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스크랩] <5> 동북아시아 철기시대

吾心竹--오심죽-- 2008. 12. 10. 12:16

<5> 동북아시아 철기시대

 

 

단군 색불루 녹산 아사달 부여 문화 bc1285~bc1112
22세 색불루, 23세 아흘, 24세 연나, 25세 솔나 단군

 

 


후단군시대 강역과 주변도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지역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워 이기니 고조선의 서북 땅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라고 불렀다.
바햐흐로 철기시대가 시작되고 전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집트 투탕카멘의 고분에서 기원전 14세기에 철검이 발굴되었다. 히타이트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는 철검이 보편화되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에 하북河北 고성藁城과 북경北京 평곡平谷에서 철날을 박아서 만든 구리 도끼 鐵刃銅鉞가 각각 발굴되었다. (지도참조)
이 철은 단조된 것이었으나 재료는 운석에서 얻어진 철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성 유적지에서는 철광석을 야철하던 유적지와 철찌꺼끼가 발굴되었다. 운석과 관련되지 않은 철광석에 의한 야철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색불루 단군 때에 남이藍夷의 남국藍國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은나라와 가까운 엄독홀掩瀆忽에 있었는데 지금의 석가장시石家庄市)로 고려된다.  석가장 동남 난성?城이 바로 남국 위치로 고려되며 그 북쪽 고성藁城의 묘자리에서 철인동월이 나온 것이다. 남이국은 본래 북경시 동북 난하?河의 난평?平(지도표시)에 있다가 남쪽 석가장 난성?城(지도 표시)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석가장 서북 영수현靈壽縣(지도표시)의 고성에는 훗날 주나라 때에 마물 단군과 왕실끼리 결혼하면서 적족翟族의 중산국中山國이 세워졌다.

 
고성시 출토 청동인월과 청동제기


홍산옥기

여기서 철인동월과 함께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색불루시대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다. 의료기로서 외과수술용 돌칼이 나왔다. 이는 수술 뿐 아니라 침구 치료가 이미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 최초 비단이 나왔고, 마직품麻織品이 나왔다. 홍산문화 옥조각 중에도 누에를 신처럼 모시는 여인상들이 보인다. 그리고 술을 빚기 위한 양조용 효모가 대량으로 나왔다.
고성이 은나라와 가까우니 은나라 문화일 것이며, 단군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은나라 문화라면 은나라 유적지 전반에서 저와같은 유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군 동이족 문화이기에 중국 땅 안에서 외로운 섬처럼 세계 최초의 선진 문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여 지역에 나타난 최초 대형 청동기물은 떡을 만드는 시루다. 신석기시대에는 쌀로 밥을 하지 못하고 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 지역에서 조나 보리를 주로 농사하였을 것인데, 역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 떡 시루는 시라무렌강 부근인 천보동 天寶洞에서 발굴되었다.
따라서 단군 왕검이 그 아들 부여를 보냈던 부여성은 바로 이곳으로 확정된다.
천보동 동남쪽 10여km 지점에 용두산 석성터가 있는데 제사터가 발굴되었다. 
이곳 고분에서는 청동도끼, 청동검 등이 묻혀 있어서 천년간 대대로 전해져온 부여왕권을 상징한다. 
천보동 지역은 시라무렌강 상류로서 보통 해발 1000m인데, 이 강변은 해발 700m다. 즉 부여지역에서 일정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부여성은 당시에 시라무렌강 북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시라무렌강에 성 중앙을 관통당했다.
요나라는 이곳에 요주성饒州城을 세웠다.


전단군시대 부여성

이곳 부여성에서 태백산까지 백분하 계곡이 있다. 백분하 계곡은 100리 화랑이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로 유명하다.
음산암각화도 여기서 퍼져나간 것이다.

부여성이 있던 천보동天寶洞에서는 상商나라 때의 청동기물이 4점 발굴되었다. 청동솥, 추錘, 부斧 등이다.

용두산은 토성자진 6km 남쪽으로서 동으로는 위당하가 있어 옹고트 빈수濱水와 이웃하고 남쪽에 용두산이 있다.

용두산 유적지 규모는 600m x 400m 규모로서 해발 900m이다. 제단 유적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고 묘장은 토갱수혈묘제였다.

1기 유적지에서는 연병동부連柄銅斧(도끼 자루를 도끼 머리 양쪽에 매는 것)가 나왔는데 상商나라 형식과 같고 러시아의 바이칼 북쪽 앙가라고원과 예니세이강까지 퍼졌다고 한다. 공병식 직도검空柄式直刀劍과 넓고 둥근 청동 화살촉銅鏃과 가늘고 긴 두 종류의 화살촉이 나왔고, 동포銅泡, 연주連珠 장식, 대식帶飾 등 청동 장식품도 다수 나오는데 주조용鑄造用 석범石范까지 발견되어 자체 제작한 것이 된다. 연대는 bc1250년경이다.
용두산의 제단은 전방후원 모양으로서 40 x 40m 규모다. 이곳에서 사슴 문양 동패식銅鹿이 나왔다.

2기 유적지에서는 흑룡강 백금보유지의 영향을 받은 기하문 도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단군 왕검 시대 전파된 것이다.
기타 제사갱祭祀坑이 7개, 순장갱 2개, 그외 72갱이 나오고 별도의 묘장은 4개가 발굴되었다.

부여 지역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우면서 은나라 서북 귀방, 지금의 오르도스 고원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 두막루(右賢王 豆莫婁)라고 불렀으며,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세습하였다.
이때 상장 서우여(徐于餘)가 탕지산의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암살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살수 땅을 주면서 서우여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b.c. 1285년 우현왕 색불루가 부여신궁(夫餘新宮)에서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서우여가 맞서 싸우다가 패퇴하고,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도 참전하여 전사하고, 단군 소태는 물러났다.
색불루는 구월산 장당경藏唐京(=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 =졸본성)에서 22세 단군으로 다시 즉위하였고, 다시 녹산鹿山에 수도를 정하고 역시 아사달이라고 불렀다.
이로서 예맥구려 중심의 전단군시대 소밀랑 백악산 아사달은 막을 내렸다.

당시 개사원은 흥안령산맥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2029m)에서 시작되어 서요하로 들어가는 임서현林西縣 가사태하?斯汰河로 고려된다. 임서현에는 하늘산에서 자칸무렌강査干沐淪강도 흘러내려와 가사태하와 만나서 서요하로 들어간다.

자칸무렌강査干沐淪강 서안 대정大井에서는 청동기시대 구리광산이 발굴되었다. 고대 동광이 있는 대정에서 자칸무렌강 상류에 올라가면 상류가 둘로 갈라진다. 동쪽가지 끝에는 소부리카索博日?라는 마을이 있는데, 요나라가 평지에 경주慶州성을 세웠다. 소부리카는 단군 색불루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소부리카 서남쪽 자칸무렌강변에 조양성朝陽이라는 지명이 있다.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산성이 보이는데 훗날 흉노에게 망하여 피신하여왔던 오환선비족의 성터였을 수도 있다. 혹은 색불루 이전 우현왕 고등의 성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오환선비는 색불루의 직계 후손일 수도 있다. 자칸무렌은 흑수黑水라고도 하고 새한산塞罕山, 즉 한산 罕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칸무렌의 서쪽가지는 파이태하巴爾汰河고 하는데 바로 녹산아사달에서 흘러나온다. 녹산은 흥안령산맥의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2029m)이다. 황강량의 북쪽 고원 지역인 아시하도阿斯哈?는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즉 백악산이나 같다. 
황강량이 부여의 주산으로서 녹산이라 했는데 녹산의 녹鹿은 우리말로 노루산, 누루산을 거쳐 누루 황자를 써서 황산黃山으로 변할 수 있다. 고주몽의 도읍 졸본성이 다른말로 눌현訥峴이었는데 고국원왕 때 황성黃城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황강량 북쪽 목엽산 아시하도가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로 고려된다. 지금 천합원天哈園이라는 곳인데 해발 1600m 고지대이며 서쪽 전자구展子溝가 궁성터로 고려된다. 
  
서쪽에 아사달 석림이 있다. 빙하시대 만들어진 자연조각이다.
 

 
현재 아사달이라는 이름과 무엽산이란 옛이름으로 보아서 천합영은 색불루 시대 수도성 녹산 아사달이다. 
영고탑 천도 후에는 <단군세기> 31세 단군 등올 때에 기린이 와서 놀던 상원上苑이 변하여 오늘날 천합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동북쪽 25km의 대청산 남쪽 상점 유지에서는 패독貝禿과 채도, 활석 팔찌, 마노瑪瑙 고리, 와환蝸環, 골주骨珠 등이 발굴되었다. 하가점문화와 다른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로 분류하는데 옹고트 석붕산 문화와 비슷하다. 이는 녹산아사달의 남쪽이다.

색불루는 마한에 여원흥을 임명하고 번한에는 개천령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서우여가 다시 좌원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스스로 기자조선이라 하였는데 기자는 태양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맞서던 번한 개천령은 전사하였고, 마한 여원흥은 한반도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고리국지인 궁홀산에 살며 막조선莫朝鮮이라고 하였다.
본래 대동강 마한은 번한과 함께 기자국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원흥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마한세가 하>는 한반도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요하 서쪽의 막조선의 기록이다. 본래 대동강마한은 서우여 기자국의 일원으로 진마辰馬, 금마金馬라고도 하였다.
막한이 뒤에 말갈족으로 변한 것이고 그래서 말갈족은 혈통적으로 구려예맥족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이 마한이 곧 고구려라 한 것은 이 막한일 것이다.

한편 
색불루가 서남쪽에서 은나라와 전쟁을 하고 돌아온 와중에 후방에서 변방장수 신독의 반란으로 수도 녹산 아사달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였고 이때부터 영고탑이 북방 대성이 되었다.
다음 단군인 태자 아흘이 녹산 아사달에 돌아와 반란을 토벌하였다. 아흘단군은 은나라를 쳐서 산동 지방에 제후들을 임명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쫓아냈던 서우여를 비왕으로 삼아서 번한으로 책봉하였다.
한편 마한과 번한을 통합한 서우여는 좀더 독립적인 이름으로 기자조선을 세웠다.
그후 서우여로부터 3대인 솔귀 번한 때에 bc1122년경(죽서기년과 80년의 차이가 있는데 전통적인 것을 따른다.)에 은나라가 망하여 bc1120년에 은나라 왕자 기자箕子가 요서遼西로 들어왔다.

단군 솔나 영고탑 문화bc1112~bc795
25세 솔나, 26세 추로, 27세 두밀, 28세 해모, 29세 마휴, 30세 내휴, 31세 등올, 32세 추밀, 33세 감물 단군

 

bc1583년 16세 위나 단군 때에 구환九桓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제사지냈다. 경을 읽으며 마당을 밟는 창경답정唱經踏庭을 5일간 하였다.

이때 등불을 들고 애한가愛桓歌를 부르면서 불함산不咸山의 붉은 꽃을 노래한다. 여기서 불함산은 곧 태백산, 도태산, 현재 대광정자산이다.

bc1345년 20세 고홀 단군 때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bc1285년 녹산 아사달에 정도한 색불루 단군은 bc1250년 변방 장수 신독의 침략으로 녹산 아사달이 함락되니 색불루 단군이 영고탑으로 피했다.

이후 bc1237년 아흘 단군 원년에 비로소 신독을 주살하고, 녹산 아사달을 수복하여 76년을 녹산아사달에서 다스렸다.

이후 bc1112년, 25세 솔나率那 단군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였다.

1981년 옹고트翁牛特旗 동남쪽 오동화진梧桐花鎭 해방영자解放營子 오포산敖包山에서 2건의 대형 청동솥靑銅鼎과 한건의 청동시루?이 발견되었다.“옹고트翁牛特 =ONGOT”은 신성하다는 뜻이며 부여의 천신 제사인 영고迎鼓와 발음이 통한다.

이중에서 청동시루에는 두 개의 원시 한자가 새겨졌는데 하나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녕寧의 약자인 녕?이라는 글자였고, 또 하나는 아亞 모양인데 성곽의 곽郭자의 상형자가 가로, 세로로 한번더 포개진 글자다.

허진웅許進雄의 [중국고대사회]에 의하면 좌측의 것이 곽郭의 고자이며 이것이 포개져도 역시 곽郭의 옛 글자다. 그러나 영고탑의 고古 발음과 같은 고固이거나, 그 뜻은 성城 또는 나라 국國과 같은 뜻일 수도 있다.

여기 청동시루에 새겨진 영寧자는 바로 우리가 찾는 영고탑寧古塔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옛 지명에도 사용되었다.

금나라는 옹고트에 전녕로全寧路를 두었고, 원나라는 전녕부全寧府라고 했었으니 영寧이 본래 지명자인 것이다.
옹고트翁牛特旗 치소治所인 오란진烏丹鎭 고성이 있는데 금나라, 원나라 전녕로全寧路 성이었다.

북부여왕 해모수 때에 북막北漠, 즉 흉노에 약탈당한 영주寧州이기도 하다.

 

한편 33세 단군 감물甘勿은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웠다. 단군묘라고도 했다.

한편 옹고트 북쪽 삼성타라三星塔羅에서 대형 옥룡이 발굴되었다.  중국 옹우특기현의 상징이 되었는데 길이 26cm이었다.

삼성사였던 삼성타라 옥룡과 영고탑성이었던 해방영자 봉황 그릇(봉황은 bc4800년전 조보구 문화 시대 작품이다.)

삼성사가 옹구트기 북쪽이고(지도에서 별표) 영고탑은 옹우특기 동남쪽이다.

월명구와 조양구 사이가 단군 솔나시대 영고탑성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그 왼쪽의 성터는 전단군 20세 고홀 때지은 영고탑성일 수 있다.

 

옹고트 오란진 북쪽에 조격온도소목朝格?都?木이 있는데 그곳에 원석산圓石山이 있다. 우리말 온달-보름달, 둥근돌이 한어로 원석인 것이다. 오라산烏拉山이라고도 한다. 이 원석산 중에는 신비한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작은 등불의 빛이 시간대별로 남색, 홍색, 백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 산 꼭대기에는 탑 받침이 남아있다. 이는 당나라 장수 위지경덕尉?敬德이 산의 동굴에서 나오는 요기妖氣를 막기 위해 쌓은 탑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미 탑이 무너진지 오래다.

1971년 조격온도소목 서쪽 삼성타라三星他拉에서 40cm에 이르는 대형 옥룡玉龍이 출토되어서 이후로 옹고트를 중화제일룡이 나타난 옥룡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이 삼성타라가 삼성사三聖祠였을 것이다. 최근에 삼성타라 부근에서도 암각화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옹고트에는 태백산(=대광정자산)으로부터 등롱하燈籠河가 흐른다. 등롱하 발원지에 신령스러운 등불이 있어서 매년 제야의 밤에 두 개의 신불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오는데 대석문大石門에 이르러서 두 등불이 합치면 길하다고 했다. 이를 몽고말로 등노리登努日 혹은 등노리고리登努日高勒라고 했다는데 그냥 우리말로 “등燈놀이”, “등놀이 골”로 생각된다.

조격온도소목 북쪽에 포리돈布日敦이라고 하는 호수沙湖가 있다. 밝은달, 발달을 몽고어로 보리돈이라고 적는다.

경치가 빼어난데다가 호수가 C자 형으로서 용 모양이라고 하고 호수 북쪽 언덕에는 몽고족이 매년 제사지내는 제단이 남아있다.
조격온도소목의 여러 전설은 후단군의 영고탑 천도 이전의 전단군시대 16세 위나 단군 때에 창경답정하던 영고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옹고트 동남쪽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북쪽 마을인 주가지周家地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紅山水庫 끝지점 동안東岸이다.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는데,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다.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刀?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柄刀와 철치병도凸齒柄刀 등이 있다.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다.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聯珠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雙連泡, 방구方 , 쌍미동식雙尾銅飾, 조형식鳥形飾, 고동목걸이箕形蝸器, 녹송석, 마포麻布 등이 보인다. 
이것이 영고탑 시대의 묘장이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고트 대포자大泡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黑龍江 조원시肇源市 백금보白金寶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다. 백금보유지는 기하문幾何紋으로 유명하다.

옹고트 서남쪽 적봉시 하가점의 상층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영고탑 시대의 유물이다.


적봉시 하가점 상층문화유물

이곳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중군 형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창에 끼우는 것이다.공병식([]柄式; 구멍에 끼우는 형)이라 한다. 주로 노합하 영성 남산근에서 나오고 극시극등기, 파림좌기, 옹우특기, 우하량 북쪽까지 나온다. 영고탑 시대 유물로 보면 된다.

 

이때 후단군조선의 영고탑 천도는 요서의 기자와 더 가까워진 것이니, 중국인 기자가 인접해 왔으므로 단군조선이 중국쪽에서 후퇴했을 것이라는 일연一然의 추측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영고탑은 발해 안원부安遠府 부주府州인 영주寧州였다.

해모수 북부여시대에 영주가 북막 추장에게 약탈당한 적이 있다.

마지막 단제 고열가는 영품리왕寧稟離王(단기고사에서는 고열가 단군의 시호였다.)으로 격하되었다. 영품리왕의 시비가 낳은 딸이 동명왕이라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있고, 졸본부여의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단고기]에 있다. <후한서> 부여전에서는 색리왕의 시비가 낳은 아들이 동명왕인데 도망쳐서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단군 오루문 낙랑 문화bc795~bc430
34세 오루문, 35세 사벌, 36세 매륵, 37세 마물, 38세 다물, 39세 두홀, 40세 달음, 41세 음차, 42세 을우지, 43세 물리 단군

1. 낙랑문화

<규원사화>에서 34세 오루문奧婁門 단군은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한다.

부여신궁에서 봉기한 색불루 우현왕이 22세 단군이 되어서 조선의 중심인 녹산 아사달로 천도해 옮겨갔는데,
이때 장자 아흘에게 단군위를 주고, 
차자인 고불가에게 낙랑홀을 맡겼었다.  
43세 단군 물리 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낙랑 도성을 빼앗겨 단군 물리가 종묘 사직을 싣고서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는데 해두는 강평현康平縣 동북쪽의 해주海洲로 고려된다.
이후 단군 구물에 의해 낙랑 도성이 수복될 때에 낙랑성에 큰 홍수가 있었으니 낙랑홀은 강변이다.
한편 37세 단군 마물麻勿 때에 성 북쪽에 샘이 솟아서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한다.

낙랑홀의 물로 추정되는 요락수饒樂水가 있었다. 왕망 때에 낙랑樂浪은 토지가 좋고 인민이 요락饒樂하다고 기록하였으니 낙랑은 요락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통전>에서 요락수는 영주 유성 관할인데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다.
당나라가 거란 땅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와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같이 설치했다.
요락도독부는 시라무렌강 북쪽인 임서현에 있었는데 시라무렌강이나 노합하나 모두 요락수라고 부른 것이다.
47세 고열가 단군이 북부여에게 패망할 때에 진조선眞朝鮮이 진시황에게 복속했다고 전한다. 43세 구물단군은 이미 다른 진조선辰朝鮮인 장당경으로 옮겨갔으므로 진시황 정에게 복속당한 진조선眞朝鮮은 낙랑이 된다. 이 낙랑이 진시황의 만리장성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bc221년 연나라 진개의 동호 인질 생활과 동호 정벌과 관련된다. 이때 낙랑이 물러나 부여쪽으로 옮겼다가 bc201년에는 흉노의 침략으로 동호가 멸망한 것이다.

오루문 단군의 수도 낙랑의 위치는 우북평군의 치소인 평강현平岡縣이다.
평강현 고성은 흑성자에 있는데 그 북쪽에 남산근 유적지가 있고 이를 포함한 낙랑성이 있었다.

 

 

노합하老哈河의 상류에 많은 청동기 고대 묘장이 나타난다.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팔리한八里罕 고성의 남산근南山根 유적지는 곤도하坤都河(노합하 지류) 연안으로서 대형 석곽묘 2기 등 분묘 9좌가 발굴되고, 무려 500여건의 청동기물이 나왔다. 기물의 연대는 대략 상商(=은殷)나라 후반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다.
남산근에 발굴된 청동기물을 내용적으로 보면 청동도가 9건, 청동부가 8건,

청동검이 7건, 칼집이 4건, 투구 1건, 원형 방패 1건, 청동과 3건, 청동모 3건, 등 무기와 말과 마차 기물 6건에, 짐승형 패식 14건이 있다.

그외 각문골판刻文骨板을 보면 쌍기雙騎 수레 두 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음산 암각화에 나오는 수레와 같은 것이고, 같은 도법圖法이다.

투구 쓴 단군이 청동검 들고 말만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풍당당하게 대초원에서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후단군조서 오루문 단군 낙랑시대 낙랑성 (녕성 남산근)의 청동기 유물은 아래와 같다.

 

 
남산근 유물들. 제기 등 맨 아래는 갑골에 새겨진 쌍마 수레

이 무렵에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청동검 2식이라고 한다. 주로 영성 남산근과 난하에서 나온다. 청동검 끝에 동물무늬 장식을 한 것으로서 남산근과 하북, 융화 등 난하 유역에서 나오는데 수병식(獸柄式)이라 한다.

 

bc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배를 타고 이주하여 마한의 왕검성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다가 bc169년에는 해성에 곡식 300섬을 받쳤다. 해성이 가까운 마한馬韓 왕검성은 마한이 아니라 막한莫韓의 오기다. 즉 막한 고리국지를 한사군 설치 때에 낙랑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195년 최숭이 낙랑에서 배를 타고 떠나왔는데 이는 201년 흉노 묵돌가한의 동호 침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호東胡는 흉노와 못쓰는 땅 천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이는 달리호 주변으로 고려된다.
조무령왕에게 망하여 양성을 빼앗긴 임호가 후퇴하여 동호로 있다가 부여성에서 최후를 마치고 선비산(하늘산)으로 올라가서 오환선비가 되었다.
뒤에 다시 적봉으로 내려왔다.

2. 오르도스, 임호 등 주변문화

오르도스 주개구 문화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오르도스)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나라 역사인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르도스 고원이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7세기에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中山國으로 동천하였다. 녹주鹿州는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이었다.

이 백적인들이 bc637년에 주周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오르도스鄂爾多斯문화의 중심인 나린탑納林塔 주개구문화朱開溝文化가 있다.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흘 때에 주개周愷에서 여러 제후들이 회합했는데 혹시 주개구일 수도 있다. 나린탑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河南이라고도 하였다. 탑塔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한다.

    

오르도스 문화 스키타이 장식 ; 신수도, 씨름도 청동패, 와각식 청동검 등


이 오르도스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검을 북방식 서군 양식이라고 하는데 위와 같다. 단 왼쪽의 방울장식, 사슴머리 장식, 오른쪽의 고리 장식 등은 요녕성의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유적지와 요녕성 흥성시 양가향 유적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유적지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와각식 청동검은 길림시에도 나타난다. 즉 후기의 것이다.

 

나린탑을 비롯하여 주변에 석불탑, 백가탑白家塔, 장가탑張家塔, 백초탑白草塔 등 탑으로 끝나는 지명이 나린탑 주위로 모여 있다.

영고는 만주말로 여섯, 육六을 의미하는데 부여는 왕실과 오가제로서 육가를 이루었었고, 탑이나 타라란 이름의 마을들이 지어진 것은 부여의 흔적이다.

오르도스 고원의 신석기문화는 옥기도 전혀 없고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오르도스 청동기가 오르도스 고원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다.

오르도스 고원은 부여의 서쪽에 살던 알유?猶였는데 상당히 낙후되었던 알유, 즉 오르도스가 이 무렵에 부여인들에 의해 개발되는 신천지가 되었다.

나린탑에는 고성이 있었다. 성둘레는 410m x 360m 정도다.

오르도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개구 문화는 중가리아准格爾旗의 나린탑북쪽 10km에서 발굴되었는데, 용산문화와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스키타이scythay식 야수문野獸文을 받아들여 동방의 서요하西遼河로 전파한 것으로 해석하여왔다.

그러나 오르도스고원의 도기는 용산문화의 도기와 다르게 사문蛇文, 즉 지자문之字文에서 비롯되는 토기 형식이 발전하여서 용산문화의 채도문 도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후기에는 남문藍文 토기가 우세해진다. 이는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한 내몽고 동부로부터 토기가 직접 전래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 양식이라고 여겨졌던 그리스 금속 동물 공예품도 오르도스에 전파되어 오기 전에 이미 오르도스식 청동 예술이 적봉시 극시극등기나 적봉시 영성에 존재하고 있었다. 즉 스키타이 예술의 씨가 나온 곳은 서요하이며 토기와 함께 오르도스 고원에 전래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스키타이양식 금속공예도 그리스에서 시베리아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요하에서 발원한 것이 직수입 된 것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전래가 내몽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내몽고 자체에서 발생하여 스키타이로 흘러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동쪽에 살았던 스키타이인이 내몽고에서부터 그리스 연안으로 진입해 들어갔을 것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주개구문화지는 bc18세기에 구리 팔찌, 귀걸이, 구리환 등이 보이며 청동기가 시작되고 bc15세기에 사문격蛇文隔(빗살무늬 종류)과 단검, 동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미 이때부터 묘를 쓸 때에 양을 희생하여 매장하였으므로 목축민족이었다. bc13세기에는 양, 말, 사슴, 뱀, 용을 장식한 청동도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b.c11세기에는 용이 사라지고 대신 새머리가 장식되고 춘추시기에는 쌍오회수雙烏回首 와각식蝸角式(칼 자루 끝 장식이 둘로 갈라져서 서로 마주 보는 것) 단검이 출현한다. 그외 아주 다양한 장식과 문양, 야수문 패식이 절정을 이루어가는 것이 춘추시기다.


오르도스 고원에서 나오는 북방식 청동검은 서군형西群形으로 분류되는데 적봉시 영성寧城으로부터 하북성을 따라서 오르도스 고원까지 분포한다.

나린탑納林塔은 우리말로 내린 탑이다.

하투河套 북쪽 포두시包頭市 성곽에서는 선우천강單于天降 와전 벽돌이 나오는데 이 강降이 하늘로부터 신인의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린탑은 춘추시대에 악방이며, 알유의 땅이며 이제말로 오르도스다.

두막루는 우현왕에 해당하는 관직 이름이었지만 후에는 부족명이 된다.

[북사] [위서] [신당서] 등에 나오는데 [동북역사지도집]에서 제제하얼의 송눈평원松嫩平原으로 비정하였다. 금나라 대에는 포여로蒲與路라고 하였는데, 역시 “부여로夫餘路”에서 비롯된 지역명이다. 바로 이 지역은 기하문토기의 원향原鄕인 흑룡강가 백금보문화白金堡文化를 모태로 한다. 

또한 [수서]의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색불루 이후 천년 뒤에 장당경에 대부여가 건국되고 다시 기백년 후에 옛 부여 도성에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세워졌었다. 이들이 한무제의 침략 이후 궐기한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이동하여 가섭원 부여라 했는데 다른 말로 동부여라고도 했다.


양성 노호산 문화 / 임호


내몽고 양성凉城의 노호산老虎山에서는 고대 성곽이 발굴되고, 또 양성 서남쪽의 오포량敖包梁에서는 23개의 석퇴石堆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단이다.

석퇴의 연장 길이는 60m인데 그중 중앙 1개의 돌은 길이가 10m, 높이가 2m이고, 그 중앙에 3개의 구멍을 뚫어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고, 양 옆으로 각기 11개의 석퇴가 펼쳐진 것이다. 22개의 석퇴에도 각기 중앙에 한 구멍씩 뚫려 있다.


양성凉城에는 적적인赤翟人들이 살았다. 춘추시대말에 적적인들은 하북성 무안武安에 옮겨갔다. 이 뒤에 양성에 남아서 살던 사람들이 임호林胡다.

전국시대 bc300년경 백적인白翟人의 중산국中山國, 하북성 靈壽고성을 멸망시킨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임호까지도 이 양성을 빼앗겼다.

임호족은 동쪽 케스케덴 토성자 천보동 부근으로 들어온 것으로 고려된다. 일부는 남천하여 하북성 난하?河 상류인 난평?平으로 옮겨갔다.

이때 임호, 동호의 별칭이 산융山戎이다. 연나라 때에 난하 동쪽 하북성 노룡盧龍의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고죽국은 산융국의 제후국이었다. 그 산융국은 단군의 제후국이었다.

난평에는 본래 남국藍國이 있었고 남국 때문에 강 이름도 난하?河인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어양군魚陽郡 백단현白壇縣이었던 난평은 약 10개의 북방형 청동검이 발굴된 곳이며 왕묘가 남아 있다.

남국은 단군 초기부터 제후국이었고 산서성의 려국黎國 등을 세우기도 했다.

 

 음산 암각화 문화

 

        

음산 암각화 모음

부여족이 활약했던 내몽고 음산陰山 산맥의 남쪽은 하투河套라고도 하는데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한다.

음산문화陰山文化는 암각화巖刻畵 문화다.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도 그 파생품이다.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 조두鳥頭 얼굴이 있다.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가 부여족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한다. 천명현조天命玄鳥 항이생상降以生商라는 상나라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나라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尊으로 이어진다. 상인商人을 조이鳥夷로 보아서, 특히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舜이고 순은 동이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을 사료로 들었다. 그리하여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일치한다고 하였는데 음산암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동경銅鏡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고트의 卍자 부호로 이어진다.

 

엄주, 서주 등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홀阿忽 때에 박고씨博(?浦)古氏를 청주淸州에 봉하여 엄국淹國을 세우고 영고씨盈古氏를 서주徐州에 봉하여 서국徐國을 세우고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봉하였다고 한다. [규원사화]에서는 박고씨를 포고씨라고 하였다. 

중국은 퉁구스족이 발해를 거쳐서, 산동반도 아래 강소성 연운항까지 내려온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며 그들이 상나라를 세웠다고 해석한다.


 

서우여 기자 험독성 문화bc1282~bc221

 

단군 조선의 서남방인 번한조선番韓朝鮮은 중국과 경계에서 항상 전쟁하면서 발전하였다.

치우가 내몽고 구려 청구국에서 태산으로 내려가서 용산문화를 만들고 중국 묘족苗族의 조상이 되었고, 발한성에 남았던 치우의 후손이 번한이 되어서, 회대까지 다스렸는데 그후 번한은 태산에서 물러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백제, 고구려가 뒤를 이었다.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세습하고, 번한이 죽자 소정을 추천했는데 단군 소태가 그리하였다.

그러나 상장 서우여가 소정을 죽였다.

소태 단군은 상장 서우여에게 살수의 백리 땅을 주어 기수奇首라고 부르게 하였다. (지도 표시) 그리고 또 서우영에게 단군 자리 양위를 계획하였다.

그러자 색불루가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이때 마한이 출병하였으나 해성(평양)에서 전사하였다. 서우여는 도망하였다.

색불루가 단군이 된 뒤에 쫓겨났던 서우여가 다시 좌원坐原에 돌아와서 색불루가 세운 번한 개천령을 전사시키니,

색불루는 서우여와 타협하여 번한으로 세운다.

그리고 마한이었던 여원흥의 후손은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막한이 되어 왕검의 유택이 있는 고리국지, 즉 창무시 부근에서 40여세를 이어간다.

 

이때 막한 여원흥의 유물이 법고시 정가방丁家方 만류가灣柳家의 유적이다. 유물은 부채형 동월銅鉞, 동척銅戚, 동부銅斧 2건, 단뉴동경 등이 있고, 하북성 초도구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영수동도鈴首銅刀, 녹수동도 鹿首銅刀, 환수동도環首銅刀 외 두 건의 동도가 있다. 이 유물들은 전단군시대 말기 무렵, 은나라 시대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된다.


 

색불루가 세웠던 마한은 막한莫韓, 막조선莫朝鮮으로 바뀌어서 북으로 후퇴하여 말갈의 조상이 된다.

여기서 좌원坐原은 삼국사기 고구려에도 나오는데 부신시 동북쪽 고원으로 고려된다.

대릉하의 백악산 아사달 유역(오한기 대전자진)은 당시 개성開城으로 고려된다.

이후로 번한세가의 적통이 치씨에서 서우여로 바뀌었는데 이를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고도 한다.
기존의 번한과 마한이 모두 서우여의 기자조선에 속하였다.

 

단군 소태가 처음에 기자 서우여에 주었던 살수薩水의 땅 백리는 무순시 고려산성이다. 요동반도 최초의 청동기가 나오는 곳이다.

무순시 망화구에서 산서성의 은묘에서 나온 것과 유사한 청동환수도가 발굴되었으므로 은나라 때에 해당하는 유적지다. 바로 단군 소태와 서우여 기자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시 청동도 길이는 24cm였고 모양은 위 그림중의 첫 번째의 날을 가졌으나 손자루에는 원형고리가 있다.

이후 무순시에서 초기 비파형청동검(비파의 상하가 1:1에 가까운 것)이 나왔다. 이 초기 비파검은 요양에서도 나왔다.

즉, 뒷날에도 지금의 요하 동쪽 일대가 서우여 기자조선의 배후가 된다.

 

[단기고사]에서 기자조선의 수도는 평양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번한의 왕험성을 의미한다.

전한의 요동군에는 번한성과 험독성이 있었다. 요동군 번한현에서는 패수가 색외에서 나와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가므로 그 위치는 지금 중국이 험독성이라고 주장하는 태안현 손성자다.

전단군조선의 번한은 극성에 있었고 탕지산 안덕향이라고도 했으며 그 위치는 당취수가 흐르던 수중현의 홍애자 고성이었다.

서우여의 번한성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 서우여의 영역이다.

기자조선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의 영역이었다. 무순시가 기자가 책봉받았던 고향이므로 심양에서 아래와 같은 기자 시대 번한왕의 고분 발굴이 있었다.

    

    
 
심양 정가와자 유물 ; 기자 서우여 시대의 복장과 청동검, 청동검 손잡이 타격석, 다뉴동경, 쌍월식 구리돈 붕朋 , 아래 청동검은 위에 있는 것임.

서우여 번한의 특징적인 문화는 바로 비파형 청동검과 다뉴동경多紐銅鏡, 그리고 천단, 즉 고인돌이다.

은나라 동경은 고리가 하나인데 반하여 번한의 동경은 고리가 둘이므로 다뉴동경이라고 한다.

번한의 관내인 의현義縣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6개 발굴되었고, 부신시 자도대  호두구 유지에서는 3개의 비파형 청동단검 석곽묘와 석성이 발굴되었다. 대집둔 험독성險瀆城의 서쪽 오금당에서는 청동단검 4개,
또 서쪽인 흥성시 양하향에서는 은말 시기의 환수청동도 등 청동도 4개가 발굴되었다. 이는 막한의 유물과 거의 같다.

서우여의 서쪽 영역은 대릉하大凌河 상류인 객좌喀左, 능원, 우하량까지로 고려되며 동남쪽으로는 한반도까지 통할한다. 이때 고인돌이 한반도에 퍼진 것이다.

2. 비파형 청동검의 발전

철기시대이고 철검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부장된 것은 청동검이다. 이는 더 강하고 오래가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파형 청동검의 분포 통계를 보면 총 218개 지점(비파형검의 갯수가 아님, 요서에서는 한개소의 3,4개의 검이 나옴.)에서 발현되었는데,
한반도는 7~8개소로서 전체의 3.2%다. 반면에 요서는 154 개소로서 70%, 요동과 심양이 45개소로서 21%, 길림장춘이 6개소로서 2.8%. 하북이 6개소로서 2.8%이다. 이는 서우여 기자조선시대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한반도 출토지는 평남 개천군 용흥리, 평양시 서포동, 평남 대동강면 석암리, 연안군 부흥리,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춘천시 외곽, 경북 청도군 예전리 등이다.

먼저 북방 청동검 중에서 동군(東群)이라 하는 것은 전형적인 비파형 청동검이다.  이것은 조립식 원리로 인해서 타격석에 청동검을 돌려서 끼워 사용했는데 후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자루에 끼웠다. 조립식으로 만든 이유는 기마전에서 나무 자루에 달아매어 창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고려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비파형 청동검이 개발된 곳은 무순시, 요양시 등이다. 이제까지의 한쪽날의 청동도(靑銅刀)를 나무 자루에 달아서 창으로 쓰다가 양쪽날의 청동검(靑銅劍)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동군의 비파형 청동검은 난하 서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동군 세력의 중심인 서우여의 패전 이후로 서우여기자조선에서만 사용되었고 그리하여 한반도와 길림으로 전파되었으며 또 진조선(眞朝鮮)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서우여 기자 번한성은 bc221년 동호에 인질로 잡혀왔던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이때 연나라 요동군이 되었다.
연나라와 번한의 새로운 경계는 만번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훗날 위만의 번한성으로서 금주시 동쪽이다. 즉 대릉하를 경계로 연나라와 기자조선의 경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진나라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고 그래서 상하 운장이라고 했다. 운장은 낙랑군에 있었는데, 전한서의 낙랑은 한무제 때의 낙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후 후퇴한 낙랑군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렇게 옮겨온 낙랑을 훗날 낙도 樂都나 낙랑서현樂浪西縣, 서락현西樂縣 등으로 달리 부른 것이 된다.  아무튼 한무제의 낙랑군 설치시에는 요동군 험독현에 속했고, 후한시대에는 요동속국의 하나로서 험독국이었다.

출처 : 문경약돌(거정석, 페그마타이트)
글쓴이 : 솔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