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초도 직산, 북천안 위례ic...2012.9.25(화) 개통 >>>
* 직산 ic, 직산 위례성 ic, 북천안 위례성 ic, 북천안 위례 ic...백제 첫도읍지 위례성, 직산 입니다.
위례산성(慰禮山城...백두대간 금북정맥 능선, 해발 523m)
산성 |
위치 |
시대 |
축조방식 |
둘레 |
대표 수습유물 |
慰禮山城 |
입장면 호당리~ 북면 운용리 |
백제~통일신라 (상한 AD4C 추정) *고고학유물 |
테뫼식 |
950m |
타날문토기, 삼족기, 토제마, 우각파수호, 철겸, 철준, 백제토기, 신라 선조문 와편, 인화문토기, 고려 청자편, 조선 분청사기, 백자 등 |
수습유물 편년 상한연대 AD 4세기경으로 추정함.
백제의 타날문토기, 삼족기, 토제마, 우각파수호, 철겸, 철준, 백제토기, 통일신라의 선조문 와편 수습 성벽의 축조연대는 통일신라를 상회하지는 못할 것이다.
위례산성은 백제말~통일신라시대에 초축(初築)되었으며, 일부구간은 고려시대~조선시대 수축된 것으로 추정함.
위례산성 토성 기저부에서 출토한 목탄을 일본 교토산업대에 보내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2010±480년으로 추정함. (서울대인문학연구소, 1997)
1차 축조 시기의 뒤채움과 구지표면에서 연질 토기완과 인화문토기가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로 파악하였으며,
2차 축조 시기는 청자편과 토기류 등의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로 보았으며,
3차 축조시기는 늦은 시기의 청자편과 분청사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조선초로 파악함.
출토유물 가운데 타날문토기의 경우는 한성백제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2009~2011 발굴조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현재 위례산성은 <성거산 위례성>이라 표현한 것은 잘못이며,
<부소산 위례성>이란 표현이 옳다할 것이다.
직산현지 역시 “위례성이 성거산”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서울대 규장각 조선시대 고지도에도 부소산, 부소령, 부소문이, 부수문이 등의 지명이 있고, 현재의 지명유래 역시 남아있다.
백제초도 역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서라도 사실의 기록은 보존되어야 한다.
백제초도사 문헌사학의 부족한 부분은 고고학적 유물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헌사학의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위치논쟁에 대한 학술회의, 세미나, 토론회 등 갑론을박은 말싸움에 지나지 않고, 수많은 추론과 가정, 각자 제주장에 근거해 하남위례성, 하북위례성을 주장할 뿐이므로 고고학 유물, 유적을 토대로 과학적 접근과 이해가 위례성 백제초도를 입증할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해발 523m의 위례산성은 왕궁성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며, 위례산성 아래 성거읍 천흥리~저리~모전리~오색당리~삼곡리, 입장면 호당리~시장리 주변, 직산읍 판정리~남산리~군동리~군서리 지역의 평지성에 주목하여 검토해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위례산성 아래 평야지대의 산성 유적과 고고학 유물에 눈을 돌려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인데 예나 이제나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를 간과했다.
이제라도 위례산성 아래 평지성에 대한 주도면밀한 조사와 검토를 통해서만이
<천안 직산 하남위례성>의 역사는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광주 이성산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그동안 사학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도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란 결정적 고고학적 유물은 수습하지 못했다.
위례산성의 발굴 역시 천안시의 재정부족으로 전면적인 발굴을 못해 아쉽지만 언젠가 재정 여유가 생기면 전면적인 재발굴이 이루어져 위례성의 역사를 재조명하기를 바랄뿐이다.
천안시 역시 인구집중에 따른 도시화, 공업화에 주변지역 유물, 유적이 파괴 멸실되고 있다. <천안시 문화유적 지도>를 수정, 보완하여 개발에 따른 문화유적의 무분별한 훼손은 막아야 한다.
직산위례성이 백제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됨에도 불구하고 백제초도 기원전후의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될만한 단서에 주목하여 찾지 않고, 발견된 다른 고고학적 유물, 유구, 유적으로 <위례성=직산이 아니다>라 단정하거나, 폄훼하는 학문적 접근태도는 버려야 할 것이다. 특히 위례성에서 발굴된 타날문토기 역시 기원전후~3세기에 사용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인 줄로 아는데 타날문토기의 편년연대를 백제후기로 잡고 백제초도 위례성을 서울시 풍납토성 인근으로 초점을 맞추어 고증하려는 학문적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위례산성과 천안 입장~북면의 부소산(459.1m...금북정맥)은 직산관아에서 바라보면 동지와 설날엔 성거산, 위례산성에서 해가 뜨고, 단오와 하지엔 좌성산(서운산)에서 해가 뜬다.
1년의 시작 새해 첫날인 설날, 정월 초하루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일출봉(日出峯)이며, 거룩한 성산(聖山)이며, 서해바다 아산만에서도 훤히 잘 보이는 직산의 랜드마크이며, 백제초도 위례성은 등대 불빛과 같은 상징적 의미인 왕성(王城)의 진산(鎭山)인 것이다. 서운산(좌성산)~부소산~위례산성~성거산성(우성산)은 해가 솟는 신령스런 산인 것이다.
서울 풍납토성 인근, 광주 고골 동쪽 검단산처럼 쌍둥이 지형의 산이 바로 위례산성이다.
* 문성(文城...백두대간 금북정맥 직산지맥, 해발 약80~90m)
산성 |
위치 |
시대 |
축조방식 |
둘레 |
대표 수습유물 |
文城 (農城) |
성거읍 문덕리~ 정촌리 |
초기백제 |
자연지형 |
700m |
타날문토기, 무문토기편
|
◎ 문성(文城)은 그간 그 어떤 기록문헌에도 남아있지 않고,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직산현지(1899년) 산천조에 <현 남쪽 10리에 있다>고 짧게 기록되었고, 성지편, 고적편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백제초도라 전해지는 위례산성의 수차례 발굴에 의심을 품고,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왕성=평지성>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역사적으로 백제의 도읍 형승이 북대천수(北帶川水)의 지형됨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다가 그렇다면 직산 땅 어딘가에도 비슷한 지형을 추적하게 되었다.
북대천수의 지형으로 그간 사학계에선 성환읍 안궁리(양양리+궁리), 도하리(도감리+하리)를 위례성 혹은 마한의 도읍지 등으로 추정하였던바 일리는 있으나 험준함이 약해서 항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일제시대 신문 직산사금광 기사를 검색하다가 “사금 채취시 입장면 용정리 한천 강바닥 약10m 지점에서 고대 뱃조각(주즙)들이 발견되어 백제 위례성시대엔 강바닥이 매우 깊어 배가 통행했을 가능성이 있다“에 주목했다.
*한천(漢川,大川)...아산만~안성천~도하리~입장 용정리~성거읍 문덕리~요방리.
성거 모곶(모전리, 일명 띄우지, 띠우지), 대문앞들, 천흥바다들, 신두(섶머리,섬머리),
모시울(저리), 만호들, 도토생이(도토성) 등 기록문헌에도 없는 동네 어른신들의 마을 지명유래를 추적하다가 <도토생이>에 주목하고, 직산현지에 기록된 저성(猪城)의 순우릿말이 도토성, 톹성임을 알게 되었다.
토토성(저성) 주변 1~2km 지역의 정밀지표조사를 매주말 답사하며 발품을 팔았다.
문성은 경부고속도로와 접해있고,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최근까지 성환활주로 공군비행장으로 사용 되었던 곳이고, 성거읍 문성리란 지명이 있을뿐, 성터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장마철이라 잡풀과 잡목이 얽혀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민묘 이장 터에서 우연히 토기편을 주워왔는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감정결과 타날문토기편으로 기원전후~AD3,4세기를 추정한다. 몇 차례 재방문하면서 수습한 타날문토기 및 무문토기편 등 유물을 몇몇 교수들에게 의뢰 감정한 결과 놀랍게도 제작기법, 태토상태 등등으로 편년연대가 BC3C~AD3,4C로 추정하였다.
문성은 나지막한 동네 뒷산이며 주변엔 넓은 들판이 있다.
오목한 자연지형이며 동북향 C자형이다. 둘레 650~700m정도이며 동쪽으로 흐르는 한천(漢川)은 자연해자처럼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건너편 동쪽 위례산성 5.5km, 성거산성 4.7km, 서북 사산성 4km지점에 위치한다.
문성(文城)이라 기록되었지만 지명유래를 종합 검토하여 추정하면
대문, 관문의 성-문성(門城)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거읍 모전리(모곶)의 대문앞들, 대문안 방죽, 모시울 만호들이 이를 방증한다.
문성이 위치한 성거읍 문덕리, 정촌리, 삼곡리, 직산 남산리, 판정리, 입장의 호당리, 시장리 일대는 백두대간 금북정맥이 동북~남서쪽으로 막혀 천험을 이루며 아산만 수계의 최상류에 위치하며, 영인지맥과 교차하고 천안 원성천~봉호천~곡교천~ 삽교천 수계의 최상류가 분수하는 분수령이다.
고대의 산성들은 수계(水界)의 최상류에 입지해야만 적의 공격에 안전할 수 있다.
위례산성 바로 밑 성거읍 모곶(茅串) 대문앞들~문성까지 일제시대 한천에서 발견된 주즙(舟葺)을 추정하여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왔다면 소형 선박을 통한 고대육로와 해상교통로가 만나는 요충지, 접경지에 문성과 위례산성이 입지한 것이다.
문성~만일령, 문성~부소문령, 문성~엽전재(협탄령), 문성~납은치, 도리치 등 서해바다 해상교통로와 당항성로 육상교통로의 중심이며,
이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천혜의 요충지에 문성이 위치한다고 볼 수 있고,
고대 강력한 세력집단이 문성주변에 세거하며 주변을 장악하며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산성(蛇山城, 성산...백두대간 금북정맥 직산지맥, 해발 176m)
산성 |
위치 |
시대 |
축조방식 |
둘레 |
대표 수습유물 |
蛇山城 (城山) |
직산읍 군동리 |
백제~신라 6C후반~7C초 추정 |
복합식판축 테뫼식, 포곡식 |
1,780m |
무문토기, 단각고배 기와편, 토기편 등 |
◎ 사산성은 일명 성산이라고 부른다.
백제초도 하남위례성이 이곳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직산현의 진산으로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능선이 성거산에서 영인지맥(아산 영인산)으로 분기하다가 단국대병원에서 성거읍 문성을 거쳐 직산읍 남산 옥녀봉, 휴류암, 매봉재를 지나 직산향교 뒤 진산이다. 용안치 능선이라 부른다.
입장면 용정리 용머리가 경부고속 용안치능선의 머리이고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이 성을 빼앗김으로써 용에서 뱀으로 격하되어 지명 역시 용안치(龍鞍峙), 용산(龍山-추정)→사산(蛇山-뱀산)으로 변화되어 위례성→사산으로 고구려 때 개명되었고, 신라 때에는 백성군(안성)의 속현으로 이어지다가 고려초 다시 직산(稷山)으로 개명되었다. 백제초도이며 왕도의 진산인 성산(城山,聖山) 대신 뱀산-사산성이라 격하된 지명을 불리는 것을 직산사람들은 그래서 싫어한다.
사산성은 테뫼식산성과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판축산성이다.
1994년 충남대학교 사산성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백제후기~통일신라기에 축성한 것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정상 테뫼식 구간은 발굴이 안되어 단정하기엔 이르다.
정상을 감싼 테뫼식 구간은 삼한, 백제초기 농성의 형식으로 축성한 듯 보이고, 포곡식보다 축성연대가 앞선다. 서해바다 아산만~안성평야의 광활한 지역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삼국사기 소나열전에도 사산성 주변에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산성 동문 입구 앞엔 직산현의 사직단이 있었다. 산정상에 뱀머리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남서쪽을 응시하는데 좀 멀리서 바라보면 뱀머리(蛇頭)의 형상을 하고 있고, 바위 위에는 누운 소(臥牛)의 형상이 있는데 소가 일어나는 날 직산은 다시 번영을 구가할거라 한다. 정상 주변에서 토기, 와편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도토성(都土城, 일명 저성-猪城...백두대간 금북정맥 직산지맥...해발 약80~90m)
산성 |
위치 |
시대 |
축조방식 |
둘레 |
대표 수습유물 |
都土城 (猪城) |
직산읍 판정리~ 성거읍 정촌리 |
백제~통일신라 6~7세기 추정 |
구릉 토축 |
400m |
타날문토기, 인화문토기 와편, 토기편 등 |
◎ 직산현지에 저성(猪城)은 현의 동남쪽 5리쯤에 있다. 토축으로 둘레 1리 가량 되는데 어느 시대에 축조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지금은 없어졌다.
저성은 우릿말로 도토성, 톹성, 돼지성이라 통상 풀이한다. (배우리-우리말연구회)
성거읍 문성부근을 지표 조사하던 중 직산의 토박이 동네 어른신들이 많이 써오던 구전지명 <도토생이>에 궁금하던 때 도토생이 어원을 추적하여 얻은 결과이다.
부친께서는 도토생이=陶土生이라 풀이하였다. 도자기를 굽던 흙을 생산하던 곳이라 풀이하였는데 명쾌하진 않았다.
도토성(都土城)=저성(猪城)=땅의 지형이 도톰하다, 돼지(톹)...저성(渚城)-물가의 성,
성거읍 삼곡리(三谷里)=시구리(우릿말)의 지명은 3개의 하천이 합수하여 붙은 명칭이므로 한천+천흥천+판정천이 합수하여 붙은 지명이다.
삼곡리(시구리) 뒷편 언덕에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안시문화유적분포지도를 근거하면 이곳이 도토성이라 전한다고 한다. 혹은 일부 주민들의 의견에 고분군이 있었다고 전하나 믿기 어렵다고 돼있어 성 터의 흔적 찾기란 매우 어렵다.
일부 토기편 등이 발견되기는 하나 편년연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좀 더 영역을 확대하여 남쪽 북천안인터체인지, 코리아나화장품공장이 있는 직산 남산리~성거 정촌리 부근까지 확대하여 유물을 수습하였지만 잡초와 잡목으로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최근 코리아나공장에서 자연생태식물공원을 조성하는 밭에서 일부 토기편, 인화문 토기편, 와편 등이 수습되어 편년을 고증한바 일부 백제 토기류 추정, 통일신라~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하였다.
직산현지의 저성=도토성의 정확한 위치는 비정키 어려워 성거읍 삼곡리~정촌리 ~직산읍 남산리(대남산) 부근으로 코리아나화장품공장 부근으로 추정할 뿐이다.
<<< 오심죽...백제초도 직산, 북천안 위례ic...2012.9.25(화) 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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