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歷史 探訪

[스크랩] 오서산 탐방...백제부흥군 복신굴~광천시장~오천항

吾心竹--오심죽-- 2012. 11. 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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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뱅이 남성(南城)재 토성(土城)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학성(鶴城)과 석성(石城)의 서쪽 6㎞ 거리에 위치하는 장곡면 광성리(長谷面 廣成里) 참뱅이 부락의 북쪽 구릉에 있는 토성(土城)이다. 
오서산(烏棲山)의 북록(北麓) 넓은 분지에 위치한다. 성 안에 적석총(積石塚) 3기(基)가 있다. 
북쪽 5㎞쯤에서 광천(廣川)을 통하여 천수만(淺水灣)으로 통하고, 북으로는 삽천(揷川 - 金馬川 - 揷橋川)을 통하여 아산만(牙山灣)으로 통한다.

 1) 마한(馬韓)무렵의 ‘참뱅이성’으로서 BC 1세기초무렵 진번국(眞番國)의 수읍(首邑)이다.
 2) 백제무렵 백제의 수도가 한강변(漢江邊)의 한성(漢城)으로부터 웅진(熊津 ; 지금의 公州)으로 천도하던 무렵의 <方-얼방-얼라방-王官>으로써 지방호족(地方豪族) 진씨(眞氏)의 본거지였다고 생각된다.
 3) 고려 때는 여양(驪陽=黎陽)현의 읍
 4)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천지기(天智紀) (663년 9월조)의 《枕服岐城-チムフ(←일어수정요함)クキ城》...<출처:홍성문화관광 홍성이야기>

 

 

 

 

 

 

 

 

 

 

 

 

 

 

 

 

 

 

 

 

 

 

 

 

 

 

 

 

 

 

 

 

  

 

 

 

 

 

 

 

 

 

 

 

 

 

 

 

 

 

 

 

오서산(烏捿山) 지명유래

 

해발 791m인 오서산은 ‘평지돌출형산’으로서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위용과 기상이 빼어나고 신령스런 기운을 지닌 호서제일의 영산(靈山)이다.

 

『삼국사기』권32에 오서악(烏西岳)이라고 기록되어있고, 당시에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나누어 국가차원의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백제 때는 오산(烏山)으로 불리며 대사 격에 해당되었고 통일신라에 와서는 중사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중국지리서인 『한원』의 백제전에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오산(烏山:오서산)과 계람산(鷄藍山:계룡산)을 소개하고 있으며 정암사(淨巖寺) 중수기에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에 버금가는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으로 수륙(水陸)의 기운이 크게 맞닿아 중천(中天)에 우뚝 여유 있게 솟아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오산 또는 오서악으로 불리며 민족의 영산으로서 태양숭배사상과 산악신앙의 중심이 되어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오서산(烏栖[棲]山)으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오서산이 단군조선에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받들어진 것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물론 그 정기와 위용이 “태양 안에는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우리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천 오서산(烏棲山)이 백제 때는 오산(烏山)으로 불렸고, 산에 흐르는 영험함 덕에 국가적 중요한 행사가 있을 시 성대한 제사 의식이 치러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내용은 광천읍사무소에서 지난 1일 홍성역사연구모임이 주최한 ‘오서산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에 관한 학술 토론회’ 중 홍성역사연구모임 조원찬(갈산고 교사) 연구위원에 의해 발제됐다.

 

조원찬 연구위원은 “백제는 기우제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초기부터 산악숭배 신앙이 있었다”며 “신성한 산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오산은 3산5악 중 북악에 해당돼 산 주변 군·현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신앙을 결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오산의 영향력은 통일신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고 전했다.

 

조원찬 위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발췌한 내용을 살펴보면 오성산(烏聖山)이라 하여 영산(靈山)으로 숭배됐던 모습도 남아있지만, 통일신라시대 때 불렸던 오서악의 ‘西’자에 ‘木’자가 합쳐져 ‘栖(깃들일 서, 棲자의 간자체)’자가 됐고, ‘棲(깃들일 서)’자로 바뀌어 역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잘못 전해지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까마귀가 서식한 산, 그런데 직접 와서 보니까 까마귀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식의 잘못된 정보는 등반객들에게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며 “역사 서술 주체가 달라지면서 잠시 주변인으로 존재했지만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오서산의 역사를 바로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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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례문화원(慰禮文化院)
글쓴이 : 오심죽(吾心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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