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천안 부소산 위례산성 2차 발굴 보고회...2010.5.3

吾心竹--오심죽-- 2010. 5. 12. 16:56

<<< 백제초도...천안 부소산 위례산성 2차 발굴 보고회...충남 역사문화 연구원...2010.5.3 >>>

 

***직산 위례산성...백제...타날문토기 발견되다.

 

  타날문 토기
 
     
 한자  打捺文 土器
 영어음역  tanalmun togi
 영어의미역  pottery with stamped design
 이칭/별칭  김해식 토기(金海式 土器)
 분야  역사/전통시대, 문화유산/유형유산
 유형  유물/기명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고재원  
   유사검색어
 성격   토기
 제작시기/일시   탐라시대 전기
 제작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재질   토제
 문양   타날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출토된 철기 시대의 타날문이 시문된 토기.

[개설]
타날문 토기라는 용어는 해남 군곡리 조개무지 발굴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보고서에서는 철기 시대 토기를 크게 경질 무문 토기와 타날문 토기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타날문 토기는 색상이나 태토에 따라 회색 연질 토기·흑색 연질 토기·적갈색 연질 토기·회청색 경질 토기 등 다양하게 세분된다.

[특징]
제주도에서 타날문 토기는 적어도 1세기 이후에는 등장한다. 외도동 유적·화순리 유적·곽지리 유적 등에서 탐라 시대 전기의 재지계 적갈색 경질 토기와 함께 외지계인 타날문 토기가 공반하여 출토되고 있다. 타날문 토기는 새로운 토기 제조 기술, 즉 도박(陶拍)에 의해 타날문이 시문된 특징 외에도 회전판 및 굴가마(登窯) 등이 채용되어 제작된 특징이 있다.

[의의와 평가]
타날 기법은 춘천 중도 집다리에서는 경질 무문 토기와 함께 등장하며 그 연대는 2세기로 보고 있다. 중부 지역의 다른 유적에서는 기원 전후로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부 지역의 김해 지내동 독널 무덤에서는 경질 무문 토기와 함께 타날문의 적갈색 연질 독이 발견되어 그 연대는 1세기경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식 와질 토기 중에 타날문이 등장하는 것도 1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타날문 토기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기원 전후에는 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

[참고문헌]
•  이청규, 『제주도 고고학 연구』(학연문화사, 1995)
•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 백제초도... 천안 직산 부소산 위례산성 발굴...타날문토기와 우각형 파수부 >

 

 

***직산 위례산성에서 바라 본 백제초도 부소산(459m)과 금북~만뢰지맥의 능선들...부소산의 전경 // 

 

 

 

***위례산성의 문지...// 

 

***직산 위례산성의 비부(비석받침...반쪽은 동쪽 성벽 아래에 있음)...// 

 

  

 

 

 

 

 

 

 

 

 

공개된 연천 횡산리적석총 발굴유적-타날문토기편



【연천=뉴시스】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인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에서 조사 중인 연천군 중면 횡산리 233번지 일대의 '연천 군남 홍수조절지 내 횡산리적석총 발굴유적'을 공개하고 지도위원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연천 군남 홍수조절지 내 횡산리에서는 적석총(積石塚), 신석기시대 원형 유구(流寇) 등과 빗살무늬토기편, 철제품, 옥제품, 석제품 등 이다. 사진은 타날문토기편 일괄.

(사진=문화재청 제공)

photo@newsis.com
 

군남댐 예정지서 '제철 마을'도 발굴


송풍관

凸자형 주거지 20기, 제철 유물 다수 수습

2호 주거지

(연천=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기 연천 임진강에 홍수 조절을 위해 건립 중인 군남댐 수몰 예정지에서 2천년 전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견된 데 이어 이번에는 이와 비슷한 시대에 강변에 있던, 철 생산을 담당한 '제철마을'이 발굴됐다.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소장 이희수)는 한국수자원공사 의뢰로 지난 1월20일 이후 수몰 예정지인 연천군 중면 삼곶리 421번지 일원 강변 충적대지 1만542㎡를 발굴한 결과, 초기 삼국시대 주거지 20기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 같은 시기 수혈유구(竪穴遺構. 구덩이) 71기 등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2호 주거지 세부

조사 결과 주거지 대부분은 기원 전후 한반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인 평면 凸자형에 속하며, 그 내부에서는 당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양대 토기인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집중적으로 확인됐다.

나아가 상당수 주거지 내부에서 송풍관 5점과 숫돌 2점, 정련 단야로(精鍊鍛冶爐) 1기, 단야로 2기를 비롯해 철기 생산과 관련되는 유물이 확인됐는가 하면 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인 철 슬래그 등도 수습됐다.

6호 주거지

조사단은 "이런 유구(遺構) 및 유물로 보아 이 지역은 정련(精鍊)이나 단야(鍛冶) 등의 철기 생산과 관련된 마을유적으로 판단된다"면서 "한반도 중부권 초기 삼국시대 문화권에서 철 생산 관련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는 가평 대성리와 여주 연양리 유적 등이 있지만, 이번 발견은 그런 철 생산 관련 시설이 대규모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발굴조사 지도위원 중 한 명인 조유전 경기박물관장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같은 군남댐 예정지에서 발견한 초기 삼국시대 마을유적과 더불어 이번 제철 유적 또한 함께 보존해 교육ㆍ전시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발굴설명회

특히 이번 제철 유적은 그 하류 5㎞ 지점인 연천 강내리에서 고려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한 대규모 마을유적(주거지 80여기)과 거의 시기가 같지만, 그 성격은 취락지(강내리 유적)와 생산시설(삼곶리 유적)로 뚜렷이 갈린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이번에 함께 발견된 수혈유구는 폐기장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점토로 벽체를 두른 것도 있고, 불을 지핀 흔적 및 바닥에 점토를 바른 것도 있어 그 기능이 다양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이들 유적이 조성되고 운영된 정확한 시기에 대해 조사단은 "5호 주거지에서 평저(平底. 편평한 바닥) 형태인 시루 편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초기 삼국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위치한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뉴스의 새 시대, 연합뉴스 Live>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포토 매거진>

 

진천 삼용리 백제토기요지 (鎭川 三龍里 百濟土器窯址)

 

 

백제 때 도자기나 그릇 등을 굽던 가마터로, 가까운 곳에 비슷한 시기의 산수리 가마터도 있다. 출토된 유물은 주로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인데, 모습은 몸통은 둥글고 주둥이가 짧은 것과 화분 모양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3세기 이전에 유행하던 토기인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를 만들어 내던 대형 가마터로서 당시 토기 제작수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진천 삼용리 백제토기 요지가 위치해 있는 곳은 충북(忠北) 진천군(鎭川郡) 이월면(梨月面) 삼룡리(三龍里) 산56-3번지일대로서 인근에는 사적(史蹟) 제325호로 지정된 진천(鎭川) 산수리 요지(가마터)가 있다.

 

이 진천 요지군은 우리나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3C 이전)에 타날문토기(打捺紋土器=긁힘무늬)를 생산하였던 요지가 여섯곳이나 밀집되어 있는 대형요지군 도요지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인근 산수리 요지군의 토기 형식보다는 몇단계 옛날방식이고, 청주 신봉동(新鳳洞) 토광묘(土壙墓) 출토 토기들과는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타날문토기는 중국 전국시대 인문경도(印紋硬陶=손가락으로 찍어눌러 무늬를 만듬 )의 제도기술과 요(窯)가 위만조선(衛滿朝鮮) 시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됨으로써 비롯된다.

 

동 요지에서 출토된 중요유물로는 고운 태토로 만들어진 타날문토기로 몸통부가 구형(球形)인 단경호(短頸壺=짧은 목항아리)와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큰 그릇형태 토기)가 대부분이다.

 

 

<연질대호 회색 타날문 연질대호> (灰色 打捺文 軟質大壺)

 

 

 

 

 

 

회색 두드림무늬 짧은목 큰항아리

 

이 형태는 짧은 목항아리의 형태를 계승한 것이다.

 

높이(높이) : 47 cm / 몸통지름(몸통지름) : 46 cm

출토지:경기도(京畿道) 하남시(河南市)

소장처: 한양대 중앙 박물관

 

이 유물의 구연지름은 27cm이고 바닥은 둥글다. 1.5mm간격으로 돗자리 무늬 형태의 타날문(두드림 무늬)이 시문되어 있다.

 

타날문 토기란, 토기의 몸통을 다지거나 부풀리기 위해 두들개로 두드려서 삿무늬(돗자리무늬)나 문살무늬(#체크무늬)가 생긴 토기를 가르킨다. 철기시대 토기 중의 하나인 ‘회색연질토기’ 연대는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의 등장을 기원전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적갈색연질토기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하였고, 회청색경질토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주로 유행하였다.

 

특히 회색연질토기의 발생을 중국(中國)의 회도(灰陶)의 영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 회도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회백색연질토기(혹은 와질토기)와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 토기는 점차 회청색경질토기로 발전되어 갔다.

 

토제우각형 파수부 장경호(土製牛角形把手附長頸壺)

 

 

손잡이 달린 소뿔 목항아리

 

 

천안 위례성, 城 입구 '門址' 확인 < 천안=뉴시스> 이종익 기자

 

기사등록 일시 [2010-05-03 10:06:56] 최종수정 일시 [2010-05-03 10:06:56]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관계자는 "제작연대를 백제 한성기까지 추정할 수 있는 '타날문토기'도 발굴돼 관심을 끈다"며 "이 토기는 적갈석 연질에 벽면이 토기를 성형할 때 산소를 빼기 위해 목판에 문향을 인위적으로 사용, 한성 백제시기 유행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우각형 파수부편(牛角形 把手部片)', '삼족토기편(三足土器片)' 외에 제작연대를 백제 한성기까지 추정할 수 있는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발굴됐다.

 

충남역사문화 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에서 위례성 첫 축조시점과 관련된 유구의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확인된 문지와 석축성벽 등에 대한 세부 조사가 이뤄지면 구체적인 축조시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직산 위례산성 출토...백제 타날문토기와 우각형 파수부...// 

 

 

 

 

종   목   사적   325호
명   칭   진천 산수리 백제요지
분   류   도요지
면   적   3,200㎡
지정일   1988.02.27
소재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196-3
소유자   사유
관리자   진천군
요지는 토기나 도자기를 만들고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이곳은 3∼4세기경 백제토기를 굽던 곳으로, 9기의 크고 작은 가마터와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가마의 구조는 산비탈을 이용한 굴가마(등요)로, 지하굴식의 대형가마 5기와 반지하식의 소형가마 4기로 구분된다. 대형가마의 하나인 7호는 전체길이 7.7m, 폭 2.95m, 높이 1.55m이며, 소형가마의 하나인 4호는 길이 3.6m, 넓이 1.6m이며 모양이 둥글다.

토기들은 회흑색의 단단한 경질토기와 적갈색의 연한 연질토기 등이며, 기형은 목짧은 항아리, 달걀모양의 항아리 등에 두드림무늬가 새겨진 것이 있다.

백제 초의 토기 가마터와 작업장이 함께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종   목   사적   344호
명   칭   진천 삼용리 백제토기요지
분   류   도요지
면   적   3,432㎡
지정일   1991.02.26
소재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삼룡리 산518-10
소유자   진천군
관리자   진천군
백제 때 도자기나 그릇 등을 굽던 가마터로, 가까운 곳에 비슷한 시기의 산수리 가마터도 있다. 출토된 유물은 주로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인데, 모습은 몸통은 둥글고 주둥이가 짧은 것과 화분 모양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3세기 이전에 유행하던 토기인 두드림무늬토기를 만들어 내던 대형 가마터로서 당시 토기 제작수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91호
명   칭   진천 태화4년명 마애불입상
분   류   마애불(부동산)
수   량   1기
지정일   1981.05.01
소재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7
소유자   국유
관리자   진천군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전리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이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각이나 돋을새김으로 새긴 불상을 말한다.

이 불상은 바위면에 가는 선으로 새긴 배(舟)모양의 타원형 광배를 갖추고 연꽃잎이 새겨진 사각형의 대좌 위에 서 있다. 불상의 각 신체부분은 파손이 심하여 잘 알아볼 수가 없다.

불상 옆에 새겨진 글을 통해 신라 흥덕왕 5년(830)에 조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선의 새김이 아름답고 절대 연대를 가지고 있는 불상으로 진천지역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국가사적 제2호인 회현동 패총에서 출토되어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이름을 얻은 "김해토기(金海土器)"는 주로 한강 이남에 분포되어 있는 원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적갈색 및 회청색의 경질 타날문 토기로 "김해식 토기"라고 하기도 한다. 바탕 흙은 그에 앞서는 민무늬 토기와는 달리 입자가 고운 찰흙을 사용했다. 태토 성분은 모래가 50~60%, 그리고 진흙이 40~50%이다. 신라 토기는 모래가 60~70%, 진흙이 30~40%라고 한다.
 김해토기 제작자들은 "물레"를 알고 있었다고 믿어지지만 물레를 쓴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진흙 끈으로 감아 올리기법을 사용, 성형 한 후 돌림판 위에 놓고 목과 아가리 부분만 마무리했다.
 표면장식은 손이나 대칼 또는 조개 조각등으로 문질러서 마무리했다. 특히 조개 표면에 동기선이 있는 고동, 꼬막, 새조개 등의 사용은 김해토기에서의 큰 특색으로 토기 안팎 표면에 빗질한 것 같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항아리의 경우는 예외없이 표면 전체가 도박으로 격문, 승석문이 새겨지고 있다. 격문은 나무 방망이에 문살 모양을 새겨서 두드리면 되고, 승석문은 꼬은 끈을 방망이에 감아 두드린 다음 그 위에 같은 간격으로 평행선을 둘러 돗자리 무늬와 같이 만들었다.
 김해식 토기의 화로는 저화도의 민무늬 토기와는 달리 보통 900 ~ 1000도의 고온으로 구웠으며 이러한 고온은 야철기술(冶鐵技術)의 발달과 관련되며 지붕을 가진 가마의 사용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남한에서 김해식 토기의 발생 연대에 관해서 확정할 관련자료는 아직 부족하나, 낙랑군 설치와 직결된다 할 것이다. 즉 김해패총(회현리 패총)에서 출토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화폐인 화천(貨泉)이 김해토기의 연대를 가르킨다 할 것이다. 김해토기의 연대는 서기 300년경을 중심으로 약 1세기라고 유추하고 있다. 김해토기의 출토는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고 있으며 유적으로는 한강 유역으로 가평의 마장리, 이곡리, 양평의 대심리, 서울 풍납동, 양주의 덕소, 부천의 시도, 화성, 별망 등에 넓게 분포되어 있고 낙동강 유역에서는 김해, 웅천, 진해, 마산의 성산, 고성, 양산 등이다. 그러나 경북의 경주, 월성과 충남 회덕과 서산, 전남의 광산 등 그 분포는 남한 전역이다.

 

< 출처-인류가 처음 토기(土器)를 만들기 시작

cutedrum | 2006-05-17 12:02 | 조회 228 | 출처: 인터넷... 다음 오픈 지식 >

 

 

 

 

 

 

 

 

 

 

 

 

 

 

 

 

 

 

 

 

 

 

 

 

 

 

 

 

 

 

 

 

 

 

 

 

 

제 1 호
원삼국시대의 연구현황
-1992년도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최성락
(목포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

1. 머리말
2. 시대명칭
3. 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4. 기타
5. 맺음말

1. 머 리 말

한국고고학에서 원삼국시대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시기는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 변화되는 중간단계로 복잡한 문화양상을 띄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하여 학자들간의 의견도 상당히 상충되기 때문이다. 원삼국시대의 연구는 일찍이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을 발굴하면서 이 시대를 금석용기로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이시대를 연구하는 초보적인 단계이었다. 금석용기에 대한 허구성은 남북학자들 사이에 일찍부터 지적되고 시정되었는데 남한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이 시대의 유적이 조사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최몽룡,1992)

 

남부지역에서는 많은 토광묘유적이 조사된 1980년대에 (와질토기론)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고 그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2년조에는 원삼국시대에 대한 많은 논의와 연구성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대명칭,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등의 문제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시대명칭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은 1970년대 초에 생겨났다. 김원룡은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제기하면서 (종래고고학에서 김해시대라고 불러왔고, 역사학에서의 삼한시대가 이에 히당되지만 원초삼국시대- 원사시대의 삼국시대라 해서 원삼국시대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 ....

 

이 시대의 실연대는 서력기원 직후 2세기 또는 2세기 반(AD.0-250)에 해당한다)고 정의하였다. 또한 원삼국시대에 앞서는 기원전의 철기문화를 초기철기시대로 설정해 두었다.(김원용,1973)그 후 하한연대를 기원후 300년까지로 연장하였다.(김원룡,1986) 현재 한국 고고학에서는 시대구분을 대체로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삼국시대로 하고 있는데[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개념을 확대하여 원삼국시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거나(이남규,1982;한영희.1984)혹은 이를 대신하여 철기시대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1977)

 

그리고 원삼국시대를 대신하여 삼국시대 전기로 하자는 안도 있다. 즉 삼국시대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삼국은 삼한과 마찬가지로 초기철기시대의 토착세력을 바탕으로 등장하였고, 그 후에 삼한지역을 통일 삼국을 정립하였으므로 삼국시대 전기로 부르자는 것이다.(최몽룡,1988.1990) 그런데 최근 이현혜는 원삼국시대의 용어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이현혜,1992)


첫째, 이 용어는 기원후 1-3세기를 원사시대로 보는 데에서 출발되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도 삼국시대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비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자신있게 역사시대로 규정하여 삼국시대로 편입하지 못한 채 삼한시대 혹은 부족국가연맹체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둘째, 원삼국이란 개념이 고구려,백제,신라의 protp-type으로 간주한다고 하나 실제는 고구려를 제외한 지역의 문화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원삼국시대의 문화를 다루면서 실제로 취급되는 지역은 백제,신라,가야지역이므로 이를 한반도 중남부로 한정하자는 의견(한병삼,1989.1992)도 제시되고 있어용어의 모순점을 고고학계 내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셋째,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내용이 학자간에 주장이 달라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기원전후로 문화가 변화되는 기준이 학자들 간에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한 연구는 그 연대의 추정이 학자들 간에, 혹은 연구되는 시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변화가 어떠한 고정된 시점에서 반드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부적절한 연대(기원전후-기원후 300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즉 고고학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은 커다란 문화적 변화를 기준으로 설정되어야 하고 그 시대의 명칭은 문화적인 특성을 암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고고학에서 그 변화되는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고고학적 방법에 의하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와 달리 절대연대를 가질 수 없다.

 

이와같이 원삼국시대의 용어에 대한 모순점들이 지적되고 있으나 고고학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인 삼국시대로 연결시키는 중간단계의 시대설정에 적합한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어 앞으로 얼마동안은 그대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3. 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이 시대의 논쟁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토기에 대한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1980년대 초까지는 김해식토기로 알려졌고 이에 대한 별다른 이론이 없었으나 1982년 와질토기론이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현재는 이 와질토기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보는 측이 상당히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도 적지 않다. 먼저 와질토지론을 주장하는 측의 의견을 살펴보자. 신경철과 최조규는 당시의 토기를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로 분류하고 와질토기란 고운 태토를 사용하였고 얇은 기벽을 가진 회백색의 연질토기이며, 도질토기란 등요에 의해 1000도C이상 환원상태에서 소성된 것으로 신라가야토기를 지칭하기 때문에 원삼국시대의 토기는 와질토기로 대표된다고 보았다.(신경철,1992; 최종규,1982)

 

또한 도질토기의 초기단계를 고식도질토기라 불렀고 이는 신라가야양식이 출현하기 이전이라고 보았다.(최종규,1982) 와질토기는 경주를 중심으로 낙동강유역에서 토광묘유적이 다량으로 확인되자 와질토기가 동남부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부지방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신경철,1986)

 

그후 중부지방인 진천 송두리유적,천안 청당동유적 등 토광묘유적에서 전형적인 와질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부지방의 토광묘는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고 이 시기에는 와질토기 이외에도 경질무문토기, 연질토기 및 경질토기가 발견되고 있어 와질토기가 이 시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와질토기론은 일본학자들의 지지하에 영남지방의 대부분 연구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원삼국시대의 문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학설에 의거한 새로운 고분 편년이 제시되면서 기존의 고분편년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이들 와질토기론의 모순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와질토기와 도질토기의 이분법적인 분류와 그 구분의 모호성에 문제점이있다. 처음 와질토기의 개념이 정의될 때는 견도,색조, 태토,흡수율 등이 기준이었으나 와질토기 속에서 경도가 아주 높은 것이 있음이 지적되자(이성주,1987)나중에는 그 구분의 기준이 애매하며 정면방법과 속심색깔의 의해 분류하고 있다.(부산대박물관,1988)또한 도질토기의 개념은 석기질의 삼국토기로 규정하였으나 여기에 원삼국시대의 회청색경질토기까지 포함시켜 혼돈을 주고 있으며 개념적으로도 종래의 회청식경질토기와는 동일시 할 수 없음이 지적되었다(최성락,1988)그리고 이들 토기의 분류와 개념과 이와 관련된 학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논고도 있었다.(최병현,1992a.1992b)


둘째, 와질토기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이를 확대 적용한다는 점이다. 처음 와질토기가 알려진 것은 낙동강유역의 토광묘유적이나 이를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보고 이 시기를 (와질토기시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부지역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적갈색연질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가 함께 발견되었고(박순발,1989; 최병현,1990),서남부지역인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는 무문토기(경질무문토기,경질찰문토기)와 타날문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색연질토기,흑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로 분류되며 전형적인 와질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최성락,1986)따라서 원삼국시대의 토기는 결코 한 종류의 토기가 절대적인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없으며 경질무문토기,경질찰문토기,회색연질토기(혹은 와질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존재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최성락,1988)


셋째, 도질토기의 발생연대 문제이다. 처음 제기될 당시에는 도질토기의 발생연대를 4세기 전반으로 보았으나 그 후 고식도질토기의 사용시기를 3세기 중반(부산대박물관,1989)으로 올려보았다.그런데 도질토기라는 개념에는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문제가 있으며 종래의 회청색경질토기의 발생에 대하여는 2세기 후반설(임효택,1992),2세기 전반설(곽동철,1992) 및 기원전후설(최병현,1990)등이 제시되었다. 이 문제는 고분과 패총의 편년문제와도 연결된다. 와질토기론자들은 토광목곽묘의 출현을 기원후 2세기 후반에,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가야의 수혈식목곽분을 기원후 5세기 전반대로,횡구식 및 횡혈식석실분을 6세기대로 보았고, 패총의 중심연대도 4세기대로 보았는데 고분의 편년관은 기존의 편년관에서 100년 내지는 150년을 낮추어 본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편년을 비판하고 고분의 연대를 올려보는 견해도 많다. 즉 수혈식석곽분의 시작연대를 3세기 후반(김세기,1985)이나 4세기 전반대(임효택,1992)로 보고 있으며 고분 편년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횡구식석실묘의 발생연대를 일본 구주지역과 같이 4세기 후반 내지 5세기 초로 보자는 안(박광춘,1990)까지 제시되고 있어 고분의 연대관이 서로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패총의 중심연대도 지나치게 내려볼 수 없음이 주장되었다(최성락,1992b) 사실 와질토기론자들과 같이 고분연대를 낮추고 보면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분연대가 구주지역의 고분연대보다도 오히려 낮아 당시의 문화가 역으로 구주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신문화의 북진설(유전강웅,1992)이나 신임나일본부설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명칭에 문제가 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김해식토기는 일본인들고에 의해 지칭된 명칭으로 이명칭의 불확실성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라는 명칭도 또한 적합하지 않다. 와질토기란 일본학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와질 이라는 개념도 애매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연질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용어로 생각된다. 도질토기는 역시 일본학자들이 일본에서 출토되는 한국계 경질토기를 도질토기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역시 적합하지 못한 용어이다.

 

이와같이 와질토기론이 제기된 이후 10년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그 자체가 가지는 모순과 약점 때문에 이제는 재고할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시말하면 이 와질토기론은 김해식토기론에 대항하여 나타난 설이지만 김해식토기가 갖고 있는 모순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고, 또한 와질토기론으로 당시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범위도 한정된다. 그리고 와질토기론과 함께 고분편년을 파격적으로 낮추는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최근에는 점차 그 연대를 수정하여 올려보고 있어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경향이다.

 

결국 와질토기론이 발표된 이후 원삼국시대의 연구를 활발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원삼국시대나 고분의 편년에 혼돈을 주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앞으로는 이와같은 학설을 발표하기 앞서 보다 신중한 자세로 새로운 학설을 검토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 고고학계에 남겨놓은 좋은 예라 생각된다.

4. 기타

1992년에 조사된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 김해 봉황대패총(부산대박물관),보성척령리 금평패총(전남대박물관),경기도 미사리유적(숭실대박물관 등),김해양동리 유적(동의대박물관),천안 청당동유적(국립 중앙박물관)등과 초기철기시대유적으로 광주 신창동유적(국립광주박물관)이 있었다.

 

그런데 패총의 연구가 단순히 인공유물 뿐만 아니라 자연유물인 조개류나 동물뼈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하며 이를 통해 당시 문화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한국고고학회,1992) 이 시대의 문화적 성격을 연구한 것 중에서 원삼국문화의 계통론이 여전히 우세하였다. 지금까지 원삼국문화의 계통은 낙랑문화영향설이 강조되었다.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초기의 토광목관묘가 전국시대 중국 남부지방의 독목관과 관련성을 주장한 견해가 있고,(한병삼,1992) 또한 토광목곽묘를 2개군으로 분류하여 각각 낙랑문화 및 북방문화영향설을 제기하였다.(신경철,1992)반면 토광묘는 서북지방과 관련을 통해 북방계이며 토광목곽묘의 계보를 달리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임효택,1992)

 

그런데 고고학에서는 계통론도 중요하나 당시의 문화가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지를 우선적으로 밝혀야 한다. 필자는 전남지방의 원삼국무놔를 검토하면서 문화가 어디에서 왔느냐에 관점을 두기 보다도 어떻게 형성하고 변화되었나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자료의 부족으로 충분한 설명이 어려웠으나 그 범위를 남부지역으로 넓힐 때 다소 가능서을 찾을 수 있었다.(최성락,1992a) 앞으로 우리고고학도 지나치게 계통론에 치우치지 말고 다양한 각도에서 고고학적 자료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1992년도에는 원삼국시대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우선(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에 대한 모순이 지적되었다. 이 용어가 고고학적 시대구분이 아님은 분명하나 이를 대치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용어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될 때까지 당분간 그대로 쓰일 것 같다.

 

그리고 토기의 편년 및 무덤의 편년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으며 원삼국문화에 대한 성격 구명도 있었다. 특히 토기문제에 있어서 지난 10여년간 논의되어온 소위 와질토기론은 원삼국문화를 연구하는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어 서서히 수정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더불어 고분의 편년도 그동안 심한 견해의 차이로 불일치를 보여왔으나 점차 학계내부에서 정리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이 시대의 문화 연구는 편년과 계통론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문화의 성격으로 규명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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