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산성축성기법

吾心竹--오심죽-- 2010. 11. 16. 19:19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산성축성기법

syc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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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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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우리나라의 전 시기 중 가장 많은 산성이 축성된 시기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전국에 2천여 개의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중 60-70% 이상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중 고구려는 가장 일찍 가장 견고한 산성을 구축하였다.


 

신라

신라는 5세기 대에 이르면 성벽의 높이가 20m가 넘는 견고한 성곽축성기술을 구비하게 된다. 기단부의 보축이나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현문식 성문, 내성벽의 내부가지 견고하게 축성하는 꼼꼼한 석축기술은 삼국을 통일할 수 있게 한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

<신라 산성의 특징과 축성방법>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신라성곽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 산성이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육계토성 등의 백제성은 평지토성이나 저평한 구릉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호로고루나 당포성, 은대리성과 같은 고구려성은 강안대지상에 축성되는 데 비하여 신라성은 대부분 해발고도가 100~300m 정도인 전망이 좋고 험고하지 않은 산정에 축성된다. 물론 주장성과 같이 해발 500m가 넘는 곳에 축성한 예도 있고,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평지성이 축성되기도 하지만 신라성의 주류는 역시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신라는 평지성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산성을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석축성이 주류를 이룬다. 성곽의 축성방법은 목책, 토성, 석성 그리고 토석혼축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기도지역의 신라성곽은 기본적으로 잘 다듬은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계의 성돌로 쌓은 석축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석축성의 성돌은 상당히 정형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면석의 크기는 너비 30~45cm, 두께 20cm, 길이는 45cm 내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은 목책이나 판축, 또는 토축을 주로 하는 한성백제시기의 백제성과 차이를 보인다.
셋째, 일정한 규모의 성들이 방사상으로 분포되어 있다. 신라성의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둘레 1km 내외의 비교적 큰 성들이 일정한 거리를 이루며 방사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성들이 군사적 기능과 함께 주ㆍ군ㆍ현의 치소성으로서 행정적인 기능까지 겸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행정치소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넓은 평야지역을 끼고 있듯이, 신라성 또한 주로 교통상의 요충지에 구축되며 배후에 넓은 평야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임진강 일대나 서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백제성이나, 교통로를 따라 직선상의 분포를 보이는 남한지역의 고구려성과도 차이를 보인다.

넷째, 현문(懸門)과 보축(補築) 등 축성방법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경기도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성의 축성기술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성곽인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의 성문과 같은 개거식(開居式)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이 주를 이룬다. 다락문이라고도 하는 현문식 성문은 이성산성과 대모산성, 아차산성, 설봉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중부지역의 계족산성, 온달산성, 왕검성 등 신라계통의 성에서 주로 보이는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은 성벽외곽 기저부의 보축시설이다. 보축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저부에 덧붙여서 성벽을 쌓은 것으로, 고구려성벽에서도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신라성에서 주로 확인된다.
다섯째, 인접지역에 고분군이 수반되어 있다. 신라성의 특징 중 하나는 인접지역에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성 주변에 고분군이 조성된다는 것은 전쟁이 있을 때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성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의미한다.

산성 주변에 고분군이 많다는 것은 신라의 성곽들이 행정적인 기능을 겸비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주는 자료가 되기도 하는데, 경기도지역의 경우 이성산성과 주변의 금암산고분군?방이동고분군, 아차산성과 아차산고분군, 오두산성과 성동리?법흥리고분군, 파사성과 매룡리고분군 등이 있다.
물론 모든 고분군이 산성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산성에 고분군이 수반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특징은 남한지역에서 아직 이렇다 할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나 백제산성과 고분군의 관계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신라성에서는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 있어 기와는 고급건축부재로서 주로 왕궁이나 사찰, 관청이나 학교 등의 공공건물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기와가 발견된다는 것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했던 건물 중의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성백제시기에는 기와의 제작기법이 아직 완숙단계에 이르지 못해 왕궁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도 그리 많은 기와가 출토되지 않고 있으며, 여타의 성곽에서 출토되는 백제기와는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반면 고구려의 경우 신라나 백제에 비하여 이른 시기부터 기와사용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남한지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기와는 붉은 색을 띠고 출토지역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전의 기와가 출토되는 산성은 대부분 신라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산성>

ㆍ경주 : 고구려의 장안성, 백제의 사비성과 달리 도시전체 외곽을 둘러싸는 나성을 축성하지 않음.

             주위에 산성을 쌓아 나성의 역할을 대신함.

삼년산성 : 축성기록이 확실한 유일한 고대산성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삼국이 쟁패한 국경의 요충지로 축성시기와 축성기

   간, 동원된 인력, 성곽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의하면, 자비왕 3년(470)에 “축삼년산성 삼년자 자흥역 시종삼년글공 고명

   지(築三年山城 三年者 自興役 始終三年訖功 故名之)이라 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는데, 삼년이라 한 것

   은 3년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 하였고, 소지왕 8년(486)에 “배이찬실죽위장군 징일선

   계정부삼천 개축삼년굴산이성(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이라 하여, 이찬신분이었

   던, 실죽장군이 일선군 경북 선산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고쳐 쌓은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산지山地에 마련한 편축성片築城과는 달리, 협축성夾築城구조여서 성벽을 높게 축조할 수 있었는

   데, 현재까지 조사된 성곽 중 가장 방어력이 좋은 최고 높이의 수직성벽이라 할 수 있다
ㆍ여주 파사성 : 파사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있는 파사산(230.5m) 정상

   에서 동남쪽 곡부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파사성의 서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현재 이포대

   교가 놓여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943m이고 내부 면적은 1만 2천 평 정도이다. 성벽은 비교적 정연하게 쌓았는

   데 삼국시대에 축성된 부분과 조선시대에 개축된 부분이 구분될 정도로 축성기법에 차이가 있다. 삼국시대 축

   성부분은 바른층쌓기로 아랫돌과 윗돌이 정연하게 맞물리도록 쌓았지만, 조선시대에 개축한 부분은 축성상태

   가 조잡하고 각층이 흐트러져 있으며 상당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북쪽은 특히 성벽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하

   여 높이 5~6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축성방법은 대체로 편축하였으나 북쪽성벽은 협축하였는데, 상부의 폭

   은 520cm이다. 성내의 시설로는 동문과 남문 등 2개의 성문과 배수구, 우물지, 건물지 등이 있다. 남서쪽 해발

   170m 지점에 만들어진 남문은 폭이 4.7m 정도이며 좌우에는 높이 120cm, 상부폭 40cm 크기의 화강암제 팔각

   형 고주초석이 남아 있다. 동문은 파사산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동문의 폭은

   4.6m 정도이며, 외곽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ㄱ자 형의 옹성(甕城)이 구축되어 있다. 성내의 물을 밖으로 배

   출시키기 위한 수구는 남문에서 동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성벽이 무너져 현재 덮개돌 2개만이 남

   아 있다. 장기간 많은 병력이 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데, 다른 성에 비해 성내에 물이 부

   족한 것이 흠이다. 유일한 우물지는 성내의 중간부분 해발 200m 정도에 있다. 원형으로 축조된 우물은 둘레가

   직경 3.2m, 현재의 깊이는 3.4m이다. 그 외에 성내부 남사면을 따라가며 곳곳에 건물터가 발견되며 많은 양의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다.
ㆍ호암산성 : 호암산성(사적343호)은 안양시 석수동과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경계를 이루는 호암산(해발 347m)

   정상에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전

   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1,250m 가량이며, 남북 장축은

   470m, 동서 단축은 200m 가량 된다. 성벽이 잘 드러나는 곳은 동벽의 북쪽 부분인데,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제

   외한 부분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외벽만 정연하게 축조하고 내부는 돌을 채우는 편축 혹은 내탁법으

   로 판단된다.  한우물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축 연못 위에 조선시대에 새로 석축 연못을 만든 것으로 밝혀졌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연지는 17.8×13.6×2.5m의 규모로 13단 정도 줄을 맞추어 쌓아올렸으며, 석축의 뒷부분은 1.5

   ~2m 가량 뒷채움이 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2우물지의 규모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깊이 2m 이

   상 되는데, 한우물에 비하여 세장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명문 청동숟가락과 각종 토

   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많은 토기류, 기와류가 출토되었고 기타 주요 유물로는 명문 청동숟가락

   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12개 기종, 1313 개체분에 달하는데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며, 기와는 무문이

   가장 많고 어골문, 평행선문 등의 순이며, 문자와도 927점이나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

   은 역시 명문 자료이다. 제2우물지에서는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호암산성이 위치한 서울시 금천구

   ㆍ구로구ㆍ관악구와 안양시 일대가 바로 《三國史記》 지리지에 나오는 잉벌노현(仍伐奴縣)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백제

백제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토성을 중심으로 구축하였다. 야트막한 구릉지역을 택하여 정상부를 중심으로 판축토루로 구축하는 백제의 축성기법은 이후 고려-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백제 산성의 특징과 축성방법>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백제지역에는 약 800개소에 달하는 고대성곽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의 수량은 충남지역에서 확인된 성곽을 모두 포괄한 것으로 그중에는 통일신라시기와 고려 조선시기에 축성된 산성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전남북과 경기도 지역의 성곽 중 얼마나 많은 성이 백제성에 포함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백제는 낙랑ㆍ대방군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수성ㆍ병산책, 독산책ㆍ구산책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철원 연천 등 낙랑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고 남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신라와의 접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곡성ㆍ낭자곡성ㆍ와산성ㆍ구양성ㆍ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괴산ㆍ옥천ㆍ보은 일대로 추정된다. 이어서 4세기대에 낙랑ㆍ대방의 멸망으로 백제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고구려와의 공방전은 雉壤城(황해도 배천), 水谷城(황해도 신계), 浿河(예성강) 등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제성들은 한강이북에서 예성강 이남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ㆍ근구수왕대까지 균형을 이루던 백제와 고구려의 역학관계는 진사왕ㆍ아신왕대에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정복활동으로 점차 깨어지게 되는데, 이 시기 고구려에 점령당하였던 백제의 성은 관미성(關彌城) , 미추성(彌鄒城) , 아차성(阿且城) 등 경기도 서북부 지역에서 남한강상류에 이르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로 천도한 이후 점차 힘을 비축하게 된 백제는 사비시기에는 점차 남쪽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전남지역에도 많은 성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 백제의 성곽은 주로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축성되었으며, 토성위주의 축성에서 벗어나 석축성도 많이 등장하게 된다.

<주요산성>

  포천 고모리산성 포천 소흘읍의 고모산(해발386.5m)에 있는 고모리산성은 비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은 아니지만 2001년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박경식 외 2001) 조사 결과 이 성의 전체둘레는 1.1km 정도이고, 토루에 일부 구간만 석축을 하였으며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성은 포천방면에서 서울쪽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성시기 백제의 전형적인 백제 산성으로 주목되고 있다. 고모리산성 성벽은 지표에서 보아 토축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단면부가 드러난 곳을 보면 성벽 하단부가 할석으로 축조된 곳이 있어서 토석혼축도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동벽의 경우에는 석축구간도 눈에 띠는데, 조잡하기는 하지만 석축이 뚜렷하여 취약 구간은 돌로 축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토축 성벽의 축조 방식부터 살펴보면 고모리산성은 일부 삭토법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성토법에 의하여 축조되었다. 삭토법을 사용한 곳은 서벽이 대표적이다. 서벽 외부는 평균 60도 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성벽 바깥쪽을 삭토하여 경사도를 높이고 상면에는 성토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토석혼축은 성벽부는 할석을 막쌓기 형태로 2~3단 축조한 후 그 위로 성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축으로 축조된 곳은 동벽 일부 구간인데 성벽 단면에 대한 조사 결과 기저부에는 폭 2 m 정도 잡석을 깔고 그 위로 석축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2m도 못되고 뒤채움 길이도 1m 정도로 본격적인 석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기저부를 정리하고 보강하였으며 큰 돌을 아래에 놓고 위로 갈수록 돌이 작아지며, 할석의 편편한 면을 전면으로 놓았다.
고모리산성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다량의 백제 토기가 수습되었다. 백제 토기류의 기종을 보면 양이부호·고배류·뚜껑류·심발형토기류·장란형토기류·호·옹류가 있는데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출토유물과 유사한 점이 많아 주목된다. 고모리산성의 축성시기는 대략 3세기 전반을 상한으로 하고 하한은 5세기대로 추정되는데 한성시기 백제 산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성흥산성 성흥산성은 부여군 임천면의 해발250m 성흥산 정상부에 구축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1.2km로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일정한 높이만큼 다짐을 한 후 다짐층을 파내고 별다른 보축시설 없이 성벽을 쌓아올렸으며 다짐층위에는 판석으로 부석(敷石)을 하였다. 체성벽은 20-40cm 크기의 잘 다듬은 장방형의 화강암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하였다. 성벽은 편축으로 축성하였으나 성문지 부근에서는 협축식으로 쌓았다. 동문지는 개거식(開据式)이며 문의 너비는 4.8m 이고 입구부근에는 2열의 석열이 남아있으며 문지의 개구부는 모서리 부분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백제 기와편과 토기편은 개구부 석열 앞의 다짐층에서 출토되고 있다.

ㆍ사비성, 성왕 16년, 538년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부근의 산지에 산성을 독립적으로 건설하는 종래의 고성계획에서 탈피

   중국식 축성법인 시가지포위식 축성법을 최초로 응용하여 한국의 산성식과 중국의 시가지포위식 축성법 혼합

   도성내에 부소산성을 만들고 시가지를 포함하여 축성

ㆍ성흥산성, 임천

   계곡을 포함하지 않고 산정을 중심으로 방형으로 축성. 고구려와 신라에는 유래가 없는 독특한 축성법

 

 

고구려

고구려의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택하여 석축성을 구축함으로써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내는 축성술을 가지고 있었다. 짜 맞추듯이 정교하게 쌓아올린 성벽과 계단상으로 구축하여 견고하게 만든 굽도리 기단,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치와 여장 등은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창안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과 축성방법>
고구려성의 대부분은 석성이며 이것은 고구려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토성은 영성자산성, 고이산성, 용담산성, 흘골산성 등 석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석성의 축성기법은 기본적으로 협축과 편축의 방법이 있다. 협축은 성의 내외면이 지상에 노출되도록 쌓는 방법을 말한다.
오녀산성 남벽처럼 산의 능선을 따라 내려오거나, 국내성 성벽이나 환도산성의 남벽처럼 평지성이나 평지부분을 가로지르는 성벽은 대체로 협축으로 구축하였다. 이러한 협축 셩벽의 구축방법에는 환도산성의 남벽이나 백암성 성벽 처럼 성벽의 내부를 치밀하게 석재로 쌓는 방법이 있고, 국내성처럼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부분은 판축을 하고 성벽의 내외면만 석축을 하는 방법이 있다.
성내부를 석재로 채워넣는 석축방법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성벽이나 백암성처럼 석재가 풍부한 지역에서구축하는 방법이다. 반면 성벽의 기저부나 중간부분은 판축을 하거나 잡석으로 채워넣고 내외면만 석축을 하는 축성방법은 국내성이 축성되는 4세기대 이후 고구려 성벽의 일반적인 축성방법이다. 그 원류는 물론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축성된 나통산성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4세기-5세기대 이후의 성곽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국내성, 대성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주요산성>
ㆍ오녀산성 : 오녀산성은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인 졸본(卒本)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4,189m 이며 그중 인위적으로 축성한 성벽은 565m 정도이고 나머지는 성벽을 쌓지 않고 자연지형을 활용하였다. 565m의 인공성벽중 남벽은 424m 정도인데 정상부의 남단에서 급사면을 따라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구축되었다.
성벽은 협축으로 구축되었으나 내벽쪽은 일부 흙으로 덮었다. 동벽은 자연지형을 따라 1,847m의 성벽이 구축되었으며 그중 구간구간 인공적으로 구축된 성벽이 400m 정도이다. 성벽의 기저부에는 1-3단 정도 대형의 할석을 놓고 그 위에는 그보다 작은 성돌을 쌓았는데 장방형으로 치석된 쐐기형의 성돌과 할석형의 성돌이 함께 사용되었다. 성벽 정상부에는 타구가 확인되지 않는 평여장이 구축되어 있는데 두께는 1.2m 이고 잔존 높이는 0.4-0.8m 정도이다. 동벽에서는 여장 안쪽에 흔히 주통(柱桶)이라 불리는 방형의 구멍이 여러 개 확인되었다.
인공적인 성문은 남문과 동문, 북문등 3개가 확인되었다. 남문은 산성의 남동모서리에 구축되었으며, 동문은 서벽이 두 단으로 90도를 이루며 회절하도록 쌓고 그 한쪽에 성문을 구축하여 성벽이 치나 적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축하였다. 서문은 정상부의 서쪽에 구축되었으며 너비는 3m 정도이다.
ㆍ환도산성 :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해발 676m 인 산성자산에 의지하여 쌓은 삼태기 모양의 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951m 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쐐기 모양의 성돌을 사용하여 5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았으며, 남문지구간과 서문등 문지가 있는 곳은 협축으로 그 외의 구간은 편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평여장이 남아있으며 여장의 앞쪽에는 대략 1.5-2m 간격으로 주통(柱桶)이 구축되어 있다. 주통의 크기는 환도산성과 마찬가지로 가로 30cm, 세로 25cm 깊이 30-55cm 정도이다.
성문은 모두 7개인데 동쪽과 북쪽, 남쪽에 각각 2개씩 있고, 서쪽에 1개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은 서문과 같은 형태의 옹성문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훼손상태가 심하여 정확한 구조를 알 수 는 없지만 성문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어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성내의 가장 저지대에 속하여 성벽에는 4개의 배수구가 구축되어 있다. 배수구 장방형으로 너비 0.8m, 높이 1.4m, 길이 13m 정도이며 입수구와 출수구의 레벨 차이가 크지 않아 바닥은 자연스럽게 경사면을 유지하도록 구축하였다.
남문지2호는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문구부는 바닥에 쇄석이 깔린 개거식이며 너비는 5.4m 길이는 8.4m 정도이다. 옹성은 길이 19m 두께 3.7-6.5m 정도이며 긴 자루형태이다. 서문은 해발371m 서쪽성벽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소봉의 정상부에 구축되어 있다. 성문은 개거식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너비는 3.6m 길이는 5.25m 이며 생토면을 다듬고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개구부의 내외모서리 부분은 원형으로 처리하였다.
ㆍ아차산4보루 :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의 해발 285.8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둘레는 210m 이다. 성벽의 높이는 4m 정도이며 동벽의 중간부분과 서벽의 남쪽부분에는 방형의 치가 구축되어 있다. 동쪽의 치는 너비 6.2m 길이 4.9m 이다. 체성벽과 치는 잘 다듬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구축하였으며 바닥에는 약간 큰 석재를 사용하였고, 위로 갈수록 약간씩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성돌의 크기는 가로 30-50cm, 세로 20-25cm , 길이 40-50cm 정도이다. 성벽은 상부의 평탄면에서 4m 정도 아래쪽에 지면을 다듬어 평탄하게 조성하고 면석을 놓은 후 면석 뒤쪽으로 두 겹 정도의 뒷채움돌을 놓아 석축의 두께가 약 1m 정도 되도록 쌓고 경사면과 석축사이는 흙으로 다져 넣으며 정상부까지 쌓아올렸다.

ㆍ국내성, 만주 통구 지방,    방형성으로 사방에 성문 설치
장안성, 586년(평원왕 2년) : 중국 수나라의 도성제를 참고하여 현재의 평양일대에 건설, 중국식 도성계획 기법인 방리제를 최초로 적용한 실례

 

 

[고려시대]

<고려 산성의 특징과 축성방법>

고려는 북방개척에 대한 강한 의지로 북방접경지역과 해안지역에 활발한 축성을 진행하였다. 태조 2년(919) 개경에 도읍을 정하고 서경에 성을 쌓고 왕이 친히 거동하였다. 왕궁을 세우면서 황성(皇城)을 쌓았다. 한편 북쪽의 거란과 여진을 대비하기 위하여 덕종(德宗)때부터 정종(靖宗)때까지 12년간에 걸쳐 군사방어선인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한편 북쪽의 거란과 여진을 대비하기 위하여 덕종(德宗)때부터 정종(靖宗)때까지 12년간에 걸쳐 군사방어선인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이장성은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으로 된 석축성이며 압록강 어귀에서 동쪽으로 청천강과 대동강의 상류지역인 산악지대를 거쳐 영흥에 이르고 있다. 이 당시 축성된 대표적인 성곽을 살펴보면 태조는 안북부를 설치하고 용강, 함종, 자산, 순안 등지에 성을 쌓았고, 정종은 서경에 왕성과 서북면의 통덕, 덕창진 등지에 성을 쌓고 동북면에서는 철옹성을 쌓았다. 광종은 서북면에는 안융진, 동북면에는 장평진 등지에 성을 쌓아 대비하는 등 역대 왕들은 고려 전시기에 걸쳐 축성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해안지대 방어는 전기에 동여진의 해구를 막기 위한 조치로서 병선을 요충지에 배치하고 해안지역에 성을 축조한 바 있는데 목종(穆宗)때부터 정종(靖宗)때에 걸쳐 동ㆍ남해안 지역에 대한 성보(城堡)의 축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11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성은 동여진의 해적을 막기위한 것이었으며 해안지역이 중요한 대상지로 동ㆍ남해안에 한정되었다. 고려후기에는 원의 지배하에서도 축성이 이루어지고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에 대비하여 해안에 축성을 많이 하였다. 고종(高宗)때 몽고와 접촉이 있은 뒤 의주, 화주에 철관성을 쌓았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하고 각도에 성을 수축케 하여 항몽의 의지를 불태웠다. 1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지역에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우왕(禑王)때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내륙으로 깊숙히 침입함에 따라 내륙의 산성들이 입보용으로 수축되었다. 이시기에는 산성의 수축뿐만 아니라 주요도시의 읍성이 수축되거나 신축되었다. 또 평지읍성도 축조되었으나 산이나 해안ㆍ강안 등 자연지세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인공으로 해자를 파고 있으며 성벽위에는 문루나 여장이 시설되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품’(品)자 모양으로 조밀하면서도 불규칙하게 함정을 파놓은 시설인 품자황(品字隍)과 성문 바깥의 해자를 가로질러 통행할 때에만 가설하는 사다리모양의 개폐다리인 조교(釣橋) 등이 조성되었다.


고려 후기에 와서 원나라의 횡포로 사회적 혼란과 국가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축성은 계속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홍건적과 왜구가 빈번히 출몰하는 말기에 읍성 축조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세종ㆍ성종 때에도 읍성의 축조가 활발하였는데 이 당시 읍성축조의 특징은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적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이 이당시에 축조되었다. 읍성은 산지에 축조된 산성과는 달리 평지나 구릉지역에 축조하기 때문에 원형 또는 방형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다. 성의 규모도 시가지를 일부를 포함하여 객사ㆍ관아 등의 건물을 두고 있어 행정ㆍ군사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려말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전쟁양상이 변화하게 되어 종전의 방어시설도 개선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곽의 방어시설물은 보강이 요구되어 읍성에는 적대ㆍ여장ㆍ옹성ㆍ해자 등은 규격화하게 되었고 성벽은 견고하고 낮아지게 되었다. 축조기법은 축성재료에 따라 토축성ㆍ석축성ㆍ토석혼축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축성은 판축법(版築法), 성토법(盛土法), 삭토법(削土法)으로 세분된다. 이중 판축법은 건물지나 탑지의 축기부, 성벽 등 삼국시대~조선시대의 각종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경기도 서해안의 구릉지대와 해안가에 자리한 토축성에는 판축법을 위주로 하여 축성하였다. 이러한 예는 용인 처인성, 평택 비파산성ㆍ덕목리성 등에서 확인되었다.
석축성은 경기도 동부와 북부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산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양평 함왕산성, 용인 보개산성, 안성 망이산성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은 몽고나 홍건적, 왜구 등 외적에 대비하여 축조한 산성으로 입보농성에 적합한 고지대에 자리하는 공통점이 있다.
토석혼축성은 흙과 돌을 혼합하여 구축한 성벽을 말한다. 이러한 성곽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용된 축조기법으로 안산읍성과 당성의 본성 등 후대의 수개축과 같은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성계획

ㆍ개성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조 2년인 919년 정도

   자연지형과 기능에 따라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상으로 발전

ㆍ삼경의 설치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설치

   개경을 수도로 하고 동경(경주), 서경(평양), 남경(서울)의 삼경에 도성을 각각 축성

<주요산성>

ㆍ보개산성 : 보개산성은 용인시 구성면과 포곡면, 기흥읍 일대에 걸쳐 있는 포곡식의 석축산성으로 석성산성(石城山城)이라고도 부른다. 보개산성은 보개산(해발 471.4m) 정상부를 북쪽 끝으로 하여 남서방향으로 해발 465m이상의 봉우리 3개를 지나, 남쪽의 계곡 상단을 남향하는 능선과 동남향한 능선을 함께 포용한 성벽으로 되어 있다.
서향한 가지능선과 최정상에서 동향하여 급히 낮아지는 가지능선을 에워싸고 있어서 매우 불규칙한 마름모꼴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1,650m이다. 성벽은 북쪽 끝에서 최남단을 이룬 서남쪽 끝까지의 직선거리가 560m이고, 북쪽 끝에서 동남쪽 끝까지는 470m, 서남쪽 끝에서 동남쪽 끝까지는 350m이고 서쪽 돌출부에서 동벽으로는 310m가 된다. 성벽은 외면을 할석으로 축조하고 안쪽으로 석재를 채워 내탁한 성벽이 대부분이나, 절벽ㆍ암반 등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구간도 서벽과 북벽에서 일부 관찰된다. 문지는 동남쪽에 있는 동문지, 남벽 서측에 있는 남암문지(南暗門址), 그리고 양쪽 성벽이 내만한 곳의 남문지가 있다. 성내에는 현재도 이용하는 우물이 두 곳이 있으며 곳곳에 건물지의 흔적이 남아있고 전체적으로 기와와 토기편이 산견되고 있다. 보개산은 주변의 평야지대를 건너 사방을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이기 때문에 일찍이 이 산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개산 봉수는 동남쪽의 죽산 건지산에서 받은 신호를 북쪽의 광주 천천산 봉수로 이어주는 곳이었다.
ㆍ백곡리산성 : 백곡리산성은 향기실마을의 동편, 구리개마을의 북편에 위치한 해발 70m의 낮은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은 향기실성, 성안성(城安城), 백곡리토성이라고도 불리운다. 산성은 해발 70m 봉우리의 9부능선을 둘러싼 테뫼식 토축산성으로 평면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320m이다. 서벽ㆍ북벽ㆍ남벽은 협축식으로 축조하였으며 동벽의 일부구간은 편축식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성내에서는 문지 2개소가 확인된다. 동문지는 북동회절부에서 남쪽으로 뻗어오던 성벽이 안쪽으로 들어오며 축조되었다. 서문지는 상면폭이 7~8m, 하단폭이1.8~2.4m정도이며 남측벽이 옹성형태로 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안쪽으로는 폭 10m정도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서문지에서 남쪽으로 30m지점에는 성벽의 흙을 굴토한 부분이 남아있다. 이곳의 단면을 살펴보면 기저부에 다량의 기와가 적체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토루축조는 적갈색점질토를 주토양으로 하여 판축하였으며 와적은 토루의 외벽기저부(外壁基底部)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와적은 배수와 하부보강을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이 기저부에서 토루 상면까지의 높이는 3.5m정도이다. 채집된 기와류는 선문ㆍ석문ㆍ어골문ㆍ복합문 등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편이 대부분으로 이성의 축조연대를 말하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라 할 수 있다.
백곡리산성의 동쪽 500m지점에는 백제시대 백곡리고분군, 서쪽으로 2km지점에는 당성, 남쪽 1km지점에는 청명산성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조선 산성의 특징과 축성방법>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개국초기에는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고, 북방에서는 명나라가 확고한 위치를 갖게되면서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방어체제 정비가 이루어져 갔다. 도성(都城)은 태조의 천도와 함께 신도(新都) 한양에 축조되었다. 도성축조는 태조의 적극적인 추진에 의해 1396년 1월부터 2월까지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와 서북면 안주 이남, 동북면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은 태종 10년경을 전후하여 왜구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타타르 원정과 여진(女眞)에 대한 압박, 그리고 정왜설(征倭設) 등 동북아 지역에서의 여러 긴장이 조성되면서 북방의 여러 거점 성곽은 물론이고 경상도ㆍ전라도에 대규모 산성을 수축하였다. 또 태종 13년에는 각 도(道)의 각 고을 3, 4식(息)안에 하나의 산성을 수축하고 창고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축성책의 추진으로 조선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약 111개 정도의 산성이 있었으며, 이는 8도(道) 330개 행정구역 가운데 약 1/3 정도의 지역에 산성이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산성입보(山城入保) 방어체지가 퇴조하면서 산성은 점차 폐지되고, 16세기 중반경에는 전국적으로 41개 정도의 산성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읍성은 방어효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전통적인 산성유익론이 다시 설득력을 갖게 되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많은 산성이 수축되었다.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인 치소(治所)에 축조하는 성곽으로, 조선전기 동안 110~123개소 정도가 유지되었다. 상비군에 의한 충분한 보호조치가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불시에 일어나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의 생명은 물론, 지방 관아의 각종 행정자료와 기물(器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읍성의 축조는 불가결한 문제였다. 특히 항상 왜구나 야인의 침입 위험이 있는 연해와 북쪽 변경지역의 경우는 그 필요성이 더하였다. 또한 연해지역 인구 증가에 따라 항구적인 안전조치가 더욱 요구되었고, 또 조운곡(漕運穀)의 보관이나 조운로(漕運路)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연해지역에 대한 방비시설의 완비는 시급한 문제였다. 특히 신왕조 권력이 안정되어 가는 상황하에서 왕권의 분신인 지방의 관아가 위협받는 것은 왕권이 위협받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는 왕권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에 특히 많은 읍성이 건설되었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왜구나 야인집단에 대응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축조된 것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행성(行城)이란 국경이나 적이 침입하는 요해처(要害處)를 가로막아 쌓는 성(城)으로, 세종대부터 변경지역 전구간에 대한 축성을 목표로 시작되었으나 성종대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한 행성구축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행성축조사업은 세종대에 추진될 당시부터 여러 측면에서 이해(利害)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 조선전기 동안 지속적인 사업추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북변(北邊)에 대한 완전한 행성구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진보성(營鎭堡城)은 각도의 절도사나 절제사, 혹은 첨절제사가 주재하는 영진(營鎭)이나 그 아래에 소속된 보(堡)에 축성하는 성이다. 특히 보(堡)는 읍성이나 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인구가 밀집된 취약지대에 건설하여 지키게 하거나 거주민의 입보처를 삼았다. 한편 성종대에 와서는 그동안 선상근무(船上勤務)를 원칙으로 하던 수군에게도 변하가 일어나 기항지(寄港地) 근처에 축성하고 수군의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만호의 주재처로 삼도록 하였다. 특히 중종대의 삼포왜란은 이러한 연해 수군포구에 대한 축성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조선초기의 전국적인 성곽 현황에 대한 상황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의 기록을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되어 있는 산성수는 총 111개이다. 이러한 산성은 숫적으로 본다면 경상도ㆍ충청도 지역이 가장 많으나 각 도(道)의 행정구역수를 감안한 비율로 계산해 보면 강원도가 전체지역이 가장 많으나 각 도(道)의 행정구역수를 감안한 비율로 계산해 보면 강원도가 전체 24개지역 가운데 15개 지역에 산성이 설치되어 있어서 구비율이 가장 낮다. 이를 전국적으로 본다면 한성부(漢城府)와 개성부(開城府)를 제외한 팔도(八道) 329개 지역 가운데 32.8%인 108개 지역에 산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25개 지역에는 읍성과 산성이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도성계획

ㆍ성곽계획

   도성의 경계에는 지세에 따라 단형으로 성곽을 축조

   근교의 주요산에는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의 산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

   주요지점에 도성의 출입구로서 사대문과 사소문을 설치

▶읍성계획

ㆍ조선시대에는 행정상 중요한 지점에 읍성을 국방상 중요한 지점에 산성을 설치

ㆍ읍성의 계획기법

   각도의 중요한 읍성에는 왕의 위패를 보관하고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로서 사용되는 객사를 반드시 설치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를 읍성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배정하고 객사의 전면에 광장을 형성

   서쪽에 문관이 사용하는 본부향청을 배치하고 동쪽에 중영, 훈련원, 군기고 등을 배치

   향교 및 문묘는 약간 떨어져 한적한 곳에 배치

ㆍ수원성, 경기 수원, 1794~96년(정조 18~20년)

   임진왜란의 경험과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식축성법을 참고로 하여 동양에서 가장 발달된 형식으로 축성

   실학사상에 따라 건축의 규격화 계획적인 시공, 근대화 공법 등을 시도

   정약용 등의 당시 실학자들이 축성과정에 참여

   "화성성역의궤(1796년)"을 통해 당시의 공사상황을 자세히 기록

 성벽일부와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화서문, 방화수류정 등의 건축물이 현존

ㆍ완산성, 전북 전주

   격자형 가로망을 기본으로 하여  곡선형 가로망을 구성

   음성 성곽의 정문인 풍납문이 유명하며 전체 읍성의 평면형은 방형형태
ㆍ낙안읍성, 전남 승주

   관에 의해 계획된 한국 읍성 마을의  전형적인 실례

ㆍ해미읍성, 충남 서삼

ㆍ청주성, 충북 청주


<주요산성>

ㆍ남한산성 : 남한산성은 이미 조선시대 이전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조선초기에 국방시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그 수축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이 군사적 요새지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남한산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선조 26년 10월 유성룡이 선조와 방어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광주(廣州)의 남한산성, 수원 독성(水原 禿城), 금천 금지산(衿川 衿之山)이 매우 중요한 요새지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용인과 양지 사이에 있는 고성(古城)을 수리하여 수원 독성, 남한산성이 상호간 삼각 요새지를 구축함으로써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ㆍ독산성 :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 산 155번지 일대의 독산에 위치하고 있는 테뫼식의 석축산성이다. 독산성은 백제가 축성한 고성으로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된 성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곳은 주요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다. 1592년 김천익 군사가 이곳에 주둔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겸순변사였던 권율이 2만의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군을 물리친 바 있다. 1594년 경기도 관찰사 유군이 이 산성을 수축하였고, 1595년 포루를 갖추었으며, 1597년에는 왜군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고 상밖에 목책을 설치 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독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10년(광해군 2) 방어사 변응성이 수축하였다. 이후에도 수보를 계속하였으며, 1796년에는 수원성 축조와 함께 개축하였고 1804년에는 산성 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독산성의 성벽 둘레는 1400m 정도이고 높이는 5~11m이다. 1982년 복원된 성벽은 길이 1,095m이고 높이는 1m 내외이다. 성벽에는 치성 8개소, 문지 5개소가 복원되었으며, 일부에는 여장을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은 할석을 불규칙하게 안쪽으로 쌓아 올렸고 외벽은 장방형 혹은 정방형의 치성석으로 마감하였다. 내벽은 현재 복원 성벽이 안쪽으로 물려 쌓아져 불확실한데 내벽쪽에서 일부 성토층이 확인되었다. 인위적으로 대지를 조성하 여 건물터로 사용하였는데 『화성지(華城誌)』에는 167.5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기와 토기편 등이 수습된다. 사적 제140호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