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의 진산,왕자산을 아시나요? 잃어버린 역사를 고스란이 간직한 곳이 바로 왕자산이다.
일제치하 후 100년의 시간을 거스르면 천하의 명당이요. 오룡쟁주, 즉, 오룡이 여의주를 물고, 다투는 지세를
가진 곳이 바로 천하제일의 명당, 그곳이 바로 왕자산이다. 왕자산은 고려태조가 왕자산에 올라 오룡쟁주의 형세를 보며 천안도독부를 설치,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실현시킨 곳이기도하다. 천안(天下安泰→天下大安→天安)을 존재케한 곳도 진산 왕자산이며 55만 천안의 안식처요. 역사가 용틍임하는 곳도 바로, 왕자산이다. 천안의 진산의 왕자산을 재 조명하며 “天安의鎭山,王字山을 찾아서”라는 자료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진 왕자산을 고찰해보자. 천안시 안서동에 자리한 각원사 좌불상이 있는 곳, 태조산(太祖山)이 때로는 천안의 진산으로 막연히 생각했지만, 고금(古今)의 자료와 사진, 인공위성 사진을 분석하며 고찰해 보자.
이 책의 저술자 윤종일(직산읍 군동리.48)씨는 “천안의 鎭山 王字山을 재 조명하는 것은 천안의 상징이자 이정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천안이란 이름의 유래가 왕자산에서 태생되었고, 오룡쟁주형의 진산인 왕자산 아래 천안도독부를 설치하여 (고려 태조13년,서기 930년) 삼천민호를 이주시켜 천안이 왕자산에서 태어났으며, 천안을 낳고
키워준 어머니와 같이 우뚝 서있는 산이 바로 왕자산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古地圖에 나타난 천안의 鎭山왕자산(王字山)] 1. 동국여지승람
2.동국지도
3. 조선팔도지도 왕자산은 신은역(단대입구(역말)) 앞산이라고 분명히 그려져있으며,성거산 주맥에서 흑성산의 중간에 서쪽으로 북일면에 속해있다
성거산에서 북서진 능선은 영인지맥으로 천안~직산간의 무넘이고개며, 직산의 입장천~성거천이 여기서 발원한다.
성거산과 왕자산의 둥근 안쪽이 문암지 와백석대,국민은행 연수원이다.
4. 대동여지도(1861) 성거산의 望日嶺(일명-만일령) 아래 신은역 맞은편이 왕자산이라고 그려져 있으며,직산과 경계 역시 점선으로 표시됐다. 경계되는 지점이 영인지맥으로 천안~직산의 성거 요방리로 넘는 무넘이(水越,무네미)고개다.
신은역(단대입구(역말)) 뒷산에 염고현(鹽高峴단국대,북일고 뒷산)이라 하였고,이어지는 능선에 직산의 양전산(良田山)이 아산의 봉수대 연암산(월랑초등학교 뒷산)이다.
5. 여지도
왕자산은 성거산~태조산 능선이 아닌 영인지맥쪽에 분명히 별도로 그려져 있으며,현재의 성거산~상명대 갈림길 방향이다. 이곳 상명대학에서 유려왕사의 유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1961년 밭가는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는 삼거리 공원에 복원돼있다.
6.지방지도(1872년)-천안군 왕자산은 여태조주군우차(麗太祖駐軍于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이곳에 군사를 주둔했다고 돼있다.
7.인공위성에서 본 왕자산
이렇듯 왕자산은 고지도, 인공위성 사진에서 보듯 충분히 천안의 진산임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고기록에서도 왕자산이 천안의 진산임을 밝혀보자 [왕자산의 고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 안서동 지명유래]
왕자산(王字山)은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고려 태조왕건이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다투는(오룡쟁주형)형세라 아뢰어 보루(堡壘)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왕자산은 바로 그 산의 모양이다.
또한, 유려왕산(留麗王山)은 고을 동쪽 11리에 있으며 목천현의 경계이며,현 태조산으로 추정된다.( 유려왕사(留麗王寺)고려 태조가 유숙했다하여 이름이 명명됨)
또, 마점사는 고려 태조가 말을 머물게 했기 때문에 이름을 마점이라 했으며, 고려 태조묘(太祖廟)는 왕자성,
고정(鼓庭) 모두 왕자산 밑에 있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음)
신은역(新恩驛)은 고을 북쪽 10리에 있고, 조선 성환 도찰방에 예속되었던 28개 역중의 하나며, 종6품(從 6品) 문관이 주관했으며, 현재의 천안시 안서동 단국대 입구 (역말)이다.
북일면(北一面)은 관아로 부터 초경(初境) 5리며 종경(終境)은 15里다.현 안서동일대)며, 쇠목고개(우수치(牛首峙))는 중암마을 호서대~유량동으로 넘는 고개로 태조산과 왕자산을 연결한다.(소가 누워있는 목부분에 길이 났다고하여 쇠목고개)
안소골(安棲谷-안서골)은 벌명당 북쪽의 골짜기로 무넘이 골짝의 가장 깊숙한 곳이며,사람들이 편안히 쉬며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해 안서골이다.)
고지도와 고기록에서 살펴보듯이 왕자산의 위치는 천안시 안서동 산 60번지, 산 59번지, 산 38-4번지, 산78-4번지,산73번지, 산 69번지, 산 98-4번지, 산 6번지, 산 10번지,산 116번지, 산 117번지일대의 산을 이며,현 상명대학교, 백석대학교, 국제대학교의 뒷산이다.
각원사 좌불상과 성불사를 둥근 원으로 포용하고 있으며, 풍선의 입구와 같고, 입구(호서대~상명대)만 막으면 천혜의 요새며, 왕자산우측으로 영인지맥(천안~직산의 무넘이)이 외성처럼 막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천안의
진산다운 위용과 공수(攻守)의 요지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왕자산은 동쪽으로 각원사 좌불상 능선과 맞닿은 목천읍 덕전리 유왕골과 접하며,동남으로 태조산(유려왕산으로 추정됨)과 목천의 진산인 흑성산이 보인다.
서쪽으론 단국대와 북일고 천안 두정동의 노태산, 직산의 미륵산, 아산의 용와산까지 조망되며, 영인지맥이
아산만까지 뻗친걸 볼 수 있다. (직산界~천안界)
남으론 천안 오룡쟁주의 핵심인 관아터(현재 중앙초교)가 있었던 오룡동, 대흥동, 유량동과 광덕산까지 한 눈에 조망되며, 북으로 금북정맥에서 분기하는 영인지맥(영인산,입암산)과 직산현과의 경계인 무넘이 고개와 (천안시 안서동~성거읍 요방리), 경부고속도로가 입장천을 따라서 안성평야, 직산,평택의소사벌(소사평-素沙坪)과 경기도 양성면의 鎭山들도 한 눈에 보인다.
또한 유왕골은 산악 분지와 같아서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쳐 방어가 용이하며 공격 또한 사통팔달으로 진군이 가능하며, 이렇게 잘 조망되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있는 산이 바로 천안의 진산
왕자산, 왕자산성이며, 이곳에 보루와 축대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자연적 요건 때문이다.
윤종일씨는 “앞으로 이곳을 보존하고 잘 가꾸어 후손에게 빛나는 유산으로 물려 주자”며 “천안시 55만 대도시의 상징물로 널리 홍보하고 보존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천안의 진산 왕자산의 보존과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재 평가를 통해 천안이 한국의 중심지로 우뚝서고 정확한 고증을 통해 역사의 재 발견을 기대해 본다.
▲ 여러각도에서 본 왕자산 왕(王)자모양의 왕자산 왕자산에서 본 천안시 왕자산 정상에 세워진비 | | 김헌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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