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서울 땅이름의 변화 서울 유래 서울 지명 서울 역사

吾心竹--오심죽-- 2010. 4. 1. 11:09

서울 땅이름의 변화 서울 유래 서울 지명 서울 역사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 땅이름

전체공개 2009.09.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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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이름사랑(이름에 관한 모든 것)

 

사대문 안의 서울이 강남까지 뻗어가
 - 위례, 남경, 한양, 한성, 경성, 서울 등 이름 변천도 심해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 도읍터를 한양으로 정할 때 가장 눈여겨 본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모양과 방어상의 우수성이었다. 당시에 무학대사, 조준(좌정승), 김세형(우정승) 등은 지금의 서울터를 보고 경치가 좋고 산으로 둘러싸여 수도로서 가장 알맞은 터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북쪽에 화산(華山;삼각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용이 내리고 범이 쭈그려 앉은 형세가 있고 남쪽은 한강으로 띠를 둘러----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곳'이라고 하여 서울의 땅모양이 지리-방어상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은 북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 등의 산이 가까이 울타리를 치고 있고, 그 밖으로 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 등의 산이 외곽을 튼튼히 두르고 있다. 안쪽을 두른 네 산을 '내사산(內四山)', 바깥쪽을 두른 네 산은 '외사산(外四山)'이라 한다. 한강이 외사산 안쪽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수운(水運)에 큰 구실을 하고, 그 유역에 넓은 평지를 이룬 것도 큰 장점이었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좋았다.
  태조 이성계가 5백 년 도읍지였던 개성을 버리고 여러 후보지 중 서울로 정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천도는 조선이 세워진 지 2년 후인 1394년에 이루어졌다.

 

 


□ 풍수-지리적으로도 머릿도시 입지로 최적

 

  신라 때부터 써 온 말인 '서울'은 '서벌' 또는 '서라벌'이 그 바탕일 것으로 보인다. 양주동 선생이 한글로 풀이한 신라 시대의 향가 <처용가(處容歌)>의 '새벌(서벌-서블)'도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이다.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나 '시림(始林)'도 '새벌(서블)'의 음차 이름으로 보고 있고, 백제의 수도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岳)', 태봉의 수도인 '철원(鐵原)' 등도 모두 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의 뜻인 이 '서벌-새벌'은 조금씩 음이 변하면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새벌>셔벌>셔블>셔불>셔울>서울
  서울은 주산인 북악(北岳)을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가 아주 잘 갖춰져 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맥은 주산인 북악에서 동쪽으로 뻗어 성북동의 응봉(鷹峰)을 거쳐 동대문 북쪽의 낙산(駱山)까지 이어진다. 우백호의 맥은 북악에서 서쪽으로 인왕산과 안산(鞍山)을 거쳐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뻗어내리다가 애오개[阿峴]와 큰고개[大峴] 등의 고개를 만들고, 계속 그 기세를 이어 용마루를 거쳐 마포 앞 한강가에 이르러서 머리를 수그리고 나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우백호의 마지막 산이 '용산(龍山)'이다.
  좌청룡-우백호가 잘 갖춰지고 주산 앞쪽으로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이 있어 장풍(藏風)의 풍수적 요건도 갖추었다.
  수도로 정해진 후 백악(북악),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이어 거의 원에 가까운 모양으로 약 19Km의 도성(都城)을 쌓고, 사방으로 동 서 남 북의 네 대문과 그 사이에 작은 문 넷을 내었다.
  조선시대의 서울 영역은 도성 안에 국한한 것은 아니고, 성 밖 10리까지도 포함했다. 이러한 지역을 따로 '성저십리(城低十里)'라 해서 성 안 지역과 구분하기도 했는데, 동쪽으로는 지금의 청량리-왕십리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남쪽으론 한강가 한남동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서쪽으로는 용산-마포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북한산 밑의 세검정-부암동까지 이르는 지역이었다.


□ 오랜 역사만큼 명칭도 많았던 서울

 

 

 


  조선 도읍 이전의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양(漢陽)인데 이는 신라 경덕왕 때부터 써 온 것이다.
  삼국 초기에 서울은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慰禮城)'이라 했다. 신라의 반도 통일 후 '한산주(漢山州)', 경덕왕 때에 이르러는 '한양군(漢陽郡)'이라 했다.
  고려시대에 와서 '양주(楊州)'로 개칭, 지방 군현으로 존속시켜 왔다. 1067년에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한 서울은 정치적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서울은 '한양부(漢陽府)'가 된다. 조선 태조 4년(1396) 6월부터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이 바뀌지만, 민중 속에서는 오랫동안 불려 왔던 '한양' 또는 '서울'이란 이름으로 불려 왔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은 '경성(京城)'으로 바뀌지만, 광복을 맞아 '서울시'로 되면서,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글식 법정 지명이 나오게 되었다. 다음해 8월에 와서 서울은 자유특별시로 승격된다.
  조선시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은 크게 다섯으로 나누었다. 즉, 1397년, 수도의 영역을 성 안의 지역과 성 밖의 지역(성으로부터 대체로 10리에 이르는 외곽 지역)으로 정한 후, 행정구역을 5부(五部) 즉 북부, 남부, 동부, 서부, 중부로 나눈 것. 각 부는 10개 안팎의 방(坊)을 관할하였는데, 초기에는 모두 52방(坊)이었다. 그 방 밑에 계(契), 또 그 밑에 동(洞)이 있었다. 속담 중에 '동네방네 소문났네'의 '동네방네'는 당시의 행정구역 단위인 '동(洞)과 방(坊)의 안(內)'이란 뜻의 '동내방내(洞內坊內)'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행정구역이 그 뒤로 조금씩 바뀌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부-방-계-동의 지명들은 광통방(廣通坊), 황토현계(黃土峴契), 상백동(上栢洞) 식의 한자로 붙여졌는데 사람들은 '너븐다리', '황토마루', 웃잣골' 등으로 많이 불러 왔다. 광통방은 지금의 광교 부근이고, 황토마루는 세종로 네거리 일대, 상백동은 혜화동 일부이다.
  일제 때에 와서 한때 서울이 사대문 안으로 국한되었다가 뒤에 문 밖의 경기도 지역을 흡수하여 경성부 관할하에 넣는다. 이 때, 경기도였던 마포, 용산 지역이 서울로 들어가고 영등포까지도 들어온다. 당시만 해도 영등포는 서울의 유일한 강남(江南) 지역이었다.
  광복 후 지금까지 많은 지역이 서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포함된 지역의 대부분은 한강 이남이었다. 경기도의 시흥이나 광주 지역 일부였던 강남은 강북에 못지않은 넓은 지역을 형성하면서 서울 전역의 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울은 이렇게 해서 이제는 '특별시'라는 이름으로 어느 도(道), 어느 광역시와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인구로 보아서도 세계에서도 몇째 안 가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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