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남한산성

吾心竹--오심죽-- 2010. 10. 9. 16:43
[이덕일의 산성기행 I 남한산성]백제와 병자호란 똑바로 쳐다보마-손바닥으로 가리랴---통한의 역사도 기억해야 (1)| *****文*史*哲* 文庫
mckim41 조회 2 | 2010.03.21. 11:16 http://cafe.daum.net/dowonlis/IabD/591
 
 
백제와 병자호란 똑바로 너를 쳐다보마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랴… 통한의 역사도 기억해야
이덕일의 산성기행 | 남한산성
숨쉬는 역사
송파의 삼전도비와 함께 치욕의 역사로 남아있던 남한산성. 최근 들어 비로소 민족의 성지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초축 시기도 최근에는 백제시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말 그대로 영욕의 현장, 남한산성을 오른다.

백제사는 어디로 사라졌나?


남한산성 남문. 정조 연간에 개·보수하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 지하철 2·8호선 교차역인 잠실역이 약속장소였다. 오늘 산성답사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진행된다. 백제 초기 도읍지의 흔적을 찾는 것과, 병자호란의 격돌 현장인 남한산성에 오르는 것이다.

백제 초기 유적지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은 백제 유적지 하면 흔히 공주나 부여만 떠올린다. 그러나 백제가 서울을 도읍으로 삼았던 기간은 493년이고, 웅진·부여가 도읍지였던 기간은 185년이다.

서울은 백제의 500년 도읍지다. 그럼에도 서울은 백제의 고도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죽이기에 나섰다. 그 중요한 논리 중 하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김부식이 자의로 창작한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다.

김부식이 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해야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힐 수가 없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고분군이 서울, 그것도 롯데월드가 멀리 보이는 강남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1917년만 해도 60여 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지만 백제사에 대한 무지와 개발 바람에 다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불과 8기만 남아 있다. 석촌(石村)이라는 지명 자체가 ‘돌마리’ ‘돌마을’ 등으로 불린 데서 나온 것이다.

그만큼 돌이 많은데, 돌로 무덤을 축조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장법(葬法)이었다. 대부분 적석총이지만 토광묘도 존재하는데, 길이 10m, 폭 2.6~3.2m, 높이 0.8m의 대형 토광 안에 8기의 목관을 나란히 안치했다. 토광묘는 백제 건국세력이 남하하기 전부터 있던 토착세력의 묘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큰 3호분은 기저부가 50.8m×48.4m로 압록강 대안 지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의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과 비슷한 크기다. 무너진 적석 사이에서 기와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상부에 향당(享堂) 등 목조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호분을 처음 보는 일행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 거대한 3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통설은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에서 무슨 명문(銘文)이 나왔다거나 하는 구체적 사료에 따른 견해는 아니다. 백제는 3~4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때문에 이런 큰 무덤은 근초고왕 이후에나 만들어질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다.

백제가 3~4세기 들어서야 고대국가로 발돋움한다는 논리 자체가 일제 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다. 그는 1919년 발간한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일본 기록에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을 설치했다고 나오지만 <삼국사기>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그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는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상대(上代)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고 서술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했으면서도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한 것은 그 스스로 논리가 궁색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도 객관적 고대사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국수적인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희한하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신봉하고 있다. 그 결과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서기전 1세기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서기 3~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등의 백제사 깎아 내리기가 정설로 행세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개발론자들에 의해 유적은 파괴되었지만 가까스레 살아남은 일부 유적은 백제사의 진실을 상처 입은 몸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석촌동뿐 아니라 가락동·방이동·광장동과 하남시 금암산에도 백제고분군이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몽촌토성·춘궁리 등과 인접해 있다. 석촌동을 비롯한 백제고분군은 만주 지안의 국내성을 생각하게 한다. 국내성의 배후산성인 환도산성 아래 고구려의 떼무덤이 있는 것처럼 백제도 도성 영역 내에 거대한 고분군을 조성했던 것이다.

도성 영역 안에 국왕이나 왕족, 혹은 귀족의 집단무덤을 배치하는 고구려식 장법을 백제인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라는 문헌사료와 서울 일대의 각종 유적·유물은 백제가 서기전 1세기에 한강변에 국가를 건국해 빠른 속도로 팽창했음을 말해준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가락동·방이동·광장동의 백제고분을 거닐면서 2000년 전 만주에서 남하해 이곳에 거대한 고분을 세운 선조의 혼과 교감해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감회를 느낄 것이 분명하다.

 

 


롯데월드에서 멀지 않은 강남 중심부의 백제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인 3호분. 기저부가 50.8m×48.4m로, 지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과 비슷한 크기다.

이성산성과 남한산성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는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다. 해발 209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올라가보면 시야가 확 트인 전형적인 요새지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인접해 있고, 한강 본류와 남한강·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도 보인다. 둘레는 약 1.7km, 높이 6~7m 정도로,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결과 성문지·저수지, 제사유구로 추정되는 건물지 등과 함께 여러 유물이 발굴되었다.

발굴 유물로 볼 때 한성백제 후기에 축조돼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점유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이후 점차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二聖)’이라는 이름이 심상찮다. 신라에서는 시조 박혁거세와 그 비 알영을 이성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와 태종처럼 두 임금을 지칭할 때 이성이라고 표현했다.

백제는 시조 온조와 그 모친인 소서노, 또는 부여 시조 동명이나 주몽과 온조를 합쳐 이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성산성은 근초고왕 때 일시 천도했던 한산(漢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의 보복전에 대비해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는데, 이성산성이 이때의 한산이라는 추측이다. 또한 백제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이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다 아차산성에서 처형되기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최후의 격전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한강의 풍부한 물과 광범한 평야지대를 아우를 수 있는 산성이기에 빼앗고 빼앗기는 혈전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성산성이 무너지면 최후의 방어선은 남한산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남한산성이 백제 도성의 배후 산성이었다는 문헌기록은 없지만 관방(關防·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했던 고대에 남한산성 같은 천험의 요새를 방치했을 리 없다. 물론 지금은 병자호란의 격전지로 더 유명하다. 남한산성 답사는 남문관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문관식당의 이종화 사장은 남한산성에서만 23대째 내려오는 광주 이씨의 후손이라는데, 이런 연유 때문에 남한산성의 역사에 해박하다. 두부전골의 맛이 깔끔하다. 식사를 끝내고 북문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북문에서 상사창동에 이르는 계곡길은 과거 수운을 통해 운반해온 세미를 등짐으로 산성까지 나르던 통로다.

북문에서 안쪽으로 포장된 길이 있고, 바깥쪽으로 성벽을 따라 걷는 코스가 있다. 성밖 코스가 성의 모습과 험준한 바깥지형을 함께 볼 수 있어 좋다. 한참을 걸어가니 최근 복원한 연주봉 옹성의 성벽이 나타났다. 옛 기록에는 포루(砲壘)라고 표기돼 있어 포대를 설치했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20여 개가 넘는 포루가 있었다. 천험의 지리에 강력한 방어무기까지 갖추었기에 막강한 청(淸)나라 군사도 점령하지 못했던 것이다. 옹성 끝의 포루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 춘궁동과 조금 전 올랐던 이성산성이 보이고, 멀리 아차산 일대와 한강도 보인다. 남한산성에 오를 때마다 착잡하다.

전쟁도 정치의 일부일진대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 3월 발생한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는 외교를 선택 가능한 정치의 일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 효(孝)와 충(忠)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유학자들이 군부(君父)를 내쫓으려니 명분이 필요했다.

서인들은 그 명분을 독특한 군주론에서 찾았다. 자신들의 군주는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는 것이다. 조선의 군주는 명나라 황제의 신하인 제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후인 광해군이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펴 임금을 배신했으니 광해군을 내쫓는 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은 데 대한 반발은 거셌다. 그해 8월 김덕원(金德元) 등이, 10월에는 황현(黃晛) 등이 사형당했는데, 모두 쿠데타에 반발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인조 2년(1624) 광해군 때 좌의정이었던 박홍구(朴弘耉)가 사형당한 것도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황한 의정부는 ‘통유문(通諭文)’을 반포했는데, 그 중 “전후 여러 역적의 공초나 흉한 격문에서 말한 바는 다 동일하게 ‘폐주를 마땅히 봉환(奉還·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지금의 반정은 정(正)이 아니다”라고 반발했다는 말도 적고 있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인조정권은 친명반청 정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안도 철산 가도(캯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숱한 해악을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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