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화로모양 토기의 우아함 / 구멍있는 토기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22

화로모양 토기의 우와함

 화로모양 토기(=노형토기)는, 화로를 접하지 못한 세대들에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트로피모양의 토기라고 보면 된다.
 이 화로모양토기는 그릇받침대로 제작된 것과, 화로모양토기로 따로 제작된 것으로 나뉠 수 있는데, 때로는 정확히 어떤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 판단하기 힘든 작품도 있다.

삼한(三韓) / 원삼국(原三國)시대 화로형토기
(흑회색노형토기)

입지름 : 20 cm / 높이 : 17 cm 와질(瓦質)토기
소장처 :경북대 박물관

 입구부분이 약간 밖으로 벌어져 있으며, 목은 직립하였고 몸체와 연결된 부분이 낮아서 몸체쪽에 약간 턱이 진다. 

입구 내외면에 물레로 손질한 흔적이 있으며,  목에는 약하게 줄무니가 돌려져 있으며, 토기 전체에도 회전 물레손질 흔적이 있다. 



 신라(新羅)시대 만들어진 경질노형토기

입지름 : 26 cm / 바닥지름 : 23.6 cm /
전체높이 : 23.5 cm
출토지 :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시(金海市)
소장처: 부신시복천 공립박물관

 입구(구연부口緣部)는 몸통과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위로 길게 벌어졌으며 윗부분에 1줄의 돋을띠(돌대突帶)를 돌출시켰다. 몸통(胴體部)은 둥글고 납작하며, 굽다리(臺脚部)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졌는데 중간에 1줄의 돋을띠를 돌렸고 그 윗단에 4개의 세로로 좁고 긴 사각형 굽구멍(透窓)을 뚫었다.

 내, 외면 전체에 작고 검은 점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바탕흙 속에 함유된 잡물들이 열에 녹아 분출한 것이다.


 그릇받침(器臺)은 밑이 둥근 항아리 등의 그릇을 올려 놓기 위해 만들어진 받침을 말한다. 삼국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지역에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화로모양토기(爐形土器)는 넓은 아가리, 둥글고 납작한 몸통, 넓은 지름의 굽다리를 부착한 것이 기본모양이며 굽구멍(透窓)이 뚫려진 것도 발견된다. 



단경호(짧은목항아리) 및 노형기대

단경호; 입지름 : 17 cm / 높이 : 21.8 cm /
노형기대; 입지름 : 38 cm / 바닥지름 : 36.2 cm / 높이 : 28 cm / 전체높이 : 32 cm
조장처 : 경북대 박물관


회청색 경질의 노형기대이다.  그릇을 받치는 수발부는 화로형 토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입구가크게 벌어지고 중위에 1쌍의 돌대가 돌아간다. 돌대 아래에는 이중원문(二重圓文)이 세겨져 있는데 아래의 이중원문은 촘촘히 베풀어져있다.

 구연과 몸체는 1쌍의 돌대에 의해 구분되고 몸체는 구(球)를 반으로 잘라 놓은 형태이다. 상부에 2쌍의 돌대가 돌아가고 각 돌대 위에는 안에 작은 원이 있는 역삼각형과 삼각형이 1쌍인 시문이 찍혀있다. 

몸체와 굽다리 역시 한쌍의 돌대에 의해 구분된다. 나팔형의 굽다리엔 8개의 긴직사각형 투창이 뚫려있다. 

몸체 내외면에서 도장을 찍은 흔적이 일정하게 나타나고 지문 흔적도 일부 같이 나타난다.  


  위의 사진처럼 출토될 때 화로형토기 안에 항아리가 겹쳐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바닥이 둥근 항아리를 올려 놓는 받침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있다. 다만 이처럼 완형으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편이다.

가야에서 만들어진 노형토기
높이 : 16.3 cm / 높이 : 16.3 cm / 입지름 : 22.2 cm / 받침지름 : 26.9 cm
출토지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
소장처: 국립김해박물관

 노형토기는 학자에 따라 노형기대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납작한 형태의 동체를 가진 노형토기는 노형기대라고 보기 어렵다. 어깨가 상당히 강조된 형태이다.
 그러나, 옆의 토지처럼 일부는 노형토기로 보아야 할지 노형기대로 보아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기형도 확인된다.



굽다리가 강조된 형태의 노형기대
*굽다리가 강조된 형태는 금관가야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는 형태이다.

입지름 : 24.5 cm / 바닥지름 : 20 cm / 높이 : 28.4 cm
소장처 : 경북대 박물관

 수발부는 화로형으로 구연부는급격히 벌어지고 구연단은 요면(凹面)을 이룬다. 목은 잘록하게 들어갔고 1조의 돌대가 있다. 굽다리(대각)는 수직적으로 내려오다가 급격히 넓게 벌어진다. 대각은 돌대에 의해 5단으로 나뉘며 각 돌대는 1조이다. 삼각형 투창은 4개씩 일렬로 뚫려 있다.

 토기 내외면에는 회전물손질이 되어있다


 기대는 수발부(受鉢部: 그릇을 받쳐두는 부분)와 대각부(臺脚部 :굽다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구분할 수 없는 똬리 모양도 있다. 납작바닥 토기가 널리 쓰인 고구려에서는 출토 예가 없으며, 둥근바닥 토기가 유행한 백제, 신라, 가야에서 주로 발견된다. 

화로모양의 그릇받침은 영남지방엣 삼한 후기부터 널리 쓰인 화로모양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신라와 가야 영역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백제영역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영역에 비해 절대적으로 양이 적어 널리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굽다리 위에 물질 및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넓고 깊은 부위를 지니고 있다.


설명및 자료출처 http://www.emuseum.go.kr문화재청 이뮤지움)

화로형 기대는 이처럼 우와하며 넉넉하며 풍만한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토기를 받치는 보조적인 용도로 주로 이용되긴 하였지만, 보조용품이라는 느낌보다는 화로형 토기 자체로서 가지는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구멍있는 토기 -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토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저장이다. 그리고 저장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구멍같은 것은 뚫려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구멍이 뚤려져 있는 토기가 흔하게 제작되었다. 도데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쓰는 물건이었을까?

둥그런 몸체(胴體)에 아랫부분이 좁으면서 외반하는 목이 있고 구연부(口緣部)가 넓게 되어 있는 기형(器形)을 하고 있으며, 특히 몸체의 가운데 부분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주요 출토지및 연대

 구멍있는 토기는 유공호라고 하는데 대체적으로 토기의 입구가 몸체보다도 넓고 목이 긴 것이 특징이어서, 넓은입 구멍토기 또는 유구광구호(有孔廣口壺)라고 부른다. 또 항아리 크기는 대부분 20cm를 넘지 않는 작은 항아리에 속한다.


 토기에 구멍을 뚤는 방식은  청동기 시대에도 있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처럼 토기표면을 완전히 통과하는 형식이 아니라, 토기 입술 아래에 한줄이나 두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찍은 것으로, 실용적인 면보다는 장식용으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었다.`열공토기(列孔土器)` `유공토기(有孔土器)`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릇 아가리 주위에 구멍을 뚫는 수법은 이미 시베리아 지방의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보이며, 한국은 물론 일본 북해도의 죠몽토기에도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민무늬그릇 중 깊은바리꼴에 많이 나타난다.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서기전 1세기경까지로 볼 수 있다.


구멍무늬그릇의 구멍 자체가 완전하게 관통된 예는 드물며, 다만 후대에 구멍으로 인해 튀어나온 질흙이 떨어져 나가 구멍난 경우가 많다.


이 토기의 형식 변천을 보면 처음에는 목이 몸체 높이보다 좀 낮고 단순하게 밖으로 벌어진있는 것에서, 점차 목의 길이가 길어지고 입술 부분에 단이 있는 반구형(盤口形) 구연이 있는 것이 나온다.


높이 : 11.0 cm / 입지름 : 11.2 cm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
관동대 박물관 소장



이 구멍 뚫린 항아리는 몸체에 비해 목부분이 약간 길고 구연(口緣)이 넓은 항아리로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라고도 불리운다.

구연부(口緣部)는 깔대기 형태이며 동체(胴體)는 둥근형이고 어깨 밑부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으며 바닥은 둥근밑(圓底)이다.


입지름 : 8.3 cm / 전체높이 : 9.5 cm / 구멍지름 : 1.3 cm
기하문(幾何文) / 사선문(斜線文
대전대 박물관 소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토기의 기능에 대해서는 첫째 조그만 구멍에 대나무관을 끼워 술 등의 액체를 따르는 용기로서 후대 주자(注子)의 원류로 보거나,
둘째 맹세나 의식을 행할 때 마시는 그릇으로 보는 견해,
셋째 기름 등잔으로 사용한 경우,
넷째 고배 등과 같이 제사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견해 등이 있으나 일본의 한 유적에서 구멍에 나무깔대기가 꽂혀 있는 것이 출토되어 주자로서의 기능이 강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는 공모양(球形)의 몸통(器身) 중앙에 둥근 구멍(圓孔)이 뚫려 있고, 나팔 모양의 넓은 입구와 긴 목을 갖추었다.

 넓은 아가리의 상반부(上半部)에는 굵은 돋을띠(突帶)가 돌려져 있고, 그 바로 위에 선대(線帶)와 접하여 10개의 쐐기형 장식을 붙였다. 몸통 중앙에 뚫려 있는 구멍(圓孔)은 위에서 비스듬히 뚫었다.
백제계통의 구멍토기중 대표적인 형태이다.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높이 : 13 cm / 입지름 : 13 cm /
구멍지름 : 1.5 cm
전라남도(全羅南道) 해남군(海南郡)



 이 토기는 입구부분이 깨어져 있고, 소송상태도 다소 좋지 않지만 굽다리 토기중에도 구멍을 뚫은 토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김제·고창 등의 전북지역과 북쪽으로는 충남 홍성 신금성(神衿城) 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나 동래 복천동 등 낙동강유역에서도 출토된다.

 

대부유공광구소호
대구카톨릭대학



장군모양의 구멍토기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와 마찬가지로 의례(儀禮)를 행할 때 몸통 중앙에 있는 구멍에 죽간(竹竿)과 같은 대롱을 꽂아 내부의 내용물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나눠먹음으로써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지기 위해 사용한 보고있다.

 장군이라고 하면 요즘세대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오물이나 분뇨등을 담아 나르는데 흔하게 쓰던 물건이다.
 아래 사진처럼 마치 드럼통에 큰 깔대기를 꽂아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거의 완형으로 발견된 이 토기는 장군형토기의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몸통 중앙에 입구를 만들고, 몸통은 구경부를 중앙에 두고 2조의 돌대를 돌려 4구획하였다.

 옆으로  배가 부른 원통모양의 작은 용기로 위에는 별도로 제작하여 붙인 아가리가 있다. 원래 장군은 지게에 얹어 인분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한 용기인데 이 토기는 일반적인 장군형 토기와 형태가 같으나 몸통의 한쪽 중간에 작은 구멍을 내었다.

몸통의 전면에 점선문을 그려 넣었는데 변화를 주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나타낸다.


한국(韓國) / 가야(伽耶)
대구 카톨릭대학소장


한국과 일본 구멍토기의 연관관계

일본에서도 한국도질토기문화의 영향으로 성립된 스에끼(須惠器)의 주요 기종 가운데 하나로서, `ハサフ`라는 옛 명칭에서 유래하여 하수오(瓦泉)라 불리우고 있다. 그 기원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영산강유역에 분포밀도가 가장 높고 형식발전상 고식(古式)에서 신식(新式)으로의 변천상도 보여주고 있어, 이곳에서 고안된 특유의 토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다만 그 조형을 낙동강하류역에서 출토되는 소형에 넓은 입의 작은항아리(圓底廣口小壺)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스에무라(陶邑)의 TG232호 가마 등 초기 스에끼단계부터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유역 토기문화가 일본 스에끼 성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역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출토되고 있어, 일본 열도와의 활발한 교류관계를 보여즈기도 한다.
그러한 예로 5세기 말무렵으로 편년되는 나주(羅州) 복암리(伏岩里)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것은 스에무라 15호 가마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며, 고성(固城) 송학동(松鶴洞) 고분의 굴식돌방무덤에서도 일본산으로 여겨지는 것이 가야계·영산강계·신라계 토기들과 함께 출토된다.

이 토기의 연대는 구체적인 결정 근거가 빈약한 편이지만, 대체로 5세기 전반 무렵 출현하여 6세기경까지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스에끼의 출현 연대가 4세기 말-5세기 초까지도 편년되는 최근의 경향을 감안할 때, 영산강유역에서 유공광구소소의 형성 시점도 4세기대로 소급될 여지가 출분히 있다.

  생활유적보다 주로 매장유적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의례 행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및 자료출처 : 문화재청 이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