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왕 재위기간.
1, 溫祚王(온조왕) 재위 46년, BC18~ AD28년
2, 多婁王(다루왕) 재위 50년, 28~ 77년
3,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77~ 128년
4, 蓋婁王(개루왕) 재위 39년, 128~ 166년
5, 肖古王(초고왕) 재위 49년, 166~ 214년
6, 仇首王(구수왕) 재위 21년, 214~ 234년
7, 沙泮王, 沙沸王(사반왕) 234년
8, 古爾王(고이왕) 재위 53년, 234~ 286년
---------------------------------------------------
백제왕기 기년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20년이 적음)
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10년이 적음)
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30년이 적음)
------------------------------------------------------
*즉위연도는 두 史書 사이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습니다.
백제왕기 구지왕 188년과 백제본기 개루왕 128년과는 60년 차이.
백제왕기 초고왕 226년과 백제본기 초고왕 166년과는 60년 차이.
백제왕기 구수왕 254년과 백제본기 구수왕 214년과는 40년 차이.
백제왕기 고이왕 264년과 백제본기 고이왕 234년과는 30년 차이.
-----------------------------------------------------------------
*백제왕기 구지왕 188년 - 백제본기 개루왕 128년 = 60년의 편차가 발생합니다.
초고왕도 마찬가지로 60년의 편차가 발생하고 있죠.
60년 차이가 나므로.. 백제본기 기루왕의 즉위년이 77년이니까, 77년 + 60년 = 137년이 기준점이 됩니다.
28년도에 다시 60년을 더하면 28년 + 60년= 88년이 기준점.
그런데, 다루왕이 즉위년 28년에 60년을 더하는 것은 작위적인 생각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최소 3명의 왕이 누락된 걸 알 수 있습니다.
------------------------------------------------------------------
추정 백제왕 기년.
1, 召西奴(소서노) 재위 13년 BC18년- BC6년
2, 溫祚王(온조왕) 재위 33년 BC6년- AD28년
3, 多婁王(다루왕) 재위 15년 28년- 42년 馬婁
4, A왕 재위 47년 42년- 88년
5, B왕 재위 41년 88년- 128년
6, C왕 재위 10년 128년 - 137년
7,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137년- 188년 已婁
8, 蓋婁王(개루왕) 재위 1년 188년
9,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10,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簡位居 牛加= 고시?
11,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麻余
12,沙泮王(사반왕) 264년
13,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依慮 (의려)가 자살. (모용외)의 침입.
-----------------------------------------------------------------
*기루왕과 개루왕을 밑에다 붙여 놓은 것은 구지왕의 머리 기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백제왕기 仇知王(구지왕)
諱伯古 己婁王第七子 而盖婁王之異母弟也 寬仁有聖德 國人敬慕之曰“仇臺王復來矣” 時盖婁王同母弟皆持寵 擅威不得人心 盖婁王深疾之 臨崩謂其后沙氏曰 “吾弟雖多唯?伯古最賢 吾死而汝子皆幼 若諸弟得志 必不利於汝子 未若迎伯古以爲汝繼夫” 沙氏乃以深夜密納宮中 是夜雪深丈餘 諸王弟皆不能知
휘는 伯古(백고), 己婁王(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盖婁王(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敬慕(경모)하며 말하길 "仇臺王(구대왕)이 다시 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盖婁王(개루왕)의 同母(동모) 동생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盖婁王(개루왕)이 이를 심히 걱정하여, 죽음에 임하여 그의 后(후) 沙氏(사씨)에게 말하기를,“내 아우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伯古(백고)가 제일 현명하다. 내가 죽고 나면 너의 아들은 모두 어린데다, 만약 여러 아우들이 뜻을 이루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불리할터이니, 伯古(백고)를 맞아 들여 너의 繼夫(새남편)로 삼음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후 沙氏(사씨)가 이내 깊은 밤에 몰래 伯古(백고)를 궁안으로 맞아드렸다. 이날밤 눈이 수 장넘게 내려서, 여러 왕의 동생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
여기서 보면, 仇知王은 "己婁王(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盖婁王(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盖婁王(개루왕)의 동생들이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테고....
또한, "盖婁王(개루왕)이 이를 심히 걱정하여, 죽음에 임하여"
盖婁王(개루왕)은 188년에 죽었다는 말이고.. 구지왕 원년이 188년 12월달부터 시작하니까..
11월달에 盖婁王(개루왕)이 죽었으리라 짐작합니다.
--------------------------------------------------------------------------------------------
구지왕은 226년에 72살로 죽었다고 했으므로, 226-72= 154년, 즉, 155년에 구지왕은 태어남.
구지왕은 7째 아들입니다. 순차적으로 2년에 한 명씩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하면, 구지왕의 형들인 6명의 왕자가 태어난 기간은 2 * 6= 12년이 걸리는 셈입니다.
155- 12= 143년에 기루왕의 장남이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 장남을 출산하는 나이가 16세 정도로 추산한다면, 143- 15=128년에 기루왕이 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128년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개루왕이 죽었다고 하던 바로 그 해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겠지요.)
기루왕은 137년에 즉위했으니까, 기루왕은 10살 정도에 즉위했다고 추정합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왕 재위기간.
1, 溫祚王(온조왕) 재위 46년, BC18~ AD28년
2, 多婁王(다루왕) 재위 50년, 28~ 77년
3,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77~ 128년
4, 蓋婁王(개루왕) 재위 39년, 128~ 166년
5, 肖古王(초고왕) 재위 49년, 166~ 214년
6, 仇首王(구수왕) 재위 21년, 214~ 234년
7, 沙泮王, 沙沸王(사반왕) 234년
8, 古爾王(고이왕) 재위 53년, 234~ 286년
------------------------------------
3,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77~ 128년 vs 7,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137년- 188년 已婁(이루)
백제본기와는 60년이 주저 앉았습니다.
백제본기 己婁王(기루왕)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立爲太子 至五十年王薨 繼位
기루왕(己婁王)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루왕이 재위 제6년에 태자로 삼았고, 50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기루왕은 C왕의 아들인데, 계산상으로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것 같으니까.. 어떤 정변에 의해,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등극했을 가능성이 높죠.
*윗 기사의 재위 제6년에 태자를 삼았다는 기사에 신뢰성을 둔다면, C왕은 재위를 오래 못 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C왕의 재위기간을 줄여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기루왕의 개별 기사의 절대 연대를 알아 냅니다.
4년(AD191년) 신미 4월 漢山(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4년(131년) 여름 4월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蓋婁王(개루왕) 4년조와 동일.
*60년 편차.
백제왕기 仇知王(구지왕) 5년.
五年 壬申 二月 築北漢山 以備高句麗 八月 新羅王逸聖立 遣使來貢
5년(AD192년), 임신 2월, 北漢山城(북한산성)을 쌓아서,고구려를 대비하였다 . 8월, 신라왕 逸聖(일성)이 즉위하였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쳐 왔다.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132년) 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蓋婁王(개루왕) 5년조와 동일.
諱伯古 己婁王第七子 而盖婁王之異母弟也 寬仁有聖德 國人敬慕之曰 “仇臺王復來矣” 時盖婁王同母弟皆持寵 擅威不得人心 盖婁王深疾之 臨崩謂其后沙氏曰 “吾弟雖多 唯伯古最賢 吾死而汝子皆幼 若諸弟得志 必不利於汝子 未若迎伯古以爲汝繼夫” 沙氏乃以深夜密納宮中 是夜雪深丈餘 諸王弟皆不能知
휘는 伯古(백고), 己婁王(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盖婁王(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敬慕(경모)하며 말하길 "仇臺王(구대왕)이 다시 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盖婁王(개루왕)의 同母(동모) 동생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盖婁王(개루왕)이 이를 심히 걱정하여, 죽음에 임하여 그의 后(후) 沙氏(사씨)에게 말하기를,“내 동생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伯古(백고)가 제일 현명하다. 내가 죽으면 너의 아들은 모두 어린데다, 만약 여러 동생들이 뜻을 이루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불리할터이니, 伯古(백고)를 맞아 들여 너의 繼夫(새남편)로 삼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沙氏(사씨)가 이내 깊은 밤에 몰래 伯古(백고)를 궁안으로 맞아드렸다. 이날 밤 눈이 수 장넘게 내려서, 여러 왕의 동생들 모두 알 수 없었다.
*155년에 구지왕은 태어남.
*구지왕 39년= AD226년, 72살로 사망.
元年 戊辰 十二月 以沙氏爲后 立母屹氏爲太后 王潛邸時納舍人賈杞妻苩氏 生子仁及女苩花 甚有寵 至是命復歸賈杞 命杞子其子女.
1년(AD188년) 무진 12월 沙氏(사씨)를 왕후로 삼고, 어머니 屹氏(흘씨)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潛邸(잠저)했을 때 舍人(사인) 賈杞(가기)의 처 苩氏(백씨)를 맞아들였는데, 백씨가 아들 苩仁(백인)과 딸 苩花(백화)를 낳았다. 총애가 깊어져 이때에 이르러 賈杞(가기)에게 복귀를 명하였고, 賈杞(가기)에게 명하여 그녀의 자녀를 자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구지왕의 원년은 AD188년.
--------------------------------------------------------------------------------------------------------------
백제본기 기루왕 49년, AD125년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49년(125)에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글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祗摩紀(지마기) 14년, AD172년
十四年 正月 北路將軍飛報 末曷數十隊出獵我境 殺掠吏民 故捕其酋三人獻之 上命莫兮深入賊窟 掃蕩餘賊
14년(AD172년) 정월 북로장군(北路將軍)이 말갈 수십 대(隊)가 우리의 국경으로 사냥을 나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거나 노략질하였다고 비보(飛報, 아주 빨리 보고함)를 전했다. 그런 이유로 말갈추장 3인을 붙잡아 바쳤다. 왕이 막혜(莫兮)에게 적의 소굴로 깊숙이 들어가 남은 적을 소탕(掃蕩)하도록 명하였다.
(3월 기사 생략)
七月 末曷諸酋分途入寇 大嶺柵主漢己失守 賊大至泥河 人心洶洶 莫兮請救於扶余 扶余遣五將軍助之 賊聞風而退潰
7월 末曷(말갈)의 여러 추장들이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 大嶺柵主(대령책주) 漢己(한기)가 지키지 못하여, 賊(적)이 泥河(니하)에 크게 이르러, 인심이 흉흉하였다. 莫兮(막혜)가 부여에 구원을 청하여, 扶余(부여)는 5명의 장군을 보내어 도왔다. (말갈의) 賊(적)이 소문을 듣고 퇴각하여 흩어졌다.
*기루왕 49년 기사는 지마기 14년, AD172년의 일로서, 연대 편차는 172년- 125년= 47년 차이가 납니다.
앞서, 개루왕과 구지왕과의 연대편차는 60년이 났으나, 47년으로 편차가 줄어든 것을 눈치챌 수 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