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직산현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滌愁樓) 옛 터 찾기...백 년의 근심을 씻어내다

吾心竹--오심죽-- 2011. 8. 4. 08:59

 

  <<< 직산현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滌愁樓)는 과연 어디인가?..100년 역사 밝힌다 >>>

 

 

보도자료

 

▢ 육로 성환역 찰방 척수루...100년 역사 밝힌다

 

조선후기 1895년까지 운영되던 <성환역도찰방>은 삼국시대~고려시대 송악 개성~조선시대 수도 서울과 충청, 전라, 경상도 삼남지방을 이어주던 국토의 대동맥이며 국토의 젖줄.

 

예전의 직산현 성환역(成歡驛)과 척수루(滌愁樓) 100년 역사를 밝힌다.

 

1894년 외세열강의 통상교섭과 청일전쟁 아산만 풍도해전, 직산현 성환역

월봉산 부근의 전투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하였고 성환역은 1895년 역사속에서 잊혀지고 사라져 고기록, 고지도, 고문서로만 남아 그 위치의 존재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천안박물관 1층에 전시된 <성환역과 척수루 모형도> 역시 성환역 찰방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여 그간 성환읍 동성중학교 부근이라고 추정하여 시민들에게 전시 홍보하고 있다.

 

천안의 정체성, 시대정신 선양을 위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천안역사의 재검토 작업을 하던 중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침탈을 위해 1911년경 조사한 전국의 지명을 일제히 조사해 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그동안 추정하고, 의견 분분한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의 정확한 위치를 찾게 되었다.

 

1872년 제작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의 직산현 고지도에 그려진 성환 월봉산의 위치를 지금의 성환읍사무소, 성환초등학교 부근의 송골 월봉산(月峯山)에 비정하였기에 그 위치 파악이 매우 힘들었다.

성환의 월봉산의 주진(主鎭) 아래 분명히 그렸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나 1911년경 일제 조선총독부가 조선 침탈을 위해 만든 <조선지지 자료>와 1894년 일제가 <청일전쟁 성환역 월봉산 승리 전투도>를 찾게 됨으로 인해서 성환역과 척수루, 연당지의 위치가 <성환역-성환읍 삼서면 외리>에 있음을 비교 검토하여 알게 되었다.

 

또한 <월봉산-성환 중리> <한부개제-성환리-개방죽...갯방죽> <통수원-성환외리>의 지명이 <직산군 삼서면 성환외리>에 있음이 밝혀지면서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었으며 현장답사 결과 한부개제(韓夫介堤)는 지금도 갯방죽 삼거리로 불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소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령이 비교적 오랜된 노송 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한 눈에도 이곳이 성환역 찰방, 척수루, 연당터, 사정(射亭)터 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 성환역원 월봉산 능선은 제3탄약창의 주진입로 사용되고 있고, 1894년 청일전쟁 일본군의 성환 월봉산전투의 승리로 1895년 성환역이 폐지되었고 성환역 도찰방 산 능선 위로 3탄약창 진입로로 사용되면서 상전벽해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아산만 수로를 이용한 군수물품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조선과 청나라 만주지역 침략기지 활용으로 건설된 성환3탄약창의 건설과 1905년 경부선철도 성환역, 직산역이 개통되고, 안성선 철도의 직산사금광 금의 채취와 삼남대로변에 서울~목포의 1번국도의 신작로가 생기면서 육로 성환역 도찰방의 기능은 역사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현재 1번국도와 연접하여 3탄약창에서는 더 큰 도로를 개설 중에 있고, 한부개제-갯방죽 역시 성환의 편리한 교통 입지조건 변화에 따라 차츰 사라지고 흙으로 메우는 토목작업이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연당지 추정지 역시 공장 등의 입지로 최근 흙으로 복토 완료되었다.

육로 성환역 찰방 추정지 예상 지역은 단독주택이 호젓하게 노송들과 어울려 보존된 곳으로 추정된다.

좀 더 세밀하고, 정밀한 지표조사와 발굴 등으로 성환 천 년 역사문화 유적지의 형체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조사 방법은 <1899년 직산현지>와 <충청도 직산읍지> <1911년 조선지지자료> <1894년 청일전쟁 월봉산 전투도...현재 천안박물관 전시 중>

<인공위성 사진> <답사> 등의 방법으로 밝힌 것임을 밝힌다.

 

<성환역>의 지명은 고려 1021년 건립된 봉선홍경사, 광연통화원, 1026년 건립된 최충이 쓴 홍경사비기에 이미 성환역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천 년 넘게 사용된 “성환역”의 지명의 역사성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성환역의 역사를 고문헌 속에서만이 아니라 이제 현장에서 보게 되었다.

 

이로써 천안시는 삼남대로 남쪽엔 <천안 삼거리>가 있고, 북쪽엔 드넓은 홍경들, 소사벌을 가로지르는 <성환역>이 남북으로 위치하여 명실상부 천혜의 교통 도시, 물류 중심이었음이 역사적으로 실증되었다고 하겠다.

 

백가제해 22담로국을 거느린 직산백제 위례성의 관문,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로, 조선시대 대동법 시행과 백성들의 가난 구휼(救恤), 조세와 물류의 중심축이 성환역(成歡驛)과 고려 태조, 조선 세종대왕이 한 숨 쉬어간 척수루(滌愁樓)가 백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사람들의 근심 걱정, 시름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내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성환 척수루~직산 수헐원(시름새)~입장 탕흉대(좌성산성-서운산)~천안 안서골

척수(滌愁)...근심을 씻어내고

수헐(愁歇)...시름을 잠시 쉬며

탕흉(蕩胸)...가슴속 답답함을 후련히 씻어내고

안서(安棲)...맘 평안히 쉬며 살아가는

근심과 시름, 수심, 답답함을 씻어내고 가슴 후련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마음껏 키우며 사는 도시 천안(天安)

<하늘아래 가장 평안한 쉼 터 관광벨트>로 환골탈태(換骨奪胎)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천하대안(天下大安) 천하태안(天下泰安) 대한민국의 역동하는 도시

삶의 질 세계 100대 도시 천안(天安) 땅인 줄 안다.

   

 

▬▬▬▬▬▬▬▬▬▬▬▬▬▬▬▬▬▬▬▬▬▬▬▬▬▬▬▬▬▬▬▬

330-150 天安市 東南區 三龍洞 261 天安博物館 2層

▬▬▬▬▬▬▬▬▬▬▬▬▬▬▬▬▬▬▬▬▬▬▬▬▬▬▬▬▬▬▬▬

天安市歷史文化硏究室

☎(041) 521-3072~3, FAX : 521-3074

 

<<< 吾心竹 ...2011.8.4 >>> 

 

 

▢ 1872년 직산현 지도...성환도찰방, 척수루

 

 

▢ 다음 위성사진...성환도찰방, 척수루

 

 

▢ 1894년 청일전쟁도...성환 월봉산 전투도(천안박물관 전시)

 

 

 

▢ 1861년 대동여지도...성환역(成歡驛)

 

 

 

▢ 해동지도 직산현...성환도찰방, 척수루

 

 

 

▢ 충청도읍지...직산현...성환도찰방, 척수루

 

 

▢ 천안박물관 1층 모형도...성환도찰방, 척수루 

 

* 천안박물관 안내판...성환읍 동성중학교(성환1리-중리) 추정...오류 // 

 

 

 * 1894년 청일전쟁도...천안박물관 기획전시중 //

 

 

 

 

 

 

직산현 성환역

성환 도찰방, 척수루 옛 터 찾기

 

 

- 차 례 -

 

 

가. 서론

나. 본론

1. 성환읍 연혁(沿革)

2. 성환역 삼서면(三西面) 지명유래 검토

3. 성환역 위치...직산현지(稷山縣誌) 검토

4. 1872년 직산현 古地圖, 朝鮮地誌 검토

5. 인공위성 거리 비교 검토(직산관아~성환역~홍경원)

6. 성환역 현장답사 검토

7. 종합 결론...성환역, 척수루 위치

8. <성환역>, <척수루> 지명 역사기록

▢ 봉선홍경사기 - 최충 ...전문

▢ 조선왕조실록 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

▢ 성환역 “척수루-滌愁樓“ 현판 제액(題額)

▢ 역원(驛院)제도의 역사...역원제도란?

다. 결론

 

라. 부록

※ 성환역(成歡驛) 척수루기(滌水樓記)

※ 성환역(成歡驛) 시문(詩文)

 

 

 

▢ 성환역도찰방 척수루 옛 터

 

 

 

가. 서론(序論)

 

 

성환역 도찰방은 삼한~삼국~고려~조선시대 삼남대로의 요충지에 위치하며 주변 11개역을 관리하던 역원(驛院)이다. 성환역은 1026년 고려 현종 때 최충의 홍경사비문에 <직산현 성환역>기록되어 그 이전부터 불리어 왔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전하며, 성환역 도찰방 북쪽 5리 지점에 봉선홍경사, 광연통화원이 1021년(현종12) 건립되어 지나는 길손들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였다. 성환역은 역참의 발달로 조선후기 간행된 직산현지(1899년)에 북쪽10리, 월봉산 주진에 있고, 1911년경 일본인이 간행(추정)한 조선지지에는 <직산군 삼동면 성환외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중심 길목으로 왜군을 쳐부순 홍경들, 소사평 직산대첩으로 임진왜란 육전 3대첩의 전승지이며, 또한 1894년 아산만~소사벌 청일전쟁의 전쟁 터로 뜨거운 역사가 숨 쉰다.

고려~조선시대 천 년 세월을 겪으며 1895년까지 성환역 도찰방은 계속 운영되다가 조선의 외세침략으로 폐지되면서 퇴락하였다.

 

1905년 성환역 경부선 철도 개통과 1번국도의 교통여건의 변화 등으로 성환역 찰방터의 위치가 수수께끼처럼 묘연하여 제대로 찾지 못하였고, 1872년 직산현 고지도에는 월봉산 남쪽에 그려져 있어 많은 혼란을 가중시켜 그동안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 위치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 추측과 주장만 무성하였다.

이제 고지도, 고문헌, 지명유래, 현장답사 등으로 성환역도찰방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천년 성환읍 지명 탄생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밝혀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 계승의 이정표로 삼고자 한다.

 

 

 

나. 본론(本論)

 

 

1. 성환읍(成歡邑) 연혁

 

본래 직산현의 지역이었으며 1026년 고려시대 홍경사비문에 성환역이란 지명이 보인다. 직산읍 서쪽의 세 번째 면이 되므로 삼서면(三西面)이라하여 성환내리(成歡內里), 중리(中里), 외리(外里), 남산(南山), 농촌(農村), 와우(瓦宇), 가동(佳洞), 신리(新里), 복모(伏毛), 수포(水浦)의 11개리를 관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서면(二西面)의 우헐(牛歇),신대(新垈), 송덕(松德), 금곡(金谷), 매곡(梅谷), 광주(光珠), 방축(防築), 신무(新茂), 임리(林里), 각금(各今), 왕지(王池), 금신(金新), 율가(栗加), 13개리와 일서면(一西面)의 당곡(堂谷), 일부와 이북면(二北面)의 중령(中令), 하령(下令), 궁리(宮里), 안양(安陽), 지족향(知足鄕) 수천(水川), 홍경(弘慶), 대하(大下), 대정(大井), 신정(新井), 사동(巳洞), 학선(鶴仙)의 12개리, 아산군(牙山郡), 삼북면(三北面)의 중왕리(中旺里)와 평택군 동면의 와야리(瓦也里)의 일부와, 경기도 양성군(陽城郡) 영통면(令通面)의 궁리(宮里), 상리(上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환도찰방(成歡道察防)의 이름을 따라 성환면(成歡面)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 되면서 우신, 송덕, 매주, 신방, 왕림, 율곡, 와룡, 신가, 복모,어룡, 성환, 성월, 수포, 양령, 안궁, 수향, 대흥, 학정 18개리로 개편 되었으며 그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천원조례 제 1084호 1988. 12. 31) 도하리가 입장면에서 편입되어19개리가 되었다. 동쪽은 입장면과 직산읍, 남쪽은 직산읍, 서쪽은 아산시, 둔포면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북쪽은 평택시와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에 인접해 있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포리(水浦里)가 성환면에 있었는데 그후 평택으로 편입되어 성환면에서 분리되었다.

<출처...성환읍사무소>

 

 

2. 성환역 삼서면 지명유래 검토...성환읍 사무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성환외리, 성환 남산리, 이북면 대정리, 각 일부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병합하여 조선시대 성환도 찰방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성환리가 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성환리가 되었다.

 

남산(南山) : 성환 남쪽에 있는 산 너머에 있는 마을.

바깥말 : 외리(外里) 성환 바깥쪽에 있는 마을.

교통(橋洞) : 학교가 있는 마을.

빗거리 : 구 성환 면사무소 앞에 있는 길. 현재 성환 농협이 있는데 구 면사

무소 안으로 이전하였다.

못터(蓮池) : 연지 터. 척수루 앞에 있던 연못 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우물만 남아 있다.

신선동(神仙洞) : 성환리 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이성환(裡成歡) : 안성환. 성환 안쪽에 있는 마을.

찰방터 : 성환 북동쪽 조금 높은 돈대위에 있는 터. 조선시대 성환도찰방이 있어 공주의 일신, 경천, 단평, 유구, 연기의 평천 금사, 목천의 연춘, 청주의 장명, 천안의 김제 신운 등의 역을 관할하다가 고종32년(1895)에 폐지되었다. 현재는 그 터에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있고 주택이 들어섰으며 소규모 공장들이 있다.

한부개제(韓夫介堤) : 한부개라는 사람이 방죽을 만들었다고 하며 성환리에 있다.

 

최옥제(崔玉堤) : 최옥이라는 사람이 만든 방죽이라 전해오며 성환리에 있는 방죽.

척수루(滌愁樓)터 : 찰방터 앞에 있는 척수루터.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터 옆에 사정(射亭)의 터가 있다. 이 척수루는 온갖 업무에 시달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면서 즐기던 곳이기도 하며 역졸들의 무술 연마장으로 쓰던 곳이다.

막거리 : 주막이 있어 지나는 행인이 쉬어가고 술을 마시고 갔다 한다.

 

 

◯ 성환읍 지명유래 종합 검토

 

① 직산현 삼서면 지역...성환 내리, 중리, 외리에 있다.

② 성환 북동쪽 조금 높은 돈대, 늙은 느티나무 3그루,

주택, 소규모 공장

③ 사정터 (활 쏘던 곳)

 

*결론: 성환 중리 삼거리~성환 한솔 현대아파트...삼우주택앞이 됩니다.

주소 :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환리 292번지 일대

 

 

3. 성환역 위치...직산현지(稷山縣誌) 검토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滌愁樓)를 찾기 위한 필요한 지명들

 

① 직산현의 북쪽 10리...삼서면(三西面)지역

② 직산현 삼서면(三西面) 월봉산(月峯山) 아래에 있으며

관문 아래에 연당과 방축이 있으며 삼남대로가 있다.

③ 척수루 : 성환역 옆

④ 이북면 지족향 : 현의 북쪽 15리

⑤ 이북면 홍경원 : 현의 서북쪽 15리, 지금은 없어졌다.

⑥ 통수원 : 성환역 곁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

⑦ 삼서면 한부개제 : 관문 북쪽 10리, 남북-240척, 동서-300척

⑧ 이북면 물자 최석제 : 관문 북쪽 10리...사동(뱀골-배암골)

 

* 결론...직산현 삼서면 10리...추정지가 너무 광범위함.

 

 

4. 1872년 직산현 고지도...朝鮮地誌(1911년경 간행)검토

 

※ 1872년 고지도와 조선지지...성환역(成歡 外里), 척수루 위치 결론

① 직산현 삼동면...한부개제(韓夫介堤-갯방죽) 바로 옆에 있습니다.

② 홍경원 15리-성환역 10리=5리...거리 차이가 납니다 (약 2km)

③ 한부개제-일명 갯방죽...1911년경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간행된

조선지지를 종합하면 현재의 갯방죽 3거리 옆이 됩니다.

④ 지도 월봉산을 현재 송골(성환 중리) 뒷산으로 착각한 결과입니다.

⑤ 월봉산(성환 중리)은 성산에서 왔다(고지도 주기...月峯山來自城山)

사람과 말(馬)에게 필요한 비교적 수량이 풍부하고, 답답하지 않고,

시야가 열리고, 성환천이 가깝고, 광활한 지형을 선택한 것 입니다.

 

 

5. 성환역 인공위성 거리 비교 검토

 

▢ 직산 관아~성환역 10리...현재 인공위성 직선거리 3.53km

 

 

 

▢ 성환역~홍경원 5리...현재 인공위성 직선거리 1.82km

* 고기록 직산현지 홍경원-성환역=5리가 거의 일치합니다.

 

 

6. 성환역 현장답사 검토

* 성환읍 제3탄약창 입구...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월리

*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 터...갯방죽(한부개제) 교통안내판

 

 

* 성환역 도찰방과 척수루 터 추정지...천안시 서부구 성환읍 성월리 //

 

 

▢ 현장 답사 결과

 

1872년 직산현 고지도와 정확히 일치하며, 탄약창 도로개설로

월봉산의 능선은 오래전 사라지고, 역과 척수루 터에는 노송 숲이 있으며, 노송숲 한가운데 개인 단독 주택이 있어 그곳이 예전의 성환역찰방 임을 간접적으로 방증한다.

연당지 추정 터에도 논배미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 복토하여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현재의 1번국도는 예전의 삼남대로 역할을 대신하고,

위례성 백제초도의 왕성로~고구려 장수왕의 남진로~신라 원효, 의상, 혜초, 김유신장군의 당항성로~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로~조선시대 임금의 온양온천 행차로 및 물류의 맥이 직산 성산~성환 월봉산의 주능선의 일맥이 이곳으로 이어지며 사방 조망이 시원하여,

옛 선비들의 척수루 시(詩)처럼 근심을 말끔히 씻어 낼 명당 터이다.

 

고려 태조가 직산 수헐원(시름새)에서 936년 9월 성거산 작명 고사와 입장~진천 협탄령(엽전재) 좌성산성(서운산)의 탕흉대와 더불어 근심을 쉬고, 씻어내며, 가슴 탁 트인 홍경평, 소사벌판을 말 달리던

군왕및 장수들과 병졸의 고단한 회한이 있고,

 

소금배에서 내린 생선과 어염, 내륙의 성거산, 부소산, 위례산의 중요 숯과 땔감, 농림산물, 옹기를 나르던 우리네 민초들의 숨결과 우마차를 끌던 거친 동물들의 숨소리가 이곳에서 잠시 멈춰 서며 땀을 닦고,

시름을 내려 놓고, 바가지 시원한 냇물과 샘물을 벌컥벌컥 물 마시던 우리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모습이 성환역 척수루,

연당지 앞을 말없이 흐르는 계곡의 여울물에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성환역 척수루(滌愁樓)~직산 수헐리(愁歇里, 일명-시름새)~입장 협탄령 좌성산성의 탕흉대(蕩胸台)는 모든 근심과 시름을 씻고자 했던 삼국쟁패, 천하안태의 요충지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중요한 지명들이다.

 

 

 

7. 종합 결론...성환역, 척수루 위치

 

그동간 성환역의 위치에 대해서 우리가 찾지 못한 큰 이유는 <1872년 직산현 고지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 광여도 등등에서 보인 성환 <월봉산>을 크게 착각하였다. 성환역의 위치를 성환읍 송골(성환읍사무소 부근) 월봉산 아래에 배치하여 그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분에서 찾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추정만하였고, 의견만 설왕설래하였다.

 

일제의 1894년 6월 청일전쟁 성환 월봉산전투를 거치면서

3탄약창 건설로 주변의 지형은 상전벽해 되어 옛지형을 잘 알아볼 수 없었으나 다행히 일제가 만든 <조선지지-1911년 간행 추정>에 우리의 지명과 한글 이름이 병기되어 성환역 찰방 터와 척수루 터를 찾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부개제-韓夫介堤...갯방죽>의 지명이 밝혀짐으로써 1872년 직산현 고지도상의 월봉산이 갯방죽 위 현재 3탄약창 진입로가 <예전 월봉산>으로 그려진 산임을 알 수 있었고, 그 위치에 연당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과 우마에게 충분한 수량의 확보는 필수중의 필수 요소이다. 그리고 통수원이 있었다는 기록도 중요하였다.

 

 

※ 성환역 찰방, 척수루 터 주소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월리 산17-1 외

 

 

 

▢ 성환역 찰방, 척수루...청일전쟁 상황도(1894년 제작)

 

 

* 淸日戰爭圖 월봉산 부근도...출처 : 천안박물관

 

▢ 성환역 찰방, 척수루 터 주소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월리 산17-1, 268, 269 외

 

▢ 성환역 찰방, 척수루 터 주소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월리 산17-1, 268, 269 외

 

▢ 성환역 찰방, 척수루 터...갯방죽...성월리 283-2, 13외

 

▢ 팔도지도...성환역...갯방죽...성월리 283-2, 13외

 

*성환↔환성...서로 연관성은 있는지 없는지 궁금합니다.

 

▢ 조선지지(朝鮮地誌...1911년 추정, 조선총독부)

 

 

 

8. “성환역(成歡驛)” “척수루(滌愁樓)“ 지명 역사

 

 

▢ “성환-成歡” 명칭...1026년(고려 현종 18년)

 

▢ 봉선홍경사기(奉先弘慶寺記)...최충(崔冲)...1026년 4월

 

신이 삼가 생각건대 불경에 이르기를, “초제(招提)라는 것은 여러 곳의 우수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서로 이끌며 널리 불법을 천명하기 위하여 거처하는 곳이다.” 하였으며, 또《장자(莊子)》에는, “여관(旅館)을 설치하여 인의(仁義)를 보인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여관을 만들어서 공무로 다니는 사람이나 사사로 다니는 사람을 구제한다.” 하였다. 지금 직산현(稷山縣)의 성환역(成歡驛)에서 북쪽으로 1마장쯤 되는 곳에 새로 절을 세운 것은 곧 그러한 종류에 속한다. 이 땅에는 전연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집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으므로, 비록 갈래길로서 요충지이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가 없는 곳이었다. 생각건대 우리 임금이 인(仁)으로서 왕위를 지키며 문화의 덕을 베풀어 무기의 종류들은 모두 버려두었으며, 예악형정(禮樂刑政)이 모두 밝혀졌으며, 특히 희사(喜捨)하는 인연과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일은 옛날 임금에게서 찾아보아도 나은 분이 없다. 일찍이 좌우양가 도승록 통진광교원 제홍도대사(左右兩街都僧錄通光敎圓濟弘道大師)인 신하 형긍(逈兢)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황고(皇考)이신 안종 헌경효의영문대왕(女宗憲景孝懿英文大王)께옵서 왕자로 계실 적에 불법에 마음을 돌리시어 항상 《법화경(法華經)》의 오묘한 학설을 보시고, 깊이 중도(中道)에서 성(城)을 만들었다는 말에 감동하시어 이대로 실천하려 하시다가 마침내 공을 이루지 못하셨다. 짐(朕)은 곧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영원히 그 성공을 보아야 할 터인데, 한 가지는 곧 길가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에 있어서 험난한 땅보다 걱정스러운 곳이 없으며, 한 가지는 곧 승려를 모아들여서 불법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니, 대사는 마땅히 노력하여 그 뜻에 협조하여 직접 터를 보아서 내가 부탁하는 명령에 부합되게 하며 그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맡으라.” 하시어 삼가 왕의 명령을 받고 지도를 펼쳐 보았다. 비록 9번을 돌아다녀도 게으른 줄을 몰랐지만 반드시 많은 협력자가 있어야만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같이할 사람이었으므로 곧 우수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광리 증현대사 사자사문(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인 신하 득총(得聰)과 정려수진전리대덕 사자사문(靜慮修眞理大德賜紫沙門)인 신하 장림(藏琳) 등이 다투어 넘어지는 수레를 부축하며 모두 중요한 길목을 점령하였다. 열의를 다하고 모여들어서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임금께서는 계속하여 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 식읍 이백호(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二百戶)인 강민첨(姜民瞻)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금자어대(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金紫魚袋)인 김맹(金猛)등에게 명하여 별감사(別監使)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을 함께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인부를 사역하는 데도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아니하였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무꾼은 목재를 공급하였다. 톱질과 자귀질은 일 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과 삽질에는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일하였다. 병진년 가을에 시작하여 신요년까지 법당ㆍ불전ㆍ대문ㆍ행랑등 모두 2백여 간을 세웠고, 그곳에 안치할 소상(塑像)ㆍ화상 등 여러 공덕(功德)의 상(像)과 종경(鍾磬)ㆍ번개(幡蓋)들은 모두 현재 있는 대로이니, 그 수가 사실 많았다. 마침내 절 이름을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고 내렸다. 공사는 여러 사람의 힘을 합쳐서 이룬 것인데, 외모는 어디서 날라온 듯이 보였다. 불상을 모신 불전, 불경을 봉안한 경루(經樓)는 화려하고 기이하여 완연히 도솔궁(兜率官)인 듯 의심스럽고 종(鍾)과 탑(塔)은 장엄하여 멀리서도 절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불도가 크게 진흥되는 때를 만났으니, 실로 영원한 불법의 계통이 서로 계승되리로다. 또한 절의 서편에 여관[客館]을 마주하여 세웠는데, 한 구역이 80간쯤 되었다.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다. 이곳도 겨울에 사용될 따뜻한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널찍하고 시원한 방이 마련되었고, 식량을 저축하며 말먹이도 저장하였다. 빈궁한 사람을 구제함은 옹백(雍伯)이 설치한 의장(義漿)의 제도와 같으며 도둑을 방비함은 진류현(陳留縣)에서 누고(樓鼓)를 세운 것과 같다. 이렇게 되고 보니, 법복을 입은 무리가 맨 손으로 왔다가 실속을 얻어서 돌아갈 뿐 아니라, 길을 가던 나그네가 밤에 헤매다가 낮에는 휴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는 진리를 증명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불한당이 나올 우려가 없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옛것을 참작하고 현재를 감안하여 선왕(先王)의 염원을 이루며 기회를 따라서 가르침을 실시하여 부처님의 오묘한 법문을 높이지 아니하였다면, 곧 모든 사람을 구제해야 할 인자한 정책이 하마터면 없어질 뻔하였다. 아아, 출발함에 깊은 의의가 있으니, 영원토록 계승해야 할 것이다. 창건한 공로는 이미 이루었으니, 받들어 시행하는 길도 또한 범위가 넓다. 최선을 다하며 언제나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유생(儒生)에게 명하여 이 거룩한 사실을 기록하라 하셨는데, 신은 생각이 부족하며 학식이 얕아서 사마장경(司馬長卿)처럼 모방하는 문장을 쓸 수는 없사오나, 서생으로서 문채 나는 작품을 감히 흉내내 보고자 한다.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역사 자료로서의 도움이 되게 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18년 되는 해, 태평(太平) 연호(年號) 제 6년 여름 4월 일에 삼가 기(記)를 씀.

 

 

봉선홍경사기(奉先弘慶寺記)...최충(崔冲)

 

臣謹按內典云。招提者。謂招引提携十方英俊。弘闡佛法居止之所焉。又莊子設蘧廬而視仁義。晉書論逆旅以濟公私。今之於稷山縣成歡驛北路一牛鳴地。新置寺舍者。卽其類也。地無長短之亭。人煙隔絶。有蕉蒲之澤。劫賊頗多。雖歧路之要衝。實往來之難便。不可終否。屬於盛時。惟我主上守位以仁。秉文之德。干戈戚揚。皆偃之矣。禮樂刑政。畢修之矣。若乃喜捨之緣。遹追之業。求諸往代。無得而踰。甞命左右。兩街都僧錄通眞光敎圖濟弘道大師臣逈兢曰。昔者皇考安宗憲景孝懿英文大王。初九潛身。大千歸命。每覽法華之妙說。深嘉中道之化城。方欲効行。未能勳集。朕則善繼其志。永觀厥成。一則救濟征人。莫憂於險地。一則招携緇侶。載轄於法輪。師宜力視贊襄。躬親胥宇。副我書貞之命。主其廬事之權。兢受綸言便圖經。縱九迴而無倦。須百足以不僵。所貴同心。用將籲俊。爰有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臣得聦。靜慮修眞理大德賜紫沙門臣藏琳等。競扶顚轂。枚卜要途。蒸烈來斯。實與我役。上續差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二百戶姜民瞻。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金紫魚袋臣金猛等。爲別監使。於是事諧共理。謗絶宣驕。庀徒勿奪於農時。程物免煩於公帑。陶人施瓦。木客供材。靈鉅風斤。蜂聚蕩心之匠。雲鍬電鍤。駿奔游手之群。起自丙辰秋。迄于辛酉歲。凡造得堂殿門廊等共二百餘閒。所置塑畫諸功德像。及鐘磬幡盖具如見在。其數寔繁。乃賜額爲奉先弘慶寺。莫不功由鳩僝。勢若飛來。像殿經樓。麗異而宛疑兜率。鳧鐘鴈塔。莊嚴而遙認爛陁。旣當三寶勃興。實可千燈相續。又於寺西。對立客舘。得一區許八十閒。號曰廣緣通化院。斯亦溫廬冬密。涼屋夏寬。積以糇粮。貯之蒭秣。施賙窮急。設雍伯之義漿。防備盜姧。列陳留之樓鼓。夫如是則不獨方袍之衆。虛往實歸。亦令裹足之徒。宵盤晝憇。終見證眞之境。蔑聞焚次之虞。向若非酌古沿今。賽先王之弘願。隨機設敎。宗彼佛之妙門。則兼濟之仁。幾乎而息。於戲權輿有旨。祖述無窮。肯構之功。旣存矣。奉行之道。亦廣矣。盡善盡美。念玆在玆。今則申命儒生。俾書盛事。臣思遲燥吻。學淺嚼筯。雖長卿形似之文。無能爲也。而小子斐然之作。竊敢効焉。略記端倪。聊裨寶錄。時聖上御圖之十八載大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日。謹記。

<出處-韓國古典飜譯院>

 

 

 

▢ 조선왕조실록>세종2년(1420)>8월12일(무신)

 

형조에서 여러 역(驛)의 전운(轉運)하는 노비에 대해 계(啓)하기를,

“경기(京畿)의 양재(良才)·낙생(樂生)·구흥(駒興)·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초현(招賢)·청교(靑郊) 등 9역에는 각 역에 10호(戶)를 주는데, 정역(正役)이 한 명이요, 봉족(奉足)이 두 명이니, 합계 2백 70명인데, 쌍수역(雙守驛)만은 12호요, 녹양(綠楊)·안기(安奇)·양문(梁文)·전원(田原)·청호(菁好)·가천(加川)·금령(金嶺)과 강원도 생안(生安)과 충청도 좌찬(佐贊)·분행(分行)·무극(無極)·용안(用安)·성환(成歡)·신은(新恩) 등 14역은 각 역에 8호씩으로, 정역(正役)이 10명이요, 봉족(奉足)이 2명이니, 합계 3백 96명이요, 충청도 단월(丹月)·안부(安富)·연원(連原)·황강(黃江)·수산(守山)·장림(長林)·장양(長楊)·태랑(台郞)·율봉(栗峯)·쌍수(雙樹)·덕류(德留)·증약(增若)·금제(金蹄)·광정(廣程)·일신(日新)·경천(敬天)·평천(平川) 등 17역은 각 역에 6호씩인데, 정역(正役)이 1명이요, 봉족(奉足)이 2명이니, 합계 3백 6명이요, 황해도 초면(初面)·잔참(殘站)·금교(金郊) 및 신설된 검수참(劍水站)도 또한 위에 정한 예에 의하여 노비(奴婢)를 마련하여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청주목 / 직산현

 

역(驛)이 1이니, 성환(成歡)이요...중략...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직산현(稷山縣)

 

성환역(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조선왕조실록 “성환역”

 

① 세종 23년 신유(1441,정통 6) > 3월26일 (계해)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충청도 성환역 승(成歡驛丞) 강득문(姜得文)이 무례하다고 구타하였으므로, 본도의 감사 이맹상(李孟常)이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핵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득문(得文)이 비록 무례하였다 하더라도 관인(官人)인데 순몽(順蒙)이 함부로 구타하여 욕보였으니, 나도 심히 이를 그르게 여기노라. 그러니 헌부(憲府)에 내려 추핵하게 하라.” 하였는데, 강득문이 일찍이 순몽의 종[妃]을 다스려 민리(民利)를 토호질하여 빼앗은 까닭으로, 순몽이 그를 욕보인 것이었다.

 

② 세조 2년 병자(1456,경태 7) > 7월20일 (정해)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역승(驛丞)들이 폐단을 일으켜 역로(驛路)가 날로 더욱 쇠잔하여지니, 전의 경기좌도(京畿左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정역 찰방(程驛察訪)은 경기 충청좌도 정역 찰방(京畿忠淸左道程驛察訪)이라 칭하고, 곧은 길로 충청도 성환역(成歡驛)에서 평천역(平川驛)까지는 경기 충청우도(京畿忠淸右道)라 칭하여 정역 찰방(程驛察訪)을 두고, 성환(成歡)과 일신(日新) 양도(兩道)의 역승(驛丞)을 혁파하고, 또 종전의 경기좌도 찰방의 소관(所管)이던 청호(靑好)·가천(加川)·강복(康福) 등 3개의 역은 지역이 우도에 가까우니, 청컨대 이속(移屬)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③ 세조 8년(1462 임오/ 명 천순(天順) 6년) 8월5일(정묘)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站驛)을 혹은 역승(驛丞)을 파(罷)하고 각각 그 부근에 합하여 하나의 길[道]을 만들어서 찰방(察訪)을 두었으나, 관할하는 역(驛)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磨勘)하여 대(大)·중(中)·소(小)의 역로 및 원근(遠近)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1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소서. 삼가 뒤에 갖추 아룁니다.

 

충청도 ...중략...

성환역(成歡驛)·신은역(新恩驛)·금제역(金蹄驛)·장명역(長命驛)·영춘역(迎春驛)·일신역(日新驛)·광정역(廣程驛)·경천역(敬天驛)·평천역(平川驛)·금사역(金沙驛)·단평역(丹平驛)·유구역(惟鳩驛) 이상 12역은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으로 일컫고...중략...

 

 

④ 세조 11년 을유(1465,성화 1)

 

처음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진지(金震知)가 아뢰기를,

 

“도내(道內)의 성환역(成歡驛)·평천역(平川驛) 등 연로(沿路)의 7역(驛)은 근년의 흉년으로 인하여, 인구(人口)가 거의 다 유망(流亡)하였으니, 청컨대 제역(諸驛)의 일수(日守)와 조역(助役)은 황해도 칠참(黃海道七站)의 예(例)에 따라 근방의 부호(富戶)를 가려서 전운 노비(轉運奴婢)를 증정(增定)하고,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소재(所在)한 고을의 제사 노비(諸司奴婢)를 추쇄하여 양수(量數)를 더하여 정하게 하고, 아울러 연한을 한정하여 복호(復戶)하여서 그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때에 제용감 판사(濟用監判事) 김달전(金達全)이 구황 경차관(救荒敬差官)으로 본도(本道)에 있으므로, 김달전에게 명을 내려 다시 살피게 하였더니, 김달전이 아뢰기를,

“성환도(成歡道)의 제역(諸譯) 안에 광정역(廣程驛)이 더욱 조폐(凋弊)하여, 인물(人物)은 다 도망하였으며, 마필(馬匹)은 모두 폐사(斃死)하였고, 그 나머지 여러 역은 모두 김진지의 아뢴 바와 같으니, 불가불 급히 도모하여 소복(蘇復)해야 할 것입니다.”...중략...

 

 

⑤ 영조 40년 갑신(1764,건륭 29)

 

서지수(徐志修)와 민홍열(閔弘烈)은 전에 산림의 선비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서지수는 관직을 삭탈하고 민홍렬은 성환역(成歡驛)으로 귀양보냈다....중략...

 

⑥ 정조 17년 계축(1793,건륭 58)

 

호서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진휼의 일을 끝마쳤다.

【공진으로는 수군 절도영 관할인 온양(溫陽)·석성(石城)·직산(稷山)·홍산(鴻山)·연기(燕岐)·평택(平澤)·아산(牙山)·신창(新昌)·은진(恩津)·청산(靑山)·부여(扶餘)·정산(定山)·보령(保寧)·비인(庇仁)·남포(藍浦) 등의 고을과, 마량(馬梁)·서천(舒川) 등의 진과, 성환역(成歡驛)의 기민 총 20만 1천 4백 97명에 진휼곡은 1만 5천 9백 84석 남짓이었고, 사진으로는 공주(公州)·충주(忠州)·청주(淸州)·홍주(洪州)·청풍(淸風)·한산(韓山)·면천(沔川)·서산(瑞山)·직산(稷山)·옥천(沃川)·대흥(大興)·단양(丹陽)·임천(林川)·천안(天安)·서천(舒川)·예산(禮山)·황간(黃澗)·이성(尼城)·제천(堤川)·연풍(延豊)·영춘(永春)·문의(文義)·태안(泰安)·음성(陰城)·청안(淸安)·회덕(懷德)·진잠(鎭岑)·연산(連山)·청양(靑陽)·진천(鎭川)·결성(結城)·전의(全義)·보은(報恩)·회인(懷仁)·영동(永同)·목천(木川)·덕산(德山)·해미(海美)·당진(唐津) 등의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평신(平薪) 등의 진과, 연원(連原)·율봉(栗峯)·금정(金井)·이인(利仁) 등 역의 기민 총 25만 5천 8백 51명에 진휼곡은 2만 9천 6백 18석 남짓이었다.】

 

⑦ 정조 20년 병진(1796,가경 1)

 

호서에 기근을 진휼하는 일을 개설하였는데, 정월에 시작하여 4월에 끝마쳤다.

【국가의 진휼은 신창(新昌)·아산(牙山)·평택(平澤)·직산(稷山)·천안(天安)·면천(沔天)·해미(海美)·대흥(大興)·예산(禮山)·덕산(德山)·당진(唐津) 등의 고을과 성환역(成歡驛)에서 실시하였는데, 기민은 총 11만 8천 1백 71명이었고 소요된 곡식은 5천 3백 11섬이었다.】

  

 

 

 성환역 “척수루-滌愁樓” 현판 제액(題額)

 

 

척수루는 성환역 우아(우편물 취급하던 건물 관아) 앞에 있는데 무릇 00칸이다.

 

충정공 이현수가 글을 써서 편액의 이름을 “척수-근심을 씻어 낸다”라고 지었다.

 

1797년 정조(정사년)에 성환역찰방 종6품 이상우(1794년5월 도임~1797년5월 과만, 재직-직산현지) 찰방이 중창하여

외삼문 위에 척수루(층루)를 지었다.

 

박규순(호-비원, 1740~? 충남 예산출신)이 척수루에 누정기를 지었다. <오심죽 윤종일 졸역>

 

< 출처 - 忠淸道 邑誌-稷山縣...척수루 >

滌愁樓在成歡郵衙之前凡0間 李忠定公袨手書額 曰 滌愁

正宗丁巳察訪 李尙友重刱於外三門上爲層樓 朴肥園奎淳作記

驛院成歡驛在縣北八里察訪一人(從六品)...後略

 

척수루재성환우아지전범0간 이충정공현수서액 왈 척수

정종정사찰방 이상우중창어외삼문상위층루 박비원규순작기

역원성환역재현북팔리찰방일인(종육품)...후략

 

◯ 통수원(通水院)...성환역 옆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성환역 찰방, 척수루 터...충청도읍지 직산현

 

※ 천안박물관

 

 

▢ 역원(驛院)제도의 역사...역원제도란?

 

옛날 교통 · 우체 · 숙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가장 중요제도로는 역원제도가 있다. 역원제도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역제는 이미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설치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후 고려조에 이르러 크게 정비되어 전국을 22도 525역으로 연결하고 공문의 전달, 관물의 운송, 공무출장 관리의 왕환 · 숙박의 편의를 주고 또한 관청간의 연락을 신속하게 하였는데, 도에는 역승이 있고 각 역에는 역장과 역리 · 역졸 · 역정 등이 배속되어 일을 맡아 하였다.

 

또 각 역에는 역전(公須田 · 紙田 · 長田 등)을 두어 그 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하고 역마를 두어 전명 전달에 이용하였다. 그 전달 방법은 상서성에서 가부를 결정하였다. 긴급시에 행하는 이른바 현령식 전달방법은 가죽 자루에 방울을 달고 역졸이 달리는 것인데, 지급 즉 대급문서는 3현령(방울 3개를 다는 것), 2급에는 2현령, 1급에는 1현령식으로 완급에 따라 행하였던 것이다. 현령식이고 비현령식이고 간에 역의 전달방식은 중계적으로 역에서 역으로 체전토록 하였던 것이다. 조선건국 후 고려의 역망은 새 수도인 한양의 경복궁 앞을 기점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역제는 처음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는데 그 후 역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역관리 체제의 개혁, 역원보충, 역로의 보수 · 개정 등이 이루어져 마침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서 여제를 탈피한 제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역 관할을 맡은 중앙 최고기관은 병조였으며, 그 안에서 실무(우역사무)를 맡은 곳은 승여사였다. 승여사는 태종 5년에 국초부터 역의 실무를 맡았던 공역서를 폐지하는 대신에 설치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방 각 도에는 종6품인 찰방 또는 종9품의 역승을 파견하여 도내의 역정을 관할케 하였는데, 각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졸 등을 두었다. 역승은 취재로서 임명되는 서리 출신이 많았고, 찰방과 함께 무록관이었다. 그리고 역장은 역리 가운데서 근면하고 신의가 있고 문장을 해독하는 자로 임명하였는데, 그 밑에 역리 · 역졸을 지휘 · 감독하여 역의 관리와 공역을 담당하였다.

역은 중앙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주로 대로변의 주현 각읍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간선도로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벽지에도 역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역은 별칭으로 관 · 참 · 합배 등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이는 각각 그 명칭에 따라 기능이나 구성면에서 역과 상이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위치하는 지역에 따라, 관례에 의하여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역에는 그 운영을 위해 마필과 역전 12결, 마전(마필의 사육을 위해 급여한 토지로서 대마 7결, 중마 5결 50부, 소마 4결을 지급한 것), 이밖에 공수전, 장전, 부장전, 급주전 등이 급여되었다. 공수전은 관리접대비에 충당키 위한 것으로 역의 대 · 중 · 소로에 따라 대로에는 20결(황해도에는 25결을 더 지급하고 평안, 함경의 양계에 10결을 더 지급하였다), 중로에는 15결(양계에는 7결을 더한다), 소로에는 5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장전은 역장에게 준 것으로 2결, 부장전은 부장에 준 것으로 1결 5부, 급주전은 급주졸에 준 것으로 50부이었다.

역의 기능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중앙과 지방과의 공문의 전달, 관물 · 세공의 수송, 관료사행의 마필의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경군정의 보고와 이밖에 민정관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다.

이 역로를 이용하는 것은 공용사무에 국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공용에 준하는 사용(私用)에도 이를 허가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육상교통 왕래의 신속을 기하기 위하여 서울 주변 및 경기도의 중요 도선장인 벽란도(예성강-개성-연안간), 임진도(임진강-파주-장단간), 낙하도임진강-교하-개성간), 중랑교(중랑구 중랑천-청량리), 살곶이다리(전관교 - 현 한양대 부근 · 제반교)를 비롯하여 도성에 출입하는 한강에는 상류로부터 도미진, 광나루(광진, 광장진), 삼전도(三田渡), 중랑포, 서빙고, 흑석진, 동작도, 한강도(한강, 서울∼용인간:현 두모포, 서빙고 중간), 노량진, 두모포(두뭇개), 용산강, 마포, 서강, 율도(밤섬), 양화진, 사천모래내), 공총진(공암진), 조강도 등 전국의 나루터에는 종9품의 도승을 두었다. 역승은 중종 30년(1535)에 모두 찰방으로 승격되고 도승도 뒤에 별장으로 되었다.

각 역의 역마를 사용하려면 '마패'라는 증명이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사용자의 관등품위에 따라 각 역에서 제공하는 마필수에 차이를 두었다. 즉 역마사용의 증빙인 마패는 일면에다 품위수에 따라 다르게 사용 마필수를 새겨 놓고 타면에다 연호, 년 · 월 · 일과 '상서원인'이라고 전자로 새겼다. 왕족의 경우 (대전왕), 대비전왕모), 중전(왕비), 동궁(세자), 빈궁(세자비), 세손궁, 세자빈의 마패는 산수자로 만든 원패로 일면에다 마수, 타면에는 '마'자만을 사용할 수 있는 수대로 새겨 넣은 동제의 원패이다. 중앙에서는 병조가 마문을 발급하면 상서원에서는 그에 따라서 마패를 내어 주었다. 지방에서는 감사 · 병사 · 수사가 발마패를 받아 계문 또는 진상 등 필요한 때에 이것으로 발마케 하고 회환문이 있으면 귀로에서도 마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군사 사정이 긴급할 때에는 쌍마를 사용하였고 포마문의 초면에 '긴급사' 3자를 써서 주야로 급주케 하고 마패를 파손한 자는 장 80, 도 2년의 형에 처했다. 그리고 마필은 상, 중 하 3등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던 바 관원의 관품에 따라 발급한 마필의 수는 <관원급마표>와 같다.

 

급마표 규정 이외에 수시로 급마하는 규정이 있었다. 곧 , 긴급군정,각릉제물재시 또 진장 · 역관 · 압공인 · 제주 자제징군관문을 가진 장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수령(홍원과 박천 이북)의 교관에게는 급마하였다. 그런데 이 '수시급마'하는 규정은 이른바 남승의 폐를 가져오게 하여 역제문란의 큰 원인을 만들었다. 초기부터 남승과 사용급마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리도록 하였지만 실지로는 법규를 위반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영조 38년(1762)부터는 중국의 패문을 모방하여 종예수 및 노정을 새겨넣은 일종의 통행증인 노문을 발급하고 대소사신이 백문과 선문을 사용함을 일체 금지하기까지 하였으나 역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식자간에 역제 및 역마공급을 위한 마정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나오고 일찍부터 용차론이 대두하기도 하였으나 그 폐는 말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역을 통과하는 공용여행은 각 역관이 직명과 일시를 기록하였다가 매계절에 병조에 보고토록 하였다.

 

역의 분포는 고려 때부터 비교적 잘 정비되어 고려 때 520여개처의 역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480여개처,『경국대전』이전 외관직조에는 540여개처로서 수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고려 때는 삭주방면인 흥화도, 운산방면인 운중도, 영흥방면인 삭방도를 북쪽 한계로 하여 그 북경 일대와 특히 개경을 중심으로 한 황해 · 강원북부에 역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많이 감소되는 한편 국경선을 따라서 서울-의주간, 서울-경흥간의 간선과 강계방면, 삼수방면의 지선이 정비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대신 중부 이남은 거의 대부분의 역이 고려 이래의 소재지를 그대로 답습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부 이남의 교통망은 그 원형을 고려대의 것에 따르고 있는 것이며 또『경국대전』 소재의 역과『대전회통』소재의 역은 서로 약간의 변동을 보이고 있을 뿐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역은 삼남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고 찰방은 경상도 같은 곳은 11개소나 되는데 비하여 평안 · 함경 양도의 산악지대에는 거의 역의 시설이 없고 찰방도 그 면적에 비하여 배치가 아주 적었다.

그리고 후기에 이르면 역로는 대 · 중 · 소로로 구분되고, 제도의 사객 이하 수령, 첨사, 만호 등의 왕래로가 분정되었으며, 위범자는 관찰사가 조사하여 보고하는 규칙이 제정되는 등, 그 정비에 세심한 주의가 경주되었다. 즉『속대전』에 의하면 대로는 경기 12역, 중로는 경기 7역, 충청 24역, 전라 4역, 경상 5역, 강원 6역, 황해 11역, 평안 13역, 함경 37역이고 기타는 모두 소로로 규정되었다. 사객 이하의 분로 역시 충청 · 전라우도의 모든 사객은 금천(시흥), 수원을 경유하며, 충청 · 경상좌도의 사객은 광주, 이천을 경유하고 전라좌도와 경상우도의 사객은 과천을 경유하여 왕래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밖에 서울 흥인문 밖 4리 지점에 있었던 노원역은 동북방면의 역로와 연결되고, 숭례문 밖 3리 지점에 있었던 청파역은 남부지역의 역로와 연결됨으로써 중시되어 병조의 직할역이 되었다 전국의 역과 그 편제에 대한 것은 처음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정리되고 그 후『경국대전』,『속대전』,『대전회통』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역승 39 · 찰방 5의 역승관리가 주가 된 체제로 총 480개의 역을 < 찰방 · 역승 정원표(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경국대전』에서는 찰방 23, 역승 18로 된 찰방관리가 주가 된 체제로 총 537역을 기재하고 있는데 중종 30년 이후에는 역승은 완전히 혁파되고 찰방으로 대치되었다.

한편 교통에 편의를 주던 시설로는 원 · 관의 제도가 있었다. 즉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위해서 각 요로에 원을 두고 빈객을 접대하기 위해 각 주현에 객사인 관을 두었다. 이 원 역시 역과 함께 고려 때부터 많이 시설되고 또 정부에서는 원위전이라고 하여 전토를 주어서 원의 경비를 충당하게도 하였다. 특히 고려시대는 불교계에서 승려들이 자선사업의 하나로 이 원을 경영하던 것도 볼 수 있다. 또 이 원은 역과 동일한 장소에 많이 있음으로 해서 역과 원을 합하여 '역원'으로도 불리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와서 원이 혹 폐지되기도 하고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여 여행자들에게 불편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 27년(1445)에는 이를 정비 · 보완하는 한 방법으로 부근 주민 중 유능한 사람에게 원주의 책임을 맡기고 원주전을 주었다. 원주에게 급여되었던 원주전은 대로인 경우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 45부이었다. 그러나 원은 그 사용자가 국한되어 있는 까닭에 점차로 퇴폐된 것이 많았고 공용여객의 공궤는 각관 · 각역 혹은 민간업자가 담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공용여행자는 초료라 하여 여행 중에 관으로부터 종인 · 필마의 숙식을 포함하는 소정의 공급을 받게 되어 있고,[ 이 증빙은 병조 · 감사 · 병 · 수사 등이 내어주게 되어 있었으며 변장 · 군관 등도 그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사용여행자는 사설의 점에서 방화전을 내고 숙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임진왜란 후에는 참마다 참점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주점 · 주막으로 부르던 거릿집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원은 형적을 감추어 여러 곳에 원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만을 남겨 전하게 되었다. 서울에도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었는데, 그 중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전한다. 서대문 밖 추모현 북쪽에 있던 홍제원은 처음 고려 성종 4년(985)에 승 정현이 창설하였던 것인데 660여년 후인 인조 26년(1648)에 청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참이 여기에 설치됨에 따라 그 해 3월에 태평관 및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해다가 새로 관우를 짓고 청나라 사신들의 유숙소를 삼게 하였던 것으로서 일반 원에서 발전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 결론(結論)

 

 

이상과 같이 검토한 결과 <성환역도찰방, 척수루, 연당지>가 있었던 성환역은 천안 역사의 길목이며, 경기와 충청도를, 서해바다의 어염과 내륙 농임산물을 교역하고 이어주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고려~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 고대 대중국 교역로 신라 당항성로이며, 대백제 직산 위례성의 대륙진출의 거점역할을 수행한 천년 역사의

로드다큐를 간직한 의미 있는 곳이다.

 

비록 현재는 철도와 고속도로 항공기의 발달로 인하여 인적, 물적 교통량이 분산되어 그 의미가 약해졌지만 아직도 성환역 주변은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고을과 고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대한민국의 중심적 교통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과 신라 김무력, 김유신장군의 당항성 진격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로, 조선왕조 군왕들의 통행로이며, 조세운반의 중요한 거점으로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와, 아산만 당진을 잇는 34번 국도, 서울을 잇는 국도 1호선, 국가의 대동맥인 철로가 성환지역을 관통한다.

 

성환역 찰방은 고려 현종 1021년 봉선홍경사, 광연통화원의 건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고 홍경사 비문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그 연대가 더욱 오래되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고려 태조가 직산 수헐원에서 오색구름이 휘도는 성거산의 이름을 친히 짓고, 천안도독부의 오룡쟁주형 왕자산을 바라보며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곳이다.

또한 천안시의 옛지명이 동도솔, 서도솔인데 최충이 지은 비문에는 홍경사 경내 200칸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미륵부처님이 사는 도솔천에

비유하여 천안 직산의 이곳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였는지 였볼 수 있고 또한 직산현 성환역, 척수루 앞에 커다란 연당을 만들어 미륵부처님이 계신 수미산 도솔궁을 이곳에 옮긴 것처럼 연꽃으로 주위를 장식하여 백성들의 평안과 위안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려 태조의 연호가 천수(天授)이다.

그런데 유달리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하늘천(天)의 지명이 천안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성거산 천흥사(天興寺)의 지명, 천안부(天安府)의 지명에서 하늘이 내려준 권력, 즉 천부(天符), 천수(天授)란 고려 태조의 연호를 통해서 미륵부처님을 대표하는 권력의 당위성을 위해 고려왕조에서 정성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초도의 진산 위례성 부소산 너머엔 천안시 북면 대평리 보협인석탑은 부처님이 미륵세계에 머물며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전생의 비밀을 국보 209호 보협인석탑을 통해 조각해 넣음으로써 미륵신앙의 이상향 수미산 33천의 도솔천, 도솔궁을 재해석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시 성환읍 성월리 산17-1외의 <성환역도찰방, 척수루, 연당지>가 위치한 곳은 이러한 지정학적인 요로에 위치하였다.

 

지명유래, 직산현지, 규장각 고지도, 위성사진, 현장답사를 통해서 그동안 베일에 휩싸여 있었던 성환역 찰방 터를 찾아 보았다.

이는 직산현 성환읍 지명유래와 고기록에 근거해서 밝혀진 결과물이다.

향후 이 지역의 정밀한 지표조사와 출토되는 유물의 결과에 따라서 좀 더 정확한 위치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성환역 찰방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사학자들의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 찾아낸 것이다.

현재 이곳엔 제3탄약창의 진입로 공사가 시작되어 어렵게 찾아낸 역사문화 유산이 더 이상 훼손, 방치되고 않고 보존 발전되어 천안시민,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시민 삶의 질 세계 100대 도시 진입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땀 흘리며 저마다의 근로 현장에서 피 땀 흘려 노력했다.

사람 역시 배부르고 등 따습고, 여유가 있으면 놀고, 즐기는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고래(古來)의 진리인바 이제 살림 형편이 일제강점기, 6.25전후에 비해서 좀 나아진건 부인할 수 없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좀 더 높은 문화예술의 향기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제 우리 천안시도 <시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성환역 도찰방, 척수루 복원>을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천안삼거리> 역시 삼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하였고, <성환역> 역시 삼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11개 역원을 거느린 커다란 역원이였다.

삼남대로 교통의 중심 도시답게 <로드다큐>, <길의 역사> <여행과 길> 등 길을 테마로한 관광문화 상품의 개발이 되어야 한다.

 

<성환역 척수루-滌愁樓> 누각 위 진흙 속 연꽃을 바라보며 인생사 희로애락의 근심을 깨끗이 씻어 내고자 했던, <입장 좌성산성 탕흉대-蕩胸臺>에서 깊은 시름을 털어내고 호연지기를 갖고자 했던, <직산 수헐원-愁歇院-시름새>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 고단한 시름을 잠시 쉬고자 했던 군왕제현(君王諸賢), 장삼이사(張三李四),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의 수많은 애환이 천안의 길목마다에 깊게 배어 있다.

 

천안삼거리와 더불어 <천안시 로드다큐 문화유산>으로 게승함이 우리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 성환역(成歡驛) 시문(詩文)

 

 

 

척수루(滌愁樓)

신유-申濡, 1610(광해군 2)~1665(현종 6)

본관은 고령.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이옹(泥翁).

 

성은에 휴가를 얻어 남으로 길 재촉하며 내려오네

성환 척수루에 올라 석양에 잠시 배회하네

한 잔 술 얻으니 번잡한 가슴속 시름 사라지나니

부질없는 이유로 사람을 부리어 귀밑머리 희어졌네

가을밤 넘치는 갯방죽의 물은 푸른빛을 더했고

이슬 앞에 피었던 연당의 연꽃은 붉게 떨어졌네

십 년 만에 호서 땅 성환역 척수루에 오르니

어느덧 늙어 시부 짓는 일 잘 못한다 뉘에게 말하겠는가

 

恩暇南來路轉催(은가남래로전최)

驛樓西日暫徘佪(역루서일잠배회)

煩襟得酒愁全减(번금득주수전멸)

冗故驅人鬢已摧(용고구인빈이최)

陂水綠添秋後漲(피수녹첨추후창)

渚蓮紅墮露前開(저련홍타로전개)

十年湖外登臨數(십년호외등임수)

潦倒誰言作賦才(요도수언작부재)

 

 

 

소사(素沙)들을 지남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 17)~1793(정조 17)

 

고적 찾아 가니 말 몰기도 더디어라

도경을 일찍이 읽어 고을 이름 알았다오

부유의 옛 나라 성터는 완연한데

마귀의 묵은 영은 전쟁 상황 위태하였네

발 가운데 홍경사를 지나며 조상하고

주점 가의 대동비를 와서 찾았네

여장 재촉하고 성환역 뒤로 가리키니

관의 나무 촌의 연기 경치가 다시 기이하네

 

訪古行行策馬遲(방고행행책마지)

圖經曾讀縣州知(도경증독현주지)

鳧臾舊國城墟宛(부유구국성허완)

麻貴荒營戰狀危(마귀화영전상급)

歷弔田中弘慶寺(역조전중홍경사)

催裝背指成歡驛(최장배지성환역)

來尋店畔大同碑(내심점반대동비)

官樹邨煙景更奇(관수촌연경갱기)

 

[주D-001]부유(鳧臾) : 부여(扶餘)를 부유로 표기한 것인데, 여기서는 백제(百濟) 왕의 성씨(姓氏)가 부여이므로 일컫는 말이다.

[주D-002]마귀(麻貴)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군(援軍)을 이끌고 온 명(明) 나라 제독(提督)인데 평택 부근에 진을 쳤었다.

 

 

 

 

 

 

 

 

 

 

 

 

 

 

 

 

 

 

 

 

 

 

 

 

 

 

 

 

 

 

 

 

 

 

 

 

 

 

 

 

 

 

 

 

 

 

 

 

 

 

 

 

 

 

 

 

 

 

 

 

 

 

 

 

 

 

 

라. 부록

 

▢ 성환역(成歡驛) 척수루기(滌水樓記)

▢ 성환역(成歡驛) 시문(詩文)

 

 

  

 

 

척수루기...滌愁樓記...修山集 卷之三 記

 

懽與樂。同出而殊名。憂與愁。異稱而共情。然懽譬諸樂。愈散而外著。愁較之憂。愈發而表見。故懽與愁。常異情而同行。相乘而常對待也。是以。君子之於去愁。必以懽而解之。猶物之去滓。必以水而滌之。然或情與物遷。當愁而强懽。則君子以爲非情。成歡驛在稷山北。爲圻湖分界。而當三南之衝。晨雞夜鈴。輪蹄如織。而滌愁樓在驛南。爲留客之舘。前有池塘。圜以楊柳數十株。紅白菡萏。與藻菱蒲芷。被於水面。登樓而望。自聖居以西。沙橋以北。極之於海。瀰漫大野。一擧目。若可得之。覽者。無不稱快。然行旅之過是者。皆有公私之憂。而得失之機。膠擾於其中。則登斯樓也。覽物向風。愁若可滌。而及夫下樓而去也。其纏綿悽慽不可聊者。如萍之復合。如草之復生。是豈可以言滌愁乎。古之賢士。其與此異。其養有素而其志已定。事之當否。瞭於目中。而得失之幾。莫得以動其心。其蘊於中也常樂而無憂。其發於情也常懽而無愁。當其有行旅之苦。出於黃塵濁川之間。而得遇荷塘柳堤曠野遠林。於以登臨而眺望。其心何如。盖其無憂於心。故境接而懽生。樂在於中。故物來而愁滌。非如常情之緣境而生懽。玩物而排愁。雖暫有樂。境退物去則還如舊也。或曰。昔范希文作岳陽樓記曰。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也。然則如斯者。雖登玆樓。未可以言滌愁耶。余曰。非也。凡人之憂。不出於己私。是以。悽悽惻惻而愁不可解也。如希文者。其憂散于四海。而布在億兆人之心中。盖常坦蕩而不可囿也。豈如小人之慽慽耶。嗚呼。安得與斯人者。共登斯樓。以滌吾心中之愁哉。辛未月日。余寓稷衙。督郵某君。重修其圮。送書請記。凡功費若干。爲日若干。夫成懽之與滌愁。待對之名也。君旣淸愼。以得郵人之歡。而又欲去行旅之愁。卽樓而新其制。凡此者。皆君子之心也。可與言懽愁之義。故書此以歸之。夫懽樂有淺深。憂愁有內外。樂於中者深。故懽於外者厚。是以。心無憂而愁可滌也。滌之爲言。如沐浴其身以去垢。不復留也。嗚呼。以此爲爾雅註疏可也。爲滌愁樓記亦可也

 

 

 

 

 

 

 

 

 

 

 

 

 

 

 

 

 

 

 

 

 

 

 

 

 

 

 

 

 

 

 

 

 

 

 

아정유고 (雅亭遺稿) -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소사(素沙)들을 지남

 

고적 찾아 가니 말몰기도 더디어라

訪古行行策馬遲

도경을 일찍이 읽어 고을 이름 알았다오

圖經曾讀縣州知

부유의 옛 나라 성터는 완연한데

鳧臾舊國城墟宛

마귀의 묵은 영은 전쟁 상황 위태하였네

麻貴荒營戰狀危

발 가운데 홍경사를 지나며 조상하고

歷弔田中弘慶寺

주점 가의 대동비를 와서 찾았네

來尋店畔大同碑

여장 재촉하고 성환역 뒤로 가리키니

催裝背指成歡驛

관의 나무 촌의 연기 경치가 다시 기이하네

官樹邨煙景更奇

 

[주C-001]소사(素沙) : 지금의 평택군 진위면(振威面).

[주D-001]부유(鳧臾) : 부여(扶餘)를 부유로 표기한 것인데, 여기서는 백제(百濟) 왕의 성씨(姓氏)가 부여이므로 일컫는 말이다.

[주D-002]마귀(麻貴)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군(援軍)을 이끌고 온 명(明) 나라 제독(提督)인데 평택 부근에 진을 쳤었다.

[주D-003]홍경사(弘慶寺) : 고려 추숭왕(追崇王) 안종(安宗)의 원당(願堂).

[주D-004]대동비(大同碑) : 사가시전주(四家詩箋註)에 의하면 조선 때 대동전세법(大同田稅法)을 시행하면서 이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찬(撰)하였다 한다.

 

 

滄洲先生 遺稿 卷之五 七言律詩

 

成歡 滌愁樓。次壁上韻。

 

冉冉征途節序催。

滌愁樓上暫徘徊。

霜前砌菊猶堪嗅。

雨後池荷半已摧。

獨夜夢魂淸易醒。

暮年懷抱苦難開。

曉來拓戶臨原野。

潦倒慙非作賦才。

 

 

 

 

 

 

 

 

東里集 卷之一 詩

 

滌愁樓。次申君澤韻。寄方伯。

 

行邁悠悠別恨催。

小樓春日強徘徊。

孤懽借酒愁難滌。

往事關心鬢欲摧。

官柳正堪橋上折。

驛梅誰使路邊開。

繁華別有難摸處。

擬寫新詩愧退才。

 

 

 

 

 

 

 

 

芝湖集 卷之一 詩

 

成歡 滌愁樓

 

匹馬南州路。

秋風古驛樓。

登臨一長嘯。

散盡百年愁。

 

 

 

 

 

 

 

 

 

 

 

 

水村集 卷之二 詩

 

寒食登滌愁樓

 

江南客子倦春遊。

寒食東風獨倚樓。

欲滌旅愁愁不盡。

夕陽芳草喚生愁。

 

 

水村集卷之二 詩

滌愁樓又題

 

去年寒食滌愁樓。

七夕今年又滌愁。

浮世客遊眞似夢。

故園歸路更逢秋。

茫茫曠野人稀去。

漠漠繁陰雨未收。

徙倚曲欄無語立。

醉來天地入搔頭。

蒼雪齋先生文集 卷之二 詩 筮仕錄

 

 

 

午憇 成歡驛 滌愁樓

 

歇馬日將午。

垂楊生晩凉。

平湖荷萬柄。

風過滿樓香。

 

損窩先生遺稿 卷之五 詩 五言

登滌愁樓 在成歡驛。癸亥。

 

策馬西湖路。

登臨古驛樓。

小池經雨漲。

孤峀接天浮。

翳日庭陰晩。

連雲隴麥秋。

沉吟覔佳句。

憑檻暫淹留。

 

 

杞園集 卷之四 詩

 

登成歡 滌愁樓 漫吟

 

成歡驛有滌愁樓。

誰作佳名慰客遊。

北去南來千古事。

一樓烟景自悠悠。

 

白日高樓㢠。

淸池老柳陰。

差堪慰客意。

聊以散煩襟。

雀噪何多事。

鶯啼自好音。

滌愁非浪號。

有酒更須斟。

 

 

 

杞園集 卷之四 詩

 

歸路。上滌愁樓。有一寒生自夾室出見。有琴倚壁。穪以自家所彈。命奏一曲。憑檻聽之。

 

風雨池塘古驛樓。

江南獨去思悠悠。

憑檻邂逅鳴琴客。

今日眞成滌萬愁。

 

 

 

 

 

 

 

 

 

 

 

樗村先生遺稿 卷之一 詩

○江湖錄[一] 戊子春夏

 

自㓒園。到成歡驛。將登滌愁樓。

 

未待秋風病已蘓。

東南十日事馳駈。

莊周化蝶身如夢。

王粲登樓興不孤。

細路依微憑客問。

危橋斷續倩人扶。

向來慢識農心苦。

父老爭嗟野色枯。

 

 

 

 

 

 

 

樗村先生遺稿 卷之一 詩 ○江湖錄 戊子春夏

滌愁樓。次板上䪨。

 

擬躡高樓路暗催。

憑軒展眺獨徘徊。

方池上下新蓮凈。

曲檻前頭古木摧。

朱閣幾時經客度。

孤牕終日遣人開。

紗籠畫壁銀鉤在。

欲和淸篇愧不才。

滁水孤亭不讓頭。

未勞取醉亦無愁。

靑槐影綴尙朱夏。

碧耦花開待素秋。

啅屋長時禽上下。

登樓半日客遲留。

丁寧欲向郵官道。

如此風光肯換侯。

湖西第一滌愁樓。

盡日猶看客倚樓。

乘風歸來餘興在。

耦花時節更登樓。

 

 

 

 

 

 

 

 

 

 

 

 

 

 

 

錦石集卷之二 詩

 

宿成歡驛 登滌愁樓。與金仲寬呼韻共賦。

 

今入湖西境。

初聞驛上樓。

層梯延夕望。

一酌散鄕愁。

草暗高帿在。

潭明老樹浮。

徐徐投舘宿。

回首數星留。

 

 

 

 

 

 

 

 

碩齋稿卷之九 海東外史 [崔老]

 

崔老者。成歡驛吏也。世爲吏於成歡驛。年七十餘。當戊申之難。時賊勢熾張。湖嶺戒嚴。驛丞姜柏走。閭閻爲之一空。雛鷄乳狗布野鳴號。崔老未忍去。與老卒守亭館。賊首李麟佐以三千兵次于驛。夜張樂飮酒。崔老供給惟勤。及四鼓。賊衆皆睡酣。警柝不響。旗竿燈火盡滅。閴若無人。崔老使卒潛伏驛後峯大呼曰。成歡驛吏。崔老曰諾。曰金吾緹騎十百輩。方捕賊而來。汝丞安在。曷不秣馬以竢。否則斬之。崔老連聲應諾而出。聲振林谷。奮挺左右衝突。因放馬庭中。相蹄趹以撓之。賊衆方睡酣。變出倉卒。惶急驚動靡所定。太半散亡。麟佐急回軍。軍聲遂不振。而因爲元帥所擒。崔老老死。名亦不傳。邑人稱崔忠臣云。余甞到成歡驛。有所謂滌愁樓者。崔老死守之地也。徘徊登覽。惆悵者久。當是時。位將相而與賊相應。以觀望成敗者。視若人何如哉。

 

 

 

鼓山先生文集 卷之一 詩

 

四月登滌愁樓。

謹次王考韻。己巳四月。王考嘗登此樓。有詩。

 

 

滌愁愁未滌。

聊上滌愁樓。

魚躍方塘闊。

鶯啼夏木幽。

能謀一盃酒。

頓忘百年浮。

愁滌方歸去。

何須問督郵。

 

 

 

 

 

 

竹堂先生集 卷之五 高靈申濡君澤著 湖行錄

 

滌愁樓

 

恩暇南來路轉催。

驛樓西日暫徘佪。

煩襟得酒愁全减。

冗故驅人鬢已摧。

陂水綠添秋後漲。

渚蓮紅墮露前開。

十年湖外登臨數。

潦倒誰言作賦才。

 

 

 

 

 

 

 

 

石洞先生遺稿 卷之一 詩

 

棄齋郞南歸。登滌愁樓。

 

 

曾遊京洛斗初東。

不道登玆陽已重。

霜葉蕭條含晩日。

綠荷多少背西風。

見愁却與羈愁滌。

歸興還將秋興濃。

千里行裝惟白髮。

一鞭羸馬好隨鴻。

 

 

 

 

 

 

 

西巖遺稿 卷之上 七言律詩

次東里李尙書長卿 殷相

 

成歡 滌愁樓韻

 

登臨暫賭片時歡。

長路覊愁到此寬。

十里芳郊三月暮。

五更荷雨一燈殘。

客留淸製題華板。

燕賀新成舞畫欄。

回首北宸看漸近。

玉樓高處想平安。

東里題此投示。

求次甚迫。

辭不獲已走酬。

 

 

 

 

原韻

 

歡城路轉又成歡。

歡不能成強自寬。

千里旅遊雙鬂白。

一春消息百花殘。

池荷過雨抽新蔕。

堤柳迎風拂曲欄。

默筭驛程知不遠。

也應明日入長安。

 

 

 

 

 

 

 

 

 

 

松坡集 卷之二 詩

 

驛樓 自此至曲松詩。凡三十七首。戊申成歡督郵時作。

 

西南冠盖不曾休。

迎送令人欲白頭。

咄咄世間眞怪事。

驛中還有滌愁樓。

 

 

 

 

 

 

 

 

 

 

 

蘆洲先生文集 卷之一 詩

 

登滌愁樓

 

愁來無以寫。

晩上滌愁樓。

官路行人織。

松林宿鳥投。

北瞻丹極阻。

南望白雲浮。

多少覊孤恨。

憑欄付酒籌。

 

 

 

 

 

 

 

 

蘆洲先生文集 卷之二 詩

 

成歡滌愁樓。次板上韻。時以靈巖郡守。自朝家給馬赴任所。

 

灾邑分憂去路催。

驛亭何事故徘徊。

棲遲昔日遊曾慣。

湖海重來氣未摧。

遠樹依依雲外合。

方塘浩浩鏡中開。

憑欄欲和前人句。

語似搔靴愧不才。

 

 

 

 

 

 

 

昌舍集 卷之二 詩

 

吟贈成歡督郵 滌愁樓主人嚴子鼎

二首

 

酒薄郵殘醉不歡。

強登樓處亦愁顔。

千年賴子詩兼酒。

驛號樓名正好看。

成歡館下滌愁樓。

常訝名將實不侔。

何幸主人風度足。

驛人懽喜客忘愁。

 

 

 

 

 

 

 

后溪集 卷之一 豐壤趙裕壽毅仲著 詩

 

投宿成歡驛。携督郵上 滌愁樓。

 

 

麥氣能扇五月風。

新蓮已滿一樓東。

十年行役登玆屢。

復倚濃陰欲雨中。

 

 

 

 

 

 

 

 

 

 

 

 

 

 

 

 

 

 

 

 

 

 

 

 

 

 

 

 

 

* 조선총독부...조선지지 1911년경 ...성환역 한부개제(일명, 갯방죽) // 

 

 

 

 

 

 

 

임명순님_반론,주장에_대한_답변.hwp

 

 

 

 

<<< 직산고을 오심죽...직산현 성환역, 척수루 터를 찾아서...2011.8.3 >>>

 

 

 

 

 

 

 

 

 

 

 

 

 

 

 

임명순님_반론,주장에_대한_답변.hwp
0.3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