稷山邑 行事記

직산 12경...백제초도 하남위례성...위례성~사산부~ 직산현~직산읍

吾心竹--오심죽-- 2009. 8. 14. 11:44

<<< 직산의 12경...2009.8.11(화)...직산읍사무소에서 각급 단체장님들과 최종확정 >>>

 

제 1 경 :  사산성(성산)에서 본 위례성의 일출

제 2 경 :  직산현 관아

제 3 경 :  직산향교

제 4 경 :  제원루지와 노송 숲

제 5 경 :  도영지

제 6 경 :  휴류암(남산바위)

제 7 경 :  백제개국공신 조성의 묘역 (직산조씨 시조)

제 8 경 :  미륵산 충장사

제 9 경 :  일서면의 배꽃 

제10 경 : 거봉포도

제11 경 : 직산의 황금 들녘

제12 경 : 양당호의 풍경

 

***천년고도 <직산읍>의 아름다운 풍경들입니다.

***<천안12경>엔 단 1개도 없지만 <직산12경>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제초도사 하남위례성의 베일이 벗겨질 때 직산의 참 역사는 시작됩니다.

----------------------------------------------------------------------------------------

 

제 1 경 : 사산성(성산)에서 본 위례성의 일출

 

소재지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산13-2 

시   대 : 삼국시대

 

흙으로 쌓았으며, 테뫼식[山頂式] 산성의 외곽에 접속하여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연장한 복합형이다. 테뫼식 산성의 2중성벽 사이 내부를 가로질러 포곡식 산성의 성벽이 축조된 것으로 보아 테뫼식 산성을 먼저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테뫼식 산성의 규모는 평면형으로 보았을 때 동서 300m, 남북 150m로 총 둘레는 750m이다. 

포곡식 산성은 백제시대인 6세기 전반에 쌓은 것으로 보이고,

테뫼식 산성은 마한의 진왕(辰王)이 다스린 목지국(目支國) 시기 혹은 백제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산성은 직산의 진산이며, 토성으로 청동기의 무문토기,백제,신라시대의 유물이 발굴됨.

직산은 본래 백제 온조대왕이 도읍했던 <하남위례성>이었고, 고구려가 취하여 사산(蛇山)으로

개명하고, 고려초 직산으로 개명한 이래 현재까지 직산(稷山)으로 불림.

 

역사적으로 1,000년 넘게 논쟁이된 <백제초도 직산 위례성>을 사산성에서 본 위례성을  선정함.

 

 

 

 

 

 

 

 

 

 

 

 

 

 

 

 

 

 

 

 

 

 제 2 경 :  직산현 관아(稷山縣 官衙)

 

소 재 지 : 충남 천안시  직산면 군동리 327-8,18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42호 (천안시)

 

조선시대 직산현의 지방행정관청이다. 북쪽에서부터 내동헌·외동헌·내삼문·외삼문 4동의 건물이 남쪽에서 약간 동쪽을 향해 기울어진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가장 앞쪽에 위치한 외삼문은 관청의 정문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아래층 3칸에는 3문을 달아 동헌으로 통하도록 하였고 위층에는 마루를 설치하였다.

건물의 가운데 칸에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호서계수아문---호서지방 경계 첫머리의 마을 아문이란 뜻임 // 

 

 

 

 

 

 

 

 

 

 

 

 

 

 

 

 

 

 

제 3 경 :  직산향교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109호  

*지정연도 :  1997년 12월 23일 

*소 재 지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164-1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997년 서재를 복원하였다. 면적은 3,458㎡이다.

대성전·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동서협문·홍살문·수복사로 구성되며, 내삼문은 평열문, 외삼문은 솟을대문이고,

동서로 협칸이 1칸씩 있다. 

 

5성위(공자·안영·증자·자사·맹자)와 중국 송의 2현, 국내인 18현(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이 배향되었고,

김안국의 친필 액자와 경서류, 선생안(先生案)·선안(仙案)·절목(節目)·노비안·전답 문기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제 4 경 :  제원루지(濟源樓址)와 노송 숲

 

제원루(濟源樓)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산9-1 , 산8-2


직산관아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직산 제원루(濟源樓) 詩 .....四佳亭 徐居正 (1420~1488) >>>


백제유허초자평(百濟遺墟草自平)-백제의 유적 남은 언덕엔 풀만 스스로 자라나고,

아래감개일상정(我來憾慨一傷情)-내 이곳에 와 보니 감개무량한데 한켠엔 맘 상하는구나 .

오룡쟁파천안부(五龍爭罷天安府)-천안부에는 다섯마리 용이 싸움을 끝내였고,

쌍봉명잔위례성(雙鳳鳴殘慰禮城)-위례성에는 두 봉황새의 울음소리만 쇠잔하구나.

시조사심홍수합(始祖祠深紅樹合)-백제시조 온조의 사당에는 단풍나무만 짝하여 붉기만한데,

성거산옹벽운횡(聖居山擁碧雲橫)-위례성있는 성거산엔 푸른 구름이 가로 비껴 가리였구나.

등루다소추풍사(登樓多少秋風思)-제원루에 오르니 가을 바람은 이런일 저런일을 생각케 하는데,

하처취잔철적성(何處吹殘鐵笛聲)-어느곳에서 불어대는 태평소 소리는 그저 쓸쓸하기만 하구나.


註)

    *오룡쟁파-고려 태조 왕건은 똑같은 성거산자락 천안의 진산(鎭山)  왕자산(王字山)에서 국력을 정비하여

                 궁예,견훤을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일.

     *쌍봉-졸본부여를 떠나 직산에 내려 온 백제의 비류와 온조 두 분을 일컬음.

     *옹(擁) : 가리다.

     *철적(鐵笛) : 날나리 , 태평소(太平簫)

     *온조왕묘(1429년 7월 세움...세종11년/예관을 보내 봄,가을 향축함/1597년        

       선조30년 정유재란때 소실됨)-직산현 서북3리-산직촌의 진왕정을 말함.

     *제원루 : 백제의 기원이 되는 누각(현재의 직산초교 뒷산에 있었슴)...

                 백제초도(기원전18~기원전6...13년간 도읍함...직산 하남위례성)


 

 

 

 

 

 

 

 

 

 

제 5 경 :  도영지

 

도영지(倒影池) : 장명다리 아래에 있는 못...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89 


(전설) :

예전에 남산이 있는 부엉바위가 굉장히 험상궂어 날마다 곡식 천석을 허비하는 상이므로

직산 고을이 이것으로 인하여 가난해진다고 하여 그대로 두면 직산 고을이 큰 일이라고 해서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그 험상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곳에 큰 못을 파서

바위 그림자로 거꾸로 비치게 하여 기능을 상실케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수축하지  못하였다.

그 후 부터는 직산 고을에 큰 부자는 안나고 작은 부자들만 난다고 전해온다.

 

장명다리(長命橋) :

군서리 앞들 가운데 있는 다리.  옛 사형장이 장명교 건너에 있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지 않아야 

명이 길다고 하여 장명교라 했다고 한다.

 

 

 

 

 

 

 

 


 

제 6 경 :  휴류암(鵂鶹岩..부엉이바위, 남산바위)


 鵂鶹岩..부엉이바위 전설...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산14-1 

 

예전에 남산이 있는 부엉바위가 굉장히 험상궂어

날마다 곡식 천석을 허비하는 상이므로 직산 고을이 이것으로 인하여 가난해진다고 하여

그대로 두면 직산 고을이 큰 일이라고 해서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그 험상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곳에 큰 못을 파서 바위 그림자로 거꾸로 비치게 하여 기능을 상실케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수축하지  못하였다.

그 후 부터는 직산 고을에 큰 부자는 안나고 작은 부자들만 난다고 전해온다.

 

* 휴류암에 올라서면 직산읍치와 금북정맥 서운산~부소산~위례고성~성거산~왕자산~흑성산이

   한 눈에 조망되며, 영인지맥의 용와산~연암산~영인산도 조망된다.

   남산바위(부엉이바위)와 마주한 옥녀봉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하여 직산의 상징이다.

   바위의 모양은 각종 동물의 형상을 많이 닮았다하여 예로부터 직산의 명승으로 꼽히였다.

 

 

  

 

 

제 7 경 :  백제개국공신 조성의 묘역(직산조씨 시조)

 

 *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산7-4, 325-1

 

 백제시조 온조왕과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백제 개국을 도운 인물.
「직산조씨 갑자대동보(稷山趙氏甲子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조 성(趙 成)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 제 11대 황제, 재위기간 : 기원전 32 - 7) 때 주몽(朱蒙 :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百濟創業)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준연(俊連)과 손자(孫子) 입충(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시조의 손자(孫子) 입충(立沖)으로부터
고려 말기(高麗末期)에 이르기까지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합문지후사(閤門祗侯使)에 올랐던 원우(元祐)와 병부 낭중(兵部郞中) 원경(元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복원(復元), 태자 첨사(太子詹事) 영원(永元), 조선(朝鮮) 때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응원(應元) 등 다섯 계통(系統)으로 갈라져서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직산을 본관으로하고,직산 조씨의 시조인 백제개국공신 하남백의 조성의 묘역을 선정함.
 

 

 

 

 

 

 

 

 

 

 

 

 

 

 

 

제 8 경 :  미륵산 충장사(彌勒山 忠壯祠)

 

 *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마정리 산63-1

 

황세득 [黃世得, 1537~1598]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때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벽파정·고금도 싸움에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순천의 예교에서 왜적을 협공하다가 전사하였다.

 

출생지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고려조에서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17세손으로, 성주황씨(星州黃氏)의 시조이다. 자는 사구(士求)이며,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稷山邑)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사촌 처형(妻兄)이다.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광량첨사(廣粱僉使)·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량첨사(蛇梁僉使)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 휘하에서 벽파정(碧波亭)·고금도(古今島) 싸움에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도독(都督) 진린(陳璘)과 더불어 예교(曳橋)에서 왜적을 협공(挾攻)할 때, 선봉(先鋒)으로 분전(奮戰)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직산읍 마정리(馬井里) 용와산(龍臥山)에 있다.

 

황박 [黃珀, ?~1637]


본관 성주(星州). 충남 직산(稷山) 출생.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명(明)나라 사신이 왔다가 돌아갈 때 마침 후금(後金:淸)이 선양[瀋陽]과 랴오양[遼陽]을 함락하여 육로(陸路)가 막히자 자원하여 해로(海路)로 명나라 등주(登州)까지 전송하고 들아왔다.

1634년(인조 12)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낸 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러 고령(高齡)으로 퇴관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 휘하에 종군, 용인(龍仁)전투에서 적군에 포위되어 분전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숙종 때 그 부자(父子)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지고,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직산을 대표하는 무장으로 임진왜란의 명장...황세득장군과 황박의 묘...한산도가(閑山島歌)를 선정함 //

 

 

 

 

 

 

 

 

 

 

 

 

 

 

 

제 9 경 :  일서면(一西面)의 배꽃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난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이뤄 하노라... (이조년 시조)

 

직산 전역에 아름답게 피는 배꽃.

하이얀 눈송이 깔아 놓은 듯 고운 꽃

직산의 특산물인 배.

 

 

 

 

  

 

 

 

 

 

제 10 경 : 거봉포도

 

직산을 대표하는 먹거리, 특산물인 거봉포도.

알맞은 일조량과 질 좋은 토질에서 생산되는 명품 거봉포도.


전국적으로 명성을 알아주는 명품 거봉포도를  선정함.

 

 

 

 

 

제 11 경 : 직산의 황금 들녘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직산의 사금광이 이곳 저곳에 있었고,

햇빛, 바람, 논 농사가 잘되고, 비옥한 터전의 황금들판...

풍요의 상징으로 직산을 대표하는 쌀.

마루 뜰, 양전 뜰, 마정 뜰, 삼은 뜰, 판정 뜰의 벼농사...

직산의 역사와 농경문화가 이 황금 들판에서 시작되었슴.  

 

 

 

 

 

 

 

 

 

 

 

 

 

제 12 경 : 양당호(良堂湖)의 풍경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양당리 309

 

양전리와 당곡을 통합하여 양당저수지라 불림.

수량이 풍부하여 관개수리가 용이하고, 풍부한 어족자원은 낚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주변의 배밭과 논배미의 풍요함은 양당저수지의 자랑이고,

특히 주변의 도시화로 한 밤의 월출과 주변 야경은 특히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 직산고을 오심죽...직산의 아름다운 12경...2009.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