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의 연구현황 -1992년도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최성락 (목포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
1. 머리말 2. 시대명칭 3. 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4. 기타 5. 맺음말
1. 머 리 말
한국고고학에서 원삼국시대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시기는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 변화되는 중간단계로 복잡한 문화양상을 띄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하여 학자들간의 의견도 상당히 상충되기 때문이다. 원삼국시대의 연구는 일찍이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을 발굴하면서 이 시대를 금석용기로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이시대를 연구하는 초보적인 단계이었다. 금석용기에 대한 허구성은 남북학자들 사이에 일찍부터 지적되고 시정되었는데 남한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이 시대의 유적이 조사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최몽룡,1992)
남부지역에서는 많은 토광묘유적이 조사된 1980년대에 (와질토기론)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고 그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2년조에는 원삼국시대에 대한 많은 논의와 연구성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대명칭,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등의 문제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시대명칭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은 1970년대 초에 생겨났다. 김원룡은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제기하면서 (종래고고학에서 김해시대라고 불러왔고, 역사학에서의 삼한시대가 이에 히당되지만 원초삼국시대- 원사시대의 삼국시대라 해서 원삼국시대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 ....
이 시대의 실연대는 서력기원 직후 2세기 또는 2세기 반(AD.0-250)에 해당한다)고 정의하였다. 또한 원삼국시대에 앞서는 기원전의 철기문화를 초기철기시대로 설정해 두었다.(김원용,1973)그 후 하한연대를 기원후 300년까지로 연장하였다.(김원룡,1986) 현재 한국 고고학에서는 시대구분을 대체로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삼국시대로 하고 있는데[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개념을 확대하여 원삼국시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거나(이남규,1982;한영희.1984)혹은 이를 대신하여 철기시대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1977)
그리고 원삼국시대를 대신하여 삼국시대 전기로 하자는 안도 있다. 즉 삼국시대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삼국은 삼한과 마찬가지로 초기철기시대의 토착세력을 바탕으로 등장하였고, 그 후에 삼한지역을 통일 삼국을 정립하였으므로 삼국시대 전기로 부르자는 것이다.(최몽룡,1988.1990) 그런데 최근 이현혜는 원삼국시대의 용어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이현혜,1992)
첫째, 이 용어는 기원후 1-3세기를 원사시대로 보는 데에서 출발되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도 삼국시대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비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자신있게 역사시대로 규정하여 삼국시대로 편입하지 못한 채 삼한시대 혹은 부족국가연맹체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둘째, 원삼국이란 개념이 고구려,백제,신라의 protp-type으로 간주한다고 하나 실제는 고구려를 제외한 지역의 문화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원삼국시대의 문화를 다루면서 실제로 취급되는 지역은 백제,신라,가야지역이므로 이를 한반도 중남부로 한정하자는 의견(한병삼,1989.1992)도 제시되고 있어용어의 모순점을 고고학계 내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셋째,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내용이 학자간에 주장이 달라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기원전후로 문화가 변화되는 기준이 학자들 간에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한 연구는 그 연대의 추정이 학자들 간에, 혹은 연구되는 시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변화가 어떠한 고정된 시점에서 반드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부적절한 연대(기원전후-기원후 300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즉 고고학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은 커다란 문화적 변화를 기준으로 설정되어야 하고 그 시대의 명칭은 문화적인 특성을 암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고고학에서 그 변화되는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고고학적 방법에 의하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와 달리 절대연대를 가질 수 없다.
이와같이 원삼국시대의 용어에 대한 모순점들이 지적되고 있으나 고고학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인 삼국시대로 연결시키는 중간단계의 시대설정에 적합한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어 앞으로 얼마동안은 그대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3. 토기의 성격 및 고분의 편년
이 시대의 논쟁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토기에 대한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1980년대 초까지는 김해식토기로 알려졌고 이에 대한 별다른 이론이 없었으나 1982년 와질토기론이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현재는 이 와질토기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보는 측이 상당히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도 적지 않다. 먼저 와질토지론을 주장하는 측의 의견을 살펴보자. 신경철과 최조규는 당시의 토기를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로 분류하고 와질토기란 고운 태토를 사용하였고 얇은 기벽을 가진 회백색의 연질토기이며, 도질토기란 등요에 의해 1000도C이상 환원상태에서 소성된 것으로 신라가야토기를 지칭하기 때문에 원삼국시대의 토기는 와질토기로 대표된다고 보았다.(신경철,1992; 최종규,1982)
또한 도질토기의 초기단계를 고식도질토기라 불렀고 이는 신라가야양식이 출현하기 이전이라고 보았다.(최종규,1982) 와질토기는 경주를 중심으로 낙동강유역에서 토광묘유적이 다량으로 확인되자 와질토기가 동남부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부지방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신경철,1986)
그후 중부지방인 진천 송두리유적,천안 청당동유적 등 토광묘유적에서 전형적인 와질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부지방의 토광묘는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고 이 시기에는 와질토기 이외에도 경질무문토기, 연질토기 및 경질토기가 발견되고 있어 와질토기가 이 시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와질토기론은 일본학자들의 지지하에 영남지방의 대부분 연구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원삼국시대의 문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학설에 의거한 새로운 고분 편년이 제시되면서 기존의 고분편년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이들 와질토기론의 모순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와질토기와 도질토기의 이분법적인 분류와 그 구분의 모호성에 문제점이있다. 처음 와질토기의 개념이 정의될 때는 견도,색조, 태토,흡수율 등이 기준이었으나 와질토기 속에서 경도가 아주 높은 것이 있음이 지적되자(이성주,1987)나중에는 그 구분의 기준이 애매하며 정면방법과 속심색깔의 의해 분류하고 있다.(부산대박물관,1988)또한 도질토기의 개념은 석기질의 삼국토기로 규정하였으나 여기에 원삼국시대의 회청색경질토기까지 포함시켜 혼돈을 주고 있으며 개념적으로도 종래의 회청식경질토기와는 동일시 할 수 없음이 지적되었다(최성락,1988)그리고 이들 토기의 분류와 개념과 이와 관련된 학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논고도 있었다.(최병현,1992a.1992b)
둘째, 와질토기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이를 확대 적용한다는 점이다. 처음 와질토기가 알려진 것은 낙동강유역의 토광묘유적이나 이를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보고 이 시기를 (와질토기시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부지역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적갈색연질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가 함께 발견되었고(박순발,1989; 최병현,1990),서남부지역인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는 무문토기(경질무문토기,경질찰문토기)와 타날문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색연질토기,흑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로 분류되며 전형적인 와질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최성락,1986)따라서 원삼국시대의 토기는 결코 한 종류의 토기가 절대적인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없으며 경질무문토기,경질찰문토기,회색연질토기(혹은 와질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존재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최성락,1988)
셋째, 도질토기의 발생연대 문제이다. 처음 제기될 당시에는 도질토기의 발생연대를 4세기 전반으로 보았으나 그 후 고식도질토기의 사용시기를 3세기 중반(부산대박물관,1989)으로 올려보았다.그런데 도질토기라는 개념에는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문제가 있으며 종래의 회청색경질토기의 발생에 대하여는 2세기 후반설(임효택,1992),2세기 전반설(곽동철,1992) 및 기원전후설(최병현,1990)등이 제시되었다. 이 문제는 고분과 패총의 편년문제와도 연결된다. 와질토기론자들은 토광목곽묘의 출현을 기원후 2세기 후반에,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가야의 수혈식목곽분을 기원후 5세기 전반대로,횡구식 및 횡혈식석실분을 6세기대로 보았고, 패총의 중심연대도 4세기대로 보았는데 고분의 편년관은 기존의 편년관에서 100년 내지는 150년을 낮추어 본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편년을 비판하고 고분의 연대를 올려보는 견해도 많다. 즉 수혈식석곽분의 시작연대를 3세기 후반(김세기,1985)이나 4세기 전반대(임효택,1992)로 보고 있으며 고분 편년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횡구식석실묘의 발생연대를 일본 구주지역과 같이 4세기 후반 내지 5세기 초로 보자는 안(박광춘,1990)까지 제시되고 있어 고분의 연대관이 서로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패총의 중심연대도 지나치게 내려볼 수 없음이 주장되었다(최성락,1992b) 사실 와질토기론자들과 같이 고분연대를 낮추고 보면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분연대가 구주지역의 고분연대보다도 오히려 낮아 당시의 문화가 역으로 구주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신문화의 북진설(유전강웅,1992)이나 신임나일본부설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명칭에 문제가 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김해식토기는 일본인들고에 의해 지칭된 명칭으로 이명칭의 불확실성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라는 명칭도 또한 적합하지 않다. 와질토기란 일본학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와질 이라는 개념도 애매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연질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용어로 생각된다. 도질토기는 역시 일본학자들이 일본에서 출토되는 한국계 경질토기를 도질토기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역시 적합하지 못한 용어이다.
이와같이 와질토기론이 제기된 이후 10년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그 자체가 가지는 모순과 약점 때문에 이제는 재고할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시말하면 이 와질토기론은 김해식토기론에 대항하여 나타난 설이지만 김해식토기가 갖고 있는 모순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고, 또한 와질토기론으로 당시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범위도 한정된다. 그리고 와질토기론과 함께 고분편년을 파격적으로 낮추는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최근에는 점차 그 연대를 수정하여 올려보고 있어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경향이다.
결국 와질토기론이 발표된 이후 원삼국시대의 연구를 활발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원삼국시대나 고분의 편년에 혼돈을 주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앞으로는 이와같은 학설을 발표하기 앞서 보다 신중한 자세로 새로운 학설을 검토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 고고학계에 남겨놓은 좋은 예라 생각된다.
4. 기타
1992년에 조사된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 김해 봉황대패총(부산대박물관),보성척령리 금평패총(전남대박물관),경기도 미사리유적(숭실대박물관 등),김해양동리 유적(동의대박물관),천안 청당동유적(국립 중앙박물관)등과 초기철기시대유적으로 광주 신창동유적(국립광주박물관)이 있었다.
그런데 패총의 연구가 단순히 인공유물 뿐만 아니라 자연유물인 조개류나 동물뼈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하며 이를 통해 당시 문화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한국고고학회,1992) 이 시대의 문화적 성격을 연구한 것 중에서 원삼국문화의 계통론이 여전히 우세하였다. 지금까지 원삼국문화의 계통은 낙랑문화영향설이 강조되었다.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초기의 토광목관묘가 전국시대 중국 남부지방의 독목관과 관련성을 주장한 견해가 있고,(한병삼,1992) 또한 토광목곽묘를 2개군으로 분류하여 각각 낙랑문화 및 북방문화영향설을 제기하였다.(신경철,1992)반면 토광묘는 서북지방과 관련을 통해 북방계이며 토광목곽묘의 계보를 달리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임효택,1992)
그런데 고고학에서는 계통론도 중요하나 당시의 문화가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지를 우선적으로 밝혀야 한다. 필자는 전남지방의 원삼국무놔를 검토하면서 문화가 어디에서 왔느냐에 관점을 두기 보다도 어떻게 형성하고 변화되었나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자료의 부족으로 충분한 설명이 어려웠으나 그 범위를 남부지역으로 넓힐 때 다소 가능서을 찾을 수 있었다.(최성락,1992a) 앞으로 우리고고학도 지나치게 계통론에 치우치지 말고 다양한 각도에서 고고학적 자료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1992년도에는 원삼국시대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우선(원삼국시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에 대한 모순이 지적되었다. 이 용어가 고고학적 시대구분이 아님은 분명하나 이를 대치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용어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될 때까지 당분간 그대로 쓰일 것 같다.
그리고 토기의 편년 및 무덤의 편년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으며 원삼국문화에 대한 성격 구명도 있었다. 특히 토기문제에 있어서 지난 10여년간 논의되어온 소위 와질토기론은 원삼국문화를 연구하는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어 서서히 수정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더불어 고분의 편년도 그동안 심한 견해의 차이로 불일치를 보여왔으나 점차 학계내부에서 정리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이 시대의 문화 연구는 편년과 계통론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문화의 성격으로 규명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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