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밀’(密=3), 고구려어의 미에(水), 고대 일본어의 미두

吾心竹--오심죽-- 2010. 2. 19. 12:11

zmfpamffls | 2009-07-20 19:12

일본서 역수입되는 백제·고구려어

일본서 역수입되는 백제·고구려어

이재운의 우리말 탄생과 진화 /

[난이도 수준-중2~고1]

13. 호(胡)자 표지 달고 사막을 건너온 중앙아시아어 ②

14. 일본으로 건너갔다 천년 만에 돌아온 우리말들

15. 남사당놀이에서 온 말

모든 언어가 대개 그러하듯이 우리말도 홀로 고고하게 발전해 오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단일민족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결코 사실일 수 없듯이 우리말만이 지상 최고의 언어요, 가장 과학적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따금 한글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이들 중에서는 우리말을 세종 이도가 만든 것처럼 종종 사실 관계를 오해하는데, 이도는 표기법만 만든 인물이고 우리말은 수천 년간 한겨레가 쓰면서 다듬은 것이다. 이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부모들이 쓰던 말이 곧 우리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완성된 말이요, 완전무결하다는 맹신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다듬고, 새 어휘를 만들거나 들여다 고쳐 써야 한다. 그러자면 이웃 나라들과 교류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여기에 민족주의가 끼어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나라가 교류하는 상대국이란 미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대표적인데, 중국은 사대주의라 하여 안 되고, 일본은 친일이라 하여 안 되고, 요즘은 미국마저 친미라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에는 여진어·몽골어·거란어 등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때는 오랑캐라고 깔봐서 못하고, 오늘날에는 교류가 없어 역시 무시되고 있다.

몇몇 연구를 보면 고대 한국어는 신라어·가야어·백제어·고구려어 네 가지인데, 학자들은 이 중에서 가야어-백제어-고구려어 차례로 일본에 전파됐다고 본다. 나라가 망할 때마다 그 유민들이 열도로 집단 이주하면서 일본인과 일본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또 한반도에 남은 한국어는 신라어뿐이어서 일본어 속으로 스며든 가야어·백제어·고구려어의 원형을 찾아내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런 중에도 천년이 지난 뒤 고구려어 몇 개가 돌아와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옛 우리말이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 요지라고 부르는 ‘양지’나 된장을 가리키는 ‘미소’가 그렇고, 또 백제어이자 고구려어인 ‘밀’(密=3), ‘우츠’(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이 멀쩡히 살아 있다가 돌아왔다. 고구려어의 미에(水), 나(國), 탄(谷)과 나머르(鉛)는 각각 고대 일본어의 미두, 나, 타니와 나마리라고 한다. 백제어의 고마(熊)와 키(城)는 고대 일본어의 쿠마와 키이며, 고대 한국어의 셤은 일본어 시마, 낟(鎌)은 나타, 밭은 파타, 바닿은 와타로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는 우리말 멍텅구리를 ‘봉구라’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회골(위구르), 꾸러기 등을 보면 ‘굴’이 얼굴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라는 실마리가 잡힌다.

일본어는 이제 친일이니 극일이니 하는 개념으로 볼 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동포들을 되찾아오던 마음으로, 일제에 징용되어 나가 살던 사할린 동포들을 모셔온 것처럼 정성 들여 하나하나 확인해 돌아오게 해야 한다. 천년이 더 지난 만큼 옛 모습이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말이니 찾아오기는 해야 한다. 이처럼 일제 때 압록강·두만강을 건넌 동포들을 따라 중국이나 러시아로 멀리 가버린 평안도·함경도의 조선 후기어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이와 함께 고구려어와 거의 비슷했을 여진어를 복원시켜야 할 간절한 소임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옛 조선의 백성이요, 고구려와 부여의 백성이었으니 여진어 속에 우리 고대어의 흔적이 적잖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말을 찾는 것은 우리 혼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2009/03/15 한겨레


한국말과 일본말 | 고대사 자료실
전체공개 2009.05.30 01:00

터어키어, 몽골어, 만주어 등을 포함하는 알타이 계통 언어들은, 아득한 옛날에 한 개의 공통 조어(祖語)로부터 분리되어 서로 다르게 변화를 해 온 친족 관계의 언어들이라고 믿어진다..

알타이 어족 사이에는 아주 두드러진 구조적 공통점이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을 들라면, 모음조화와 문법적 교착성(膠着性)이다.
즉, 한 단어 안의 모음이 동화현상을 보인다. 또, 모든 단어의 파생과 되틀림이 각기 단일기능을 가진 접미사에 의해 규칙적으로 이루어진다.

알타이 조어에서는 모든 문장이 동명사를 포함한 명사들로만 이루어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모음 교체나, 자음 교체가 문법적 기능을 가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보통 두 개의 동사가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알타이어족에서는 (관계대명사라는 것도 없고) 앞선 동사가 부동사형(예컨대, "먹으러"같이 러를 붙여서)을 취하며 뒤에 오는 동사와 연결이 된다.

알타이 계통 언어들 사이에 수사(數詞)의 일치가 매우 드문 편인데,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에는 일치하는 수사가 많다. 고구려어에서 3은 밀(密), 5는 웇(于次), 7은 나넌(難隱), 10은 턱(德)인데, 고대 일본어에서는 3이 미, 5가 이쓰, 7이 나나, 10이 퉈워이다. 고구려어의 미에(水), 나(國), 탄(谷)과 나머르(鉛)는 각각 고대 일본어의 미두 , 나, 타니, 와 나마리이다.

백재에어 고마(熊)와 키(城)는 고대 일본어의 쿠마와 키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휘적으로 또 음운론적으로 보면 거리가좀 있지만, 구문론적으로 또 형태론족으로 본다면 아주 밀접한 친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구문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 한국말과 현대 일본말의 문장구조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 밖의 일반적인 문법 형태도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고대 일본어에는 모음조화도 있었다.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사이도 이들보다 더 유사할 수가 없을 것이ㅏㄷ.

이기문은 고구려-백제어가 신라어는 물론이고 특히 일본어와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백제어와 일본어는 분리 연대는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어를 근간으로 형성된 중세국어가 진화한 것이라 한다. 즉, 중세와 현대의 한국어는 모두 신라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데, 신라계 한국어건, 부여-고구려-백제계의 일본어건 , 전반적인 문법체계는 세월이 흐르면서 제각기 나름대로 간소화는되었을 망정, 문장구조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변함없이 양쪽이 완벽하게 일치한 상태를 지속했다. 즉, 양쪽의 문장구조에 변화가 있었다면 아주 똑같은 방식의 변화만 있었다는 얘기다. 언어학적으로 보아 기적에 가까운 현상인 것 같다.

고대 일본어의 나가 1인칭 혹은 2인칭 대명사로 쓰였는데, 이것은 한국어의 나 혹은 너에 비교될 수 있다.
고대 일본어의 시마(島), 파타(田), 와타(海) 등은 각각 고대 한국어의 셤, 밭, 바닿등에 해다한다.

필자가 고대 한일관계를 연구하면 생긴 큰 의문점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한반도이 삼한(주로 가야)사람들이 건너가 야요이 논농사 시대를 전개하고, 또 4세가 후반에 한반도이 백제사람들이 야마토 왕국을 세우고 고분시대를 지배했다면, 어째서 현대의 한국말과 일본말의 어휘가 그렇게도 다를 수 있는가이었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장구조만 남고, 공통의 단어들은 대부분 그 형체와 사용법이 크게 변질되거나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째서 21세기에 와서도 양궁어 문장구조는 꼭 같은데 어휘만은 그렇게 다르게 된 것일까? 언제부터 양국간에 통역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필자는 추가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설을 제시한다.
우선 야요이시대를 생각해 보자. 야요잉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논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드링 사용하던 허휘가 당시 한반도에서 남아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와 모두 일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일본 열도의 종족 구성과 (종족간의 충돌과 혼혈을 수반하는)거주지 이동 측면을 살펴보더라도, 한반도에서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와 음운규칙은 당연히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와 음은 체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운이라는 것은 소리를 내고, 또 그 소리를 낼 때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즉, 언어의 외형을 구성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와 억양-울림 등을 배합하는 현상이다)

이제 고분시대를 생각해보자. 4세기말 이후,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왕국을 세우고, 일본어가 한국어의 문장구조를 포함한 전반적인 문법체계를 좀더 조직적으로 완전하게 수용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어휘들을 대량으로 빌려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법이라는 것은 아주 보수적이기 때문에 차용현상이 거의 없다)

국립 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 국어대사전에 실린 현대 한국어 단어는 30만 개나 된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사용 빈도 상위 1,000개의 단어를 아는 것만으로 한국어의 75%를 이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흥규,강범모, 2000)

추상적이 철학적인 내용의 대화가 드물고, 단순한 일상생활이 대화의 주내용이라면, 사람들은 그저 1천 개 미만의 기초 단어(특이 명사와 동명사)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문법 형태를 공유하는 어느 두 지역의 사람들이, 그 1천여 개 내외의 기초 단어 중 절반 정도만이라도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서로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 데 아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표정의 변화와 손짓 발짓으로 나머지 절반 정도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간으할 것이다.

4세기말, 백제사람들이 야마토 지역에 왔을 때,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제 땅 자체에서도, 부여-고구려 계통의 백제 지배층은 왕을 어라하라 불렀고, 토착 마한 피지배층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없다.

야마토 왕국 지배계급의 공식 언어는 고구려- 백제계 한국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 상당 기간 동안, 한반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일찌기 5세기 중엽 오아사즈마(允恭)때, 신라 조문 사절단이 야마토 땅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잘 몰라(未習風俗之言語) 곤욕을 당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신라사람들과도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상생활회화를 익히는 습언자(習言者)는 필요했을지 몰라도, 중국사람을 상대하듯이 통역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6세기말, 일본서기 비다스 12년(583)조에는, 좀 쌍스럽게 들리는 말을 놓고 韓語라는 표현이 나온다. 백제 왕국의 피지배층인 마한사람들이 사용한 방언일 수도 있다. 이 한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663년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 언제인가부터,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통역이 없이는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7세기말,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망한지 18년이 지난 681년에, 신라가 (야마토)말을 익힐 사람(習言者) 세명을 보낸다.

8세기 중엽. 속일본기에 의하면 , 740년에 신라로부터 말을 배우려는 사람(新羅學語)이 왔다. 760년에는 신라가 자기 나라에 야마토조정의 풍속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無知聖朝風俗言語者)" 학어 두 명을 보낸다 했다.
780년에는 신라가 상례에 따라 학어생을 보냈다(依常例 進學語生)
야마토 조정은, 761년에 미노와 무사시 두 지역에 명하여 각기 20명의 소년들을 뽑아 신라어를 배우게 했다(習新羅語). 말인즉,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9세기초. 일본후기에 의하면, 812년에 신라선 한 척이 대마도에 정박을 했고, 그 배에는 10여 명이타고 있었ㄴ느데, 말이 통하지 않아(言語不通) 무슨 사정인지 알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적선인 것 같아, 야마토 조정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신라어 통역을 뽑아 보냈다 한다. 815년에는 아예 대마도에 신라말 통역을 두었다(置新羅譯語)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들을 보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9세기 들어와서는 한반도 사람과 일본 열도 사람이 서로의 말을 못 알아듣게 된 것 같다. 드디어 통역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풍속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어가 불통인 것이다.




잉글랜드의 경우를 보자. 기원전 2세기경에 켈트 족이 몰려오고, 기원 전후로 로마제국의 침공을 받아 그 식민지가 되고, 5세기말에 앵글-색슨 족에게 점령을 당하고, 11세기에 노르만-프렌취에게 정복을 당하고, 스캔디내비안 바이킹들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약탈을 하고..

영어 단어들을 보면, 대충 스캔디내비안 계통, 독일어 계통, 프랑스어 계통, 이탤리안 라틴 계통 단어들이 뒤섞여 잇다. 오히려 고대 독일어 어휘에 그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어드의 수가 (상대적으로)별로 많지가 않다고 한다.

물론 크게 보면 이들 모두가 다 인도-유로피안 계통이 단어드이지만, 좀더 분류해본다면 북부 게르만 계통과 남부 로만스 계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라틴어가 프렌취,스패니쉬,포르투기스,이탤리안으로 나뉘면서 로만스 언어를 구성한다)

그런데 잉글리쉬의 문법체계의 본질은 아주 단순하게 변형된 고대 독일어 문법이다. 정복자의 노르만-프렌취가 공용어로 사용된 300여년간, 잉글리쉬는 무식한 앵글로-색슨농민들만 주로 사용을 했기 때문에, 그 복잡한 고대 독일어 문법체계가 아주 무식하게 단순화된 것 같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가 거의 똑같은데 비해 현대 독일어와 현대 앵글로-색슨 잉글리쉬의 문장구조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후 3세기까지 야요이 일본 열도에 정착한 한반도 변한(가야)사람들을 4세기말에 정복한 것이 바로 한반도의 백제사람들인 데 비해 5세기에 잉글랜드에 정착한 앵글로-색슨 게르만 족을 11세기에 정복한 것이 당시의 게르만 족이 아니라, 로만스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는 노르만-프렌취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정복자 윌리엄이 당시의 게르만이었다면, 현대 독일어와 현대 앵글로-색슨 영어의 문장구조가 똑같았을 것이다.

1066년에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들은, 1204년 존 왕 때 이르러, 자신들의 본거지인 노르망디를 파리의 필립왕에게 빼앗겼다. 1236년에 헨리왕이 프랑스 왕실 여인과 결혼하게 된 시기를 전후로, 새삼 프랑스어의 영향이 일시적으로 커졌으나, 결국은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되기도 전에 프랑스와의 적대 관계가 심화되었다.

중세프랑스어는 4개의 주요방언이 있었다. 즉, 중부의 파리-프렌취, 동부의 버건디-프렌취, 북동부의 피카아드-프렌취, 그리고노르만-프렌취 등이었다. 13세기경, 파리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가 강대해지자 중부의 파리-프렌취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한반도의 서라벌 말과 이탤리안 반도의 Latium 말이 지배적인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 비교핼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휘나 억양에서 영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노르만-프레렌취는 프랑스 땅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끄럽게 생각한 일부 노르만 귀족들은, 촌사람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파리에 보내 표준 프렌취를 배우게 했다.

노르망디의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후, 자신들의 운명을 잉글랜드와 함께ㅔ 할 수밖에 없게 된 노르만 정복자들은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영어가 1362년경에 공용어가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쵸서(1340?~1400)와 셰익스피어(1564~1616)등이 나타나서, 이미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영어의 품격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세기부터 11세기전반까지 사용되었던 영어를 쵸서이후, 혹은 셰익스피어 이후의 영어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캔디내비안 바이킹, 게르만, 프레누치, 이탤리안 라틴 등 다양한 문화의 풍부한 어휘가 단순화된 문법체계와 어울려 영문학의 황금시대를 가죠오곡, 급기야 21세기 전인류의 공통어로서의 역할을 논하게깢지 되었다.

고대 한국어는 4가지 주요 방언이 있었던 것 같다. 즉, 경북 지방의 신라 방언, 경남 지방의 가야방언, 북한 지방의 고구려 방언, 그리고 경기-충청-호남 지방의 백제방언이다. 하지만, 후자는 경기-충청의 초기 백제방언과 호남지방의 마한 방언으로 세분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7세기후반,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대 신라 방언이 현대 한국어의 근간이 되었다.

B.C 300년경부터 변한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가지고 온 어휘들 자체도 , 일본땅에서 야요이 600년간 논농사를 지으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상당수의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단어들이 차용되고, 음운규칙과 억양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배제사람들이 4세기 후반에 야마토 땅에 건너왔을 때,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그 어느 한 곳에도 없다. 그래도 야마토 왕국의 초기 단계인 5세기 중반경, 이미 신라사람들이 소위 풍속언어에 미숙하여 봉변을 당할 정도로 양쪽 어휘와 억양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백제 멸망으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9세기초, 특히 농민 출신의 사무라이들이 지배계급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10~11세기 무렵,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들은 이미 통역이 없이는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 가다. 그로부터 다시 1천여년이 경과한 21세기에 어떻게 될 것인가는 현재 우리가 보는 바 그대로이다.

어느 사회가 특정 시점에서, 주어진 어휘와 음운체계를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흐르고, 생활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음운체계와 어휘도 조적적으로 변화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애당초 사용하던 어휘들의 본래의 형체와 사용법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5세기 전후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해 본다면, 그 자체로도 엄청난 벼노하가 있었을 것이다. 아예 한자로 대체되어 사라져 버린 순수 한국말 어휘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일본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5세기 전후에 일본 열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해 본다면, 그 역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어 자료의 핵심이며, 남아 있는 신라 문학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향각는 삼국유사에 14개, 균여전ㅇ에 11개가 실려 있다. 향찰로 표기된 이 향가드은 한자를 이용해서 자기 말을 표기해 보려는 노력의 집대성인 것이다.

하지만 음절을 초성,중성, 종성으로 나누어야 제대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 그저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려 해도, 그 표기 방법이 아주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요즘 아무조 아주 자신있게 향가 내용을 현대 한국말로 번여겨하지 못하고 있다. 음절구조를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일본의 경우도,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시나 노래뿐만 아니라, 759년 이전의 장가, 단가를 모아 놓은 만요오슈우(만엽집)역시 , 아무도 자신 있게 번역하지 못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모두 똑같은 단어들을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지나면,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하물며 한쪽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아니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차용 어휘를 가지고 출발했다면, 더욱 큰 상이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완벽한 음운이론에 입각해서 1443년 한글이 창제된 반면, 일본은 비과학적으로 한자를 차용한 가나(假名)를 가지곡 계속해서 음절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표기했기 때문에, 시가이 흐르면서 (많은 경우에 그 어원을 쉽사리 추적하지 못할 정도로)어휘의 상이성이 두드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어나 일본어나, 일반적인 문법체계는 필연적으로 모두 나름대로의 상이한 역사적 발전 환경을 반영하면서 각자 독특한 간ㅅ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한국어와 일본어의 문장구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 상태를 2천여년 가까이 지속했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가 21세기라는 현재 시점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오히려 기적 같은 이야기다.

현대 영어와 현대 독일어의 문장구조는 상이한 점이 적지 않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가 게르만이 아니라 노르만-프렌취에 의해 정복된 데 반해, 야요이 일본 열도는 백제인들에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홍원탁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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