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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의 목지국에 辰王井 샘솟으니
소사벌 오곡백과 풍요를 자랑하네
사산성 鎭山으로 千年古都 이어가네
아산만 뱃길따라 동으로 노저으니
위례산 높은봉에 성벽을 둘러치고
열명의 도움받아 十濟를 건국했네
弘慶寺 불타올라 民心이 요동쳤고
맹간교 화포소리 倭敵을 격퇴했네
湖西의 제일관문 蛇山城 우뚝하네
성거산 흑성산을 지척간 마주보며
외야곶 서해대교 중국배 들락날락
望海山 옛 봉수대엔 흰갈매기 높이나네
**진왕정(온조묘 터)--직산 판정리 산직촌 뒷편의 우물..온조대왕제를지냄.
**외야곶(外也串)--직산현의 월경지로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일대의 지역.
**망해산(望海山)봉수대--직산현의 봉수대--평택 팽성의 경양포 뒷산/ 지금은 야구장으로 사용중 /
아산의 연암산, 입암산~양성의 괴태길곶(홰대기곶)과 호응함/평택 포승읍의 해군2함대 사령부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유(兪)ㆍ백(白)ㆍ조(趙)ㆍ전(全) 모두 촌성(村姓)이다. 경양(慶陽) 김(金)ㆍ조(趙)ㆍ백(白)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천안부(天安府)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봉황(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시조(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聖居山)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馬]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孔子)의 상달(上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평택(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 『신증』 신원(新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명환】 본조 이영구(李英耈)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인물】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찬(匝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恭愍王)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효자】 본조 봉유지(奉由智)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戲)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噪古墟幽)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방면】 동변(東邊) 끝이 5리. 서변(西邊) 끝이 5리. 일동(一東)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동(三東)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일남(一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남(二南)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서(一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서(二西)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삼서(三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북(二北)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경양(慶陽)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언리(堰里) 서북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 외야곶(外也串) 수원(水原) 서남쪽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진의 북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주D-002]운몽택(雲夢澤)……트였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가슴 가운데 운몽(雲夢) 같은 것 팔구(八九)를 삼켜도 조금도 걸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운몽은 초국(楚國)에 있는 큰 못이다.
[주D-003]학야(鶴野) :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 때문에 요동(遼東) 들판을 학야(鶴野)라 한다.
[주D-004]동산에……배웠네 : 맹자가, “공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보셨다.”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달한다.”[下學而上達] 하였다.
[주D-005]어찌……종알종알하리 : 한유(韓愈)의 글에, “지금 벼슬하는 이들은 삼성(三省)에 숙직 차례가 되면, 이불을 가지고 들어 가면서 계집종을 돌아보며 집안일 부탁하는 말이 종알종알하는데 오늘 은원외(殷員外)는 만리 밖 회골(回鶻)로 사신이 되어 가는 장도(壯途)에 오르지만,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D-006]닭을……말이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학생들의 현가(絃歌)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며, 자유에게 “닭을 잡으면서 소 잡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그것은 작은 고을에 천하를 다스리는 예악(禮樂)을 가르친다는 말이었다. 조금 뒤에 공자는, “나의 말은 희롱이었다.” 하였다.
[주D-007]송아지 머물러 둔다 : 진(晉)나라 양편(羊篇)은 청렴한 관원이었다. 자기의 소[牛]를 관사(官舍)에서 길렀는데 송아지를 낳았다. 그 뒤 옮겨 갈 때에 그 송아지는 관사에 두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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