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고성혁
(2007-05-16 17:52:05, Hit : 6574, Vote : 35)
Subject
우리가 묻어버린 한성백제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신형함정에 올릴만한 백제장군은?
어제인가 발제글 중에서 새로 건조되는 함정에 역사적인 위인들, 그 중에서도 장군들 이름 선정하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는지요? 수많은 전쟁 900여회의 침략을 받았어도 굿굿이 헤쳐나왔다는 우리민족의 유명한 장군을 막상
꼽아 보려니 솔직히 몇 10손가락을 넘길려니 힘이 들었을 줄 압니다. 특히 백제의 장군을 거론하려니 계백장군을 딱 말하고 나면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백제 장군은 신형함정에 올릴만한 장군이 진짜 없었을까요?
2. 계백장군의 무덤은 진짜일까?
그리고 부여에 있는 계백장군의 묘도 진짜인지 사실 의심스럽습니다. 승전국의 장군무덤도 거의 모르는 판국에 계백장군의 묘가
진짜인지 저로서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5천결사대가 거의 몰살당했다는 상황에서 누가 패전장군의 전사체를
알아보고 수습하였을까 하는 상식적 상황에 접근해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인 것이 승전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쟁에 지면 역사 또한 왜곡을 넘어서 뭍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뭍혀버린 한성백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항상 그랬듯이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묻혀버린 한성백제
▼ 풍납토성 안내간판
저 곳이 바로 우리가 묻어버린 한성백제의 터입니다. 저곳에 살고 있는 회원분들도 꽤 있으리라고 봅니다. 초기백제 위례성터가 어디인가하는
많은 논란끝에 현재는 거의 풍납토성이 바로 초기 한성백제의 왕궁터일것이라고 학계에서는 거의 굳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이야기를 하자면 또 일부에선 이병도 박사가 어쩌구 저쩌구 할텐데 그 부분은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에
논외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과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의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몽촌토성을 묘사한 서울모형(몽촌역사관)
그럼 시대적 상황은 언제일까요? 바로 고구려 최전성기때 입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그 때입니다. 서기로는 475년입니다.
몽촌토성내에 몽촌역사관에 해당 자료가 참 잘 꾸며져 있습니다.
다음그림은 풍납토성의 절개단면사진입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백제초기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쌓은 토성으로 볼때
토성의 축성법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흙을 일일이 채로 쳐서 한층한층 다져서 왠만한 비에도 끄떡않도록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밑면이 40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축성법은 일본에도 전해져서 오사카 근방의 고대 토성은 바로 백제식의 토성이라고 합니다.
현재 풍납토성의 일부 복원 모습입니다. 이 풍납토성안에서는 기원전후로부터 하여 한성백제가 망할때까지의 각종 기와파편 및 토기류가
엄청나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아는 바람에 그 지역은 현재와 같이 아파트와 주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원히 묻혀버린 한성백제가 된것이죠. 당시 문화재 발굴로 인한 공사지연때문에 이에 항의하는 아파트 입주자의 데모는
뉴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500년이 지난 후 그 장소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었던 것이죠.
남들의 역사왜곡을 비난하고 그것에 목소리 높여 흥분하여 말하지만 이렇게 우리 스스로 묻어버린 우리의 역사현장에서
그 의미를 다시 음미하는 것은 국방력 강화운동 못지 않은 일이라 판단합니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3만 군은 한강을 건너서 한성백제 도읍을 포위한 7일만에 함락시키고 당시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군에 끌려가 지금의 아차산성에서 참수되는 굴욕을 맞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적 접근을 통해서 그 전투를
재구성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 대한 상세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외적의 침탈을 워낙 많이 받다 보니 그런 것 아닐까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여기서 또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3중의 해자까지 둘려쳐진 한성백제의 위례성이 어떻게 7일만에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병자호란때 남한산성도 함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40여일간의 농성끝에 스스로 항복을 하였고 또 안시성의 경우엔 끝까지
버틴 역사적 사실도 있습니다. 게다가 한성위례성은 일반적 산성이 아니고 해자가 둘러쳐진 그런 성입니다.
해자가 둘러쳐진 대표적인 일본의 성같은 경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을 함락시킬때도 결국 속임수로 해자를 메운후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수왕의 고구려 군은 7일이라는 단시간에 백제의 위례성을 무너뜨렸을까요?
▼ 풍납성의 모습 (멀리 워커힐 아파트뒤가 고구려의 아차산성이다. 개로왕이 참수된 한성백제의 굴욕의 장소이다)
질문 3 :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백제 최전성기 근초고왕으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개로왕때인데 최정성기의 백제군의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고구려군이 7일만에 성을 함락한 것은
그 무엇인가의 비밀이 있지 않았을까요?
* 김훈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26 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