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博物館

[스크랩] 백제금동대향로

吾心竹--오심죽-- 2010. 8. 19. 12:57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1993년 12월23일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곽(木廓) 水路 안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扶餘)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 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금속공예품 예술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다.

 

 

 

 

 

 

 

 

 

                                                    향로 ?

 

 

향을 피우는 그릇으로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이집트, 유대교를 포함한 고대 중동문명, 고대 그리스, 라틴문화권에서도 사용되었지만, 동양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도에서는사람의 체취나 방 안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향을 사용하였다.

 

이와같이 나쁜 냄새를 제거해 주는 향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는 의미로 변하여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러 부처들을 맞이하는 법당의 불전(佛殿)에 삼구족(三具足 .. 부처 앞에서 공양할 때 쓰는 세 가지 도구, 향로,꽃병,촛대를 이름) 또는 오구족(五具族)의 하나로 향로를 안치하게 되었다.

 

 

 

                                                     국보 제60호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자 향로를 만들었으며, 고려시대 금산사(金山寺) 향로는 일본에 전해져 이 것을 모방한 긴상사(金山寺) 향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향로로는 靑瓷獅子有蓋香爐(국보 제60호), 靑瓷麒麟有蓋香爐(국보 제65호)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많은 향로가 전해지고 있다.

 

 

 

 

 

                                         박산향로    博山香爐

 

 

 

박산향로(博山香爐)는 중국 한대(漢代)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구리로 만든 향로이다. 박산(博山)은 바다 위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山이다. 신선, 기이하게 생긴 짐승, 바닷물 등이 향로의 뚜껑에 조각되어 있고, 몸체에는 구멍이 많이 뚫어져 있으며 금,은으로 상감세공된 것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대략 2천 년 전에 바다를 상징하는 받침접시(이것을 承盤이라고 함) 위에 한 개의 다리와 겹쳐진 산봉우리 형태의 몸체를 갖춘 박산향로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향로의 기본형태가 되었다. 박산향로는 당시 중국의 산악숭배, 무속, 불로장생사상, 음양사상 등을 쫒는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이 되었으며, 박산향로는 우리나라에도 전래된 듯 하나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기 이전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승반(承盤)과, 하나의 다리를 대신하여 머리를 들어올린 용을 조각하여 받침을 삼았고, 그 위에 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서 있어 외형적으로는 신선사상의 지향처인 三神山을 가리킨다는 박산향로의 형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향로는 높이가 64cm에 이르는 유례없는 대작인데다,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져 있고, 그리고 박산이라는 명칭이 중국적인 체취가 남긴 이름이므로, 우리 선조들에게 삼신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친근하게 불리워 온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을 붙여 백제금동용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蓬萊山香爐)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다. 

 

 

 

 

 

 

 

 

 

                                          백제인들의 정신세계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뚜껑, 몸통, 받침 그리고 꼭대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뚜껑은 백제인들의 이상세계인 박산(博山)을 상징하고 있다. 박산(博山)은 전설적인 山으로 동해 가운데 있고 불로장생하는 仙人들이 산다고 한다.

 

꼭대기의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나는 상상의 새이다. 몸통은 만물의 어머니인 연꽃을 상징하고 있고, 받침은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상징하는 龍을 묘사하였다.  

 

 

 

 

                                                 꼭대기 .. 봉황

 

 

 

 

                                                   뚜껑부분

 

 

 

 

                                            백성을 상징하는 기러기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날아 들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니 장차 먼 곳의 백성이 귀의해 올 것입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10월에 남옥저의 구안해 등 20여 가문이 부양에 이르러 귀의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게 하였다..."

 

"백제본기"의 온조왕 43년조에는 백성의 상징이 기러기임을 실제로 말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남하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의 삶에 덧대어 말한 것이다. 백제대향로 속에는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핀모습, 날개를 완전히 접은모습 등 모두 다른 자세로 조형되어 있는 기러기가 5악사의 연주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듯 가무상(歌舞像)으로 그려졌다. 이 향로 속의 다섯 마리 기러기..역시 백제인 즉, 백성을나타내고 있다.

 

 

  

 

 

 

 

                                                       몸통 부분

 

 

 

 

                                                     받침 부분

 

 

 

 

 

 

 

 

 

                                                            신선세계와 불교,도교적 사상

 

 

 

 

향로는 천계 - 선계 - 인간계 속에 형상화된 天人 등 각종 인물과 맹호, 이무기, 물고기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에 이르는 동식물 등을 염두에 둘 때 불교 유입 이전의 한국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 민속신앙 전체를 상징하는 100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백제가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때는 바로 382년, 하지만 기록상으로만 볼 때 6세기 전반과 중반 무렵 백제 불교미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잇다. 백제는 국교가 불교이었던만큼 향로가 제작되었을 시기에는 부여지방에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고, 그에 따른 탑과 불상들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6세기 후반에는 불교미술이 보다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전성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어난 대향로는 불교적인 색채도 물론 가미되었지만, 도교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

 

용과 봉황의구성, 수렵의 인물상, 상상의 동물들 등산악과 동물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갗은모습은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동탁은잔)에 장시괸 용의 모습에서도 도교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 당시 백제의 장인들이 무려왕릉의 금속공예품을 장식할 수 있었던 예술적, 기술적 솜씨가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시기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백제금동대향로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향로는 불교와 도교 등 그 당시 백제인의 수준 높은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면 적절할 것이다. 

 

 

 

 

 

 

 

 

백제대향로는 높이 61.8cm, 몸통 최대 지름 19cm, 무게 11.85kg으로 규모면에서 다른 박산향로(博山香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작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그리고 다리로 각각 따로 구리합금으로 주조되어 하나로 만들어 금으로 도금한 것이다.

 

 

 

 

 

 

 

이 대향로는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山 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像)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한다는 신선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이자 별천지인 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뚜껑은 박산(博山)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향로는 많이 있으나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5단으로 이루어진 박산은 산봉오리가 모두 74개로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동물들이 돋을 새김되어 있는데, 사이사이에는 식물,바위,시냇물,폭포 등도 표현되어 있어 백제인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뚜껑은 정상부에 봉황이 턱 밑에 여의주(如意珠)를 끼고 있고, 그 아래로 다섯명의 악사(樂士)와 인면조신상(人面鳥身像), 인면수신상(人面獸身像)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 세계에 실제하는 호랑이, 코끼리,멧돼지, 사슴 등 모두 42마리의 짐승과 다섯명의 악사를 비롯한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 새김되어 있다.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온다는 상상의 새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 오르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턱 아래에 작은 여의주를 표현하고, 발톱으로는 큰 여의주를 움켜 잡고 있다. 봉황이 세상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한다. 봉황의 아래 산봉우리 정상에는 다섯 명의 악공이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향로의 정상에 있는 새는 맨아래에 위치한 용과 대비되어 나타내어진 아시아의 대표적인 신수(神獸)인 봉황(鳳凰)이다. 봉황은 박산(博山)에서 양(陽)을 대표하는 신수로서, 그리고 음(陰)을 대표하는 맨 아래 위치한 용과 대칭되어 맨 정상에 안치되었다.

 

 

봉황은 막 비상하려는듯 날개와 꼬리를 거의 50도 가량으로 펼치고 있다. 봉황의 부리 밑에는 용을 비롯한 신수(神獸)의 입 언저리에 여의주가 있다. 봉황은 벌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춘다고 하며, 노래는 묘음(妙音) 또는 오음(五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예로부터 음악과 관련된 동물이다. 이 향로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동반된 것, 다섯 원앙이 봉황을 응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산 봉우리 정상에는 작은 원앙 다섯마리가 봉황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에는 다섯명의 악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악사들은 완함,북,거문고,배소,퉁소를 각각 연주하고 있다. 산 봉우리와 그 사이에는 다양한 인물과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뚜껑에는 총 17명의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 짐승을 부르는 듯한 모습,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를 잡고 있는모습, 지팡이를 집고 가는

등이 굽은 모습, 팔짱을 끼고 명상을 하는듯한 모습 등으로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보이고 있다. 한편 뚜껑에 뚫린 연기 구멍은 봉황의 가슴 윗부분에 연기가 나올수 있도록 뚫은 2개의 작은 구멍과 함께 다섯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 산봉오리 뒷쪽에 5개, 5명의 악사 앞에 솟은 산봉오리 뒷쪽에 5개를 둥글게 돌아가며 배치하였는데, 봉황의 가슴에 뚫린 2개를 제외하고는 솟아오른 뒷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연꽃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불교에서 모든 생명은 연꽃을 통하여 탄생한다고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를 "연화화생(蓮華化生 : 연화에 의하여 화생된다 - 화생이란 "어떤 조화를 부리듯 흔적없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태어남))"이라고 한다. 연꽃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바다를상징하는 용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연꽃으로 변하고, 이 연꽃에는 두 명의 인물과 다양한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연꽃잎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어 잎의 끝부분을 사선문(斜線紋)으로 음각하여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훨씬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금동대향로의 몸통은 연화화생을 표현하는데, 모든생명은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것으로 8장의 연꽃잎이 세 겹으로 배치되어 있다. 두 명의 인물은 달리는 동물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무예를 하는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한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몸통에는 27마리의 동물이 돋을 새김되어 있는데,

 

날개 달린 동물, 춤 추는 학, 날개 달린 자라, 물고기를 삼키고 있는 수달, 머리에 깃털이 있고 발은 넷이며 몸은 도룡뇽의 형태를 한 청어, 새들의 나라에 살며 쉴새 없이 지저귄다는 활구, 긴다리를 활짝 벌리고 달려가는 타조를 닮은 새, 날개 달인 잉어 등이 표현되어 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 드는데 제일 하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을 복엽(覆葉)으로 묘사하였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외면과 윗단의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용은 수중세계를 관장한다. 모든생명은 물에서 나왔다고 한다. 바다에 사는 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용의 발톱 부분에 물결 무늬를 표현하였다. 물 속에 사는 동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용의 몸에도 연꽃 당초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용의 입김에서 연꽃이 피어 오르고 이 연꽃이 박산(박산)이 되어 있다. 용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백제대향로의 받침은 한 다리를 생동감있게 치켜들고 있는 용이 활짝 핀 연꽃봉우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받침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뒤와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구름모양의 갈기를 투각하여 장식하였다. 구름모양과 다리 사이에 6엽의 연꽃무늬로 나타내었는데, 용의 세 다리와 구름모양이 원형을 이루게 구성하여 안정감있는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 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용의 입안에 물려진 짧은 기둥은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과 연결시켰다. 이처럼 용의 입과 연결되도록 물고 있는 모티브는 신라의 금관총 출토 초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용이 입에 물고있는 기둥의 위로는 향로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키기 위한 기둥이 이어져 있고, 이 기둥은 몸체의 둥근 안쪽면에서 약간 솟아 올라 그 끝에는 별도의 고리를 끼워 고정시켰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살얼음이 얼을 정도로 추웠던 1993년 12월12일 오후 4시 30분, 해가 뉘엇뉘엇 지고 부여 능산리의 고분 발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 쯤이었다.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박물관학예사는 공방의 수조라고 추측되던 물구덩이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차가운 물기를 머금고 기와편이 촘촘히 쌓여있던 물웅덩이..

 

드디어 웅덩이에 꽃삽으로 조금씩 파내려 가던 중 1m이상 내려가자 석면,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다량의 기와, 백제금동불상 방배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발굴단은 야간발굴이라는 특단의 결정을 한다. 야간발굴은 문제가 많은 결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안전사고와 도난의 예방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한지 3시간반쯤 지났을까..발굴단은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물 앞에서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였다.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향로가 정말 백제인이 만든 것인가? 중국의 박산향로(博山香爐)와 닮았지만 그보다 더 섬세하면서도 크기도 크다. 우리가 정말 백제의 혼을 다시 깨운 것인가 ??"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것은 그곳이 바로 부여군에서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계획하였던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계단식 논이었던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작은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에 있었고, 부여군은 주차장을 마련하기 전에 유구(遺構), 유물 확인을위하여 사전 시굴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부여군의 강행 방침에 부여박물관 및 충남대 박물관은 이에 항의하여 겨우 발굴조사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현장 상황은 더 이상 나쁠 수 없었다. 당시 2,000만원이 조금 넘는 비용으로 3개월이 넘는 발굴을 진행하여야 했고, 발굴지역이 계곡인데다 항상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겨울철 발굴조사를 진행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몇몇 고고학자들이 유구 밀집지역을 정확하게 잡고, 신속하게 발굴을 진행함으로써 한국 발굴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유물을 우리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30분 경 첫발견하였고,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오후 8시30분, 1,4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백제대향로의 제작 과정

 

 

 

대향로는 청동 표면에 금을 도금하였다. 받침인 용과 향을  담은 연꽃부분이 몸통이고, 박산(博山)과 봉황이 뚜껑이며, 뚜껑에는 12개의 연기 구멍이 있다. 향을 피우면 봉황의 가슴과 각 봉우리의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게 된다. 대향로는 일반적으로 금속 주조법인 밀랍법을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도안을 하고 밀랍에 조각을 하는데, 밀랍은 벌집과 송진을 잘 섞어 다진 다음 섬세하게 산과 인물과 동물을 조각하였다. 몸통에 그대로 새긴 경우도 있고, 따로 조각하여 붙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형태가 모두 만들어지면 진흙으로 거푸집을 만든다. 밀랍 원본에 섬세하고 고운 진흙을 붙이고, 여러 번 덧칠하여 바른다.어느 정도 마르게 되면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열을 가하면 열에 약한 밀랍이 녹아내려 진흙으로 만든 거푸집만 남게 된다.

 

 

이 거푸집을 가마에 넣고 한 번 더 열을 가하는데, 이는 거푸집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굳히게 된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잘 맞추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열이 식은후 거푸집을 깨트리면 향로의 모습이 나온다.

 

 

덜 자듬어지고 거칠은부분은 따로 손질을 한다. 손질이 끝난 향로에  금도금을 하게 되는데, 금도금은 금가루와 수은을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고 붓이나 손으로 향로에 잘 바른다.그 후 열을 가하면 수은은 날아가고 금만 표면에 난게 된다. 금을 광쇠로 문질러 광택이나면 금도금이 완성된다.

 

 

    

 

 

 

 

 

 

                                                     제작 시기

 

 

 

능산리절터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절터로 1992년부터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형식이다.

 

 

이 절터의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는데,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百濟昌王銘舍利龕 .. 국보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공양자와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舍利龕)에 새겨진 글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건립한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의 사리감(舍利龕)은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이었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윗쪽은 원형, 아래쪽은 높이 74cm, 가로와 세로가 50cm인 터널형이다. 

 

 

감실(龕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cm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실의 좌우 양측에  각각 중국 남북조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창왕십삼계태세재   정해매 ? 공주공양사리

                                 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媒 ? 公主供養舍利 

 

 

 

즉, 이 사리감은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威德王)에 의하여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하여 밝혀진 최초의 작품이다. 

 

 

 

 

 

 

 

 

 

 

 

 

 

 

 

 

 

 

                                                    악기

 

 

 

신선세계 또는 신선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도교(道敎)에서는 의례시 향을 피우며 음악이나 춤이 동반하고 있음을 본다. 이 향로의 악사(樂士)도 같은 차원에서 즉 신선세계의 음악의 연주자로서 등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악사는 예로부터 음악을 동반하며 나타내던 봉황 즉 이 향로 정상의 새와 관련이 있다. 즉 봉황이 절로 노래하고 춤을추자 이에 동반하여 악사가 선계(仙界)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악기를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몸체에 기둥이 꽂혀있는 현악기는 우리나라 월금(月琴)이나, 중국의 완함(阮咸)과 흡사하다. 세로로 불고 있는 관악기는 종적(縱笛)이다. 가늘고 길이가 다른 관을 여러 개 묶은 관악기는 배소(排簫)이다.  그리고 배가 불룩하고 양쪽이 좁아지는 몸통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는 현악기는 금(琴)으로 보인다. 한 손으로 윗판을 들고 있는 타악기는 동발(銅渤)로 보여진다.

 

 

 

 

                                      백제의 귀족을 상징하는 5악사

 

 

 

왕을 상징하는 봉황 그리고 백성을 상징하는 다섯 마리의 기러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다섯 명의 악사... 모두 백제의 5부체제를 표방하는하나의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외형상 악기 연주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백제 5부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하는 5부 귀족 또는 5부족을 상징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부체제란 ? 고대국가는 각 나라마다 고유한 성수(聖數)체계를 갖고 있어 각종 상징물의 조형원리 등으로 삼았다. 백제의 경우 행정기구이었던 5부(部)와 5방(方) 그리고 백제를 상징하는대표적 조형물인 정림사터 5층석탑 등으로 볼 때 백제의 성수는 "5"의 체계에 든다.

 

악사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내려뜨리는 독특한 머리 장식, 산악도 속의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옷을 갖춰 입고 있는 모습 등은 이들이 귀족임을 대변해 주고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봉황을 중심으로 다섯명의 악사와 다섯 마리의 기러기.. 이러한 상징체계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음악과 정치의 상관관계이다.

 

고대에는제천의식(祭天儀式)이나 왕의 행차에는 물론 전쟁이나 수렵활동을 할 때에도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는 "소리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고대국가의 정치의 이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금동대향로가 5부체제를 봉황과 5악사, 기러기의 가무형태로 표현한 것은 백제인들의 정치적인 이상이 하늘의 질서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天神을 맞아 함께 제례를 지내며 가무를 하는 동안, 王과 神 그리고 귀족과 백성들은 모두 하나가 된다. 즉 백제금동대향로는 하늘을 향하여 피우는 향훈(香薰) 속에 神과 人間,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한데 어울려 사는 세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1400여 년 전 백제시대는 국제성과 평등성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세계이었다.      

 

 

 

 

                                                                             현금   玄琴

 

 

 

 

거문고로도 불리우는 현금은 중국 진(晉)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보내온 7현금을 왕산악이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악기이다. 이 향로 속의 악사는 왼손을 3현으로 표시된 거문고 줄 위에 얹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거문고의 잔해가 발견되어, 이미 무령왕 시절에 백제인들이 고구려의 거문고를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완함    阮咸

 

 

 

 

백제금동대향로의 정수인  봉황, 그 바로 아래에는 악사가 감미로운 표정으로 완함을 연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완함이 다섯 악기의 중심이 되는 악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파계열의 현악기인 완함은 원래 말 위에서 다루는 서역의 악기이다. 중국 한대까지는 비파로 불리다가 진(晉)나라 때 완함이라는 사람이 잘 연주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완함은 보통 4현을 갖고 있는데, 이 향로 속의 완함은 3현만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피리    笛類

 

 

 

 

피리는 서역의 구자(현, 쿠차)에서 기원한 관악기이며, 가느다란 대나무로 엮어 만들었다. 서양의 팬푸르크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향로 속의 악사는 피리보다 괸(管)이 길고 겹 리드의 흔적이 없는 적류(笛類)의 악기를 불고 있다. 적류는 흔히 옆으로 부는 횡적(橫笛 ..흔히 대금 또는 젓대)과 앞으로 부는 종적(縱笛)으로 구분되는데, 위의 악기는 종적(縱迪)에 해당한다. 

 

 

 

 

                                                                        배소   排簫

 

 

 

 

대나무를 옆으로 나란히 묶은 배소(排簫)는 북방 유목민들의 관악기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난다. 배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시경에 "소관"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악기는 북방민족이 주로 활동하던 한대(漢代)와 남북조시대에 널리 사용되다가 그들의 퇴조와 함께 쓰임새가 급격히 줄어, 이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고유악기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향로속의 배소는 사다리꼴로 대략 10관에 길이는 1자(尺) 정도로 보인다.    

 

 

 

                                                                                

 

 

 

완함의 오른쪽에 있는 북은 항아리 모양의 토기에 가죽을 씌웠다. 악사는 무릎에 북을 올려놓고 왼손으로 고정시킨 뒤 오른손으로 북채를 쥐고 내려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은 중국이나 고구려 유물에서는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주목을 끌고 있는데, 그 원형을 인도네시아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그곳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물 그림

 

 

 

 

 

 

봉황 아래에는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다섯명의 주악상(奏樂像)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74개의 산봉우리와 18명의 인물 그리고 100여가지의 온갖 형상들이 조화롭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18명의 사람들은 모두 다 직업이 다르고, 하고 있는 일이 다르다. 폭포수에 머리를 감고 있는 사람, 도를 닦는 듯한 사람, 개를 끌고 다니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말을 타고 가는 사람 등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여흥을 보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물그림

 

 

 

 

 

 

 

 

 

동물들의 모습은 인물상 못지 않게 더욱 다양하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사자, 원숭이, 코끼리, 멧돼지, 개, 뱀을 물고 있는 거북이 등이 있다. 특히 코끼리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임에도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포함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상상 속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호랑이, 사슴 등 향로 곳곳에 표현된 각종 문양은 향로의 품격을 한단계 높여준다. 향로 속 18인의 신선 또는 사람, 65마리의 짐승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묘사이다. 그리고 백제는 聖王 시절, 겸익이 뱃길을 이용하여 인도(印度)에 가서 불경을 구해 왔으며, 분황국과도 교역하였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분황국은지금의 캄보디아로 백제의 해양진출과 무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문유해
글쓴이 : 박병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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