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坡平尹氏) 발복지 윤관(尹瓘) 장군 묘
|
윤관장군묘
|
|
윤관장군묘 전경
|
|
산맥도
|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44명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다.
또 왕비 4명을 배출해서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5명으로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조선시대에 총 정승수가 365명이었는데 이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 12명, 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 11명으로 6위를 차지하는 등 파평윤씨가 명문(名門)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라 하여 잉어를 잡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시조 윤신달과 윤관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평(坡平)의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윤씨(尹氏) 성을 가진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다.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에게 포위되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지만 건널 배가 없었다. 이때 잉어 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윤관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적군이 장군의 뒤를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신(尹彦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신(尹彦 )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문강공(文康公) 윤언신(尹彦 )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원사(元師)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西京)함락 때 큰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나라에 다녀왔고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사(元師)가 되어 이를 정벌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인물이다.
윤인첨의 아들 3형제 윤종악(尹宗 ), 윤종성(尹宗誠), 윤종양(尹宗양)도 대과에 급제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3형제씩 대과급제함으로써 이들 집안을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이라 불렀다. 또 이들 후손 중에 참판공(參判公) 윤민신(尹民新)이 있었는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급제하였고 이중 한 사람이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가문에는 급제자가 많은 만큼 과거(科擧)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파평윤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이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윤호(尹虎),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이조판서에 오른 윤곤(尹坤), 태종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향(尹向), 수양대군의 장인이며 대사헌, 우참찬을 지낸 윤번(尹 ), 윤번의 아들 3형제인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 ), 윤사흔(尹士昕)은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윤번의 딸은 제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는 같은 시기에 왕비가 2명이 나왔다.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 그녀는 제12대 왕인 인종(仁宗)을 낳았다. 제2계비(繼妃)는 윤지음의 딸로 제13대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 윤임), 소윤(小尹, 윤원형)의 지목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하여 20년 간 서로 죽고 죽이는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도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 윤호(尹濠)의 딸이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른 윤희재(尹希齋), 청백리로 녹선되고 시문에 능해 호당(湖堂)에 뽑힌 윤현(尹鉉), 중종 때 우의정인 윤인경(尹仁鏡),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윤증(尹拯),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 영조 때 영의정인 윤동도(尹東度), 일제치하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이고 한국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윤봉길 의사도 파평윤씨다.
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묘지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한다. 사람도 경호원이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귀한 사람이지만 산도 귀하게 본다. 때문에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이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하고 험한 기운을 모두 털어 버리고 순수한 생기(生氣)만 모아 혈을 맺는다. 이때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치도록 하여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인속기법으로 최종적으로 용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어 기를 모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좌우선룡법으로 내룡(來龍)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용맥의 끝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이때 물이 우측에서 흘러나오면 용맥은 좌측으로 돌아야 하고, 물이 좌측에서 나오면 용맥은 우측으로 돌아야 음인 용과 양인 물이 서로 음양교합을 할 수 있다. 이를 좌선수(左旋水)에 우선룡(右旋龍), 우선수(右旋水)에 좌선룡(左旋龍)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 번째는 태식잉육법으로 현무봉 중출로 처음 나오는 용을 태(胎), 과협이나 결인속기처럼 잘록하게 변화하는 것을 식(息),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에 기를 모아 마치 아이밴 모습과 같은 잉(孕), 아이를 출산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혈을 육(育)이라 부른다.
용맥이 혈을 결지(結地)하였는지 여부를 살필 때는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세 가지 현상 모두가 있을 때도 있는데 윤관 장군 묘가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너무 많은 정비를 하여 이를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 관리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예산을 들여 성역화(聖域化)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꼭 대대적인 사업을 해서 원형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파괴다. 또 문화재는 조형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도록 한 지형도 중요하다. 주변 땅을 파헤치고 석축(石築)을 쌓으면 물길과 지기(地氣)가 변해 문화재에 나쁜 영향을 준다. 이러함에도 대대적인 정비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문화재 범위에는 지형까지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철령 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현등산), 수원산, 죽엽산, 광릉 용암산을 거쳐 축석령을 지난 다음 양주군 주내면 불국산(470m)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한북정맥은 산성, 호명산을 이루고 의정부 뒤 산맥을 따라 남진하여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으로 이어진다.
파주 일대로 오는 산맥은 의정부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칠봉을 만들고 장흥유원지를 이루는 꾀꼬리봉과 앵직봉(621.8m), 계명산(621.3m)을 지나 뒷박고개를 넘은 다음 박달산을 만드니 이곳의 소조산(小祖山)이다. 박달산에서 기세 장엄하게 광탄 쪽을 향하던 산맥은 분수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넓은 국세(局勢)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었다.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 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윤관 장군의 생애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그의 묘를 떠나면서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되고 고구려와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방정책 같은 것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