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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구성 마북동서 한성백제 유적 발굴

吾心竹--오심죽-- 2009. 3. 30. 13:49

구성 마북동서 한성백제 유적 발굴
총 71기 구덩이 중 삼국시대 원형 수혈 유구 64기 나와
인근 보정동 신라고분묘 등 구성일대 삼국 각축지 재확인
2008년 12월 31일 (수) 함승태 기자 stham@yongin21.co.kr

   
▲ 입구보다 바닥으로 갈수록 더 넓어지는 복주머니(삼각 플라스크) 형태의 수혈유구 모습.

   
▲ 64호에서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흑색마연토기가 출토됐다.

기흥구 마북동 442번지 일원 근린생활시설부지 내에서 한성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64기의 원형 수혈유구(구덩이)를 비롯해 백제시대 수혈주거지 1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1기, 근세분묘 5기 등 71기의 구덩이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2006년 8월 경기도 기념물 제215호로 지정된 할미산성과 석성산 유적 등 용인 중심부 산악에 위치한 관방유적을 비롯해 지난 2003년 발견된 6~7세기 추정의 보정동 신라고분군 등을 종합해 볼때, 이 일대가 삼국시대의 각축지였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되는 순간이다. 마북동 한성백제 유적이 알려주는 비밀은 무엇일까.

# 군사보호지역의 구릉지 지난10월 시굴조사

용인 기흥구 마북동 442번지 일원은 영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신갈분기점의 북동쪽에 접해 있다. 해발 104.8m의 독립구릉이다. 이곳은 오랜기간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지역으로 근린생활시설인 소매점, 휴게음식점 등을 계획하고 있던 곳이다.

조사면적은 약 1,950㎡(600여평)으로 (재)한국문화유산원(원장 박상국)이 지난 8월, 매장문화재 조사 후 보고를 전제로 한 조건부 허가를 얻어 10월부터 시굴조사를 시작했다. 4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확인된 것은 다수의 원형구덩이였다. 단면을 잘랐을때 바닥이 입구보다 더 넓어지는 복주머니(삼각 플라스크) 형태의 수혈유구(구덩이)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해당되는 한성백제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이번 시굴조사를 담당한 한국문화유산원 측의 설명이다.

   
▲ 회청색 경질토기
64기의 원형수혈유구 중 60기가 깊이 180㎝ 이상이고, 4기만이 100㎝ 이하다. 대부분의 원형수혈유구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데, 64호 원형수혈유구에서는 회청색경질의 옹, 흑색마연토기 등이 확인됐다. 48호 수혈유구의 경우에는 2기가 중복된 상태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와같은 수혈유구를 학계에서는 한 때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토실’로 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저장창고일 가능성에 한층 무게를 두는 상황이다.

한국문화유산원 조사단 측은 “한성백제시기의 대형 수혈유구 64기가 500여평의 좁은 면적에 밀집되어 있는 양상은 드문 일로서,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의 집단적인 저장수혈의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주변에서 계속 확인되는 백제유적들과 연관시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유적과 같은 성격의 유구가 조사된 유적으로는 용인 구갈동유적, 용인 보정동 고분군, 용인 서천지구 조사지역, 오산 내삼미동유적에서 동일한 성격의 수혈유구들이 조사된 바 있다.  

#한성백제 유적의 향토사적 의미

이번 마북동 한성백제 유적은 무엇보다도 용인지역을 중심으로 삼국시대 세력관계와 지배시기 등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표1>에서 보듯 죽전동 백제 주거지, 삼막곡 삼국시대 취락 유적, 성복동 통일신라 요지 등 삼국과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고루 발견됐다. 여기에다 신라가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할미산성과 석성산 등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이 치열하던 시기, 각국의 역사적 흔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미 청동기시대 유적은 경기남부지역에서는 비교적 많은 수의 고인돌과 선돌이 확인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풍덕천에 위치한 임진산성과 남사면 봉명리 유적, 죽전동 대덕골 유적 등에서 수혈식 주거지가 확인됐다. 언남리· 청덕리 등지에서는 백제토기편들이 수습된 바 있다.

신라·통일신라시대 유적은 고분이 다수 조사됐다. 운학동·유방동·언남동·죽전동·보정동·동백동 등에서 다수의 석실분과 석곽묘가 확인됐다. 이중 보정동에서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석곽묘 25기 등 100여기의 고분이 소실봉 부근에서 조사되기도 했다.

두 번째로 갖는 의미는 선사시대의 청동기 유적과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와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용인지역에서 확인된 역사유물과 유적만으로도 한국사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역사의 학습현장으로 갖는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자원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들어 용인의 랜드마크 설정 움직임과 할미산성 복원 추진 등과 맞물려 한성백제 유적 발굴은 적지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 공중에서 내려다 본 발굴 현장. 다수의 원형구덩이 모습이 선명하다. 시굴조사 결과 한성백제시대의 수혈유구(구덩이) 64개가 확인됐다.

   
▲ 기흥구 마북동 한 생활근린시설 예정지였던 시굴조사 현장 원거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