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성환역도찰방 척수루기...수산 이종휘(1731~1797)

吾心竹--오심죽-- 2011. 8. 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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滌愁樓記_번역.2011.8.7.hwp

 

 

 

 

滌愁樓記...修山集(1803년간) 卷之三 記

 

이종휘(李種徽) 1731(영조 7)∼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아버지는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철(李廷喆)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

 

< 척수루 기>...修山 이종휘...1797년 씀...성환역 도찰방 이상우(李尙友, 1794.12월 도임~1797.5월 瓜滿) 請 //

 

즐길락과 더불어 기뻐할환은 같은 뜻인데 다른 이름이다.

근심우와 더불어 근심수는 또 다른 이름인데 같은 뜻을 갖고 있다.

그런고로 기뻐할환은 비유하자면 모든 즐거움인데 점점 더 밖으로 확산되는 표현이다. 근심우와 근심수를 비교하면 점점 더 표현이 커져가는 것이다.

고로 기뻐할환과 더불어 근심수는 다른 뜻이면서 같이 사용되는 것이다.

서로 배가시키고 항시 서로 마주하며 의미를 더욱 확산 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군자는 근심을 제거하고 반드시 기뻐함으로써 근심을 푼다.

오히려 물건의 찌꺼기(더러움)를 제거함에 반드시 물로 세척하는 것이다.

혹 그러하다가 인정은 재물의 이동과 더불어 당연히 근심을 더욱 근심스럽게 하는고로 군자는 비정해야 한다.

 

성환역은 직산현 북쪽에 있고 경기지방과 호서지방의 경계를 나누며

마땅히 삼남대로의 요충지이다.

새벽 닭 울 때부터 야밤 순라꾼의 통금 요령이 울릴 때까지 성환역 삼남대로는 수레와 말굽소리가 동서남북 직물의 날올 씨올처럼 서로 교차한다.

척수루는 성환역 나그네들이 머무는 객관의 남쪽에 있다.

앞에는 연못이 있고 수양버들 수 십 그루가 둥글게 서 있다.

붉고 하얀 화사한 연꽃과 더불어 마름과 창포, 지초가 수면에 덮혀 있다.

척수루에 올라 바라보면 성거산의 서쪽과 소사교 이북, 지평선 끝으로 바다가 있고, 널리 퍼져 아득한 큰 들판이 있어 눈을 한번 들어 바라보면 가히 이런 풍광을 볼 수 있다.

 

전망을 보면, 통쾌함이 있어 여행하며 지나는 자에게 그러하다.

누구나 모두 공사의 근심은 있는데 그 득실의 기회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있은 즉 이 척수루에 올라보면 업무 보며 쌓인 근심을 약간 씻어 낼 수 있고 척수루를 내려와 떠나 갈 때엔 대저 그렇게 된다.

 

그 실타래처럼 얽힌 슬픔과 근심은 애오라지 풀지 못하면 부평초와 부합되고, 잡초와 같이 다시 살아난 즉 근심을 씻어 냈다는 말을 어찌하여 옳다고 하겠는가?

 

예전의 현사는 이 다름을 인정하여 그 본 바탕을 길러 그 뜻을 이미 정립하였다. 일의 옳고 그름은 눈 가운데에서 명백히 하여 어느정도 득과 실로서도 그 마음을 움직여 얻지 못하였다.

걱정이 없는 일상의 즐거움 가운데 그것을 길렀고

근심이 없는 일상의 즐거운 정에서 그것을 드러냈다.

 

마땅히 그 여행길엔 다니는 고단함이 있어 어지러운 세상(황진탁천)에 나오면 연못 버드나무 제방 둑에 올라 조망하면 넓은 들판 먼 숲과 연꽃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마음 어떠하겠는가? 모두 그 마음에 근심이 없어진다.

이런 연유로 마침내 기뻐함이 생겨나는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그러고로 근심을 씻음으로서 일(사무,업무)을 위로하는 것이다.

 

기뻐함이 생겨나는 경우 일상의 정은 같지 않다

근심을 물리치고 일(업무)을 즐겨야만 비록 잠시 즐거움이 있다.

이런 경우 일을 버려야 즉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혹은 말하길 예전 송나라 범희문이 지은 악양루기에 말하길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다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 하였다”

그런즉 이러한 것은 비록 여기 누각에 올라도 척수(근심을 씻어냄)란 말을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하길, 아니다.

평범한 사람의 근심은 자기의 사사로움으로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

옳다. 몹시 처량하고 측은함은 그 근심을 풀지 못한다.

범희문과 같이 그 근심이 사해에 날리고 억조창생의 마음 중에 퍼져

평탄하고 탕흉하여 상시 세상을 뒤덮는 것은 이 정원에서는 불가하며

소인의 깊은 근심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오호라, 편안함을 얻은 그 사람과 함께 이 누각에 오르면 내 마음 속에 수심을 씻어내는구나.

 

신미월일, 나는 직산현 관아에서 묵고 있는데 우편업무를 감독하는 모군이 그 척수루가 무너져 중수하며 편지를 보내 누기를 청하니 무릇 하루 일당 비용은 약간이라.

척수(滌愁)와 더불어 성환(成懽)이란 무릇 서로 호응하는 이름이다.

 

모군은 이미 깨끗하고 신중하여 우편인으로써 기뻐함을 얻었고

또 여행하는자의 근심을 씻어내고자 그 척수루를 새롭게 다시 짓는다함이라.

무릇 이 사람은 다 군자의 마음가짐을 지닌 자이다.

 

가히 기뻐함과 근심의 말과 더불어 그 생각에 옳음이 있다.

고로 이 글로써 돌아가 무릇 기뻐할환, 즐길락에도 얕고 깊음,

근심우, 근심수 역시 안팎이 있다.

즐거움은 이 깊은 가운데 있고 기뻐함은 이 두터움 밖에 있다.

그럼으로써 근심 없는 마음은 근심을 가히 씻어낼 수가 있다

씻어낸다는 말은 그 몸에 때를 목욕하듯 씻어내는 것과 같아서

다시 남지 않는다.

오호라, 이것으로써 이 바른 뜻을 풀어 밝혀 소통함이 옳은 것이요

척수루기 역시 또한 그러한 것이다.

 

 

< 위례문화원...직산고을 吾心竹 졸역...2011.8.6 >

 

* 한문 실력이 淺薄하여 내맘대로 飜譯했습니다.

江湖 고수님들께서 飜譯 誤謬를 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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滌愁樓記...修山集 卷之三 記

 

懽與樂。同出而殊名。환여락 동출이수명

憂與愁。異稱而共情。우여수 이칭이공정

然懽譬諸樂。愈散而外著。연환비제락 유산이외저

愁較之憂。愈發而表見。수교지우 유발이표현

故懽與愁。常異情而同行。고환여수 상이정이동행

相乘而常對待也。상승이상대대야

 

즐길락과 더불어 기뻐할환은 같은 뜻인데 다른 이름이다

근심우와 더불어 근심수는 또 다른 이름인데 같은 뜻을 갖고 있다

그런고로 기뻐할환은 비유하자면 모든 즐거움인데

점점 더 밖으로 확산되는 표현이다.

근심우와 근심수를 비교하면 점점 더 표현이 커져가는 것이다.

고로 기뻐할환과 더불어 근심수는 다른 뜻이면서 같이 사용되는 것이다.

서로 배가시키고 항시 서로 마주하며 의미를 더욱 확산 시키는 것이다.

 

 

是以。君子之於去愁。시이 군자지어거수

必以懽而解之。 필이환이해지

猶物之去滓。必以水而滌之。유물지거재 필이수이척지

然或情與物遷。當愁而强懽。연혹정여물천 당수이강환

則君子以爲非情。즉군자이위비정

 

그럼으로써 군자는 근심을 제거하고 반드시 기뻐함으로써 근심을 푼다.

오히려 물건의 찌꺼기(더러움)를 제거함에 반드시 물로 세척하는 것이다.

혹 그러하다가 인정은 재물의 이동과 더불어 당연히 근심을 더욱 근심스럽게 하는고로 군자는 비정해야 한다.

 

 

成歡驛在稷山北。爲圻湖分界。성환역재직산북 위기호분계

而當三南之衝。이당삼남지충

晨雞夜鈴。輪蹄如織。신계야령 윤제여직

而滌愁樓在驛南。爲留客之舘。이척수루재역남 위류객지관

前有池塘。圜以楊柳數十株。전유지당 환이양류수십주

紅白菡萏。與藻菱蒲芷。被於水面。홍백함염 여조릉포지

登樓而望。自聖居以西。등루이망 자성거이서

沙橋以北。極之於海。瀰漫大野。사교이북 극지어해 미만대야

一擧目。若可得之。일거목 약가득지

 

성환역은 직산현 북쪽에 있고 경기지방과 호서지방의 경계를 나누며

마땅히 삼남대로의 요충지이다.

새벽 닭 울 때부터 야밤 순라꾼의 통금 요령이 울릴 때까지 성환역 삼남대로는 수레와 말굽소리가 동서남북 직물의 날올 씨올처럼 서로 교차한다.

척수루는 성환역 나그네들이 머무는 객관의 남쪽에 있다.

앞에는 연못이 있고 수양버들 수 십 그루가 둥글게 서 있다.

붉고 하얀 화사한 연꽃과 더불어 마름과 창포, 지초가 수면에 덮혀 있다.

척수루에 올라 바라보면 성거산의 서쪽과

소사교 이북, 지평선 끝으로 바다가 있고, 널리 퍼져 아득한 큰 들판이 있어

눈을 한번 들어 바라보면 가히 이런 풍광을 볼 수 있다.

 

 

覽者。無不稱快。然行旅之過是者。람자 무불칭쾌 연행려지과시자

皆有公私之憂。而得失之機。이득실지기 개유공사지우

膠擾於其中。則登斯樓也。요우어기중 즉등사루야

覽物向風。愁若可滌。람물향풍 수약가척

而及夫下樓而去也。이급부하루이거야

 

전망을 보면, 통쾌함이 있어 여행하며 지나는 자에게 그러하다.

누구나 모두 공사의 근심은 있는데 그 득실의 기회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있은 즉 이 척수루에 올라보면

업무 보며 쌓인 근심을 약간 씻어 낼 수 있고

척수루를 내려와 떠나 갈 때엔 대저 그렇게 된다.

 

 

其纏綿悽慽不可聊者。기전면처척불가료자

如萍之復合。如草之復生。여평지부합 여평지부생

是豈可以言滌愁乎。시기가이언척수호

 

그 실타래처럼 얽힌 슬픔과 근심은 애오라지 풀지 못하면

부평초와 부합되고, 잡초와 같이 다시 살아난 즉

근심을 씻어 냈다는 말을 어찌하여 옳다고 하겠는가?

 

 

古之賢士。其與此異。고지현지 기여차이

其養有素而其志已定。기양유소이기지이정

事之當否。瞭於目中。사지당부 요어목중

而得失之幾。莫得以動其心。이득실지기 막득이동기심

其蘊於中也常樂而無憂。기온어중야상락이무우

其發於情也常懽而無愁。기발어정야상환이무수

 

예전의 현사는 이 다름을 인정하여

그 본 바탕을 길러 그 뜻을 이미 정립하였다.

일의 옳고 그름은 눈 가운데에서 명백히 하여

어느정도 득과 실로서도 그 마음을 움직여 얻지 못하였다.

걱정이 없는 일상의 즐거움 가운데 그것을 길렀고

근심이 없는 일상의 즐거운 정에서 그것을 드러냈다.

 

 

當其有行旅之苦。당기유행려지고

出於黃塵濁川之間。출어황진탁천지간

而得遇荷塘柳堤曠野遠林。이득우하당류제광야원림

於以登臨而眺望。其心何如。어이등림이조망 기심여하

盖其無憂於心。개기무우어심

故境接而懽生。樂在於中。고경접이환생 낙재어중

故物來而愁滌。고물래이수척

 

마땅히 그 여행길엔 다니는 고단함이 있어

어지러운 세상(황진탁천)에 나오면

연못 버드나무 제방 둑에 올라 조망하면

넓은 들판 먼 숲과 연꽃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마음 어떠하겠는가?

모두 그 마음에 근심이 없어진다.

이런 연유로 마침내 기뻐함이 생겨나는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그러고로 근심을 씻음으로서 일(사무,업무)을 위로하는 것이다.

 

 

非如常情之緣境而生懽。비여상정지연경이생환

玩物而排愁。雖暫有樂。완물이배수 수잠유락

境退物去則還如舊也。경퇴물거즉환여구야

或曰。昔范希文作岳陽樓記曰。혹왈 석범희문작악양루기왈

先天下之憂而憂。선천하지우이우

後天下之樂而樂也。후천하이락이락야

然則如斯者。雖登玆樓。연즉여사자 수등자루

未可以言滌愁耶。미가이언척수야

 

기뻐함이 생겨나는 경우 일상의 정은 같지 않다

근심을 물리치고 일(업무)을 즐겨야만 비록 잠시 즐거움이 있다.

이런 경우 일을 버려야 즉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혹은 말하길 예전 송나라 범희문이 지은 악양루기에 말하길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다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 하였다”

그런즉 이러한 것은 비록 여기 누각에 올라도

척수(근심을 씻어냄)란 말을 알지 못한다.

 

 

余曰。非也。凡人之憂。여왈 비야 범인지우

不出於己私。是以。불출어기사 시이

悽悽惻惻而愁不可解也。처처측측이수불가해지

如希文者。其憂散于四海。여희문자 기우산우사해

而布在億兆人之心中。이포재억조인지심중

盖常坦蕩而不可囿也。개상단탕이불가유야

豈如小人之慽慽耶。기여소인지척척야

 

내가 말하길, 아니다. 평범한 사람의 근심은

자기의 사사로움으로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

옳다. 몹시 처량하고 측은함은 그 근심을 풀지 못한다.

범희문과 같이 그 근심이 사해에 날리고

억조창생의 마음 중에 퍼져

평탄하고 탕흉하여 상시 세상을 뒤덮는 것은 이 정원에서는 불가하며

소인의 깊은 근심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嗚呼。安得與斯人者。共登斯樓。오호 안득여사인자 공등사루

以滌吾心中之愁哉。이척오심중지수재

 

오호라, 편안함을 얻은 그 사람과 함께 이 누각에 오르면

내 마음 속에 수심을 씻어내는구나.

 

 

辛未月日。余寓稷衙。신미월일 여우직아

督郵某君。重修其圮。送書請記。독우모군 중수기비 송서청기

凡功費若干。爲日若干。범공비약간 위일약간

夫成懽之與滌愁。待對之名也。부성환지여척수 대대지명야

 

신미월일, 나는 직산현 관아에서 묵고 있는데

우편업무를 감독하는 모군이 그 척수루가 무너져 중수하며 편지를 보내

누기를 청하니 무릇 하루 일당 비용은 약간이라

척수(滌愁)와 더불어 성환(成懽)이란 무릇 서로 호응하는 이름이다.

 

 

君旣淸愼。以得郵人之歡。군즉청신 이득우인지환

而又欲去行旅之愁。이우욕거행려지수

卽樓而新其制。즉루이신기제

凡此者。皆君子之心也。범차자 개군자지심야

 

모군은 이미 깨끗하고 신중하여 우편인으로써 기뻐함을 얻었고

또 여행하는자의 근심을 씻어내고자

그 척수루를 새롭게 다시 짓는다함이라.

무릇 이 사람은 다 군자의 마음가짐을 지닌자이다.

 

 

可與言懽愁之義。가여언환수지의

故書此以歸之。夫懽樂有淺深。고서언환수지의 부환락유천심

憂愁有內外。우수유내외

樂於中者深。故懽於外者厚。낙어중자심 고환어외자후

是以。心無憂而愁可滌也。시이 심무우이수가척야

滌之爲言。如沐浴其身以去垢。척지위언 여목욕기신이거구

不復留也。불복유야

 

가히 기뻐함과 근심의 말과 더불어 그 생각에 옳음이 있다.

고로 이 글로써 돌아가 무릇 기뻐할환, 즐길락에도 얕고 깊음,

근심우, 근심수 역시 안팎이 있다.

즐거움은 이 깊은 가운데 있고 기뻐함은 이 두터움 밖에 있다.

그럼으로써 근심 없는 마음은 근심을 가히 씻어낼 수가 있다

씻어낸다는 말은 그 몸에 때를 목욕하듯 씻어내는 것과 같아서

다시 남지 않는다.

 

 

嗚呼。오호

以此爲爾雅註疏可也。이차위이아주소가야

爲滌愁樓記亦可也。위척수루기역가야

 

오호라,

이것으로써 이 바른 뜻을 풀어 밝혀 소통함이 옳은 것이요

척수루기 역시 또한 그러한 것이다.

 

 

<<< 직산고을 오심죽 졸역...2011. 8.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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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역 척수루기(1751년,영조27, 21세)...수산 이종휘(1731~1797, 67세)

 

 

성환역 척수루기.hwp

 

 

 

기쁜 것과 즐거워하는 것이 같은 심정에서 나오지만 명칭은 다르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말은 다르지만 심정은 같다. 하지만 기쁜 것이 즐거움에 비하여 산만한 듯 하지만 표면으로는 더욱 드러나고 근심하는 것이 걱정하는 것에 비하여 더욱 속마음은 발하지만 표면으로는 더욱 드러나고 근심하는 것이 걱정하는 것에 비하여 더욱 속마음에서 발하지만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기쁜것과 걱정하는 것은 항상 심정은 다르지만 행동이 같아 두 개가 항상 상대적이다. 그리하여 군자는 근심을 버리는데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써 해결하니 모든 물건이 찌꺼기를 버리는데 반드시 물로써 세척하는 것과 같음이라.

그러나 혹 본정이 물욕에 옮기어 걱정을 당하면서도 억지로 기뻐한다면 그것은 군자로서는 실지의 정이라 볼 수 없다. 지금 성환역은 직산 북쪽에 있고 기호의 경계이므로 바로 삼남의 요충지라. 새벽에 닭 우는 소리와 밤새도록 들리는 방울소리, 수레바퀴와 말발굽 소리가 베짜는 씨줄 날줄처럼(비단처럼) 이어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척수루는 성환역 남쪽에 있어서 오고가는 나그네의 유숙하는 관사로써 앞에는 연못이 있어 버드나무 십여주가 제방을 둘러 싸고 붉고 흰연꽃과 마름초 갯버들 향초들이 수면에 가득하도다.

 

척수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성거산 서쪽과 소사교 북쪽에서 부터 서해바다 끝까지 드넓은 평야가 한 눈에 보인다. 그 경관을 보는 사람들은 기분이 상쾌해진다. 하지만 오고가는 나그네 이곳을 지나는 모두가 공사간의 걱정이 있고 득실의 기회가 교착하여 그 심정이 흔들리게 된 즉 이 누각에 올라 물정을 보고 풍경을 향하면서 근심을 씻을 듯 하다가 다시 누대에서 내려와 가다보면 끊어지지 않는 심정 헤아릴 수 없을 것이지만 떠돌다보면 다시 만날 때도 있는 것이며 초목처럼 다시 살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근심을 씻었다 하리오. 옛날 어진 선비는 그의 심정이 이와는 다르니 그분들은 함양하는 것이 바탕에 있고 그 뜻이 이미 안정되었기에 사리에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은지 눈 앞에 효연함으로 득실의 기미에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에 쌓여져 항시 즐거움이 있고 걱정하는 일이 없으며 그 칠정에 발하여 항시 기쁘기만하고 근심하는 일이 없다. 자기가 행려의 고통이 있어 황진탁천 속에 있다해도 좋은 연당과 유제와 광야에 있듯이 이곳에 올라 멀리 풍경을 보니 그 마음 어찌하랴. 보통 그 마음에 걱정이 없기에 환경에 따라 기쁨도 생기고 즐거움도 그 속에 있어 물욕이 보이면 근심을 씻어버리는 것인데 보통사람의 정은 환경에 따라 기쁨도 생기고 그 일을 보면서 근심도 버린다. 하지만 비록 잠시의 즐거움이 있다 하여도 그 지경에서 벗어나 그 환경을 지나면 바로 옛날로 돌아가게 된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옛날 범문정공께서 지은 악양루 기문을 지어 이르기를 “먼저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다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 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와같은 사람은 아무리 누각에 오른다해도 근심을 버릴 수 없단 말인가? 나는 말하기를 그런 뜻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걱정은 자기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환경에 닥치면 비참하고 가여워서 자기의 근심을 풀지 못하게 되니 범문정공 같은 이는 그 근심을 사해에 씻어서 억만대중에게 산포할 것이라. 그분은 마음이 넓고 넓어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시니 어찌 소인들의 근심과 같으랴. 오호로 어찌 이와같은 사람과 이 누대에 올라 나의 심중에 있는 근심을 씻을 수 있으리오.

 

신미년 어느날 내가 직산관아에 우거하고 있는데 성환찰방 모군이 척수루를 중수하고 편지를 보내면서 기문을 청하니 그 내용은 비용이 약간이요 시일이 약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저 기쁜 것이 오면 근심을 풀게 되는 것은 상대적 명분이다. 그대는 청신한 자품으로 역인의 환락을 얻고 또 나그네의 근심도 버리게 하려고 이 누대를 말끔하고 수리를 하였으니 이와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의 심정이다. 실로 환수의 뜻을 말할 수 있기에 이 글을 써서 보내준다. 하지만 환락은 천심에 있는 것이요, 우수는 내외가 있어 즐거운 것이 심중에 깊기 때문에 밖으로 기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걱정이 없어 근심을 씻어 버릴 것이니 씻는다 말하면 자기 몸을 목욕해서 그 때를 버리려 다시없게 하는 것이다. 아 이 글이 너의 아름다움에 대한 주석이 될 만한 것인가. 척수루 기문이 될 만한 것인가.

<번역 - 秋江 金權東...前 天安蓄協 理事...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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滌愁樓記...修山集 卷之三 記

 

 

懽與樂。同出而殊名。憂與愁。異稱而共情。然懽譬諸樂。愈散而外著。愁較之憂。愈發而表見。故懽與愁。常異情而同行。相乘而常對待也。是以。君子之於去愁。必以懽而解之。猶物之去滓。必以水而滌之。然或情與物遷。當愁而强懽。則君子以爲非情。成歡驛在稷山北。爲圻湖分界。而當三南之衝。晨雞夜鈴。輪蹄如織。而滌愁樓在驛南。爲留客之舘。前有池塘。圜以楊柳數十株。紅白菡萏。與藻菱蒲芷。被於水面。登樓而望。自聖居以西。沙橋以北。極之於海。瀰漫大野。一擧目。若可得之。覽者。無不稱快。然行旅之過是者。皆有公私之憂。而得失之機。膠擾於其中。則登斯樓也。覽物向風。愁若可滌。而及夫下樓而去也。其纏綿悽慽不可聊者。如萍之復合。如草之復生。是豈可以言滌愁乎。古之賢士。其與此異。其養有素而其志已定。事之當否。瞭於目中。而得失之幾。莫得以動其心。其蘊於中也常樂而無憂。其發於情也常懽而無愁。當其有行旅之苦。出於黃塵濁川之間。而得遇荷塘柳堤曠野遠林。於以登臨而眺望。其心何如。盖其無憂於心。故境接而懽生。樂在於中。故物來而愁滌。非如常情之緣境而生懽。玩物而排愁。雖暫有樂。境退物去則還如舊也。或曰。昔范希文作岳陽樓記曰。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也。然則如斯者。雖登玆樓。未可以言滌愁耶。余曰。非也。凡人之憂。不出於己私。是以。悽悽惻惻而愁不可解也。如希文者。其憂散于四海。而布在億兆人之心中。盖常坦蕩而不可囿也。豈如小人之慽慽耶。嗚呼。安得與斯人者。共登斯樓。以滌吾心中之愁哉。辛未月日。余寓稷衙。督郵某君。重修其圮。送書請記。凡功費若干。爲日若干。夫成懽之與滌愁。待對之名也。君旣淸愼。以得郵人之歡。而又欲去行旅之愁。卽樓而新其制。凡此者。皆君子之心也。可與言懽愁之義。故書此以歸之。夫懽樂有淺深。憂愁有內外。樂於中者深。故懽於外者厚。是以。心無憂而愁可滌也。滌之爲言。如沐浴其身以去垢。不復留也。嗚呼。以此爲爾雅註疏可也。爲滌愁樓記亦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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