煩惱無盡 誓願斷

원효대사

吾心竹--오심죽-- 2010. 3. 24. 11:24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인물과 역사
황금마삭 조회 31 | 09.12.27 02:28 http://cafe.daum.net/geumgangbuddha/NnWg/48

1. 일본에서의 원효의 명성, '효사'(효선생님)

 

           "원효가 대학자였기 때문에

           일본의 모든 승려들이 원효가 지은 책을 읽고 있었다"

                                                   - 이시이 고세이 교수(고마자와대학 불교학과)

 

일본 정토종의 본사 교토 선림사.

이곳 수장고에는 매우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800년전 필사된 원효(617-686)의 책,

<무량수경종요>.

 

일본에선 '해동의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신라에선 '파계승'으로 여겨졌던 원효.

그는 과연 누구인가?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것은 일본의 국보 중에 하나입니다.

 뭔가 궁금하시죠?

 

 바로 '화엄연기 [華嚴緣起]'입니다.

 

 놀랍게도 이 그림은 

 신라 화엄종의 선구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대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역사스페셜에서 사진으로 찍어서

 한 통의 두루마리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원본은 모두 여섯통의 두루마리

 의상과 원효의 구법의 과정을 각각 세통씩 담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지 함께 보시죠.

 

 지금 보시는 그림은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도중에

 무덤속에서 하루밤을 자는 그런 장면입니다.

 

 또 이 그림은

 무덤속에서 함께 잠을 자던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그런 장면입니다.

 

 이외에도 이 두루마리에는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원효가 저자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런 그림도 보이구요,

 또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는 그런 원효의 모습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라인이 아닙니다.

 12세기경에 살았던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닌 사람의 일대기를 이렇게 남겨둔 걸 봐서

 이 사람은 원효를 굉장히 숭상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이것을 국보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효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남겨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또 일본은 왜 이 그림을 국보로까지 지정해두고 있는걸까요?"

 

일본의 유서깊은 화엄사 사찰 교토 외곽 고산사.

이곳이 바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연기'가 있던 절이다.

 

천황이 하사한 액자를 받을 정도로 유서깊은 이 절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화엄연기도 이곳에 있었다.

 

"이곳이 고선사 석수원입니다.

 화엄연기 외에 원효대사의 영정도 여기 모셔져 있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볼 수 없습니다."

                                                               -시게마쓰 쇼텐(일본 보림사 주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화엄연기'를 만들었을까?

 

화엄연기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초반.

이 절을 만들었던 묘에(1173~1232)에 의해 추진되었다.

 

묘에의 부도탑.

 

묘에는 직접 글을 쓰고,

쇼닌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중세 일본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그는

원효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추사론(推邪論)>.

 

그의 저서를 보면

한 페이지 안에도

여러번 원효를 인용하고 있을 정도다.

                                               

"원효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삶을 자신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원효가 대학자였기 때문에

 일본의 모든 승려들이 원효가 지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묘에는 단순히 학문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까지 존경했던 것입니다."

                                                     - 이시이 고세이 교수(고마자와대학 불교학과)

 

묘에가 원효의 책을 강의했었다는

일본 화엄종의 본산 동대사.

 

이 절은 초기부터 원효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8세기 신라에 유학했던 심상

원효의 책들을 대량 입수해 돌아온다.

 

그것이 원효의 학풍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껏 계속 이어지고 있다.

 

"원효의 학풍은

 매우 폭이 넓어서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동대사

 특히 화엄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화엄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교학을 공부해왔다는 점에서

 원효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모리야 고우사이(傳 방장스님)

 

원효의 영향은

비단 화엄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의 불교전문대학인 <오오타니대학>.

 

도서관엔

오래전에 필사된 원효의 책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판비량론(判比量論) 필사본>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이것은 원래 카마쿠라 시대에

 법상종의 학승이 공부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것인데,

 에도 시대에 다른 사람이 또 필사했고,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 기무라 센쇼 교수(오오타니 대학)

 

국내에는 판본조차 없는 원효의 저술들.

 

일본의 거의 모든 종파가

이 책들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대부분 저작물들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도중에 없어진 것도 있지만,

 오오타니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번 필사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원효의 저작물을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읽고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 기무라 센쇼 교수

 

원효는 비단 학문에서만 계승된 것이 아니다.

 

동대사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교기(카마쿠라 시대의 승려).

 

그는 대중 교화에 주력했던 원효의 삶을 존경해

원효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서 서민 구제에 힘쓴 그는

원효의 실천적 계승자였다.

 

'고통받고 있는 서민을 구제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원효에 대한 호칭은 '효사'입니다.

 

 '효선생님'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을 부르면서

 원효에 대해서만 '효사'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원효를 존경하고 숭상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2. <송고승전>,

                  중국에서도 원효의 전기 별도 수록

 

"원효는 신라에 국한된 불교학자가 아닙니다.

 신라가 낳은 불교학자로 의상이 있지만

 원효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의상은 신라안에서의 위대한 불교인이지만

 원효는 세계속의 위대한 불교인입니다."

                                                        - 카마타 시게오(동경대 명예교수)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까지

고승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송고승전>.

 

이곳엔 원효의 이야기가

별도의 이야기로 수록되어 있다.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 - <송고승전> 중

 

'문필을 종횡무진으로 휘둘렀고

 삼학에 널리 능통하여

 능히 만 명을 대적할만한 사람이었다.

 도리에 정통하여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다른 전기들이 그 사람의 문제점도 지적하는 것에 반해

원효의 전기는 찬양 일변도다.

 

"대개 우리나라 고승들이 유학을 가셨어도

 별도의 전기로 중국고승전에 수록된 예가 많지 않습니다.

 

 유학을 했던 대부분의 구법승들은

 그분들을 지도했던 중국의 은사스님들, 스승들의 전기속에

 일부 두세줄로 간단히 소개가 될 정도인데요,

 

 원효스님은

 실제로 중국에 유학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

 장문의 별도의 전기를 마련해놨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인들이 원효의 존재, 

 원효의 교학에 대해, 

 대단하게 평가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 불교학과)

 

"원효는 신라에 국한된 불교학자가 아닙니다.

 신라가 낳은 불교학자로 의상이 있지만

 원효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의상은 신라안에서의 위대한 불교인이지만

 원효는 세계속의 위대한 불교인입니다."

                                                        - 카마타 시게오(동경대 명예교수)

 

원효는 생전에 많은 책을 지은

저술가이자 학자였다.

 

그가 지은 책은

100여 종 240여 권에 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손오공의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스님

실제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져다가 번역 작업을 한 승려다.

 

그런데 그가 평생 지은 책이 50여 종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이 원효의 저술 작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해동소>라고도 불리는

그 유명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대승불교에 관한 책 중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그런 책이다.

 

또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그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범어로 번역이 되어서

불교의 원산지라고 하는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원효의 사상을 모르거나 책을 읽지 않으면 

크게 부끄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3. 출가전 행적,

             경산에서 태어난 신라 6두품 출신 원효.

 

       "서쪽계곡의 사미

       동쪽 봉우리 상덕께서 계신 높은 바위 앞에

       머리 조아려 예를 올립니다.

 

       작은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며

       미미한 물방울을 용연(태화강)에 보탭니다."

                                                                - 삼국유사, '낭지승운'조

 

 

이렇게 원효는 질과 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저술가이자

동아시아 사상계에 최고봉이었으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던가,

요석공주와의 사랑 같은 단편적인 내용인데,

그것은 원효의 전기가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까닭이다.

 

그동안 우리가 원효를 이해하는데는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이 두 권의 책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원효 부분이나 <송고승전>은

본격적인 원효의 전기라고 볼 수는 없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행자,

일종의 위인전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역사속에서 살아숨쉬는

한 인간으로서의 원효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이런 한계는 있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료를 중심으로

또 이 땅에 남아있는 원효의 행적을 찾아가서

원효의 삶을 추적해보도록 하자.

 

출가를 하기전 원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성은 설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설씨 대종회.

실제 경주(순창) 설씨 족보에는 원효에 이름이 나타난다.

 

"16세손이 잉피공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원효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되시지요.

 또 아버지께서는 내마 담날로 족보명 이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원효할아버지는 신라 6부 촌장의 18세손입니다.

 족보명은 설사(薛思)로 되어있고

 초명은 '원효'라고 되어있습니다."

                                                                           - 대종회 총무간사, 설명환

 

17세기 설씨 집안에 내려졌던 효종의 교서.

여기서도 신라 6부장 설호진의 18세손 설사가 원효임이 확인된다.

 

"'설사'가 출가해 원효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효가 태어난 곳은 어디일까?

 

경북 경산면 자인면.

예전엔 밤나무가 우거졌다는 곡산 일대.

이곳이 원효의 고향으로 추정된다.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에 있는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삼국유사와 지리적인 설명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마을엔 원효가 태어난 곳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원효성사탄생지(元曉聖師誕生地)'

 

마을 가운데 있는 제석사.

원효는 그 경내 밤나무 아래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저기 나무 두 그루 있죠.

 원래 저 사이 좁은 오솔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오솔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효스님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해산하러 친정집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산기가 있어서 아버님의 겉옷을 나무위에 걸고 해산하셨다고 합니다."

                                                                                       - 제석사 성인스님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제석사

조선 인조 지은 것으로, 

 

당시 그 일대에 유일한 절터에다가 

현재의 제석사를 옮겨온 것인데,

 

그때 이 터에선 불상의 좌대를 비롯해 오래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곳이 예전에 유명한 사찰 사라사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제석사로 옮겨올 때

 물이 부족해서 절을 옮겨왔다고 하는데요,

 절을 옮겨올 때 아무데나 옮겨오진 않았을 거예요.

 

 밤골 일대에서 유서 깊은 터를 잡았을텐데,

 유서 깊다고 하는 것은 절이 있었지만

 현재는 절이 없어진 터로 옮겨왔다고 봤을 때,

 

 현재 제석사터가   

 옛날 원효스님이 출생하셨다고 하는 사라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 이봉춘 교수(동국대 불교학부)

 

경산에서 태어난

6두품 출신의 원효.

 

그는 출가후

낭지, 보덕 등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행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그때 머물렀던 곳 중 하나가 영취산 일대.

지금의 반고사터가 당시 원효가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말하기를

 낭지스님이 계신 영축산에서 서북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방향이 이곳 맞습니다.

 그리고 신라 서라벌과 울산을 연결하는 통로가 이 앞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 이상도(울산향토사 연구소장)

 

반고사지 출토 유물 - 부산대박물관 소재

 

원효는 반고사에 머물며

당대 고승 낭지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두 권의 책을 짓는다.

 

당시 원효가 지어

낭지에게 바친 시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서쪽계곡의 사미

 동쪽 봉우리 상덕께서 계신 높은 바위 앞에

 머리 조아려 예를 올립니다.

 

 작은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며

 미미한 물방울을 용연(태화강)에 보탭니다."

                                                                - 삼국유사, '낭지승운'조

 

자신을 사미로 낮추고

자신의 책을 미미한 물방울이라고 표현한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수학할 당시 원효는 매우 겸손하게 배우고 수행에 정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 원효에 대한 행적은

설화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몇 조각만 발견된 '서당화상비' 일부다.

 

"<삼국유사>는 13세기에 기록되었고

 <송고승전>만해도 10세기 와서 기록되었죠.

 

 그에 비해 이 '서당화상비'는 9세기에 기록된 금석문이니까

 상당히 역사적인 신빙성을 높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이 비가 알려주는 중요한 사실은

원효가 이른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수공 2년(686년) 3월에 돌아가시다

 춘추가 70이었다."

 

그리고 '고선대사'라고 불릴 정도로

고선사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고선사, 고선대사(高仙大師)'

 

그렇다면 고선사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그러나 고선사를 찾을 수 없었다.

70년대 중반 경북 경주시 덕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버린 것이다.

겨우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고선사.

 

'옛 고선사 전경'

'서당화상비'

 

고선사 주변에서 일부가 발견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서당화상비'.

 

그러나 이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1,3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원효의 자취는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다.

 

 

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정말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을까?

 

                                     "마음이 생기니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지금 제 뒤에 보이는 게 모두 원효의 영정들입니다.

 이것은 광주 원효사에 있는 영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남 양산에 적반암에 있는 영정입니다.

 

 그리고 이쪽에 있는 이 영정은 경주 분황사에 있는 영정입니다.

 

 분명히 같은 인물을 그린 영정들인데

 서로간의 그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이것은 원효의 행적과 풍모를 알 수 있는

 현장과 기록이 부족하다는 사실의 반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원효의 행적을 말해주는

 많은 설화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 원효에 대해 좀더 알 수 있는 부부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설화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그림에 표현된 구도설화,

즉,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관한 부분인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원효는 정말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중국책에 주로 실려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첫번째 육로를 통한 시도가 실패하자

십 년뒤 해로를 통한 유학길을 나선다.

원효는 당성을 향한다.

 

경주 -> 안동 -> 충추 - > 수원-> 당성

 

옛날 당성이었다고 하는

경기도 화성군 지화리 일대.

 

지금 이곳의 풍경은 여느 농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예전엔 달랐다.

 

 "옛날엔 여기가 바다였죠.

  제방이 쌓이면서 막혔죠.

  그전에는 어민들이 농사는 부업으로 하구요

  바다일을 전업으로 했거든요."

                                                                 - 김창식, 67세 농부

 

지금은 넓은 벌판으로 보이는 이곳이 예전엔 물길이었다.

이곳의 물길은 서해안으로 이어져 중국에 닿고

현재 지명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지화리 들어오는 입구가 남경도죠,

 중국 남경 가는 남경도죠.

 여기서 배를 타고 오갔죠."

                                                     - 김창식, 67세 농부

 

<대동여지도>

조선 시대 지화리의 지명은 화양지(花陽地).

그때까지도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출발지였다.

 

당성에서 출발하면 물길은 서해로 이어지고

중국 산둥반도 등주에까지 닿았다.

 

당성 -> 대부도 -> 백령도 -> 산둥반도 등주 -> 당나라 수도 장안

 

"6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중국 문물을 배우려고 하는 그런 흐름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 전에는 고구려백제를 통해서

 중국의 문물을 배우고 이해하는 단계였습니다.

 

 6세기 진흥왕이 

 당항성(한강)을 차지하면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열리니까,

 

 신라 사람들이

 직접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문물을 배우겠다는 풍조가 많이 일어나서,

 

 원광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서해안 항로를 이용해 중국으로 향합니다."

                                                               - 김기흥 교수(건국대 사학과) 

 

당성으로 향하던 원효와 의상은

도중에 비를 만난다.

 

게다가 날까지 저물자

주변 동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무덤이었다고 전한다.

 

과연 무덤을 동굴로 알고 들어가 자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방이동 고분군(서울 송파구)

 

당시 당성 일대 무덤 양식은

횡렬식 석실 고분이었다.

 

횡혈식 석실 고분은

2인 이상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긴 널길이 있는 부부 또는 가족 합장묘였다.

 

무덤 내부를 방처럼 꾸미고

입구부터 긴 통로를 따로 만들어두었다.

 

무덤의 겉모습은 봉분 형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축대가 무너지기도 하고

봉분 위에 풀이 자라기도 했다.

 

"다음 부인, 다음 남편을 모시기 위해서

 앞에 연도(무덤 통로)를 폐쇄시키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게 되면 위에는 흙으로 덮여있고

 안에는 석실이 있고 

 입구에는 널길의 문이 아직 열려져 있으니

 그건 완전히 토굴이죠." 

                                              - 최몽룡 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그렇다면 해골물을 마셨다는 부분은 어떻게 된 걸까?

 

시간이 지나게 되면 관은 썩게 되고 유골은 노출된다.

유골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몸체가 유탈이 되고

 몸체가 분리가 되면서 머리나 팔, 다리가 따로따로 놉니다.

 어떤 경우 동물들이 들어가 놀게 되면

 머리가 떨어져 나가 밖에서 뒹굴게도 됩니다."

                                                                   - 최몽룡 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게다가 무덤의 벽과 천장은 로 만들어져 있다.

때문에 외부와의 온도 차이로 습기가 차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빗물이 새기도 한다.

그래서 무덤 내부에 배수로까지 따로 만들어뒀다.

 

그렇다며 원효는 이 무덤에서 정말 해골물을 마신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은 책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임간록(林間錄)> - 12세기 혜홍 지음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갈증이 심해 무덤 속에 고여 있는 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새벽에 보니 그것은 해골물이었다."

 

<송고승전>

 

"하룻밤을 더 그 무덤 속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어도 마음이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하매 근심이 많구나."

 

<송고승전>에는 해골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룻밤을 잘 때는 토굴인 줄 알고 잘 잤는데

다음날 무덤인 줄 알고 나니 마음이 동요되어 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두 기록의 차이는 매우 크다.

두 기록의 공통점은 무덤을 토굴로 알고 하룻밤을 잤다는 것.

 

그렇다면 해골물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임간록>을 제외한

 <송고승전>이나 <삼국유사> 원효 전기,

 서당화상비, 또 의상대까지 추가한다 하더라도,

 

 1차 자료에 보면

 해골물 마시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아마 <임간록> 편집자가

 현실적인 인간들을 이해시키는 차원에서

 때마침 무덤속에 있는

 해골을 끌어다가 각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 고영섭 박사(한림대 철학과)

 

그러나 해골물 이야기의 핵심은

원효의 깨달음 그 자체에 있다.

 

"마음이 생기니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무덤속 하룻밤 계기로 마음의 이치를 체득했던 것이다.

 

"물은 똑같은 물이고

 바가지는 똑같은 바가지인데,

 

 어제는 감로수였는데

 오늘은 더럽다고 토했다는 것은,

 

 더럽거나 깨끗함이

 물이나 바가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구나,

 

 그러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이

 바가지를 금으로 하면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더럽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분별이 그 자체 존재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인식속에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자각을 하게 된 거죠."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는데

굳이 당나라까지 가서 구할 일이 있겠는가,

원효는 단호히 발걸음을 돌린다.

 

십 년에 걸쳐

두 차례나 시도한 당나라 유학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렇게 원효는 신라로 되돌아오게 된다.

 

 

5. 파계승 원효.

             

    "거사와 함께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고

     사당에서 거문고를 뜯고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며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 <송고승전>

 

그 뒤 원효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경주 분황사에 머문다

 

당시 많은 불경이 수집되어 있었던 이곳에서

집필에 몰두한다.

 

그는 우선 여러 경전의 핵심을

요약정리한다(종요).

 

깨달음에 도달한 그가 정리한 책들은

쉽고도 명쾌했다.

 

원효의 책들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7세기 동아시아 불교는

발전을 거듭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자은사를 중심으로

커다란 사상 논쟁에 빠져있었다.

 

대자은사 - 당나라 최대의 사찰

 

논쟁에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손오공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현장이었다.

 

인도에서 불경을 수집해 온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론을 전개한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계 전체가 사상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삼장법사 서역노정기

 

"현장은 새롭고 정교한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불교의 정신, 

 불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적에 합당한 지에 대해서는

 모두들 큰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당시의 불교인들은 모두 그 주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바로 그 과제에 대해 가장 먼저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원효 대사였습니다."

                                                     - 기무라 센쇼 교수(오오타니 대학)

 

이때 원효가 제시한 것이 화쟁 사상.

 

<십문화쟁론(十門 和諍論)>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 '한마음(일심)'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서울에 가는 길을 누가 물었을 때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그러고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라고 그러고

 수원 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라고 그런다.

 그 하나하나를 가지고 만든 것이 종파인데,

 서울을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된다, 서쪽으로 가야 된다, 북쪽으로 가야 된다

 이렇게 마치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처럼 논쟁을 했단 말이지요.

 

 그런데 원효대사는 확연하게 깨우친 눈으로 보니까

 그것은 다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방편에 불과한거다,

 그러니까 열가지 방편을 가지고 다투는 데 

 이것은 다툴 일이 없는 거다,

 

 그래서 <십문화쟁론>을 쓰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 사상이고

 이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그러나 한참 명성을 얻고 있던 원효는

어느날 갑자기 붓을 던진다.

 

화엄 사상의 

'진정한 보살행'에 관한 부분에서였다.

 

그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사와 함께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고

 사당에서 거문고를 뜯고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며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 <송고승전>

 

당시의 승려로서는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정통적인 계율에서 보면 중이 세속적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통적인 계율에서 보면 춤추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노래 부르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 법륜 스님

 

원효의 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요석궁터

 

요석공주와의 사랑으로

설총을 낳은 후

승복마저 벗어던진다.

 

환속한 거사로서

아무런 규율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원효는 자기의 전 생애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모습으로,

 또 한 번 초월하고, 또 한 번 초월하는 모습으로 삽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그러나 그 댓가로 원효는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백 명의 승려를 선발해 행하는 호국불교 의식인 백고좌법회.

원효도 이 법회에 추천을 받는다.

 

그러나 원효의 파계를 문제 삼는 교단 승려들의 반대로

끝내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교단의 계율은 엄격했다.

계율을 어기면 교단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교단이 누리는 많은 특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6. 부처의 가르침은 평등! 

                         고통 받는 민중속으로!~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면 귀족 출신으로 당시 이미 많은 명망을 누렸던 원효는

왜 이 많은 것을 버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절실했던 것일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

 

처음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된 만큼

불교는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아갔다.

 

원효가 활동하던 7세기 중엽엔

소위 '불국토설'과 '진종설'이 유행했다.

 

불국토설 : 신라는 현재 부처와 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땅이라는 설

 

진종설 : 신라 왕실이 석가의 종족이라는 설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신성시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고

승려들은 왕실과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선덕여왕 당시 국통이었던 자장이었다.

 

진골 출신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온 그는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현실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황룡사 : 총면적 2만 여평의 대사찰, 왕궁 가까이 위치.

 

왕궁 주위에는 거대한 사찰들이 지어졌고

사찰엔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대부분 중국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왕궁 근처의 사찰에 머물며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법회에 주력했다.

 

 "심지어 북한학계에서는

  통치 계급의 일원으로

  승려들을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혜택 받은 신분 계층으로

  고대, 중세 사회 승려들은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

 

  그것은 불교가 발전하는 중요한 원동력도 되었지만,

 

  또 그 이면에서 보면 

  민중들과 괴리된 상태로 불교가 전개되었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 불교학과)

 

반면 일반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충북 보은 - 삼년산성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간의 전쟁은 국운을 건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계속 되는 전쟁으로 민중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었고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갔다.

그들의 삶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 삼국간 전쟁 횟수

 

   5세기 - 60회

   6세기 - 50회

   7세기 - 150회

 

"대부분의 남자 장정들은 군역에 동원되고

 군대 가지 않은 사람들도 수시로 부역에 동원되었지요.

 농사 지을 사람이 마땅찮은 상황이 전개되죠.

 심지어 부녀자, 노인들까지도 수레를 끈다든지 돌을 나르는 이런 기사가 나오고,

 어린 아이가 농사를 짓는다고 나오기도 합니다."

                                                                       - 김기홍 교수(건국대 사학과)

 

이 무렵 저자거리를 돌아다녔다는 한 기이한 승려의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7세기 신라 승려, 대안 스님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안(大安), 대안(大安)'하고 다녔다는 그 스님,

 그 스님이 '크게 평화로워라!~' 이렇게 외치고 다닌 그 한마디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 사회가 오랜 전시 상황속에서

 불안해지고 어렵고, 인간 소외 이런 것들을 겪었다는 거죠." 

                                                                   - 김기홍 교수

 

이런 시대 배경속에

서서히 '민중 불교'가 싹이 트고 있었다.

 

민중 불교 전파자들은

저자거리를 떠돌거나

당시 수도이던 경주를 떠나 지방에 절을 지었다.

 

포항시 오천읍 오어사(吾魚寺)

 

오어사엔

그 중에 한 명인 혜공(일명 부궤화상)이 살았다고 한다.

 

당시로선 드물게 평민 출신으로 승려가 된 혜공은

기이한 행동을 하고 다니며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혜공 스님은 70여 분의 제자들을 데리고 이 절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평상시에 삼태기를 뒤집어쓰고 술에 취해 춤을 추면서 다니셨고,

 그 당시에 계율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일반 서민들의 가슴속 애환을 함께 하신 그런 스님이라 볼 수 있습니다."

                                                                                - 학나 스님(오어사 주지)

 

원효는

이런 승려들과 뜻을 같이 했다.

 

이 절에는

원효의 것으로 전해오는

삿갓과 숟가락이 소중하게 보관되어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는 부처의 가르침과

귀족 위주의 신라 불교 사이에서

원효는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

 당시 최하위 계층 천민인 수드라에게 출가를 허락하신,

 당시로 봐서는 파격적일 뿐아니라

 혁명적인 부분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원효는 그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고,

 그와 같은 불교가 오늘날 왜 신라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을까,

 이 부분을 상당히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 불교학과)

 

치열한 고민과 방황끝에

그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문자를 알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열 번만 외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설파해 구원의 희망을 준다.

(정토 신앙, 아미타 신앙).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일깨운다.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외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원효의 무애행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계율을 어기고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 (유마거사)가 술을 마신 것은

 자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사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유마거사가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불교의 공(空)사상을 몸소 실천한 분이 유마거사인데

 원효대사도 그의 생활을 보면

 유마거사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 기무라 센쇼 교수(오오타니 대학)

 

"계율이라는 것은 사다리에 불과합니다.

 어느 곳을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말입니다.

 그 당시 신라 사회 구조가 원효가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봐집니다.

 원효 같은 과감한 사람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죠.

 

 더 큰 것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계율도 버릴 줄 아는 그런 원효스님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 종수 스님(분황사 주지)

 

원효의 이러한 노력은

훗날 신라의 불교가 민중들에게 퍼져 황금기를 맞는 밑거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조차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원효의 교화 덕택이다."

                                        - 삼국유사 원효 불기 조

 

'새벽'을 뜻하는 그의 이름 '원효'처럼

어둠에 잠겨있는 민중들에게

불교의 첫새벽을 열어준 것이다.

 

 

7. 소성거사 원효에 대한 진정한 인식

 

 

"머리를 깍으면 원효대사

 머리에 두건을 쓰면 소성거사로다.

 온갖 몸으로 현신(現身)에도 알아보기 쉬우니

 비록 두 모습 가졌으나 한바탕 연극인 것을"

                                                               - 고려 시대 이규보의 시, '소성거사찬'

 

'소성거사'란

원효가 환속한 후에 스스로를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규보가 시를 지을 당시 소성거사의 상,

지금으로 말하면 동상 같은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동상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승려의 모습 같은 것이 아니라,

머리를 기르고 있는 거사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사회로부터

거사로서의 원효의 삶을 인정받고

그런 동상까지 조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효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무애행으로 교단에서 축출되었던 원효.

그러나 그는 만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 계기는 <금강삼매경론>의 저술이었다.

 

이 경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경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효만이

단 3일만에

그 일을 해냈다고 한다.

 

해인사 장경각.

<금강삼매경론 경판 - 원효 술(述)>

 

"금강삼매경의 주석이 너무나 뛰어나서

 금강삼매경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론'이라는 이름은

 원래 보살이 쓴 것이 아니면 붙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두들 원효는

 보살이 환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마타 시게오(동경대 명예교수)

 

원효는

백고좌법회가 열리는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날 백고좌법회에 참석하지 못한 일을 빗대 일관한다.

교학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원효의 권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날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내 비록 참여하지 못했으나,

 

 오늘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일은

 나 밖에 할 수 없구나."

                                                           - <송고승전>

 

그러나 원효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 전환은

일본으로부터 왔다.

 

혜공왕 19년인 799년.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은 일본에 사신으로 간다.

이때 그는 오미노 미후네를 만나게 된다.

 

일본 나라현. 히메 신사(오미노 미후네 사당)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한 오미노 미후네는

한문학의 대가로 일본의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이다

 

"오미노 미후네는 동대사의 승려였는데

 화엄교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는 홍문 천황의 증손자였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승려였던 그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환속해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 시게마쓰 쇼텐(일본 보림사 주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동한 오미노 미후네는

설중업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 시까지 지어준다.

 

"일찌기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나

 그를 만나지 못해 한으로 여겼다.

 이제 그의 후손을 보니 기꺼이 시를 써서 준다."

                                                                     - <삼국사기>

 

이 사건은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원효를 기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서당화상비.

 

동국대 박물관, 서당화상비 조각,

높이 1.7미터, 폭 1미터, 2천 여자를 새김.

 

비석은 원효가 생존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고선사에 세워졌다.

비석이 건립된 것은 원효가 죽은 지 120년뒤.

 

이 비가 세워짐으로써 원효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첫번째는 원효를 세우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원효소상을 절에 모시는 일이었는데,

 

 그 소상이 거사상이었다는 것이

 이 비편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되는 바이고,

 

 더구나 여기에는 훗날 왕이 되는

 김언승(신라 41대 헌덕왕)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 사회 전체에서

 원효를 새롭게 보고 재평가하는 노력이 이루어졌음을

 이 비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고려 시대에 더욱 높아졌다.

 

대각국사 의천

원효를 제2의 부처에 비쳐,

'마명.용수'에 비겨 추앙하고,

화쟁국사비를 세운다.

 

그러나 이 비석 역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경주 분황사 화쟁국사 비좌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원효의 전기도, 기념비도 다 사라졌다.

 

그러나 원효가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잊어진 것은 아니었다.

 

광주광역시 무등산 원효사

 

전국에 무수한 암자와 사찰에는

원효와 관련된 설화들이 무수하게 전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다수는 허황되고 과장되기도 한 설화들.

 

그러나 그것은 민중속에 살아있는 원효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1,300년전 이 땅에 살다간 원효.

 

 원효는 저술을 위해 머문 분황사를 제외하고

 평생 이름 있는 사찰에는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또 교단부의 핵심에도 있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거창하게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원효가 얻은 것은 민중의 마음이었습니다.

 당대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책을 지었던 원효.

 

 그러나 원효는

 자신의 지식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그친 게 아니라

 백성들의 삶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1,300년을 건너뛰어 이 시대에도 원효가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민중들편에 서서 고민을 하던

 혁명적인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의 모습은 지금껏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무지와 편견속에 묻혀 있던 원효의 본모습을 찾아내

 설화속에 고승이 아니라 역사속에 인물로 살려낼 때,

 

 우리는 비로소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평등을 부르짖고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진정한 화합의 길을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원효의 참모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역사스페셜을 보고(늘 평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