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思索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괴(槐)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吾心竹--오심죽-- 2009. 11. 26. 10:29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회화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이다.

 

 

 


생장은 다소 빠른 편이며 토질은 과습지만 별로 가리지 않고 자라며 적응성이 넓다. 수명이 길며 특히 배기가스, 먼지 같은 공해에 매우 강하며 건조에도 강하고 풍해에도 강하여 태풍에도 가지가 부러지든가 쓰러지는 일이 별로 없다. 또 충해가 적으며 내한성도 강하여 우리나라 전역에서 식재가 가능하다. 단점은 큰나무의 이식이 다소 곤란하다.

 

재배 및 번식

1) 적지

과습지만 아니면 별로 토질을 가리지는 않으나 비옥한 심층토를 가장 좋아한다. 치묘는 그늘에서도 자라지만 신장생육이 더디므로 묘목생산시는 해가 잘 드는 곳을 택하는 것이 좋다.

 

2) 번식

실생, 삽목, 접목 등을 이용하여 번식할 수 있으나 실생번식이 가장 이상적이다.
실생법 : 10월경 염주모양의 열매꼬투리가 누렇게 될때 가지에서 따면 쉽게 채종할 수 있다. 회화나무씨는 다른 콩과식물과는 달라 심하게 건조시키면 발아력이 상실되므로 마르지 않게 채종 즉시 깍지를 제거하고 직파하든가 아니면 지나친 건조와 저온을 피한 곳에 모래와 섞어 가매장하였다가 다음해 봄 3~4월에 뿌린다.
파종상은 보수력이 있고 부드러우며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땅이 나중 생육에 좋다.
파종요령은 이랑너비 30cm로 하여 줄뿌림을 한다. 발아한 후 20cm 간격으로 솎아주면 1~2년 이식하지 않고 비배할 수 있어 유리하다. 밀식은 비대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직파한 것은 겨울에 볏짚이나 낙엽, 왕겨 등을 덮어 동상을 방지한다. 직파한 것이나 봄에 뿌린 것이나 모두 싹트는 것은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이루어지며 늦어도 가을까지는 발아가 끝난다. 회화나무는 불임성씨가 많아 발아율이 나쁘다.
삽목 : 봄 3~4월경 싹트기 전에 지난해 자란 가지를 잘라 삽목한다. 활착률은 좋은편이 못된다.

 

3) 육묘

실생 1년째 가을에는 20cm 정도로 자란다.묘상에 두고 2년 비배하면 실생 2년째 가을에는 50~60cm로 자란다. 육묘시의 생육은 다소 느린 편이나 이때부터 곁가지도 나오므로 3년째 봄 싹트기전에 1m이랑에 50cm 간격으로 넓혀준다. 2년 비배한 후 1m간격으로 넓혀준다. 잎이 맞닿을 정도가 되면 이식한다.

 

 

4) 병충해

 

충해는 개각충이 붙을 정도로서 대단하지는 않다. 병해로는 줄기나 가지에 혹같이 부풀어 올라 발생하는 녹병이 있으며 잎에 탄저병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잎이 피기 전에 석회유황합제나 보르도액을 뿌려 예방한다.

회화나무에 대한 내용

 

당나라 때 안녹산의 난으로 궁궐이 점령 당하여 옥에 갇힌 왕유는 응벽지(凝碧池)라는 시에 "회화나무 낙엽 지는 궁궐은 쓸쓸한데 /응벽지 언덕에는 주악 소리만 들려오누나"라고 읊조렸다. 중국의 궁궐에 널리 심는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왕궁에도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의 하나로 매우 귀히 여겼다. 주나라 때 조정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을 상징할 정도로 귀한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면 기념으로 심는 것도 회화나무였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 그 꽃을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괴(槐)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느티나무도 흔히 괴목이라하여 옛 문헌에서는 앞뒤 관계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이름은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scholar tree라고 쓴다.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다.

회화나무는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시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해론(奚論)이 "백제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되자 회화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 함께 전설이나 유래가 전해져 오는 회화나무 노거수(老巨樹)를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충남 서산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내에 자라는 약 600년 된 회화나무는 조선 말기 병인사옥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으므로 교수목(絞首木) 또는 호야나무 등으로 불려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밖에 고궁이나 서원, 문묘, 벼슬하던 양반 동네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가 심겨져 있다.

흔히 말하는 남가일몽(南柯一夢)도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꿈속에 괴안국(槐安國) 태수가 되어 호강을 누리다 어느 날 꿈을 깨어보니, 바로 자기 집 뜰의 회화나무 밑둥 아래의 개미나라를 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 활엽수로 지름이 두세 아름, 키가 수십m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어린가지는 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 특징이며 나이를 먹으면 나무 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아카시아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나 끝이 점점 좁아져서 뾰족해진다. 꽃은 가지의 끝에 여러 개의 원뿔모양 꽃대에 복합하여 달리며 늦여름에 연한 노랑꽃이 핀다.

본초강목에는 회화나무 종자, 가지, 속껍질, 진은 치질이나 불에 덴 데 쓰인다 하였고, 특히 꽃은 말려서 고혈압, 지혈, 혈변, 대하증 등에 널리 이용 되었다. 꽃에 들어있는 루틴(rutin.일명 비타민P)이라는 물질은 모세혈관을 강화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다. 솥에 꽃을 달여 나오는 루틴의 노란 색소로 물을 들인 한지에 부적을 쓰면 효험이 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열매는 염주를 길게 꿰어 놓은 모양이고 종자가 들어 있는 부분이 잘록잘록하여 매우 독특하다.

 

 

   서울 돈화문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19세기 초에 화공들이 그린 ‘동궐도'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당시의 나무의 크기와 자람 상태를 알수 있다. 금호문 쪽 회화나무는 3m 남짓한 담장보다 낮게 그려져 있다.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때의 나무나이는 많아야 50년 전후로 보이니 지금의 나이는 2백살 남짓일 터이다. 오른 쪽 금천 건너 4그루는 여러 그루의 능수 버들 사이에, 주위를 압도하는 큰 나무로 그려져 있어서 금호문 쪽 회화나무보다는 당시에도 나이를 더 먹은 나무였다. 지금의 나무 굵기와 궁궐도의 그림으로 추정한 나이는 400살에서 600살 정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을 새로 지을 때 심었거나, 아니면 1405년 창덕궁 창건당시에 심은 나무로 보인다.


조선왕조 내내 영욕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창덕궁에는 이곳 말고도 낙선재 입구 언덕에 벼락을 맞았어도 죽지 않고 견디는 회화나무도 있고 신선원전 들어가는 길목에도 멋진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옛날 중국 궁궐 건축은 ‘주례’라는 책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라 하여 회화나무 반드시 심었다. 궁궐의 외조는 왕이 삼공과 고경대부,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인데, 이 중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공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특석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돈화문 안은 바로 외조에 해당하는 곳이다.


회화나무는 차츰 고위 관직의 품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차츰 궁궐을 비롯하여 관아의 앞뜰, 고관대작의 사저에도 회화나무는 한그루 두그루 심어지기 시작했다. 현직에 있는 고위층 뿐 아니라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만년을 보내는 고향 땅에도 회화나무가 늘어갔다. 그래서 전국 어디나 전통을 자랑하는 양반 마을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창덕궁안에는 여름 뜨거운날에 꿋꿋한 기개를 자랑하는 회화나무가 버티고 서서 부끄러운 역사를 거울 삼아 거듭된 잘못은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듯 하다. 그러나 기개와 품위의 노거수는 이번 여름에도 무더위에 꽃 피우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아 방학을 맞아 숙제하러 오는 어린 학생들과 가족에게 발품 파는 고된 일을 잊고 활짝 웃게 해준다. 회화나무는 영조의 행렬 수원성 나들이는 물론 마지막 왕이 자동차 타고 들락거리던 모습 등 온갖 역사를 꽃으로 피워내는데 그것은 삼복더위 염천이다. 너무 뜨거워서 이 계절에 발산하는게 자연의 이치인가 보다.

 

 

 * 나쁜 기운 몰아내고 행복을 부르는 회화나무, 중풍을 낫게하고 온갖 질병에 신효한 신비의 약나무 *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  또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회화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이다.

회화나무가 길상목으로 꼽히게 된 것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이다.  주나라 때에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으며 우리나라로 치면 3정승에 해당하는 3공(三公)이 회화나무를 마주보며 앉게 하였고, 또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어 조정의 대신이 앉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회화나무를 심는 풍속 때문에 3공(三公)의 위(位)를 괴위(槐位)라 하였고 대신의 가문을 괴문(槐門)이라 불렀다.  또 회화나무를 심으면 출세한다고 하였고, 선비가 이름을 얻은 뒤에 물러날 때에도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회화목(懷花木), 회나무, 홰나무, 괴화나무, 괴목, 괴수 등으로도 부르는 잎지는 큰키나무이다.  키 45미터, 지름 3미터까지 자라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몸집이 크게 자란다.  수형이 웅장하고 단정하여 품위가 있어 정자나무로도 인기가 있다.  

회화나무를 중국에서는 학자수, 출세수, 행복수라고도 부르는데,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고 큰 인물이 나오며 집안에 행복을 부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실제로 이 나무는 그 수형에서 호탕한 영웅의 기개와 고결한 학자의 풍모가 함께 느껴진다.  한참 이 나무를 보고 있으면 그 엄숙한 위엄에 압도되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게 하는 힘이 있다.  

영험한 힘을 지닌 신령한 나무
회화나무가 이처럼 신성한 나무로 숭상 받는 것은 나무의 수형이 위엄과 품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나무가 하늘의 뭇 별들 중에서 불과 해독작용을 주관하는 별인 허성(虛星)의 정기를 받아서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늙은 회화나무는 불을 잘 일으킬뿐더러 그 속에 신선(神仙)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왔다.

옛날 중국에서는 재판관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 가지를 들고 재판에 임했다고 한다.  회화나무에 진실을 가려 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가 나라의 길흉을 예고한다는 얘기도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한의 광무제때 궁전 뜰 앞에 높이 스무길이 넘는 큰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뿌리째 뽑혀 거꾸로 서 있었다.  이를 보고 나라의 흉조라고 하였으나, 광무제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는 하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여 재물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그러자 회화나무는 하룻밤 사이에 본디 모습대로 바로 일어섰으며 잎사귀 하나도 마르거나 상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안동 시내에 회화나무 거목이 많은데 이는 명재상으로 이름났던 맹사성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맹사성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거리를 순찰하는데 여기저기에서 여인의 슬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연유를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안동에는 오래 전부터 젊은 과부가 많이 생겼는데 그 울음소리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곡성이라고 하였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살펴보니 과연 안동은 과부가 많이 날 형국이었다.  이를 막기 위하여 거리 곳곳에 회화나무를 심게 하였더니 그 후로는 과부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한반도에는 야생 회화나무가 없으므로 본디부터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적어도 천 년이 넘었으므로 토종나무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 중에서 회화나무와 가장 닮은 것은 ‘다릅나무’이다.  민간에서는 이 다릅나무를 회화나무에 못지 않은 영험을 지닌 나무로 여겼다.

회화나무는 잎 모양이 아까시나무나 다릅나무 잎과 비슷하다.  달걀꼴의 잎은 길이 2~6센티미터, 넓이 1.5~2.5센티미터로 7~17장이 어긋나기로 한 잎대궁에 달린다.  

꽃은 8월에 새로 자란 가지 끝에 연한 노란색으로 핀다.  이 꽃은 괴화(槐花)라고 하여 고혈압의 예방과 치료약으로 쓴다.  꽃피기 전의 봉우리를 괴미라고 부르는데 그 모양이 쌀을 닮았기 때문이다.  회화나무 꽃에는 꿀이 많아 벌들이 많이 모여들고 회화나무꿀은 꿀 중에서 제일 약효가 높다고 한다.  회화나무꿀은 특히 항암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화나무로 염색한 괴황지와 스스로 우는 꽃
괴화는 꽃이 벌어지기 바로 전에 따서 말려 두었다가 약으로 쓰는데 혈압을 낮추는 것 말고도 지혈, 진정, 소염 등의 작용이 있어 토혈, 대하, 임파선염, 치질, 이질, 피부병의 치료약으로 쓴다.

괴화에는 루핀이라는 노란색 색소가 20~30퍼센트 들어 있어 이것으로 천이나 종이를 염색할 수 있다.  회화나무 꽃이나 열매로 염색한 종이를 괴황지라고 부른다.  

괴황지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음력 칠월 칠석날에 따서 말린 괴화를 물에 담가 노란 색소를 우려내어 동짓달에 좋은 닥종이에 물을 들인다.  괴화를 우려낸 물에 닥종이를 담갔다가 말리기를 아홉 번 반복하여 진한 노란색이 나게 한다.  이 때 유의할 것은 마지막 아홉 번째 물들일 때의 시간이 반드시 동짓날 자시(밤11시 30분~1시 30분)여야 한다.  만약 5분이라도 틀리면 효력이 없다고 한다.

회화나무 열매를 달여서 우려낸 물로 괴황지를 만들기도 한다.  대개 아홉 번을 반복해서 물을 들여야 하며 신선한 열매를 짓찧어서 나오는 즙을 창호지에 발라 물을 들이기도 한다.  경신일, 계해일, 경신시, 계해시에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일반 딱종이는 태우면 재가 거의 생기지 않지만 괴황지는 숯처럼 까만 재가 남는다.  또 일반 닥종이는 경면주사를 참기름으로 개어 도안을 그리면 번져서 사용할  수가 없지만 괴황지는 번지지 않는다.  

회화나무에는 자명괴(自鳴槐)라 하여 스스로 우는 꽃이 나무마다 한송이씩 있다는 얘기가 있다.  중국의 옛 책인 <태을통독(太乙通讀)>을 보면 까마귀가 이 자명괴를 따서 먹고 괴화의 정(精)으로 하늘과 땅과 인간세계의 길흉을 미리 아는 능력을 얻어 흉한 일이 닥칠 집을 보고 까욱까욱 짖는다고 하였다.  자명괴를 얻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회화나무 꽃이 피기 시작할 때부터 큰 망태기를 메고 다니면서 한송이도 땅에 떨어뜨리거나 빠뜨리지 말고 모두 따서 모은다.  이것을 여러 그릇에 나누어 담는다.  밤에 자지 않고 그것을 지키면 반드시 그릇 가운데 하나에서 은은하게 쇠붙이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난다.  그러면 그 소리나는 그릇의 괴화를 다시 여러 그릇에 나누어 담고 밤새 지키기를 반복한다.  그릇 하나에 괴화 한 송이를 담을 수 있을 때 까지 하다 보면 마침내 소리를 내는 괴화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소리내는 괴화를 먹으면 영통(靈通)해져서 천상의 일과 인간세계의 일을 모두 아는 신통력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명괴는 어느 틈엔가 땅에 떨어져 버리므로 그것을 얻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적혀 있다.

압구정동과 연신내의 가로수가 바로 회화나무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간이나 궁궐, 서원, 사당, 벼슬하던 양반집 뜰에 수백 년 묵은 회화나무가 많다.  마을 들목이나 마을 가운데에 정자목으로 심은 것도 더러 있다.  주로 영남 지방에 오래 묵은 거목이 많으며 요즈음에는 길가에 가로수로도 흔히 심는다.  서울의 압구정동과 연신내의 가로수가 거의 회화나무이다.  중국의 북경에도 회화나무 가로수가 많아 사람들이 떨어지는 괴화를 빗자루로 쓸어 모아 말려서 시장에 내다 판다.  

우리나라에는 오백 년이 넘은 회화나무 거목이 꽤 많다.  이 나무들에는 대개 심을 때의 내력이 전해 오고 또 신목으로 받드는 것이 많다.  회화나무 거목에 치성을 드리면 병이 낫는다거나 집안이 화평해진다거나 전염병이 피해 간다거나 하는 전설도 적지 않다.  반대로 나무에 손을 대면 큰 횡액을 당한다는 얘기도 많다.

회화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공해에도 강하므로 공원이나 길 옆에 가로수로 심기에 좋다.  수형도 단정하고 병충해도 거의 없다.  이 나무를 문 앞에 심어 두면 잡귀신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또 좋은 기운이 모여들어 만사가 형통한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가꾸기가 쉽다.  씨앗을 봄에 심으면 싹이 잘 난다.  옮겨 심어도 잘 살고 꺾꽂이나 접붙이기를 해도 잘 산다.  콩과에 딸린 식물이므로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를 만들어 내므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땅은 토심이 깊고 비옥한 곳이 좋지만, 돌이나 모래가 많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다만 습기가 많은 땅에서는 꽃이 잘 피지 않는다.  탄소동화작용이 활발하여 모든 나무 중에서 산소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낸다고도 하고 식물에는 희귀한 게르마늄 원소가 가장 많이 들어 있다고도 한다.

회화나무는 우주의 상서로운 기운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인간에게 전해 주는 나무다.  회화나무가 있는 곳 근처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고 재물이 모인다고 하였다.  장사하는 사람이 집 앞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손님이 들끓게 되고 공부하는 사람의 집 앞에 심으면 문리(文理)가 트이게 된다고 하였다.  가문이 번창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문 앞에 회화나무가 있기 마련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잘 되던 집안이 왠지 갑자기 몰락하는 일이 생겨 가 보면 회화나무를 소홀히 관리하여 말라 죽었거나 베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신령한 힘이 있었기에 회화나무는 일반 서민들의 집에는 심을 수 없었고 고관대작이나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 고결한 학자의 집에만 심을 수가 있었다.

회화나무는 우주의 기운을 인간세계에 전해 주는 전령사 역할을 하는 나무이다.  집안을 화목하고 건강하게 하려면 집안에 회화나무를 심고, 마을이 잘 되고 번성하게 하려면 마을 주위에 회화나무를 심을 것이며, 나라 전체가 부강하고 편한하게 하려면 금수강산 집집마다 마을마다 거리마다 회화나무를 심을 일이다.

신선이 되는 약으로 이름난 나무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신선이 되게 하는 나무로 알려질 만큼 훌륭한 약성을 지닌 나무다.  꽃, 열매, 껍질, 줄기, 뿌리를 다 쓰는데 주로 고혈압, 뇌일혈, 중풍, 손발의 마비 등 순화기계 질병과 치질, 치루 등에 효과가 크다.  오래 먹으면 머리카락이 희어지지 않고 늙지 않으며 오래 산다고 한다.  먼저 옛 의학책에 적힌 회화나무의 약효를 알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회화나무 열매를 괴실, 괴각 또는 괴관으로 부르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다.  열매의 꼬투리가 염주를 줄에 꿰어 놓은 듯한 모양인데 회화나무 말고는 꼬투리 모양이 염주알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달리 없다.  거대하고 장엄한 수형을 지닌 나무에 어떻게 괴상하게 생긴 열매가 가득 달리는 것일까?


회화나무 열매도 강장, 지혈, 양혈(涼血)등의 효과가 있어 토혈, 각혈, 치질, 혈변, 혈뇨, 장염 등의 치료약으로 널리 쓴다.

열매는 완전히 익은 뒤에 따서 햇볕에 말려 꼭지를 떼어 내어 쓴다.  덜 익은 열매를 따서 즙을 짜서 쓰기도 하는데, 이 즙을 괴료(槐療)라고 하여 중풍이나 신경계통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쓴다.  드물게 이른 봄철 곡우 무렵에 회화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받아 약으로 쓰기도 한다.  


해묵은 회화나무 밑동에 드물게 버섯이 나는 수가 있다.  회화나무에 나는 버섯을 괴이, 괴아, 괴균, 괴치 등으로 부르며 신선이 되게 한다는 선약을 만드는 데 쓴다.  또한 이 버섯은 항암효과가 매우 높다.


<향약집성방>에 소개된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비법

■ 회화나무 열매를 음력 10월에 따서 독에 넣고 약 기운이 새지 않게 꼭 덮은 다음 진흙으로 싸발라 봉해서 14일 동안 두었다가 꺼내서 껍질은 버리고 첫날부터 매일 먹는다.  첫날에는 한 개를 물로 먹고 다음 날부터는 날마다 한 개씩 늘여 15일 동안 먹는다.  이렇게 달마다 먹으면 밤눈이 밝아지고 힘이 나며 장수한다.

■ 회화나무 열매를 껍질을 벗겨 소 쓸개에 채워 넣고 그늘에서 백일 동안 말린 다음 한 번에 한 개씩 아침 빈속과 해질 무렵에 각각 한번씩 깨끗한 물로 먹는다.  한 달을 먹으면 몸이 거뜬해지고 백일동안 먹으면 빠졌던 이가 다시 나오고 달리는 말도 따라잡을 수 있게 된다.  

■ 10월 상순에 좋은 회화나무 열매 두 말을 따서 질그릇에 담고 뚜껑을 꼭 덮은 다음 종이나 천 또는 진흙으로 잘 봉하여 49일 동안 두었다가 꺼내면 껍질에서 물이 생겨 물컹물컹하게 된다.  이것을 껍질을 모두 벗겨 천으로 깨끗하게 닦고 물로 잘 씻어서 닥종이로 만든 봉지에 넣어 두고 처음에는 한 개를 물이나 차로 먹는다.  다음부터는 매일 한 개씩 늘려서 10일 동안 먹는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한 개부터 시작하여 매일 한 개씩 늘려서 10일 동안 먹는다.  이렇게 거듭해서 먹으면 장수하고 중풍도 치료되고 머리도 좋아지고 수염이 검어진다.

옛 책에는 “회화나무 열매는 갖가지 약 중에서 으뜸이다.  음력 10월 4일에 따서 물에 일거나 씻지 말고 크고 잘 여문 것만을 골라 하루에 다섯 개씩 깨끗한 물로 먹는다.  먹는 동안 꺼리거나 금할 것은 없다.  1년을 먹으면 수염이 검어지고 2년이면 몸이 거뜬해지며 3년 뒤에는 머리가 총명해고 눈이 밝아진다.  오래 먹으면 효과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좋다.”라고 하였다.

■ 회화나무 줄기나 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녀도 중풍에 걸린 사람이 낫는다고 할 정도로 중풍을 비롯한 온갖 질병을 낫게 하고 오래 살게 한다는 좋은 약이다.  껍질은 상처가 짓물러 곪은 데나 고름이 나오는 데 가루를 만들어 뿌리면 잘 낫는다.  줄기에 상처를 내어 받은 진은 여러 가지 중풍이나 힘줄이 오그라드는 데, 기침, 경풍 등에 신효하다고 할 만큼 효험이 있다.  회화나무 진은 중풍으로 인한 팔다리의 마비, 피부에 감각이 없는 데, 구안와사, 파상풍, 허리가 뻣뻣하고 힘이 없는 데 효과가 매우 좋다.  진을 말려서 가루 내어 먹기도 하고 다른 약을 달일 때 같이 넣을 수도 있으며 마르지 않은 것을 차나 음료에 타서 먹을 수도 있다.

■ 열매는 오장에 있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열을 내린다.  신장의 기운이 허약하여 침을 흘리는 것을 멎게 하며 뼈가 부러진 것, 부인의 유방에 멍울이 생긴 것, 자궁이 몹시 아픈 것 등을 낫게 한다.  회화나무 열매를 식초에 오래 담가 두었다가 복용하면 중풍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으뜸가는 약이 된다.

■ 자궁의 통증을 치료하거나 남자가 양기를 세게 하려면 음력 칠월 칠석날에 회화나무 꽃을 따서 짓찧어 생즙을 내어 구리 그릇에 넣고 은은한 불로 오래 달여 고약을 만든다.  여기에 느릅나무 껍질 가루를 조금 넣고 팥알 만하게 알약을 만들어 하루 두 번, 한 번에 대여섯 개씩 미지근한 물로 먹는다.  오래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흰 머리가 검어지며 병 없이 오래 살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이 방법으로 정력이 매우 강해진 사람이 있다.  여성이 자궁통증에는 이 알약을 한 번에 한 알씩 며칠 동안 성기 속에 넣는다.


회화나무의 약성에 관한 옛 문헌 기록

회화나무 속껍질
<본초강목>에는 회화나무 속껍질을 끓여서 다섯 가지 치질과 악창 및 불에 데인 곳, 몹시 헤어져 헌 데를 씻는다고 나와 있다.

<향약집성방>에는 회화나무 속껍질을 후비증(어혈로 인한 염증)으로 추우면서 열이 나는 것을 치료하고 약을 데우거나 태울 때 쓰는 초를 만드는 데 쓴다고 나왔다.

또 회화나무 속껍질은 맛이 쓰고 독이 없다.  입 안에 생긴 병이나 이가 아플 때에는 이것을 좁쌀 뜨물에 달여 입에 물고 있는다.  남자의 음낭이 부은 데는 회화나무 큰 가지를 잘라서 새싹이 나게 한 다음 그것을 뜯어 달여서 술을 만들어 마시면 나병, 위증(몸이 오그라드는 증상), 비증(마비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회화나무 버섯은 맛이 쓰고 매우며 성질은 평하고 독이 없다.  다섯가지 치질, 가슴앓이, 부인의 음부가 헐어 아픈 것들을 치료한다.  뽕나무 버섯처럼 단단한 것이 좋다.

회화나무 열매
<향약집성방>에는 회화나무 열매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맛은 쓰고 시며 짜고, 성질은 차고 독이 없다.  오장의 사기와 열을 없애고 침 흘리는 것을 멎게 하며, 다쳐서 부러진 것, 다섯 가지 치질, 불에 덴 것, 여성의 젖멍울 등을 치료한다.  자궁이 몹시 아플 때에는 음력 7월초에 딴 것을 짓찧어 즙을 낸 다음 구리그릇에서 알약을 빚을수 있을 때까지 졸여 팥알만하게 알약을 만든다.  이것을 음부에 넣되 세 번만 바꾸어 넣으면 낫는다.  또한 이 방법은 태아를 유산시키는 데에도 쓴다.  오래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기운이 나며 머리카락이 희어지지 않고 오래 산다.

회화나무 가지
<향약집성방>에는 종기가 난 데와 음낭 밑이 축축하고 가려울 때 회화나무 가지를 물로 달여서 씻는다고 전한다.

회화나무 진
<향약집성방>에 보면 회화나무 진은 여러 가지 중풍을 치료한다고 한다.  급경풍으로 이를 악물거나 팔다리가 마비된 것, 구안와사, 파상풍을 치료한다.  달여 먹거나 가루약 또는 알약으로 만들어 먹는다.  달여 먹을 때에는 다른 약에 섞어 쓴다.

회화나무 꽃
<동의보감>에 회화나무 꽃은 다섯 가지 치질, 가슴앓이를 치료하고 뱃속에 있는 벌레를 죽이고 열을 내린다고 적었다.  적백이질, 장풍(腸風), 하혈도 치료하는데 약간 볶아서 쓴다.  회화나무 잎은 어린이 경기, 열이 날 때, 옴, 버짐 등을 치료할 때 물에 달여서 쓴다.

북한의 <동의학사전>에는 이렇게 나왔다.  회화나무 꽃은 맛은 쓰고 성질은 평하다.  간경, 대장경에 작용한다.  열을 내리고 혈분의 열을 없애며, 피나는 것을 멈춘다.  약리실험에서 꽃의 루틴 성분이 실핏줄의 투과성을 낮추고 염증을 없애며, 달임약은 혈압을 낮추고 핏속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것이 밝혀졌다.  루틴 함량은 꽃봉오리가 더 높다.  장출혈, 치루, 자궁출혈, 피를 토할 때, 코피, 혈리 등의 모세혈관 장애로 인한 여러 가지 출혈과 간열로 눈이 붉어진 데, 부스럼에 쓴다.  피가 나는 데는 거멓게 볶아서 쓰고 고혈압에는 약간 볶아서 하루 6~9그램을 달임약, 가루약, 알약 형태로 먹는다.  외용약으로 쓸 때는 달인 물로 씻거나 가루 내어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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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아지고 눈이 밝아지는 회화나무 꽃차

회화나무 꽃을 늘 차로 마시면 고혈압을 예방, 치료하고 잘 늙지 않으며 뇌가 좋아지고 눈이 밝아진다.  만드는 방법은 여름철, 꽃이 피기 전에 봉루리째 따서 꽃술은 버리고 그늘에서 말린다. 이것을 약한 불에서 살짝 볶아 물 500밀리리터에 말린 꽃 10그램 정도를 넣고 양이 반쯤 줄어들때까지 은근한 불에 천천히 달인다.  이것을 하루 세 번에 나누어 마신다.  꿀이나 설탕을 타서 마셔도 좋고 감초나 결명자를 함께 넣어 달여도 좋다.  

회화나무 꽃차(괴화차)는 중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시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맛이 특이하고 몸에도 좋으므로 널리 마셔 봄직하다.  조선 시대의 학자 이수광이 쓴<지봉유설>에 6월 15일 유두날에 수단을 먹는 것은 옛날 회화나무 잎을 찬물에 띄워 먹던 것과 같은 것으로 액운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면 옛날 우리 선조들은 회화나무 꽃차를 즐겨 마셨던 것 같다.

회화나무 열매나 껍질, 가지도 차로 끓여 마시면 뇌를 튼튼하게 하여 기억력을 좋게 하고 머리카락을 검게 하며 눈이 밝아지는 등의 효과가 있다.  특히 중풍으로 몸을 못 움직일 때에 회화나무 껍질 네 근에 물 한 말쯤을 붓고 푹 달여서 그물을 마시면 잘 낫는다.  하루 세 번 한 번에 한 사발씩 마시는데 전갈, 두꺼비, 지네 가루와 함께 먹으면 효과가 빠르다.  대개 한 달에서 두달쯤 꾸준히 먹으면 큰 효험을 본다.

회화나무 한눈에 보기
과  명: 콩과
생약명: 괴목, 괴화
속  명: 홰나무, 회화나무, 괴화나무
분포지: 집 안이나 절간, 집 주변 등에 심는다.
개화기: 8월
꽃  색: 황백색
결실기: 9~10월
열  매: 콩꼬투리 모양의 꼬투리에 까맣고 둥근 씨가 들어 있다.
높  이: 20~30미터 자라는 잎지는 큰키나무
채취시기: 꽃은 8월, 열매는 10월, 뿌리껍질이나 껍질은 가을에 채취한다.
가공법: 그늘에서 말린다.
약  효: 치질, 동맥경화, 고혈압, 장출혈, 자궁출혈, 치루, 피똥을 누는 데, 잇몸염증, 부스럼, 화상 등      (글/ 한국토종약초연구소 회장 최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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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끈한 선비의 품새 `회화나무 이야기 *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회화나무는 학자 혹은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立身出世의 상징이었다. 선비들은 벼슬에 오른 기념으로 자신의 집 정원에 이 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회화나무를 出世木 또는 幸福樹라고 불렀다. 호탕하지만 무게가 있고 깨끗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품새라는 것이다.

옛 선비들이 이삿짐 목록에서 반드시 빠뜨리지 않았던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다. 가지 퍼짐이 거침없이 변화무쌍하게 뻗어나가되, 어디 한 군데 도드라지지 않고 미끈한 껍질을 가진 회화나무는 그 잘생긴 품새가 ‘선비나무’ 혹은 ‘학자수’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영문 이름도 ‘Scholar Tree’인 것을 보면 나무에 대한 느낌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예부터 느티나무에 버금가는 정자나무로 아껴온 회화나무는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방에서 특히 많이 관찰된다. 이른바 선비의 고장이라는 안동·영주 등이 버티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보호수로 지정된 173건의 회화나무가 서울 경기 지역에 50건, 경북에 56건이나 집중돼 있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우리나라 임학 연구의 선구자인 임경빈 선생은 회화나무를 “느티나무가 법을 지키는 나무라면, 회화나무는 법을 만들어가는 나무”라고 한다. 회화나무는 자신의 골격을 만드는 데 어떤 예정도 없고 대담무쌍하며 호연한 자세를 갖춰 호탕하지만 무게가 있고 깨끗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품새라는 것이다.

회화나무는 잘 자라면 30m를 훌쩍 넘고, 가슴높이둘레도 10m를 훨씬 넘어설 만큼 오래도록 크게 자란다. 대기 오염이나 공해에도 비교적 잘 견뎌 도심에서도 잘 자란다. 긴 세월 동안 어떠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이며 조화롭게 자라는 모양이 앞선 사람들의 업적을 뛰어넘어 언제나 개성 있는 독창적 분야를 개척하는 학문의 길과 같은 셈이다.

자태 빼어난 당진 송산면 회화나무

중국이 고향인 회화나무는 중국에서도 입신출세의 상징으로 매우 귀하게 여겼다. 중국의 선비들은 벼슬에 오르면 그 기념으로 정원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출세목’(出世木)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행복을 가져온다고 해서 ‘행복수’(幸福樹)라고도 한다. 중국인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은 이 나무를 베이징(北京) 시에서는 주요 가로수로 쓰고 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나무의 꽃을 가을의 진사(進上)시험이 다가왔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모두 회화나무는 학자 혹은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충남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회화나무도 오래전 바로 이 나무 앞에 있었음직한 대가집에서 심고 가꾼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나무 앞에는 이종성 씨 댁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된 이 회화나무는 우리나라 회화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졌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송산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km 남짓 올라가다 보면 남쪽을 향한 완만한 경사지가 나타나는데, 송산면 회화나무는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나무는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용재공(容齋公) 이행(李荇·1478~1534) 선생이 중종 12년(1517) 이곳에 내려와 집을 짓고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라고 전해온다.

500살 먹은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가지 퍼짐이 회화나무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로 뻗어 웅장하며, 미끈한 껍질에서 느낄 수 있는 건강미는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조금도 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키는 21m, 가슴높이 둘레 5.7m, 뿌리 근처 둘레는 5.64m나 된다. 2m 높이에서 가지가 퍼져 동쪽으로 16.2m, 서쪽 16.2m, 남쪽 18.1m, 북쪽 18.1m로 고르게 펼쳐졌다. 8월쯤 노란색 꽃이 활짝 피어나면 풍년이 들고, 꽃이 제대로 피어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인천 서쪽 교통의 요지인 신현동 주택가에서 자라는 회화나무는 500살이 넘은 나이나 생김새 역시 송산면 회화나무에 못지않지만 그 생육 조건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자연의 삶을 거슬러 살아가는 도시에서 명을 이어가는 안타까운 운명이라 할 만하다. 천연기념물 제315호로 지정 보호받는 인천 신현동의 회화나무는 키가 22m, 가슴높이 둘레 5.3m로 송산면 회화나무와 크기나 수형이 매우 비슷하다. 주택가로 모습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신현동 주변에는 넓은 농토가 있어 주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살았던 까닭에 주변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할 수 있는 신현동 회화나무 역시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나무였다.

신현동 회화나무로 점을 치는 방법은 조금 흥미롭다. 꽃이 위부터 피면 풍년이 들고, 아래부터 피어 올라가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벼 이삭이 한참 무르익어야 할 8월께 햇볕이 잘 들면 회화나무의 꽃은 나무 위쪽부터 고르게 필 것이고,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을 때는 꽃이 고르게 피지 못해 아래쪽부터 피게 된다. 그런데 햇볕은 벼 이삭이 익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니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모습은 농사짓는 사람에게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마을 한가운데서 자라는 것이 대부분인데, 신현동의 회화나무 역시 그렇다. 이 나무는 주변에 5∼6층 높이의 서민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찬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나무가 있는 자리는 널찍하게 공간을 비워 충분한 생육 공간을 마련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인 광합성을 위한 햇빛을 받는 조건이 매우 열악하다. 주변 빌라의 높이가 낮다고는 하지만 사위(四圍)가 완전히 막혀 있어 햇빛을 제대로 보기 힘들 뿐 아니라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숨이 막힐 듯싶다. 보는 사람조차 이 나무 앞에 서면 꽉 막힌 주변 분위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정도다.

또 갈수록 늘어나는 승용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어 바로 이 나무 아래까지 주차하게 되니 예전에 사람들의 휴식처였던 정자가 마치 자동차들의 정자인 것처럼 여겨진다. 애초 이 지역의 토지계획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이나 현재의 담당 공무원들의 무심함을 탓해야 할지 주민들의 무관심을 탓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나무가 더 오래 살기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무심한 사람들 탓에 손상되기도

경북 경주 안강읍의 흥덕왕릉(興德王陵) 근처에서 자라는 천연기념물 제318호 월성 안강읍 회화나무는 400살이 조금 넘는데, 키는 17m, 가슴높이 둘레 6m로 마을을 지나는 도로 중앙에 서 있다. 역시 사람과 가깝기 때문에 수난을 겪는 운명의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안강읍 회화나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마을길을 냈는데, 나무의 뿌리가 숨을 쉬어야 할 자리까지 시멘트로 포장하고 옹색하게 철책을 둘러 놓았다.

게다가 나무 바로 옆에 바짝 붙여 새로 지은 경로당을 짓기 위해 트럭이나 굴착기와 같은 중장비들이 지나다니면서 나무 줄기를 많이 손상시킨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나뭇가지가 여럿 말라 죽은 흔적도 있고, 중간에 수술자국도 남아 있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 밑둥치의 우람함에 먼저 눈길을 주게 된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을 제주(祭主)로 정해 정월 대보름날 육통1, 2, 3리 주민들이 모두 모여 동제를 지내는데, 줄기에 걸쳐 놓은 당산 금줄이 눈에 띈다. 금줄이 걸린 나무 줄기에는 적지 않은 수술 자국과 함께 세월의 깊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나무에는 특별히 김영동 회화나무라는 별명과 함께 애절한 전설이 전한다. 전설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74)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당시 이 마을에는 김영동이라는 효성 깊은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즈음 고려는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왜적이 침입해 수난을 겪고 있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이 젊은이는 출정의 뜻을 세우고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외아들이던 그는 전쟁터에 나간 자식을 기다리실 부모님을 생각해 나무 한 그루를 심고, 부모님께 “기필코 외적을 물리치고 돌아올 터이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나무를 저처럼 여기고 잘 가꾸어 달라”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국내 최고령, 인천 교동도 회화나무

부모는 그의 말대로 낮이나 밤이나 자식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나무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영동은 왜구와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그 뒤 김영동의 부모는 전쟁터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이 나무에 더 큰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당시 그 나이를 약 400살로 추정했지만, 전설을 토대로 한다면 630살쯤으로 올려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는 인천시 교동도(喬桐島)는 또 다른 관심을 끈다. 인천시 강화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면적 46.9㎢, 인구 3,500여 명 남짓한 작은 섬 교동도는 주로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졌지만 상고시대 때부터 고유한 역사가 서려 있다. 이 섬은 특히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 가깝다는 이유로 소외된 감이 적지 않은데, 이는 역으로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다시 많은 관심을 끄는 섬이다.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가장 짧게 갈 수 있는 뱃길이어서 예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기착지 역할을 했으며, 개성 송도와 한양의 관문 역할을 맡아 왔다. 이런 까닭에 현재까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는 교동 향교는 고려 충렬왕 12년(1286) 안향(安珦)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자(孔子)의 상을 처음으로 가져와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유학자들이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서는 우선 교동도에서 며칠 머무르며 뱃길을 알아보고는 했다. 그들 유학자 가운데 일부가 교동도에 정착해 살기도 했으리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곳에 머물렀던 선비 가운데 어떤 이가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회화나무를 심었다. 바로 강화군 교동면 삼선리 회화나무다.

1999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나이가 1,000살이 훨씬 넘은 것으로 추정돼 우리나라에서 관찰된 회화나무 가운데 최고령이다. 키 20m, 가슴높이 둘레가 4.8m인 이 나무는 그러나 현재 건강 상태가 매우 나쁘다. 심재(心材)가 완전히 썩어 들어가 밑둥치에 큰 공동이 생겼고, 말라죽은 가지가 적지 않음에도 수술 흔적은 전혀 없다. 돌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학자의 기상을 간직하며 외롭고 조용한 섬 교동도에서 1,000년을 살아낸 학자수, 회화나무는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어른 한 명이 쑥 들어갈 만큼 안을 텅 비워내면서도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톨릭 순교의 역사를 증명하는 회화나무]

나무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미읍성의 호야나무다. 회화나무는 발음이 쉽지 않아 지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다. 회나무·해나무 심지어 호야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이 호야나무는 충남 서산 해미읍성에서 순교자들의 목을 매 처형하던 교수대로 쓰인 고약한 운명의 나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교수목(絞首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미읍성에 들어서면 우선 동헌까지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탱자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그 한쪽에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우뚝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바로 해미읍성의 호야나무다. 300살이 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산림청 지정 보호수는 아니지만, 1975년 가톨릭 교회 측에 의해 썩은 부위에 대한 전면 외과수술을 받고, 인근에 후계목을 번식시키는 등 각별하게 보호받고 있다.

사적 제116호인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충청병마절도영이 1414년 이곳으로 옮겨진 후 1651년 다시 청주로 옮겨지기까지 서해안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 요충지 역할을 맡았으며, 1578년에는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해미읍성이 유명한 것은 조선 후기 최대의 박해 사건으로 불리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천주교 순교자들의 순교 장소라는 것이다. 바로 그 순교가 이뤄진 처형대가 호야나무다.

호야나무가 서 있는 뒤쪽으로 지금은 없어진 옛 감옥 자리가 있다. 감옥 안에 갇혔던 천주교인들은 한 명씩 호야나무 처형대 앞으로 끌려나와 이 나무에 매달려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와 함께 고문을 받았으며 급기야 교수형을 당했다. 호야나무가 기쁨의 표정을 가질 수 없는 까닭이다.

회화나무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까닭에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사람들 가까이에 머물러야만 했고, 그래서 사람살이의 슬픔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야 했다. 경북 경주 안강읍 회화나무도 그처럼 슬픈 이야기를 담고 지금까지 사람 곁에서 슬픈 목숨을 살아가고 있다.

(월간중앙 [고규홍의 나무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