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탕정성을 찾아서-제3편--영인산성(신성산성)...대두산성(大豆山城)

吾心竹--오심죽-- 2008. 12. 19. 13:59

<<< 탕정성을 찾아서-3편...영인산성...신성산성(薪城山城)...대두산성??? >>>

 

***영인지맥---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의 분기점 칠장산에서 분기한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남서진하며,

    서운산~부소산~위례성~성거산(579m)~왕자산~태조봉~취암산으로 이어지며, 

    성거산~왕자산 중간의 문암산~직산 무넘이~단국대~북일고교~노태산~직산의 미륵산~용와산~

    연암산 봉수대~어라산~국사봉~신성산(영인산)~입암산(갓바위 봉수대)으로 이어진 영인지맥의 최고봉이다.

 

   이곳엔 南城과 北城의 산성이 있다.

   고지도에는 산성만 있다고 전할뿐 그 유래나 기록이 전혀없고...단지 신성산성(薪城山城)이라는 것만있다.

   산정의 용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는 것과 평택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에 피했다해서 평택성이라

   이름 불려진다.

   고지도에는 영인산과 신성산으로 불려지며, 영인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그리 오랜된 것 같지 않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백제본기편...대두산성, 탕정성의 기록...>>>

 

   1) 온조왕 27년(서기 9년)  여름4월에 마한의 두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 온조왕 36년 (서기 18년)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3) 고구려 장수왕 서기 475년 한성을 불태우고, 백제의 개로왕을 아차산에서 죽이고, 강역을 남쪽으로 확장한

       장수왕에 밀려 백제의 문주왕은 겨울 10월에 웅진(공주)으로 천도한다.

 

   4) 고구려 장수왕은 지금의 직산까지 남하하며...지금의 영인지맥(성거산~연암산사~영인산~입암산)을

      백제와의 국경선으로 삼는다.

      장수왕은 백제초도 직산 위례성을 빼앗고, 백제 위례성의 지명도 사산현(蛇山縣)이라 고쳤다.

 

   5) 다급해진 백제의 문주왕은 다음해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민호를 옮겼다.

       8월에 해주(解仇...추측컨대 졸본부여계의 종친으로 사료됨...백제는 부여의 해부루,해모수에서 나뉨...)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문주왕 4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좌평 해구가 도둑으로 하여금 왕을 죽이게 했다.

 

   6)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은 13세살...9월에 아버지 문주왕이 시해되자

       다음해 2월 봄에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더불어 군중을 모아 대두성에 웅거하며 반란하니

       왕은 좌평에게 군사 2천명을 주어 치게했으나 실패...다시 덕솔 진로에게 5천명을 내주어 해구를 격살시켰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니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시(공주)에서 베어 죽였다.

 

   7) 삼근왕 3년 가을 9월에 대두성(大豆城)을 두곡(斗谷)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돌아갔다.

 

 <<< 조선팔도지도...백제초도 직산 위례성의 강역도...(백제초도를 찾아서? 오리골,진채,불그머리...참조바람) >>>

 

***온조왕 13년 8월...遣使馬韓 告遷都 遂劃定疆場, 至北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

    

***웅천(안성천...이병도 박사)---안성천~한성 풍납성 거리...170리 ///

***웅천(공주...단재 신채호)-----공주~풍납성 거리...300리 ///

***웅천(곡교천...???)----------곡교천~풍납성 거리...200리 ///

 

***마한왕이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백제 온조 일행에게 내어준 <동북 일백리> 강역도 ///

    (서해~삽교천~도고산~송악산~광덕산~차령~작성산~길상산~서운산~칠장산)

 

 

    <<< 결론 >>>

 

    이상을 살펴본바 제 생각으로는 탕정성은 지금의 온양의 배방산성(排方山城)으로 생각되며,

    장수왕이 직산지방까지 밀고 왔다면 웅진(공주)의 요충지인 곡교천과 차령,쌍령을 넘는 길목을 지켰을 것이고,

    또한 영인지맥이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쭉~뻗어 천연의 방패막이 였고...곡교천이 배수진을 친 형국임.

    영인산성은 사방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천험의 요새이며...

    탕정성(배방산성)이 방어 못하는 예산방면의 길목에  위치하여 웅진 북방의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임.

 

    대두산성을 영인산성으로 주장한 <유원재--1992년>--논문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의견임.

    삼근왕이 반란군을 진압할때 해구를 <격살-擊殺>...공격하여 쳐서 죽였다는 표현은 성을 포위하고,

    못 도망가게 한 다음 성을 함락했으며...연신이 고구려로 분명히 도망갔다는 표현은 안성천(한천,웅천)과

    상당히 가까운 지역임에 추격병을 따돌리고, 미처 처자를 챙길 겨를이 없이 황급히 도망친 것으로 생각됨.

 

    물론 신라의 위협도 컸겠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국가존망의 곤경에 처한 백제는

    북변 방어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임.

 

    영인산성은 한수이북의 주민이 이주해 온 곳이라 토착적 지지기반이 약하고, 불평불만이 많았을 것이며,

    탕정성인 배방산성을 지척에 바라보며, 백제 진압군의 동태를 한 눈에 조망하며,

    웅진 공주로 진격하기 위한 요로인 것임(차령과 쌍령...예산과 유구를 지나 서쪽으로 진군하기도 유리함)

    이곳이 좌평 해구에게는  반란군의 거점으로  정권을 찬탈 할 적지로 본 것 임.

    또한 반란이 실패할 시 고구려나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요충지임.

 

    이후 반란이 진압되고 대두성 살던 주민들을 곧바로 두곡성으로 이주한 대목에서

    직산지방까지 진출한 고구려 장수왕의 강력한 세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곡교천 이남을 전략적 방어선으로 삼은 것으로 사료됨.

 

    이후 영인산성(신성산성)은 역사의 고기록에서 사라졌슴.

    이는 반란군의 거점이며, 고구려 세력의 접경지로 대두성을 폐성시켜 적들이 이용치 못하게 했을 것이라 사료됨.

 

    영인산 아래 마을이 밀머리---밀두리(密頭里)인데 이는 <밀물의 머리>란 뜻이고,

    <택리지 영인산>의 설명처럼---

     이 산들이 수구(水口)를 감싸 안아서 문 같다. 물이 문을 통해 나오면, 곧 유궁포의 하류와 합치며, 

     공산(公山)은 큰 배에 돛을 올린 것 같다. 

     공산도 전체가 돌이며, 중류에 우뚝 서서 발해(渤海) 복판에 있는 갈석산(碣石山)과 같다.

 

     영인산(신성산)의 지형은 대해로 향하는 큰 배에 돛을 올린 것 같아...뱃머리에 해당된다. 

     이런 지형이 대두(大頭)---→대두(大豆)와 상응한 동음동의어(同音同意語)로 생각함. 

     신성산성(薪城山城)---영인산성(靈仁山城)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축성한 대두산성으로 생각함. 

 

     백제가 멸망한지 1,300년...

     2천년 긴 잠에서 깨어나 대중국의 무역항으로 세계를 향해 다시 세대박이(돛이 세개인 큰 범선)를 띄우는

     서해의 성장 동력인 백제초도 위례성지를 보존하고, 잘 가꾸어 찬란했던 백제사를 다시 정립했으면 합니다.      

      

 

삼국사(三國史)를 읽다.---사가집(四佳集)


삼한이 날마다 서로 침공을 일삼다 보니 / 三韓攻戰日相侵
백만의 창생들이 이미 어육을 당했는데 / 百萬蒼生已陸沈
신라 백제가 어찌 순치의 형세를 알았으랴 / 羅濟豈知脣齒勢
수와 당은 스스로 휼방의 마음을 가졌었네 / 隋唐自有鷸蚌心
강산은 묵묵하여 말할 줄을 모르지만 / 江山黙黙不知語
역사는 역력하여 찾아볼 수 있고말고 / 編簡歷歷猶可尋
절반은 영웅이요 절반은 또한 흉역들이라 / 半是英雄半兇逆
공연히 후인의 눈물이 옷깃을 젖게 하누나 / 空令後人涕沾襟

    

***아산 영인산(신성산)의 성벽---신성산성-薪城山城 ///

 

 

 

 

 

 ***축성방식이 온양 탕정성과 유사함.

 

 

 

***영인산성에서 본 입구와 곡교천...///

 

 ***아산 밀두리(밀머리)...삽교천 방조제...///

 

 ***서해대교...///

 

 ***영인산성...<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먼 산 우측이 성거산...위례성...부소산...금북정맥///

 

  ***멀리 서해의 아산만과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나가는 뱃머리 형상의 영인산성...///

 

   <<< 택리지의 천안,아산 이야기 >>>

 

 택리지의 저자는 이중환(李重煥)이며 자(字)는 휘조(輝祖)이고, 호는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靑華山人)이며 

여주가 본관이다. 숙종 16년(1690년)에 태어나서 63세가 되는 1752년에 세상을 하직 하였다. 

이 책의 저술한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세상을 하직하기 2년전에 환갑년인 61세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1751년에 저술한 것으로 추청된다.


 이 책이 완성되자  많은 사람이 베껴서 읽었던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이 책의 명칭이 택리지만이 아니고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동악소관(東岳小管).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을 보면 베껴 간 사람이 제나름대로 명칭을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대체로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 네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중점은 팔도총론과 복거총론에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소위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으로 달라지게된 원인과 내력을 서술하였고, 

팔도총론에서는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서술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로 나누어 그 지역의산맥과 

물의 흐름을말하고, 그 지역과 관계 있는 인물과 사건을 설명하여 인문 지리적(人文地理的)인 성격을 띠었다.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조건을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또한 인물과 관련된 부분도 많지만 

그 보다도 상업경제 관계를 많이 말하였다.


살 만한 곳은 첫째, 지리(地理-땅. 산. 강. 바다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치)가 좋아야하고, 

둘째, 생리(生利-그 땅에서 생산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셋째, 인심이 좋아야 하며, 

넷째,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하였다. 

지리는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 되고, 생리는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으나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팔도총론의 충청도 편에서 천안 주위의 산과 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시와 같이 설명되어 있어 

그것을 모두 보아야 만 천안의  내용을 알 수 있으므로 모두를 옮겨 기록하였고, 충청도 내포지방 중 일부가 

옛 천안군의 월경지인 신종면 돈의면 덕흥면 지역임으로 그 내용도 옮겨 기록하였다. 

직산에서 정유재란 시 일본과 명나라 전투내용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어 옮겨기록하였다.


 복거총론의 생리 편에는 천안에 관한 사항이 없었으나 충청도에 관한 사항을 보면 천안에 관한 사항을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것으로 사료되어 옮겨 기록하였고, 

복거총론의 산수(山水) 편에 천안의 광덕산이 절과 암자가 있고 골짜기마다 여염집과 밭고랑이 서로 뒤섞여서 

긴 숲과 간수(澗水) 위에 숨바꼭질하듯 하니 하나의 도원도(桃園圖)라고 하였다. 


  복거총론에서 살기 좋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가모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천안 지역은 지리적 조건, 생리적 조건, 인심도 좋고, 또한 가까운 곳에 광덕산이 있어 네가지를 모두 

구비한 지역으로살기 좋은 도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안에 관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팔도총론>

   충청도(忠淸道)


 충청도는 전라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다.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가 맞닿았다. 

그리고 동북편 모퉁이가 되는 충주 등 고을은 강원도의 남쪽에 불쑥 들어가 있다.
 남쪽의 반은 차령(車嶺)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物産)은 영남. 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다.


 충청도 감사는 공주에 머문다. 곧 백제 말엽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한양에서 3백 리의 거리이며, 차령이남 금강 남쪽에 있다.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차령을 넘고, 천안(天安). 

직산(稷山)을 지나서 북쪽으로 경기도 양성(陽城)에 이르게 되며, 진위. 수원. 과천을 지나 서울에 이른다. 
 이 길을 따라서, 직산 이북은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고, 땅도 메마른데 좀도둑이 많아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편으로 이백 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니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했는데, 곧 서해(西海)가 쑥 드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 또 큰 개(浦) 하나가 있다. 개는 유궁진(由宮津)이라 하며,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 

남쪽은 오서산이 막아, 다만 산 동남편으로 공주와 통할 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산맥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서산 동편에 면천. 당진이고 당진 동쪽으로 큰 개를 건너면 아산이다.

 다시 북쪽으로 엇비뚜름하게 경기도 남양의 화량과 작은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했다. 

이 네 고을은 가야산 북쪽에 있으며, 가야산 동쪽은 홍주. 덕산이다. 아울러 유궁진의 서편에 있어서 

개 동편인 예산. 신창과 더불러 뱃길로 한양과 통하며 매우 빠르다.

 산맥 한 가지가 북쪽으로 가서 거대령(巨大嶺)이 되고, 다시 달천을 끼고 서북쪽으로 경기도 죽산 경계에 이르러서 

칠장산(七長山)이 되었다. 칠장산에서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간 맥은 흩어져서 한강 남쪽의 여러 산이 되었고, 

서남쪽으로 간 맥은 한 영맥(嶺脈)이 되었다. 

진천에서는 대문령(大門嶺)이 되고 목천(木川)에서는 마일령(磨日嶺)이 되었다. 

전의 읍에서는 끊어져서 서쪽은 평지가 되고, 금강 북편에 와서 차령(車嶺)이 되었다. 또 서쪽으로 무성산(茂盛山). 

오서산(烏棲山)이 된 다음, 남쪽은 임천. 한산에서 그쳤고, 북편은 태안. 서산에서 그쳤다.

 마일령의 동쪽과 거대령의 서쪽 중간에 큰 들이 열렸고, 동쪽. 서쪽 두산의 물이 들 가운데서 합쳐져서 작천(鵲川)

이 되었다. 작천의 물 근원은 진천 칠정의 동쪽인데, 여기서 나와 남쪽으로 금강 상류인 부용진(芙蓉津)에 

들어간다. 작천의 서쪽에서 서쪽 산 옆이 목천. 전의. 연기이고 작천의 동쪽에서 동쪽 산 옆이 청안. 청주. 문의이다. 

그 중에서 청주가 가장 크며 공주의 동북편으로 백리 거리에 있다. 고을이 거대령 밑에 위치하였고, 

지역이 작천 서쪽을 넘어, 목천, 연기 사이에 끼어들어서 서산(西山)에 그쳤다. 

서산 한줄기가 구불거리며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모두 토산(土山)이고 돌이 없다. 

작천 서쪽으로 휘돌아서 북쪽은 목천.전의에서, 남쪽은 연기까지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감여가(堪輿家)는 살기가 벗었다 한다.  

금산.옥천과 견주어서 더욱 평단하고 토지가 매우 기름져서 오곡돠 목화 가꾸기에 알맞다. 

작천의 동쪽은 큰 들이 되어 동남쪽으로 사십여 리까지 통했고, 

들 가운데 산 하나가 있어 봉우리가 여럿이므로 팔봉산으로 부른다.

 청주 북쪽은 진천이다. 청주와 견주어서 들이적고 산이 많다. 산골이 겹쳐졌고, 또 큰 내가 많다. 

그러나 모두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 

서북쪽으로 대문령을 넘으면 안성(安城). 직산(稷山) 땅이다. 

바다와 겨우 백리 거리인 까닭으로 생선, 소금의 이익이 있다.
 목천 마일령(磨日嶺)의 서쪽에서 내포(內浦)의 동쪽과 차령(車嶺) 이북에 

천안(天安). 직산. 평택. 아산. 신창. 온양. 예산 등 일곱 고을이 있어 풍속이 대략 같다. 

그러나 남쪽은 산골인데 산골 가까운 곳은 기름져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가 알맞고, 

북편은 개와 섬에 가까운 곳은 거친 땅과 기름진 땅이 반반이다. 
비록 생선과 소금, 뱃길의 편리함은 있으나 목화 가꾸기에는 알맞지 못하다.


천안과 직산은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다. 

직산에서 평야 지대를 이십 리쯤 가면 평야가 끝나면서 소사하(素沙河)이고 

소사하의 북쪽은 곧 경기도 남쪽 경계이다. 


 옛날 선조 정유년에 왜적이 남원을 쳐부수고 전주를 지나 북쪽으로 공주에 올라와서 

군세(軍勢)가 매우 강성하였다. 

그 때 명나라 장수 형개(邢 )는 총독(總督)이 되어 요동에 머물러 있었고,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새로 평양에 도착하였다. 

연광정(練光亭)에서 방금 저녁밥을 먹는 중이었는데 첩보(諜報)가 날아들었다. 

양호는 포(砲) 한 방으로 영(令)을 내리고, 곧 말에 올라 남쪽으로달려가니 

기병(騎兵)이 급히 따르고 보군(步軍)이 또 뒤를따랐다. 

평양에서 한양까지 칠백리 길을 하루 낮, 이틀 밤만에 달려 왔다.
달단 출신인 해생(解生). 파귀(擺貴). 새귀(賽貴). 양등산(楊登山) 등 네 장수에게 

철갑기병(鐵甲騎兵) 4천 명과 말을 탄 원숭이 수백 마리를 거느리게 하여, 

소사하 다리 밑, 들판이 끝나는 곳에 숨어 있게 하였다. 

그 때 왜적은 직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마치 숲같이 보였다. 

숨어 있는 곳에서 백여 보 되는 곳에 왔을 때 말을 탄 원숭이를 먼저 풀어 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아 달리면서 왜적의 진과 충돌하는 것이였다. 

왜국은 본래 원숭이가 없으므로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원숭이를 처음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진을 머물러 발을 멈추고 멀거니 보는 것이었다. 

왜진에 가까이 간 원숭이는 곧 말에서 내려 왜진 복판에 들어 갔다. 

왜적은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원숭이는 도망쳐서 잘 피하며 온 진을 꿰뚫으니 진이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서 해생 등이 드디어 철기(鐵騎)를 놓아 급히짓밟으니 

왜적은 총과 화살을 한 번 쏘아 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하여 남쪽으로 당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이겼다는 기별이 오자, 호는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고 남쪽으로 왜적을 쫓아서 경상도 바닷가에 이르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와 같은 승리는 없었다. 

그가 지휘한 꾀와 절제(節制)한 공은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에서 거둔 승리보다 훨씬 켰지만,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는 호가 자기에게 사유를 알리지 않고 홀로 공을 이루었음을 분하게 여겨서, 

싸움에 이겼다는 것이 거짓이라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호는 탄핵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갔는 바, 

이 한가지 일로 봐도 명나라 조정도 별볼일 없음을 알겠다. 

 

선조께서 사신을 보내 호가 무고되었음을 변명하고 정응태도 관직이 갈렸다. 

그러나 그는 동림당(東林黨)과 결탁하였고, 응태의 아들이 그 아비의 일을 동림당에 호소하였다. 

전목재(錢牧齋)도 그 말을 믿고 자기의 문집에다 응태가 옳은 양 기록하였으니, 동림당의 허술함과 군자(君子)는 

쉽게 속아넘어감을 알겠다. 들에서 밭가는 사람이 지금도 가끔 창. 칼 등속을 줍는다.


 유궁포(由宮浦)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소사하와 합치며 두가닥 물이 만나는 그 사이가 아산현(牙山縣)이다. 

칠장산(七長山) 큰 맥이 직산 성거산(聖居山)에 와서 다시 한 멕을 들 가운데에 뻗어 내렸는데, 

이 맥이 성환역(成歡驛)을 지나고 아산의 영인산(靈仁山)에 그쳤다. 이 산이 곧 고을 의 진산(鎭山)이다.

 
산은 동남쪽에서 서북편으로 향하였고, 소사하의 하류(下流)가 여기에 와서는 산 바로 앞에 감돌아 괴어 있다. 

후면에는 곡교(曲橋)의 큰 냇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오는데 양쪽 물이 서북방에 함께 모여서 큰 호수가 되었다.
호수 남쪽의 산 하나는 신창에서 뻗어 왔고, 호수 북쪽의 산 하나는 수원에서 뻗어 왔는데, 

이 산들이 수구(水口)를 감싸 안아서 문 같다. 물이 문을 통해 나오면, 곧 유궁포의 하류와 합치며, 

공산(公山)은 큰 배에 돛을 올린 것 같다. 

공산도 전체가 돌이며, 중류에 우뚝 서서 발해(渤海) 복판에 있는 갈석산(碣石山)과 같다.


 나라에서는 영인산의 북쪽 바닷가에 창(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서 

해마다 배에 실어 서울로 나르는 까닭으로, 이 호수를 공세호(貢稅湖)라 부른다. 

이 지방에는 본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이 설치한 부터는 백성이 많이 모였고, 

장사꾼도 모여들어서 부유한 집이 많다. 

창이 있는 마을만 그러할 뿐 아니라 영인산 맥이 두 갈래의 물 사이에 그쳐서 기세와 맥이 풀리지 않았으므로, 

산의 전후와 좌우가 모두 이름난 마을이며 사대부의 집이 많다.


 유궁포의 동쪽과 서쪽의 여러 고을에는 모두 장삿배가 통하나, 

그 중에서도 예산이 배들이 떠나고 머무는 곳이 되었다. 

차령에서 서쪽으로 뻗은 맥이 북쪽으로 떨어져서 광덕산(廣德山), 다시 떨어져서 설라산(雪羅山)이 되어 

온양 동쪽에 위치 하였다. 
민중포진(閔中浦田)의 호공산(壺公山)이 중천에 빼어나서 우뚝한 홀(忽)과 같은 형상인데, 이 산이 흡사하다. 

이산을 동남쪽에 있는 길방(吉方)이라 하는 것은, 아산. 온양 등 여러 마을에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과 문학을 공부한 

선비가 많이 나온 때문이다.

  < 복거총론(卜居總論) >

        생리(生利)


 충청도에는 내포(內浦)와 차령 이남은 기름진 곳과 메마른 곳이 반반인데, 가장 기름진 곳도 종자 한 말을 뿌려서 

60두 안팎을 거두는 곳이 많다. 

차령 이북에서 한간 남쪽까지도 또한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반반씩 되나 차령 남쪽보다도 못하여서 

기름지다는 곳도 거두는 것이 40두를 넘지 못하는 곳이 많다. 한강 북쪽은 대체로 땅이 메마르다.
 내포에는 아산 공세호와 덕산 유궁포가 수량이 많고 근원이 길다. 

홍주 광천과 서산 성연은 비록 시냇물 항구이나, 조수가 통하는 까닭에 장사배가 머물러서, 

화물을 싣고 부리는 곳으로 되어 있다.

    < 산수(山水) >

 공주 무성산(茂盛山)과 천안 광덕산(廣德山)은 서로 연해 있어, 모두 토산(土山)이다. 

그러나 두 산 남쪽, 북쪽에 긴 골이 매우 많다. 절과 암자만이 골짜기를 차지한 것이 아니고, 골짜기마다 여염집과 

밭고랑이 서로 뒤섞여서 긴 숲과 간수(澗水) 위에 숨바꼭질하듯 하니, 완연한 도원도(桃園圖)이다.


***아산의 영인산성---신성산성(薪城山城)...아산현 서쪽 5리에 있다. 산 정상의 용샘--기우제를 지냄 ///

 

 ***영인산성의 성벽 줄기...///

 

 

 

 ***영인산성, 신성산성의 내부...///

 

 

 

***영인산성의 기왓장.../// 

  

 <<<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영인산성, 신성산성--- 연화봉 >>>

 

 

 

     <<<  영 인 산 (靈仁山)  >>>


 

  • 높이 - 해발 363.9m
  • 위치 - 영인면 신현리, 염치읍 강청리

수십리에 걸쳐 산세가 어우러져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1550년대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성산으로, 1819년 발간된 신정아주지에는 영인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인산 이라는 이름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 듯 하나 그 어원은 고려 6대 임금인 성종 9년 이후 寧仁이라는 별호가 있었던 것에 기인한 듯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이 있고 삼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성이 둘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성은 신성산성 남쪽의 성은 평택사람들이 피난하여 지었다하여 평택성이라고 한다.

 

 

 ***아산만의 안성천+진위천의 합수...평야.../// 

 

 

 

 ***입암산과 서해대교...밀두리, 걸매리...///

 

 ***곡교천+삽교천의 합수머리...예당평야...///

 

 

 ***영인산성--신성산성...깃대봉...///

 

***영인산성...신성산성의 용샘...///

 

 ***기우제를 드리던 용샘(龍井)

 

 

 

 

 ***영인산성--신성산성의 우물...///

 

 

***민족 시련의 탑...신성산성...무명산성...///

 

 

 

 ***아산만 방조제... 안중읍...///

 

 ***영인산성---신성산성의 긴 성벽...///

  

***백제 온조왕 36년 가을 7월에 탕정성을 쌓고(築湯井城), 대두성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백제 온조왕 43년 가을 8월에 아산(아산)의 들에서 5일 동안 사냥을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大斗山城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고구려가 멸망할 때 압록강 이북에서 항복하지 않은 성 중에

大斗山城이 나온다.

고구려 대두산성은 非達忽(고대 발음으로 희달골 또는 불달골)이라 하는데

非(히)는 해(日)를 뜻한다.

발음은 불(火=日) 또는 히(日)로 하고, 달(達)은 달(月) 또는 달(땅.들)을 가리킨다.

忽(골)은 성을 이룰만한 큰 동네를 의미한다.

고구려 불달골은 의미상 해와 달의 아들을 칭한 고구려 임금과 관련된 연혁을 지닌 땅이므로,

고구려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여긴 듯 한데 그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백제본기에 나오는 대두산성을 살펴본다.

 

[溫祚王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文周王 二年 春二月 修葺 大豆山城 移漢北民戶.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三斤王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建市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三年 春夏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위 백제본기 문구로 보아, 백제 대두산성은 탕정성, 원산성, 금현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공주 두곡에 있는 두곡성과도 멀지 않은 곳이다.

해구가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백제의 수도는 공주 방면이었으므로,

두곡성은 공주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만약 대두산성이 압록강 북쪽에 있다면 당시 백제 수도가 웅진인데,

압록강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되어 코미디가 된다.

 

사학자들은 대두산성을 공주 두곡에 있는 두곡성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보고 있다.

혹자는 大豆는 콩이므로, 콩산성=공산성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억지로 꿰어다 부친 것으로 공산성은 공주 산성동에 있고,

대두산성은 공주 두곡리 방면에 있으므로 다른 성이다.(인터넷 퍼옴)

 

     <<< 대두산성에 대한 제 의견 >>>

 

    1.이기백---탕정 수한산성설---1978년

    2.유원재---아산 영인산성설---1992년

    3.천관우---연기설(燕岐)------1972년

    4.김기섭---대전설(대전)------1995년

 

 

온양군(溫陽郡)---신증동국여지승람 ///

 <성곽> 배방산성(排方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3백 13척에 높이는 13척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산천】 연산(燕山) 군 북쪽 2리에 있는 이 고을 진산(鎭山)이다.

  배방산(排方山) 군 동쪽 8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

  가장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과안봉(過雁峯)이라 한다.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1872년 아산현...영인산...(유고성-有古城...옛 성이 있다)

 

 ***1872년 아산현 고지도...규장각 ///

 

아산현(牙山縣)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6리,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32리이고, 북쪽으로는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 음잠(陰岑)이라고도 했다. 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는 인주(仁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목종(穆宗) 8년에 다시 이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는데,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ㆍ평택ㆍ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하였다

 

<산천> 신성산(薪城山) 현 서쪽 5리에 있다. 동림산(桐林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고용산(高勇山) 현 북쪽 12리에 있다. 동심산(東深山) 현 동쪽 5리에 있다. 연암산(鷰巖山) 현 동쪽 29리에 있다. 입암산(笠巖山) 현 서쪽 12리에 있다. 바다 현 서북쪽 15리에 있다. 창정지(倉正池) 현 북쪽 11리에 있다. 장자지(長者池) 현 남쪽 18리에 있다. 대내산진(大迺山津) 현 서쪽 10리에 있다. 경기 안성군(安城郡)에서 발원하여 뭇 지류를 받아들여 이 나루가 되었다. 개포진(介浦津) 현 서쪽 13리에 있다. 시진(市津) 현 북쪽 26리에 있다. 당포(堂浦) 현 북쪽 16리에 있다. 봉화천(烽火川)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의현(全義縣)에서 발원하여 견포(犬浦)로 흘러 들어간다.

 

 ***광여도...아산현 ///

 

***좌해지도...///

 

 ***청구도...아산현 ///

 

 

신창현 新昌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祁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본현 서쪽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서 당성(溏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읍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산천> 성산(城山) 현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성당산(禁城堂山) 현 동남쪽 11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현 남쪽 16리에 있다. 또 예산현(禮山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정포도(井浦渡) 현 서쪽 20리에 있으니 즉 장포(獐浦)의 하류이다. 또 예산현 무한천(無限川)이 여기서 합류하여 면천군(沔川郡) 범근내포(犯斤乃浦)로 들어간다. 장포(獐浦) 현 서쪽 15리에 있다. 도고산에서 발원하여 정포도로 들어간다. 차륜탄(車輪灘) 현 동쪽 12리에 있는데, 온양군 가리천(加里川)과 천안군 포천(浦川)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견포(犬浦) 현 북쪽 15리에 있으니 즉 차륜탄의 하류이다. 범근내포로 들어간다.

 

 

 

 

 

 

 

 

 

 

 <<< 영인산 주변...지명유래 >>>

 

배두실 : 상성리에서 가장 마을. 영인산 북쪽에 있는데 별모양이라 .

불무실 : 상성리에 붙은 마을.

원모루 : 배두실 북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홍인원이 있었음.

신랑봉 : 배두실 서북쪽 들가운데 있는 외단 .

            옛날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우귀하다가 도둑을 만나 신부가 항거하다가 죽음에 신운리 통미에 장사지내고

            신랑도 병들어 죽어서 이산에 장사하였으므로 이산을 신랑봉리라 하고 신운리 통미를 각시봉이라 .

: 옥거리 위에 있는 .

낙포대 : 배두실 남쪽에 있는 영인산 아래의 놀이터로 영인 수석원화동천이라써있음.

영인 저수지 : 상성리, 아산리를 끼고 있는 만수량 1,183톤인 저수지.

옥거리 : 불무실 옆에 있는 . 전엔 옥이 있었다함.

고려장터 : 성대남쪽 영인산 북쪽에 고려장터가 있었다.

백정촌 : 상성리 79 - 3 80번지 일대로 욕골에 백정의 무덤이 있는산

: 상성리 70번지 주변으로 일제 강점기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던 곳으로 현재는 민가가 있다.

 

영인산(靈仁山) : 영인, 염치, 인주의 3 읍ㆍ면에 걸쳐 있는 큰산. 높이 364m 높은산으로 험준하더라도

        사람이 다치지 않으며, 정상 부근에 "용샘"이라는 우물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백제때의 산성으로 석성(石城) 있어 "영인산성"이라고 하며 일명 신성산성(新城山城) 이라고 한다.

 

깃대봉 : 영인산 봉우리 가운데 있으며, 정상 바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았다 한다.

평택봉 : 고려시대에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평택사람들이 피난을 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토성이 있고 평택성(平澤城)이라 한다.

연화봉 : 옛날부터 엄봉으로 불려오다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 건립(1998. 8. 14) 되어 있으며,

           멀리서 보면 연꽃 모양으로 보이기도 연화봉이라고도 한다.

: 벼두실 앞에 있는 .

: 엄봉의북쪽 능선을 따라오다 패러글라이더 타는 곳에서 발원하여 궁아래로 흐르는내.

큰골(噙) : 영인산 깃대봉과 편택봉 중간에서 발원하여 오다 샘마지골과 합류하여 낙포대의 놀이터를

                지나 성대(벼두실) 내가 되어 영인 저수지 합류된다.

: 영인산 엄봉 밑에 있는 샘으로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 지역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렸다.

 

궁터 연못 : 상성리 142-2번지에 연못이 있는데 주인이 연못을 매워 밭으로 경작을 하는데,

               하루는 주인이 못을 다시 복원하라는 꿈을 꾸고 본래의 연못 반을 복원하였더니

               연꽃이 피어났으며 현재도 피고 있다.

낙포대 : 큰골에 있는 놀이터로 2m 낙수가 되는 곳이 있고, 하천 바닥 바위에

          『영인수석원화동천(靈仁水石元化洞天)』이라 써있다. 북쪽 200m 지점에 절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밭침돌을 채취하여 가정에 지대석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이곳으로 전라도민들이 올려 3마지기를 팔아서 구경을 왔었다 한다.

공터 갱변 : 나무하는 아이들이 나무해 가지고 오다가 쉬면서 공치고 놀던 곳이다.

거리 : 일설에는 벼두실(성대) 앞산(안산) 있는 마을로 아산 옥거리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옥거리 또는 옥고리라 부른다.

엄봉골 : 영인산 동쪽에 있는 엄봉을 발원으로 불무실 마을 내가 .

           중간 쯤에 회양목이 자생하고 있고 영인 저수지로 합류된다.

빈자지골 : 영인산 동쪽으로 엄봉을 발원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내로, 옥거리 앞으로 흐르고 영인 저수지로 합류된다.

샘마지골 : 영인산 동쪽 엄봉의 북쪽에 용샘이 있는데, 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며 큰골 낙포대에서 합류한다.

                                                                                                               <<< 온양문화원 >>> 

 ***서해대교 현수교...///

 

 ***서해대교...서궁대해(西窮大海)...중국가는 배... 페리호...세대박이 대신 페리호가...///

 

 ***금북정맥 성거산(579m)...영인지맥의 발원점 ///

 

 ***온양의 곡교천과 배방산...배방산성...망경산...///

 

 ***배방산성과 온양(백제시대--탕정)의 조산 설화산(설아산)...///

 

 ***곡교천...온양...천안 일대...///

 

 ***곡교천 하류...선장면과 예당평야...합덕읍 우강면...///

 

 ***고용산과 그 너머...평택시내와 소사평...직산 홍경들...///

 

 ***직산 위례성...///

 

 ***위례성과 성거산 ///

 

 ***백제초도 위례성의 강역...///

 

***영인산성에서 본 목천의 흑성산과 천안시가지...///

 

 ***도고산과 신례원...///

 

 ***신창,도고,선장면...곡교천...///

 

 ***평택시 포승읍...///

 

 ***안성천+진위천의 아산만...광교산...강 안쪽 백석포...와우산 선사유적지...///

 

 ***영인산성에서 본 삽교천 방조제...///

 

 ***삽교천+곡교천의 합수점...건너편 합덕읍 우강면(선우대교) ///

 

 ***직산현 망해산 봉수대...안중, 팽성...//

 

 ***아산현 읍치(백제--아산원-牙山原,아술현-牙述縣)

 

***여민루...아산현--아산원,아술현 읍치...///

 

영인 산성 : 영인산 꼭대기에 성이 남북쪽으로 둘이 있는데

               북쪽성은 돌로 쌓아 둘레가 480, 높이 10척이며

               남쪽성은 흙으로 쌓아 둘레 480 높이 4척으로 겹성이 되어 있음.

               고려 몽고 난리때 평택군 사람들이 여기와서 피난 하였다고 하며,

               신성산성 또는 평택성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온양문화원...마을의 유래 >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영인산성(靈仁山城)--신성산성(薪城山城) ///

 

<<< 직산고을 吾心竹...영인산성--신성산성...백제 온조왕 27년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2008.12.19 >>>

 

 

 

 

 

 <<< 신성산성--(薪城山城,靈仁山城) >>>-----吾心竹 詩 ---

 

慰禮城 부소문령  물 따라 일백리 길

素沙河 玉澤마다  기장 벼 베어내니

오리떼 群舞되어  하늘을 덮는구나

 

雙嶺山 車嶺고개  산 따라  일백리 길 

曲橋川 小澤마다  수수 조  걷어내니

참새떼 이리저리  낱알을 쪼는구나

 

곡교천 안성천에  백성들 모여드니

집마다 굴뚝연기  태평을 누리나니 

城柵을 둘러막고  百濟라 이름하네

 

밀머리 산꼭대기  西海를 바라보며

溫祚王 세대박이  大洋을 누비나니

뉘라서 칠백년대업  虛無하다 말을하리

 

<<< 직산고을 오심죽..백제성 신성산성(영인산성)에 올라...200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