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안성의 역사이해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6:18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이메일   kimsea6@naver.com 홈페이지   
파일첨부    조 회   185
제 목   안성의 역사이해
안성의 역사이해

<차례>

1.안성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2.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
3.고대의 안성지역
4.고려시대의 안성지역
5.조선시대의 안성지역
6.개항 전후의 안성지역
7.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의 안성지역




1.안성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①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역사공부의 목적은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②향토사연구의 문제점
☞향토사 연구는 지방적 시각으로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다.
☞향토사 연구자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하여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
☞그동안의 향토사연구는 객관성이 결여된 부분이 많았다.
그러므로 지역이기주의에 기인한 향토사해석을 탈피하고 객관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향토사 연구도 긍정적, 부정적인 요소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 역사란 부정적인 요소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

가.안성지역의 선사문화
안성지역은 한남금북정맥이 동북으로 뻗어 있어 동북쪽은 4, 5백 미터, 2, 3백 미터의 산들이 발달하였고, 서남쪽은 낮은 구릉과 평야 그리고 하천이 발달한 고장이다. 하지만 큰 강이 없고 동굴이 발견될 가능성이 적어 구석기유적이 형성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하지만 인근의 용인과 이천에서는 4, 5개 내외의 유적과 유물산포지가 발견되었으며, 안성지역에서도 1969년 고삼저수지 부근에서 후기구석기 유물인 자르개가, 그리고 공도면 용두리 부영임대아파트 건설현장에서도 몸돌과 긁개가, 공도면 승두리에서는 찍개와 격지가 발견되어 구석기유적의 발견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경기도박물관, 『안성천 Ⅰ-환경과 삶』, 2003

.
안성지역의 선사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청동기유적이다. 청동기 유적은 양성면 반제리, 방신리 등 고성산 자락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들 유적에서는 단단한 무늬 없는 토기가 많은데 대부분 산 정상부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주거지가 산의 3, 4부 능선 또는 7, 8부 능선에 위치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주거지가 높은 것은 당시의 농경이 밭농사 위주였고, 청동기가 들어오면서 정복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곳에 주거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나. 고인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인돌은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 불가리아, 에디오피아. 수단, 일본 등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이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2000~2500년 전의 것이 많다. 우리나라에 분포된 고인돌은 약 4만기에서 많게는 6만기로 추정한다. 매장된 유물로 판단할 때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판단되며, 이와 같은 매장방식이 사용된 기간은 4세기 이전(기원전 640~410년. 탄소연대측정 연도)에서 남방으로 내가면서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사이 200년에서 250년 사이로 이야기된다. 일반적으로는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개수와 짧은 사용기간 때문에 석관묘와 함께 당시의 일반적인 매장방식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고인돌은 양식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평안남도에서부터 북한강 서쪽, 황해도 일대와 만주와 중국의 동북부지역에 대부분 남아 있으며, 드물게는 전북 고창, 전남나주에서도 발견된다. 분포지가 주로 대동강, 재령강 등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역인 점을 들어 고조선 지배층의 무덤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돌방이 노출되어 있어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돌화살촉과 돌칼을 비롯하여 드물게는 청동검과 옥(玉)으로 만든 유물도 출토된다 한국전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2
. 남방식은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 4개 이상의 받침돌을 놓은 형태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초기(기원전 3세기~1세기)에 사용된 분묘이다. 주로 평지나 구릉에 많이 분포하며, 드물게는 산정상부나 계곡에서도 발견된다. 개석식은 뚜껑돌이 돌방을 직접 덮는 형식이다. 이 형식의 특징은 뚜껑돌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돌방 주위에 납작한 돌을 평탄하게 깔은 점이며,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된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표적 형식이다. 고인돌은 한 두 기가 독립적으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10여 기에서 많게는 100, 200기씩 무리지어 분포한다. 출토유물은 청동기보다는 반달돌칼과 돌화살촉이 대부분이며, 홈자귀, 돌창, 숫돌 등 피지배층의 생산도구들도 출토된다. 특징적인 것은 반달돌칼이 개석식에서 많이 출도되는 반면 돌도끼는 북방식과 남방식에 많다. 최근 평안남도에서는 비파형동검, 거친무늬 거울, 미송리식 토기 등 고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무덤의 주인은 일반적으로 혈연중심의 족장사회 지배층의 무덤 또는 고조선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부장품의 성격 때문에 단언할 수 없다.
안성지역에서는 공도면 승두리와 만정리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금광면 내우리에는 선돌이 있다. 형태는 개석식으로 판단되지만 받침돌을 확인할 수 없어 단언하기 이르다. 승두리 고인돌은 덮개돌 윗면에 지금 10센티, 깊이 5센티 가량의 8개의 혈(穴)이 뚫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안성시. 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 이와 같은 혈은 순천의 고인돌군이나 고창 등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인돌의 덮개돌이 제의(祭衣)적 용도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고대의 안성지역

가. 마한의 영역에 속했던 안성지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안성지역이 경기, 충청, 전라도에 걸쳐 있던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기록되었다 안성시, 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앞의 책
. 이 시기 안성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는 양성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신분활국(臣濆活國)이 있다. 또한 안성천 건너 직산지역에는 마한을 영도했던 목지국이 있었으며, 수원에는 모수국, 화성군에는 상외국 그리고 위치가 불분명한 대석색국, 소석색국 등 여러 개의 소국들이 있었다. 안성지역은 거리적으로 목지국과 신분활국과 가까워 이들 소국(小國)들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 온조집단의 남하와 안성지역
백제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며 건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온조집단의 남하위치는 하남위례성(이병도)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처럼 굳어졌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조 및 직산부근의 위례산, 위례성과 같은 지명들을 토대로 천안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직산설도 상당히 설득력 있다. 만약 직산설이 옳다면 안성지역은 초기부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 백제의 영역이었던 안성지역
삼국시대 한강유역은 삼국 항쟁의 중심지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최초로 안성지역을 지배한 나라를 고구려로 기록하였지만 현실성이 없고, 실제로는 백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기원전 5년) 조에는 백제의 경계를 북쪽으로 패수(浿水=한강),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안성천)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온조왕 24년(기원후 6년)에는 왕이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책망하여 헐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고이왕 5년(238년)에는 ‘부산(釜山=평택시 진위면)에서 사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초기 뿐 아니라 3세기 초까지도 지속적으로 백제의 관할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라. 고구려의 남하와 안성의 행정구역 변천
고구려가 한강유역에 있던 백제를 웅진(공주)방면으로 밀어내고 한강유역과 경기남부지역을 점령한 것은 기원후 5세기 후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원 후 475년 8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5세기 초 광개토왕 시기에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고구려의 남하 이후 국경은 서쪽으로 아산만, 남쪽으로 남한강 상류인 중원지방까지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안성지역도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나혜홀(안성), 사복홀(양성), 개차산군(죽산)이다. 홀(忽)은 고구려계 지명으로 성(城)을 의미한다.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아산만 유역을 상실한 시기를 백제 성왕이 한강하류지역을 회복한 기원후 551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고대국가에서 국경은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과, 특정 국가의 점령 시기 동안 확고한 통치가 이뤄졌다는 확신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483년 백제 무녕왕이 한산성에서 백성을 위무하고, 495년 고구려가 황해도 연백에 있던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였으며, 507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23년 무녕왕이 한성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마. 신라의 성장과 7세기 전후의 안성지역
신라가 안성지역을 점령한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백제로부터 한강하류를 탈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한강하류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6개 군을 지배하였는데, 이 때 안성지역도 신라의 영향 아래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한강하류를 점령한 목적은 당항성(진)을 확보하여 중국과의 교류창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당항성은 화성군 서신면의 당성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신라에서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충주를 거쳐 안성, 용인, 수원을 지나는 길이 유일했다.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신라는 564년 위진남북조의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후 수차례에 결처 사신교환이 있었다.
신라가 안성지역을 점령한 후 안성천 유역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양 국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은 백제 멸망 전까지 지속되었고,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뒤에야 안정되었다.

바. 통일 후 지방제도 정비와 안성지역
신라는 삼국통일 후 지방제도 정비를 실시하였다. 먼저 신문왕 때에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685년 9주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686년과 687년에는 주(州) 밑에 군(郡)과 현(縣)을 두고 중앙에서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다. 이후 경덕왕 때에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집사부와 함께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앙관제 및 지방관제가 재정비되었고 군현(郡縣)의 명칭이 한자로 바뀌었다.
안성지역의 행정구역도 경덕왕 때를 거치면서 재정비되었다. 예컨대 고구려 때 내혜홀(奈兮忽)로 불려졌던 안성은 백성군(白城郡)이 되었고, 사복홀이라고 불렸던 양성은 적성현(赤城縣), 개차산군으로 불렸던 죽산은 개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들 군현은 한산주에 속했으며, 행정적으로 청주의 서원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안성의 역사와 문화(1999)에 따르면 세 군현의 치소(治所)로는 적성현이 무한성 남쪽 산록, 백성군이 비봉산성, 개산군은 죽주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근거 있는 주장이다. 고려 초 이전의 치소는 군사적 방어에 유리하고 교통과 통신이 편리한 곳에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4.고려시대의 안성지역

가.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성장과 안성지역
안성지역은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겪으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후삼국 초기 주로 후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안성지역은 900년 왕건의 남벌을 계기로 후고구려(궁예)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후삼국 시기 가장 주목되는 지역은 죽산이다. 죽산은 중원경(충주)에서 개경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전투가 잦았으며 호족이 성장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 죽산지역의 대표 호족으로는 죽주박씨 세력을 꼽을 수 있다. 죽주 박씨는 고려 태조 이후 삼한공신으로 책봉되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평산 박씨 박수경 일족과 근본이 같은 가문으로, 박기오가 왕건에게 협조하고 광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안성지역의 대표 호족으로 행세하였다.
이와 함께 죽주산성에 웅거하며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훤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기훤은 초적(草賊) 출신으로 죽주산성을 근거로 큰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궁예가 891년 경 기훤에게 몸을 의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이 같은 인연 때문인지 죽산을 비롯한 안성지역에는 미륵신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죽산이 군사적, 지리 교통의 요지라는 점 외에도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민심을 모르려고 하였던 궁예의 영향이 후대까지 미쳤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 고려건국과 안성지역의 행정구역 개편
고려 초 안성지역은 중앙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교통과 군사적 요지라는 사실 외에도 왕건에게 귀부했던 죽주 박씨 세력의 영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때문에 신라 경덕왕 때 개산군으로 개칭되었던 죽산지역이 태조 때 죽주(竹州)로 승격되었으며(고려사), 태조부터 광종 대에는 화차사를 봉업사로 개명하여 대대적인 중건을 하였다.
건국 후 고려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안성지역의 행정구역은 신라 하대만 해도 안성지역의 백성군, 백성군의 영현이었던 양성의 적성현, 죽산에 개산군, 죽산과 이천 경계에 음죽현이 있었다. 또 직산 부근의 사산현도 백성군의 영현이었고, 특수행정구역으로 안성과 죽산 사이에 감미탄부곡, 마전부곡, 신곡부곡 등이 있었다.
행정구역 개편은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국가체제 정비가 본격화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 직 후(940년 경) 각 지방의 행정 명을 정비하였는데, 이 때 기존의 백성군이 안성(安城)으로, 개산군이 竹州(죽주)로, 적성현이 陽城(양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12목을 설치하고 외관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죽주에는 단련사(團練使) 고려시대 10도 12주 절도사 체제에서의 지방관. 이 제도는 고려 초기(995) 지방세력 통제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설치하였다. 단련사는 도(道)에 설치한 절도사, 작은 주에 설치한 도단련사 다음의 관직으로 주로 군사적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본다.
가 파견되었다. 현종9년(1018)에는 전국을 5도 양계를 바탕으로 3경(京), 8목(牧), 4도호(都護), 군(郡), 현(縣) 또는 진(鎭) 정확하게는 5도 양계,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이다.
으로 개편하였다. 이 때의 개편으로 안성과 양성은 水州(수주)의 영현이 되었고, 죽주는 광주에 예속되었다. 명종 2년에는 監務(감무)가 파견되었는데, 감무(監務)의 파견은 중앙의 통제력이 점차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 외세의 침입과 안성지역
교통이 발달한 안성은 외세의 침략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시대에는 항쟁의 중심이었으며, 이 같은 상황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안성지방과 관련된 외침으로 대표적인 것은 고려 후기의 몽고의 침입과 고려 말 공민왕 때의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왜구의 침입을 들 수 있다
몽고의 침입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30여 년 간 6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몽고는 1231년 8월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왔는데 귀주성에서 박서 등이 싸워 이겼으면서도 광주를 거쳐 충주까지 침입하였다. 2차 침입은 1232년 8월에 시작되었는데 고려 조정은 한 달 전에 강화천도를 하였고, 초기부터 고려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광주 남한산성에서 패한 뒤 용인 처인성에서 살레탑이 사살당하면서 대구지방까지 내려갔다가 퇴각하였다. 3차 침입은 고려 조정의 입보책으로 인해 백성들이 섬이나 가까운 산성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대규모 침입이 전개되었다. 이 때의 침입에서 고려는 각 지역에 파견한 방호별감과 입보한 민중들의 항전으로 죽주 죽주성전투는 1236년 방호별감으로 파견된 송문주 장군의 지휘 아래 백성들이 힘을 모아 공성전을 통하여 이끌어낸 승리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송문주는 조우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 충주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고군은 경주와 전북 부안까지 침입하여 민중들을 도륙하고 문화재를 불태웠다.
홍건적의 침입은 공민왕 10년(1361)에 있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경상도 안동까지 피난하였다. 이 때 양광도 다른 고을들은 모두 항복했지만 안성의 백성들은 거짓으로 항복하고 주연을 배풀어 유인한 뒤 적장 6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건으로 안성은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수준 관할이던 양양부곡, 감미부곡, 마전부곡, 신곡부곡 등 네 개 부곡이 안성으로 이속되었다.
안성에 왜구가 침입한 것은 우왕 3년(1377)부터다 『고려사 절요』 권 30
. 왜구는 기병 100여기로 안성천 하구를 지나 직산현 경양포(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를 거쳐 수주의 종덕(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과 안성으로 침입하였다. 하지만 양광도(현 경기도 일대) 원수 왕안덕은 가천역(현 원곡면 내가천리)에 주둔하여 부원수 인해 등에게 적의 퇴로를 막게 하였지만 적이 미리 알고 다른 길로 도망하므로 추격하다가 도리어 왕안덕은 부상당하고 군졸 4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후에도 왜구는 거듭 침입하여 공양왕 2년(1390)에는 안서을 거쳐 죽주, 괴산까지 침입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5.조선시대의 안성

가. 조선 초(1413) 8도제의 성립과 행정구역 변천
조선은 나라를 건국한 후 태종 13년 8월(1413)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이 때의 개편은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속현(屬縣)이나 향소부곡, 장, 처와 같은 특수행정구역을 폐지 또는 통폐합하고, 8도(道)제를 기본으로 부목군현을 설치한 것이었다. 안성지역의 행정구역은 안성현, 죽산현, 양성현 등 3개 군현으로 편재되었다. 그 가운데 안성현과 양성현은 본래 충청도였는데 지방통제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경기도로 이속되었고, 충청도 청주목 관할이었던 죽산현은 그대로 두었다가 세종 16년에야 경기도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에 죽주(竹州)가 죽산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안성현, 죽산현, 양성현 조
. 죽주가 죽산으로 바뀐 것은 지방제도의 격(格)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예컨대 군(郡)과 현(縣)의 이름에 주(州)자가 들어가는 것은 부(府)나 목(牧)과 격(格)이 맞지 않으므로 산(山)이나 천(川)으로 바꾸어 구별하려고 한 것이다. 죽산현은 임진왜란 후 국방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죽주산성이나 망이산성의 군사적 중요성과 이 지역이 일본 사신의 입경(入京)로로 이용되면서 부(府)로 승격(중종)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성현을 예속시켰는데 안성백성의 반발이 매우 컸다. 결국 백성들의 반발로 광해군 즉위년 8월에 안성을 분리 독립시켰지만 부(府)의 지위는 그대로 두었다.
군(郡)이나 현(縣)같은 일반행정구역 외에도 역(驛)이나 원(院) 또는 진(津)이나 도(渡)같은 교통 통신과 관련된 특수한 행정구역도 있었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가 지났던 안성지역에는 역과 원이 여러 개가 설치되었다. 세종 6년 2월에 정비된 역원(譯院)을 보면 안성지역에는 강복역과 광보원, 대비원, 소사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나. 임진왜란(1592~8)과 안성지역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기반을 뿌리 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오랑캐는 엄하게 꾸짖어 가르쳐야 한다(이황)”는 사대교린의 입장을 가졌던 조선은 날로 흉악해져 가는 왜구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 경상도 남해안의 성곽보수와 지역방어 정비만 힘을 쏟았다.
하지만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양상은 조선의 지배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고려 말의 왜구쯤으로 생각했던 왜군은 11만에서 14만 명 수준의 병력과 조총과 긴 칼 등으로 무장하고 한양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였다. 정부는 죽령, 조령, 남해안 방향으로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역전의 맹장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충주에서 신립이 크게 패하면서 조선은 더 이상 정규군으로 적을 막을 힘이 없게 되었다. 왕은 백성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피난길에 올랐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이순신, 원균, 이억기를 중심으로 하는 수군과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수군은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저지함과 동시에 보급로와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켜냄으로서 북상하면서 전선이 길어진 왜군의 보급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의병은 유격전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면서 왜군의 전력을 분산시켰다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속의 전쟁』, 청년사, 1997
.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지역은 교통의 요지이다. 삼국시대부터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요충에 위치한 안성지역도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지역은 가토오와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의 북상로에 위치하여 분탕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주둔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실록에는 왜란 초기 이덕형이 북상하는 화의를 요청하러 충주를 향해 남하하던 중 용인에 이르렀을 때 왜군은 벌써 죽산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592년 11월 말에는 용인 금령역에서 패한 왜구 4,500명이 죽주성에 머무르며 기회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선조실록』 권 36
. 왜군이 군사적 요지인 죽주산성을 장악하자 이를 빼앗으려는 관군과 의병들의 싸움도 더욱 치열해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전라도 초모사(招募使) 변이중의 죽주산성 탈환작전이다. 변이중은 1593년 1월 30일 경기도 조방장 홍계남의 지원을 받아 소 200마리를 앞세우는 ‘우차지계(牛車之計)’를 써서 적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의병활동으로 익산군수를 제수 받은 전라도 의병장 출신의 황진은 1593년 2월 30일 재차 공격을 시도하여 결국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왜군은 음죽을 거쳐 충주, 상주까지 퇴각하였다 『안성군지』, 1990
.
왜란이 시작된 후 안성지역에서도 전공을 세운 인물들이 여러 명 배출되었다. 오정방과 홍계남, 이덕남은 그 가운데 대표적이다. 오정방은 양성 덕봉(뫼)리 출신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왜란 중에는 도사(都事) 벼슬에 있으면서 함경도 영흥에서 의병 수 천을 모집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으며, 명나라 원군의 보급을 잘 담당하여 경상병사 겸 진주목사가 되었다. 홍계남은 부친 홍언수의 뒤를 이어 고종사촌 이덕남과 함께 안성에서 기병하여 의병 3천 여 명을 규합한 뒤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전공으로 경기도 조방장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다. 무신난(이인좌의 난)과 안성지역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은 조선의 정치구도 및 지방지배정책을 크게 바꿔 놓은 사건이었으며, 많은 지방 사족집단들이 명멸하여 향촌사회를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경종 때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들 죽인 소론(小論)이 경종 사후 노론(老論)의 추대로 영조가 즉위하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준비는 소론(小論) 강경파(준소)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되었던 남인의 일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한국전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사건은 윤휴의 손자사위였고 남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이인좌를 중심으로 태인현감 박필현, 전라도에 유배되었던 박필몽, 정온의 4대 손으로 경상도지역의 명문가였던 정희량 등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완소)가 등용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은 소론 내부의 위기의식을 가중시켜 김중만, 최규서 등의 고변으로 이어졌다. 결국 사대가 위급하게 전개되자 이인좌 권서봉 등은 양성(현 평택시 소사동)까지 올라와서 군대를 모집하여 한양을 노렸지만 여의치 않자 청주성을 함락시켰으며, 군대를 끌고 영남대로를 따라 진천을 거쳐 안성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반란군은 전라도와 영남의 동조세력과 합류하지 못하면서 전력이 분산되어 같은 소론계열의 오명항, 박문수 등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서운산성, 죽산전투에서 잇달아 패하였고, 영남의 반란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18세기 조선의 정치 뿐 아니라 안성지역의 사회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이 사건으로 소론(小論)계열은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노론(老論)에 의한 일당전제화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의 명분을 얻어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지방정치에 있어서는 지방사족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키고 수령권을 강화시켜 지방관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소론(小論)계열이 많았던 안성지역은 반란세력으로 권서봉, 권서린, 목함경, 정세윤 , 윤취상, 서문석 등이 가담하였고 안성시, 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 원곡면 지문리 등에 근거를 두고 있던 봉조하 최규서와 양성의 김중만, 양성면 덕봉리 해주 오씨와 같은 집안인 오명항, 병천이 고향인 박문수 등이 토포군으로 활약하면서, 반란세력에 가담한 집안은 몰락하고 토포세력도 점차 중앙에서의 권력을 상실하면서 지방세력화하였다. 이와 함께 안성지역의 여러 사족들이 반란에 가담하고, 양성, 죽산 등이 반란군의 주요 진격로로 이용되면서 안성지역의 수령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먼저 반란이 일이났던 영조 4년(1728) 3월 경 양성현의 현감이었던 한일운은 적이 올라온다고 하자 지례 겁을 먹고 야반도주하여 파직당했으며, 뒤 이어 부임한 김태수도 관아를 지키지 않고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다가 파직 후 먼 지역으로 유배당했다. 또한 죽산부사 최필번은 반란군이 죽산으로 밀려들자 36계 줄행랑을 쳤다가 잡혀 국문을 당하고 죄를 받았다.

라. 장시의 발달과 안성지역
안성은 조선시대 전국 10대로(大路) 중에서 호남로와 영남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물화(物化)의 교역이 빈번했고 상인들과 공인(貢人)들이 모여들어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안성읍 밖은 비록 평지라 하여도 땅에 살기가 있어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안성군『안성군지』, 안성군지편찬위원회, 1990, 225-227쪽
이와 같은 현실은 상공업 인구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안성은 조선 후기 전국 15대 장시에 들만큼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도 삼남의 물화가 모이는 곳으로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구한말 이전만 해도 삼남의 포목, 어물, 과일과 각종 수공업품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통로였다. 1902년 일본영사관의 시찰단이 경기, 충청지역을 돌아보았을 때 안성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1일 1만 명 수준이었으며, 1910년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경성(京城)을 제외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보고 있다. 『한국경기충청양도내지정황』, 통상휘찬 178호, 경기도박물관, 『안성천 Ⅰ-환경과 삶』에서 재인용

안성군의 장시들이 5일장을 형성한 시기는 대략 19세기부터라고 생각된다. 거래 품목을 보면 죽산 부내(府內)장은 쌀, 콩, 보리, 면포, 면관(免冠), 과물(果物) 등이었으며, 안성군내장은 쌀, 콩, 보리 외에 면포, 어염, 밤, 배, 유기, 철물, 사기, 립(笠)자, 목반, 피혁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안성군『안성군지』,앞의 책 227쪽
그 가운데 대표적인 상품은 쌀과 농우, 우피(牛皮), 목면 등이었고, 특산물로는 유기와 가죽꽃신,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가 유명했다.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어물, 포목, 과물, 수공업품을 취급하는 물상객주가 수 십 개 번창하였으며 거간이나 감고(監考)들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성시장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철도역이 부근의 평택에 세워지면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인천이나 경성에서 수입되는 물목들은 평택역을 통하여 유입되었고, 일본에 수출하는 품목들도 평택역이나 평택의 군문포, 아산의 둔포를 통하여 출하되었다 평택은 경부선 평택역과 서정역을 통하여 일본 및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각종 수입품이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평택, 안성, 아산 등지의 곡물과 특산물이 반출되었으며, 군문포로는 서해안의 소금과 어물, 석유, 비단 등이 들어와 평택과 안성 등에 공급되었다.
. 이와 같은 현상은 장시의 쇠퇴와 상업인구의 감소로 나타났다. 안성상인들은 교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간선철도의 부설과 청나라 및 일본상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였다. 결국 1925년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경남철도(주)에 의해 장호원선(천안-장호원 간) 철도가 부설되었지만 간선철도의 한계 때문에 큰 이익을 보지는 못하였다. 1920년대 들어 안성시장은 더욱 쇠퇴하였다. 쇠퇴의 원인은 안성시장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곡물이 평택-장호원 간 간선도로(38번 국도)를 통하여 평택역으로 출하되었고, 일본산 양은그릇과 담배의 전매제도, 고무신의 유행 등으로 특산품인 유기나 담뱃대, 가죽꽃신의 판로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경기도, 『경기도요람』, 1912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안성지역의 보수성도 따지고 보면 오세의 경제침탈에 대한 안성상인들의 결속력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일본상인의 침투가 적었던 것도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6.개항 전후의 안성지역

가. 천주교의 전래와 안성지역
안성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당한 후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양성 미리내로 옮겨 매장하였다는 사실과, 우리나라 천주교 2대 신부인 최양업이 1850년대 진천 경계인 배티성지에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볼 때 최소한 184, 50년대쯤에는 천주교가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성시, 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앞의 책 85쪽
. 그 후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죽산의 치명터에서 안성, 진천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했으며, 김선우, 이덕윤, 최성철 등 18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안성시, 『안성군지』, 1990
. 또한 박해를 받은 천주교 신자들이 금광면, 고삼면, 양성면, 서운면 일대에 숨어들어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안성지역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1900년 안성 구포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던 콩베르(1875~1950)다. 콩베르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귀국한 뒤 1901년 2월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하여 안성구포동에 성당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안법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천주교는 1886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1909년 안법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는 전국에 약 112개에서 135개의 학교가 설립되어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안법학교는 설립당시 안성의 유지 이승방이 3년 간 교원 1인의 급료를 담당하고, 서울 주재 프랑스 선교사 비에모로부터 1, 100원의 기부를 받아 설립되었다.(경기문화재단, 일제하 경기도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2001)
, 뒤이어 유치원도 개설하였다. 안법학교는 1936년 이복영 신부가 부임하면서 6년제 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정식학교가 되었으며, 1938년에는 안성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안법국민학교로 , 해방 후 1951년에는 안법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 이와 함께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파리에서 포도나무를 가져와 농가부업을 장려하였으며, 3.1운동 때에는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성당 안에 보호하고, 만세운동의 지휘자로 신자였던 김중묵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처럼 안성지역 천주교회는 박해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안성지역 근대민족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항쟁 시기 안성지역의 동향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안성지역의 동학조직은 안성이 2포, 양지가 1포였다 안성시,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앞의 책 77쪽
. 이 지역의 접주로는 정경수와 임명준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9월 초 죽산을 점령하였으며, 안성군의 동헌(東軒)을 포위하고 군수와 아전들을 포박한 뒤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또 교동에 거주하는 조만봉 형제들은 동학교도 정성택과 봉기하였다가 체포되었으며, 농민군들이 전주화약 이후 재차 봉기하여 논산을 거쳐 공주로 진격할 때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농민군 일부와 안성지역의 교도들이 합세하여 10월 19일 경 전투를 벌였다. 또 일죽면에서는 농민군 5명이 남하한 일본군 2명을 기습하여 살해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구한말 안성지역의 의병활동은 상당히 미약하였다. 이 시기 의병활동은 1895년 명성황후민씨시해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1차 봉기와,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어난 2차봉기,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개된 3차 봉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안성지역은 1907년 3차 때 봉기하였다. 이 때의 봉기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국권상실의 울분을 품고 있던 청년들에 의해 결사대가 조직되어 친일단체인 일진회 안성사무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1명, 일진회원 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 밖에도 1907년 10월 2일 해산군인을 포함한 3백여 명의 의병부대가 안성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사건이 있고, 안성군지에는 20여 명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시기나 인원, 규모 등 자세한 내용은 없다.

7.일제강점기의 안성지역

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안성지역의 변화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8도제를 중심으로 아래에 큰 읍(邑)에는 주(州)나 부(府)를 설치하고 중간크기에는 군(郡)을 작은 읍에는 현(縣)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의 큰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후 1895년 23부제를 중심으로 지방제도를 개편한 것이다. 이 때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안성지역은 충청도 충주부에 죽산이 충청도 공주부에 안성과 양성이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 8월 조선정부는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로 개편하였다. 13도제는 8도를 13도로 세분하고 그 아래 7부, 1목, 331개 군을 두는 체제였다. 이 때의 제도개편으로 안성지역은 안성군, 죽산군, 양성군으로 편재되었다.
그 후 1906년에도 제주목을 폐지하고 몇 개의 부(府)를 설치하였으며, 345개 부(府) 군(郡)으로 나눠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였다. 이 때의 개편으로 양성군은 안성군에 통폐합되었고, 음죽과 양지는 죽산에 통폐합되었다.
1914년 3월에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이 있었다. 이 때의 개편은 기존의 12부 317군 가운데 1부 121군이 폐합되고 새로 1부 24부가 설치되어 12부 220郡이 되었으며, 군(郡) 아래에 2,500면(面)을 두었다 이정은, 『일제의 지방통치체제 수립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또한 곡(谷), 골, 동(洞), 평, 원, 성 등 다양한 자연지명으로 되어 있던 마을들을 통폐합하여 리(里)로 획일화하였으며, 리(里)에는 구장을 두었다. 이와 함께 1910년에는 기존의 향회, 향약과 같은 향촌자치조직을 완전히 폐지하고 조선 면(面)제를 실시하였다. 조선 면제의 실시와 뒤에 실시한 구장 제도의 실시는 지방을 관권의 일방적 통치를 받는 조직으로 변모시켜 일제의 식민통치가 말단 행정구역까지 미치도록 하는 효과를 갖게 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으로 나눠졌던 안성지역은 세 개 군을 통합하여 안성군이라고 하였고, 그 아래 읍내면, 보개면, 대덕면 등 12개 면(面) 170개 리(里)를 두었다. 읍내면은 도시발달에 따라 1931년 안성면으로 개명되었으며, 1937년에 안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에는 용인군 고삼면이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안성군에 편입되었고, 1998년에는 통합 안성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안성시, 『안성군지』, 73쪽
.

나, 일제강점기 안성지역의 사회 경제적 상황
일제강점기 안성군의 인구는 1925년 기준 13,524戶, 66,016名이었다. 이것을 국적별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하 안성군의 인구증감표(1925) 김태영, 『안성기략』, 동아일보 등 참조


1916
1920
1923
1925
조선인
호수
12,750
13,355
13,349
13,387
인구
66,319
72,466
72,201
65,548
일본인
호수
78
94
88
106
인구
291
344
265
354
외국인
호수
16
29
24
31
인구
40
66
101
114

호수
12,844
13,478
13,461
13,524
인구
66,650
72,876
72,567
66,016



일제의 지배정책은 행정기관과, 자문기관, 자치기관을 통하여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 행정기관으로는 1925년 현재 군청 및 12개 면의 일반 행정기관 외에 사법기관으로 경성지방법원 안성출장소가 있었으며, 경찰서는 안성경찰서와 주재소 8개가 있었고, 소방서는 읍내면에 1개 있었다. 김태영『안성기략』, 안성군 읍내면, 1925, 113쪽,
행정자문기관으로는 1930년까지 지방위원회, 군(郡)참사자문회, 학무위원회, 향교장의회, 학교평의회, 도평의회, 면협의회 등이 있었다.
1930년을 기준으로 주요 사회단체와 기관으로는 안성청년구락부, 안성청년회, 죽산청년회, 우리청년회, 일죽청년회, 삼죽청년회, 안성천주교청년회, 안성기독면려청년회 등이 있었고, 안성소년회, 안성소년단, 안성기독소년회, 죽산청년회 소년부 등 소년단체가 있었으며, 형평사 안성분회, 안성노인회, 공조회,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일본 적십자사위원부 등이 있었다. 언론기관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경성일보 안성지국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죽산분국이 있었고 언론단체로 안성기자단이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수탈기구였던 산업조합에는 안성군 동업조합, 안성군 양잠조합, 안성군 농사장려회, 안성군 산림보호조합, 생산판매조합, 안성군 면작조합 등이 있었다. 교육시설은 1935년 기준하여 공립보통학교 12개, 사립보통학교 1개, 공립농업보습학교 1개, 야학 및 강습소 약 20개, 서당이 67개 그리고 일본인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안성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1개, 공립심상보통학교가 3개 있었다.

다. 안성지역의 3.1운동
1919년 3.1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된 이후 지방대도시, 농촌지역 순으로 확산되었다. 경기도 지역은 3월 3일 개성에서 처음 시위가 발생한 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시기에 집중적이고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강점기 안성군은 일부 사족층과 상공계층을 중심으로 유지집단이 형성되었고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 다른 지역보다 봉건적 신분관념이 약하고 사회의식이 높은 편이었다. 일제강점기 안성군은 공, 사립학교를 제외하고도 주로 빈농 자제들을 교육했던 개량서당의 숫자가 151개나 되었으며 학생 수는 11578명이었다. 이것은 개성, 수원 다음으로 많았다.
안성군의 3.1운동은 읍내면, 죽산면, 양성면 등 3개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지역들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만 해도 3개 군(郡)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정서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었다.
안성지역 최초의 시위는 3월 11일 읍내면에서 있었다. 하지만 이 때의 시위는 50여 명이 참가하는 소규모였기 때문에 전 지역으로 확산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시위는 3월 말경에 시작되었다. 3월 30일 읍내면 동리, 서리, 장기리에서 이성옥(33)이 주도한 시위는 참여 군중만도 5, 6백 명이나 되었으며 시위양상도 면사무소 유리창을 부수는 등 폭력적이었다. 3월 30일 시위 후 큰 변화는 기존의 농민, 노동자들 외에도 안성상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상인들의 참여로 시위규모는 더욱 확대되고 격렬해져 3월 31일에서 4월 2일까지 연인원 4천 명이 넘는 시위가 읍내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죽산지역은 4월 1일 죽산공립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두현리 주민들의 시위를 필두로, 4월 2일에 있었던 죽산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시위는 장원리, 장계리, 죽산리, 매산리 주민 2000여 명이, 유춘삼, 이광칠, 박광순, 그리고 매산리의 조문삼, 김기은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는데, 이날 시위에는 죽산지역 최초로 태극기가 등장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2』,1993. 678쪽
이 날 시위는 경찰의 무차별 난사로 3명이 죽고 8명이 부상하였으며, 검거된 사람 중 2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양성지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변 마을로는 확산되지 못하다가 4월 1일부터 동족마을인 덕봉리(200명), 산정리, 도곡리(10명), 석화리, 구장리를 중심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주도층은 한학자인 오세경, 오관영과 소농들인 이희봉, 손정봉과 조병훈이었다. 이들은 각자 마을에서 만세를 부른 후 경찰 주재소나 면사무소, 우체국 등 행정관서가 있는 동항리로 진출하여 수 백 명이 다시 만세를 불렀다.
원곡, 칠곡의 3.1운동은 주동자 이덕순의 주도하에 3차례에 걸쳐 서울의 시위를 경험하고, 운동의 방법이 사전에 논의되었으며, 면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다. 또 운동의 방법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폭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일제와 일본인을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주모자는 칠곡리 이유석, 홍창섭, 내가천리 이덕순, 최은식, 외가천리 이근수, 이희용이었는데 이들은 한학을 공부했거나 근대학문을 공부한 농촌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위는 3월 26, 7일에 마을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진행되다가, 4월 1일 저녁 8시경 1천 여 명이 원곡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일제히 전개되었다. 이들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남길우와 서기 정종두에게 강제로 만세를 부르게 하고, 태극기를 쥐어서 앞장세워 양성고개를 넘어간 뒤 마침 만세시위를 하고 해산하려던 양성의 시위대와 연합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에 투석하고 방화하였으며, 일본수비대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선과 전화선을 끊고 다리를 파괴하였다. 다음 날에는 더욱 과격해져 원곡면사무소를 방화하고 군대의 출동을 차단하기 위해 평택으로 몰려가 경부선 철도의 침목을 제거하려고도 하였다. 이 시위로 361명이 검거되고 12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24명이 순국하였다. 이정은『원곡. 양성의 3.1운동』,앞의 책 79-90쪽


다. 일제강점기 안성지역의 청년운동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은 1919년 3. 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운동은 크게 민족주의계의 사회운동과 사회주의계의 사회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민족주의계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였다. 일제하 안성지역 사회운동은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농민운동, 야학운동, 신간회운동, 언론운동, 종교운동, 형평사운동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청년운동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10년대 초반 계몽주의적인 청년운동단체가 설립되면서 다. 그러다가 1920년대 초반 사상단체들이 만들어졌고, 1924년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되면서 사회주의계의 주도로 조직과 이념을 토대로 한 청년운동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의 청년단체로 처음 설립된 것은 1920년 7월에 창립된 안성유예구락부였고, 본격적인 청년운동은 1920년 8월 안성청년회 안성청년회는 박희정, 이원익, 조병칠, 윤철주, 이중환, 윤효병, 나성원, 박흥균의 발기로 1920년 8월에 창립되었으며, 회장은 김상천, 총무는 민영선이었고, 조직은 문예, 서무, 덕육, 체육부가 있었다.
가 창립되면서다. 안성청년회는 처음 일종의 문예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장년층 유지집단들의 사교단체 성격을 가졌으나 1921년 총회와 1922년 임시총회를 통하여 심일섭, 박홍균, 김중묵, 김태영, 이중화 등이 참여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의 대중운동단체로 변모하였고, 1924년 총회부터는 점차 사회주의계의 참여가 두드러지면서 중앙조직과의 연계하여 운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안청학원이라는 야학강습소를 개설하였다. 1925년부터는 좌파민족주의 내지는 사회주의적 성향이랄 수 있는 김태영 1925년 총회에서 김태영이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됨
을 비롯하여 박승경, 이원백, 박건호, 한갑원 등이 청년회를 장악하였는데, 이들은 청년의 교양강화, 민중의 생활개선, 소작조합 건설, 소년, 여성, 형평사운동 등을 추진하여 운동의 이념과 목적 그리고 방향을 분명히 하였다. 1926년부터는 민족운동계의 다수가 일제에 타협하면서 비타협적 일부세력이 사회주의계와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하자 안성청년회도 부문별 사회운동단체의 연합을 시도하면서 신간회 창립을 추진하였다. 안성청년회는 중앙조직과 함께 정치투쟁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안성공원 철폐반대운동과 안성천부역부과문제항의투쟁, 읍내면 경비부당지출 항의 면민대회개최투쟁 등 일반대중들의 일상적 이익투쟁에도 적극 나섰다.
1927년부터는 안성청년회 내부에 이념투쟁이 전개되었고 1927년 2월 우파 민족주의 계통의 유지층을 중심으로 우리청년회우리청년회는 청년의 친목, 실업향상, 윤리도덕 존중을 강령으로 내세웠으며, 집행위원장에 이재원, 서무에 이경우, 최병헌, 유영순, 박순석, 김종원, 지육부장에 임병호, 이창섭, 실업부장에 김광일, 김사복 체육부장에 박용복, 이희영이 선출되었다.
가 창립되었지만 당시의 통일전선의 영향을 받아 그 해 12월 통합되었다. 1927년 10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들이 안청학원 건축 및 운영 문제를 제기하여 김태영을 비롯한 민족주의계 집행위원이 퇴진시키고 윤효병, 박건호, 조종학, 민영선 등 진보적 인물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이와 함께 안성군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전선적 청년동맹의 건설과 신간회를 조직하는 데 조직의 역량을 결집하였다. 하지만 1928년 2월 청년회 내부에서 사회주의계 사이의 헤게모니투쟁이 격렬해지면서 사회주의계 청년들이 분열되면서 조직의 역량이 약화되었고 대중의 지지도 상실하면서 이후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라. 일제강점기 안성지역의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은 1920년대 초 소작쟁의가 발생하고, 소작인조합이 출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노농총동맹(1924)과 조선농민총동맹(1927)이 결성되면서 합법적으로 전개되다가 1930년대 이후 비합법적인 농민조합운동으로 발전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일제강점기 안성지역은 전체 인구 중 농업인구가 92%나 되는 농업지대였다. 또 전체 농업인구 중에서 지주는 321호인데 비하여(대지주 59호, 중소지주 262호), 소작농은 무려 3364호(92.6%)나 되어 소작농의 수가 절대다수였다. 『동아일보』 1923 10월 9일자
이 가운데 년 소득 5백원미만이 빈농들이 전 농업자의 89.6%나 되어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20년대 이후 식민지지주제와 기한부소작제 등이 강화되고 지주와 마름의 가혹한 착취가 심해지자 도처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였다. 안성지역 소작쟁의 및 소작관계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마름의 부당한 소작권 이동과 고율의 소작료, 지주와 마름의 부당한 착취였다.192, 30년대 안성지역의 소작쟁의
번호
시 기
지 역
내 용
성 격
1
1923. 3
보개면 동신리
마름 곽찬의 부당한 착취
경성지주
2
1924. 4
서운면
지주와 마름의 부당한 소작료 인상
군내지주
3
1924. 5
보개면 가사리
동척이민으로 인한 소작권 이동
동척농장
4
1924. 4
읍내면 서리
부당한 垈賭租 인상
경성지주
5
1925. 5
이죽면 장원리
소작권 이동
경성지주
6
1926. 4
이죽면
마름의 부당한 착취
경성지주
7
1928. 12
양성면 노곡리
마름의 부당한 소작료 징수
경성지주
8
1930. 2
미양면 운두리
마름의 착취와 소작권 이동
경성지주
9
1929.11
미양면 진촌리
마름의 소작료 인상과 소작권 이동
수원지주
10
1938. 3
일죽, 이죽면
고율의 소작료 인상
경성지주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시대일보 참조
쟁의(爭議)는 보개, 서운, 죽산, 미양, 양성면 등 과거 행정의 중심지이거나 안성시장과 가깝고 경성부재지주나 조선인 지주가 많은 곳에서 다수 발생하였다. 성격적으로는 1920년대 초, 중반의 쟁의가 자연발생적인 경향이 많다면, 1920년대 후반에는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소작인조합을 결성하고 집단적인 시위와 진정서를 내고 지주 및 일제행정관청과 담판을 하거나 사회주의자들의 지도로 조직적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점차 계급투쟁적 성격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소작쟁의는 1930년대에 들어서 발생빈도가 더욱 높아져서 1938년 5월 1일부터 16일 사이에 는 약 60건(동아일보 1938년 5월 18일)의 쟁의가 발생하였으며, 1938년에는 한 해 동안 면사무소나 경찰관 주재소에 조정 신청한 소작쟁의가 너무도 많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가 지역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면서 1920년대 초부터 소작인상조회 안성지부, 천주교 소작인회 같은 농민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안성청년회나 신간회 안성지회에서도 소작인조합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안성지역의 농민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1926년 죽산면에서 죽산농우연맹(竹山農友聯盟)이 결성되면서이다.
이 단체는 안성지역에서 처음으로 조직과 이념을 바탕으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농민운동단체였다. 농우연맹의 주도인물은 윤인영 윤인영 : 본적은 안성군 이죽면 장릉리였으나 양평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특별히 받은 일은 없었으며, 한학을 공부하였고, 농우연맹을 창립하기 전에는 경성지주 윤명영자의 친족관계를 이용하여 사백석 규모의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을 하였다. 20년대 초반에는 농촌계몽과 문맹퇴치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1926년 죽산농우연맹 결성과 죽산농우학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농우학원에서는 원장 겸 리사와 학감의 역할도 하였고, 신간회 안성지회 간부를 역임하였다. 죽산농우연맹 창립을 전 후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에는 이죽 면장(1945년 8월 -1월)을 역임하였고,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자와 정상규 정상규 : 일명 김순봉. 정상규는 진주가 고향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학교에 입학하였고, 길림성 용정에서 대성중학을 졸업했다. 대성중학을 다니게 된 것은 형이었던 정재규가 대성중학 강사로 재직하였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후 함경북도에 가서 다른 형 정창세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죽산농우학원에는 형 정창세의 소개로 정재규와 함께 부임하였다. 32년 4월 조선공산당 경기도공작위원회 준비위 결성에 참여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당 조직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34년 9월 공판을 받고 4년간 복역하였다.
, 이봉재 등 사회주의 청년들이었다. 결성당시에는 농촌의 개발, 농민의 교양증진, 농민의 대동단결을 강령으로 소비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 노동야학운동, 월간회보 간행, 운동회 등 대중의 이해에 기반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소비조합으로 죽산공제조합이 설립되었고 『시대일보』1926년 6월 15일 자
무산농민과 빈민자제 교육을 위해 죽산농우학원을 설립하였다.
농우연맹은 1928년 정기총회를 계기로 공동경작, 소작문제, 소비조합운동 등 사회문제에 본격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소작문제에 대해 조사부를 파견하여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지주와 마름에게 경고문과 항의문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각 면(面)에 농우회가 조직되었다. 이 시기 창립된 농민단체는 양성농우회(1927년 10월 3일 창립),『동아일보』, 1927년 10월 8일
양성농우회는 1927년 10월 3일 황갑성 김거제 등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처음부터 집행위원장제를 채택하였다. 양성농우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양성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함.
2. 우리는 相互扶助적 정신으로 양성농민의 대동단결에 노력함.
3. 우리는 양성 농민의 知的 교양과 實的 훈련에 노력함.『동아일보』, 1927년 10월 8일


강령에 나타난 이념은 당시 조선농민 총 동맹의 지도노선을 충실히 따라서, 날로 빈농화 되어가고 있는 농민층의 일상적 이익옹호와 조직화, 의식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성 농우회는 1927년 11월 12일에 창립된 신간회 지회 창립간사였던 黃甲性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조선농민 총 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미양농우회((1928년 1월 8일 창립),『동아일보』 1928년 1월 11일
미양농우회는 金顯錫의 주도로 1928년 1월 8일에 창립되었다. 신명강습소 내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에는 趙錫夏, 서기에는 朴重和가 선출되었다. 창립대회에 모인 회원은 50여 명이었고, 축사는 김태영이 하였다. 창립 시 선언과 강령은 다음과 같다.(동아일보 1928년 1월 11일)

*선언 : 現下 우리농촌은 피폐하였고 농민은 생활의 안정을 失하였다. 이 현상을 구제하는 길은 농민의 각성과 단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로서 미양농우회를 조직하야 강령을 제정하고자 하오니 농우회 회원은 찬동하소서.

*강령 : 1.我等은 사회진화의 원리에 합당한 신생활의 실현을 期함.
2.我等은 농촌계몽과 농민의 이익증진에 노력함.
3.我等은 농민의 단결을 기함.
*임원
집행위원장 :鄭寅肅, 상무집행위원(서기) :金顯錫, 尹秉烈(경리), 趙定夏(친목)
許鎔(산업), 金恩培(교양), 朴重和(조사), 집행위원 :高君三 외 6명.

선언과 강령을 보면 미양농우회는 사회진화론과 농촌계몽을 표방하는 것으로 봐서 미양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이 창립한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생태계의 약육강식의 원칙을 국제관계 및 사회현상에 적용한 이론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이었으며, 독립협회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의 이론적 기초였다. 미양농우회의 성격은 창립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집행위원장 鄭寅肅은 1920년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미양면의 대표적인 농촌계몽운동가였고, 『동아일보』 1929년 1월 11일
金顯錫, 趙錫夏는 신명강습소, 신명공업실습소 등의 교사로 교육운동에 헌신했던 민족운동가였다. 이와 같은 주도인물의 사상적 경향이 미양농우회의 강령과 운동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산리농우회(1929년 6월 9일)『동아일보』,1929년, 6월, 12일
읍내면 옥산리에 창립된 玉山農牛會는 정재윤 등에 의해 1929년 6월 창립되었다. 주도인물은 鄭在潤이었고 강령은 농사개량, 애경상조, 악습타파, 교양단결이었다. 『동아일보』, 1929년 6월 12일

죽산농우회(1930년 9월 29일)가 있다.
이들 단체는 죽산농우연맹을 중심으로 조직적 연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강령이나 조직으로 볼 때 지향하는 이념은 다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죽산농우연맹은 1930년대 초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조선사회주의 운동의 빈농우위의 방침에 따라 농우학원 학생들 가운데 우수한 학생 1백여 명에게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시키고 이들을 통하여 면(面), 리(里) 단위의 조직을 결성한 후 빈농중심의 조공재건운동을 시도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도중에 발각되어 죽산농우학원 학무주임 윤인영, 강사 심혁상, 윤일남, 이근옥, 이봉재, 전 강사 정상규, 최주평(일명 최성준), 정재규 등 17명이 검거되고 조선공산당 경기도공작위원회 준비위 사건 『동아일보』1932, 7, 12일
이라는 이름으로 경찰에 송치되어 윤인영, 이봉재, 정상규 등 6명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던 최성준(주평)을 제외한 5명은 검거 1년 만에 예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 1933, 8, 4일


마. 일제강점기 안성지역의 교육운동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노동력 수탈에 적합한 기술인력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교육연한을 4년으로 하였으며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억제하였다. 식민지시기 지방교육기관은 공, 사립학교와 같은 공교육기관과, 야학, 강습소, 개량서당 등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민중교육기관으로 나뉘어 진다.
1930년대 초까지 안성지역의 12개 면(面) 가운데 공립학교는 일본인들과 친일적인 지역유지의 자제들이 다니는 심상고등소학교 및 심상소학교 4개, 조선인들이 교육받았던 일반소학교 8개가 있었다.








<1920, 30년대 안성지역의 公敎育機關>
학교이름
성격
설립일
위치
기타
안성심상고등소학교
일인학교

읍내면

공도공립심상소학교
일인학교

공도면

죽산공립심상소학교
일인학교

이죽면

광선공립심상소학교
일인학교
39년 8월 15일
죽산면

안성공립보통학교
공립
1902년 3월 12일
읍내면 동리
군수 이종두
공도공립보통학교
공립
22년 4월 1일
공도면 용두리

삼죽공립보통학교
공립
25년 5월 1일
삼죽면 진천리
덕산학원 승격
죽산공립보통학교
공립
1911년 2월 12일
이죽면
사립죽산보통학교
일죽공립보통학교
공립
23년 4월 1일
일죽면

미양공립보통학교
공립
1929년 12월 15일
미양면

보개공립보통학교
공립
34년 9월 21일
보개면

금광공립보통학교
공립
32년 9월 2일
금광면

서운공립보통학교
공립
1927년 4월 10일
서운면

양성공립보통학교
공립
1918년 3월
양성면
양성적성학교
대덕공립보통학교
공립
35년 10월 22일


원곡공립보통학교
공립
33년 9월 16일
원곡면 외가천리

안성공립농업보수학교(안성농교)
공립
1910년대 후반
읍내면
25. 3. 1일 승격
안성공립공업학교
공립
1936년 3월
읍내면
현 안성중학교
안성공립 여자실업학교
공립
1943년 4월


안법학교
사립
1909년 1월
안성천주교회 내
공안국 신부

참조 :『동아일보』, 『안성군지』,『안성기략』외

야학 및 강습소운동은 피폐해진 빈농층의 생활조건과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일제하 야학은 관제야학과 민간야학으로 구분되며, 민간야학은 1910, 20년대의 계몽야학과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의 민중야학으로 나뉜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 사이 설립된 안성지역 야학은 다음과 같다.
이들 야학은 사회운동단체들이 무산계급 교육을 위해 설립한 경우와 마을의 지식 청년들이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설립한 것들이 있었다. 교육의 대상은 계몽야학이 지리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어서 학교에 갈 수 없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립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무산아동, 근대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문맹퇴치나 의식각성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고, 민중야학은 대중의 계급적 각성, 지식계발을 통한 반일의식 고취와 의식각성에 목적을 두었다. 1920, 30년대 민중야학으로 대표적인 것은 죽산농우연맹이 설립한 죽산농우학원과 안성청년회가 설립한 안청학원이 있다. 그래서 민중야학은 일제에 의해 감시와 압력을 받았으며, 친일적 유지집단들에게도 외면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대 안성군의 야학 및 강습소
학교이름
성격
설립일
위 치
설립자
천명의숙
야학
1920년 경
미양면 고지동
남희원
원동의숙
야학
1919년 4월
양성면 방축리
정원모, 윤래동
안성보통학원
야학
20년대 초
미양면 진촌리
성공회 교회
신명강습소
강습소
1922년
미양면 진촌리
성공회 교회
안청학원
야학
1925년 5월
읍내면 동리
안성청년회 설립, 현 안청중학교
덕천학교
야학
미상
미상

사립 해성학교
강습소
1907
양성면 미산리
강도영 신부
사립적성학교
강습소
1910
양성면 동항리
오범선, 오진영, 한갑수
산창학교
주학
1910-1915
원곡면 산하리
정응설
산평야학
야학
1925. 11월
서운면 산평리

박용순 외 발기
덕산학원
야학
1916년
삼죽면 덕산리
삼죽공립보통학교 전신
안성육영학원
야학
1924년 봄
공도면 중복리
최여천, 최여성
미장학원
노동야학
1929년 경
삼죽면 미장리
이현직
관해학원
야학

금광면
강태기
대농학원
야학
1928년 4월
대덕면 대농리
박건호
동광야학
야학
1928년 가을
일죽면
김유배
죽산농우학원
야학
1927년 1월
이죽면 장원리
죽산농우연맹
죽산농민야학
야학

이죽면
죽산농우회
안성부인야학
야학
1924년 5월
읍내면
안성부인회(윤정숙)
안성여자강습소
강습소
1923년 봄
서리장로교회 내
박숙원
안성유아원
유치원
1925년 9월 1일
읍내면 서리
안성서리장로교회

참조:『동아일보』,『안성기략』,『안성군지』

바. 해방 후 좌우의 대립과 죽산지서 습격사건
한반도의 해방은 2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의 전후처리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결과였다. 이와 같은 현실은 전후 냉전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통일된 민족국가건설을 위한 우리 민족의 자율적 노력은 전면 부정되었고,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정치세력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해방 후 남한은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활동하였고, 좌우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우익의 정치세력으로는 일제강점기 지주와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이승만,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와 한독당세력을 꼽을 수 있고, 좌익에는 해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된 후 남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고 있었다. 좌익과 우익사이에는 중도파도 있었다. 여운형, 안재홍,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해방 전부터 국내에 남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방 후 치안유지와 국가건설을 준비하였고, 해방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좌우통합을 통한 국가건설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년운동도 이념적 성향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였다. 좌익에서는 사회주의청년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고, 우익은 지주, 자본가 계급의 후원을 바탕으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단체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반공을 기치로 이승만과 김구의 지도에 충성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였다.
1946년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주도 아래 29개 좌익단체가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대중조직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 등 중도좌파적 성향의 인물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연합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였다. 이들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지지, 우익과 같이하는 5당연합체 탈퇴, 비상국민회의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단, 토지문제의 민주적 해결 등을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군정이 조직한 비상국민회의와 미군정자문기관인 대한국민민주의원이 결성되면서 우익세력과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였고 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남로당이 와해되면서 헤체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3』, 1996, 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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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안성지역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우익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단체총동맹 안성지부가 서상천의 주도로 결성되면서 일정한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이 단체는 안성농고(현 한경대학교)와 안법중학교(현 안법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학련안성지구연맹’을 조직하여 경찰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좌익세력에 대항하였다. 좌익은 여운형,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대응하였다. 이 단체는 초기에는 산하에 농민조합을 두고 미군정의 양곡수매반대, 부대비용을 지주부담으로 하는 3:7제 소작료 징수 등을 내세우며 노동자, 농민을 선동하였고, 안성군지편찬위원회, 『안성군지』, 1990. 297쪽
남로당이 주도한 노동자 총파업과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 전국농민총동맹(이하 전농)은 초기 소작료 금납제, 부대비용을 지주부담으로 하는 3:7제 소작료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6년 3월 북한에서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이 실시된 직후 소작료 불납 및 5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정책을 관철시키려는 투쟁에 돌입하였다.
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1947년 5월 22일 새벽 이죽(죽산)지서를 습격하고 면(面) 내의 우익인물 18명 이봉재 등이 습격한 18명의 인물에는 당시 죽산의 유지급 인물인 최창혁이 포함되었다. 최창혁은 3.1운동 때 죽산시장 시위를 주도하고 복역한 인물로, 동아일보 죽산분국장과 죽산청년회 집행위원장, 죽산농우연맹 간부, 구우계 계장을 역임하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청년들이 공격한 것은 일제말의 행적 및 해방 후의 보수 우익적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의 집을 습격 방화하였다. 습격당한 인물들은 대부분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단체총동맹, 건국청년회, 애국부인회 등 보수우익단체의 간부이거나 대표였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은 1920년대 후반 죽산농우연맹과 1930년대 초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한 이봉재 이봉재 : 충북 진천군 만승면 죽현리가 고향으로, 이 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양정고보를 다녔다. 양정고보를 중도 퇴학한 후에는 일본 동경에 갔다가 다시 만주 용정으로 건너가서 대성중학 3년을 마쳤다. 그 후 죽산농우학원에 와서 강사가 되었다.(동아, 33, 8, 4일) 조공재건 경기도 공작위원회 사건으로 4년을 복역한 후 죽산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남로당 경기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며 1947년 5월 18일 이죽지서 및 우익인사 습격사건을 주동하였다
(당시 남로당 경기도 조직부장)와 이재규(남로당 안성군 부의원장), 이학연, 임규성, 정덕규, 최기성, 한봉수 등이었다.
좌익들의 조직적 움직임에 우익단체들은 민주주의동지회 이 단체를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촉성안성지부장 이계원, 건국청년회 안성지부장 이상은, 한국독립당 안성지부장 변세훈, 건국청년회 안성지부 간부 최문환 등이었다.
를 결성하여 폭력과 테러로 좌익에 대응하였으며, 경찰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좌익주동세력의 검거에 나섰다. 결과 이재규, 이봉재 등은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조직원들도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