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鎭山 王字山

고려 태조 왕건 추정 동상 출토...천안 목천 텃밭서 발견

吾心竹--오심죽-- 2016. 7. 7. 11:11

‘태조 왕건’ 추정 동상 출토...천안 목천 텃밭서 발견

개성 왕건 동상과 닮아

석탑 부재도 함께 발견

 

조한필·이재경기자l승인2016.06.20l수정2016.06.19 21:48

 

 

 

 

천안 목천읍에서 고려 태조 왕건상(像)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은 1992년 개성 왕건릉(현릉)에서 출토된 왕건 동상과 흡사한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통천관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관이다.

천안 출토 인물상의 통천관 중앙에는 개성 출토품엔 없는 임금 왕(王)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인물상의 주인공이 태조 왕건으로 확인되면 남북한 사학계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왕건상 추정 유물은 천안 목천의 한 전원주택 텃밭에서 발견됐다. 지인 제보를 받고 이곳을 찾아간 건 지난 13일이었다. 60대의 집주인은 “텃밭에서 다수의 기와 조각과 함께 석탑 부재와 관(冠)을 쓴 얼굴상까지 나와 크게 놀랐다”며 “이곳에 절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얼굴 부분만 남은 이 출토품은 길이 10cm 남짓으로 재질은 청동으로 보이나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

 

통천관은 개성 출토품처럼 외관·내관으로 구성돼 있었으나 내관은 사라지고 외관만 남은 상태다. 외관 앞면에 있는 황제 상징인 오각형(금박산) 안에는 ‘왕(王)’자가 쓰여 있다. 옆으로 난 비녀 모양의 뿔은 오른쪽은 망가지고 왼쪽만 남은 상태다. 비녀 뒤로는 굵은 띠 장식이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이 인물상은 젊은 시절의 왕건을 형상화한 것으로 밝혀진 개성 출토 동상과 비교할 때 같은 왕건상일 가능성이 크다. 두툼한 윗눈꺼풀, 풍성한 볼, 코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깊은 주름, 코와 윗입술 사이 푹 패인 인중 등 얼굴 모습이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펴낸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에 따르면 고려는 광종 2년(952년) 왕건상을 만들어 개성의 봉은사 별도 전각(眞殿, 진전)에 모시고 지극 정성으로 받들었다. 이렇게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신 절이 이른바 ‘진전사찰’이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과 깊은 연관을 지닌 천안에도 태조 사당을 짓고 초상화를 모셨다. 이후 조선은 새 왕조 개창에 따라 이들 왕건 형상들(동상 혹은 그림)을 모두 왕건릉 등 땅에 묻었다.

 

천안에선 태조 사당의 존재는 알려졌었으나 진전사찰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었다. 목천 출토 왕건상 주위에서 발견된 석탑 부재와 암막새를 볼 때 이곳에 왕건상을 모신 진전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서 나온 귀목문(원형돌기)·범자문의 암막새(와당)는 이 사찰이 고려 때 조성됐음을 확인해 준다.

 

목천·청주는 후삼국시기 고려에 귀속되었으나 반란을 자주 일으킨 지역이다. 왕건이 930년 후백제 공격을 위한 병참기지로 천안도독부를 설치한 데는 가까운 목천·청주의 이탈을 감시하려는 뜻도 내포돼 있다.

 

발견자는 “집 앞의 길이 천안 목천에서 북면을 거쳐 청주로 가는 옛 길”이라고 말했다. 고려는 왕건을 모신 진전사찰을 목천·청주 길목에 세워 왕건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모든 유물은 발견자의 매장문화재 신고에 따라 천안시가 보관 중이다. 차후 문화재청 조사가 있을 예정이다.

 

 

/천안 조한필·이재경기자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황제관을 쓴 ‘천안의 남자’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기자l승인2016.06.22

 

▲ 조한필 부국장(내포)

개성서 왕건 동상이 출토됐다는 걸 안건 10년 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06년 북한에서 빌려 전시했을 때였다.

 

1992년 왕건왕릉(현릉) 뒤편에서 출토된 동상을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이라고 밝힌 터라 더욱 화제를 불렀다. 앉은 모습의 실제 성인 크기 나체 동상이었다. 서울 전시 때 성기가 노출된 허리 부분에 흰 헝겊을 덮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이 왕건상은 개성 봉은사에 모셔져 고려인들이 지극 정성으로 받들던 동상이었다.

 

그런데 지난 13일 천안 목천에서 크기는 작지만, 그와 비슷한 얼굴상이 발견됐다(본지 6월 20일자 16면 보도). 개성의 왕건 동상처럼 황제의 관, 즉 통천관(通天冠)을 쓴 남자였다.

누구일까? 이런 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고려의 왕 말고 달리 있을까?

 

이 얼굴상은 야트막한 산 중턱 전원주택 텃밭에서 나왔다. 주위에선 다수의 기왓조각과 석탑 구조물 일부가 나왔다. 암막새의 귀면문(원형 돌기)·범어문을 볼 때 고려시대 사찰임은 분명하다.

 

왕건상은 천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물이다. 왕건과 천안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왕건은 930년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로 천안도독부를 설치했다. 왕건은 병참기지 성격의 신도시로 천안을 탄생시킨 것이다.

 

결국 왕건은 936년 10만 대군을 몰고 천안에 내려왔다. 먼저 와 있던 태자(후일 혜왕)와 합류해 후백제로 진격,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천하를 편안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천안(天安)’의 포부를 이룬 것이다.

 

천안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 만든 도시다. 이런 천안에서 왕건을 지극 정성으로 떠받든 건 당연하다. 태조묘(廟), 즉 왕건 사당은 고려 초 일찌감치 지어졌다. 왕건 사당은 고려 때 지은 글에서도 확인된다.

 

1349년 이색의 부친 이곡은 고향 한산에 다녀오다 천안을 들렀다. 이때 왕자성(태조산)에 지어진 회고정에 글을 남겼다. “이곳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있다…이 고을은 할아버지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초상(肖貌)을 뵈었다”고 적었다. 태조 사당이 있고 거기엔 왕건 초상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전 천안군수 강호문이 1377년 지은 남원루기를 보자. “사당의 모습(廟貌)이 온 고을을 비추어 백성을 복되게 한 지 거의 500년이 됐다. 지난 계축년(1373년), 내가 조정 명령으로 이 고을에 부임해 태조묘를 배알하고 물러나와…고정(鼓庭, 병사 훈련장)과 왕자성은 모습이 예전과 같으니 왕업을 일으킨 공(功)에 힘입은 바다.” 고려 초 천안에 세워진 왕건 사당이 고려 말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이번에 목천서 출토된 왕건 추정 동상은 사찰 터에서 발견됐다. 개성의 왕건동상이 모셔졌던 사찰, 봉은사와 같은 경우다. 왕의 초상화나 형상(眞)을 모신 전(殿)을 갖춘 ‘진전(眞殿)사찰’인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왕건의 초상화·동상은 천덕꾸러기였다. 세종 10년(1428년) 8월 1일 예조가 건의했다.

“충청도 천안군의 고려 태조진(진영, 초상화), 문의현의 태조진과 주상(鑄像), 전라도 나주 혜종진 및 소상, 광주 태조진을 함께 유후사로 옮긴 후, 각 능 옆에 묻게 하소서.” 세종이 따랐다.

 

이렇게 고려시대 천안엔 전국에 몇 개 없던 태조 초상화가 있었다. 이런 천안에서 태조 왕건동상이 발견되는 건 하등 이상하지 않다.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천안에서 왕건을 찾자 

 

조한필 기자l승인2016.07.06l수정2016.07.05 17:59

 

▲ 조한필 부국장(내포)

고려 태조 왕건은 천안을 여러 번 들렀다. 천안이 최종 목적지일 때도 있었지만 이곳을 거쳐 충북 보은·문의(이상 932년), 예산(934년) 등 다른 곳으로 갈 때도 많았다.

한 번은 천안 직산읍 수헐리를 지날 때였다. 인근 산을 가리키며 “오색구름이 둘러싸여 성스러운 산신이 있을만 하다”며 산 이름을 성거산(聖居山)이라고 직접 지었다. 이후 산기슭에 천흥사(天興寺)가 지어지고 현종 때는 천흥사 동종(국보)이 주조되는 등 이곳은 고려 왕족의 주요 사찰로 관리됐다. 성거산이란 이름은 현재까지 1000여 년 동안 불리고 있다.

천안에서 왕건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유적, 유물은 남은 게 없다. 왕건은 지명과 설화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 때문인지 지금껏 천안시는 왕건에게서 시 유래를 찾는 데 소홀했다.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이름이 태조 왕건에서 비롯된 것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

지난달엔 천안 목천읍에서 왕건 얼굴로 추정되는 동상이 발견돼(본보 6월 20, 22일자 16면 보도) 더욱 천안과 왕건의 연관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만간 문화재청이 조사를 진행할 예정으로 왕건상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지난해는 한림대 김용선 교수가 소개한 직산현 출신 최홍재(?~1135) 묘지명이 천안과 왕건의 관련성에 새 사실을 보탰다. 직산(稷山) 이름이 최홍재의 고조 할아버지 때문에 왕건이 지어준 지명이란 것이다.

묘지명 첫 머리에 “고조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양유(良儒)로 직산현 사람이다. 처음 태조가 통합할 때 양유가 같이 한마음으로 도와 공을 이뤘다. 태조가 순행하여 이 현의 북악에 이르러 양유가 사직을 지켰다고 하여(社稷之衛) 이름을 직산이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도운 여러 지방호족 중에 천안 직산의 최양유도 있었던 것이다. 최씨 성도 그때 하사됐을 것이다.

930년 왕건이 후백제 공격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천안이라 이름 지어 신도시를 만들었듯이 종래 사산(蛇山) 지역을 후백제 통일 기여에 따라 직산으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왕건은 천안 이름은 물론이고 현재 천안에 편입된 성거읍, 직산읍 이름도 직접 지었다. 작명 이유도 모두 뚜렷하다.

왕건의 흔적은 천안 절이름에도 남아있다. 고려왕이 머물렀다는 뜻의 유려왕사(留麗王寺)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적어도 이 책이 편찬된 16세기까진 천안에 존재했던 절이다.

마점사(馬占寺)는 왕건이 말을 머물게 해 이런 절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목천읍 덕전리와 지산리 사이 마점 마을이 그 절의 존재를 확인해 준다.

또 왕건과 천안의 깊은 인연을 증명하는 건 왕자성(王字城)과 고정(鼓庭), 태조사당이다. 고정은 왕자산(현 태조산) 아래에 있던 군대 연병장이다. 고려 말에 지어진 시문에서 이 세곳의 존재가 명확하게 입증된다.

천안을 세심히 보면 태조 왕건의 숨결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천안시는 지금껏 왕건을 잊고 살아왔다. 역사 흔적을 쉽게 찾기 힘든 2000년 전의 백제시조 온조에만 매달렸다. 523m 산꼭대기서 왕궁을 찾으려 돈을 쏟아부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반면 왕건과 관련이 깊은 천흥사터는 지금껏 방치했다. 석탑·당간지주가 보물로 지정돼도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와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는 9월 초 천안시가 ‘왕건과 천안’ 학술대회를 열기로 했으니 뭔가 달라질 거란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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