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윤관의 <고려지경> 정계비---성호사설

吾心竹--오심죽-- 2008. 12. 3. 18:05

<<< 윤관의 비...선춘령 >>>

 

성호사설 제2권

윤관비(尹瓘碑)


윤관의 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있으니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육성(六城)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高嶺鎭)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치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경계를 정할 적에 우리의 대표로 나갔던 사람이 윤관의 비를 가지고 옛날에 서희(徐熙)가 소손녕(蕭遜寧)에게 항쟁하듯이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윤관이 병사령할(兵使鈴轄)인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때의 일을 기록하되, “이 땅은 동으로 대해(大海)에까지 연접했고, 서북으로 개마산(蓋馬山)까지 들어갔으며, 남으로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과 연접했으니 산천도 수려하고 토지도 비옥하다.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지금 그곳이 바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만강 밖에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면 윤관의 비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윤관 전에 벌써 고구려에서 새겨 세운 비가 있었던 것이다.

 

 <<< 선춘령,先春嶺...윤관의 고려정계비(1107년)...두만강 건너 공험진의 700리...동국여지전도...윤두수 >>>

 

 

 

 

補遺
先春嶺賦 022_347c


惟天作高山之穹窿兮。限華夷之區域。伊先春之巨嶺。寔北紀之扃鐍。幾年覆沒於胡虜。爲龍蛇之所蟠。驚刀斗於一夕兮。達烽火於長安。蒼生力盡於荷戈。誰矍鑠而據鞍。偉麗國之有臣。云氏尹兮名瓘。心已壯於許國。豈患地脈之生殘。擁萬夫之衿旆。涉大江之漫漫。却山戎於千里。城大鎭兮額額。非好大而022_347d喜功。實規模之宏豁。登嶺頭而耀武。瞰殊俗之風靡。斸山骨以爲碑。辨內憂而外夷。安國步於盤石。絶北冠之窺伺。猗夫人之勳業。合作頌以封山。何後裔之綿遠。昧先易而後難。城旣復而爲隍。碑亦剝落而難看。吾固知惟德之可恃。山河非固國之寶。自我國之啓運。聖繼神而相保。戎狄棄甲而遠遁。敢自干於天誅。觀古嶺於今日。似有待於來蘇。蒙雨露之沾濡。聳濯濯之春容。雖大平之足誇。願長鎭於大東。亂曰。惟東有國。肇自開闢。江山回022_348a抱。大禹難績。由九而三。統三爲一。邈彼北荒。煙火不通。伊麗尹氏。人中之龍。穿山渡海。荒度土功。先春有嶺。實惟所封。今爲樂土。序此山戎。與國咸休。永世無窮。

 <선춘령(先春嶺)의 비석>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 고려대 박물관 소장




고려 예종 2년(1107) 평장사 윤관(尹瓘, ?-1111) 등이
17만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친 뒤
국경을 넓혀 그곳에 육성을 쌓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새겨진 비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선춘령(先春嶺)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다음의 古地圖를 봅시다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두만강의 북쪽에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로 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어디있을까요?




1900년초 일본이 작성한
'통감부 임시 間島 파출소 기요' 극비보고서 이책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중국 연길국자가 서쪽 1리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 하였는데 비문의 대부분은 알아 볼 수 없고
남은 20여자의 글자 중 다행히 무자년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무자년은 고려 예종 삼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지금의 그 비석은 중국에 의해 사라져버렸습니다.

“高麗之境” 4글자가 씌여져 있었던 그 비석을 꼭 찾아 보고 싶습니다.

(완)



(운영자 추가게시 자료)



(고려의 동북쪽 경계는 함경남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밖)



지금까지는
고려 동북 경계는 함경남도 정도로 배워 왔으나
고려사와 고지도는 두만강 북쪽 700리 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사 권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춘령에 대해서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 61-77(고지도) 및
규장각 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북쪽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42권에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강역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강감찬 장군의 구주대첩은 만주에서 일어난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


오재성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에 운영자가 지도 등을 첨부하여 설명한 글임

(참고지도)






(본문)


원사에서 “동령로”에는
고려인 최탄등이 서경부 주현진(州縣鎭) 6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현 토산 중화진에 “귀화”가 있다고 했으며
60여성의 지명으로는

“정원부 곽주 무주 황주 령주 자주 가주 순주 은주 숙주 덕주 창주 철주 태주
개주 삭주 선주 성주 회주 맹주 연주 운주“
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심양로”에는

태종 6년
고려인 홍복원 등이 서경도호 “구주” 등 4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한 기록이 있다.


관할주 명칭에는

“신성주 요성주 가홀주 건안주 남소주 목저주 개양주 대나주 창승주 마미주 적리주
여산주 연진주 안시주“
등 14개성은 명칭이 나오는데 나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란병을 물리친 “구주”의 명칭이 분명히 “동령로”에는 없는데
“심양로”에 등장하고 있으니

“구주”는
동령로 지역이 아닌 “심양로” 지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히 첫기록인
"태종4년 高麗人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40餘城來降"은
(고려인홍복원솔서경도호구주40여성래항)
"태종4년에 고려사람 홍복원이 서경도호부 산하 구주 등 4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했다"

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구주대첩지역이 평안도에 있었다면
동령로 항목의 60성에 기록이 있었어야 하는데 구주가 심양로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원사 또는 신원사 기록이 잘못기록되었다 하여도
둘다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면
이미 심양과 요양은 “본래 고려땅”이라고 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제42권 공민왕 19년(1370) 7월
동령부에 출정하여 동년 12월에 평정하였고

그 때
"요심(요양과 심양)은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
라고 하였고


강계만호로 하여금 방문을 붙이는데
요 심(遼 瀋) 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요양은 본시 우리나라(고려) 지경이다(遼陽元是國界)"
라고 하였고
원나라말경에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려사 권42 공민왕19년(1370년) 1월
동녕부를 평정하고 북방사람들이 귀순하여 왔는데

"동쪽은 황성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의 지대에 적의 종적이 없어졌다
(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
하였다.

남쪽이 압록강이라 하였으므로 상기지명들은
전부 압록강 북쪽지역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남쪽에 압록이 있고
북쪽에 동녕부가 있으니
현재의 압록강을 고려때 압록강으로 보면
동녕부는 만주에 있어야 이러한 기록이 가능한 것이다.

서경이 동녕부라면
서경은 만주에서 찾아야지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서경과 철령과의 관계를 나타낸 기록이
1388년 2월의 기록에 있는데

"사실 철령은 우리 서울로부터 겨우 3백리 거리에 있으며
공험진이 국경계선으로 되어 온 것이 한해 두해가 아니다"
(철령지산거왕경근삼백리공험지진한변계비일이년)
(鐵嶺之山距王京僅三百里公험之鎭限邊界非一二年)

라고 했으니
철령과 왕경은 3백리에 있다는 것이다.

요, 심(遼, 瀋)의 북쪽에 철령이 있다.



1388년 기록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니

우가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철령(鐵嶺)으로부터 북(北)으로 가면서
문, 고, 화, 정, 함(文 高 和 定 咸) 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험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의 땅이다"

라고 하였으니

철령의 남쪽 3백리 지경에서
서경이며 동녕부였던 지역을 찾아야
고려사에 의한 고려땅을 밝혀 볼수가 있을 것이다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경도 경원밖 6백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그지역 인근에는 고지도에 "고려계비 또는 윤공비"라는 비석표시가 있으니

공험진의 위치는 아래 흥개호와 고려영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지도 참고)

철령에서 공험진까지 이어지는 부분이
고려의 주강역 아니었나 조심스레이 추정해 봅니다


그리고

“최남선” 저 “국난사”에서
“천리장성” 조를 보면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축성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는데

현종10년 5월에는 영평진(永平鎭)을 쌓고
현종14년 12월에는 요덕진(耀德鎭)을 쌓고
현종16년 9월에는 상음(霜陰)현에 성을 쌓고
현종17년 2월에는 순덕(順德)에 성을 쌓고
현종18년 2월에는 현덕(顯德)에 축성하고
동년11월에는 청새(淸塞)진을 축성하고
현종19년 7월에는 용진(龍津)진에 축성하였으며
현종20년 8월에는 경도라성을 11년만에 완성하였다.
현종21년 2월에는 인주(麟州)에 축성하고
동년 9월에는 영덕(寧德)진에 축성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평/요덕/순덕/현덕 등은 한반도지명이 아니다


정종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
라는 기록이 있는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018년의 구주대첩이 있었다
그런데 1035년에 송령에 장성을 구축하였다하였으니
바로 이 “송령” 동쪽의 심주지역에 “구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


원사의 구주부분에서는 이자료이상 더 찾아볼 자료가 없으니
다른 여러 가지 기록에서 “구주”를 더 확인하여
강감찬 장군의 “구(귀)주대첩”이 과연 한반도에서 있었는지
만주지역에서 있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기타 보완자료가 발견될 경우 즉시 자료를 올려드리겠습니다
(관련지도 재모음)


(철령에서 3백리에 고려서경 ?)

(화주=쌍성)




(선춘령=공험진)





제일위 중국 큰호수(흥개호)와 고려영 사이에 선춘령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고려의 주강역이다

고려영(高麗嶺)
노야령(老爺嶺) 옆에 대려령(大麗嶺)이 있고 훈춘 서북에 고려령이 있다


(고려모(高麗帽)=빈공(賓公)이라는 지명이 옛 “고려모”라는 곳이었다)




모(帽)자는 모자모자 인데 여기에 “고려모”라는 지명이 있다


(교과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