병 5천 명을 빌려 주시어 그들의 본거지를 뒤엎게 하소서. 그러면 수십만 군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응하지 않았다. 황제가 도종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 근저가 되었다. 황제가 고연수에게 사신을 보내어 속여 이르기를,
“내가 그대 나라의 강포한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기 때문에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 나라에 들어왔다가 말먹이가 충분치 못하므로 몇 개의 성(城)을 취한 것이다. 그대 나라가 신하로서의 예를 제대로 갖추기만 한다면 빼앗은 성은 반드시 돌려주겠다.”
하니, 고연수가 그것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태종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여 직접 지휘하였다. 이세적을 파견하여 보기(步騎)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군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우진달(牛進達) 등이 거느린 정병(精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이 되어 산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가 고구려 군의 뒤를 치도록 하였으며, 황제는 친히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숨기고 기치(旗幟)를 뉘고 고구려 군영의 북쪽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고각이 울리면 일제히 내달아 치게 하였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해 항복받을 막사를 조당(朝堂) 곁에 치도록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에 이곳에서 고구려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신당서》에, “이날 밤에 유성(流星)이 고연수의 군영(軍營)에 떨어졌다.” 하였다. 무오에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를 내어 싸우려고 하였다. 태종이 멀리 장손무기의 군영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고각(鼓角)을 일제히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당나라 군사를 치려고 하였으나, 대오가 이미 흐트러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치통감》에, “이때 마침 우레와 벼락이 쳤다.” 하였다. 이때 이세적이 긴 창을 가진 보병 1만 명으로 치니, 고연수의 군사가 드디어 패하였다. 장손무기가 고구려 군사의 뒤편에서 군사를 풀어 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 처음에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군사의 모집에 응하여 종군하였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낭장(郞將) 유군앙(劉君昻)이 고구려 군에 포위되어 매우 위급한 처지였는데, 설인귀가 말을 타고 달려가 구원하면서 앞을 막는 고구려 장수를 참수한 다음,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설인귀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설인귀가 스스로 날래고 용맹한 것을 믿고는 기공(奇功)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복색(服色)을 특이하게 해 흰옷을 입고 창을 잡고 긴 활을 허리에 찬 다음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돌진하니,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흩어지고 쓰러졌다. 이에 대군이 승세를 타고 진군하였다. 대총관(大摠管) 유홍기(劉弘基) 역시 힘껏 싸워 고구려 군을 함몰시키고, 양홍례(楊弘禮)가 마병과 보병 24군(軍)을 거느리고 불시에 나아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꺾어 참획한 것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군이 이로 인해 크게 궤멸되어 1만여 급이 참수되었다. 고연수 등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산을 의지해서 지켰다. 이에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 군을 포위하고,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었다. 황제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서 고구려 군의 진영을 살펴보고는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서 왔으니,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깃발 한 번 흔들어서 패퇴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해 하늘에 감사하였다. ○ 《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주필(駐蹕)한 뒤에 이미 육군(六軍)이 싸움이 붙었는데, 고구려 군사에게 눌려서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태종이 흑기(黑旗) 영공(英公 이세적을 말함)의 깃발을 보게 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가, 흑기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포위가 풀렸다고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돌격하는 함성이 산골짜기를 뒤흔들었으나, 이세적의 군대가 대승하여 수만 명을 참수하였다.” 하였다. ○ 또 《통감고이》에는, “실록(實錄)에 이르기를, ‘이세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폐하께서 친히 치지 않았다면, 신과 도종(道宗)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어도 이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연수 등 10여 만 명이 창을 꼬나들고 일제히 달려 나오고, 성안에 있던 군사들이 이에 다시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신이 앞쪽을 구원하면 뒤쪽이 패하고, 뒤쪽을 구원하면 앞쪽이 패하였는바, 반드시 고연수 등에게 포로가 되어 평양성으로 보내져서 막리지에게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오늘 신은 감히 폐하께서 다시 살려 주시는 은택을 베푸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였다. 황제가 평소에 이세적과 친하게 지내었으므로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세적은 뒤에 혼자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태종이 친히 쳤겠는가. 이것은 사관(史官)이 태종을 아름답게 수식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세적이 아첨한 것이다. 이에 지금은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 기미에 고연수와 고혜진이 그의 무리 15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군문으로 들어오게 하니, 고연수 등이 무릎걸음으로 나와 절하면서 명(命)을 청하였다. 《신당서》에, “황제가 ‘이 뒤로도 감히 천자의 군대와 싸울 것인가?’ 하자, 고연수가 두려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태종이 누살(耨薩) 이하 추장(酋長) 3천 5백 명을 뽑아 융도(戎徒)를 주어 내지(內地)로 옮기고, 말갈(靺鞨)의 군사 3천 3백 명을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자치통감》 주에, “말갈의 군사가 진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평양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마리와 명광갑(明光甲) 1만 벌을 획득했고, 그 밖의 다른 병기(兵器)도 이와 맞먹었다. 고구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랐는데,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은 다 스스로 도망가 수백 리의 사이에 다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신당서》에, “황제가 역서(驛書)로 태자에게 알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이 장수 노릇하는 것이 이러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하였다. 인하여 행차한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구당서》를 살펴보건대, 그 산의 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장작(將作)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陣圖)를 만들게 하고, 중서 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구당서》
○ 7월 신미에 황제가 안시성의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기었다. 기묘에 전사한 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게 하고 군사들이 돌아갈 때 그들에게 주어 함께 돌려보냈다. 무자에 고연수(高延壽)를 홍려 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高惠眞)을 사농 경(司農卿)으로 삼았다. 장량(張亮)의 군사가 건안성(建安城) 아래에 이르러 벽루(壁壘)를 완전히 만들지 못하여 사졸들이 밖으로 나가 나무를 하고 꼴을 베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갑자기 이르자, 군중(軍中)이 놀라 동요하였다. 장량은 본래 겁 많은 사람이라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똑바로 응시하고 말을 못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그것을 보고는 도리어 용맹스럽게 여겼다. 총관 장금수(張金樹) 등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단속해 고구려 군사들을 쳐서 격파하였다.
8월 갑진에 후기(候騎)가 막리지의 첩자(諜者) 고죽리(高竹離)를 잡았는데, 손을 뒤로 묶은 채 군문(軍門)으로 데려 갔다. 그러자 황제가 불러 보고는 결박을 풀어 주면서 묻기를,
“어째서 그렇게 수척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몰래 샛길을 택하여 오느라 며칠 동안 먹지 못하여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먹을 것을 주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그대가 첩자가 되었으니 속히 복명(復命)해야 할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막리지에게 ‘군중의 소식을 알고 싶으면 사람을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보낼 것이지, 어찌하여 샛길로 보내어 고생시키느냐.’고 말하라.”
하였다. 고죽리가 맨발이었는데, 황제가 신을 주어 보냈다.
병오에 안시성의 남쪽으로 군영을 옮기었다. 황제가 요동성 밖에 있으면서 군영을 설치할 때 척후(斥候)만 분명하게 할 뿐 참호와 성루(城壘)를 만들지 아니하였는데, 비록 성에 가까이 다가가도 고구려 군사들이 끝내 감히 나와서 노략하지 못하였다. 군사들을 뽑아 단신으로 나가 노숙하게 하기를 중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연타(薛延陀)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황제가 그에게 이르기를,
“너의 가한(可汗)에게 가서 ‘우리 부자(父子)가 지금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 있으니, 네가 능히 침략할 수 있을 것인바, 속히 중국으로 나와 치라.’고 말하라.”
하였다. 그러자 진주가한(眞珠可汗)이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으며, 또 군사를 내어 돕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군사가 주필산에서 패함에 미쳐서, 막리지가 말갈을 시켜 진주가한을 달래면서 후리(厚利)로 꾀었는데, 진주가한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 9월에 황제가 백암성(白巖城) 싸움에 이기자,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들이 강하며, 그 성주(城主)는 재주와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는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서 그대로 맡겼다.’ 한다.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다고 한다. 만약 불시에 나아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니,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의 뱃속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 이른바 ‘성 가운데는 치지 않아도 되는 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다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치다가 적이 우리의 군량 보급로를 끊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나아가 건안성을 취할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공을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일을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는 문득 성에 올라가 북을 울리며 욕을 하니, 황제가 노하였다. 그러자 이세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 성중의 남녀를 다 묻어 버리도록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더욱 굳게 지켜,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기를,
“저희들이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성의를 다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야만 저희들도 처자와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자식을 아끼고 염려하여 스스로 싸우고 있으니, 쉽사리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10만이 넘는 군사로써 폐하의 깃발을 바라만 보고도 무너졌으니, 고구려 사람들의 간담(肝膽)이 서늘할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누살(耨薩)은 늙어서 굳게 지키지 못하니, 군사를 옮기어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가의 작은 성(城)들은 반드시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 달아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곳의 군량과 물자를 취하여 북을 울리며 전진한다면 평양성도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뭇 신하들이 또 아뢰기를,
“장량(張亮)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사성은 바로 비사성(卑沙城)이다. 그를 부르면 이틀 안에 올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이 두려워하는 틈을 타 힘을 합쳐 오골성(烏骨城)을 함락하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서 곧바로 평양성을 취하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르려 하였다. 그런데 유독 장손무기(長孫無忌)만은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정(親征)하시는 것은 제장(諸將)들이 공격하는 것과는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의 오랑캐가 오히려 10만이 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다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거침없이 몰아 나가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황제가 중지하였다. 제장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중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성이 포위된 지 오래되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날로 줄어들어야 할텐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다. 이것은 필시 그것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을 틈타서 우리를 엄습하려는 것이니, 병비(兵備)를 엄하게 해야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이 줄을 타고 성을 내려왔다. 황제가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쳐 고구려 군사 수십 명을 참수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퇴주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안시성 동남쪽에 토성(土城)을 쌓으니, 고구려에서도 또한 성의 담장을 높게 증축하여 높이가 같게 하였다. 사졸을 교대로 나누어 교전하였는데, 하루에 6, 7번씩이나 싸웠다. 이세적이 안시성의 서쪽을 공격하면서 포거(抛車)로 돌을 쏘고 충차(衝車)로 성을 부수게 하여 누첩(樓堞)을 파괴하면 성중에서는 무너지는 즉시 목책(木柵)을 세워 무너진 곳을 보완하였다. 도종이 나뭇가지와 흙을 담은 부대로 토둔(土屯)을 만들어 산과 같이 쌓고는 그 가운데에다 다섯 갈래의 길을 만든 다음 그 위에다가 나무를 얽어 놓고 흙을 입혔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고 60일 동안 쌓으면서 50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높아 성중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이 높은 곳에서 무너져 내려 성을 누르자, 성이 무너졌다. 그때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 군사 1백 인이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였다. 그러고는 참호를 파 길을 끊은 다음 빙 둘러서 불을 놓고 막아 굳게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진중에 조리돌린 다음, 제장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와 죄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그대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개모성(蓋牟城)과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한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용서한다.”
하였다. 《책부원귀》
○ 황제가, 요동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군마가 오래 머무르기가 어렵고 또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므로, 계미에 군사를 돌리라고 칙명을 내렸다. 먼저 요주(遼州)와 개주(蓋州) 두 주의 호구(戶口)를 뽑아서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 이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가니, 성중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안시성의 성주(城主)가 성 위에 올라가 배사(拜辭)하니, 황제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이 되게 하였다. 《자치통감》
○ 기왕부참군(紀王府參軍) 교보명(喬寶明)이 행재소(行在所)로 나오자, 태종이 이르기를,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평양성은 아직 멀리 있다. 내가 삼군(三軍)이 얼어 죽을까 염려되어 이미 회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금 경이 멀리까지 나왔는데, 무슨 계책을 진달하려고 왔는가?”
하니, 교보명이 아뢰기를,
“신은 명을 받들고 평양성으로 가서 고구려를 회유하고자 합니다. 고구려는 폐하께서 출정하신 뒤로 간담이 서늘해져 있을 것이니, 신이 가서 달래면 반드시 두 손을 묶고서 스스로 올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불손한 마음을 품는다면 신은 흉노의 임금을 죽인 부개자(傅介子)처럼 개소문의 머리를 자른 다음 고구려에 항복하겠습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 을유에 요동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요동성에는 아직도 군량이 10만 석이나 있었는데 군사들이 다 가져올 수가 없었다. 병술에 요수를 건너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렀는데, 진흙탕이 80리나 되어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장손무기와 양사도(楊師道) 등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수레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게 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달고 역사(役事)를 도왔다.
10월 초하루 병신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주둔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발착수(渤錯水)와 포구(蒲溝)는 모두 요택(遼澤) 가운데 있다.” 하였다. 황제가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하였다. 제군(諸軍)이 건널 때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쳐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길에다가 횃불을 피우고 군사들이 건너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 출정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玄菟)ㆍ횡산(橫山)ㆍ개모(蓋牟)ㆍ마미(磨米)ㆍ요동(遼東)ㆍ백암(白巖)ㆍ비사(卑沙)ㆍ맥곡(麥谷)ㆍ은산(銀山)ㆍ후황(後黃) 등 10성(城)을 함락하고, 10만 호(戶)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통감고이》에, “실록에, 상이 이르기를,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세 주(州)의 호구로서 내지로 들어온 것이 전후로 7만 명이었다.’ 하였다. 계축에 내린 조서에는, ‘10만 호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중국으로 옮기지 않은 자까지 아울러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성(新城)ㆍ주필(駐蹕)ㆍ건안(建安) 세 곳의 큰 싸움에서 전후로 참수한 것이 4만여 급이었고, 대장 2명, 비장(裨將)ㆍ관인(官人)ㆍ추수(酋帥)ㆍ자제(子弟) 3천 5백 명, 군사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과 소 각 5만 마리, 관곡(館穀) 10순(旬)을 노획하였다. 처음에 출정할 때에는 군사 10만 명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옴에 미쳐서는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고 전마도 십중팔구는 죽었다. 수군은 7만 명 가운데 수백 명이 죽었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병오에 영주(營州)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 싸움에서 죽은 군사의 시신을 모아 유성(柳城)에서 장사 지내고, 태뢰(太牢)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황제가 임하여 곡을 하니,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병진에 황제가 말을 타고 임유관(臨渝關)으로 들어갔다. 황태자가 길옆에서 맞이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태자와 이별할 적에 갈포(褐袍)를 입고 임어하여 이르기를, “너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바꾸어 입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두 철이 지나도록 바꾸어 입지 않아 옷에 구멍이 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바꾸어 입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사졸들이 모두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새옷을 입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바꾸어 입었다. 요동에서 사로잡은 고구려 백성 1만 4천 구(口)를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는데, 먼저 이들을 유주(幽州)에 모아 놓고 장차 장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려 하였다. 황제가 그들 부자와 부부가 떨어져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유사(有司)에 명하여 포백(布帛)으로 그들의 몸값을 치르어 주고 용서하여 백성이 되게 하니, 늘어서서 절하면서 즐거워 외치는 소리가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에 근심하다 죽었고 고혜진만 장안(長安)으로 왔다. 《신당서》
○ 11월 신미에 거가가 유주에 이르니, 고구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맞이하였다. 절하고 환호하다가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흙먼지가 이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다. 《자치통감》
사신(史臣)은 논한다. 북쪽 오랑캐가 중국과 가까이 있으면서 변경을 침범해 오는 일은 종종 있었으며, 동쪽 오랑캐가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불손한 짓을 하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이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성에서 타고난 것으로, 태평산(太平山)에 사는 사람은 순하고 공동산(空同山)에 사는 사람은 드세다는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태종이 친히 요동을 정벌하였는데, 손실된 것이 역시 많았다. 태종이 개선하던 날에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짐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번 출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군사를 출동한 것을 후회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오랑캐의 나라는 돌밭과 같다. 그것을 얻더라도 이익될 것이 없으며, 잃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헛된 이름을 구하기에 힘써서 유용한 것을 수고롭힐 필요가 없는 법이다. 다만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하고, 교화를 입혀서 복종하게 하며, 믿음직한 신하를 택해서 어루만져 주고, 변경의 방비를 튼튼히 해 침입을 막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 조공을 바치게 하면, 오랑캐에 대처하는 방도를 제대로 한 것이다. 《구당서》
정관(貞觀) 연간에 천하가 다스려지고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여 천자의 위덕(威德)이 몹시 성대하였다. 태종은 군사를 조련하고 공명을 숭상하여 그 뜻이 몹시 날카로웠다. 이러한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뜻을 가지고 천하에 임하면, 환난을 미리 예방하고 태평스런 왕업을 보존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먼 오랑캐 땅에 사는 신하 하나가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주변의 국가를 침입하자, 조서를 내려 침략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오랑캐가 듣지 않았다. 오랑캐가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중국의 일에야 관계되겠는가. 한두 장수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으로 가 토벌하여 구원하려는 형세만 보여, 그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고 감싸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품게 하면 족히 천자의 능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친히 정벌할 계획을 한단 말인가. 충신과 현인들이 다투어 간쟁하면서 충고하였으나, 이세적(李世勣)의 한마디 말에 뜻을 굳혀 바꾸지 않았다. 이에 드디어 수만 명이나 되는 중국의 군사를 동원해 먼 외국 땅으로 내몰았으니, 이는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것으로, 잔인한 마음인 듯하다. 더구나 존귀한 천자의 몸으로 멀리 있는 오랑캐와 승부를 다투었으니, 이는 또한 자신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비록 요동의 몇 성을 평정하고 고연수(高延壽)의 대군을 격파하기는 하였으나, 어찌 천자의 위덕을 보이는 데 보탬이 되겠는가. 만약 고연수가 대로(對盧)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대개 태종이 스스로 영웅으로 자부하여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이다. 이세적은 그런 태종의 뜻에 영합해 일을 만들어 내어 드디어 잘못된 계책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당초에 요동의 정벌을 의논할 때 저수량(褚遂良)이 간언을 올려 그 일을 중지시키자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세적이 “설연타(薛延陀)가 변경을 침입해 왔을 적에 성상께서 본래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위징의 간언으로 말미암아 시기를 놓쳤습니다.”는 말을 하면서 태종을 충동질하여, 드디어 친정할 의논이 정해졌다. 고연수의 군대를 격파함에 미쳐서는 태종이 말에서 내려 하늘에 사례하였으니, 태종의 위태로운 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출정 도중에 전사한 군사들에 대해 훈작(勛爵)을 더해 주고 분향소를 세웠으니, 중국의 군사가 먼 오랑캐 땅에서 많이 죽었음을 알 수가 있다. 천자는 중한 종묘와 사직을 맡고 있어 천하 백성들의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중국에 관계되지도 않는 일로 인해 위태로운 일을 벌이고 인명을 가볍게 여겼으니, 천자의 위덕을 손상시킨 것이 아닌가. 이세적은 위징이 설연타를 추격하는 일에 대해 간언을 올린 것을 뒤늦게 허물하면서, 그것을 실책이라고 하였는데, 설연타가 변경을 침범하였을 적에는 태종이 장수에게 명해서 설연타의 군사를 대파시켰다. 그러니 중국의 위엄을 보임에 있어서는 추격하지 않더라도 역시 실책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는 본디 중국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친정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이세적은 황제의 뜻에 영합해 사단을 만들어 내었으니, 그 죄를 면할 길이 없다. 방현령(房玄齡)과 교보명(喬寶明)은 죽음을 무릅쓰고 표문을 올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라고 간절하게 간언하였으니, 어질다. 《당사논단(唐史論斷)》
○ 20년에 보장왕 5년 황제가 이정(李靖)에게 묻기를,
“내가 천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가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정이 아뢰기를,
“그에 대해서는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
하자, 황제가 도종을 돌아보고 물었다. 강하왕 도종이 주필(駐蹕)에 있을 때에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을 공격하자던 말로 갖추어 진술하니, 황제가 서글픈 목소리로 이르기를,
“당시에는 몹시 급해서 내가 살피지 못했다.”
하였다. 이 출정에서 빈틈을 타 평양성을 취하자는 계책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세를 타고 오골성(烏骨城)을 취하자는 계책도 쓰지 않았다. 무술에 요주도독부(遼州都督府)와 암주도독부(巖州都督府)를 고구려를 정벌하여 얻은 두 주이다. 혁파하였다. 《자치통감》
○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 5월 갑인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그러자 태종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말하기를, ‘어여쁜 계집은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그대가 바친 바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이 본국에 부모 형제들을 남겨 두고 떠나온 것이 불쌍하다. 그들을 여기에 남게 해 부모를 잊게 하고, 여색을 아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수가 없다.’고 하라.”
하고는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구당서》
○ 황제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로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신당서》에, “처음에 군사들이 돌아올 때 황제가 활과 옷을 연개소문에게 하사하였는데, 연개소문이 그것을 받고도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기는 해도 그 말이 모두 궤탄(詭誕)하였다. 그리고 또 당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도 거만할 뿐더러,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10월 임신에 조칙을 내려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하고, 다시 고구려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자치통감》
○ 21년 보장왕 6년 2월에 황제가 장차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올리기를,
“고구려는 산을 의지해 성을 쌓아 공격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에 폐하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적에 고구려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못한 데다 함락시킨 성의 곡식을 모두 가지고 왔으며, 계속해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대부분 식량이 부족합니다. 지금 자주 소규모의 군대를 내보내 번갈아 가면서 고구려의 변경을 소요시켜 고구려로 하여금 이에 대항하느라 피곤하게 하며, 쟁기를 놓고 보루 속으로 들어가 몇 년 동안을 사방에서 농사짓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이반되어 압록강의 북쪽을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3월에 조서를 내려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군사 1만여 명을 징발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로부터 신성(新城) 길을 경유해 들어가게 하였다. 두 군에 모두 수전(水戰)에 익숙한 자를 뽑아 배치하였다.
○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등 몇 성을 거치는 동안 고구려에서는 대부분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다. 이세적이 이들을 쳐서 격파하고 그 성곽을 불지르고서 돌아왔다. ○ 7월에 우진달ㆍ이해안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 무릇 1백여 차례를 싸워 모두 이기고, 석성(石城)을 쳐서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와 싸웠으나, 이해안이 쳐서 격파했으며 2천여 급(級)을 베었다. ○ 8월 무술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해 강남(江南) 12주의 공인(工人)을 징발해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2월 을해에 고구려 왕이 둘째 아들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인하여 사죄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책부원귀》
○ 22년 보장왕 7년 정월 병오에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裴行方)으로 부총관을 삼은 다음,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당서》
○ 4월 갑자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新感)이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부장(部將) 고신감(古神感)으로 되어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보기(步騎)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살펴보건대, 역산이 《신당서》에는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복병을 설치하여 또 그들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6월 병자에 설만철이 갑사(甲士) 3만 명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에서 1백여 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에서 40리 되는 곳에 머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두려워서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박작성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설만철이 배행방(裴行方)을 파견하여 보병을 거느리고 별도의 군대가 되어 계속 전진하게 하고 설만철과 제군(諸軍)이 그 뒤를 따라 치니,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1백여 리를 추격하여 진중에서 소부손을 참수한 다음, 진격하여 박작성을 포위하였다. 박작성은 산세를 따라 성을 쌓고 압록수로 가로막혀 튼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에서 장수 고문(高文)을 파견해 오골성(烏骨城)과 안지성(安地城)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여서는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자,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대적하였는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구당서》
○ 황제가 장손무기와 함께 계책을 세우면서 이르기를,
“고구려가 우리 군사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호구가 줄고 수확이 없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은 성을 쌓아 늘리기만 하여 백성들이 굶주려 구렁텅이에 나뒹구는 등 너무도 피폐해졌다. 내년에 3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고 공이 대총관(大摠管)이 된다면,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검남(劒南)에 조서를 내려 배를 만들게 하였다. 《자치통감》에, “7월에 우령좌우부장사(右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보내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배는 길이가 1백 척이고, 폭은 그 반이었다.” 하였다. 촉(蜀) 땅 사람들이 재물을 강남으로 실어 보내기를 원하였으므로, 값을 헤아려서 배를 만들었다. 배 한 척당 비단 1천 2백 필을 거두니, 파촉(巴蜀) 지방이 크게 소란하여 공주(邛州)ㆍ미주(眉州)ㆍ아주(雅州) 세 주의 만족(蠻族)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농서(隴西)와 섬내(陜內)의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정벌해 평정하였다. 일찍이 황제가 이미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는 섬주 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와 내주 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조서를 내려서 삼산포(三山浦)와 오호도(五胡島)에 군량과 병기를 저장하게 하는 한편, 월주 도독(越州都督)에게 큰 배와 우방(偶舫)을 만들어 대기하게 하였다. 《신당서》
○ 9월 계미에 설만철 등이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돌아왔다. 《자치통감》
○ 23년 보장왕 8년 5월 기사에 태종이 붕(崩)하였다. 유조(遺詔)로 요동 정벌하는 일을 파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藏)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위로하였다. 《신당서》
○ 고종(高宗) 영휘(永徽) 4년 보장왕 12년 장군(將軍) 신문릉(辛文陵)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를 위무(慰撫)하였다. 행군하여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 고구려 군사가 이들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위대가(韋待價)가 중랑장(中郞將)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조서를 받들고 동쪽 변경을 경략(經畧)하고 있었는데, 이를 인해 부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 신문릉이 악전고투하자, 고구려 군사들이 점차 후퇴하여 보전할 수가 있었으며, 위대가는 중상을 입었다. 《구당서》
○ 5년 보장왕 13년 10월에 고구려 왕이 장수 안고(安固)를 파견하여 말갈의 군사와 함께 거란을 공격하니,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방어하였다. 신성(新城)에서 싸울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구려 측에서 쏜 화살이 모두 되돌아 가므로, 거란이 이 틈을 타 공격하여 고구려를 크게 패배시켰다. 거란이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웠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죽으니, 시체를 한곳에 쌓아 놓고 무덤을 만들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승리를 고하자, 고종이 조정에 이를 포고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6년 보장왕 14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사신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2월 을축에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군사를 징발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5월 임오에 정명진 등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귀단수(貴端水)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정명진이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취하였으니, 《구당서》 정명진열전에 나오는 귀단수는 마땅히 신성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 건너와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분투하여 크게 격파하고, 수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 외곽(外廓)과 촌락(村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현경(顯慶) 3년 보장왕 17년 6월 임자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쳐서 함락시키고, 4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수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가 대장 두방루(豆方婁)를 파견하여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정명진이 거란의 군사로써 역습하여 크게 깨뜨리고, 2천 5백 급을 참수하였다. 《상동》 ○ 《통감고이》에는, “《구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에 이르기를, ‘현경 2년에 유인궤에게 정명진을 딸려서 요동을 경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를 귀단성(貴端城)에서 격파하고 3천 급을 참수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하였다.
○ 5년 보장왕 19년 12월 임오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 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신당서》
○ 용삭(龍朔) 원년 보장왕 20년 정월 을묘에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의 67 주 군사를 모집해서 4만 4천여 명을 얻은 다음, 평양(平壤)과 누방(鏤方)의 행영(行營)으로 나아갔다. 무오에 홍려 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은 다음 회흘(回紇) 등 여러 부(部)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했다. 《자치통감》
○ 4월 경진에 조서를 내려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사업(蘇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고,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현경(顯慶) 5년 12월에 정명진이 포주 자사(蒲州刺史)로서 이미 누방도 총관이 되었다. 이제 《신당서》를 따른다.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 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번호(蕃胡) 35군(軍)을 거느리고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해서 먼저 고구려의 빈틈을 살피게 하고, 황제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였다. 그러자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오랑캐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신단 말입니까?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못할 것입니다. 이는 군비(軍費)로 천하를 피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마침 또 무후(武后)가 반대하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8월 갑술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7월 갑술로 되어 있다. 소정방과 고구려가 패강(浿江)에서 싸워 고구려를 격파해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신당서》
○ 소정방이 양건방(梁建方)ㆍ계필하력(契苾何力)과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橫山)에서 싸웠다. 설인귀(薛仁貴)가 필마로 돌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들을 쏘아대자, 쏘는 곳마다 모두 쓰러졌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어 성 아래에서 수십 명을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단기로 달려가 곧장 돌진하자, 활과 화살을 모두 잃어버린 채 손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생포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 설인귀열전을 보면, 이 일이 현경 4년의 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경 4년에는 계필하력이 고구려를 정벌한 사실이 없다. 이에 이해에다 넣어 기술하였다. 9월에 계필하력이 압록수(鴨綠水)로 나아갔는데,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요새지이다. 막리지(莫離支)가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보내어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계필하력이 이곳에 이르자 마침 얼음이 합해졌으므로, 즉시 군사들을 건너게 한 다음 북을 울리면서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이에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 급을 참수하니, 나머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연남생은 겨우 살아 도망쳤다. 《구당서》
○ 2년 보장왕 21년 2월 갑술에 패강도 대총관 임아상(任雅相)이 군중에서 죽었다. 무인에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가 고구려와 더불어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서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신당서》에, “방효태가 영남(嶺南)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수(蛇水)에 진주하였다가 개소문의 공격을 받아 전 부대가 몰살했다.” 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눈이 많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 12월 무신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와 백제를 토벌하려다가 하북(河北)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렸다는 이유로 정지하였으며, 태산(泰山)을 봉하는 것과 동도(東都)에 행차하는 것도 아울러 정지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건봉(乾封) 원년 보장왕 25년 정월에 고구려 왕 고장이 아들 고남복(高男福)을 보내어 천자가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하는 데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용삭(龍朔) 2년 8월에 고남복이 와서 천자가 봉선하는 데 따라갔다.
○ 5월에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으니, 큰아들 연남생(淵男生)이 그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연남생이 처음에 국정을 맡고 있다가 여러 성을 순무(巡撫)하러 나가면서, 그의 아우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에게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연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니 먼저 계책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두 아우가 처음에는 믿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연남생에게 고해바치기를,
“두 아우는 형이 돌아오면 그 권한을 빼앗을까 두려워서 형에게 항거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한다.”
하니, 연남생이 몰래 친한 사람을 평양에 보내 그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두 아우는 그를 체포하고 이어 왕명(王命)으로 연남생을 부르니, 연남생은 두려워서 감히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마침내 연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고는 군사를 내어 연남생을 공격하니, 연남생은 보별성(保別城)으로 달아났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되어 있다. 그러고는 그의 아들 연헌성(淵獻城)을 시켜 당나라의 대궐에 나아가 구원해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 역시 땅을 떼어 바치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 6월 임인에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 연남생을 구하게 하고 《자치통감》에, “연헌성을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아 향도(嚮導)하게 하였다.” 하였다.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龐同善)과 영주 도독(營州都督) 고간(高侃)을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와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이근행(李謹行)을 후속 부대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9월에 계필하력이 요동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5만 명이 요수(遼水)에 주둔하고, 또 말갈(靺鞨)의 군사 수만 명이 와 남소성(南蘇城)에 주둔하였는데, 계필하력이 온 힘을 다해 쳐서 모두 크게 격파하였다. 1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7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마침 방동선도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연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방동선과 합군(合軍)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연남생을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에 제수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을 봉하였다. ○ 12월 기유에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학처준(郝處俊)을 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또 계필하력과 방동선을 모두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전대로 두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에게 압록도(鴨綠道)를 경유하고, 곽대봉(郭待封)에게 적리도(積利道)를 경유하고, 유인원(劉仁願)에게 비렬도(卑列道)를 경유하고, 김대문(金待問)에게 해곡도(海谷道)를 경유하게 한 다음 이들 모두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두의적(竇義積)을 운량사(運粮使)로 삼았다. 그런 다음 이들을 모두 이세적에게 붙여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으며, 연(燕)과 조(趙) 지방에 있는 곡식을 운반해 요동으로 모으게 하였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2년 보장왕 26년 정월에 이세적이 각도(各道)의 군을 이끌고 신성(新城)으로 진격하였다. 《신당서》
○ 9월 신미에 이세적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계필하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세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고서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해처(要害處)여서 먼저 이곳을 얻지 못하면 나머지의 성들은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 드디어 이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성안에 있던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城主)를 포박하여 문을 열고 항복하니,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서 16개 성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때 방동선(龐同善)과 고간(高侃)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밤중에 군사를 보내 이들 진영을 엄습하였다. 그러자 설인귀(薛仁貴)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진군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와 싸웠는데, 전세가 불리하였다. 고구려가 승세를 타서 고간을 추격하였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고 5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남소(南蘇)ㆍ목저(木底)ㆍ창암(蒼巖) 등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의 군사와 합하였다. 《자치통감》
○ 고종이 직접 칙서를 지어 이세적을 위로하기를,
“금산(金山)에서의 큰 싸움에서 흉당들이 아주 많았었다. 그런데도 경은 사졸들의 앞장을 서서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좌충우돌하여 향하는 곳마다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이에 사졸들이 용기를 얻어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니 앞으로 공적을 잘 세워서 아름다운 이름을 보전하라.”
하였다. 《구당서》
○ 곽대봉(郭待封)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다른 길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세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기를 대 주게 하였는데, 풍사본이 파선(破船)을 당하여 기일 안에 대 주지 못하였다. 이에 곽대봉은 군사들이 주리고 군색하자, 글을 지어 이세적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편지를 빼앗겨 그 허실(虛實)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세적에게 보냈다. 글을 받아 본 이세적은 성내어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한창 급박한 때에 어찌 시를 지어 보내는가. 내가 꼭 참수하고 말겠다.”
하였다. 그러자 행군관기통사(行軍管記通事) 사인(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이해 주니, 이세적이 이에 다시 군량과 병기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원만경이 지은 격고려문(檄高麗文)에, “압록의 험지(險地)를 지킬 줄 모르는구나.” 하였는데, 연남건이 “삼가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회보(回報)하고는, 곧바로 군사를 옮겨 압록진(鴨綠津)을 점거하니, 당나라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 보냈다. 학처준(郝處俊)이 고구려의 성 아래에 있었는데, 진을 치기 전에 고구려 군사들이 엄습하자,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그런데 학처준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마른 양식을 다 먹은 다음에 몰래 정병(精兵)을 뽑아서 이를 격파하니, 병사들이 그의 담략에 모두 감복하였다. 《자치통감》
○ 총장(總章) 원년 보장왕 27년 정월 임자에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 겸 안무대사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았다. 《신당서》
○ 2월 임오에 설인귀가 고구려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나서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다는 이유로 말리니, 설인귀가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선봉이 되어 달려 나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와서 막았으나 이를 맞받아쳐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1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이 모두 풍문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한꺼번에 항복을 청하였다. 설인귀가 곧바로 바다를 아우르고 땅을 경략하여 이세적의 군대와 평양에서 만났다. 《구당서》
○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에 가서 일을 살펴보고 돌아오자, 황제가 군중(軍中)의 일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옛날에 선제(先帝)께서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때 이기지 못한 것은 그들 내부에 틈이 없어서입니다. 속담에, ‘군(軍)은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中道)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서로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되었으므로 고구려의 실정과 거짓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가 우리의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사졸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祕記)에, ‘9백 년이 못 되어 80의 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세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고구려는 지금 연이어 굶주려서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오고, 두더지가 성문에 구멍을 내어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연남건이 군사 5만으로 부여성을 공격하자, 이세적이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설하수(薛賀水)로 되어 있다.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머리 5천 급을 베고 3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병기와 우마 역시 그만큼을 빼앗았다. 그런 다음 진격해서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켰다. 《신당서》
○ 4월 병진에 혜성이 오거성(五車星)에 나타나자, 허경종(許敬宗)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으니 고구려가 곧 망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 8월 신미에 비열도총관(卑列道摠管)인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유인원(劉仁願)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은 데 좌죄(坐罪)되어 요주(姚州)로 귀양 갔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이세적이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고 나서 계필하력과 설인귀 등이 모두 이세적과 더불어 압록수(鴨綠水)에 모였다. 고구려가 항거하여 오자, 이세적 등이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모든 성이 도피하여 잇달아 항복하였다. 계필하력이 번호(蕃胡)와 중국군 50만 명을 이끌고 먼저 평양성에 이르니, 이세적의 군사가 뒤이어 와 평양성을 7개월 동안이나 포위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한 달 남짓으로 되어 있다.
9월 계사에 고구려 왕 고장이 연남산(淵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1백 명을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98명으로 되어 있다. 거느리고 흰기를 들고 와서 항복하고, 또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이세적이 예로서 대접하였다. 그런데도 연남건은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고구려의 대장인 중[浮屠] 신성(信誠)이 몰래 첩자(諜者)를 보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어 놓았다. 이에 이세적이 군사를 풀어 들어가게 하고, 성 위에 올라가 북 치고 소리 지르면서 성문과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났다. 연남건이 다급하여 스스로 자신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 왕 고장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먼저 소릉(昭陵)에 고구려의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를 울리면서 돌아오게 하였다.
12월 정사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 앉아서 이세적 등을 인견하고 뜨락에서 포로들을 받았다. 고장(高藏)에 대해서는 평소에 협박을 당하여 스스로 정사(政事)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면(赦免)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으며, 연남산(淵南産)은 먼저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사재 소경(司宰少卿)을 제수하였다.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 보내고, 백제 왕(百濟王) 부여융(扶餘隆)은 영외(嶺外)로 유배 보냈다. 연헌성(淵獻城)을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신성(信誠)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淵南生)은 중국 군사를 향도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을 봉하였으며, 특진(特進) 등은 예전대로 주었다. 이세적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게 하고, 계필하력은 행 좌위대장군(行左衛大將軍)으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본래 나라 전체가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이 1백 76개에, 호구가 69만 7천 호였다. 이에 그 지역을 9개 도독부(都督府), 42개 주(州), 《자치통감》 주에, “신성주(新城州)ㆍ요성주(遼城州)ㆍ가물주(哥勿州)ㆍ위락주(衛樂州)ㆍ사리주(舍利州)ㆍ거원주(居袁州)ㆍ월소주(越素州)ㆍ거조주(去朝州)ㆍ건안주(建安州) 등 9개 도독부가 있으며, 42개 주 가운데 지(志)에 있는 것은 남소(南蘇)ㆍ개모(蓋牟)ㆍ대나(代那)ㆍ창암(倉巖)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목저(木底)ㆍ안시(安市)ㆍ제북(諸北)ㆍ식리(識利)ㆍ불열(拂涅)ㆍ배한(拜漢) 등 14개 주뿐이다.” 하였다. 1백 개의 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통괄하였으며, 고구려의 장수 가운데 공이 있는 우두머리를 택해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을 제수해 중국 관리와 함께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를 파견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가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머물러 다스리게 하였다. 그 뒤에 설인귀에게 겸검교안동도호(兼檢校安東都護)를 제수해 신성(新城)으로 옮겨 가서 다스리면서 고아와 늙은이를 돌보아 주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재주에 따라 등용하며, 충효(忠孝)와 절의(節義)가 있는 자를 모두 정표(旌表)하게 하니,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다 기뻐하여 감화되었다. 이해에 교제(郊祭)를 지내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표한 것이다. 《신당서 및 구당서》
○ 2년 4월에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이반(離反)하는 자가 많자, 칙명을 내려 고구려의 민호 3만 8천 2백 호를 강남(江南)ㆍ회남(淮南) 및 산남(山南)ㆍ경서(京西) 등 여러 주의 비어 있던 땅으로 옮기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은 그대로 두어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자치통감》
○ 함형(咸亨) 원년(670) 4월에 고구려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다.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고장(高藏)의 외손인 안순(安舜)을 왕으로 삼았다. 조서를 내려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고간(高侃)을 동주도 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 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그리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 도망치고 남은 고구려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났다. 《신당서》
○ 2년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7월 초하루 을미로 되어 있다. 동주도 총관 고간(高侃)이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어떤 고구려의 중이 중외에 재이가 있을 것이라고 떠들어 대니, 주벌하소서.” 하고 상주(上奏)하니, 황제가 학처준(郝處俊)에게 이르기를,
“하늘에서 재이를 내리는 것은 임금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그 재이가 사실이라면 말한 자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서 스스로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순 임금이 비방(誹謗)하는 말을 기록하도록 나무를 세운 것이 참으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천하의 입을 막으려고 한들 되겠는가. 이는 죄를 줄 것이 없으니, 특별히 용서하게 하라.”
하였다. 《책부원귀》
○ 3년 12월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천산(泉山)으로 되어 있다. 격파하였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구원하였는데, 고간이 격파했다.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신라의 구원병 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다.
○ 4년 윤5월에 연산도총관 우령군대장군(燕山道摠管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반란군을 발로하(發盧河)에서 격파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발로하가 호렴하(瓠簾河)로 되어 있다. 다시 싸워서 1만여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해 갔는바, 4년 만에 평정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이근행이 아내인 유씨(劉氏)를 벌노성(伐奴城)에 머물려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지켰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의봉(儀鳳) 원년(676) 2월 갑술에 안동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성(故城)으로 옮겼다. 《통감고이》에 이르기를, “실록(實錄)에, ‘함형(咸亨) 원년에 양방(楊昉)과 고간(高侃)이 안순(安舜)을 토벌하여 비로소 안동도호부를 함락하고 평양성에서 요동주로 옮겼다. 의봉 원년 2월 갑술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고 한 말은 결과를 두고 말한 것이고, 의봉 원년에 고구려의 유민이 반란하였다고 한 말은 안동도호부를 옮기게 된 원인을 말한 것이다. 또 《당회요(唐會要)》에는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는 사실이 없고 의봉 원년에 요동 고성(故城)으로 옮겼다고 하였기에, 이제 그를 따른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도 “함형 원년에 고간이 도호부의 소재지를 요동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에 앞서서 동관(東官)으로 있던 당나라 사람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자치통감》
○ 2년에 고장(高藏) 에게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2월 정사에 공부 상서(工部尙書) 고장에게’라고 되어 있다. 개부의동삼사 요동군도독(開府儀同三司遼東郡都督)을 제수하고 조선 왕(朝鮮王)을 봉한 다음, 안동(安東)에 거주하면서 본번(本蕃)을 진압하고 군주 노릇을 하면서 유민들을 안집시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들을 모두 용서하여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자치통감》 주에, “지난해 봄에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으로 옮겼다가, 지금 또다시 신성으로 옮긴 것이다.”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여 모반하였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그를 도로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유배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흩어서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옮겼으며, 가난하고 허약한 자들은 안동성 주위에 머물려 두었다. 《구당서 및 신당서》
○ 영순(永淳) 초에 고장이 졸하였다. 위위 경(尉衛卿)에 추증하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으며, 주위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고구려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고 유민들은 돌궐이나 말갈로 흩어져 도망갔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이 모두 끊어졌다. 《신당서》
○ 무후(武后) 수공(垂拱) 2년(686)에 고장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구당서》
○ 성력(聖曆) 원년(698)에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하였다. 그러고는 그에게 안동을 맡겨 고구려의 옛 백성들을 통섭하려 하였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동》
○ 2년 말에 고장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다. 그 뒤로 조금씩 나라의 모양이 이루어졌다. 《신당서》
○ 헌종(憲宗) 원화(元和) 13년(818) 4월에 고구려국에서 악공(樂工)을 보내왔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이는 바로 고덕무의 후손이다.
고구려는 삼국(三國) 시대 이래로 역사에 나타난 나라이다. 구려(句麗)가 그 국호(國號)이고, 고(高)가 그 성씨(姓氏)이다. 그런데 수나라가 구(句) 자를 빼어 버렸기 때문에 당나라 이래로 단지 고려(高麗)라고만 칭하였다. 《오대사기(五代史記)》에 “후당(後唐) 동광(同光 장종(莊宗)의 연호임) 원년(923)에 한신(韓申)이 왔는데, 그 왕의 성이 여전히 고씨였다.” 하였으니, 삼국 시대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한 성으로만 전해져 온 것이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임)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권지국사 왕건(權知國事王建)’이라 칭하였으니, 왕씨가 고씨를 대신한 것은 동광과 장흥 사이에 있을 것인데, 역사에서는 실전(失傳)되었다. 《석림연어(石林燕語)》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망한 것은 당나라 현경 원년이다. 역사에서 영순(永淳)이나 수공(垂拱) 이후에 고씨 성을 가진 군장(君長)이 이미 끊어졌다고 칭하였으니, 다시 중국에 통하지 못한 것이다. 왕씨(王氏)가 일어난 것은 후량(後梁)의 정명(貞明) 4년(918)이었으며, 한신(韓申) 역시 왕씨의 사신이었다. 섭소온(葉少蘊)은 구려의 성이 고씨라는 것만 믿고 왕씨가 이미 흥한 것은 상고하지 않은 채 왕의 성씨가 여전히 고씨라고 하였으니, 틀린 것이다.


[주D-001]상주국(上柱國) : 공이 큰 공신에게 주는 최고의 칭호이다. 주국(柱國)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우리나라 왕에게 관직을 제수할 때 이 칭호를 붙였다.
[주D-002]천존상(天尊像) : 도교(道敎)의 신상(神像)이다. 도교에서는 천신(天神)을 천존(天尊)이라 한다.
[주D-003]도사(道士) : 도교의 승려를 말한다. 원래 도사라는 칭호는 전한(前漢) 시대 이전에는 없었으나 후한의 장릉(張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개창하자, 후대 사람들이 비로소 그 무리를 도사라고 칭하였다. 방사(方士)라고도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9쪽》
[주D-004]힐리가한(頡利可汗) :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셋째 아들로, 이름이 아사나돌필(阿史那咄苾)이다. 당 고조 때 군사가 강한 것을 믿고 중국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정관(貞觀) 연간에 이정(李靖)에게 토벌당했으며, 보철산(保鐵山)으로 도망쳐 있다가 장보상(張寶相)에게 체포당하여 경사(京師)로 잡혀 와 있다가 죽었다. 그의 시신은 돌궐의 풍속에 따라 패수(㶚水) 가에서 불태웠다.《舊唐書 卷194上》
[주D-005]대대로(大對盧)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의 하나이다. 초기의 대로(對盧)가 뒤에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 등으로 되었다.
[주D-006]연개소문(淵蓋蘇文) : 이병도는, “개소문에 대하여는 《신당서》 고려열전(高麗列傳)에 ‘개소문이란 자가 있는데, 혹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천씨(泉氏)이고,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라 한 한 구절이 있는데, 이에 의거하면 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요,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 및 10년 조에 보이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당서》의 ‘소문의 동생 정토’와 같은 사람임을 보면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던 것이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함이 통설(通說)이다. 《삼국유사》 보장봉노조(寶臧奉老條)에 적힌 ‘스스로 성은 개(蓋)이고 이름은 금(金)이라고 칭하였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바로 시중의 직책이다.’라 하여 소문을 관직명이라 한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21쪽 주》 이하 본 번역에서는 모두 연개소문(淵蓋蘇文)으로 표기하였다.
[주D-007]고장(高臧) :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臧王)의 이름이다. 보장왕은 나라를 잃은 탓에 시호(諡號)가 없으며, 보장은 그의 또다른 이름이다.《三國史記 卷21 高句麗本紀 第9 寶臧王上》
[주D-008]막리지(莫離支)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다. 막리지의 호칭은 수ㆍ당 이전부터 있어 오던 것인데, 최초로 막리지가 되어 군권(軍權)과 정권(政權)을 한꺼번에 잡은 사람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막리지는 기무(機務)ㆍ조명(詔命)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한 손에 쥐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어원(語源)은 확실하지가 않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1쪽》
[주D-009]진씨(晉氏)의 난리 :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를 찬탈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주D-010]설연타(薛延陀) : 종족의 이름으로 흉노의 별종이다. 처음에는 설부(薛部)와 연타부(延陀部)로 나뉘어져 있다가 설부가 연타부를 합병하고는 설연타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연말산(燕末山)에 웅거해 있다가 이남(夷男)이 부족장이 되어 돌궐에 귀부하였으며, 그 뒤 돌궐을 배반하고 자립(自立)하였다. 당 태종 때 진주비가가한(眞珠毘伽可汗)으로 책립(册立)되었으며, 정관(貞觀) 말에 몽고의 울독군산(鬱督軍山) 즉 지금의 항애산(杭愛山) 부근에 웅거해 있으면서 여러 부족을 통솔하였다. 진주비가가한이 죽은 뒤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당나라에서 이세적(李世勣)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주D-011]해(奚) : 4세기경부터 몽고 동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 거란족(契丹族)과 인접해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한 부족으로, 처음에는 고막해(庫莫奚)라고 불렸다. 뒤에 흉노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12]고정(郜鼎) : 고정은 고나라에서 만든 솥이다. 춘추 시대 때 송나라의 태재(太宰) 독(督)이 상공(殤公)을 죽이고 정(鄭)나라에서 풍(豐)을 맞아다가 옹립하였는데,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이를 규탄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노(魯)나라 환공(桓公)에게 고정을 뇌물로 주었다. 이로부터 고정은 비리(非理)로 받는 뇌물을 뜻하게 되었다.
[주D-013]개모성(蓋牟城) : 지금의 무순(撫順) 서쪽에 있는 탑산산성이다.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의 중간 지점인 십리아반(十里阿畔)이라는 설과 대련(大連)의 북쪽인 개평(蓋平)이라는 설도 있다.
[주D-014]개주(蓋州)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에 있었던 주의 이름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이었으나 당나라에서 빼앗아 개주를 두었다. 뒤에는 발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원나라 때에는 개주로(蓋州路)가 되었고, 명나라 때에는 개주위(蓋州衛)를 설치하였으며, 청나라 때에는 개평현(蓋平縣)을 설치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2쪽》
[주D-015]국내성(國內城) : 고구려 전기(前期)의 수도로, 만포진(滿浦鎭) 대안(對岸)의 집안현성(輯安縣城)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 이곳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3쪽》
[주D-016]이세적(李世勣) : 원문에는 ‘李勣’으로 되어 있는데, 이적의 본명은 이세적(李世勣)으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휘를 피하여 이적(李勣)으로 표기한 것이다. 본 번역에서는 모두 이세적으로 표기하였다.
[주D-017]백애성(白崖城) : 《신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동북쪽에 있는 연주성(燕州城)이다. 당나라에서 이곳을 빼앗은 다음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다.
[주D-018]손벌음(孫伐音) : 《통감》과 《삼국사기》에는 손대음(孫代音)으로 되어 있다.
[주D-019]북부 누살(北部耨薩) : 누살은 욕살(褥薩)을 말한다. 욕살은 군(郡) 규모의 여러 성을 통괄하는 커다란 행정 구역인 대성(大城)의 장관이다.
[주D-020]대로(對盧) : 고구려 왕실 직속의 최고 벼슬로 패자(沛者)와 같이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총리(總理)하는 수상격이며, 후대에는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관직까지 생겼다. 대로는 왕이 직접 임명하는 벼슬이 아니라 여러 부족 가운데 우세한 부족에서 선출하였던 것으로, 타부족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21]진왕(秦王) :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처음 봉군(封君)되었을 때의 칭호이다.
[주D-022]주필산(駐蹕山) :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일명 수산(首山)이라고도 한다.
[주D-023]진주가한(眞珠可汗) : 설연타(薛延陀)의 부족장인 이남(夷男)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칭호이다.
[주D-024]안시성의 성주(城主) : 성주의 이름은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야사(野史)에는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이라 전한다.《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권6 경연일기(經筵日記) 기유년 4월 26일 조에, “상이 이르기를,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누구인가?’ 하니,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양만춘(梁萬春)입니다. 그는 당나라 태종의 군대를 막았으니, 참으로 성을 잘 수비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였으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 28일 을해 조에, “세상에 전하기를,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히자, 황제가 성 아래에서 군사들을 시위하게 하면서 비단 1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킨 데 대해 상 주었다.’고 한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35쪽 주》
[주D-025]부개자(傅介子) : 한나라 소제(昭帝) 때의 무신(武臣)으로, 대완국(大宛國)에 사신으로 가서 조령(朝令)으로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을 책하여 모두 복종시켰다. 뒤에 누란국과 구자국이 배반하자, 누란국으로 가서 왕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주D-026]박작성(泊灼城) : 지금의 안평(安平) 하구(河口)에 있으니, 단동현(丹東縣) 동쪽의 구련성(九連城)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27]거란의 …… 방어하였다 : 거란은 수나라 개황(開皇) 말기에 부족이 점차 불어나자, 목축을 하기 위해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요서(遼西) 2백 리 되는 곳에 이르러 회흘(回紇)에 의지하여 살았다. 당 태종 정관(貞觀) 22년(648)에 추장인 굴가(窟哥)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하자, 당 태종이 거란부(契丹部)를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만들고 굴가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송막과 요락(樂樂) 지방을 통치하게 하였으며,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성(新城)에서 고구려와 싸운 것이다.《東史綱目 第4下》
[주D-028]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9]회흘(回紇) : 종족의 이름으로, 외올아(畏兀兒)ㆍ회골(回鶻)이라고도 한다. 본디 흉노족의 후예로, 돌궐족에 복속되었었다. 위(魏)나라 때에는 고거(高車)ㆍ원흘(袁紇)ㆍ오호(烏護)라 칭해졌고, 수나라 때에는 위흘(韋紇)이라 칭하다가 당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회흘이라 칭하였으며,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여 회골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내몽고와 외몽고의 지역에 거주하다가 내란으로 인해 서쪽으로 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외올아(畏兀兒)라 칭하였으며, 천산(天山) 남로(南路)의 지역에 거주하였다.
[주D-030]고남복(高男福) : 《삼국사기》에는 복남(福男)으로 되어 있다.
[주D-031]금산(金山) : 《성경지(盛京誌)》에는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백 27리 지점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곳이라고 하였다.
[주D-032]연남생의 …… 합하였다 : 이병도는, “연남생은 이때 당나라 군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말한 연남생의 군사는 그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할 때 본래의 근거지인 국내성(國內城)에 머물러 있게 하였던 군대인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3쪽 주》
[주D-033]이합시(離合詩) : 시를 지으면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자획(字劃)을 떼어서 지은 것으로, 그것을 합하여 보아야만 원뜻을 알 수가 있다. 곽대봉(郭待封)이 지은 이합시는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주D-034]고구려의 성 : 《삼국사기》에는 학처준이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주D-035]소릉(昭陵) : 당나라 태종(太宗)의 능으로, 섬서성(陜西省) 예천현(醴川縣) 동북쪽에 있다.
[주D-036]부여융(扶餘隆) :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백제가 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다. 665년에 당 고종(唐高宗)의 명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당나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는 부여융이 의자왕의 태자라고 되어 있는데, 의자왕의 태자는 부여효(扶餘孝)이다.
[주D-037]그 뒤에 …… 다스리면서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설인귀는 다음 해에 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도호부를 옮긴 것은 검모잠(劒牟岑) 등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평양 부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5쪽 주》
[주D-038]고구려의 …… 겸모잠(鉗牟岑) :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으며, 관직도 대형(大兄)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東史綱目 第4下》
[주D-039]고장(高藏)의 …… 안순(安舜)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왕의 외손인 안순(安舜)’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안승(安勝)’이라 하였으며, 《동사강목》 제4에는 ‘왕의 아들 안승(安勝)’으로 되어 있다. 이병도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함형(咸亨) 원년 4월 조의 기사에서는 ‘왕의 외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당서》나 《자치통감》의 기사와 일치한다. 한편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 6월 조의 기사에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이 안승을 고려국왕에 봉할 때의 책명(册命)에 ‘高句麗嗣子安勝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자(庶子)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5~346쪽》
[주D-040]발로하(發盧河) : 《삼국사기》에는 호로하(瓠瀘河)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 제4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다.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주D-041]동관(東官) : 고구려와 백제의 지역을 통치하는 도독부의 관원을 말한다.
[주D-042]섭소온(葉少蘊) : 섭몽득(葉夢得)을 말한다. 소온(少蘊)은 그의 자(字)이다. 송나라 오현(吳縣) 사람으로, 《석림연어(石林燕語)》를 저술하였다.

 

 

 

신라(新羅)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의 혁거세(赫居世)가 진한(辰韓) 6부(部)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즉위하여 비로소 서라벌(徐羅伐)이라 칭하였고, 남해왕(南解王) 때 계림(鷄林)으로 고쳤으며, 기림왕(基林王) 때 신라로 고쳤다. 동진 원제(東晉元帝) 3년(320)이다. 그 사이에 혹 사로(斯盧)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신라라고 칭하기도 하다가 지증왕(智證王) 4년에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2년(503)이다. 비로소 신라로 정하였다. 대개 방언(方言)에 신(新)을 ‘새로[斯盧]’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고 하므로, ‘새로 창건하여 세운 나라’란 뜻에서 취해 와 신라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서라(徐羅)ㆍ사라(斯羅)ㆍ신라(新羅)는 모두 사로(斯盧)에서 전이된 것인데, 사로란 것은 바로 《위지(魏志)》에서 말한 진한사로국(辰韓斯盧國)이 바로 그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동진 이전에는 단지 사로(斯盧)란 칭호만이 있었는데, 사로는 바로 진한의 속국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이 사로의 사실에 대해서 진한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즉 위진(魏晉)의 역사서에 실려 있는 진한에 관한 내용은 위 경초(景初) 연간에 오림(吳林)이 진한 8국을 낙랑에 주었고, 진 태강(太康) 연간에 진한왕이 해마다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삼한 세기(三韓世紀)에 자세히 보인다. 모두가 신라의 실적(實跡)인 것으로, 징험할 수가 있고 믿을 수 있음이 우리나라의 소위 고기(古記)라 하는 여러 책들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매번 신라와 진한을 분명하게 구분 지워 전후로 세대를 바꾼 두 개의 나라로 여기고 있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진한은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점차 나뉘어져서 12개의 나라로 되었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살펴보건대, 《위지(魏志)》를 보면, 진한의 12개 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고, 《북사(北史)》를 보면, 신라를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는 5백 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그 땅은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와 백제와 접하고 있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하였고, 또 “한나라 때 낙랑(樂浪)의 지역에 있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말이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였고, 살펴보건대, 이는 사로(斯盧)를 잘못 쓴 것인 듯하다. 송나라 때에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후위(後魏) 때에는 사라(斯羅)라 하였다. 그 나라는 아주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지 못한다. 그 나라의 풍속에 도성을 ‘건모라(健牟羅)’라 하고 읍을 도성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도성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말로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륵이 있다. 문자(文字)가 없으며, 말을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만 통할 수 있다. 《양서(梁書)》 ○ 《수서(隋書)》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자, 고구려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고구려 왕이 옛 땅으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나라 사람 가운데는 중국인ㆍ고구려인ㆍ백제인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ㆍ불내(不耐)ㆍ예(穢)ㆍ한(韓)의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신라 왕은 본디 백제 사람으로, 바다를 통해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선대 때에는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있다가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화함으로 인해 드디어 강국이 되었으며,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였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하였다.
○ 한 선제(漢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혁거세 원년 소벌공(蘇伐公)이란 자가 나림(蘿林)에서 큰 알[卵]을 얻었는데, 어린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자라남에 성스러운 덕이 있자, 6촌(村)에서 기이하게 여겨 이를 세워 서간(西干)으로 방언으로, 군(君)을 뜻한다. 삼았다. 이때에 알영씨(閼英氏)는 또한 신룡(神龍)이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낳은 계집아이인데, 그 역시 성스러운 덕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성인[二聖]’이라 불렀다. 고구려ㆍ백제와 더불어서 정립하여 삼한의 왕이 되었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살펴보건대, 이는 제갈원성(諸葛元聲)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년 내물왕(奈勿王) 22년 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진(前秦)에 조공을 바쳤다. 《자치통감》
○ 진왕(秦王) 부견(苻堅) 건원(建元) 18년에 내물왕 27년 신라 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衞頭)를 보내어 미녀(美女)를 바쳤는데, 머리털의 길이가 1장(丈) 남짓 되었다. 부견이 사신에게 묻기를,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사신이 답하기를,
“중국도 시대가 바뀌면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서(秦書)》
○ 후위 선무제(後魏宣武帝) 경명(景明) 3년에 지증왕(智證王) 3년 사라국(斯羅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후위서》
○ 양 무제 보통(普通) 2년에 법흥왕 8년 이름이 진(秦)인 신라 왕 모(募)가 비로소 백제의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양서》 ○ 뒤에 가라(加羅)임나(任那) 등의 나라를 습격하여 멸하였다. 《통전》 ○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법흥왕 때 가라의 여러 나라를 멸하였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보인다.
○ 북제 무성제(北齊武成帝) 하청(河淸) 4년 진흥왕 26년 2월 갑인에 조서를 내려 신라 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공 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公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제서》
○ 신라의 풍속에 귀인(貴人)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뽑아 분단장을 시켜 꾸미고 이들을 ‘화랑(花郞)’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앞 다투어서 이들을 섬겼다. 《대중유사(大中遺事)》 ○ 살펴보건대,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흥왕 37년(576)에 화랑(花郞)을 두었다. 당초에 군신(君臣)이 사람의 덕을 알아볼 길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아 놓고 함께 놀게 한 다음 그들의 행실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에 얼굴이 잘 생긴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키고는 화랑(花郞)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혹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기게 하니, 세월이 오래 흐름에 사정(邪正)이 저절로 드러났다. 이에 그 가운데서 바른 자를 택하여 등용하였다.” 하였다.
○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14년에 진평왕 16년 신라국왕 김진평(金眞平)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高祖)가 김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에 제수하였다.
○ 대업(大業 수나라 양제(煬帝)의 연호임) 이래로 신라에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신라 땅은 산이 많고 길이 험한 탓에, 비록 백제와 서로 사이가 나빴으나 백제에서 어쩌지를 못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신라는 김씨(金氏) 성으로 서로 전하여 30여 대를 내려왔는데, 지금도 성이 김씨이다. 《수동번풍속기(隋東蕃風俗記)》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는 박(朴)ㆍ석(昔)ㆍ김(金)이 서로 이어서 왕위를 전하였다. 신라는 위진(魏晉) 이후로 비로소 중국과 통하였으며, 육조(六朝)를 거쳐서 수당(隋唐)에 이를 때까지 대대로 중국을 신하로서 섬겨 중국으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았으며, 사신이 잇달아 오가고 조공을 빠지지 않고 바쳤다. 그런데도 박씨와 석씨 두 성은 당초에 중국 측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김씨가 30여 대를 서로 전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라는 시조 때부터 수나라 양제 대업 원년(605)인 진평왕 때까지 6백 62년으로, 총 25대이다. 《통지》에는, “그 왕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역시 성이 김씨였다.” 하였고, 《양사(梁史)》에는, 신라 왕의 성이 모씨(慕氏)라고 하면서, 중간에 성씨가 변경된 사유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정초(鄭樵)가 《통지》를 지으면서 이연수(李延壽)가 《남사(南史)》를 지으면서 잘못 쓴 것을 그대로 따라 쓰고, 마단림(馬端臨)이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지으면서도 그대로 따라 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양서》에 “보통(普通) 2년(521)에 이름이 진(秦)인 신라 왕 모(募)가 백제의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지, 어찌 일찍이 ‘성씨가 모(募)’라고 하였는가. 모(募)가 《통지》에는 ‘모(慕)’로 되어 있고, 진(秦)이 또 ‘태(泰)’로 되어 있다.
○ 당 고조 무덕(武德) 4년에 진평왕 43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친히 위로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보내어 사신으로 가게 하고, 새서(璽書)와 그림 병풍 및 금채(錦綵) 3백 단을 하사하였다. 이 이후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는 동쪽과 남쪽이 모두 바다로 막혀 있고, 서쪽은 백제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구려와 접하였다. 동서 간은 1천 리이고, 남북 간은 2천 리이다. 《구당서》 ○ 신라의 관제(官制)는, 왕의 친속으로 상관(上官)을 삼는다. 그 종족은 제1골(骨)ㆍ제2골이라 이름하여 분별한다. 형제의 딸이나 고모, 이모, 종자매(從姊妹)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여도 된다. 왕족은 제1골이 되는데, 아내 역시 그 종족 가운데서 취하며,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또 제2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으며, 비록 맞아온다 하더라도 항상 잉첩(媵妾)으로 삼는다. 《신당서》
○ 고조가 이미 해동의 세 나라가 오래 전부터 원한을 맺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모두 번국(藩國)이니,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 사신에게 원한을 맺게 된 사연을 물으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지난날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적에 신라에 가서 도와주기를 청하였는데, 신라가 도리어 군사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해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원한을 맺어 번번이 서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신라가 백제 왕을 잡아 죽였습니다. 원한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구당서》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진흥왕 15년(554)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군주(軍主) 김무(金武)가 백제 왕을 쳐 죽였다.
○ 7년에 진평왕 46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김진평을 주국(柱國)으로 삼고, 낙랑군왕 신라왕(樂浪郡王新羅王)에 봉하였다. 《상동》
○ 태종(太宗) 정관(貞觀) 5년에 진평왕 53년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여자 악공(樂工) 2명을 바쳤는데, 둘 다 머리가 새까만 미인이었다. 그러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들으니, 노래와 미색을 즐기는 것은 덕을 좋아하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천이 가로막혀 멀리 있으니,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얼마 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흰색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제나라로 돌려보내 주기를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겠는가. 그들이 멀리 고국을 떠나왔으니, 반드시 부모 친척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니 사신이 가는 편에 그들을 붙여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상동》
○ 6년에 진평왕 54년 진평왕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진평왕이 정관 5년에 훙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아들이 없어서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고 종실(宗室)인 대신 김을제(金乙祭)가 국정을 총괄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김진평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비단 2백 단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상동》
○ 9년에 선덕주(善德主) 4년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선덕을 주국(柱國)에 책명(册命)하고 낙랑군왕 신라왕(樂浪郡王新羅王)에 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세습하게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선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구당서》 및 《신당서》
○ 17년 선덕주 12년 9월 경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면서 침입해 수십 성을 잃었습니다. 두 나라가 연합한 것은 그 뜻이 신의 사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데 있기에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에 귀명(歸命)하니, 얼마간의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고구려기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에 태종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어 고구려에 새서(璽書)를 내리기를,
“신라는 나에게 귀순한 나라로서 조공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고 있다. 그러니 너와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할 경우에는 내년에 군사를 출동시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하였다. 이때 태종은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하여 신라에 조서를 보내어 군사와 말을 모집해 중국 군사에 응접하라고 하였다. 《책부원귀》에, “정관 18년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신라 왕 김선덕이 그 나라의 성읍을 다 동원하고 국고를 모두 긁어모은 다음, 우리의 크나큰 은택을 받아 여러 대에 걸쳐 맺힌 원수를 갚고자 한다. 그러니 낙랑(樂浪)으로 나아가 고구려의 한가운데를 치고, 옥저(沃沮)로 달려가서 고구려의 소굴을 소탕하라.’ 하였다.” 하였다. 그러자 신라에서 대신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으로 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구당서》
○ 21년에 선덕주 16년 선덕이 졸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직과 봉작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인하여 그의 여동생 진덕(眞德)을 왕으로 삼고는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 《상동》
○ 22년 진덕주(眞德主) 태화(太和) 2년 9월 기축에 신라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13성을 격파당하였다고 상주하였다. 《자치통감》 ○ 12월 계미에 신라국에서 재상인 이찬(伊贊)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황제가 광록 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교외에 나아가 노고를 위로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김춘추가 도착하자, 김춘추를 특진(特進)으로 삼고, 김문왕을 좌무위 장군(左武衞將軍)으로 삼았다. 김춘추가 이어 장복(章服) 제도를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니, 안에서 진복(珍服)을 꺼내 김춘추 등에게 하사하고, 부(府)로 하여금 김춘추의 종자(從者)들에게도 주게 하였다. 《책부원귀》 ○ 김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는 것과 강론(講論)하는 것을 보여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이 이에 자신이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및 새로 찬한 《진서(晉書)》를 하사하였다. 김춘추가 본국으로 귀국할 때에는 3품관 이상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게 하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구당서》
○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에 진덕왕 4년 진덕이 백제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는 그의 동생 김법민(金法敏)을 파견하여 《신당서》에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보고하였다. 진덕이 이때 오언(五言)으로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비단에 짜서 올렸다. 태평송은 예문지에 나온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김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상동》
○ 5년 진덕왕 8년 윤4월 임진에 진덕이 졸하였다. 황제가 거애(擧哀)하고, 조서를 내려서 김춘추로 하여금 뒤를 이어 즉위하게 해 신라 왕(新羅王)으로 삼은 다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 《상동》
○ 6년에 무열왕(武烈王) 2년 백제가 고구려ㆍ말갈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구당서》
○ 현경(顯慶) 5년 무열왕 7년 3월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衞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웅진도 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총 10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이어 김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평하게 하니, 백제 왕 부여의자(扶餘義慈)를 포로로 잡아 궐하(闕下)에 바쳤다. 이 뒤로 신라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지역을 소유하여 그 경계가 점차 넓어져서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상동》
○ 용삭(龍朔) 원년 무열왕 8년 9월 초하루 계사에 김춘추가 졸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太府卿) 김법민(金法敏)에게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으로 삼았다. 《상동》
○ 3년 문무왕 3년 4월 을미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 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삼고, 김법민에게 계림주 도독(鷄林州都督)을 제수하였다. 《상동》
○ 상원(上元) 원년 문무왕 14년 정월 임오에 좌서자 동중서문하 삼품관(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官)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위위 경(尉衞卿) 이필(李弼)과 우영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해 신라를 토벌하였다. 이때에 신라 왕 김법민이 고구려의 반역한 무리를 거두어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사람을 시켜서 지켰으므로, 제(帝)가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서 김법민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김법민의 동생인 우효위 원외대장군 임해군공(右驍衞員外大將軍臨海郡公) 김인문(金仁問)이 마침 경사(京師)에 와 있었는데,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 2년 문무왕 16년 2월에 유인궤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호로하(瓠蘆河)를 건너가 신라 북방의 큰 진(鎭)인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고, 또 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 남쪽 국경으로 가서 많은 백성들을 참획하였다. 유인궤가 군사를 거느리고 되돌아왔다. 《구당서》 ○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둔병해 있으면서 경략(經畧)하게 하였는데, 신라와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이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또 사죄하니, 상이 용서해 주고, 김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이 중도에서 중국으로 되돌아오자, 다시 임해군공(臨海郡公)을 봉하였다. 《자치통감》 ○ 그러나 신라는 백제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쪽 국경까지 점령하여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ㆍ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 등 9개 주를 설치한 다음, 주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개 혹은 20개의 군을 통솔하게 하고, 군에는 태수(太守)를 두고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신당서》
○ 개요(開耀) 원년에 문무왕 21년 김법민이 졸하였다. 그의 아들 김정명(金政明)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구당서》
○ 무후(武后) 수공(垂拱) 2년에 신문왕 6년 김정명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조회하였다. 인하여 표문을 올려 당나라의 예전(禮典)과 기타 사장(詞章)의 책을 내려 주기를 주청하니, 측천무후가 유사(有司)를 시켜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의 글 가운데서 규계(規戒)에 관계되는 글을 가려 뽑아 이를 50권으로 만들게 하여 하사하였다. 《상동》
○ 천수(天授) 3년에 신문왕 12년 김정명이 졸하였다. 측천무후가 거애(擧哀)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弔祭)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김이홍(金理洪)을 책봉하여 신라 왕으로 삼았다. 이어 김이홍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輔國大將軍行豹韜衞大將軍鷄林州都督)을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자치통감》에는, “장수(長壽 측천무후의 연호임) 2년(693) 2월 병자에 신라 왕 김정명이 졸하였다.” 하였다.
○ 장안(長安) 2년에 효소왕(孝昭王) 11년 김이홍이 졸하니, 측천무후가 거애하고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거두었으며, 《자치통감》에, “장안 3년(703) 윤 4월에 신라 왕 김이홍이 졸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신문왕은 재위한 지 11년 만인 장안 2년 임인에 훙하였으니, 《자치통감》이 틀린 것이다. 사신을 보내어 그의 동생인 김흥광(金興光)을 세워 신라 왕으로 삼고, 이어 그 형의 관작인 장군과 도독을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구당서》에는 또 “김흥광의 본명이 태종(太宗)과 같았으므로 선천(先天) 연간에 측천무후가 고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동사를 보면, 성덕왕(聖德王)의 본명은 김융기(金隆基)이며, 《자치통감》에는 김숭기(金崇基)로 되어 있다. 대개 당 현종(玄宗)의 휘(諱)를 피하여 김흥광(金興光)으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선천(先天)은 현종 원년(712)인 바, 측천무후가 고쳤다고 하는 것은 더욱 크게 잘못된 것이다.
○ 현종(玄宗) 개원(開元) 2년 성덕왕(聖德王) 13년 2월 임인에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와서 조회하니, 머물면서 숙위(宿衞)하게 하고, 집과 비단을 하사하여 특별히 대우하였다. 《책부원귀》
○ 11년에 성덕왕 22년 신라에서 자주 들어와 조회하면서 과하마(果下馬)ㆍ조하주(朝霞紬)ㆍ어아주(魚牙紬)ㆍ해표피(海豹皮)를 바쳤으며, 또 두 여자를 바쳤다. 이에 황제가 이르기를,
“이 여인들은 모두 다 왕의 누이동생으로, 낯선 풍속에 부모와 이별해 있으니, 짐이 차마 이들을 여기에 있게 하지 못하겠다.”
하고는 많은 물품을 주어 되돌려 보냈다. 신라에서 또 자제(子弟)들을 파견하여 태학(太學)에 입학해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황제가 간간이 김흥광에게 서문금(瑞文錦), 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紫繡紋袍) 및 금은으로 만든 그릇 등을 하사하였고, 김흥광 역시 특이한 개와 말, 황금, 미체(美髢) 등 여러 가지 물품을 올렸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에는 개원 연간이라고 하였는데, 《책부원귀》에는 개원 11년의 일로 되어 있으므로, 그에 따라 기록한다.
○ 21년에 성덕왕 32년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이때 김흥광의 족인(族人)인 김사란(金思蘭)이 앞서 조회하는 일로 인하여 경사(京師)에 와 있으면서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그를 귀국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어 김흥광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더 제수하였다. 《구당서》
○ 24년 성덕왕 35년 6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으며,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패강(浿江) 이남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 25년 성덕왕 36년 2월 무진에 김흥광이 졸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증직하고, 이어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에게 홍려 경(鴻臚卿)을 섭직(攝職)시켜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고, 아울러 그의 아들인 김승경(金承慶)을 세워 아버지의 작위인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을 승습하게 하였다. 형숙이 출발하려 할 적에 황제가 시(詩)와 서(序)를 지어 주었으며, 태자 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부(賦)와 시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황제가 형숙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자못 글을 알고 있어서 중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경이 학술을 알아 강론을 잘 하므로 사신으로 뽑아 보내는 것이니, 신라에 가서 경전(經典)을 천양하여 신라로 하여금 중국의 유교(儒敎)가 성대하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또 신라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인하여 바둑을 잘 두는 솔부병조(率府兵曹) 양계응(楊季鷹)을 형숙의 부사로 삼아 보냈다. 형숙 등이 신라에 이르러서 신라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으며, 신라에서 바둑을 잘 두는 자들이 모두 양계응보다 하수였다. 이에 형숙 등에게 신라에서 금보(金寶)와 약물(藥物) 등 많은 선물을 주었다. 《구당서》
○ 28년 효성왕(孝成王) 4년 3월 계묘에 신라 왕 김승경의 아내 김씨를 책봉하여 신라 왕비로 삼았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왕의 아내 박씨를 책봉하여 비(妃)로 삼았다고 하였다.
○ 천보(天寶) 원년에 경덕왕(景德王) 2년 김승경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효성왕이 천보 원년 임오에 훙하였다. 조서를 내려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사신으로 보내어 신라로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고, 김승경의 아우인 김헌영(金憲英)을 책립하여 신라 왕으로 삼고, 아울러 그 형의 관작을 승습하게 하였다. 《구당서》
황제가 촉(蜀) 지방에 있었는데,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성도(成都)에 와서 정조례(正朝禮)에 참가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경덕왕 15년(756) 병신에 사신을 보내어 촉에서 조회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천보 15년이다.
○ 대종(代宗) 대력(大曆) 2년에 혜공왕(惠恭王) 3년 김헌영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경덕왕이 대종 영태(永泰) 원년(765)에 훙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김헌영의 아들인 김건운(金乾運)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신당서》에는, 김건운이 즉위하였으나, 아직 어렸다고 하였다. 이어 대신 김은거(金隱居)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조공을 바치면서 책명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구당서》
○ 3년 혜공왕 4년 정월 갑자에 황제가 창부낭중 겸 어사중승 사자금어대(倉部郞中兼御史中丞賜紫金魚袋) 귀숭경(歸崇敬)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서(册書)를 가지고 가 조제(弔祭)하고 책봉하게 하였다. 김건운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삼고, 이어 김건운의 어머니를 책봉하여 태비(太妃)로 삼았다. 《상동》 ○ 《신당서》에는, “아울러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하였다. ○ 이때 신라의 재상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가, 3년 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해에 조공을 바친 것이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혜공왕 16년(780)에 김지정(金志貞)이 난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였는데, 김양상(金良相)이 김지정을 죽이고 이어 왕을 시해한 다음 왕이 되었다.
○ 덕종(德宗) 건중(建中) 4년에 선덕왕(宣德王) 4년 김건운(金乾運)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혜공왕이 건중 원년(780)에 피살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상상(上相)으로 있던 김양상(金良相)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구당서》
○ 정원(貞元) 원년에 선덕왕 6년 김양상에게 검교태위 도독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檢校太尉都督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을 제수하였다. 이어 호부 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사신으로 보내었다. 《책부원귀》를 보면, 비서 승(祕書丞) 맹창원(孟昌源)을 조제책립사(弔祭册立使)로 삼아 보내었다. 그해에 김양상이 졸하였다. 상상(上相) 김경신(金敬信)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김양상의 관작을 이어받게 하였는데, 김경신은 바로 김양상의 종형자(從兄子)이다. 《상동》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종부제(從父弟)라고 하였고, 동사에는 내물왕(奈勿王)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 14년에 원성왕 14년 김경신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김경(金敬)’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원성왕이 정원(貞元) 15년(799)에 훙하였다. 그의 아들이 김경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김경신의 적손(嫡孫)인 김준옹(金俊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상동》
○ 16년 소성왕(昭聖王) 2년 4월 경인에 김준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을 제수하고는 사봉낭중 겸 어사중승(司封郞中兼御史中丞) 위단(韋丹)을 보내 부절과 책명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위단이 운주(鄆州)에 이르러 김준옹이 졸하고 그의 아들인 김중희(金重煕)가 즉위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조서가 없으므로 그대로 되돌아갔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애장왕(哀莊王)의 이름이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김중흥(金重興)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므로 동사에 따라 바로잡았다.
○ 순종(順宗) 영정(永貞) 원년에 애장왕 6년 조서를 내려 병부낭중(兵部郞中) 원계방(元季方)을 파견하면서 부절과 책명을 가지고 가서 김중희를 책봉하여 왕으로 삼게 하였다. 《상동》
○ 2월 무진에 신라 왕 김중희의 어머니 화씨(和氏)를 태비(太妃)로 삼고 아내 박씨를 비로 삼았다. 《책부원귀》
○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 애장왕 7년 11월 경자 초하루 기해에 중국에서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의 아들 김헌충(金獻忠)을 신라로 돌려보내고, 이어 시비서감(試祕書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상동》
○ 3년에 애장왕 9년 신라에서 김역기(金力奇)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였다. 7월에 김역기가 글을 올리기를,
“정원(貞元) 16년에 신의 옛 임금 김준옹(金俊邕)을 책봉하여 신라 왕으로 삼고, 왕의 어머니 신씨(申氏)를 태비로, 아내 숙씨(叔氏)를 비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책봉사 위단이 신라로 오는 도중에 김준옹이 훙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대로 그 책명을 가지고 중국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책명이 지금 중서성(中書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니, 신에게 그 책명을 주시어 가지고 가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김준옹 등에게 내린 책명을 홍려시(鴻臚寺)로 하여금 중서성에서 받아 오게 하되, 책명이 홍려시에 도착하거든 김역기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책명을 받들고 신라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구당서》
○ 10월 기유에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 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과 아우 김중공(金仲恭) 등 세 사람에게 본국으로 하여금 예전의 규례대로 문극(門戟)을 주게 하라.”
하였다. 《책부원귀》 ○ 《신당서》에는, “김역기가 또 신라의 재상 김언승ㆍ김중공 및 왕의 동생 김소금(金蘇金)ㆍ김첨명(金添明)을 위하여 문극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다 들어주었다.” 하였다.
○ 5년 헌덕왕(憲德王) 2년 10월에 신라 왕이 그의 아들을 파견하여 《구당서》에는, 왕자 김헌장(金憲章)이 와서 조회하였다고 하였다. 와서 조회하고,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佛經), 번(幡) 등을 바쳤다. 또 글을 올려 순종(順宗)을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상동》
○ 7년에 헌덕왕 4년 김중희가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애장왕이 원화(元和) 4년(809)에 숙부인 김언승에게 시해되었다. 신라의 상(相)으로 있던 김언승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김창남(金昌南)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부고를 전하였다. 7월에 김언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 신라국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國王)을 제수하고, 김언승의 아내 정씨(貞氏)를 책봉하여 비로 삼은 다음, 직방원외랑 섭어사중승(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 최정(崔廷)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제를 지내고 책립하게 하였으며, 볼모로 와 있던 왕의 아들 김사신(金士信)을 부사로 삼았다. 《구당서》 ○ 8월 초하루 정해에 칙서를 내려 신라국의 대재상(大宰相) 김숭빈(金崇斌) 등 세 사람에게 본국으로 하여금 예전 규례에 의거해 문극(門戟)을 하사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11년 헌덕왕 8년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경계와 가까운 곳에 있는 주부(州府)의 장리(長吏)들로 하여금 이를 단속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숙위하러 와 있던 왕자 김장렴(金長廉)이 글을 올려 진정하였으므로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상동》
○ 11월에 조회하러 오는 왕자 김사신(金士信) 등이 사나운 바람을 만나 초주(楚州) 염성현(鹽城縣)의 지경에까지 표류하여 갔는데,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이용(李)이 아뢰었다. 이해에 신라에 기근이 들어서 무리 1백 70명이 절강성 동쪽에서 식량을 구하였다. 《구당서》
○ 경종(敬宗) 보력(寶曆) 원년 헌덕왕 17년 5월 경진에 신라의 국왕 김언승(金彦昇)이 아뢰어서, 앞서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 등 네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하고, 또 새로 조공하는 데 따라간 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 등 12명을 중국에 남아 숙위(宿衞)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이어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히게 하고, 홍려시로 하여금 이들에게 물자와 식량을 대 주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따라 주었다. 《책부원귀》
○ 2년 헌덕왕 18년 12월에 신라에서 볼모로 와 있던 김윤부(金允夫)가 예전의 규례대로 중국 사신이 신라로 들어갈 적에 신라에서 숙위하러 와 있는 사람들을 부사(副使)로 차임해, 사신과 함께 신라로 돌아가서 조서를 통역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고, 단지 고한 데 따라 부사로 차임하기만 하였다. 《상동》
○ 문종(文宗) 태화(太和) 5년 흥덕왕(興德王) 6년 김언승(金彦昇)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헌덕왕이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에 훙하였다. 맏아들 김경휘(金景徽)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삼고, 그의 어머니 박씨를 태비로 삼고, 아내 박씨를 비로 삼은 뒤, 태자좌유덕 겸 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 조제(弔祭)를 지내고 책립(册立)하게 하였다. 《구당서》
○ 개성(開成) 원년에 희강왕(僖康王) 원년 신라의 왕자 김의종(金義琮)이 와서 사은하고, 아울러 머물러 숙위하였다. 《상동》
○ 2년 희강왕 2년 4월에 칙서를 내려 숙위하고 있던 왕자 김의종을 신라로 돌려보내었는데, 물품을 주어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 3년 민애왕(閔哀王) 원년 7월에 신라 왕 김우징(金祐徵)이 치청 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선사하는 노비를 중국으로 보내었는데, 황제가 그들이 먼 이국 땅까지 온 것을 불쌍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상동》
○ 5년 문성왕(文聖王) 2년 4월에 신라에서 국상(國喪)이 났다고 고하여 왔다. 황제가 홍려시에 있던 질자(質子)와 기간이 다 차서 돌아가야 할 국학생(國學生) 등 총 1백 5명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었다. 《구당서》
전류(錢鏐)가 오월왕(吳越王)을 자칭하면서 오월왕 원년은 바로 효공왕(孝恭王) 2년(898)이다. 사신을 보내어 신라 왕과 발해 왕을 책봉하였으며, 바다에 있는 여러 나라의 군장(君長)을 모두 책봉하였다. 《오대사(五代史)》
○ 후당 장종(後唐莊宗) 동광(同光) 2년 경애왕(景哀王) 원년 정월에 신라 왕 김박영(金朴英)과 신라의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상동》
○ 요(遼) 태조(太祖) 천현(天顯) 원년 경애왕 3년 3월에 요나라가 발해를 평정하였는데, 신라가 정벌에 따랐던 공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상을 내려 주었다. 《요사(遼史)》
○ 후당 명종(後唐明宗) 천성(天成) 2년 경순왕(敬順王) 원년 4월에 신라국 강주(康州)에서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책부원귀》
○ 장흥(長興) 3년 경순왕 6년 4월에 신라국 권지국사(權知國事) 김부(金溥)가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비(金朏)를 사신으로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동》 ○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본디 진한의 후예이지 변한의 종족이 아니다. 그 나라의 지리와 임금의 세계(世系) 및 물산(物産), 풍속(風俗) 등은 《당서》에 나타나 있다. 당나라 고조 때 김진(金眞)을 살펴보건대, 《당서》에는 김진평(金眞平)으로 되어 있다. 봉하여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은 뒤로부터는 그의 후손이 대대로 임금이 되었다. 동광(同光)과 장흥(長興) 연간에 국왕 김박영(金朴英)과 김부(金溥)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는데, 김박영과 김부의 세차(世次)와 즉위한 해, 죽은 해에 대해서는 사관이 그 기록을 빠뜨렸다. 후진(後晉) 이후부터는 사신이 오지 않았다. 《오대사》
○ 신라는 55대를 거친 다음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하였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주D-001]혁거세(赫居世) : 이병도는, “혁거세는 실상 휘가 아니라 존호(尊號)이니, ‘혁(赫)’은 바로 광명(光明), 명철(明哲), 현명(賢明)이라는 말인 ‘’의 차음(借音)이요, ‘거세(居世)’는 왕호(王號)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은 음과 뜻인 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서간은 《삼국유사》 권1에서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거니와, 거세(居世)ㆍ거슬(居瑟)도 같은 음과 뜻의 말로서, 삼한 군장(君長) 칭호의 중국 측 사음(寫音)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에 해당되는 말이니, 혁(赫)은 여기의 건(鞬)과 같이 거세(居世)를 형용하고, 거세는 거서ㆍ거슬ㆍ길지와 같은 뜻의 말로 보면 좋다. 그러면 혁거세는 명왕(明王)ㆍ철왕(哲王)ㆍ성왕(聖王)의 뜻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에서 거세(居世)와 거서간(居西干)을 나누어 거세는 휘(諱), 거서간은 위호(位號)로 나눈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쪽 주》
[주D-002]서라벌(徐羅伐) : 서라벌이 《삼국사기》 권1에는 서나벌(徐那伐)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권1에는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로 되어 있으며, 서야벌(徐耶伐)로 표기된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서나(徐那)ㆍ서라(徐羅)ㆍ서야(徐耶)는 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신라(新羅)와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서, 서(徐)ㆍ사(斯)ㆍ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ㆍ라(羅)ㆍ야(耶)ㆍ노(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의 뜻이다. 벌(伐)은 불(弗)ㆍ불[火]ㆍ비리(卑離)ㆍ부리(夫里)와 한가지로 성읍(城邑)이나 도시(都市)를 의미하는 동방의 고어(古語)이다. 그러면 서라벌은 ‘상국읍(上國邑)’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현대어인 ‘서울’은 이 서라벌의 약칭인 ‘서벌’ 즉 ‘서’에서 전래된 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쪽 주》
[주D-003]건모라(健牟羅) : 큰 성(城)이라는 뜻이며, 후에는 금성(金城)이라고 쓰였다. 고구려ㆍ백제의 왕도(王都)에 상당한 것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한 왕기(王畿)를 말하는데, 우리말의 ‘큰마을’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이병도는 “건모라는 고대어(古代語)에서 대촌(大村)ㆍ대읍(大邑)을 뜻하는 ‘큰므르’ㆍ‘큰몰’의 사음(寫音)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619쪽》
[주D-004]읍륵(邑勒) : 신라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로, 신라어(新羅語)의 읍(邑)과 촌(村)을 의미하는 ‘벌(伐)’, ‘불[火ㆍ弗]’의 대음(對音)이다. 곧 ‘읍’의 종성(終聲)인 ‘ㅂ’과 ‘륵’의 초성인 ‘ㄹ’을 반절한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95쪽》
[주D-005]문자(文字)가 …… 있다 : 문자가 없다는 것은 한자(漢字)가 아닌 고유한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중국 사람과 신라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백제 사람의 통역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백제 사람이 신라어(新羅語)를 이해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나아가 신라어와 백제어가 같았다는 뜻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01쪽》
[주D-006]가라국(迦羅國)을 …… 삼았다 : 가라국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본가야(本加耶)가 신라에 항부(降附)하였다. 가야국(加耶國)ㆍ가라국(加羅國)ㆍ가락국(駕洛國)으로도 표기한다.
[주D-007]소벌공(蘇伐公) : 이병도는 “소벌공을 《삼국유사》 권1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였지만, 이는 실상 인명(人名)이 아니므로 ‘소벌’이 서라벌을 약칭한 ‘서벌(徐伐)’과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리고 또 《삼국사기》 권1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이라 하였는데, 이 고허촌의 ‘고허(高墟)’가 바로 ‘소벌(蘇伐)’의 한역(漢譯)인 것이다. 즉 소벌의 ‘소(蘇)’나 서벌의 ‘서(徐)’는 ‘고(高)’의 뜻에 해당하고, ‘허(墟)’는 ‘벌(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소와 서는 고(高)ㆍ상(上)을 의미하는 ‘솟’ㆍ‘솔’ㆍ‘수리’의 대음(代音)이니, 소벌ㆍ서벌은 북방(北方)의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소부리(所夫里)’ 즉 부여(扶餘)와 공통된 말이다. ‘고구려’는 ‘수릿골’ㆍ‘솔골’의 대역(代譯)이고, ‘소부리’는 ‘솟벌’의 사음(寫音)으로, 모두 상읍(上邑)ㆍ수읍(首邑), 즉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말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96쪽》
[주D-008]누한(樓寒) : 누한은 내물왕의 이름이 아니라 왕의 칭호인 마립간(麻立干)을 일컫는 것으로서, 루(樓)를 ‘마루’로 훈독(訓讀)하면 마립(麻立)이고, 한(寒)은 ‘간(干)’과 같이 취음(取音)한 것이다.《國譯三國史記 37쪽 주》
[주D-009]이름이 …… 모(募)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에는 법흥왕의 휘가 원종(原宗)이라 하였다. 이병도는 “왕의 성이 모(募), 이름이 진(秦)이라 한 것은 어떠한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53쪽 주》
[주D-010]가라(加羅) : 가라는 가야(伽倻)ㆍ가야(加耶)ㆍ가량(加良)ㆍ구나(拘那) 가락(駕洛)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1]임나(任那) : 고대 변진(弁辰)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 이름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가야연맹체를 총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임나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으로, 여기서는 ‘任那加羅’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금관가야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명왕(景明王) 8년에 세워진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에 보이는 임나도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해 임나라고 하였다. 임나는 본디 ‘님나(nim-na)’로 발음되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미마나(mima-na)’로 발음하였다. 이는 고대 우리말에 있어 n음과 m음이 서로 넘나드는 음운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말이 있어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마치 임나에 일본의 통치 기관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게 되었다. 이 임나일본부설은 1970년대 이후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면서 계속적인 연구가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주D-012]임읍(林邑) : 지금의 안남(安南)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진(秦)나라 때 임읍현(林邑縣)을 설치하였고 한나라 때 상림현(象林縣)으로 고쳤다. 후한 말기에 구련(區連)이란 자가 중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현령을 죽이고 자칭 임읍국왕(林邑國王)이라 하였는데, 수나라 때 이를 격파하고 임읍군(林邑郡)을 두었다. 당나라 때에는 다시 임읍국(林邑國)이라 하였고, 그 뒤에 임읍을 점(占)으로 옮겨 점성국(占城國)이라 하였다. 그 뒤 안남(安南)에 의해 멸망되었다.
[주D-013]신라국에서 …… 조회하였다 : 《구당서》에 “진덕왕의 아우 국상 이찬간(伊贊干) 김춘추 및 그의 아들 김문왕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고, 《신당서》에 “진덕왕이 그의 아들 김문왕과 아우 이찬의 아들 김춘추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고, 《삼국사기》에 “이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덕여왕과 김춘추는 6촌 간이고, 김문왕은 김춘추의 셋째 아들이다. 이찬(伊贊)은 이찬(伊飡)으로, 이벌찬(伊伐飡)의 다음 등급이다.
[주D-014]도수충(屠粹忠)이 찬하였다 : 이 부분은 편찬자가 무슨 내용을 기술하려고 하다가 빠뜨린 듯하다.
[주D-015]호로하(瓠蘆河) : 《동사강목》 제4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다.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주D-016]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17]매초성(買肖城) :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사강목》 제4에는 “매초는 매성군(買省郡)으로, 지금의 양주이다.” 하였다.
[주D-018]발해와 …… 노략질하였다 : 발해는 이 당시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국토를 크게 개척하고 연호를 고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해지던 시기로, 당나라에 맞서서 장문휴(張文休) 등이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에 있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다.
[주D-019]황제가 …… 있었는데 : 이 당시에 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인해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지방으로 옮겨 가 있었다.
[주D-020]김중희(金重煕) : 애장왕의 고친 이름이다. 애장왕의 본명은 김청명(金淸明)으로, 즉위하면서 김중희로 고쳤다.《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第10》
[주D-021]화씨(和氏) :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숙씨(叔氏)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제10에는 애장왕의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이는 당시 중국과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 혈족 혼인(血族婚姻)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소성왕 왕비의 아버지 이름인 김숙명(金叔明)의 숙(叔) 자를 취하여 가성(假姓)으로 삼았던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69쪽 주》
[주D-022]문극(門戟) :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시행한 제도로, 묘사(廟社)나 궁전의 문, 부주(府州)의 공문(公門)에 시렁을 만든 다음 극(戟)을 걸어 놓아 위의(威儀)를 갖추는 것을 말하는데, 귀관(貴官)의 사제에 이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주D-023]김중희가 …… 삼았다 : 《삼국사기》에는 이 기사가 헌덕왕 원년 조에 들어 있다.《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第10》 ‘원화(元和) 4년’은 원문에는 ‘원화(元和) 원년’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화 4년에 김언승이 그의 아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하였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김언승의 아내 정씨(貞氏)’는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제10에, “헌덕왕의 비는 각간(角干) 김예영(金禮英)의 딸인데, 지금 정씨(貞氏)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하였고, 《삼국유사》 왕력(王曆)을 보면 각간 김충공(金忠恭)의 딸로 되어 있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신라에서 혈족 혼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정씨라고 가칭한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71쪽 주》
[주D-024]헌덕왕 18년 : 원문은 헌덕왕 14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편찬자가 보력(寶曆) 2년(826)을 장경(長慶) 2년(822)으로 착각하여 기술한 듯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김윤부(金允夫)는 보력 원년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주D-025]전류(錢鏐) : 오대(五代) 시대 때 오월(吳越)을 개국한 임금으로, 임안(臨安) 사람이다. 후당(後唐) 건부(乾符) 연간에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에 제수되었고, 천복(天復) 연간에 월왕(越王)에 봉해졌으며, 천우(天祐) 초에 오왕(吳王)에 봉해졌고, 양(梁)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여서는 오월왕(吳越王)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는 스스로 오월국왕(吳越國王)이라 칭하였다. 그 뒤 41년간 재위하였다.《五代史 卷67》
[주D-026]김박영(金朴英) : 여기서 말하는 신라 왕은 경애왕의 전왕인 경명왕(景明王)으로 그는 동년 2년 8월에 훙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명왕의 이름이 김승영(金昇英)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12 新羅本紀 第12》
[주D-027]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 왕봉규는 신라 말기의 호족(豪族)으로, 처음에 의상현(宜桑縣) 즉 천주현(泉州縣)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의령(宜寧)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치다가 뒤에 강주(康州) 즉 진주(晉州) 지역도 석권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중국과 활발한 교섭을 벌여 후당(後唐)으로부터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ㆍ회화장군(懷化將軍) 등의 직을 제수받았다. 뒤에 견훤(甄萱)의 지배하에 들어가 세력이 소멸되었다.
[주D-028]4월에 …… 바쳤다 :

이는 신라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 당시 강주(康州)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봉규(王逢規)가 파견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4년 조에,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후당에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자, 명종(明宗)이 중흥전(中興殿)에서 불러 보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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