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소산(扶蘇山,459.1m, 458.7m) 부소령(扶蘇嶺) 입비식...직산초등학교 개교 제112주년...2009.10.24 >>>
***백제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부소산 부소령 직산 백제시대(bc18-6,13년)
<<< 대백제...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kbs 역사스페셜 >>>-아래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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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 扶蘇嶺 立碑式 >>
百濟初都 河南 慰禮城
직산 백제시대
(bc18~6, 13년)
--- 직산초등학교 개교 제112주년 기념 ---
(1897년 4월 24일 개교)
---일 시 : 2009.10. 24(토) 10:00 (음력 : 9월 7일)
---장 소 :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산21-3
입장 양대리~북면 운용리
부소산 부소령(부수문이 고개) 정상
<<< 직산초등학교 총동창회 >>>
<<< 백제 초도 하남 위례성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 순서 >>>
1.개회식---------------------------------사회자
지금부터 <직산초등학교 개교 제112주년> 기념
백제초도 직산 하남위례성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을
거행토록 하겠습니다.
2. 묵념-----------------------------------사회자
* 일동 차려! 순국선열 및 먼저 가신 님들에 대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묵념~ !!! 바로~!!!
3. 백제 하남위례성-부소산 부소령 유래 및 경과 보고-----사회자
* 부소령 비--가로: 60cm, 높이: 2.5m, 폭: 45cm, 무게: 약 2톤
* 설립 목적 : <지역 문화유산 보존 및 계승> <천안의 상징성 홍보>
*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부소산 부소령 유래-(유첨 비문 내용 참조)
4.강신(降神)------------------------------사회자
*모두 단정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에
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초혼관인 <총동문 회장님>께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분향하고,
산신령님과 온조대왕님을 모셔 주시기 바랍니다. 강신~!!!
*초혼문(招魂文) 낭독---------------동문 회장 (촛불2개켜고 분향한 후)
단기 4342년 기축년 2009년 10월9일 직산초교 총동문 일동은
커다란 음덕을 내려 도와주신 부소산 산신령님,
대백제 온조대왕님께 감사를 드리오며,
직산초등학교 총동문 및 천안시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태평안녕 할 수 있게 도와 주시고,
부족한 정성이지만 성심을 다하여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이곳
부소산 부소령에서 부소산 산 신령님과 대백제 온조대왕님께
올리오니 인간세상에 내려 오셔서 임재(臨在) 하여 주시옵소서!!
4.참신(參神)------------------------------사회자
*참신! 다 같이 삼배로 산신을 맞이합니다, 일동 삼배!
*참여한 동문, 내외귀빈 모두가 참신 삼배를 한다.
5.초헌(初獻)------------------------------사회자
*초헌! 총동문 회장님께서 부소산 산신 및 온조대왕님께 첫 잔을
올리겠습니다.
*초헌관--첫 잔을 올리고 세번 절한다.
6.독축(讀祝)------------------------------사회자
*독축! ... <총동문 회장,사회자>께서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 축문>을 낭독하겠습니다.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 축문-(별첨 참조)
7.아헌(亞獻)------------------------------사회자
*아헌! ... 회장님께서 두 번째 잔을 올리겠습니다.
*아헌관---두 번째 잔을 올리고 세번 절 한다.
8.종헌(終獻)------------------------------사회자
*종헌! <차기 총동문 회장님>께서 세 번째 잔을 올리겠습니다.
*종헌관-세 번째 잔을 올리고 세번 절한다.
9.헌작(獻酌)------------------------------사회자
*헌작! 다음은 헌작 순서입니다
*<고문-임원-내외 귀빈 순서>로 술 잔을 올리고 세번 절한다.
10.소지(燒紙)------------------------------사회자
*<총동문 회장님>께서 축문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냅니다.
11.음복(飮福)-----------------------------사회자
*음복! 모든 잔을 다 올렸습니다.
이제 철상하고 음식을 나눠 들도록 하겠습니다.
12.폐회사 ---------------------------------사회자
*이상으로 <직산초등학교 개교 제112주년 기념>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 대단히 감사합니다 >
<< 부소산 부소령 입비식 축문 >>
유세차 단기 4342년, 서기 2009년 10월 24일
기축년 음력 9월 7일
부소산 부소령 정상에 직산초등학교 졸업생과 천안시민 일동은
백제 첫 도읍지이며, 진산인 부소산 산신령님과
백제시조 온조대왕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수 천년 긴 세월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북대한수
천험지리 난득지세의 터를 갖춘 직산고을 땅에
마한의 맹주 목지국 진왕으로부터,
이곳 하남위례성을 봉토 받아 작도건국한 백제의 온조대왕님,
그리고 직산고을에 수천년 대이어 살아 온 고을의 백성들
호서 제일의 관문이며, 대중국 해로의 관문인 이곳에서
수복강녕을 누리고, 오늘도 태평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나이다.
부소산 신령님이시여! 대백제 온조대왕님이시여!
앞으로도 천안 고을이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세계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성장 동력의 중추가 될 수 있도록
무한한 음덕을 내려주시고,
직산고을, 천안시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
널리 세상을 이롭게하는 홍익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대대손손 계승할 수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작은 정성으로 주와 포를 올리오니 흠향하여 주시고,
저희들의 간절한 기원이 꼭 이루어지게 하여 주소서.
< 2009년 10월 24일 직산초등학교 졸업생 및 천안시민 일동 >
● 직산현(稷山縣) 부소산(扶蘇山--459.1m) 유래
위 치 :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산21-3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산1, 산24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辰王)으로부터 동북 100리 땅을
봉토(封土) 받아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부소령은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이어주며, 일명 부수문이고개,
부소치(扶蘇峙), 부소문치(浮所門峙) 등으로 규장각 고지도에 전해지며,
<비류와 온조>가 첫 도읍을 정하기 위해 십신(十臣)과 함께 올랐던
한남정맥 용인(龍仁)의 부아산(負兒山)과도 이어진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며,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고구려 건국 수도 졸본의 강은 비류나, 보술수, 송양(沸流那,普述水,松壤)
으로 불렸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夫斯)가 침투한 것이다.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開城)
보술(普述)은 이후 부사(夫斯), 부소(扶蘇)로 변화했는데 백제의 첫 번째
수도 위례홀의 뒷산은 부사악(夫斯岳, 負兒岳)으로 불렸다.
백제는 천도로 위례홀→한홀(漢城)→고마(公州)→소부리(扶餘)로 바뀌었다.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중심으로
<좌 : 서운산성(瑞雲山城, 左聖山-左城山)>, <우 : 성거산성(聖居山城,
右聖山-右城山)> 익성(翼城)으로, <남 : 목천 진산 작성산성(鵲城山城)>
<서북 : 직산 진산 사산성(蛇山城)> 동서남북으로 배치함으로 추청되며
가히 천험지리 난득지세의 천혜 요충지를 자랑한다.
서해 아산만과 삽교천의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密頭里-밀머리, 해빈 미추홀
-海濱 彌鄒忽)에서도 <직산 하남위례성>은 한 눈에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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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산21-3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산1, 산24
옛 직산현의 동쪽과 목천현의 북쪽 경계를 이루던 산이며,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부터 동북 100리 땅을
봉토 받아 백제 첫도읍지 <하남 위례성>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백두대간 금북정맥(호서정맥)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부소산 아래
깊은골(深谷)은 금강이 발원하고, 입장천을 따라 안성천, 아산만이 발원하며,
성거산, 왕자산(王字山) 남서를 따라 곡교천(曲橋川), 삽교천이 발원한다.
부소령(扶蘇嶺)은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이어주며, 일명 부수문이고개,
부소치(扶蘇峙), 부소문치(浮所門峙), 부소령으로 직산현과 목천현의
각종 고지도에 그려져 전해진다.
백두대간 금북정맥(호서정맥) 부소산~서운산~칠장산과
한남정맥 안성~용인~수원~광주의 한성 백제(漢城 百濟)의 광주(廣州)로
이어져 <비류와 온조>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올랐던 용인(龍仁)의 한산(漢山) 부아산(負兒山-負兒岳)과도 이어진다.
서해바다의 어염과 직산, 성환, 안성, 평택 소사평(素沙坪) 100리 드넓은
곡창지대를 내륙으로 이어주고, 아산만 최상류에 위치하여 대중국(大中國)
무역항으로서 호서제일관문(湖西第一關門)의 역할을 다한다.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중심으로
<좌측엔 서운산성(瑞雲山城, 左聖山-左城山)>, <우측엔 성거산성(聖居山城,
右聖山-右城山)>이 익성(翼城)으로 배치되고, 남쪽으로 목천의 진산
작성산성(鵲城山城), 서북쪽으로 직산의 진산 사산성(蛇山城)이 남북으로
포진하여 천험지리 난득지세 천혜의 요충지를 자랑한다.
서해 아산만과 삽교천의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密頭里-밀머리, 해빈 미추홀
-海濱 彌鄒忽)에서도 <직산 하남위례성>은 한 눈에 잘 보인다.
부소산 북쪽능선에 신례산(新禮山), 신례사 터, 한림봉, 고려말 충간공 직산군(忠簡公 稷山君) 백문보(白文寶) 고향인 양대리, 조선시대 민복(閔福)의 묘와 위례산성 아래의 옛날 나라에서 제사 올렸다는 국사봉(國師峯), 남쪽엔 온조대왕이 위례성에 와서 처음에 머물렀다는 깊은골(深谷)과 금강발원지(錦江發源地), 온조왕이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곡간리(곡대), 국보 209호 보협인탑이 발견된 대평리 탑골(구룡사 터), 백제때 군대가 주둔했다는 군단이(軍團),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때 시장이 섰다는 장생이, 위례성 전투에서 죽은 군사의 무덤이 있다는 납안리(納安里)가 있고, 위례산성 아래엔 범이 자주 울었다는 범우래, 우례골, 백제 9명의 시랑이 살았다는 구시랑이골, 시장, 무술을 연마했다는 도장골,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는 호겨니(虎見里), 진채봉, 금성사(錦城寺)가 있고, 직산엔 마한 목지국 진왕정(辰王井)과 온조왕묘(溫祚王廟) 터, 제원루(濟源樓) 터, 백제 개국공신 하남백(河南伯) 조성(趙成)의 묘, 직산의 진산인 사산성(蛇山城)이 있고, 백제때 나라에서 쓰기 위해 구리로 둘러 만들었다는 우물인 불그머리(赤井) 등의 지명과 유적지가 현존하고 있슴.
<부소산>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慰禮忽)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이었다. 그런데 아(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夫斯)가 침투한 것이다.
고구려 건국 수도 졸본의 강은 비류나, 보술수, 송양(沸流那,普述水,松壤)으로 불렸다. <보술→松, 나→水ㆍ壤>의 대응을 나타내므로 <보술>이 松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나(那),라(羅)는 모두 땅(壤·地)을 뜻한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나>,<라>가 합쳐져 현대의 순 한국어인 ‘나라(國)’가 파생됐다.
보술(普述)은 이후 부사(夫斯), 부소(扶蘇)로 변화하였는데 백제의 첫 번째 수도 위례홀의 뒷산은 ‘부사악(夫斯岳, 負兒岳)’으로 불렸다.
개성(開城)의 옛 이름은 부소압(扶蘇押)이었다. 이후 소나무<솔>의 한자어가 이름에 들어가 ‘송악(松嶽)’이 됐다.
백제는 천도로 인해 위례홀(稷山)→한홀(漢城)→고마(公州)→소부리(扶餘)로 바뀌었다.
<<< 출처...백제어연구... 도수희 교수 >>>
< 위례성 > --- 吾心竹 尹鐘一 詩 ---
위례성 부소모이 물 따라 일 백리 길
소사하 沃澤田畓 기장 벼 베어내니
오리 떼 군무되어 하늘을 덮는구나
쌍령산 차령고개 산 따라 일 백리 길
곡교천 沼澤田畓 수수 조 걷어내니
참새 떼 이리저리 낱알을 쪼는구나
곡교천 소사하에 백성들 모여드니
집마다 굴뚝연기 태평을 누리나니
성벽을 둘러막고 백제라 이름하네
밀머리 산꼭대기 서해를 바라보며
온조왕 세대박이 대양을 누비나니
뉘라서 칠 백년 대업 허무타 말을하리
위례성(慰禮城) ---신흠 詩
오래전 백제국 느낌도 하많은데---舊國自多感
동풍은 위례성 옛터로 스치네----東風慰禮墟
흥망성쇠 모두 과거사 되었고-----興亡從古事
누벽은 이미 모두 허물어졌구료---壘壁已全虛
가느다란 관교로 길은 이어지고---路入官橋細
주막은 쓸쓸히 연기속 희미하네---烟稀野店疎
청산은 한가닥 연이어 있는데-----靑山連一髮
남쪽을 바라보니 부여로구나------南望是扶餘
--- 신 흠 (申欽, 1566~1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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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 위례성 회고 >
어느 세월 백제는 이곳을 경영했던고
황량한 유허엔 초목만 무성할 뿐
천고흥망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요
삼국의 형세는 빈 하늘 밝은 달빛일세
강물은 흘러 사산군을 안고 굽이치는데
위례성 들판을 휘감아 굽이 치는구나
영령들께 조문코져 해도 물어 볼 이 없고
목메어 우는 검가소리에 홀로 맘 상하네
何年百濟此經營 (하년백제차경영)
惟見丘墟草木平 (유견구허초목평)
千古興亡天已老 (천고흥망천이로)
三分形勢月空明 (삼분형세월공명)
河流曲抱蛇山郡 (하류곡포사산군)
野色橫蟠慰禮城 (야색횡반위례성)
欲弔英靈無可問 (욕조영령무가문)
劍歌嗚咽獨傷情 (검거오열독상정)
학 주 김 홍 욱 詩
(鶴洲 金弘郁, 1602~1654)
***직산 부소산 부소령의 위례고성 이정표...금북정맥(호서정맥) ///
***부소령에서 바라 본 백제의 진산...부소산(459.1m, 458.7m) 전경 //
***북면 군단이에서 본 부소산 부소령...//
***부소산과 부소령(부소문령, 부수문이 고개...입장 양대리~북면 운용리, 납안리)
***북면 곡간리에서 싸리재 입구에서 본 위례산의 모습 //
***멀리 중앙의 산...위례성(위례산성, 위례고성)
***북면 납안리에서 본 성거산(579m, 성거산성) ///
<<< 오심죽...백제초도 직산 부소산 위례성...부소령 입비식...2009.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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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백제 - 해양제국의 건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그냥 방치되고 있었다. 그나마 1,3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놀라운 역사적 사실과 함께 사라진 백제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특히 523년 5월 무녕왕(武寧王)이 죽자 만들어진 무녕왕릉이 1971년 발견됨과 함께 백제의 실체가 비로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하나하나 밝혀지는 백제사를 통해 우리 정신의 지평을 넓히고 활발한 개척정신과 해양민족의 면모를 가다듬자.
1. 백제는 '해양제국'이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만국과 해양은 제패한다'는 뜻을 담아 백제라 하였고 국가가 존속하는 내내 바다를 따라 뱃길을 따라 해외영토를 개척한 나라였다. 그리스·마케도니아 등 해양을 제패했던 지중해 국가들이나 영국과 네덜란드를 보라. 본국의 영토는 작았지만 짧게는 1세기에서 수 세기에 걸쳐 해상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이렇듯 백제의 활동공간도 상식을 뛰어 넘는다.
해양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항해술과 조선술은 기본이다. 항로를 알고서야 바다로 나설 수 있으며 해도(海圖)나 바다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먼거리도 갈 수 있는 원양선·무역선이 있어야 한다. 한국배의 원형으로 손꼽히고 있는 백제선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250m의 길이에 150명이 승선할 수 있는 규모의 배가 나온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동남아는 물론 인도양까지도 능히 갈 수 있는 것이다.
2. 백제는 본국의 임금(王)을 정점으로, 담로를 통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담로란 말은 '다물 즉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말에서 나와 담장을 뜻하는 '담'자와 나라를 뜻하는 '라'자를 합성한 담라로 변했고 이를 다시 한자로 적으면서 담로로 바뀐 듯하다. 그래서 '담을 두른 영지', '새로 개척한 영토(정복지)'를 뜻하는 말로 쓰였는데 해양국가 백제가 다스리던 영토를 왕족이 직접 지배하는 지방 지배체제였다.
이제 우리가 22담로의 영토와 역사를 다시 찾고자 한다면 그 소리(발음)가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가야 한다. 뜻은 소리에 담겨있는 채 이두식 표기로 한자를 통해 전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대문리(다문리, 다물리)·대수리(수=물)·다문리·탐라·대마도, 일본에는 다마다(玉名, 남나·탐나), 중국남부에는 담수만·담수도·담수갱, 대만에는 담수행·담수사 등지가 담로가 다스린 지역으로 밝혀졌으며 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지에까지 넓게 펴져 있다.
3. 백제인의 활약상이 일본 역사의 기원 및 초반부에 대한 진정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일본서기는 신화의 형식을 빌어 음(陰)과 양(陽) 두 신 사이에서 인간이 나고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그 인간이 담로(淡路)다. 즉 백제의 담로는 일본의 지도자이자 개척자이자 정복자였던 것이다. 실제로 큐슈에는 4 내지 7C에 걸쳐 청동거울이 33개가 나왔다. 이는 백제 왕급 담로의 무덤에서 나오는 지위 및 신분의 상징인 만큼 백제의 세습적 지배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왕급 지배자에 의해 다스려진 증거인 것이다. 일본서기에 최초로 등장한 나라 「日向の國」도 일본열도 최고(最古)의 흔적이자 최초의 국가로서 백제계의 소국이었다.
이후로도 큐슈·오사카·나라 등지로 이어지는 백제의 일본경영사는 계속된다. 아스카 조상신으로 추앙하는 인물도 5C에 활약했던 실존 인물로서 백제의 곤지왕(백제 개로왕의 동생. 아스카베 신사의 주인)이다. 아스카를 일으킨 담로로서 훗날 백제의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이 각각 그의 둘째, 첫째 아들이다. 당시 백제 본국은 고구려에 패퇴하여 개로왕이 참수되고 문주왕은 웅진(熊津. 곰나루) 천도를 단행한다. 그리고 문주왕은 곤지왕과 연합했으나 결국 귀족에 피살당하고 이어 임금에 오른 동성왕도 피살되면서 곤지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형인 사마왕(斯麻王. 무녕왕)이 본국왕인 백제왕에 오르면서 정국은 안정된다. 이처럼 당시 일본열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백제의 영토이자 일부였던 것이다.
큐슈 다마나시에 있는 6 또는 7C 경 일본 최고·최대 유물인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횡혈식 석실고분 형식에다가 백제계 유물인 금동신발과 금동관이 나왔다.
전방후원식 고분은 앞은 긴 사각형으로 네모지고 뒤는 둥근 형으로써 하늘에서 보면 열쇠모양 비슷하다. 이 양식은 세계에서 백제에만 보인다. 전남 영암 등 옛 백제지역에서 가장 원형적인 형식이 나오면서 큐슈→아스카 지역으로 옮아 갔다. 즉 오사카·나라 일대까지 퍼져나간 것이다. 특히 미네가즈카 고분은 백제인 고분 중에서도 일왕가(천왕가) 못지않은 위세를 자랑한다. 물론 그 무덤의 주인은 일왕 못지않은 세도를 누린 백제계 인물일 것이다. 또한 아스카 천총이라 불리는 1천여기의 고분도 횡혈식으로써 백제 것이다.
훗날 백제멸망 후에는 큐슈 미야자키현 난고촌에 정가왕(미카도 신사에 모셔진 백제왕) 일족이 도착했고 기조정에는 그의 맏아들 복지왕이 자리잡는다. 그러나 신라군과 신라계 추격군이 오자, 이에 저항하던 정가왕과 복지왕은 결국 전사한다. 지금도 다노정(쎈켄 신사에 모셔진 백제왕) 등 큐슈 여러 곳에 백제왕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얼마전에 정창원(正倉院)을 재건축하고 스스로 백제마을이라고 부르고도 있는 등 백제에 관한 여러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당시 백제인들이 단순히 교역하고 체류하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을 정복하고 지배한 지배자였고 주인이었다.
4. 백제가 다스린 대륙지역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백제는 중국 대륙에도 영토를 개척했으며 요서와 진평을 대륙치소로 삼았다. 요서는 유성(柳成. 요령성 조양시)과 북평(北平. 하북성 노령시)사이의 영토였다. 동성왕대에는 위의 동맹요구를 묵살하고 위와의 488년, 490년 2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대륙에서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진평은 광서장족 자치구 일대인데 지금도 백제향(百濟鄕. 남녕[南寧]지역)과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장족은 한족도 동남아족도 아니다.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특히 사람모습은 구분할 수 없게 같다. 부뚜막, 맷돌(그중에서도 아래로 즙이나 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놓은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고, 특히 백제지역에 많음), 외다리방아(전라도·일본 등 백제권에만 나옴)가 있다. 그들도 그들 조상이 아주 먼 옛날 장사하러 또는 전쟁 때문에 산동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산동지역이 어딘가. 당시 이 일대 해안 지역은 백제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우리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 아닌가.
또한 백제는 요서와 진평 사이에 있던 지역도 대륙해안을 따라 점령하였으며 광양·광릉·청하·성양·동청주 태수 등이 다스렸다.
그리고 우현왕·좌현왕 등 숱한 백제왕이 등장하는데 다들 대륙지역을 다스리던 담로다. 백제는 이후 본국을 중심으로 대륙지역은 '서조(西朝)', 일본은 '동조(東朝)'라 하여 직접 통치하는 구도를 통치구조의 근간으로 삼았다.
5. 남방지역으로도 백제인의 발길은 이어졌다. 뱃길이 가는 데로 어디까지든 갔던 것이다. 본국이 멸망하자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원래 부여씨였지만 남방지역의 왕(담로)으로 봉해지면서 흑치로 그 성씨를 바꾼 것이다. 또한 554년 부남(캄보디아)의 노예를 일본에 선물을 주고, 565년 탑등(북인도 지방 양탄자) 선물, 641년 곤륜(인도차이나 일대) 관련 기록이 나오는 등 남방 지역에서도 백제인의 해상활동은 눈부시다.
6. 그러나 663년 백제가 주유성(州柔)마저 함락당하자 완전 멸망했고 대륙지역에 있던 백제인들은 돌궐·말갈지역으로 흩어져 갔고 백제왕의 적통이었던 부여숭(崇)도 본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은 670년 국호마저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출발을 하기 시작했고 광서지역·동남아 지역의 백제인들도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30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가벼이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너무나 위대했던 해양제국 백제라면 다시금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백제의 담로 위치도, 일본에서의 백제 관련행사 일정표 등을 작성하여 해양국가 백제의 역사를 우리 생활의 일부로 소중히 삼아야 한다. 항해를 꿈꾸는 대학생이라면 그 길을 따라 가보기 바란다.
'역사는 전설과 신화의 파편으로 흩어지고 남는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쳐 가노라면 역사와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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