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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동학농민군 세성산 전투사

吾心竹--오심죽-- 2012. 1. 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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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동학농민군 세성산 전투사

 

 

 

▢ 1894.10.21 천안지방 동학농민군 전투 역사를 정리한다

 

지금까지 천안지역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은

①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시 세성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다.

② 관군을 도와 협조한 의병이 있다.

기록에 대한 자료들을 보지 못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에 대한 번역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고 뿐만 아니라 번역도 하였기에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자료를 쉽게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천안지역에서 알려져 있는 내용과 많은 부분을 새로이 정리 할 수 있었다.

 

우선,

① 세성산 전투는 관군과 일본군이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패배시킨 것이 아니고 청주지역에서 이동한 죽산부사 이두황의 군대 813명이 동학농민군 세성산 진지를 공격하여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② 관군을 도운 의병들은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토벌 전투에 참여했고

세성산 전투와 인근 동학 잔재를 소탕 수습하는 일을 도왔다.

 

특히, 천안지역은 세성산 전투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적어도 세성산 전투가 있기 1년 전부터 천안지역은 동학의 성지와 같은 장소로 충청도지역의 동학인의 모집장소 중심지임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조명하여야 할 목천출신 인물로 알려진 이운규(李雲圭) 선생이라는 본명이 이수증(李守曾-本 全州) 철종 때 대과에 급제 대원군(고종1년) 때 관직에 부임, 묘소는 목천 삼뱅이에 있으며 후손들이 제향하고 있다. 이운규는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 (知人之鑑)에 밝아 최제우(崔濟愚)와 김광화(金光華), 김항(金恒)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

 

1861년(철종12년) 이운규선생은 최제우, 김광화, 김항을 차례로 불러 교시하였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3·7자 주문을 독송하며심신을 연마하라 하였다.

김광화에게는 불교적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南門)을 열고 바라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하라고 하였다.

김항에게는 유교적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시를 남겨주었다. 그리고는 이운규선생은 표현히 띠울 마을을 떠나 무주 용담(龍潭)으로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본 고향인인 천안 목천(木川)으로 돌아왔다 하나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기록이다.

그 뒤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광화는 남학(南學)을 창시하였으며,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해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正易)>의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앞으로 이운규, 김광화, 김항에 대해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반가운 사실이 있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목천 목판본을 김종식(金鍾植)이 발굴하였다.

그동안 필사본만 규장각에 있었는데 이번에 목천지역 비장(秘藏) 되었던 판본을 발굴하여 복사본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

 

 

木川 細城山 東學農民軍 戰鬪 人命殺傷 實相

 

 

※ 미상자 포함 1천여명 살상

 

1894. 10. 21 새벽 이른 시간 전투, 전사, 소탕 살상 명단

 

金福用, 金永祐, 元金玉(목천) 金化成(천안), 金鏞熙(木川) 金聖至(목천) 韓有吉(東面), 정인석(북면), 김교형(병천) 黃聖道(직산), 최창규(목천), 李熙人(木川), 洪致燁, 김중칠 3兄弟, 宋完成(新店), 羅采益, 李善一, 金羅貴(원거리) 金順京(원거리), 鄭學天(知井), 林萬鎭(원거리), 이천옥, 김성범 신일석, 李千如, 徐成萬, 黃致敎(馬山), 申成甫(직산), 朴明淑(진천), 尹成宜(驛村), 李成日, 全福同, 金化成 子(원거리)

 

이복길, 송치성, 박흥길, 김흥복, 김영손, 설정업, 이영희 김병구, 고순용, 고성환, 신정문, 김영교, 송석태, 진한식 박영식, 박계선, 임순용, 이언녀, 안덕인, 김정현, 진암희 김경백, 김수녀 이진녀, 고춘일, 임오일, 김형옥, 金春日 金致善, 李成日, 全福同, 韓喆永, 金炳憲, 최창규, 이희인 한철영, 최창규, 김병헌, 김춘일, 김치희

 

 

 

 

 

東學 農民軍 天安地方 沿革

목천, 천안, 전의

 

1883. 2월 : 동면 장송리 金殷卿家(강릉)

東經大全 100部 發刊行 勢成長

天安 大接主 金化成

목천 복구정 대접주 김성지, 金鏞熙

도세확장, 장창, 화포, 무기 제작 준비

봉건타파, 외세투쟁, 제국주의 침략 대항

양반 신분사회 신분제도 폐지

민중봉기 의거 투쟁

金殷卿 木川地方土族 父 金演奎 현감

 

1894. 1. 10 : 농민군 고부군청 도모

 

1894. 4월(1차) : 농민군 백산 7천여명 봉기

 

7. 8 : 청일전쟁 소사벌 전투

 

9월(2차) : 삼례회의 전봉준, 김개남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연합 전선 봉기

공주요충 거점 확보하고 논산 대본영 설치

경상도 충청도 의병합세 조직 체계 구축

 

※ 한성에서 남진하는 관군,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방 천안 방어진

으로 세성산을 선택했다.

 

삼남 동학농민군 연합부대 한성으로 북진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세성산을 선택했다.

 

 

1894. 8월 : 천안 목천 전의 호서지역 동학농민군 1,500명 기포세력

표면화

 

9월 2일 : 농민군 세성산 입성

 

9월18일 : 기포령 이후 이희인 김복용 기병,

목천현, 천안군, 전의현 도모 무기 알곡 확보

세성산 입산

 

9월30일 : 농민군 4천여명 세성산 입산 규합

무기, 식량 확보 세성산 포진

 

1894.10.14 : 목천현감 정기봉(鄭基鳳)을 충청, 경기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鄕里 농민들을

무마 또는 선별하였다.

관군은 집강소를 설치 운영하고 유화군(宥和), 소모군

(召募)을 활용하여 의병들을 모집하고 농민군을

설득시켰다.

 

10월18일 : 청주병영 세성산 토벌 지시

관군 죽산부사 이두황 목천 세성산 이동

현대식 무기 무장 훈련군 813명

세성산 농민군 포위

 

10월21일 : 새벽 이른 시간 관군 농민군 포위

기습공격 개시, 농민군 패퇴

패퇴 농민군 세력 광덕 대거리, 만복골 재집결

유구전투 참전

 

일방적 토벌, 사살, 처절 현장, 화력열세 전술 미숙.

동학농민군 일천여명 희생.

무기 작동할 줄도 모르는 훈련받지 못한 열악한 병력, 전투력 이었다.

 

무지한 농민들은 동학교들에게 포섭되거나 강제협박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관군의 공격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주하는 농민들에게 동학의 주문을 강제로 외우게 하며 희생되기도 했다.

 

관군의 병소 윤열렬(尹英烈) 통령 윤치소(尹致昭) 통령 소모 300 의병 합류 공로 별군관 치하 받았다.

 

세성산 동학농민군 4천명은 일본군 지원 없는 관군 813명에게 일방적으로 패전하였다.

 

현장에서 370명이 전사하고 770명이 부상자, 포로 17명이였다.

 

 

1894년 10월25일 :

세성산 전투의 참패는 동학농민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쳐 10월25일에는 충남농민군의 대진 홍주성이 이승우가 거느리는 관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세성산을 공략한 관군의 본대는 세성산을 출발하여 공주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공주의 광정에 진을 치고 공주에 유지하고 있는 관군과 합세하여 공주 방어에 주력해 갔다.

 

이 당시 세성산 정상은 커다란 바위로 뒤덮혀 있었으며 이곳 바위에 동학농민군은 진막을 설치하였고, 한편 세성산을 탈환한 관군은 동쪽 산록에서 부터 동학군을 패퇴시켜 서쪽 계곡에 몰아 넣어서 몰사 시키려 했다.

 

이 사실은 당시의 기록들과 현지의 구전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서쪽 움푹 들어간 사시당골에는 수천 동학군을 쓸어 넣어 죽였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서워서 나무도 안했다”고 한다.

 

당시에 여자들은 “동학군들이 무서워 집에서 잠도 못자고 피난을 다녔다”고 하며 마을에서는 산 위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바위를 “떼머리 푼돈”이라는 묘한 어휘로 부르고 있다.

 

작성산이나 세성산이나 동학군이 북에서 남으로 진지를 옮기기는 하였지만 이 두 군데가 모두 충절의 고장 목천현의 북면과 성남면 땅이다.

 

 

1894. 12월20일 : 전봉준 체포

 

1894. 10월27일 :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은 총지휘부에서 동학농민군

무차별 학살, 살육을 명령한다.

 

1895. 3월29일 :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성, 성두환 순교(교수형)

 

전봉준 유언

“우국단성수하지(憂國丹誠誰何知)”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누가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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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

 

 

▢ 세성산 전투 전황

 

<세성산 전투에서 관군의 노획물>...김양식 기록

무 기 류

조총

140정

나팔

2개

288자루

긴화살(長箭)

3300개

거마철(巨馬鐵)

32건

아기살(片箭)

2000개

징(鉦)

5좌

※청국탄환 36궤

22500개

동로구(銅爐口)

3좌

철환(鐵丸)

366000

북(鼓)

3좌

작은삽

5자루

큰삽

5자루

소철로(小鐵爐)

1좌

월도

1좌

곡괭이

1자루

철촉롱(鐵燭籠)

2쌍

잡색대소기(雜色大召旗)

30면

철질려(鐵蒺藜)

1500개

화살촉

2000개

◦ 백미 266섬, 벼 367섬, 콩 12섬, 보리 8섬, 소금 3섬

- 조총 140정,창 288자루, 나팔 2개

- 긴화살 3,300개, 아기살 2,000개, 대소기(旗) 30개

※ 청국탄환 36궤(22,500개)

◦ 철환 336,000개

 

◦ 패퇴 동학농민군 전사 370명

중경상자 77명, 포로 17명

유화군, 소모군, 관군 의병에 의해 소탕 사살된 동학농민군

1천여명 추산

 

◦ 관군 : 세성산 전투대장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

충청소모관 정기봉(鄭基鳳)

목천현감 이수영(李秀永)

의병소 통령 윤영렬(尹英烈) 천안감찰

윤치소(尹致昭) 조 카

※ 소모의병 300명 소모공 차하 “별군관”

 

▢ 동학혁명과 농민봉기 정신

 

※ 갑오 동학농민군 봉기

 

1894년(고종31) 1월 10일

 

1천명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여 고부군청을 습격하였다. 이것이 세칭 “고부민란”이다. 농민중심의 동학당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들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제폭구민(除暴救民) 축멸왜이(逐滅倭夷)”의 기치 아래 봉기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은 점차 일정한 지휘체계를 갖춘 동학군으로 변모하였고, 몇 개월만에 삼남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리하여 3월25일 동학군은 4대 명의(名義)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동학군의 혁명의지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1.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다.

2.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어 없애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4. 군대를 몰로 서울로 들어가서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이어 백산에서 발표한 격문(일명 白山倡義文)에는 동학군이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의 농민혁명을 지향한 것임을 신용하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회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몰라내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들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백성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말단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때 동학군이 발표한 12개조 폐정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어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5.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 칠반 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성이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적과 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돌릴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이어 9월 전봉준 등은 전라도 동학군에게 동원령을 내려 삼례로 모이게 하였다. 전봉준은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과 정면승부를 겨루려고 모든 동학군을 집결케 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은 삼례에 전라도 창의대중소(倡義大衆所)를 두었다. 이곳 삼례에 전라도의 많은 농민들이 모여 들었다.

 

한편 충청도에 전령을 띄워 양곡과 짚신, 연초등을 준비해 두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대원군과 연계를 모색하였고 북접의 호응을 요구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마침내 북접의 호응을 얻었다.

 

북접에서는 관군들이 계속 동학교도들을 탄압하고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점점 정도를 더해갔으며 전국의 교도들은 봉기명령을 내려 달라는 빗발치는 재촉을 받았다. 그동안 최시형은 신중하게 정세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때 교단지도부에서도 전면적인 봉기를 주장하였다. 손병희 등 중견들이 앞장서 봉기를 서둘렀다. 최시형은 마침내 “앉아서 죽겠는가?”라고 분연히 외치고 전국에 대동원령을 내렸다. 이 대동원령은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의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농민혁명을 전국적 규모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이들 지역 동학교도들은 대접소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갑오년 사회 실상

 

조선 사회는 1876년 서방국에 개항한 이후 중국과 밀무역으로 국내시장에 외국상품이 유입 침투하였다.

 

조선 조정은 급변하는 시장경제 사회계급에 애해 관리능력이 미치지 못햇다.

지주계급 농민착취 수탈이 일반화 부(富) 축적, 농촌 빈농 극심, 도시 빈민계층 몰락 계급모순이 심화되었다.

 

또한 1888년 삼남지방 큰 흉년, 자연재해, 전염병 만연하여 농촌인구가 줄어 사회적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

 

19세기 중엽에 조선사회에서 동학(東學)이 태동된 이유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먼저 18세기 이후 변질된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제반 정치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둘은 국가에서 납세제도인 삼정(三政) 곧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이 문란했다.

셋은 19세기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속에서 국가보위 의식이 팽배하였다.

넷은 전통적인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여러 폐단에 따른 지도이념이 퇴색되었다.

다섯은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학문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의식으로 대응하려는 자세의 발로이다.

여섯은 실학에서의 현실비판 및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은 피지배 민중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높아진 자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동학혁명운동 6개 지역 중 목천, 천안, 전의는 서북부지역이다.

 

고부 농민봉기는 삼남지방으로 확대 활성화 다양한 촉진으로 작용했다.

양반계급 억압착취에 견디지 못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민족모순, 계급모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대응으로 촉발된 농민봉기운동이다.

 

동학운동은 인간평등의식, 척왜(斥倭), 척화(斥和), 척양(斥洋) 반외세 의식을 강화 확산시켰다.

 

동학의 의무 실천덕목은 사인여천(事人如天) 도성덕립(道成德立), 지상선도(地上仙道),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이다.

 

성(誠) 경(敬) 신(信) 무극대도(無極大道)

 

인간존중 평등 윤리사상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므로 중국이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는 조선인 눈에는 하나의 경악일뿐 아니라 위기상황으로 크게 동요하게 된다.

중국의 아시아권에서 누려왔던 오랜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1894. 7. 28 청일전쟁 성환 소사벌 전투에서 청군이 패전한 것은 더할 것 없는 충격이었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조선을 압박해 왔다.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놀란 조선조정은 일본군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 마침내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을 먹이로 놓고 조선 땅에서 청일이 패권을 벌인 꼴이 되었다.

 

 

  

 

 

▢ 세성산의 싸움

 

세성산은 목천 남쪽에 솟아오른 천연의 험난성으로 북서쪽은 높이 솟아 있으며 동남쪽은 밀림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학군의 대부대는 산위에 방비부대를 세우고, 산성의 높은 암벽사이에 진영 막사를 세웠는데 공격하기 매우 어렵고 견고하였다.

 

산성의 동학군은 투지가 왕성하였고 깃발은 수풀처럼 세워졌으며 함성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부대를 편제하여 용감하게 전투에 종사하는 그 광경은 장렬하였다. 이 산성에 주둔한 동학군은 순수한 동학교도로서 열렬한 신자가 많았는데, 그들은 관군이 쏜 총탄은 동학의 주문으로써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포탄이 몸에 맞아도 죽지 않으며 칼에 맞아 상처를 입어도 피가 흐르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앙은 귀신과도 같아서 탄환이 비 오듯 쏟아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확고한 미신을 갖고 있는 무지한 교도들이었다.

 

이때 관군은 동남쪽에서 두 부대로 하여금 포격하게 하였고, 점차 소나무 숲에서 돌격해 왔다. 동북쪽의 산맥을 넘어 돌격한 부대의 관군은 청주방면에서 원군으로 온 주력부대로서, 그 가운데 이두황군 한 부대가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공격하였다. 점차 산성의 기슭에 도달한 토벌군은 곧바로 돌격하였고 동남쪽 깊은 계곡의 산림을 지나 산성 가까이 매진하였다. 산성의 동학군은 대부분 칼로써 맞서 싸우려고 몸을 드러내 놓고 관군을 기다렸다.

 

토벌군이 쏜 총알은 동학군의 커다란 무리를 장기 업듯이 쓸어 버렸다. 피가 흘러 사방에 흩어지고 죽은 시체가 쌓여 있는 엄청난 광경을 보자, 상처도 입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던 동학군은 이제 다시 귀신같은 토벌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학군은 크게 무너져 북쪽으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남쪽에서 진격한 부대는 동학군의 북상을 추격하여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는데 마치 토끼를 사냥하듯 하였다. 다행히 위급함을 벗어나 북쪽 암벽으로 도망한 사람도 암벽아래에 숨어 있던 한 부대에게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산성의 동학군은 사면에서 포위된 상황에서 패퇴하였으며, 산성에 남아 있던 산성의 주장(主將) 김복용은 사로잡혀 그 뒤에 군문(軍門)에서 총살되었다.

 

이 싸움에서 관군은 소총 140점, 나팔 2개, 창 288자루, 긴 화살 3,200개, 청국제 탄환 26,500발, 깃발 30개, 백미 266석, 현미 367석, 잡곡 13석, 죽은 시체 370명을 헤아렸고, 포로 17명, 기타 중경상자는 400명을 넘었다.

 

 

▢ 세성산에 진을 치게 된 배경

 

그러면 왜 북접의 동학 수뇌들이 이 지역에 진을 치고 남접이 올라오면 이곳에서 재집결하여 한성으로 가는 중간지점으로 선정한 것일까. 동학농민군이 목천 세성산에 진을 치게 된 배경과 몇가지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갑오년 동학농민운동을 최초로 일으킨 사람이 목천사람이다.

당시로 보면 동학혁명을 처음으로 경북 상주와 충북 진천에서 주모한 사람이 이필재(전주이씨설)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천주교회사>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기록상에는 목촌(木村)이나 목천(木川을 뜻함) 이필제는 본래 천주교인 이었다. 그러나 북면 납안이 씨아골(씨아골은 서학<西學>골이 와전된 것으로 봄)에 천주교인들이 신유박해 등으로 인해 피신해 있다가 관군에게 수난을 당할 때에 그 부친마저도 타살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천주교의 힘으로는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 없음을 깨닫고 동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당시(광무 5년) 목천군수 정철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더라도 “천주교인이 다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그 세력은 10년 후인 갑오년에 다스리기 어려운 동학조직으로 세력화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1893년 4월 25일 충북 보은 집회에 목천사람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100여명이나 되었다하니 당시로서는 목천의 동학세력이 상당히 컷음을 알 수 있다.

 

3. 목천지방은 동학의 뿌리가 강했던 터에 인근지역인 천안, 직산, 전의, 진천 등지의 동학의 주도권이 목천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 5개 지역의 무기와 관물이 거의 세성산에 집결되기에 이른 것이다.

 

4. 동학을 전국에 전파하는데 있어서 목천사람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발행하는 목적은 교세확장을 위한 것으로 목천지역에서 <동경대전>을 2회나 발행하였다. 즉 장내리인 동면 장송리에서 1차로 1,000권을 발행한 후 다시 복구정인 북면 연춘리에서 100권을 발행하였다. 2차는 연춘리 도령굴에서 김화성 등 광덕 사람들의 참여하에 동학 3로가 가담하여 발행한 후 목판은 직산으로 옮겨 졌으나 이천여의 집에서 관군에게 탈취 당하였다.

 

5. 목천지역의 동학활동을 지원하는 세력으로 양반들의 협조가 컸다. 구한말의 양반조사 결과를 보면 목천의 소재지인 동리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북면(용암리 등) 일대에 양반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인해 일본인들은 이 지역에 금광을 채굴한다는 미명하에 허가도 득하지 않고 쇠말뚝을 박아 혈을 끊어 양반가문의 몰락을 계획하였으나 목천군수가 “중구봉에 광산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통보와 못하도록 제지하였다. 그 이유로는 중구봉에는 기우제단이 있고 또한 천제단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하였으며, 이렇듯 관리도 동학을 간접 지원하고 있었다.

 

6. 천안의 보부상 역할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천안의 경계 즉 월경지(越境地) 사람들로서 4개 지역의 보부상이 있었으며 이들은 규율이 엄하여 단결과 상부상조의 힘이 컸었던 터에 동학에 가담하여 물자를 지원하고 연락을 해주는 등 그 역할이 컸다.

 

7. 직산현 관아의 무기를 세성산으로 가져왔다. 천안 인근의 관아에 있는 무기들도 거의 탈취하여 집결시켰다.

 

8. 갑오년 8월에 천안의 남산거리에서 다리 공사 중 일본인 6명이 지나가자 동학교도인 조명운, 김치선 등이 시비를 걸어 3명은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고 3명은 도주하는데 성환까지 뒤따라가서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한연수는 무죄로 석방하였다 한다. 이렇듯 천안지역의 동학세력이 상당히 크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세성산에 진을 치게 된 것이다.

 

 

▢ 동학 관련 지명 구전

세성산 : 사자형 방애바위

만인 먹일 산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화성리

 

구분

지역

주요활동 개요

비고

천안군

읍내리(현사직동)

남산 소거리에서 김치선,조명운등이 일본인 살해(3명)

3명은 추격살해 (계 6명)

목천현

성남면

화성리

세성산 전투지역(1894.10.18~10.21) : 약700여명 사상

 

북면

연춘리

사라진 도령골과 동학삼로,연춘역원 소실,장군평유진소

 

매송리

김구선생 은신처, 작성산 동학군을 지원한 주민들, 접주 정인석

 

사담리

하사에서 동학군 처형, 도주자 포살 등

 

양곡리

베장골에 설치한 관군의 유진소

 

목천면

서리

이희인의 거주지마을,조경호피진지(당초 양곡리 거주)

 

동평리

장군평에 진을 친 이두황 부대

 

수신면

장산리

이두황 부대를 안내한 승지 홍가유(연춘리 항발)

 

병천면

송정리

정지완댁에서 1박한 이두황부대(지역정찰)

구)복다회리

도원리

소실된 면실마을, 동학군의 처형장 광터골 뒷산

 

병천리

소실된 서원말, 이희인이 생포된 개목마을

 

동면

구도리

한유길 처형지 보평, 동학 간부 김낙철의 출생지

현 고수마을

 

죽계리

윗말 김은경댁에서 <동경대전>간행

 

덕성리

김은경의 묘소가 있는 곳(바타니)

 

광덕면

광덕리

동학당시 피난처 장군바위앞 계곡, 소실된 댓거리마을

 

행정리

동학군 경유지(당시 :청주 덕평)

 

직산현

직산면

마정리

김성범, 신일척 처형, 황성도 집에서 포탄, 총 등 몰수

수원 압송

군서리

이천여 체포, 동경대전 판각압수, 총, 창 등 압수

 

판정리

황성도 등 직산의 접주 처형지역(판정천)

 

 

 

< 천안지역 주요 동학 활동 및 관련사항 >

▢ 참고문헌

연번

참고 문헌

비 고

1

일지

임명순 수집, 2011

2

순무선봉등록(巡撫先鋒謄錄)

임명순 수집, 2011

3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임명순 수집, 2011

4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임명순 수집, 2011

5

순무사각진전령(巡撫使各陳傳令)

임명순 수집, 2011

6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陳傳令各陳)

임명순 수집, 2011

7

선봉진정보첩(先鋒陳呈報牒)

임명순 수집, 2011

8

선봉진서목(先鋒陳書目)

임명순 수집, 2011

9

취어(聚語)

임명순 수집, 2011

10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

임명순 수집, 2011

11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

임명순 수집, 2011

12

동학당정토인록(東學黨征討人錄)

임명순 수집, 2011

13

목천의 대접주 이희인, 손자 호익의 증언

임명순 수집, 2011

14

난중기문(亂中記聞)

임명순 수집, 2011

15

남졍록

임명순 수집, 2011

16

동학판결문

임명순 수집, 2011

17

동학판결문 원본

임명순 수집, 2011

18

동경대전 해설

임명순 수집, 2011

19

동경대전 목천판(목활자본)

김종식 수집, 2011

20

천안지역 동학농민전쟁연구

최인섭, 1997

21

동학혁명과 세성산성

장성균, 1991

22

갑오 동학농민혁명과 천안

장성균, 1991

 

 

 

 

 

 

 

 

 

천안 동학농민군 세성산 전투사 2011.10.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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