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시 정려 모음...충효열(충신, 효자, 열녀) >>>
1) ①. 입장면 용정리 진주 강씨 정려
☯소재지 :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
☯유적현황 : 정려는 직산에서 입장 쪽으로 가다가 고속도로 굴다리위로 좌회전해서 경부고속도로 변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용정리 마을의 남쪽 경부고속도로변에 경주최씨 12정려와 함께 위치한다.
정려는 동향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으며 야산의 하단 부를 정지하여 조성하였다. 정려는 2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12정려는 옆의 땅을 종인으로부터 기증받아 확장하여 증축 하였으며 구 정려 와 나란히 함께하고 있다. 좌측의 건물이 강씨의 정려인데 정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에 겹쳐 마를 한 건물로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면은 홍살로 시설하였고 좌우 측면은 반담시설을 하였으며 북벽은 목판으로 막아 그 면에 용호의 그림을 그려 놓았다. 8각 초석에 원주를 세우고 내부의 중앙에 현판 대신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효부 유인 진주 강씨 기적비(孝婦 孺人 晋州姜氏 記蹟碑)라고 각서 되어있다.
2) ②. 용정리 경주최씨 12정려
☯소재지 :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
☯유적현황 : 정려는 진주 강씨 정려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새로이 확장 하여 옆으로 옴 겨 왔다. 삼 칸의 솟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좌우 측면은 벽으로 시설을 하였다.
이 정려에는 총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면과 좌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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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정헌대부 참찬 의정부사 증시 평도공 최유경 지려 태종조 명정
(孝子 正憲大夫 參贊 議政府事 贈諡 平度公 崔有慶 之閭 太宗朝 命旌)
☯효자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행 중훈대부 백천군수 최사립 지려 중묘조 명정 (孝子 贈 通訓大夫 司憲府 執義 行 中訓大夫 白川郡守 崔斯立 之閭 中廟朝命旌)
☯효자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행 조산대부 전함사별좌 덕인지려 중묘조 명 정
(孝子 贈 通政大夫戶曹參議 行 朝散大夫 典艦司別坐 德璘之閭 中廟朝 命 旌)
☯효자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행 통훈대부 가평군수 최 덕순 지려 중묘조 정려(孝子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行 通訓大夫 加平郡守 崔德珣 之閭 中廟朝 旌閭)
☯효자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총관 행 조봉대 부 경기전참봉 최돈 지려 인조묘 명정 (孝子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 知義禁府司 五衛都摠府總官 行 朝奉大夫 慶基殿參奉 崔墩之閭 仁廟朝 命 旌)
☯효자 종사랑 최기 지려 인묘조 명정(孝子 從仕郞 崔基 之閭 仁廟朝 命旌)
☯효자 통덕랑 최극인 지려 효묘조 명정(孝子 通德郞 崔克認 之閭 孝廟朝 命 旌)
☯효자 장사랑 최계민 지려 숙묘조 명정(孝子 將使郞 崔桂旻 之閭 肅廟朝 命 旌)
☯열려 통덕랑 최혼 처 공인 평산 신씨 지려 숙묘조 명정 (烈女 通德郞 崔焜 妻 恭人 平山 申氏 之閭 肅廟朝 命旌)
☯효자 통덕랑 최종운 지려 순묘조 명정 (孝子 通德郞 崔宗運 之閭 純廟朝 命旌)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최구현 지려 상지9년 임신 2월 일 정려
(孝子 童蒙敎官 朝奉大夫 崔九鉉 之閭 上之九年 壬申 二月 日 旌閭)
☯열려 동몽교관 최구현 처 증 영인 전주이씨 지려 상지9년임신2월 일정려
(烈女 童蒙敎官 崔九鉉 妻 贈 令人全州李氏之閭 上之九年壬申二月 日旌閭)
최유경의 자는 경천(擎天)이며 극해(克諧)의 아들이다. 당숙 극충(克忠)에게 양자하였다. 성품이 지효해서 모친이 종창을 앓고 있을 땐 입으로 종기를 빨아 치료하였고, 모친이 겨울에 물고기 자시기를 원하시매 주경은 얼음을 두드리고 소리쳐 기도하니, 수일이 지나 얼음이 깨어지고 큰 물고기가 올라오므로 그것을 다려 드리니 모친의 병이 쾌유되었다. 그리고 생정 부모(生庭父母)의 병보(病報)를 듣고 매일 산을 넘어서 왕래하며 간병 하는 대 호랑이가 함께하였으며, 사리문 박에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함께하였다 한다. 이는 모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고, 그 후 시묘를 살을 적엔 예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애통함이 시종일관하였다. 대인들의 주청으로 정문을 세워 그 효를 찬양하였다.
최극인(崔克認)의 자는 인보(仁甫)요 효자 돈(墩)의 맏아들이다. 효성이 지극 하여 어려서부터 어른과 같았다 한다.
마침 부친께서 환후가 계시매 단지(斷指)를 하여 그 피를 드리니 차도가 있었고, 한해는 겨울에 모친이 병이 깊어 마지막으로 수박 잡수기를 원하니 극인은 사방으로 수박을 구하려 노력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여 뒷산에 올라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는 데, 홀연히 푸른 넝쿨에 수박 한통이 있어 극인은 하늘이 준 것 이라 것이라 생각하고 모친에게 드리니 모친의 병은 나았다.
이런 연유하여 그 산의 이름을 수박산(서과재 西瓜峙)이라 부른다. 친상3 년에 죽만을 먹고 상복 또한 벗지 않았으며 여막에서 시묘에 지성을 다하니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였다. 이 효행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효종 임금께서 들으시고 정문을 세우기를 명하니 이와 같이 살아서 정문을 받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3) ③. 입장면 가산리 토산 진보 조립 정려
☯소재지 : 천안시 입장면 가산리 1구 토산마을
☯유적현황 : 입장면 가산리 1구의 토산마을 안 남향 사면 야산 하단의 도로변에 대지를 평탄하게 조성하여 세웠다. 입장 중학교를 지나 한 참 가다보면 토산마을 입구에 입석 표지판이 있다. 마을로 진입하여 끝 부분에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갖추고 있으며 자연초석 이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면 좌우에는 홍살을 설치하고 후면엔 목판으로 벽을 만들고 벽에 2마리의 용이 싸우는 형상이 그려져 있으나 퇴색된 상태이다.
정려의 내부에는 중앙 상단에 현액이 걸려 있는데,
☯효 통정대부 조립 지문 숭정기원후 을미 사월 일 (孝子 通政大夫 趙砬 之門 崇禎 紀元後 乙未 四月 日) 라고 각서 되어있다.
정려의 좌우측에 최근에 세운 비가 있는데 좌측은
☯효부 조운형 처 강능 김씨 지비 (孝婦 趙雲瀅 妻 江陵 金氏 之碑) 이며
우측은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시 문정 진보 조공 휘 용 신도비명병서(崇綠大夫 議政府 左贊成 諡 文正 珍寶 趙公 諱 庸 神道碑命竝書)라 새겨진 신도비이 다.
조립(趙砬)은 진보인(珍寶人)이다. 고려 말의 충신 조용(趙庸)의 7세손으로 직산군 삼동면 토산리에(현재 입장면 가산리1구 도산마을) 살았다. 입이 어려서부터 출중하였고, 조모와 모친을 섬기매 의복을 손수 손질하여 봉양하였다.
나이가 36에 조모 상(祖母 喪)을 당하여 통곡하며 슬퍼함이 하늘에 닿고, 입의 나이 53세 변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마을이 퇴패하자 처자는 놔두고 노모를 업고 산속으로 들어가 난(亂)을 피했고, 오랑캐가 조립을 검거하려 했으나 그의 노모 봉양의 효성에 감격하여 그대로 내려갔다.
61세에 모친 상(母親 喪)을 당하여 때를 가리지 않고 시묘 살며 삼년상을 초종처럼 애통하였다. 71세에 이르자 부친 돌아가신지 60년이라, 부친상에 어려서 집상(執喪)을 치루지 못한 것을 애통히 여겨 기일에 초상과 여일하게 상복을 입고 슬퍼하며 술과 고기를 멀리 하였다.
이에 도 관찰사는 입의 행실을 조정에 알리어 조정에서는 세금과 부역을 면 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位階)를 내리었다. 입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진형(震亨)이 또한 효자문 세울 것을 상언하고 이어서 황구하(黃龜河)가 별도로 이 사실을 적어 올리니 마침내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었다.
직산현지에는 조 립(趙砬)은 진보인(眞寶人)이며, 고려말 충신 문정공 용(庸)의 7세손으로 삼동면 토산리에 살았다.
립(砬)이 탄생할 때부터 영리하고 기이하였는데, 나이 10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과 같이 애통하였고, 11살에 모친의 병환을 만나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려서 회생시켰다.
조모와 모친을 받들었는데, 때 묻은 의복이 있으면, 반드시 친히 빨래를 하였고 아내와 자식들이 대신하지 못하게 하였다. 모친이 기쁘지 않은 얼굴빛을 하면, 곧 회초리를 가지고 가서 ‘종아리를 때려 주소서.’하고 유쾌한 음성과 기쁜 표정을 청하였고, 일찍이 얼굴에 다급한 빛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립이 36세에 조모 상을 당하니, 몹시 슬퍼 몸부림을 하며 통곡하였고 정성과 예법을 갖추어 지극 하게하였다. 부친이 계시지 않으니 승중손(承重孫)으로서 슬픔이 더욱 더 많았던 것이다.
53세에 병자호란(1636)을 당하여 병든 모친을 등에 업은 채, 허리에다 식량을 차고 산골에 드나들면서 적병의 칼끝을 피하였는데, 하루는 갑자기 오랑캐 기병(騎兵)을 만났다. 겁탈하여 끌고 가려하므로, 립이 피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다.’고 호소하니, 그 말이 사람들을 감동 시킬 만 하였다. 오랑캐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그를 버리고 가 버렸다. 이와 같은 일이 두 세 번이나 있었으니, 강혁(江革)이 도적을 감동시켜 칼날을 피했던 것으로 더불어 물연(沕然)히 서로 비슷하였다.
사람 없는 산 속에 눈이 쌓이고 날씨가 몹시 춥기 때문에, 입이 땔나무를 구하여 불을 피우고 돌을 불에 달궈 따뜻하게 싸서 모친으로 하여금 얼어붙는 추위를 면하게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이 이러했다.
입의 나이 61세에 모친상을 당하니, 죽을 먹으면서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지 않은 채, 한 결 같이 옛 사람의 예법과 제도를 따라 삼년상을 하루와 같이 마치었다.
나이 70세가 되니 곧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지 1주갑(1주갑 ; 60년)이었다. 입이 말하기를‘남들은 모두 양친의 상복을 입는데, 나만 홀로 입지 못했으니, 이것이 자식으로서 죽을 때까지 애통한 일이다. 이제 옛 회갑을 아이가 만났으니, 거의 정겨운 일을 추억하여 펼 수 있겠다고 하였다. 곧 상복을 입고 슬퍼하며 초종 절차(初終節次)를 한 결 같이 하였으며, 두 돌이 지나도록 술과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마을사람과 친족들이 너무 노쇠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소식(素食)을 중지하도록 권고했으나, 듣지 않았고 몸은 끝내 건강했다. 사람들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앞서 본도의 관찰사가 입의 효행과 의리로써 조정에 보고하여 복호(復戶)의 명령을 내리고 또 입에게 통정대부의 품계를 가자(加資)했다. 입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진형(震亨)이 또 그 분의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바라는 말씀을 올리니, 을미년(1655)에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가 특별히 글을 올려 그 집 대문에 정표(旌表)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러 하늘이 낸 효자)’라 하였다.
그가 어버이 계신 것은 알면서 그 자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하면서죽은 뒤에야 그쳤으니, 아!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4) ①. 풍세면 가송리 송정마을 안동장씨 충 효 열 3세 정려
☯소재지 : 천안시 풍세면 가송리 440-1 송정마을 느티나무 위
☯유적현황 : 천안시내에서 광덕 방면으로 가다 보면 풍세면 남관리가 나온다. 남관리 다리에서 좌회전하여 3km 정도 가면 송정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 끝에 마을의 역사 을 말해주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마을의 정자를 대신하며 촌 노들이 쉬는 자리이다. 정려는 이 느티나무 위에 자리 한다.
정려는 매봉재라 부르는 야산아래 북향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사면은 홍살로 시설하였으며 8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려의 정면 상단에는 ‘충효열삼세(忠孝烈三世)’ 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칸마다 현판이 1개씩 걸려있다. 정면 우측부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충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훈련원정 장핵지려 숙묘조 병술명정(忠臣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 訓練院正 張翮之閭 肅廟朝 丙戌命旌)
☯효자 통사랑 행 군자감참봉 장사일 지려 상지계해명정(孝子 通仕郞 行 軍資監參奉 張士逸 之閭 上之癸亥命旌)
☯열여 충의위 장한 처 완산이씨 지려 인묘 정축 명정(烈女 忠義衛 張漢 妻 完山李氏 之閭 仁廟 丁丑 命旌)
장핵(張翮)은 선조1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하였으며 그 후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왔다. 그러던 중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아 죽산과 진천사이에 방어진을 치고 적을 맞아 피나는 싸움을 하였다. 악전고투하여 수많은 적을 무찔렀으나 내외종서 박씨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함을 보고 분개하여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분전하다가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 장사일은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전쟁터로 달려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대성통곡하였다.
장사일(張士逸)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인 장핵의 큰 아들로 써 어려서부터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였고 담력과 재기를 겸비하였다. 200여근이나 되는 돌을 200여보나 되는 거리까지 던질 수 있는 힘이 센 역사였다. 나라의 원수며 아버지의 원수인 왜적을 물리 칠 것을 결심하였다. 사일은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의병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아가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도 원수 권율에게 청하여 인수받은 군량미가 떨어졌으며 병기도 부족하게 되자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일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친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3년간 시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동안 먹지 못하고 애통한 나머지 병이 생겨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조정에서는 사일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 핵은 충신이요 아들 사일은 효자라 하여 정문을 내렸다.
또한 사일의 조카며느리 열녀 전주이씨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이복림의 따님인데 역시 효성이 극진하였다.
2대에 걸쳐 가정은 생각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보니 가산은 탕진하고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다 못해 머리를 잘라 식량을 마련하니 세상에 없는 효부라 칭찬하였다.
그 후 병자호란을 만나 온가족이 목천의 흑성산에 있는 토굴로 피신하였다. 밖에는 호병들이 찾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울기 시작하였다. 위험을 느낀 이 씨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으나 굶은 사람이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이가 더욱 소리 높여 젖을 물고 우르니 발각될까 두려워 어린아이에게 빈 젖을 물린 채 꾹 누르고 있어 어린 아이는 질식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오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 씨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호병의 앞을 가로 막았다. 이 씨는 남편에게 도망가게 하고 이 씨는 말에서 떨어지니 호병은 다시 이 씨를 말에 태웠다. 그 순간에 남편은 도망하니 이 씨는 호병의 칼을 빼앗아 자결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핵을 의금부사로 증직하고 장사일을 통사랑을 증직하였으며 열녀 이 씨와 함께 삼세 충효열 정문을 천원군 풍세면 가송리 에 세우니 모든 사람들이 이들이 아름답고 충효로운 넋을 기리고 있다.
이 자료는 엣 1982년 천원군청에서 발행한 천원실록에서 발취한 것으로 일부분 교정 하였습니다. 김종식
안동장씨삼세 충,효,열전(安東張氏三世忠孝烈傳)
1592년 壬辰4월에 왜군이 소서행장(小西行長) 휘하일진(麾下一陣)을 선두로 부산에 上陸하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후속 부대가 뒤따라 조선을 침략하니 왜적의 수가 15만이나 되었다.
갑작스레 왜군을 맞아 조선의 관군들이 나아가 분전(奮戰)을 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적의 위세에 밀려 20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宣祖는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끼지 몽진(蒙塵)을 하여야 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할 때 천안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내려와 막 삼년상을 마친 장핵(張翮)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관직을 벗어나 삼년을 채울 때까지 집에 있는 관례가 있었다)
이분이 바로 義兵將 忠臣公 이시다. 먼저 공의 집안을 살펴보면 15세 사길(思吉)조가 태조조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신데 공의 7대 조이시고 16세 哲祖가 정정조 정사이등공신(定社二等功臣)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6대조이며 17세 영변부사(寧邊府使) 치경(致卿)공이 5대조 가되시고 18세 갑산군수 진충(進忠)가 고조이며 19세 大護軍 득기(得紀)조가 증조부가 되시고 20세 할아버지는 內禁衛將 훈(訓)공이고 21세 순경(舜卿) 부호군(副護軍)이 아버지시니 대대로 관직(官職)을 이어오는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시었다.
공께서 1583년 계미(癸未)에 35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임명된 무관(武官)이었다.
창졸간(倉卒間)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태로워지자 나라의 록(祿)을 먹은 武官이 할 일이 무엇인가 분연(奮然)히 일어나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500여 軍士로 그해 10월부터 충청도 죽산(竹山)과 진천(鎭川)에 陣을 치고 왜적과 교전(交戰)하여 수차 많은 적병을 격살(擊殺)하는 전과를 올리었다. 다음해 3월18일 왜군과 치열한 전투 중에 평소 아끼고 사랑하던 부장(部長) 박병(朴炳)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니 (박병은 외종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출신(出身)이었다.)
그의 시신(屍身)이라도 고향으로 옮겨 묻어주려고 말에 실어 오려는데 잠복하고 있던 적병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즉시 옷을 벗어 손가락을 잘라 사국(死國)아라 혈서를 써 깃발을 세우고 달려드는 적병들을 베었다.
싸움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하나가 쓰러지면 또 하나가 달려들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기진하여 마침내 장열히 전사하시니 같은 마을에 단옥근(段玉根)이란 사람이 이를 목격하고 도망쳐 달려와 본대로 이 비보를 전했다. 참으로 원통(寃痛)하고 애석(哀惜)한 일이었다.
1706년 숙정32년 의병장 장핵의 충절정려(忠節旌閭를 세우라 命이 내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추증(追增)되시었다.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장자 사일(士逸)이 들었다. 사일은 19살로 힘이 장사(壯士) 이었으니 200근이나 되는 돌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매우 용맹(勇猛)하였다. 아버지 잃은 슬픔을 뒤로 미루고 남은 의군을 수습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怨讐) 나라의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났다. 사일공은 나라위해 죽겠다고 맹서하고 부인의 옷을 속에 입고 또 비단치마로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가족과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것으로 표를 삼아 나의 시신(屍身)임을 알고 찾아 묻어 다오” 하였다.
공은 부친의 상중(喪中)이라 검은 상복(喪服)을 입고 군사(軍士)를 지휘하였다. 공의 행적(行蹟)은 1593년 5월21일에 청도도원수(靑道都元帥) 권율장군(權慄將軍)이 보낸 답신에서 “장핵이 전사한 것이 슬프다. 장사일이 복수 하겠다는 뜻을 가상히 여긴다. 와신상담(臥薪嘗膽)마음을 다하라.”하였다. 이로서 확실한 증거가 된다.
공은 왜적(倭敵)을 모두 베고 아버지 따라 전사하려고 결의(決意)했었다.
그러나 왜적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버지께 죄인이라 생각되어 묘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 사리를 하며 매일 통곡하다가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고 마침내 병이 나고 일어나지 못하고 1595년 을미(乙未) 9월1일 아버지를 따라 이 세상과 하직 하였다. 공은 통사랑(通士郞) 행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이시고 향천(鄕薦)으로 1743년 영조 19년에 효행(孝行)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열녀 이씨전(烈女 李氏傳)
이씨는 양령대군의 후손(後孫) 천안 대동(大東) 사람 이복립(李復立)의 딸인데 타고난 性品이 지극히 孝誠스러워 정성을 다하여 父母를 섬기다 21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張 翮의 손자 장한(張漢)에게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 장사준 훈련원직장(訓練院直長)이 임시 목천에 가서 살게 되자 따라가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精誠을 다해 섬기었다.
가난한 살림에 父母를 奉養하기 어려우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음식을 장만하고 언제나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어 아무도 모르게 하였는데 일년이 채 안되어도 머리가 예전같이 길게 자라니 그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기이하게 여기고 지극한 효성 때문이라 말했다. 이렇게 하기를 10년이나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토굴에 숨어 밥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적병(敵兵)들이 나타나 숨을 죽이고 있는데 젖먹이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 하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밖에 들리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잡혀 가게 될 터 인지라 아이에게 급히 젖을 물리고 젖으로 아이의 입을 눌러 막았다. 낌새를 안 적병이 굴 안으로 들어와 큰칼로 남편을 내려치려는 순간 이씨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몸으로 남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인에 주린 적병은 이씨를 보고 겁탈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이씨를 끌어안으려한다 이때이씨가 지기(知機)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멀리 피하도록 하고 시간(時間)을 充分이 보낸 뒤에 칼을 꺼내 자결 하였다.
비록 村婦로 깊은 學文은 안했을 것이나 시부모를 供養하고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버리고 自己의 生命을 아낌없이 바친 烈女이엇다.
어찌 이일이 萬世에 귀감(龜鑑)이 아니리요
1637년 인조 15년에 열녀이씨(烈女李氏)의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이 내리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송정리 수령 300년은 넘었을 느티나무 십여 그루 숲에 고색(古色)짙은 충효열삼세 정문 어찌 안동장문의 자랑 만이겠는가 悠久한 歷史와 함께 찬란(燦爛)히 빛나리라.
5) ②. 남관리 공사마을 창원유씨 4정려
☯소재지 : 천안시 풍세면 남관리 공사마을
☯유적현황 : 정려는 남관리 다리에서 우회전해서 600m정도 가면 공사마을 입구 노송이 우거진 개수봉아래 도로변에 위치한다.
정려는 서향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는데 야산의 하단부에 노송을 잘 살려 대지를 조성하여 다듬은 석재로 기단을 만들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이다.
방풍판을 시설하였고 4면은 홍살을 돌렸는데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8각 고 추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건축하였다. 정면 에는 중수기가 걸려있으며 내부에는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의 내용을 정면 좌측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효자 통정대부 호조정랑 유언겸 지문 중종 십이년 병술 삼월 일 명정(孝子 通政大夫 戶曹正郞 兪彦謙 之門 中宗 十二年 丙戌 三月 日 命旌)
☯열여 유언겸 처 호 칠비 지문 중종 십이년 병술 삼월일 명정(烈女 兪彦謙 妻 號 七非 之門 中宗 十二年 丙戌 三月 日 命旌)
☯효자 사옹원 봉사 유경인 지문 숙종사년 무오 이월일 명정(孝子 司甕院奉 事 兪敬仁 之門 肅宗 四年 戊午 二月 日 命旌)
☯효자 사첨시 참봉 유명입 지문 영종삼년 병오 팔월 일명정(孝子 司瞻寺 參 奉 兪名立 之門 英宗三年 丙午 八月 日 命旌)
정랑 유언겸은(正郞 柳彦謙) 자는 겸지(謙之)요 병진생(丙辰生)이다. 어려서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처 예의를 오로지 하였다.
자라서 부친상을 추모하여 초상 때와 같이 애통함을 마지않고 3년을 다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장례와 예절을 한결 같이 예문에 따르고 시묘를 살며 한번도 집에 이른 일이 없어 피눈물로 3년을 보냈다. 여막에는 두 마리 호랑이가 지키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같이 하며 지냈다, 또한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장계가 조정에 들리니 정문을 향리에 세우고 복호(復戶)를 명하고 관직을 제수하였다.
용담 인제 신계(龍潭 麟蹄 新溪)에서 군수를 역임하고 나이 63세에 이르러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졸하였다. 공은 청빈하여 4군의 군수를 지냈으나 재산이라곤 없어서 식솔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열여 칠비(烈女七非)는 황해도 귀산의 관노였다. 일찍이 타인의 문중에 출가하더니 오래지 않아 혼자되어 수절하여 깨끗이 지킴을 듣고 정랑공 언겸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부인으로 삼아 서로 존경하였다.
칠비는 정랑공의 문중에 들어와 서로 공경(恭敬)하며 한번도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정랑공이 병을 얻어 위급 할 적에 주야로 간병함에 하늘에 빌며 밤 낫이 없었다.
3년이 지나 상복을 벗으매(복결 服闋)함에 손으로 그 머리를 잘라 그 몸을 스스로 허물며 정조를 지키며 처음과 같으니 모두 장하게 여기어 장계를 들이니 조정에서는 정문과 세금과 부역을 면하는 은전을 내리었다.
유경인(柳敬仁)의 자는 영신(榮伸)이요 을유생(乙酉生)이며 정랑 유언겸 아들이다. 부모를 섬기매 효성을 다하고 집이 가난하다 하여 음식을 받드는데 술과 고기를 거른 적이 반드시 없었다. 부친상에 손을 째어 피를 드리고 슬피 울며 절통하기를 따를 자가 없었고 장례절차는 한결같이 예문에 따랐다.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하였으며 간장과 소금도 먹지 않았으며 시묘(侍墓)를 살매 한 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다. 집에 아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여사(廬舍)에 앉아 가보지 않았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세금과 부역을 면 하는 은전이 내리였다.
유명립(柳名立)의 자는 현백(顯伯) 이니 경인의 아들 이오, 정랑공 의 손자이다. 세세로 천안에 살았으며 명립이 부모를 봉양함에 힘을 써 그 마음을 기쁘게 했다.
상(喪)에 3년을 피를 토하며 울기를 똑 같이 하니 주위 사람들을 애통하게 하였으며 모두 보는 자 탄복치 않는 자 없었다.
김세렴(金世濂)이 암행어사로 천안을 지나다가 명립의 행위로 듣고 명립을 찾아보니 기상이 온아하고 풍채가 동인하며 더욱이 경중한 것을 보고 그 효행을 들어 조정에 천거하여 조정에서는 즉시 참봉을 제수하니 때는 인조 11년 2월이요 명립의 년기가 61때였다.
벼슬에 별반 즐겨하지 않아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줄기다 떠나니 향년 89세요 현종(顯宗) 2년이었다.
6) ③. 풍세면 용정3리(용머리) 채주영의 정려
☯소재지 : 천안시 풍세면 용정 3리 용머리
☯유적현황 : 용머리 마을 입구 슈퍼 있는데서 산 아래 마을 쪽 으로 100여m 떨어진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하였다. 4면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8각 고주초석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의 내부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에는
효자 통덕랑 채주영 지려 갑인 정려(孝子 通德郞 蔡冑永 之閭 甲寅 旌閭)
라고 적혀 있다. 현판도 똑같이 되어 있다. 특별한 전설은 없으며 평상시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채주영은 부친 섬기기에 극진하여 가을에 알밤을 주어다 모아서 구덩이에 묻어두고 저녁마다 서너 개 씩 꺼내어 구워 부친께 드렸는데 밤이 3년간 줄지 않고 계속 있어 이를 이상히 여겨 파보니 쥐 길이 나 있었다. 미물인 쥐도 효에 감동하여 매일 밤을 물어다 쌓아 놓아 밤이 줄지 않았다 한다.
7) ④. 풍세면 보성리 기계 유후양의 정문
☯소재지 : 천안시 풍세면 보성리
☯유적현황 : 보성마을 입구에서 북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 건물은 8각의 고추주석에 원형의 기둥으로 맛 배 지붕으로 되어있는데 최근에 중수한 것으로 확인되며 홍살을 설치한 2칸의 정문으로 내부의 현액에
효자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유후양 지문(孝子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兪後揚 之門)
효자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 유응채 지문(孝子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兪應采 之門)
이라는 각서가 있으며 이는 상지십년(上之十年)에 임금이 명으로(命旌)세웠다는 내용을 아울러 병서하고 있다. 정문의 주인공인 후양은 정랑 언겸의 후손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자라서 선친의 묘소를 밀리(密邇)하여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되 풍설을 피하지 않기를 늙어 움직일 수 없을 때 까지 하였다.
모친을 지성으로 봉양하여 밤마다 문안드리고 ,모친 앞에서는 짐승들과 종복도 꾸짖지 않고 항상 안색을 웃는 낫으로 하였다. 부친의 기일을 당하면 애통해하며 통곡하기를 초상(初喪)때와 같이 하니 이웃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모친의 뜻을 받들어 외조부모를 모셨는데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어머니 섬기듯 하였고 국상(國喪)에는 아침저녁으로 망곡(望哭)하고 3년 동안 소식(素食)하였으며 국기(國忌)를 당하면 목욕 재게 하고 3일간 소식하였다.
사부(師傅)의 상을 당하여는 심상(心喪)3년을 행하고 벗이 죽으면 3일 동안 좋은 음식을 하지 않았으며 친족에 화목하고 이웃에 후덕하여 언행이 효제(孝悌)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8) ⑤. 풍세면 풍서리 박종덕 정문
☯소재지 : 천안시 풍세면 풍서리
☯유적현황 : 풍세면에서 파출소 옆 큰 길로 해서 한 500m 정도 가면 박승용씨 댁에 현대식 콘크리트 스라브에 철 대문 2개를 하고 왼쪽 것엔 정문의 현판이 걸려있고 오른쪽으로 사람들이 왕래한다.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박종덕 지문 금상 28년 신묘12월 명정(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朴鍾德 之門 今上 28年 辛卯12月 命旌) 란 현판만 옛 것이 걸려있다.
효행의 실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
광덕면
9) ①. 광덕면 매당리 쇠골 고흥 유언의 정려
☯소재지 :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하금곡
☯유적현황 : 풍세면에서 광덕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매당리의 하금곡 쇠골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쇠골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조금가면 마을 회관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에 주차하고 오른쪽으로 다시 걸어서 200여m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있다. 정려는 남 동향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는데 주변을 철책으로 보호시설을 한 후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하여 세웠다. 정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4면은 홍살을 시설 하였다. 원형의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내부의 중앙 상단에 현판을 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자 통정대부 유언지려 숙묘9년 계해 십월일 명정 금상12년갑신3월초9월일 중 갈(孝子 通政大夫 柳堰之閭 肅廟九年癸亥十月日 命旌 今上二十年甲申三月初九月日 中褐)
유 언 (柳堰)은 천안 원일면(지금의 광덕면 매당리1구 쇠골 또는 금곡이다) 사람이니 갑오생(甲午)이다. 모친 정씨가 중병이 있었는데 늘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느 날 모친이 기절해 언(堰)은 망극하여 칼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얼마 후에 병이 나았다.
갑인 8월에 모친이 또 기절하니 기유(己酉)때와 같이 작지주혈(斫指注血)하고, 다음 해 8월에 모친이 또 기절하니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으나 모친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언은 애통하여 마지않고 늘 묘에서 통곡(痛哭)하면서도 돌아와서는 병든 부친께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여 뜻을 모아 현감에게 아뢴 지 1년여인 계해(癸亥) 10월에 정문을 세워 이곳을 오가는 모든 이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10) ②. 광덕면 매당리 고흥유씨 4정문
☯소재지 :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유적현황 : 광덕면 매당리 당하리에 있는 유청신 사당에서 남쪽으로 충효산 구릉의 동쪽 방향을 다듬어 세워 젖다.
정려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있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자연 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내부에는 4매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효자 고려 선충동덕 좌리익조공신 삼한삼중 대광 도참의 정승 판의부사 고흥부원군 증시 영밀공 유청신 지려 려조 정려(孝子 高麗 宜忠同德 佐理翊祚功臣 三韓三重 大匡 都參議 政丞 判宜府事 高興府院君 贈諡 英密公 柳淸臣 之閭 麗朝 旌閭)
충신 효자 유명조선국 효충장 적의 협력 선무 원종공신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행 어모장군 훈련원첨정 유의신 지려 영종 임술 삼월 명정(忠臣 孝子 有明朝鮮國 效忠仗 迪毅 協力 宣武 原從功臣 贈 通政大夫 戶曹參議 行 禦侮將軍 訓練院僉正 柳義臣 之閭 英宗 壬戌 三月 命旌)
효자 학생 유연지려 영종임술 삼월 명정(孝子 學生 柳淵之閭 英宗 壬戌 三月 命旌)
효자 수의부위 유흥우 지려 영종임술 명정 당저 기미 삼월 중수(孝子 修義副尉 柳興雨 之閭 英宗 壬戌 命旌 當宁 己未 三月 重修)
라고 되어있다.
유청신(柳淸臣)은 고흥(高興)사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승무(門下侍郞 平章事 升茂)의 아들이며 은청광록대부 평장사 판호부사 상장군 욱(銀靑光祿大夫 平章事 判戶部事 上將軍 昱)의 손(孫)으로 공은 선충동덕 익조공신 삼중대광 도참의 정승 판의부사(宣忠同德 翊祚功臣 三重大匡 都僉義 政丞 判宜府事)를 역임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책록 되었으며,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고려 말에 왜적들이 삼남 일대를 침범하여 마을을 어지럽게 하던 어느 날 부모를 따라 왜적을 피하여 가던 중 왜적들이 칼로 그의 어머니를 해하려 하였다. 이에 자기로 대신할 것을 원하니 적이 감동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사실이 조정에 전하여 저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나이 18살에 급제하고 충숙왕(忠肅王)때 원나라에 들어가 마침내 정승(政丞)이 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까지 책록(謮錄)하였다.
공은 연저(燕氐연길)에서 졸하였다.
사우(祠宇)와 정려(旌閭)가 천안시 광덕면 매당3리 에 현존하고 정려가 있는 곳을 충효산 이라 부른다. 전하여 오기를 에 천안의 호도의 종자를 원나라에서 은밀히 가져왔다고 하나 믿을 만한 자료와 문헌이 없다.
유의신(柳義臣)의 자는 언정(彦正)이며 천안 광덕 사람이다. 의신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향당(鄕黨)에 칭송이 자자하더니 선조16년 계미(宣祖16年 癸未1583)에 무과에 급제하며 선조24년(1591辛卯)에는 이진(利津)의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년(壬辰年)에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전남우수사 이억기(全南右水使 李億祺)는 황급히 관하장사들 에게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물으니 의신은 사리에 지당하고 용병(用兵)에 합리한 방책을 상세히 진언(進言)하고, 의신은 선봉장(先鋒將)으로 훈련도 되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가덕포(加德浦)앞 에서 대적(對敵)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 크게 승첩하여 이에 조정에서벼슬을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 올렸다.
의신은 다시 웅천포(熊川浦)싸움에서 또한 크게 승리하니 벼슬을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특진시켜 그 공을 치하하였다.
왜적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다가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이름 높은 한산도 해전(閑山島海戰)에 참전하여 혼신을 다하여 적을 베고 싸우다 불행히 하여 적의 탄환에 맞아 순절(殉節)하면서 그의 아들 연(淵)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연(淵)의 나이는 19세로 약관(弱冠)이나 부친의 소임을 능히 감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과 훈을(功勳) 책정 할 적에 의신은 선무원종1등공신과호조참의(宣武一等功臣 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부모에게 봉작(封爵)을 내리고 자손들에게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유연(柳淵)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열이 전사한 유의신의 아들이다. 연은 부친 의신과 더불어 진중에 있었는데 부친 의신이 진중에서 장졸을 독려하여 왜적을 거의 물리칠 쯤에 적의 탄환에 맞아 진중(陣中)에서 전사 하였다.
연은 부친의 지휘권을 대신하여 장졸(將卒)들을 독려하여 적을 물리치고 부친의 한을 복수 하고 부친의 시신을 반장(反葬)하여, 3년을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였다. 부친이 진중에서 왜적의 손에 전사 한 것을 한탄하여 죽을 때 까지 애회통곡(哀懷痛哭)하였다 한다. 영조 때에 와서 정문이 내리고 이언소(李彦熽)가 시장(諡狀)을 올렸는데 잘되지 않았다.
유흥우(流興雨)는 충신(忠臣) 인 의신(義臣)의 손자이며 지(池)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여서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자르는 효성이 있어서 어머니는 병이 나아서 천수를 하였다. 영조18년(1742년)에 정문이 세워지고 문간공 이희조(文簡公 李喜朝)가 문헌(文獻)을 찬(撰)하고 이언소(李彦熽)가 시장(諡狀)을 지었다
11 ③.광덕면 신흥4리 효자 지봉휘 정문
☯소재지 : 천안시 광덕면 신흥리 4구
☯유적현황 : 이 정려는 광덕면 신흥리의 4구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풍세면 매당리에서 광덕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가 큰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좁은 길을 따라가면 논산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신흥4리 경노당이 나온다. 경노당 에다 차를 세우고 몇 발자국 걸어가면 붉은 기와를 올린 솟은 대문이 있다. 정문은 솟은 대문 중앙에 현판 하였고 최근에 새로이 조성한 것으로 건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정문은 고종 24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현재 기와는 시멘트로 만든 기와를 올리고 있으며 그동안 수차례 증수되어 왔으므로 옛 모양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문내부에 있는 현액에는
효자 장사랑 왕자사부 지봉휘지문 성상 24년 명정 (孝子 將仕郞 王子師傅 池鳳輝 之門 聖上 二十四年 命旌)이라 각서 되어 있다.
12 ④. 광덕면 매당리 쇠골의 상뜸마을 해주오씨 정문
☯소재지 :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쇠골 또는 금곡의 상뜸 마을
☯유적현황 : 광덕면 매당리 쇠골 또는 금곡마을에서 중뜸 마을을 지나 상뜸 북쪽에 위치한 동향 사면의 계곡의 하단부에 위치한다.
이 정려는 밭 가운데를 돌로 기단을 조성한 후에 잔디를 깔아서 지반을 만들고 기단의 위에는 화강석재의 8각 초석을 놓고 원주를 올리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서 맞배지붕에 홑치마를 하고 있다,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둘렀으며, 정려 좌우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재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열여 학생 황홍인처 해주오씨 지려 성상28년 10월 일 명정(烈女 學生 黃弘仁 妻 海州吳氏 之閭 聖上二十八年 十月 日 命旌)이라고 각서 되어 있다.
천안실록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안골에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열여문(烈女門)이 있다.
그녀는 해주오씨(海州吳氏) 오 순석(吳 順石)의 딸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10여세(여세)에 황홍인(黃弘仁)에게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나이 어려서 시집을 갔지만 항상 부모(父母)님이 말하기를 시집을 가면 남편을 믿고 남편을 섬기며 일생을 사는 것이 우리나라 아내의 도리이며 또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남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정성 것 섬기지 못한 그 아내에게 있는 것이 라고 교훈(敎訓)을 받아서 오씨(吳氏)는 시집을 와서 이집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성 것 가업(家業)에 종사하였다.
새벽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곤히 잠든 부군(夫君)이 잠에서 깨여날 까봐 방문도 조심성 있게 열었으며 새벽 일찍 부엌으로 나와서 살림을 챙기며 일을 시작하니 가족들이 말하기를
“아기가 벌써 일어났군!”
하고 위 사람이 말한 그 말이 이웃마을까지 통용서(通用서)가 되었다 한다.
사람이란 부지런하면 가난이 있을 리 없고 남을 사랑함을 자기의 몸의 귀중함에 비교하면 남과 다투는 일이 있을 수 없다하니 그녀는 한층 나아가서 생각하기를 사람의 몸은 자주 움직일수록 부지런해지고 남과 다투는 일은 자기의 소양이 부족한데서 나온다고 생각하고선 하루 종일 움직여서 집안을 보살피니 집안은 깨끗하고 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니 위 사람들은 그녀를 가르켜 효부라 하였고 아래 사람들께는 사랑으로 일을 도와주니 그녀를 따르는 아랫사람들의 수효가 많았었다 한다.
그녀는 부지런히 일하며 단락한 생활을 꾸며 온지 몇 해되던 해 그녀는 19세에 아이를 갖게 되자 집안사람들은 말하기를 착한 아내에게 자식(子息)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기뻐했었다. 그녀가 자식(자식)을 가짐으로서 더욱 부부간의 정이 두터워지는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일까? 그녀의 부군(夫君)이 병석(病席)에 눕더니 자리에 누운 지 얼마 않 되어 죽고 말았다.
하늘같이 믿고 살아왔던 부군(夫君)이 죽으니 그녀의 시름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 그녀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어째서 나만 남겨놓고 죽느냐고 시신(屍身)을 붙들고 통곡하였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대답이 있을 것인가? 그녀는 생각하기를 부군(副群)이 죽었으니 자기도 따라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안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미리 목을 매달아 죽을 장소까지 마련했었다.
밤이 이슥하여 초상을 치른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목을 매달아 죽어서 부군(夫君)의 뒤를 따라야겠다고 큰 대들보에 새끼를 걸쳐놓고 목을 매달으려고 하다가 언뜻 생각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집 대(代)가 끊기는데 대(代)를 이을 사람이 없구나.
하곤 자식(子息)을 잘 길러서 대(代)를 이어주는 것도 부군(夫君)에게 바치는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머금고 죽기를 그만 두었었다.
부군 황홍인(黃弘仁)이 죽은 다음날에 그는 자식(子息)을 낳으니 그 자식(子息)은 아들 이였다. 그녀는 아들을 잘 키워서 집안 대(代)를 이어야겠다고 마치 금을 다르듯 자식을 키워나갔다.
허나 자식(子息)을 키워서 집안을 일으키고 죽은 부군(夫君)에게 아내로서의 도리를 한다는 것은 그녀의 생각 이였다.
그녀가 아직 젊음에 부군(夫君)이 죽었으니 그녀가 개가(改嫁)하여야 한다고 친정에서부터 들고 일어났다. 불가 20고비의 딸을 그대로 과부로 일생을 마치게 하는 것도 죄악(罪惡)이 된다고 친정집에서 들고일어났으나 그녀의 결심은 개가(改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어도 이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고민 하던 중 병(病)이 생기자 그 병을 구실로 독한 주약(注藥) 침염(針炎)을 맞으니 이제는 수족(手足)이 틀리고 음식(飮食)을 바로 분별(分別)치도 못하고 얼굴도 뒤틀려갔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아직 나이가 젊으므로 집안에서 개가(改嫁)에 대한 권장과 여러 사나이들의 강폭(强暴)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런 방법(方法)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폐인(廢人)처럼 행세(行勢)하며 앉은뱅이가 되어서 자식(子息)을 키웠다. 그렇다고 자식(子息)이 자라서 며느리를 맞이하는 아들의 결혼식(結婚式)날 그녀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가장 바라던 정일(정 一)이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실을 가져오라고 하고선 그 실을 붙잡고 일어서서 걸으니 그녀는 그날부터 걷기 시작하였다한다.
한국의 한 여인이 수절(守節)하기 위하여 독한 약을 먹고 몸이 부서져도 아랑곳없이 수절(守節)을 하며 한국의 열녀(烈女)로서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나라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종(高宗) 28년에 정문(旌門)을 내리고 유몽(惟夢) 정 인창(鄭寅昌)이 선문(撰文)을 쓰고 열행(列行)을 칭송하며 여기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3) ⑤. 광덕면 매당리 당하마을 남양 서효자 3정문
☯소재지 : 천안시 광덕면 당하리 마을
☯유적현황 : 풍세 광덕으로 가다 풍세를 막 벗어나면 들 역엔 송림이 우거지고 아래에 자그마한 정자 있는 곳은 당하마을 인데 송림은 풍수의 비보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소나무를 심어 우거지면 마을에 우환이 없다 하여 조성된 것으로 일인 들이 소나무를 베어내려 할 적에 동리 주민들이 결사 반대하여 보존 되어왔으나 근자에 이르러 토지 소유자들이 그늘 된다하여 베어버려 많이 없어진 것을 시에 건의하여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도 옴겨 십고 해서 이제는 제법 송림이 되었다, 송림 맛은 편 도로변에서 서쪽으로 5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방풍판이 설치되어있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사각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에는 3매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효자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서충필 지려(孝子 折衝將軍 行 龍讓衛副護軍 徐忠弼之閭)
효자학생 서충좌지려(孝子 學生 徐忠佐 之閭)
효자 통덕랑 서한장지려(孝子 通德郞 徐漢章 之閭)
라고 되어있다.
효자 서충필(孝子 徐忠弼)의 자는 언직(彦直)이니 관향은 남양(南陽)이다. 부친 질병을 얻어 다년간 고생하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공이 둘째 아우 충좌(忠佐)와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다. 병이 위독하면 대변을 맛보아 병의 깊이를 살피었다. 그 부친이 고질병을 지니고 8순에 이른 것은 오직 아들 삼형제 효성의 소치이다.
부친이 돌아가심에 장예와 제사를 모두 예문을 따랐으며 죽으로 3년을 살았으며 애훼통곡(哀毁痛哭)하여 뼈만 남았다. 3년 탈상 후에도 집에 제당(祭堂)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약식 제사를 받들어 나이 들어 음직일수 없을 때까지 지성을 더하였다.
어머니 원씨(元氏)도 88세의 나이로 임진란(壬辰亂)에 피난할 때 널판으로 가마를 만들어(板𨏐) 모시고 갔으며 , 우애가 지극하여 마을에서 존경하는 대상이 되니 방백(方伯)이 일향의 이 같은 사실을 감사(監史)에게 전하고 조정에서 논의되어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효자 서충좌 (孝子 徐忠佐)의 자는 경직(敬直)이니 적순복위(迪順福尉) 혼(混)의 아들이며 효자 충필(忠弼)의 아우이다.
충좌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하고 올 곳어 부모를 섬기매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효제(孝悌)로서 극진하였다.
선조는 4년 신미(辛未)에 어머니 원씨가 병을 얻어 고생하며 고통이 심하니 충좌는 아버지가 병을 얻을까 염려하여 형인 충필로 하여금 업어 딴 곳에 모시고 있게 하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었다. 주야(晝夜)로 간병하더니 충좌도 어머니와 같은 병을 얻어 눕게 되었는데도 어머니의 간병은 개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어머니 원씨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충좌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부엌에 나가 칼을 잡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이는 형제의 효행을 하늘이 굽어보았다 하겠다.
서한장(徐漢章)의 자는 우천(于天)이며 천안군 원일면 사람이다. 장령(掌令)을 지낸 정연(挺然)의 아들이요 효자 충필과 충좌(忠弼과 忠佐)의 종손(從孫)이다.
아버지가 기절함에 오른쪽 4째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 어머니를 봉양함에 말씀을 한번도 거스른 적이 없고 음식도 달고 맛 나는 것은 어머니를 우선하였다. 또한 매일 일찍 일어나서 사당(祠堂)에 배례(拜禮)하고 저녁때 또한 갓이 하였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병을 얻었을 때에도 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상(喪)을 당하여 겨울에 오래 머문 것이 병이 되어 상복을 벗은 후 5월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38세요. 때는 숙종4년 무오년(肅宗 四年 戊午) 이였다.
그 후 18년인 숙종 21년에 순무사(巡撫使) 송광윤(宋光潤)이 장계를 올려 정문을 마을 입구에 세워 사람들은 서한장의 효행을 귀감 하도록 했다.
효행을 널리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여서 한 가문에 효행의 첩지가 여럿이라 군수 최윤이 감사에게 알리니 선조 7년 이었다.
서충우(徐忠右)는 충필 충좌의 막내 동생으로 형들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명나라에서 정문을 내리던 날에 공을 형들에게 미루고 양근(楊根)땅 부근으로 옴 겨 갔다 한다. 조정에서는 해읍(該邑)에 합복을 명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 하였다.
성남면
14) ①. 성남면 신덕리 중뜸 중화 김수필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성남면 신덕리 2구
☯유적현황 : 성남면 신덕리 중실 마을에서 서편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도로의 북측구릉 하단에 단지를 조성하여 세웠다.
정문의 주변은 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예전의 시멘트 담을 헐어내고 자연석을 이용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정려의 구조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다.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우측면은 철제로 홍살을 설치하고 후면은 막았다. 자연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려의 내부에는 북벽 상단에 현액을 달았다. 현액에는
효자 학생 김수필 지문 성상12년 임신 명정(孝子 學生 金壽弼 之門 聖上十二年 壬申 命旌) 이라 각서 되어 있다.
김수필은 중화(中和) 사람으로 어머니의병에 의원이 이르되 제비가 약에 된다고 하였다. 때가 겨울인지라 흐느껴 울며 하나님께 빌었더니 제비가 집으로 날아 들어와 잡아 썼더니 효력을 보았다.
또 하루는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피하여 바위 밑에 들어갔더니,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와 본즉 갑자기 바위가 무너졌다. 집이 가난하여 부친의 장례를 소울하게 치룬 것이 한이 되어 임종 때 아들에게 유언하되 장례 절차를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아들이 후히 갖추었더니 밤에 갑자기 불이 일어나서 상복과, 관과, 상여, 등이 다 타버렸다. 이는 하늘의 훈계라 이르며 오래도록 위의 사실들이 마을에 훈육처럼 전해오니 현감과 유림들이 천거하니 드디어 정묘(丁卯)년에 정문이 세워 젓다.
15 ②).성남면 석곡리 대양마을 경주 이규호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성남면 석곡리 대양마을
☯유적현황 : 석곡리 대양마을 입구의 북측 야산 아래로 대지를 조성하여 세워 젓다.
정문의 구조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으며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정면은 철제로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좌우 후벽은 시멘트로 벽을 발랐다. 칸마다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면 좌측에는
효자 급제 이규호지문 상지 십삼년 임술 십월 일 명정(孝子 及第 李圭祜 之門 上之 十三年 壬戌 十月 日 命旌)라고 각서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효자 급제 이규호 처 경주김씨지문 상지십삼년 임술 십월일 명정(孝子 及第 李圭祜 妻 慶州金氏 之門 上之 十三年 壬戌 十月 日 命旌)라고 각서 되어있다.
이규호(李圭祜)는 자(字)가 의원(義元) 이니 경주(慶州)가 본관이다. 영조(英祖)28년(1752)에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이정암(李廷馣)의 10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34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름은 광춘(光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천성이 아름답고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할 때 밤을 세워가며 손수 시탕하여 정성을 다하여 간병 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께 드려 그의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죄에 연좌되어 전라도 임실의 옥에 갇혀 있을 때 어머니가 병환이 나셔서 늘 걱정하매 꿈에 한 의원이 나타나 대나무를 빻아 죽을 잡수시게 하면 낫는다, 하여 이에 어머니께 보내드려 선통한 효험을 내어 완쾌 되었으나, 춘추가 높으셔서 돌아가시자 그는 어머니의 영정에서 목 놓아 울다가 격한 나머지 피를 많이 토하고 혼절하여 추운 날 이라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그의 부인 경주김씨도 남편의 장례를 법도에 준하여 엄격하게 모두 마치고 6일간이나 음식을 끊고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남편은 효에 죽고, 부인은 열에 죽으니 효자와 열부가 동시에 난 것이다.
철종 13년(1862)에 조정에서는 이 부효 부열(夫孝 婦烈)에 대한 높은 정신을 찬양하여 효와 열의 귀감으로 하여 효열정려를 동시에 내렸다.
천안실록에는 이 규호(李圭祜)의 자는 의원(義元), 본관은 경주로써 영조 28년(1752)에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이정암(李廷암)의 10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34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름은 광춘(光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천성이 아름답고 효심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병환이 위독하여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약 시종을 남에게 맡기는 일이 없이, 밤을 세워가며 손수 시탕(侍湯)하여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이 더욱 위중하여 어머니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게 되었다.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드렸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 드리니 어머니는 의식을 찾아 희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계실 때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규호는 전라도 임실(任實)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옥살이의 괴로움을 아랑곳없이 오직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고 호주(號注)을 그치지 않았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구하여 어머니의 약을 구하는데 전력하였으며 약이 구해지면 그 약을 사람을 사서 천리 길을 멀다않고 보내니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은 차도가 없어 자나 깨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한 의원이 나타나 말하기를“그대 모친의 병에는 죽순(竹筍)이 특효약”이라는 현몽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놓아 백방으로 죽순을 구하였으나 죽순의 철이 아닌지라 죽순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규호는 내 손수 구하여도 어렵거늘 장차 남의 손을 빌려 구하려 하니 얻을 도리가 있는가! 이 불효를 어찌 씻으리오 하고 길길이 울부짖어 통곡하였다.
그날 밤 지쳐서 깊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또 그 의원이 나타나서 말하기를“죽순이 없으면 대나무를 빻아 만든 죽을 잡수시게 하리로다. 그대는 너무 상심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하는 것 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잠에서 깨어나니 아침에 먼동이 트기도전에 전에 노인이 옥문에 나타나더니“내가 병이 있어 대나무를 빻아 만든 죽이 있는데 신령님의 현몽이 있어 이를 공에게 드리고자 가져왔다.” 는 것이 아닌가. 규호는 한편 놀라옵고 한편으론 그 약그릇을 받고 정중히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하고 지체 없이 어머니에게 보냈다. 과연 신통한 효험이 있어 어머니는 완쾌되었다.
그러나 워낙 춘추가 높으신지라 얼마 후에 노모는 명을 다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옥에서 부보(訃報)를 받은 그는 특별히 은전을 받아 출옥해서 천리 길을 달려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출상을 하여 그토록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영영 뵐 길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 영전에서 목 놓아 울면서 어머니를 부르다가 너무도 격한 나머지 피를 많이 토하고 기색혼절(氣色魂絶)하여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하다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고 만 것이다.
그의 부인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아주 정숙하고 덕망이 높았다. 그리도 목메어 그리던 남편이 출옥되어 집에 돌아오더니 어머니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니, 자신도 남편의 뒤를 따라 죽기로 결심하였다.
땅을 치며 통곡하며 남편의 초종장례(初終葬禮)를 모두 마치자 6일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더니 드디어 자진(自盡)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남편은 효에, 아내는 열(烈)에 목숨을 바쳐 효자와 열부가 동시에 나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도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조정에서는 이 부효 부열(夫孝 婦烈)에 대한 높은 정신을 기리어 효열정려(孝烈旌閭)가 동시에 내렸다.
16) ③.성남면 신덕리 가덕마을의 공주 이유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성남면 신덕리 가덕마을
☯유적현황 : 성남면 가덕마을의 도로변 북측에 있는 논 가운데 위치한다. 평탄하게 대지를 조성한 뒤 철책으로 보호시설이 돌려져있어 오히려 정문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답답함이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측면 1칸에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시설하였으며 4면은 홍살을 설치하였다. 8각의 초석위에 원주를 놓았는데 최근에 조성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내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있으며 후면에 행장기가 걸려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현액에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이유지려 성상12년 계미 명정(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李維之閭 聖上 十二年 癸未 命旌)
라고 각서 되어 있으며 비문도 같은 내용이다.
공의 휘는 유(維)요, 자는 상지이며, 본은 공주(公州)이다. 공산 부원군 (公山府院君) 천일의 후손이요, 광록대부(光祿大夫) 사손의 13세손이시다.
천성이 순후하고 독실하여 12세의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15세 때 아버님께서 병석에 누우시게 되니, 일년을 하루 같이 약 시중을 하였다. 겨울철에 아버님께서 붕어를 잡수시고 싶어 하셔서 얼어붙은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울며 기도를 하자 하늘도 효심에 감동하였음 인지 마침내 큰 붕어를 얻어 다려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장년이 되어 가세가 점차 윤택해지자 날마다 좋은 반찬을 갖추어 어버이께 공양하셨고 부인 파평 윤씨 또한 지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봉양하셨다.
순조 13년(1813)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3년을 시묘하셨으며, 또 순조(1817)에 모친 문화 류씨께서 병석에 눕게 되시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를 하셨으나, 효성의 보람도 없이 병환이 위증하기에 이르자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드리니 3일 간을 더 사셨으나, 끝내 돌아가신즉 비통함이 하늘에 닿은 듯 하였다.
공은 정조 3년(1778)에 태어나서 현종 13년(1847)에 돌아가셨다.
고종 20년(1883) 9월 임금님께서 세조대왕 능에 행차 하셨을 때 본도 유생들이 주상님께 공의 효행을 상소하였고 예조판서 조석여가 다시 명에 따라 상소하여 고종 21년(1884) 10월 교지를 내리고 마을입구에 정문을 세워 모든 사람들은 귀감 하라 했다..
수신면
17) ①. 수신면 장산리 미륵댕이 경주 이춘영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1구
☯유적현황 : 장산리 1구의 장명마을에서 미륵댕이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어귀에 미륵을 모시는 작은 정자가 있고 미륵위의 야산에 동향을 하여 세워져 있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으며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다. 원형 초석에 원주를 놓았는데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현액을 걸었다. 현액에는
효자 교수 경주 이춘영 지문 공부자 탄강2478년 정유3월 일 경성 선성 묘건 (孝子 敎授 慶州 李春榮 之門 孔夫子 誕降2478年 丁酉三月 日 京城 先聖 廟建)
라고 쓰여져 있다.
이춘영(李春英)은 경주(慶州)인이며 선조 때 사람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이 고장을 침입해 들어옴에 동네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하였으나 이춘영은 유일하게 마을에 홀로 남아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보살폈다.
왜적이 당도하자 어머니와 가족을 가까운 산증에 숨겨 놓고 왜적을 상대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그이 충정과 효를 기리기 위해 효자문을 세웠다 한다.
18) ②수신면 백자리 증자동 경주 이동표 정문
수신면에서 전동면으로 가는 길로 망경산을 바라보며 가다보면 수신면 백자3리 이정표가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서있다. 마을 회관을 지나 좀 가면 응천사(應天祠)란 사우와 외진 곳에 자그마한 정문이 있다. 곳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경주 이동표의 정문이다 . 1992년(癸酉)에 세워진 이정문은 한 칸으로 원형 초석위에 둥근 기둥으로 맛 배 지붕에 방풍판을 설치하였고 사방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복 향을 하여 지어 젖으며. 중앙에 현판을 하였고 뒤에는 중건기 가 걸려있다
현판에는
증 사헌부지평 행 동몽교관 은촌 이공 동표 효려(贈 司憲府持平 行 童蒙敎官 隱村 李公 東慓 孝閭)각자되었다
천안시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이곳은 은촌 이선생(隱村 李先生)의 유풍이 전해오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세거지 입니다.
마을옆 기슭에 응천사(應天祠)는 곧 은촌 선생을 모신 사우이며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정문(孝行旌門)이 서있다.
선생의 휘(諱)는 동표(東慓)이시고 자는 중건(仲建)이신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극진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김이 없으셨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잃지도 않았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했다 전한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예의와 법도에 장례를 다하시고, 천안 북면 전곡리에 모신 뒤에는 내외상(內外喪) 6년 동안을 시묘(侍墓)를 하셨다.
깊은 산골인지라 때로는 호랑이가 와서 함께 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풀이 말랐다고 합니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꿔서 증자동(曾子洞)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풍문(風聞)에 듣고 선생의 여막을 찾아 본 후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알려 숙종(肅宗)께서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셨고, 그 뒤 10년이 지나 향인(鄕人)과 유현(儒賢)들이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추증)하고 정려를 명하였으나 가세가 빈약하여 정문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오다 종인들의 효성으로 1992년 에 세워젔다.
정려 중건기(旌閭重建記)
천안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 증자동(曾子洞)에 정문(旌門)이 있어서 길가에 높이 선 것은 옛날 효자 사헌부 지평 행 동몽교관(孝子 司憲府持平 行 童蒙敎官) 은촌(隱村) 이선생의 정문이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요 자는 중건(仲建)이니 평리공(評理公) 휘 인정(仁挺)의 후손으로 경주세가(慶州世家) 이다. 효성이 출천하여 어려서부터 혼정진성과 출고반면(昏定震省 出告反面)에 어른과 같이 행하시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시어 행실에 힘쓰시었으며 몸소 농사에 힘써 부모를 봉양하시되 화한 빛으로 조금도 어김이 없으셨다.
효제(孝悌)로 근본을 하고 학문에 길(道)을 정도(正道)로 잡아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보지 않으시고 소학과 사서로 수신(修身)하는 법을 삼으셨다. 부모가 병상에 계실 때 대변을 맛보시고 병의 차도를 증험(證驗)하시며 하늘에 이 몸이 대신 하기를 빌었고 부친상을 당해서는 애통함이 예절에 지나치고 장례 후에는 시묘(侍墓)를 하고 상을 마치니 산소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자리는 확 모양을 이루고 피눈물 떨어진 곳에는 잔디가 말랐다.
묘소가 북면 전곡리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직 때때로 호랑이가 내려와 호위 하였다. 모친상 때에도 전과 같이 하였다. 어사가 듣고 여막을 방문하여 감복하고 조정에 아뢰어 숙종 때에 동몽교관을 재수 하시고 그 뒤에 선생의 덕에는 부족하다 하여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받으셨다. 선생이 항상 증자의 말씀을 복종해서 실천하니 마을 사람들이 선생의 덕이 증자와 같다하여 마을의 이름을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여 이제까지 내려오고 있다.
산소 옆에 나무가 항상 푸르러서 효조(孝鳥)가 누식하니 오호라 무릇 효는 백행의 근원(百行根源)이요 만선의 근본(萬善根本)이니 천지신조(天地神袛)와 금수초목(禽獸草木)이 어찌 감응(感應)치 않으리오, 선생의 6대조 고 호군공(護軍公) 휘 식(植)과 고조고 승지공(承旨公) 휘 광전(光荃)은 다같이 충절로 인하여 안성 원곡에 정문이 있다. 무릇 충과 효는 하나이니 그 부모에 효도하면서 그 인군에 불충 하는 이 없으며 그 인군에 충성하면서 그 부모에 효도 않는 자 없는 지라 선생의 대효는 전해 받은 바가 있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 후손들이 또 조상을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하여 봄과 가을에 제향을 모시니 주시(周詩)에 가로되 군자가 만년토록 길이 효자 효손이 이어온다 하니 선생에게 이른 말이다. 슬프도다 세상의 교화가 쇠퇴한지 오래이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부모를 위하여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서 어찌 송구(悚懼)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것을 기록하노라.
계유년 정월 기망에 진양 강인규는 짓다(癸酉 正月旣望 晋陽 姜麟圭 謹撰)
응천사 묘정 비문 (應天祠 廟庭碑文)
천안군 수신면 남쪽에 망경산(望京山)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 있으니 이곳이 은촌 선생(隱村)의 유풍이 전해 오는 경주이씨의 세거지 이다. 마을 옆 기슭에 있는 응천사(應天祠)는 곧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은촌(隱村) 선생을 모신 사우(祠宇)이고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을 표창한 정문(旌門)이 서있다.
단기 4324년(서기 1991년) 2월에 유림의 공의로 성균관장에게 천거하여 정문을 세웠고 다음에 봄 3월에 선생을 사우에 봉안(奉安)하였다. 무릇 생폐(牲幣)을 드리고 제사를 모시는 것을 도덕을 존모함이니 도덕을 존모하면서 세덕과 선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원훈 좌명공신(新羅元勳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소판(蘇判)벼슬을 지내신 휘 거명(居明)이 기(起) 세조이시다. 휘 금서(金書)는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시고 휘 핵(翮)은 호가 열헌(悅軒)이니 상서 좌복사(尙書左僕射)를 지내시고 휘 인정(仁挺)은 호가 성암(誠菴)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셨다. 그러나 직간(直諫)으로 임금의 뜻을 거스른바 되어 한때 불우한 처지에 있었으나 문정공 이지시(文正公 李之氏)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휘 원선(元善)은 벼슬이 전서(典書)요, 휘 진(進)은 진사로써 감무(監務)를 지내셨는데, 문덕(文德)이 찬란하여 태종의 잠저(潛邸)때에는 교분이 두터웠다. 휘 식(植)은 어모장군 호군(禦侮將軍 護軍)벼슬을 하셨는데 금성대군 옥사(錦城大君 獄事 )에 연류 되어 청하 현(淸河縣)에 은거하시다가 혐의가 풀린 뒤에 승지(承旨)벼슬에 추증(追贈)받았고 충절(忠節)로 정문을 명(命)하니 안성군 원곡면(安城郡元谷面)에 세웠다. 이분의 아들이 후(厚) 인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寒暄堂 金先生의 문인 이였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으니 곧 선생의 5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광전(光荃)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내셨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시고 순절하니 정려를 명하여 조손(祖孫)의 정문이 한곳에 서있다. 증조의 휘는 우신(又新)인데 집의(執義)를 배(拜)하였고 조의 휘는 문서(文瑞)인데 문과 진사(進士)로 광해조의 어지러울 때 시를 지어 이이첨(李爾瞻)과 절교(絶交)하였다. 고의 휘는 무(茂) 인데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승지벼슬을 추증 받았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이고 자는 중건(仲建)인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접견하지 않으셨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하셨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슬퍼하시며 정예(情禮)를 다하시고 장례를 모신 뒤에 6년 동안을 시묘하셨다. 깊은 산골이라 때로는 호랑이가 나와서 보호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사초가 말랐다고 한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꾸어서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였다. 장 하도다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교육의 원천이니 어찌 동인의 감화뿐이랴 어사가 선생의 여막을 찾아보고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숙종께서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재수하셨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서 향인의 논의로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시니 훌륭하도다. 지극한 효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감흥 하는지라 신명이 감흥하면 풍속이 변하며 지명도 바뀌게 되나니 선생의 덕이 그러하기에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빛나도다.
선생의 묘정(廟廷)에 효조(孝鳥)가 서식하고 장송구목이 충해와 설화도 없으니 과연 신명(神明)의 감흥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아들은 만승(萬升), 만익(萬益)이요 손자는 종진(宗震), 득헌(得獻), 성헌(聖獻), 종환(宗煥)이요 증손은 경상(敬常), 경철(敬哲), 경천(敬天), 경노(敬老), 효순(孝舜), 효증(孝曾)이요 현손은 태진(泰鎭), 형진(衡鎭), 헌진(憲鎭), 정진(定鎭), 관진(寬鎭), 원진(元鎭), 화진(華鎭), 좌진(左鎭), 익진(翼鎭),이요 5대손은 응규(應奎), 학규(學奎), 환규(煥奎), 선규(善奎), 병규(秉奎), 화규(華奎), 인규(麟奎), 용규(龍奎), 완규(完奎), 철규(喆奎), 의규(毅奎), 준규(俊奎)이다.
이상 선조의 5대손까지의 위패(位牌)를 행렬의 순차로 같은 사우(祠宇)에 모시고 매년 가을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기로 하였다. 모름지기 세일제는 묘정(墓庭)에서 봉행함이 선현의 예전(禮典)이라 하겠으나 세속의 변천에 따라 사우(祠宇)에서 봉행케 됨을 조상의 영영(英靈)께서도 감흥(感興)하시리라 믿는다. 이 묘정비(廟庭碑)를 세움에 있어 규석, 규진, 종건(圭錫 圭鎭 鍾健)이 나에게 기문을 청함으로 제삼고사하다가 삼가 찬하노니 은촌선생의 덕행과 효성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단기 4325년 3월 일
진향 강인규는 삼가짓다(晋陽 姜麟圭 謹撰)
직산읍
19) ①. 직산 마정리 미륵산 오씨효열 3정문
☯ 소재지 : 천안시 직산면 마정리 2구
☯ 유적현황 : 마정리 2구의 저수지 서측의 야산 남동향의사면에 평탄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주변에 향나무를 심어 정비하였다.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좌우 벽의 안은 백회로 발랐으며 전후 면은 홍살을 설치하였다. 4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려의 내부에는 현액이 3개가 걸려 있는데 전면에는 정려의 현액이 뒷면에는 행적이 기록 되어있다.
정면의 좌측부터
효자 증 통정대부 군차감 정랑 오막생 지려 영묘조 명정 성상28년 임신11월일 (孝子 贈 通政大夫 軍車監 正郞 吳邈生 之閭 英廟朝 命旌 聖上二十八年 壬申十一月日)
효자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오계학 지려 영묘조 명정 성상28년 임신 11월 일 (孝子 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吳桂鶴 之閭 英廟朝 命旌 聖上二十八年 壬申 十一月 日)
효열 유인 학생 오선남처 경주김씨 지려 영묘조 명정 성상28년 임신 11월일(孝烈 孺人 學生 吳善男妻 慶州金氏 之閭 英廟朝 命旌 聖上二十八年 壬申 十一月日)
라고 각자되어있다.
오막생(吳邈生)은 일서면 미륵산(一西面 彌勒山, 현 작산면 마정리) 사람이다.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순근(醇勤)하여 부모를 잘 섬기데 힘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부친상을 당해 곡성(哭聲)에 애절함을 다하고 제사에는 생시에 좋아하시던 음식으로 갖추어 정성을 다하고 묘소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산충(山蟲)이 그 잎을 먹거늘 막생은 산충을 잡아 탁상에 놓고 산신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하니, 그 후로 벌레가 먹지 않았다. 눈이 오면 반드시 비로 쓸며 손과 발이 터져도 그치지 않았다. 영종임신(英宗壬申)년에 진사 최진보(進士 崔鎭普)가 상소(上疏)하여 정문을 그 마을에 세웠다.
오계학(吳桂鶴)은 효자 막생(邈生)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효순하여 부모봉양을 우선하였다. 음식은 부모 입에 맞게 하며 의복은 차갑고 더움에 유념하였다.
부친이 유행병(流行病)에 걸리니 마을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피 하되계학(桂鶴)은 홀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극정성을 다하여 병은 드디어 나았다. 후일 부친이 노병(老病)에 꿩 고기(雉肉) 을 구워 먹기를 원하니 계학이 사냥하되 잡지 못하여 근심하고 있을 때 홀연히 꿩이 부엌으로 날러 들어와 잡아서 부친께 구워드리니 모두 기이한 일이다. 부친상을 당하여 장예에 지성으로 임하니 스스로 법도에 맞아들었다. 3년을 시묘(시묘)를 살았으며 죽으로 연명하며 시묘를 맞추었고, 시묘 후 에도 애절(哀絶)함은 여전하고 연음(宴飮)에 임하지 않고 담소(談笑)를 즐겨하지 않았다.
오선남(吳善男)의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공손하여 예도(禮度)가 있었으며 천한 말을 입에 담아 본 일이 없었다. 막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효자와열여로 마을에 효열삼세정문(孝烈三世旌門)을 세우니 세속의 사람들은 하늘이 낸 가문이라 하였다.
☯오막생(吳邈生)
일서면 미력산(彌力山) 사람인데, 일자무식이었으나, 성격이 순박하고 근면하였다. 부모를 잘 섬기고 힘을 다해 충실히 봉양하였으며, 제 몸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감히 어기지 않았다.
부친이 일찍이 병이 들었는데, 막생이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대 소변을 몸소 부축해 드렸으며, 입은 옷가지를 손수 세탁하였다. 때마침 추운 겨울에 목욕을 하고, 자신이 부친의 병을 대신하기를 소원하여 무릇 5일 밤낮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슬프고 괴로워하는 소리가 이웃 마을가지 진동하였으며, 부친의 병환도 쾌유하였다.
부친상을 당하니, 슬픔을 다해 통곡하였고, 제사에는 반드시 생전에 즐기고 좋아하던 것을 사용했다. 무덤가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산 벌레가 잎을 먹어버리니, 벌레를 주워 탁상에 놓고 향불을 피워 산신(山神)에게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 후부터 막생이 묘소에 심은 나무에는 벌레가 다시는 먹지 않았다. 눈이 내리면, 반드시 삼태기와 삽을 가지고 무덤을 쓸어 내리니, 손발이 거북의 등가죽처럼 터졌어도 근심하지 않았다.
영종(英宗) 임신년(1752)에 읍내에 사는 진사 최진보(崔鎭普)등이 임금님께 말씀을 올리니, 그 마을에 정표(旌表)를 명하였다.
☯오계학(吳桂鶴)
효자 막생(邈生)의 아들인데, 천성이 효순하여 부모를 잘 봉향하여,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더운 때와 추운 때에 몸에 맞도록 해 드렸다. 부친이 일찍이 전염병에 걸리니, 가족들은 피하여 나가 있게 하고, 주학이 홀로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병세가 위독하였다. 주학이 가슴을 치고 하늘을 부르짖는 소리가 밤이 깊도록 입에서 그치지 않고 매우 처절하였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효성스럽구나, 이 사람의 병이 비록 꺼림칙하나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만나보고 많은 방법으로 구호하여 병이 마침내 완치되었고, 이웃과 마을에도 무사하였다.
그 후, 부친이 병중에 꿩고기구이를 먹고 싶어 하므로, 주학이 나가서 사냥하였으나, 종일토록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 아래로 날아 들어오므로, 구워서 드렸다.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를 지성으로 변통하여 예법에 맞도록 하였으며, 무덤 옆의 여막에서 비린내 나는 것을 먹지 않고 죽을 마시며 대상(大喪)을 맛 쳤다. 항상 단갈(袒褐)하던 날처럼 몸이 마르고 파리하여 뼈만 앙상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으며, 매양 부모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겼다. 복(服)을 끝마친 뒤에도 역시 잔치에 나아가지 않았고, 또 평일과 같이 웃거나 이야기하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부모를 잊지 못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
사람을 대함에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며, 비루하거나 패역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평생에 행한 일이 칭찬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주학의 며느리가 또한 열녀의 행실로써 정려(旌閭)하니, 삼대의 충렬이 일시에 나타났다. 비록 예법을 알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집안이라 할지라도, 무엇으로써 더할 수 있으리요.?
☯효열부(孝烈婦)의 김씨(金氏)
일서면 미력산 오선남(吳善男)의 아내이며, 효자 오계학(吳桂鶴)의 자부(子婦)이다. 성격이 유순하였고, 출가하여서는 부도(婦道)가 매우 정성스러워 한 집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혼인한 지 2년만에 선남(善男)이 요절하니, 김씨가 몸이 수척하도록 부르짖으며 통곡하여, 보는 자의 코가 시큼하였다. 장례 날이 되자, 남모르게 무덤 광중(壙中)에 몸을 던져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피를 흘리며 수건으로 목을 매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서너 번이나 하였으므로, 집안 식구들이 밤낮으로 교대하여 지키며, 시부모가 온갖 방법을 다하여 타이르고 울며 간청하니, 김씨가 감동하여 깨닫고 순종하여 시부모에게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일찍이 시아버지가 등창이 나서 종기의 뿌리가 매우 독하였다. 김씨가 하루에 세 번 입으로 빨아내어 20여 일만에 완치되었다.
그 친정 부모가 일찍 과부가 된 딸을 불쌍히 여겨, 마음을 돌려 재혼을 시키고자 하니, 김씨가 거짓으로 허락하고 밤중에 도망쳐 돌아와 시부모를 뵙고 그 이야기를 말 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 호미를 들고 나가니, 집안 식구들은 밭에 가는 줄 알고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김씨는 직접 연못으로 가서 투신하였는데, 때마침 김을 매고 있던 사람이 있어서 구원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이 여러 차례였다. 그 시아버지 주학이 순수한 효자였으므로, 능히 지성으로 그 마음을 감동시켜, 김씨가 마침내 죽지 않았다.
임신년에 읍내의 많은 선비들이 상언(上言)하여 계학 부자는 효행으로 정려(旌閭)하고 김씨 또한 열녀로써 정려하였으니, 지금의 읍치 서쪽 미륵산에 편각(片刻)이 새롭다.
아! 순수한 행실과 굳은 정렬은 글을 읽은 선비에게서 구하여도 오히려 보기 드문데, 하물며 여항 편호(閭巷編戶)의 백성이나, 유약한 부녀자임에랴. 오씨 한 가문에 정려가 셋이니, 아! 또한 기특하고 장한 일이다.
20 ②).직산 마정리 미륵산 황씨 2세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직산면 마정리 2구
☯유적현황 : 마정리 미륵산 아래 오씨 정문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농로를 따라가면 용와산과 미륵산이 만나는 계곡의 상단부에 북향하여 조성되어 있다.
정려는 정 측면 한 칸의 옛 건물을 헐어내고 2001년에 새로 건축한 건물로 의미는 없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전 후면은 홍살을 설치하였고 원형 초석에 원주를 세웠다. 현액은 내부의 좌우로 2매가 걸려 있는데 좌측의 것은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정대부 장흥도호부사 황세득 지려(忠臣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 通政大夫 長興都護府使 黃世得 之閭)
라고 쓰여 있으며 우측은
☯충신 증 자헌대부 공조참판 겸 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의주부윤 겸 병마첨절제 대도호부사 황박 지려(忠臣 贈 資憲大夫 工曹參判 兼 義禁府事 行 嘉善大夫義州府尹 兼 兵馬僉節制 大都護府使 黃珀 之閭)
라고 되어 있다.
황세득(黃世得)의 자는 사구(士求) 이며 관향은 성주(星州)이고, 시호(諡號)는충장(忠壯)이다. 고려조 금자광록대부(高麗朝 金紫光祿大夫)황석계(黃石桂)의 17세손이며 조선조 중훈대부사헌부감찰 증 좌승지 황종식(朝鮮朝 中訓大夫 司憲府監察 贈 左承旨 黃鍾植)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32년) 정유(丁酉)에 직산 양전리에서 출생하였다. 명종19년(1565),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남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三道水軍統制使 李舜臣)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공은 이순신장군의 처종형(妻從兄)이 되며 통제사 이순신은 공의 제주가 탁월하고 용맹이 큼을 평소부터 칭찬하였다. 선조 30년 (1597년) 정유재란 다음해 무술(무술) 11월 2일 제독 유정(提督劉廷)이 15,000명의 군대를 인솔하고 통제사 이순신(統制使 李舜臣)과 합세하여 도독진린(都督陳璘)과 더불어 독전할 때 공이 몸을 떨쳐 선봉이 되어 왜적을 무수히 사살하였으나, 유탄(流彈)에 맞아서 진중(陣中)에서 절명(絶命)하니 통제사 이순신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탄식하였다.
그 후로 방백과 유림들의 공의로 상소하여 숙종30년(1704년 갑신 5월 17일)에 정문을 세우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 하니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할 때 공의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려수 충민사기(麗水 忠愍祠記)에 공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황세득(黃世得)
자는 사구(士求)요. 성주인(星州人)인데, 일서면 양전리에 살았다. 선조조(宣祖朝)에 무과에 등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쳐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기백과 절개가 높았다.
임진왜란에 통제사 이순신을 따라 남해에서 왜적을 방어하였으니, 세득(世得)이 이공(이순신)에게는 부종형(婦從兄,사촌동서)이었다. 이공이 평소에 세득의 재주와 기량이 크고 용감하며 뜻이 충량(忠亮)함을 알고 그와 더불어 군무를 계획하였으며, 세득(世得) 또한 마음을 다하여 협찬했다.
진(陣)에 임하여 대적할 때에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선봉(先鋒)에 올랐고, 벽파정(辟派亭),고금도(古今島)의 대첩에서는 삶을 가벼이 여기고 분발하여 전공이 많았다. 통제사가 매양 그 충성과 용기를 칭찬하면서도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경계하였다.
배를 한산도에 대었는데, 달은 밝고 파도조차 잔잔하였다. 세득(世得)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뱃머리에 나와 앉아 있다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칼을 어루만지며 격렬하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판옥선 머리에 홀로 기대어,
삼척검(三尺劍)어루만지며,
만곡(萬斛)의 심회(心懷)에 시름도 깊은데,
어디서 일성(一聲)의 긴 피리 소리가
시름을 더하게 하네.
장사(將士)들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술년(1598)9월에는 도독(都督) 유정(劉挺)이 군사 15,000명을 거느리고 예교(曳橋) 북쪽에 와서 진을 쳤다. 10월에는 우리 수군과 함께 왜놈 오랑캐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통제(이순신)가 도독(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전투에 나아가 바야흐로 전선(戰船)을 재촉하여 독전할 때에 세득(世得)이 또 몸을 떨쳐 먼저 나아가 무수한 왜적을 사살하니, 왜적의 두목이 분노하여 총포를 잘 쏘는 놈으로 하여금 합세하게 하여 세득에게 연속 발포하니, 세득이 탄환에 명중하여 절명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깜짝 놀라 통제사에게 들어와 보고하니,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세득이 죽었으니 나는 다시 어느 때에,,,.’
라고 하였다. 이 말을 한 뒤에, 이통제(이순신)도 또한 탄환에 명중하여 배 안에서 졸하였다.
후에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이충무(李忠武)의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세득이 공을 세운 사적을 병기하였다. 숙종 병술(1706)에 고을 사람들이 소청(疏請)하여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명하고, 호조참판을 증작(贈爵)했다.
☯항박(黃珀)은 본관이 성주로 임진왜란의 명장 황세득 장군의 아들이다 ?자는 백옥(伯玉)이요 시호(諡號)는 장열(壯烈)이다.
선조 6년 계유(癸酉)에 출생하여 선조 25년(15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러 노령으로 고향인 직산에 머무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자진 출전하여 진중에서 전사하니 인조 14년(병자 1636년)의 일이고 향년 64세의 일기였다.
공은 지략과 병사에 밝으며 천문지리에 통달하였다. 광해군 13년 신유(辛酉)에 명나라 사신 양우(揚雨) 가 사신으로 조선에 와 있을 때 마침 후금(後金)이 요양(療養)을 함락하여 만주(滿洲)를 석권(席捲)하고 있던 때라 양우가 율로 돌아 갈수 없어 수로(水路)를 택하매 공이 개연히 청행(청행)하여 공이 명사라 사신양우를 호송(護送)하고 돌아왔다.
인조 병자년 겨울(仁祖 丙子 冬 1636)에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상을 포위하자 공은 종복 팽금(彭金)에게 백여 개의 활과 화살을 지우고 즉일로 출전하였다. 공은 맹열(猛烈)이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운명하였으나 한 치의 후퇴 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숙종(肅宗) 30년에 비로소 공의 부자(父子) 정문을 세우게 하고 공에게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다시 6년이 지난 후 직산의 방백(傍白)과 유생(儒生)들이 모여 직산출신 5충신의 행적을 적어 사당을 세워 혼영을 위로 하고 저 숙종 때에 상소하여 윤허를 얻었으나 소요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끝내 사당을 짓지 못하였다.
☯황박(黃珀)
세득(世得)의 아들이다. 지혜로운 생각을 지녔고, 병사(兵事)에 밝았으며, 천문(天文) 지리(地理)의 학술에 정통하였고, 무과에 등과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천계(天啓) 신유(1621)에 명(明)나라 사신 양우(楊雨)가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이 때에 오랑캐가 요양(遼陽)을 함락하여 육로(陸路)가 막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바닷길을 경유하여 명(明)나라에 가는 조공(朝貢)과 사신(使臣)을 배에 태워 바다 건너 등주(登州)에 도착시키고 돌아오게 하고자 했다.
이에 조정에서 바닷길을 능히 정탐할 수 있는 사람을 모집했으나, 감히 응하는 자가 없으므로, 박(珀)이 분연히 가기를 청하여, 무사(武士) 김진(金眕), 인계선(印繼先), 통역관 이현남(李賢男), 최계서(崔繼序)등을 거느리고 4월에 철산 거우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5월에 등주(登州)에 닿았다. 안찰사 도공(陶公)이 박(珀)을 보자, 존경하여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고, 따라온 사람들에게도 차등이 있게 상을 주었다. 그리고, 박(珀)에게 안마(鞍馬)와 종 그리고 수레를 주어 출입할 때의 위의(威儀)가 매우 융성하였으므로, 구경하는 자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떠들썩하였다.
박(珀)이 조용히 도공(陶公)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나온 바 있는 석성(石城), 장산(長山), 광록(光綠) 등 여러 섬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만약 비워둔 채 오래도록 진무(鎭撫)하지 않으면, 반드시 모두 오랑캐의 소유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명(明)나라에 조공(朝貢)하는 길이 영원히 막힐 것이니, 장차 이것을 어찌합니까?’
하니, 도공(陶公)이 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비록 잎사귀 하나와 같은 작은 땅을 잃는다고 하여, 어찌 이처럼 지나친 염려를 하시오 진무(鎭撫)할 일은 이미 정제(整齊)되었으니,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보전함에는 다른 근심이 없을 것이니, 원컨대 공(公)은 돌아가 이 뜻을 국왕(國王)에게 보고하시오.’
라고 하였다. 박(珀)이 명(明)나라 사신 양우(楊雨)를 전송하여 길에 오르게 하고, 드디어 배를 돌려 돌아와 7월에 돌아오니, 수로(水路) 왕복의 거리가 만 여리(萬餘里)나 되고, 경과한 크고 작은 섬이 수십 개였다. 토인(土人)들이 가끔 오랑캐에 붙어서 항구(港口)를 차단하고 행선(行船)을 못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박(박)이 자세하고 정중한 태도로 설명하며 충의 로운 얼굴빛이 분명하였으므로, 비록 어둡고 사나우며 풍속이 다르기는 하지만, 또한 알고서 감복하여 서로 해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앞길을 열어 보여주었다. 혹 사나운 바람과 성난 파도에 돛대가 쓰러지고 노가 부러져도 멈추지 아니하고, 능히 방향을 살피어 기후를 점치며 마음을 고요히 하여 묵도(黙禱)하면서 고래처럼 무서운 파도와 악어처럼 험한 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건넜으며, 곧 하늘의 도움이었다.
여러 차례 벼슬을 옮기어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이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차하였으며, 나이 늙어 직산 자은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숭정 병자년(1636) 겨울에 현감 이척연(李惕然)에게
‘군사 정책을 수칙(修勅)하여 근심이 없도록 대비하시오.’
라고 권고했으나, 척연이 응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젊어서는 문망(聞望)이 있었으나, 지금은 너무 늙었다.’
고 하였다. 이때에 박(珀)이 몸소 건상(乾象)을 우러러 살펴보고 전쟁의 기운이 이미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살피지 못했다. 12월에 갑자기 오랑캐 군사가 서울을 핍박하므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시니, 박(珀)이 놀랍고 두려워 눈물을 흘리며 행장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집안의 종 팽금으로 하여금 화살 백여 개를 짊어 지게하고 자신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찼다. 출발에 임하여 아들 석중(碩中)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에 몸을 맡겼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로서 죽어야 하거늘, 어찌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 돌아오겠느냐? 너는 일가와 더불어 칼날을 잘 피하 거라.’
하고 개연히 말에 올라 혼자서 포위되어 있는 성 아래로 달려가 죽으려고 하였다. 때 마침 호서백(湖西伯 ; 충청도관찰사) 정공(鄭公) 세규(世規)가 근왕병을 거느리고 직산현에 도착하였는데, 평소에 박(珀)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중군(中軍)으로 권차(權差)하고, 파총(把摠) 이국운(李國運)으로 하여금 그를 따라 더 불어 함께 하라 하니, 박(珀)이 소속이 있음을 기뻐하고 그대로 따랐다.
용인에 이르러 박(珀)이 세규(世規)에게 말하기를, ‘만약 외로운 군사로써 경솔하게 강적을 범한다면 스스로 잘못을 취하여, 위로는 나라에 보답할 수 없고, 아래로는 직분을 다할 수 없으니, 잠시 광교산(光敎山)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을 독려하고 있다가, 그 들과 더불어 합세하여 나아가 적을 꺽어 포위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세규가 듣지 험천(險川)에 진을 쳤다. 박(珀)이 지세를 살펴보니, 적을 대응하기 어려우므로, 세규에게 요청하기를
‘원컨대, 일부(一部)의 군사를 얻어 후방으로부터 성채(城寨)를 기습하는 적을 방비하려고 합니다.’
하였으나, 세규가 또 듣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까 과연 오랑캐 100여 기(騎)가 앞에서 도전하고 대병이 뒤에서 압박하였다. 아군이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일시에 무너지니, 박(珀)홀로 작은 참나무 밑에 의지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떨치며 화살을 비 오듯이 쏘았다. 조금 뒤에 오랑캐의 화살이 박(珀)의 입(面門얼굴)에 명중되었다. 팽금(彭金)이 곁에 있다가, 급히 화살을 뽑아내려 하니, 박(珀)이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이 찰나에 있으니, 한 놈의 적이라도 쏘는 것이 급하다. 뽑아내어 무엇 하겠느냐?’
하면서 스스로 분발하여 쉬지 않고 활을 쏘았는데, 온 몸에 꽃인 화살이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팽금(彭金)이 장교들은 모두 흩어지고 화살이 다한 것을 보고 발아래에 엎드려 발걸음을 옮기시기를 청하니, 박(珀)이 꾸짖으며 쓰고 있던 망건 반쪽을 팽금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내 뼈를 거두도록 하라.’
하고, 또 황색 요대(腰帶)를 헤쳐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증거를 삼아라.’
하면서, 급히 떠밀어 팽금으로 하여금 달아나 숨도록 하고 잠깐 뒤에 창상(創傷)을 입어 땅에 쓰려졌다.
팽금(彭金)과 국운(國運)등은 쌓여있던 시체 속에 엎드려 목숨을 구했다. 적이 물러갔으므로, 와서 살펴보니, 과연 참나무 밑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다. 팽금이 시체를 이끌고 달려 돌아와 몸에서 화살촉을 뽑아내니, 한 되(一升)가량이나 되었다.
팽금이 옛 마을에서 늙어 죽었는데, 매양 사람들에게 박(珀)이 꼿꼿이 서서 적에게 활을 쏘던 상황과 죽음에 임하여 부탁하던 말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역력하게 말하였고, 이국운과 천안 선비 박동도(朴東道)등이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당일의 사실을 보았으므로,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목이 메어 울지 아니하는 때가 없었다.
숙종 병술년(1706)에 비로소 박(珀)의 부자(夫子)의 마을에 정표(旌表)를 하고, 박 에게 공조판서를 증직하였다. 6년이 지난 임진년(1712)에는 직산 관하의 여러 유생들이 서로 거느리고 궁궐 문에 나아가서,
‘오충신(五忠臣)중에서 아직 정포(旌褒)되지 않은 자에 대한 정표(旌表)와 증직(贈職)을 추가로 베풀어주시고, 아울러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을 올려서 충혼에 보답하게 하소서.’
라고 부르짖으니,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셨으나, 공사가 크고 힘이 약하여 미루어 오다가 이루지 못했다.
아! 옛날 소나(素那) 부자가 이 땅의 사람으로 몸으로써 순국했고, 1,000년 뒤에 황박(黃珀) 부자가 경오년(1750)에 영조(英祖)께서 온천에 행차하실 때에 직산에 멈추시어 특별히 충신 황박(黃珀)의 후예를 물으시니, 때마침 석중(碩中)의 손자 하청(河淸)이 있었다. 임금이 불러 보시고, 그의 소원을 물으시니, 하청이 벌벌 떨면서 감히 우러러 대답을 못하여 퇴출되었으니, 운명이었다.
아! 황(黃), 이(李) 삼충(三忠)은 참으로 옛날의 사수자(死綏者)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거늘, 겨우 100년이 지났는데, 자손이 영체(零替)하여 무덤을 다스리지 못하고 정문(旌門)의 명문(銘門)이 이미 그 전왕(前王)의 뒤에 자연(自然)히 도사(道士)가 이미 없으니, 비록 조청(趙淸)이 주소(奏疏)를 올린다 해도 장차 이를 어찌하랴? 내가 일찍이 글을 지어 고을 선비들에게 고하여 정문을 고쳐 세우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릴 것을 꾀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중지되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이로 인하여 그 글을 뒤에 붙여서, 고인(古人)의 일을 평론(評論)하는 자가 한 번 읽어보게 하려는 것이니, 그 글은 이러하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나라의 위험을 당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진실로 신하로서의 좋은 명예이며, 절개를 장려하고 충성을 포상하는 일은 우리 사람이 지닌 봉성이니, 이것은 곧 중단될 수도 없는 것이며, 반드시 권장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옛날, 수양성(水陽城)에서 안녹산(安祿山)을 막아낸 장순(張巡)의 수양비(水陽碑)와 진정사(眞定祠)와 같은 것은 중국 정표(旌表)의 특이한 것이지만, 종용당(從容堂)과 충렬묘(忠烈廟)는 우리나라에서도 무궁토록 높이 받들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떳떳함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시대의 일을 멀리 생각하니, 마음이 간절하고 격앙하여 감회가 깊은데다가, 아울러 우리 한 고을을 더 욱 더 염모(艶慕)하다 보니, 서글픈 생각이 더하다.
돌아보건대 고(故) 판관(判官) 이공(李公) 덕회(德恢), 고(故) 부사(府使) 황공(黃公) 세득(世得), 고(故) 부윤(府尹) 황공(黃公) 박(珀), 이 분들은 명문(銘門)의 화려한 벌족(閥族)이며, 뜻이 의(義)롭고 충성스러워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정성을 다하는 신하가 되기를 스스로 허락하였다. 임진(1592). 계사(1593)의 왜란을 만나 일찍이 호종(扈從)하였고, 군위(君韋)을 입은 군자(君子)는 개돼지 같은 오랑캐들이 날뛰는 것을 통탄(痛嘆)하였다. 대방성(帶方城 :남원성)이 위태하니, 먼저 무기고를 불태우는 기묘한 전략을 시도하였으며, 한산도에 배를 대고 노래한 격검(擊劍)의 비가(悲歌)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혀에서 나오는 말이 도끼처럼 엄격하여 총병(憁兵) 양원(楊元)도 그 정직함을 두려워했고, 얼굴에 화살과 돌이 날아와도 피하지 않으니, 통제사(統制使)이순신이 그 재빠름을 경계하였다.
관찰사(觀察使)를 따라 근왕(勤王)할 때에 먼저 광교(光敎)의 높은 곳을 보루(堡壘)로 삼자고 건의했으나, 제지(制止)를 받은 채, 중군(中軍)의 자리에 있다가, 험천(險川)에서는 신기한 병법을 활용하지 못했다.
부채에 글을 써서 노복(奴僕)에게 부탁했다는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헌(宋象賢)과 같은 의지와 결심을 하였으며,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는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응하(金應河)처럼 힘이 다하였다.
시신(屍身)에서 뽑은 화살촉이 한 되(一升)에 가득할 뿐 아니라, 선진(先溱)의 얼굴처럼 살아 있는 듯하였으며, 마침내 정령(精靈)이 북두성(北斗星)에 닿은 듯, 종택(宗澤)의 눈처럼 흐려지지 않았으니, 곧 하늘이 산악(山岳)에서 정기(正氣)를 거두어 이 사람을 탄생시킨 것이며, 아버지가 가문(家門)에 영웅의 명성(名聲)을 계승하도록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병(騎兵)과 수군(水軍)으로서 계급이 낮아도 탓하지 않으니, 북쪽 궁궐에서 총애하고 돌아보시어, 양전리(良田里)와 산읍리(山蔭里) 대문인 중방이 빛나고, 남쪽 산하(山河)에는 슬픔과 영광이 많았다. 용성(龍城 ;남원성)의 새 사당(祠堂)에는 비록 일곱 분의 충절을 배향(配享)하였는데, 사산(蛇山 ;직산)옛 마을에는 아직도 혼령을 평안히 모실 데가 한 군데도 없다. 더구나, 운수가 기박하고 가문이 쇠약하여, 병사(兵使)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자손처럼 영체(零替)하였고, 시대와 사건이 지나갔으니, 명(明)나라 예주(豫州)의 조승훈(趙承訓) 무덤처럼 쓸쓸하다 충절을 세우고 목숨을 바친 발자취의 증빙이 없으니, 황연(怳然)히 앞에 있던 먼지가 영겁(永劫)으로 간 듯하고, 탄생한 곳을 분별할 수 없으니, 온통 쇠잔한 풀 속에서 차가운 연기만 피어오른다.
제향(祭享)을 위한 상소(上疏)를 하늘에 부르짖어 임금님의 비답(批答)이 내렸으나, 거행하지 못 하여 아름다움을 정표(旌表)한 고운 현판이 땅에 버려졌으니, 옛 자취를 어루만지며 탄식할 뿐이며, 한두 사람이 경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마침내 오십년 동안 사라지게 되었으며, 아직도 정결한 제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약오(若傲)의 귀신이라도 굶주리지 않으면, 하나의 기(氣)가 항상 존재한다는데, 옥(玉)처럼 깨끗한 황천(黃泉)의 혼령이야 말로 상상하건대, 또한 나타날 것이니, 어찌 우리 영내(領內) 전체의 부끄러운 일을 이웃나라에까지 들리게 할 것인가?
비루(鄙陋)한 우리들은 한갓 고금(古今)의 감상(感傷)만을 가슴에 품은 채, 사람됨이 보잘 것 없으며 말이 천박함을 헤아리지 않고 명분에 의지하여 진실을 주워 모아, 의(義)와 이(利)의 공(公)과 사(私)를 간략(簡略)하게 긍정(肯定)하고 추축(追逐)하였다. 그 절의(節義)가 뚜렷한 분을 생각하면서 항상 할 곳에서 죽었으니, 어찌 예전 사람만 같지 못하다 할 것이며,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곧 공의(公議)라고 할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무릇 여러 군자(君子)들은 이 땅에 오래 살면서 일찍부터 덕을 닦은 옛사람을 사모하여 왔다. 성현의 글을 읽고 모두가 마음속에 선(善)을 숭상하여 의(義)를 즐겼으며, 나라와 조정의 사건을 보게 되면, 반드시 먼저 충성심을 나타내어 선량(선량)함을 다하였다. 오히려 저 먼 곳에 있는 분의 명망(名望)과 인품도 사모하는데, 하물며 가까운 향리(鄕里)의 우물에 인접한 분이야 말해 무엇 하리?
지극한 충성과 높은 절개가 한 고을에 모였으니, 우리 향리(鄕里)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가? 상작(賞爵)의 문재와 제향(祭享)의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며, 병술년(1706)에 내린 정미(旌楣)는 마을 문 위에 걸려 있지 않으니, 어찌 복구를 늦출 것인가?
그러나, 쇠퇴한 것을 부흥시키고 황폐한 것을 보완하는 일이 비록 사람이 도모(圖謀)해야 할 가장 착한 일이 라고는 하지마는, 굽힌 것에 힘을 주고 파리한 것을 들어올린다면, 어찌 물자와 재화를 모으기 어려울 것인가? 의(義)로운 소문이 나게 되면, 사농공상(士農工商)들이 복종하여 진실로 간격(間隔)이 없을 것이니, 재화(財貨)와 물자(物資)가 소량(少量)이든, 다량(多量 )이든, 어찌 구애(拘礙)될 것이 있는가? 오직 그 정성이 도달하면, 사업이 이루어질 것인데, 어찌 공사(工事)는 크고 힘이 약하다고 걱정만 할 것인가?
드디어 편액(扁額)을 조각하여 두 마을(良田 山陰)에서 군중(群衆)들이 높이 바라보도록 새롭게 중건(重建)하고, 마침내 한 사당(祠堂)에 다섯 영령(英靈)을 함께 모신 신주(神主 ; 尸)와 제문(祭文 ; 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서 우리 고을이 풍교(風敎)를 돈독히 숭상함을 알게 되어, 겨울에는 시경(詩經)을 배우고 여름에는 예기(禮記)를 배워, 사림(士林)이 돌아가 의지함을 보게 될 것이니, 이것은 머나먼 황천(黃泉)의 영령(英靈)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근 한 고을 을 빛내는 일이다.
아! 하나의 선(善)을 행한 것을 기념하여 오히려 향선생(鄕先生)으로 제사(祭祀)를 지내는 모임이 있는데, 삼강(三綱)의 사실에 관계되는 우리 고을에 충신의 정려(旌閭)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사우(祠宇)를 세워 추배(追配)한 전례가 이미 많으니, 이 논의가 참람(僭濫)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 백성들이 앞장서서 글을 올린 뜻을 함께 알고 있으니, 깊이 제공(제공)들에게 바라건대, 돌처럼 굳은 이 여론을 펴서 쇠와 같이 단단한 허락을 내려주기 원한다.
병천면
21) ① . 병천면 봉황1리 경주 김인석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1구
☯유적현황 : 병천리 시장에서 풍산공원묘지 쪽으로 약 9km 정도 들어가면 봉황1리 풍산공원입구 길 옆 동쪽으로 약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는 예전의 부록크의 담장을 헐어내 새로이 잔디를 조성하였으며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방충판을 설치하였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8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김인석 지문 상지 18년 신사 4월 일 명정(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金仁碩 之門 上之 十八年 申巳 四月 日 命旌)
라고 쓰여 있다.
김인석(金仁碩)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에 만뢰산 오르며 하느님께 빌었는데 밤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길 좌우에서 호위해 주었다.
인석이 죽으니 한 떼의 까마귀들이 상여가 묘지에 이르기까지 날아왔다가 장레를 마치자 날아가 버렸다.
권준(權晙)이 행장(行狀)을 정리하여 조정에 알리고 호랑이도 부자(父子)의 인(仁)에 감동했고 까마귀 떼의 일도 효에 감동한 소치라고 하였다.
그의 손자 경손(慶孫)도 또한 효행이 있었다.
천안실록엔,
까마귀와 호랑이도 감동한 효자 김 인 석(金仁碩)
김 인석(金仁碩)은 본관(本貫) 경주(慶州)로 영조 11년(1735)에 김 지(金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석은 어려서부터 고결한 성품과 모든 행동이 착하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모았다. 인석의 지극한 효성과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38년(1762)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인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약을 다려드리면서 간호하기에 심혈을 기울여 그 효성에 마을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가 없이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인석은 약을 다려 간호하면서 밤마다 만뢰성(萬賴城)에 올라가 아버지의 병환이 쾌유되도록 기도를 올렸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어,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창창한 춘추시온데 병마에 신음하고 계시니 이 어인 일입니까. 천지신명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
하고 목메어 흐느끼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니 그 구슬픈 울음소리는 모든 사람의 구곡만장을 메이는 듯 하였다. 삼라만상이 고이 잠든 깊은 산속에서 거의 울음소리는 끊이는 듯하다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하다가 끊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피로와 오열에 지쳐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삼경이 넘어 있었다. 캄캄한 숲 속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의 병환을 생각할 때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큰 호랑이 두 마리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석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휘둥 거리며 살펴보니 호랑이는 순한 송아지처럼 좌우에서 꼬리를 흔들며 인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랑이는 말을 못할망정 꼬리를 흔들며 인석을 보호하겠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석은 좁고 험한 산길을 두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집에까지 돌아왔다.
이러니 사람들은 인석의 출천지효(出天之孝)에 호랑이가 감동하여 보호하여 준 것이라 하여 더욱 그를 추앙하게 되었다.
이토록 인석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천명을 다 했던지 그의 아버지는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남달리 효심이 지극한 인석은 상여를 붙들고 목이 터지라고 호곡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이지만 상여가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디선지 별안간 검은 까마귀 한 떼가 날라 와 상여를 에워싸는 것 이었다.
까마귀 떼가 상여를 에워싸고 나서야 비로써 상여가 출발하여 장지에 이르러 하관(下棺)을 마치니 비로써 까마귀 떼는 사라졌다.
까마귀는 원래 반포조(反浦鳥)라 하여 효(孝)를 아는 새로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왜냐하면 까마귀는 새끼가 처음 태어나면 어미 새가 60일 동안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새끼 까마귀가 자라면 60일 동안 먹이를 물어다가 어미 까마귀를 봉양한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포조(反浦鳥)는 효자의 상징어로 쓰이며 반포보은(反浦報恩)이란 말도 있게 된 것이다.
인석의 효행은 이렇듯 호랑이나 까마귀 등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까지 깊은 감동과 행동의 호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다.
인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1년 후며, 어머니 창씨(倉氏)가 돌아가신 후 6년째 되는 해인 영조 49년(1773)에 불과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성이 세상에 이미 진동하고 있었음으로 그 해에 정려를 명하고 교지(敎旨)가 내렸다. 천안시 병천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차량이 겨우 통하는 좁은 산길을 약 8km정도가면 봉항리(鳳項里)에 봉암 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 마을의 입구에 깨끗이 단청된 효자 정문이 우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이 김 인석(金仁碩)효자의 정문이다.
22) ②. 병천면 매성리 청주 한범이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
☯유적현황 : 병천리에서 매성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의 동향 사면 야산기슭에 위치한다.
정려는 시멘트 기단 위에 조성하였는데 정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하였다. 4면은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초석 없이 원형의 석주를 세웠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있는데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한범이 지 정려 함풍5년10월 일(贈 朝奉大夫 童蒙敎官 韓範履 之 旌閭 咸豊五年十月 日)
라고 쓰여 있다.
1990년 4월 29일에 준공된 이정문은 초석 없이 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를 얻고 기와를 올린 옛것을 흉내 낸 현대식 정문이다.
부모의 말을 한번도 거스른 적이 없고 부모공양을 우선하여 조석으로 부모님 입에 맞는 음식을 갖추었으며 부모 병 시엔 하늘에 대신하기를 기도하며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여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6년이나 시묘를 하였고 집이 가난하여도 기일엔 7일전부터 목욕재계 하고 성묘 후에 제사를 모시고 나이가 들으매 후학 들게 정성을 다하여 가르쳐 인제를 양성하고 자식들과 동등하게 대하였다. 목천의 방백과 유림들이 상소하여 철종6년(1885)별세 8년 후 조정에서 교지를 내렸으나 가세가 어려워 세우지 못하고 135년 후 한상운 한상옥형재분과 종인들의 노력으로 정문을 세워 후세에 그분의 부단한 인품과 덕행 그리고 효행을 귀감하고 있다.
23) ③.병천면 매성리 수안 이씨 효자 2정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
☯유적현황 : 병천리에서 봉성초등학교로 가는 도로에서 좌측으로 복전사로 돌아가는 도로변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4면은 홍살이 설치되었으며 원형의 초석에 원주를 세웠다. 정려 내부에는 2매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정면 우측은
효자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지재교 행 동턱랑 사헌부지평 이공복장지문 숙묘 계묘10월 명정 (孝子 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兼 知製敎 行 通德郞 司憲府持平 李公福長之門 肅廟 癸卯十月 命旌)
좌측에는
효자 승의랑 이공번지정려 숙묘 정미명정(孝子 承議郞 李公 藩 之門 肅廟 丁未 命旌)
라고 각자되어 있다. 상단에도 같은 내용의 현액이 걸려있다.
정려의 좌측에는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작성산 이복장 수성지지 사적비(鵲城山 李福長 守城之址 事蹟碑)
라고 쓰여진 비가 세워져 있다.
이복장(李福長)의 자는 신수(伸綏)이고 호는 송담(松潭)이고 관향은 수안(遂安)이다. 참판 영견(參判 永肩)의 현손이며 승지 익령(承旨 益齡)의 증손이다. 나이 9세에 모친이 질병에 걸리매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니 신기하게 바로 병이 나았다.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가솔과 주민 수백을 데리고 작성산에 피신하여 산성을 수축하고 창의(倡義)하여 많은 왜적을 무찌르니 공이 심히 컸다.
죽은 후 숙종 때에 와서 비로써 충효로 정문을 마을 입구에 세워 공의 행실을 귀감(龜鑑)하도록 하였다.
이번(李潘)은 복장(福長)의 손자이다. 장성 하여는 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어려 상복(喪服)하지 못하였음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사람과 더불어 즐거워하지도 않았다.
숙종때에 와서 정문을 세워서 그 효성을 칭송하고 공의 행실을 귀감 하도 록 하였다.
24 ④.병천면 봉항 효자 이순학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유적현황 : 봉항리에 위치한다.
병천 시장에서 풍산공원 쪽으로 대략 15분 달리면 풍산공원 입구 북쪽 산 능선에 2기의 정문이 있는데 그 중 산 밑 북쪽의 정문이다. 정문의 주변은 철책으로 보호시설을 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곁에 비를 세웠다. 정문은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하단이 4각으로 된 8각의 고주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홍살문 형식으로 현액을 걸었는데 현액에는
효자 통정대부 이순학 지문 옹정 칠년 기유 윤칠월 일 명정(孝子 通政大夫 李順鶴 之門 雍正 七年 己酉 閏七月 日 命旌)라고 쓰여 있다.(옹정7년1729영조5년)
이순학(李順鶴)은 부모가 병고를 겪으면 목욕제계(沐浴齊戒) 으로 하늘에 대신하기를 정성을 다하여 빌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부모의 생명이 천수를 다 하였다.
영조(英祖)때에 와서 비로 서 정문이 세워지니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목천현 근동면 소근리에 있었다(현재로는 병천면 봉항리 이다).
25 ⑤. 병천면 봉항리 효자 이귀웅의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유적현황 : 봉항리에 있는 이 정문은 이순학의 정문과 30여보 사이로 마주하며 마을의 야산 아래 밭 가운데에 잔디를 입혀 대지를 조성 한 뒤 세웠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8각의 고주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홍살문 형식으로 현액을 걸었는데 현액에는
효자 병절교위 행 용양위부사과 이귀웅 지문 옹정 칠년 기유 윤칠월 일 명정(孝子 秉節校尉 行 龍讓衛副司果 李貴雄 之門 雍正 七年 己酉 閏七月 日 命旌) 라 쓰여 있다.(옹정7년1729영조5년)
이귀웅(李貴雄)은 아버지의 병에 기(氣)를 입으로 빨아 쾌유(快瘉)시켰으며 어머니 병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하였다.
영조(英祖)때 정문이 세워지니 목천현 근동면 소근리에 있었다(현재로는 병천면 봉항리 이다).
26) ⑥ .병천면 도원리 강능김씨 충효열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유적현황 : 충효열문이란 현액이 걸려 있는 이 정려는 병천면 시장에서 풍산공원방면으로 자동차로 5분여 가다보면 도원리 입구란 큰 이정표 에서 우회전하여 가면 큰 다리를 건너 옆에 강능김씨 종중소유의 팔각정을 지나서 2층으로 되어있는 강능 김씨 종친회 사무실 앞에다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있는 이정문은 정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정려는 최근에 새로이 단장한 것으로 기단 부를 시멘트로 말끔하게 정리한 상태이고 주변은 잔디로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전면에는 충효열문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있다,
정려 내에는 열녀와 충신 그리고 효자의 현액이 걸려 있는바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열여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사직서령 김광열 처증 정부인 창영성씨 지문 (烈女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 社稷墅令 金光烈 妻 贈 貞夫人 昌寧成氏 之門)
충신 효자 증 순충겸의 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동원군 행 통훈대부 재용감 봉사 김철명 지문 (忠臣 孝子 贈 純忠兼義 補祚功臣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東原君 行 通訓大夫 濟用監奉事 金哲命 之門)
효자 통정대부 행 서산군수 홍주진관 병마첨절재사 김도혁 지문(孝子 通政大夫 行 瑞山郡守 洪州鎭管 兵馬僉節制使 金道爀 之門)
이라 적고 있다.
김철명(金哲命)은 본관이 강능이며(本貫 江陵)이며 벼슬은 제용봉사(濟用奉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아버지 이조참판 광열(吏曹參判 光烈)을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임진년 5월 11일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먼저 그 아버지를 칼로 치려 하니 철명(哲命)은 몸으로 아버지를 가리고 대신 맞아 죽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게 되어 이조판서를 증직(吏曹判書 贈職)하고 동원군(東原君)에 봉하며 효로서 정문을 세웠다. 그리고 사실들을 삼강실록에 기록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효를 귀감 하도록 소개하였다.
27) ①, 성환읍 대흥리 덕수장씨 정문
대흥리 연암대학입구 4거리 주유소 구석에 있는 이 정문은 원래는 도로 가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주유소가 생기여 언듯 보기엔 찾을 수가 없다. 천안 유도회에서 세운 이 정문은 원형의 호박모양 초석위에 원형의 기둥으로 홑처마를 하고 기와를 올린 정 측면 1칸의 정문으로 좌우와 뒷면을 벽돌로 막고 정면은 낮은 가로중방을 하고 쇠 파이프 로 홍살를 하였으며 오른쪽에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을 시설 하였다.
가운데 현판에
열여 의인 덕수장씨 지려 융희 3년 3월 명정(烈女 宜人德水張氏 之閭 隆熙3年 3月 命旌)
라 각자된 현판이 있다
열여 덕수이씨는 조선 말기 사람으로 정태양(鄭泰壤)의 부인으로 부군(夫君)이 갑자기 병이 발생하여 3년간 병간호에 지극정성으로 울안에 단(壇)을 쌓고 기도하였다. 백약이 무효하자 단지 수혈하여 남편의 생명을 연장 시켰고 부군이 줄 하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잘 안되었다. 그 후에 시 부모를 극진히 모시다가 시 부모가 돌아가시자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하시고 장례를 정성으로 모시고 나서 나을 후에 세상을 버렸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직산의 유현들이 합심하여 1966년 5월에 세웠다.
29) ①. 목천읍 덕전리 중니마을 언양김씨 효열정문
목천읍에서 약5km정도 북으로 하천을 따가 가면 목천읍 덕전리 중니 마을을 지나 구 덕전국민학교(현재 덕전야영장)를 지나 바로 길 엽에 남향을 하여 세워진 이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원형의 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전면에 언양김씨 효열정문(彦陽金氏 孝烈旌門)이라 쓴 큰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 중앙에는 비석을 세워 현액을 하였는데 비석에는
효자 통덕랑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지려 열려 영인 고성이씨 정려(孝子 通德郞 朝奉大夫 彦陽 金義淵 之閭 烈女 令人 固城李氏 旌閭)라 각자 되어 있으며 중앙의 현판에는
효자 통덕랑 증 동몽교관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지문 순조22년임오 윤삼월13일명정(孝子 通德郞 贈 童蒙敎官朝奉大夫 彦陽 金義淵 之門 純祖22年壬午 閏三月十三日命旌)
열여 공인 통덕랑 증 동몽교관조봉대부 언양김의연 처 증 영인 고성이씨지문 순조22년 임오 윤3월 13일 명정 (烈女 恭人 通德郞 贈 童蒙敎官朝奉大夫 彦陽金義淵 妻 贈 令人 固城李氏之門 純祖22年 壬午 閏3月 13日 命旌) 이라 세긴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정문은 영.정조 때를 살다간 언양 김의연과 부인고성이씨의 효열을 귀감 하여 세워진 정문으로 김의연은 나라가 풍전등화로 위기에 있을 때 호련이 몸을 던진 고려의 김취려와 조선 선조 때 김응상의 12세손과 7세손이 되며 사간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이 있는 김동연의 아우이다. 형이 과거로 관직에 있으므로 오로지 부모 봉양에 뜯을 두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시묘를 하며 조석으로 통곡하였고, 절 하던 자리는 활모양으로 움푹 패었다 한다.
허리에 종기가 생기여 그 고통으로 사경에 이르자 형인 사간공께서 극구 말류에도 불구하고 삼년시묘를 마치였다. 소문을 듣고 현감이 와서 보고는 칭찬하며 말하기를 뒤에 사람들은 김효자의 효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나무 표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한다.(後人 勿入 金孝子 侍墓之村 木碑立)그 후에 호련이 호랑이가 나타나서 항시 호위하였다. 또한 모친이 위독하자 단지 수혈하여 십 여년을 더 사시고 또 다시 위독하자 다시 단지 수혈하여 사일을 더 연명하여 형이 와서 임종을 보게 하였다.
그 후 단지 한 것이 잘못되어 사경에 이르자 부인 고성이씨도 내 어찌 아녀자로 부군의 죽음을 보리오! 하고는 식음을 전패하여 어머니 돌아가신 16일후 세상을 떠났다. 공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 5일후 돌아가시니 모두가 21일 상간에 벌어진 일로 옛 문헌에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순조년에 방백과 유현들이 상소하여 순조22년 윤삼월13일 정문이 대소인원하마비와 함께 하사되어 목천군 읍내면 와용리에 세워져 세인들을 귀감 하였으나 1880년에 세인들의 실수로 화제를 입어 전소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초석을 빼어다. 집을 짓는 만행도 있었다한다. 이러한 일을 통곡하던 공의 현손 되는 동몽당 주현공께서1968년 아들 현수와 조카들과 더불어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다음은 대록삼강실록의 내용이다
김의연은 본관이 언양(彦陽)1)이니, 고(故) 충신(忠臣) 응상(應祥)의2) 6세손이요 목사(牧使)3) 동연(東淵)4)의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본래 지극한 효자였다.
나이 겨우 네다섯 살 때에, 모부인(母夫人)5)어머니가 일찍이 질병이 있어서 효자6)에게 젖을 먹이며 말하기를, 『내가 장차 죽으려나 보다. 너는 그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하였다. 효자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어찌 살수 있겠습니까? 역시 어머니를 따라 죽으렵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부인도 역시 질병이 나았다.
성장하여 부모를 섬김에 예를 다하였고 한번 움직이고 멈출 적에 반드시 여쭈어 보고 행하였다. 그의 대인(大人)7)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운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모든 약이 효험이 없었다. 영남지방에 유명한 의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몸소 가서 처방을 물으려고 하였다. 그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이라서 빙판과 눈이 길을 막았고, 집에는 타고 갈 말이나 같이 갈만한 식구조차 없어서 맨 걸음으로 길에 올랐다. 친척들이 대체로 지금 가지 말고 내년 봄을 기다리자고 권하였다.
효자는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가 병들어 침상에 누웠을 때 용렬한 의원에게 진료를 맡기는 것을, 옛날 사람이 불효라고 하였다. 이제 명의(名醫)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멀리 봄이 오기를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자식 된 직분은 부모를 위하여 힘써 노력하며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도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지금 떠난다고 하여 반드시 죽기야 하겠는가?』하였다.
드디어 발을 감싸고 길을 떠나 하루에 백 여리를 걸었다. 무릇 8일 만에 의원의 집에 도착해 보니, 의원은 몇 달 전에 이미 죽은 몸이었다. 효자는 쓸쓸한 마음으로 곧장 길을 돌렸다. 해가 저물어 여관에서 묵었는데, 우수에 젖은 나그네8)가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한 노인이 묻기를, 『나그네는 얼굴에 근심이 있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효자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는데, 노인이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자세히 병의 증상을 묻고 이내 주머니에서 한 꾸러미 약을 꺼내면서, 『반드시 이런저런 약재를 더 넣고 다려서 드리면 마땅히 효험이 있을 터이니, 심려치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효자는 일어나서 절하고 조심스럽게 받았다. 다음날 아침 황급히 걸어서 기약한 대로 돌아와서 곧장 조제하여 드렸더니 여러 해 묵은 고질병이 이에 힘입어 나았다. 사람들은 효성에 감동한 신명(神明)이 와서 도왔다고는 말을 하였다.
그 뒤 12년이 지나 대인(大人)이 말질(末疾)9)에 걸렸다. 효자는 밤낮으로 황급하게 허둥거리며 침식을 전폐하였고, 밤이면 뜰 가운데 서서 북두칠성에게 빌며 자신으로 대신해 달라고 소원하였다.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째어 피를 마시게 하였으나 마침내 병을 낫게 하지 못하였고 애통해하는 것이 절도를 넘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대인이 생존하였을 때, 일찍이 명경과(明經科)10)에 응시하기를 권하였는데, 임종에 임하여 또 유계(遺戒)11)하기를, 『다른 날12)에 묘소 앞에 와서 경을 외우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재능과 행실을 특히 아껴서 그가 성공하기를 기대하여 바랐던 것이다. 효자는 감히 유교(遺敎)를 어기지 못하고 상을 마친 뒤에 한 달에 세 번씩 묘소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경전을 암송하여 그 소리가 묘소에 안장된 선친에게 들리도록 하였다. 암송을 마치고 애오라지 오열하여 그 슬픔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였다. 묘소가 십여 리에 있었고 길도 가파르고 험난하였으나, 아무리 큰 바람이 불고 몹시 추운 때일지라도 일찍이 혹간 그만둔 적이 없었으니,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편모(偏母)를 섬김에 더욱 효성과 사랑을 독실하게 하였다. 백씨(伯氏)13)는 과거에 급제한 뒤 서울에 있을 때가 많고 집에 있을 때가 드물었다. 모친이 연세가 들어 점점 노환을 심하게 앓았다. 효자는 마침내 집안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모친 봉양만을 생각하며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청렴하여 가난하였으나, 모친의 몸에 편안한 물건과 입맛에 알맞은 음식은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갖추었고 모친의 뜻에 순종하기에 힘썼다.
이와 같이 한지 십 여 년이 지나서 모부인의 병환이 갑자기 위급하였다. 백씨는 서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급히 한 사람을 서울로 보냈다. 그런데 나루터가 얼어 배로 강을 건너지 못하여 백씨는 출발 시기를 늦추었고, 병든 모친은 큰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이에 효자는 손가락 하나를 째어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형이 생전에 어머니와 만나기를 애원하였다. 모부인이 과연 깨어났으나 다시 까무러쳤다. 효자가 또 다른 손가락을 째어 피를 먹였다. 사흘 뒤에 백씨가 도착하여 마침내 모자(母子)가 임종 전에 서로 만나볼 수 있었다.
대고(大故)14)를 당하여 의연은 어머니를 따라 죽기로 결의하고 한 알의 쌀도 입에 넣지 않았다. 성복(成服)15)을 지나며 원기(元氣)는 자연히 성엣장 같고 손가락의 창병(瘡病)16)이 크게 도져서 마침내 죽음(不熟)17)에 이르렀다.
공인(恭人)18) 이씨(李氏)19)도 역시 시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한 때를 당하여 밤낮으로 애태우며 급히 서둘렀다. 이씨는 군자(君子)20)가 손가락을 째어 피를 마시게 하는 일을 보고, 놀랍고 애통하여 어찌할 줄 몰랐으며, 손가락의 창병이 나날이 심해지고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자 이내 구제할 수 없음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내가 차마 군자가 홀로 효도에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노라.』하였다. 이씨는 마침내 음식을 끊고 먹지 않다가 군자보다 먼저 며칠 전에 숨을 거두었다. 효자로다, 이 사람이여! 열부(烈婦)로다, 이 사람이여! 옛부터 효도에 죽는 자를 어찌 막으며, 정렬(貞烈)에 죽는 자를 어찌 막겠는가?
오직 이 사람 김효자는 부친상을 당하여 편모(偏母)가 살아있어서 몸을 감히 마음대로 못하였었다. 자모(慈母)가 돌아가시자 우러러 의지할 사람이 없고, 정성과 사랑이 미치지 못하여 삶이 온전하기를 바라지 못하였다. 차라리 홀연히21) 죽어 지하로 돌아가서 돌아가신 부모를 만나고자 하였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죽겠다고 한 말을, 끝내 백발로 늙었을 적에 실천하였던 것이다.
천 리나 멀리 있는 의원을 찾아 추위를 뚫고 산 넘어 물 건너며 두 발이 누에고치처럼 되었어도 시기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으니, 이는 매우 따라하기 어려운 일이다. 무슨 물건인가? 어느 노인이 신방(神方)22)의 묘약을 주어서 고당(高堂)23)의 실올 같은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백씨가 벼슬로 타지에 있을 적에, 모친의 병환이 갑자기 위독해지자 두 번 손가락을 째어서 마침내 병든 모친이 장자의 귀가를 보게 하였고, 형이 곁에서 임종을 지키게 하였다. 만약 경탄스런 효성24)이 하늘(天翁)까지 알려진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는 부모에게 효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능히 형에게 우애를 다한 것이니, 더욱 어찌 탁월하고 뛰어나지 않은가. 심지어 공인(恭人) 이씨도 차마 남편의 순효(殉孝)25)를 볼 수 없어서 먼저 운명(殞命)하였다. 이는 효자가 집안 식구들의 모범이 되어 그 교화가 부인의 정열(貞烈)을 이룬 것이다.
무릇 효(孝)와 열(烈) 이 두 가지에서 그 중 하나를 이루기도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데, 하물며 효(孝)?열(烈)이 한 가문에 모였음에랴? 이야말로 옛날의 효자도 드물었던 것인데도, 이 사람만이 유독 아직까지 정려의 표창을 받지 못하였으니, 실로 이는 은전(恩典)에서 빠진 것이다. 그 밖에 자기 몸을 근신하는데 청렴(淸廉)하고 검약(儉約)하며, 사람을 대할 적에 충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종족간에 돈독하고 화목하며 향당에서 진실하고 신중한 것은, 모두 효행 속에서 나온 결과이며 인근의 고을에서 전송(傳誦)되고 있다.
사람이 진실로 능히 효행으로 칭송하면, 이 밖의 여러 행실이 비록 혹간 넘나들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포상하여 칭송하건마는, 하물며 한 사람의 몸에 백행(百行)을 다 갖추었음에랴? 빼어난 행실과 빛나는 명성은 가까운 곳에서 멀리 퍼지고 시일이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조(禮曹)에서 증직(贈職)할 뜻으로 장계(狀啓)를 올리니, 정려를 명하시고 효자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26)을 증작(贈爵)하시고 부인(夫人) 이씨에게 영인(令人)27)을 증작하셨다.
☯ 교관공 행장(敎官公行狀)
공(公)의 휘(諱)는 의연(義淵)이고 언양인(彦陽人)이다.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의 17세손(十七世孫)이요, 정열공(貞烈公) 윤(倫)의 14세손(十四世孫)이요, 참판공(參判公) 자(赭)의 11세손(十一世孫)이요, 충신(忠臣) 응상(應祥)의 6세손이요, 사간(司諫) 동연(東淵)의 아우이다. 나서부터 비범(非凡)하고 본성(本性)의 효성이 지극하여 겨우 다섯 살에 모부인(母夫人)이 질환(疾患)이 있어 젖먹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니 너는 누구를 의지할 것이냐.”고 하자 눈물을 머금고 답하기를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 저는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또한 따라서 죽겠습니다.”고 하니 듣는 이 모두가 기특하게 여기고 모부인의 병(病)도 나았다.
자라서는 예(禮)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모부인의 와병에 여러 해를 백약(百藥)한데 영남(嶺南)에 명의(名醫)가 있음을 듣고 몸소 가서 묻고자 하였다. 때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길이 막혀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가서 여러 날 후에 도착하니 의원(醫員)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서 공(公)은 막막하였다. 귀로에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근심하는 용모가 방인(傍人)을 감동시켜 한 노인이 묻기를 “무슨 근심이 있어 자지 못하는고?” 하자 공(公)이 사실로 대답하였다. 노인이 한약 꾸러미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약을 쓰면 으레 효험이 있으리라.”고 하니 공(公)이 절하여 받고 서둘러 돌아와 다려 드리니 여러 해 묵은 고질이 쾌히 나았다. 사람들은 “효성(孝誠)의 감동으로 천지신명이 와서 도와 준 것이다.” 하였다.
십여년 뒤에 부친께서 병환이 나자 애태우며 허둥지둥 약을 써 보며, 밤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에 축수(祝壽)하면서 자기가 대신할 것을 빌었다. 급기야 위독(危篤)하시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드렸으나 구명치 못하고 애훼(哀毁)함이 절도를 넘었고, 시묘살적에 허리에 종기가 생기여 그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자 사간공 께서 극구 말류에도 불구하고 삼년시묘를 마치였다. 그 후로는 부친의 유언에 초하루 보름으로 사경을 암송하는 것이 듣고 십다, 하여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며 사경을 암송하기를 죽는 날 까지 끊이지 않았다.
절하던 자리는 활처럼 움푹 파이고 현감이 소문을 듣고 와서 칭송하며 말하기를 김효자 시묘 사는 곳이니 방해 말라(後人 勿入 金孝子 侍墓之村)이라는 목비를 세워 칭송 하였다. 그 후 호랑이가 홀연히 나타나 항시 호위하였다 한다. 자모(慈母)를 더욱 독후(篤後)한 효성으로 섬겼다. 백형(伯兄)이 과거(科擧)를 보고 서울에 살면서 벼슬하자 공은 오로지 공양에 뜻을 두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몸에 편한 물건과 입에 맞는 음식을 극력으로 갖추었고 그 뜻을 잘 받들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 모친의 질환이 갑자기 위독(危篤)했을 때 백형(伯兄)이 귀가하지 못해 모자만 임종시(臨終時)에 두번 단지수혈로 사일 연명하여 형이 와서 상견(常見)하게하였다. 대고(大故)를 당하자 순사(殉死)할 것을 결심하고 식음을 전폐한데 손가락 창(瘡)이 크게 터져 끝내 별세하시고 말았다.
부인 이씨(李氏)도 효열의 성정이 있어 부군이 손가락을 자르는 거사를 보고 손가락 상처가 점점 심해져 구원되지 못할 걸 알게 되니 울면서 말하기를 “내 어찌 차마 부군이 죽는 것을 보리요.”하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부군보다 며칠 앞서 서거하였다. 효자로다, 열녀로다. 예로부터 효열에 죽은 이를 어찌 셀 수 있으리오 마는 오직 공의 효(孝)와 그 부인 이씨(李氏)의 정렬이 한 가문에 모였으니 이것은 옛적에도 희유한 일이다. 대부분 사람이 효열로써 칭송되면 그밖에 다른 행실이 혹 지나치고 모자람이 있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포상하여야 할 것이다. 하물며 한집안에서 효(孝)와 열(烈)이 동시에 같이 출현함에 있어서야(더 말할 나위 없다). 탁이한 행실과 찬란한 명예는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 순조(純祖)시에 예조(禮曺)에서 증직할 것을 구계하고 명하여 정문을 세우고 공에게는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를, 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에게는 영인(令人)을 증직(贈職)하였다.
지금 그 현손 참현(玄孫參鉉)이 그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그 행장(行狀)을 부탁하거늘 이것을 천학이 감(敢)히 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고사(固辭)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대략 특이하게 보인 바를 가감하고 수정하였다.
정삼품행 비서원비서 승증외손 이종악(正三品行 秘書院秘書 丞曾外孫 李鍾岳)지음
☯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정문의비문(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旌門義碑文)
김의연(金義淵)은 사간(司諫) 동연(東淵)의 아우인데 언양인(彦陽人)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자(赭)의 11대 손이다. 부 병환에 명의를 찾아 눈이 쌓인 겨울에 영남(嶺南)으로 갔는데 의원은 이미 죽은 뒤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관에서 하루를 묵는데 한 노인이 첩약을 주어 가지고 와서 달여 드렸더니 병이 나았더라. 그 후 어머니 병에 양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더니 3일 더 사시고, 공은 손가락 에 창이 나서 돌아가셨다. 예조(禮曺)에서 증직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참판 준진(參判 俊盡)의 증손녀인데 통덕랑 김의연(通德郞 金義淵)의 부인이다.
“남편이 어머니 병환 시에 손가락 자른 것이 잘못되어 창이 나서 못 살게 됨을 알고 내가 남편의 죽음을 어찌 보리요.” 하고는 남편보다 며칠 앞서 돌아가셨다. 효자로다. 열녀로다. 예조(禮曺)에서 정문을 내릴 것을 건의하였다. 옛날 정문(旌門)이 있던 곳은 목천군(木川郡) 읍내면(邑內面) 와룡리(현, 목천면 서흥2리 저수지 근처)에 있었는데 1880년(경진) 3월에 불이 나서 정문이 전소되었다. 그 후 1968년(단기 4301무신) 3월에 현손 주현(玄孫 周鉉)이 5세손들에게 명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협력해서 목천면 덕전리 중리 덕전국민학교 뒤편에 중건하였다.
단기 4301년 무신 3월 재립(再立)
방 5대손 붕수(鵬洙)가 짓고 현손 주현(周鉉)이 세움.
• 정려중수기문록(旌閭重修記文錄)
중수자 고손 김주현(金周鉉)
기록 6대손 종식(鍾植)
본 정문(旌門)은 목천에 사는 언양 김공(金公) 효자 통덕랑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의연(孝子 通德郞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義淵)과 그의 부인인 공인 증 영인 고성 이씨(恭人 贈 令人 固城 李氏)의 효열 정려문(孝烈 旌閭門)이다. 조선의 영조(英祖)때에 모부인 와병 시 두 번 단지수혈(斷指輸血)하여 모부인의 병은 연명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병이 깊어져 돌아가셨다.
부인 이씨도 효열이 있어서 부군의 거사에서 손가락의 종창으로 부군(夫君)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내 아녀자로 어찌 부군의 죽음을 보리 오” 하고는 식음을 전패하고 부군보다 며칠 앞서 돌아가셨다. 또한 아버지 상시에는 공이 묘막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는데 허리에 종기가 생기여 그 고통으로 사경에 이르자, 형인 사간공께서 극구 말류에도 불구하고 상장막대기에 의지하여 삼년시묘를 마치였으며 절하던 자리는 활처럼 움푹 파였다.
부친의 유지에 따라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며 묘 앞에서 사서삼경을 암송하기를 죽는 날 까지 하여 지하에 게신 부친이 들리게 하였다. 현감이 와서 보고 칭송하며 뒤에 사람들은 김효자의 효행을 방해 말라는(後人 勿入 金孝子 侍墓 之村) 목비(木碑)를 세워 칭송하였고 그 후 호랑이가 홀연히 나타나 항시 호위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슬퍼한 나머지 16일 후 부인 이씨가 졸하고 5일 후에 공이 졸(卒)하였다. 모두 합하면 21일 상간에 어머니, 부인과 공이 모두 졸하니 이는 옛날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 희유(稀有)한 일이로다.
목천 현감(縣監)과 유림이 상소하여 조선 순조(純祖)22년(1822) 임오(壬午)윤 3월 13일에 교지를 하사하여 정문(旌門)을 세우니 목천의 거리가 밝았다. 목천군 읍내면 와룡리에 정문을 세우고 보존하였으나 1880년 3월 사람들의 실수로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고 주초석(柱礎石)만 비바람을 맞으며 수십 년을 내려오던 중, 공(公)의 현손인 동몽당 김주현(童蒙堂 金周鉉)이 그의 큰아들 청송 김현수(靑松 金賢洙)와 조카들에게 명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 중니 덕전국민학교 뒤 길 옆 김주현(金周鉉)의 밭 끝머리에 1967년(丁未) 시월에 사방 20보 10보에 유림들이 모여 중수하여 발기하고, 11월에 기공하고 다음 해에 1968년 무신(戊申) 4월에 준공하니 이는 조상을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로다
정문중수 추진위원(旌門重修 推進委員)
현 손(玄 孫) 주현(周鉉)
5대손(五代孫) 인수(仁洙) 창수(昌洙) 현수(賢洙)
정문중수시 소요대지(旌門重修時 所要大地)
현 손(玄 孫) 주현(周鉉)
정문중수시 소요원목(旌門重修時 所要原木)
현 손(玄 孫) 주현(周鉉)
5대손(五代孫) 인수(仁洙)
정문중수시 단청(旌門重修時 丹靑)
5대손(五代孫) 태수(泰洙)
정문중수시 현판봉안(旌門重修時 懸板奉安)
6대손(六代孫) 종식(鍾植)
※ 1977년(정사년:丁巳年)에 5대손 청송현수(靑松 賢洙)가 당시 군청에 건의하여 천원군청의 보조로 단청과 기와를 새롭게 보수하였다.
※ 1993년(계유년:癸酉年) 보수시 단청은 5대손 청죽태수(靑竹 泰洙) 6대손 연구(連九)와 돈구(敦九)가 각 백만원씩 출연하여 기와를 새롭게 보수하였다.
1993년 보수시 추진위원(癸酉年 補修 時 推進委員)
5대손(五代孫) 갑찬(甲燦) 현수(賢洙) 태수(泰洙)
6대손(六代孫) 관식(觀植) 종식(鍾植)
바람막이 5대손(五代孫) 흥수(興洙)
6대손(六代孫) 관식(觀植) 상식(尙植)
목천향교(木川鄕校)의 기문록(記文錄)과 목천현지(木川懸誌)를 상고(相考)하여 감히 흠이 될까 염려하며 글을 줄여서 중수기문(重修記文)을 지으니 선조(先祖)님께서는 편히 쉬십시오.
다음은 목천읍 석천리 먹방이 묘소에 있는 비문이다.
☯ 김의연(義淵) (1731년 6월 11일 ~ 1781년 12월 11일) 통덕랑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通德郞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효자공의 비
묘소 :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 먹방 큰 산소 왼쪽 건좌(乾坐)
☯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묘갈명 (孝子 童蒙敎官 朝奉大夫 彦陽 金義淵 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의연(義淵)이요. 언양 사람(彦陽人)이다. 경순왕(敬順王)의 일곱째 왕자 선(鐥)의 후손인 위열공 취려(威烈公 就礪)의 17세손(十七世孫)이요, 정열공(貞烈公) 윤(倫)의 14세손(十四世孫)이요, 참판공 자(參判公 赭)의 11세손(十一世孫)이요, 충신 응상(忠臣 應祥)의 6세손이요, 사간공 동연(司諫公 東淵)의 아우(弟)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본성(本性)의 효성이 지극하셨다. 자라서는 (成長) 예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모부인 와병에 백약이 무효한데 영남 (嶺南)에 명의가 있음을 듣고는 엄동설한에 도보로 여러 날에 의원을 찾 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귀로에 날이 저물어 유숙하는데 근심 하 는 용모가 방인을 감동시켰고 한 노인(老人)한테 선약을 구하여 달여 드 리니 쾌히 나았다. 사람들은 효성(孝誠)의 감동으로 천지신명께서 도와 주 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 상시에는 공이 묘막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는데 허리에 종기가 생기여 걸을 수가 없어 그 고통으로 사경에 이르자, 형인 사간공 동연께서 극구 말류에도 불구하고 삼년시묘를 마치였다. 절하던 자리는 활처럼 움푹 파였다.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며 묘 앞에서 사경을 암송하기를 죽는 날 까지 하였으며 지하에 계신 부친이 들리게 하였다. 현감이 와서 보고 칭송하며 뒤에 사람들은 김효자의 효행을 방해 말라는(後人 勿入 金孝子 侍墓之村) 목비(木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 후 호랑이가 홀연히 나타나 항시 호위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슬퍼한 나머지 16일 후 부인 이씨가 졸 하고 5일 후에 공이 졸(卒)하였다. 10년 후 모친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렸으나 구명치 못하고 상을 당하자 순사할 것을 결심하고는 음식을 전폐한데다가 손가락의 종창으로 끝내 별세하셨다.
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도 효열의 정성이 있어 부군이 손가락을 자르는 거사를 보고 손가락 상처가 점점 심해져 구원되지 못할 걸 알게 되자 울면서 말하기를 “내 어찌 부군의 죽음을 보리요.”하고는 음식을 전폐하고 부군보다 육일(六日) 앞서 서거하셨다. 효자로다, 열녀로다. 공의 효(孝)와 부인 이씨(李氏)의 열이 한 가문에 모였으니 이것은 옛적에도 희유(稀有)한일이다.
효와 열(孝烈)의 찬란한 행실이 드러났도다. 순조 시(純祖 時)에 예조에서 증직(贈職)할 것을 명(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공(公)에게는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부인 고성 이씨(夫人 固城 李氏)에게는 영인(令人)을 추증(追贈)하였다.
이 석물은 5대손(五代孫) 현수, 흥수, 태수(賢洙, 興洙, 泰洙) 삼형제(三兄弟)가 합심으로 봉행하였으며 이 비(碑)를 세워서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리라.
서기 1989년 2월(서기 1989년 2월)
6대손 현수, 흥수, 태수 삼형제 합심하여 봉행〔賢洙, 興洙, 泰洙 三兄弟 合心奉行〕하고 6대손 종식(六代孫 鍾植)이 씀.
북면
30) ①. 북면 운용리의 남원 윤영발 정문
☯소재지 : 천안시 북면 운용리 군단이마을
☯유적현황 : 21번 국도를 따라 독립기념관 사거리를 지나 북면 연춘리를 자나 큰 다리 앞에서 북면 쪽으로 좌회전 하여 691번 국도를 따라 20여분 가면 운용리 입구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설치하였으며 4면에 홍살을 시설하였다. 8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있는데
효자 증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윤영발지문 광무7년 계묘6월7일 입 (孝子 贈 嘉善大夫 漢城府左尹 尹永發之門 光武七年 癸卯六月七日 立)
이라고 각서되어 있다.
윤영발은 남원인으로 무판관 승남의 손이다. 부친의 병에 꿩이 약으로 쓰인다는 말을 듣고 하느님께 정성껏 빌었더니 꿩 한 마리가 앞에 날아오므로 잡아 썼고 손가락을 단지하여 하루를 더 연명케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는 관직을 버리고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고 질풍폭우에는 묘를 안고 슬피 울기를 종신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 후 1903년 6월 7일에 정려가 세워졌다.
31) ①. 청당동 거재 원주 원씨 정문
☯소재지 : 천안시 청당동
☯유적현황 : 천안에서 온양 쪽으로 가다가 카르프 앞에서 남부순환도로 좌회전하여 병천 청주방면으로 약 1.500여m 정도 가다 보면 도로의 남쪽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으로 한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설치 있으며 4면의 홍살을 쇠창살로 시설하였다.
8각의 1m정도 고주(高柱) 초석 위에 원주를 하여 세웠다.
내부에는 비가 서있는데,
여산송공 재혁지처 열여 원주원씨 지려(礪山宋公在赫之妻 烈女 原州元氏之閭)
라고 각서 되어 있다.
이 정문은 2005년 12월경 도시개발로 매립되어 정문이 헐리고 청당동 거재의 송씨들이 모두 떠나 그 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여산송씨 가보에도 원씨의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32) ①. 용곡동 두터골 정계인 정문 효자 정계인 (孝子 鄭戒仁) 묘소와 정려가 군남면 신리에 있다. ○ 증손과 험손(驗孫)이 묘소 아래에 산다.
☯소재지 : 천안시 심방동 두터 골
☯유적현황 : 천안 일봉산 남쪽 자락 용곡동 두터 골에 있는 이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한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설치 있으며, 좌우를 붉은 벽돌로 마감을 하였고, 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뒷면은 1m정도 원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나무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정면과 후면은 홍살을 설치하였다, 하단을 한자반 정도 붉은 벽돌로 쌓아 정면에는 정효자의 효지를 새기고, 후면에는 1m정도 붉은 벽돌을 쌓아 홍살을 설치하였고, 행적을 새긴 현판을 달아 볼 수 있게 하였다.
孝子 學生 鄭戒仁 之閭(효자 학생 정계인지려)라
각자하여 붉은 현판을 달고 뒷면에는 행적을 각자하였다.
현재는 주변이 산업화로 급속히 변하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주변이 모두 훼손되고, 옛 선조들의 혼이 깃든 효행과 정려의 정신은 차자 볼 수 없다,
정계인은 천안 군남 사람이고 아버지는 양반인 일남(日南)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임신년 4월 24일 밤에 불한당들이 무리지어 돌입하여 가재를 약탈하였고 칼을 뽑아 아비 일남을 죽이려고 하였다. 계인이 몸을 던져 뛰어 들어가 날개를 펴듯이 아버지를 덮으면서 지성으로 애걸하였다. 비록 무수한 상처를 입었지만 끝내 꿈쩍하지 않고 자신을 아버지 대신 죽여 달라고 하는 말을 끊임없이 하였다. 도적들도 감동하여 차마 해치지 못하고 부자를 함께 놓아 주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정계인은 효행이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그 후에 일남이 병들어 죽으려고 할 적에 계인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주입하여 회생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장계를 올렸고 경진 년에 본도에서 조정에 알렸다. 경인년에 비로소 정려를 내리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계인은 57세로 갑진 년 정월에 죽었다.
【안】옛적에 강혁(江革)이 도적을 만나 애걸하여 노모를 살렸는데, 주자가 이를 취하여 《소학(小學)》에 실었다. 지금 정계인이 선인의 훌륭한 말씀과 행적을 알지 못하였지만, 힘껏 흠모하여 그 경지에 이른 것은 지극한 정성이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부모가 계신 것만 생각하였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슬 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이와 같이 부모를 구원하였고, 자기 몸이 무수히 칼날에 찔리면서도 입에서는 부모를 대신하여 죽여 달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였으니, 단지 강혁의 정성어린 말에 견줄 것만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사람은 옛사람만 못하다고 말하지만, 계인의 행실을 보면 옛사람과 지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 있는가? 아-, 공경스러울 따름이로다!
이곳에 게제된 31곳의 천안의 정문들은 천안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문화유적을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본인이 가감 편집한 내용들 입니다.
손수 천안의 모든 정문들을 찾아 다니며 후손들의 도움으로 족보를 참고하였고 협조하지 않는 문중은 현존하는 정문의 기록내용을 이용하였다.
컴푸터를 잘못 다루는 관계로 간혹 오자가 있을수 있으며 부족한 부분은 뒷날을 기약하고 천안의 효행을 귀감 하는데 다소 도움이 됬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뿌신 가운데도 협조를 해주신 각 문중의 어르신들께 이 지면을 통하여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천안의 문화유적
천원군지
천안시지
역사의 현장
충효열전
내고장의 빛난 얼
강능김씨대동보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2편. 효열비
목천읍
1). 목천읍 송전리 언양 김세현부인 파평윤씨 효정비
열부파평윤씨기적비(烈婦坡平尹氏記績碑)★: 목천읍 송전리 경로당앞
열부 파평윤씨는 언양 김세현의 부인인데 노성(지금이 논산)윤자건의 여식으로 이곳 삼뱅이로 시집을 왔다, 불행이도 부군이 병이 생기여 차도가 없어 고행을 하다 자식이 없이 세상을 뜨자, 대청에 고연을 모시고 조석으로 따듯한 음식을 향음 하고 곡 하기를 끝이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상(喪)을 마친 후 부군 곁에 묻히기 원하며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나 향리의 유현들이 효부라 칭송하며 대록(목천의 옛 이름)삼강실록을 편찬할시 그 행적이 기록되어 전하다, 잊혀진 것을 천안향토사학자 후손 국봉 김종식(國峯 金鍾植)이 발굴하여 번역하고 총친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열부 파평윤씨 기적비문
열부 파평 윤씨(1846-1870)는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노성(현재논산)에 사는 윤자건(尹滋建)의 딸로서 언양 김씨 사간공 동연(東淵)의 증손자인 지항의 둘째아들 세현의 아내이다. 세현(世鉉1849-1870)은 문아한 선비이지만 불행하게도 역병에 걸렸다. 윤씨는 그때 노성의 친정에 있었는데 소식이 급히 전해오자 윤씨부모는 윤씨를 급히 서둘러 떠나보냈다. 윤씨는 이별을 고하면서 죽고 사는 것은 하늘 명에 달렸으니 근심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소리도 태연하게 도리어 양친의 마음을 위로하고 떠났다. 시댁에 도착하여 이틀이지나자 세현의 병은 악화되어 결국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지항은 상(喪)을 당한 날에 집안 식구들에게 아이가 요절하여 후사가 없으니 어떻게 영연(靈筵)을 설치하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윤씨가 이 말을 듣고 애통하게 울면서 말하기를 제가 김씨가문에 들어 온지 7년이나 친정에 있던 날이 많고 시댁에 있던 날은 불과 몇 달 입니다. 지아비가 살아 있을 적에도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거늘 지아비의 죽음에 조석으로 전을 올리지 못한다 하면 부부의 정례(情禮)가 버려진 것입니다 또한 영연(靈筵)이 아니면 제가 무엇에 의지하여 하루라도 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시아버지가 윤씨를 위하여 영연을 설치하였으며 이에 윤씨는 조석으로 정결하게 전을 올리고 엎드려 통곡(痛哭)하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또 상복을 입은 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의 동서에게 말하기를 나의 소망은 삼종(三從)의 도리에 따라 의리에 맞게 죽는 것이다 우선 지아비의 장례를 기다렸다가 함께 한 무덤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였다 결국은 7월에 홀연히 약을 먹고 영원히 세상을 떠나니 부인의 찬 서리같이 늠늠한 절개와 태양같이 세찬 기개는 사람의 뼛속가지 스며들고 세상에 널리 빛났다.
친정아버지가 와서 곡 하며 말하기를 저번에 네가 어머니에게 올리는 편지를 보고 벌써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 과 같다. 어리석은 딸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저의 본뜻이 아닙니다.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의리만을 쫓을 따름이니 살아서 의리를 어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의리에 맞는 것이 더 낫고 살아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마음편한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음으로서 삶을 바꾸어 저의 소원대로 의리를 쫓을 것입니다. 오호라! 윤씨의모든 행적은 무릇 귀감이 되기에 이를 기리어 널리 세상을 도와 쓰이게 하려고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비를 세운다.
서기 2003년 계미 2월 28일
향토사학자 김종식은 짓고
언양김씨 천안종친회 김영구. 손, 정구 증손, 병재. 현손, 기영.대영.원영. 후손, 병은. 소영. 무영. 관영. 우영.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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