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평택지방의 역사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6:15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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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평택지방의 역사
가. 선사시대
구릉과 평야가 발달하고 하천과 바다가 인접한 평택 지방은 선사시대 사람이 살만한 조건을 갖췄다. 최근 출토되는 유물 유적으로 볼 때 평택지방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포승면 원정리, 안중면 현화리, 청북면 백봉리 등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유적의 공통점은 바다나 하천과 인접한 반도로 구릉과 작은 협곡이 형성된 지역이다. 이 같은 지역은 발달된 농경과 목축 그리고 주거환경으로 적합한 배산임수의 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
평택은 북쪽으로 진위천, 남쪽으로 안성천, 서쪽으로 아산만과 서해바다를 두고 있으며 중국의 황하유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일찍이 해로와 수로 교통이 발달하고 해양 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이다.
삼한시대의 평택은 마한(馬韓)의 영역이었다. 평택주변에는 여러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가운데 직산의 목지국이나 양성의 신분활국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고구려로부터 온조세력이 직산방면까지 남하하였다가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평택지방은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백제는 서기 9년과 18년에 마한의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아산만 지역을 확보했으며, 서기 238년에는 고이왕이 부산(釜山, 진위면)에서 사냥을 했을 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5세기 후반(475년)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안성천 북쪽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평택지방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오래되지 국력을 회복한 백제에 의해 회복되었고, 482년 경이 되면 평택지방과 한강 남쪽지방이 다시 백제영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한 시기는 553년 진흥왕 때이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변동을 거쳐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통일 후 평택지방은 군사적 중요성이 약해지면서 중앙정부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신문왕 때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하는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이 시기 평택지방은 한산주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 설치된 서원경의 관할을 받았다. 경덕왕 때는 중국의 군현제를 근간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현이 진위현으로, 영신현이 영풍현으로 바뀌어 수성군(수원)의 영현이 되었다. 또 하팔현은 평택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탕정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지금의 현덕면에는 광덕현이 설치되어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던 거홀현(상홀현)도 차성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다. 고려시대
신라 말기 각 지방에는 호족들이 성장하였는데, 죽주(죽산)의 기훤, 원주의 양길, 나주일대의 견훤, 송악과 철원일대의 궁예가 대표적이었다. 평택지역은 후삼국 초기 기훤의 영역이었다가 나중에 양길과 궁예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초기 수성군(수원)의 호족 김칠과 최승규가 왕건에게 귀순하면서 수원을 수주(水州)로 승격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평택지방은 수주의 속현이 되었다.
5도 양계로 지방제도가 개편된 현종 때에는 진위현은 광주목의 통제를 받으면서 수주(수원)의 영현이 되었고, 평택현은 청주목의 통제를 받으면서 천안부의 관할을 받았다. 그 밖에도 용성현이나 광덕현, 영신현은 수주(水州)의 속현이 되었으며, 평택현 서쪽의 경양현(계양)은 천안부에 속하였다. 평택지방에는 일반 행정구역 외에도 향, 소, 부곡이나 장(壯)과 같은 하급 행정구역이 있었다. 예컨대 포승면 일대에는 포내미부곡, 육내미부곡, 감미부곡이 있었고, 송탄에는 송장부곡, 서탄면에는 천장부곡 등이 있었으며, 고덕면, 포승면, 진위면 등에는 오타장, 종덕장, 신영장, 청호역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평택지방의 인구는 진위현 221호, 평택현 179호에 1237명(진위현 535명, 평택현 704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주현(군)의 수탈과 향리 및 지배층의 탐학으로 민중들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씨 무신정권기에 진위민란이 발생하였고, 고려 후기에는 몽고군의 침입과 왜구의 침략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라. 조선시대
조선건국 후 태종 15년(14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세종 14년(1432)에는 330여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 같은 정책으로 점차 속현이나 ,향, 소, 부곡이 사라지고 장(莊)이나 역(驛)이 일반 군현에 통합되었다.
평택지방은 고려시대 17개의 행정구역을 진위현과 평택현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서부지역은 직산현, 수원부, 양성현이 분할하는 형태로 정비되었다. 그 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주변 군, 현과의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1895년에 평택군과 진위군, 수원군으로 행정단위가 바뀌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어 진위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은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이었다. 서울과 가까워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이 심했으며, 바다가 가까워 흉년을 이기려는 민중들이 모여들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바다와 가깝고 교통로가 발달하여 토지가 박하고 인심이 사납지만 흉년을 나기에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때가 오면 고통 받는 민중들은 지배층에게 저항하였다. 1862년의 임술봉기 때 평택현에서 두 차례의 민란(民亂)이 발생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이와 함께 평택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었던 지역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임진왜란 때의 소사벌 전투와 1894년 청일전쟁을 들 수 있는데, 이 같은 전란으로 농토는 황폐화하고 인구는 감소하여 민중들은 큰 고통을 당하였다.

마. 근대의 평택
갑오․을미개혁(1895년) 이후 조선 정부는 기존의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바탕으로 전국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공주부로 이속하여 진위군으로 개편되었으며, 평택현도 평택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공주부에 속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팽성읍 본정리, 노양리 일대(계양지역)와 오성면, 안중면, 청북면, 포승면, 현덕면은 수원군과 양성군, 직산군 지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다시 개편하면서 옛 경양현이었던 게양지역이 평택군에 이속되었고, 양성군 영역이었던 포승면, 청북면 일대가 수원군으로 옮겨왔다.
평택지역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다. 이로써 평택군과 수원군에 속하였던 포승면, 현덕면, 안중면, 오성면, 청북면, 고덕면 일부지역이 통합되어 진위군이 되었다.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교통과 통신의 변화도 있었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평택지방의 주요 교통시설은 도로와 조운(漕運)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 철도역이 병남면 군물리에 ‘평택역’이라는 명칭으로 신설되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이 평택역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되자 철도역 주변에는 일본인들과 조선상인, 중국상인들이 모여들었으며, 점차 봉남리에 있었던 행정 기관들이 하나 둘씩 옮겨왔다. 이 같은 발전에 따라 역(驛) 주변에는 평택리가 신설되었고, 1926년 4월에는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38년에는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바뀌었다.

바. 현대 사회와 평택
평택은 1946년 병술년 대홍수와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피해와 변화를 겪었다. 병술년 대홍수는 안성천 변에 건설한 평택시가지를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하였고,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은 구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의 폐허로 군청, 경찰서, 세무서, 금융기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철도역과 상가들은 철도역 동쪽 신시가지로 옮겨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평택시장마저 통복동으로 이전하였다. 새 시가지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의 도로망과 경찰서, 군청, 시장, 상가, 극장, 시외버스정류장 등이 자리 잡았다.
현대사에서 평택지방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송탄과 팽성읍 안정리에 주둔한 미군기지였다. 송탄은 구한말에는 탄현(炭峴)면과 송장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송장의 송(松)과 탄현의 탄(炭)을 합하여 "송탄(松炭)"이라고 지명을 개편하였다. 송탄은 한국 전쟁 중에 신장동 일대에 K-55 미군기지가 건설되고, 이후 미군기지 주변에는 기지촌이 발달하였다. 안정리에는 일제 말 일본군 시설보급대가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였다. 이것을 해방 후 미군이 접수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재 주둔하여 K-6 미군기지가 되었다. 196, 70년대 기지촌은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도시 팽창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63년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송탄시로 발전하였으며, 안정리도 1972년에 안정출장소가 설치된 후 1979년에는 팽성읍으로 승격하였다. 평택도 1986년에 시(市)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평택시, 송탄시, 평택군을 통합하여 ‘통합 평택시’로 발전하였다.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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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근대도시 평택의 성립과 발전
근대도시 평택(平澤)의 성립과 발전

◈ 차림표 ◈
1.개항이전의 평택지방
2.경부선 철도건설과 평택
3.평택역의 위치선정 문제
4.평택역의 설치와 식민지형 소도시의 발달
5.평택역의 설치와 유통구조의 변화
6.해방 후 철도역의 이전과 신도시의 개발



1.개항 이전의 평택지방
조선후기 평택지방은 안성천을 경계로 충청도와 경기도로 나눠졌고, 진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으로 불리되었다. 동부지역은 대부분 진위현에 속하였고, 서부지역은 수원부, 양성현, 직산현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이 단일한 체계 내에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1895~1914년 사이다. 1895년 전국 23부제를 근간으로 개편된 행정구역은, 1896년 13도제로 재 개편되면서 진위현은 경기도 진위군으로, 평택현은 과거 직산현에 속했던 경양폐현(게양)을 통합하여 충청도에 편재되었고, 복잡하게 나눠졌던 서부지역은 수원군에 통합되었다. 평택지방이 오늘날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 것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이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은 진위군, 평택군, 수원군으로 나뉘었던 지역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대, 중, 소 규모로 산재되었던 자연마을을 통합하여 근대적 행정체계에 적합하게 개편한 점이 특징이다.
개항 이전의 평택지방은 내륙 깊숙이 조수가 유입되고 간석지가 넓어 경제기반이 취약하고 사족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을 전후하여 명례궁(덕수궁)이나 왕족이었던 순화군, 수어영(守禦營) 등에 의해 내륙의 간석지의 개간이 진행되면서 경제기반이 확대되었다. 경제기반의 확대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황무지 개간이나 산미증식계획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결과 안성천의 중, 상류 외에도 하류지역의 넓다란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하였으며, 기존의 궁방전이나 역, 둔토 등도 동양척식주시기회사나 일본인에게 불하되었다. 그래서 안성천, 진위천 변을 따라 거대한 일본인 농장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농장에서 생산된 곡물은 수로나 철도를 이용하여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갔다.
조선후기 평택지방은 삼남대로와 충청대로가 지나는 육로교통의 요지이며 수로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생산기반이 취약하여서 상업발달이 뒤졌다. 이에 따라 상권으로 보면 안홍성, 예산, 아산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상권이었지만, 영남대로가 지나고 한강상류의 여주, 이천상과과 가까운데다 농업생산력이 높은 안성과, 육로와 해로가 만나고 농경지가 비옥한 둔포에 비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경부선 평택역이 건설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곳은 군물포였다. 이곳은 충청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 가는 길목이었으며, 평택평야의 곡물의 집산지였을 뿐 아니라, 안성천 하구를 통하여 소금, 새우젓, 생선 등이 유통되던 나루였다. 군물포의 주요 상품은 평택평야의 곡물과 현덕면이나 포승면 연안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아산만의 어물이었다.

2.경부선 철도건설과 평택
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은 개항 초기부터 조선침략을 마음 먹고 철도건설에 필요한 사전조사를 실시하였다. 예컨데 1885년 일본인 마쓰다는 4년에 걸쳐 전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 교통, 민정, 경제상황을 면밀히 조사하였으며, 이어서 일본인 철도기사 고노가 입국하여 사냥꾼으로 가장하고 서울에서 부산 간 철도 예상지역을 답사한 뒤 보고서를 작성하여 측량도면과 함께 일본 정부에 제출하였다.
경부선 철도건설은 경쟁철도의 출현을 방지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농업 및 상공업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다. 일제는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에서 경부철도건설에 관한 내용을 조선정부와 협의하였고,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1898년 ,‘경부철도합동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여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공사는 용지매수분쟁, 결빙과 홍수, 화폐유통의 문제 등으로 관민의 저항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902년 러일전쟁이 임박하면서 군사적 목적으로 공사가 강행되어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고 1905년 1월 1일 개통을 보게 되었다.
평택지방은 경부철도 2 착공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영등포에서 진위군까지의 구간으로 이완용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운수회사, 대한경부철도부역회사 등 5개의 한국계 회사와 한일공업조, 아가와구미 등 일본회사가 참여하였다. 특히 오산에서 진위군(평택) 사이 구간을 맡은 회사는 야마구찌라는 일본회사로, 조선인 90% 고용 규정에 따라 평택지방의 노동자들 상당 수가 공사에 참여하였다.
철도부설에 따른 용지수용은 전답을 중심으로 13만 9천 평에 달했다. 용지수용비는 전답의 가격에 따라 지역적으로 차이를 나타냈는데 평택지방은 수원지역의 17원보다 많은 평당 19원으로 높게 책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보상비는 이보다 훨씩 적어서 평택은 약 8원, 수원은 4원정도가 지급되었고 총 보상비는 2만 7천원이었다.

3.평택역의 위치선정 문제
경부선 평택(진위) 구간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철도건설은 최단거리와 경제침략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삼남대로나 영남대로와 같이 기존의 대로를 딸 건설된 경우가 많은데, 평택지방은 기존의 대로(大路)를 무시하고 건설된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이 발생하게 된 것은 삼남대로 평택구간에 고개가 많은 점도 있었지만, 곡물이나 해산물 같은 경제침략적 목적이 보다 높게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철도는 전통적 행정도시들을 비껴나가게 되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나 위치상으로 역(驛)을 설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봉남리와 객사리가 제외되면서 세롭게 떠오른 지역이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였다. 이곳은 인가가 거의 없는 황무지인데다 군물포를 통한 수로교통과 연결되는 이점이 있었고, 안성이나 둔포 등 주변 상권과의 연계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역(驛)의 위치선정을 확정짖는 과정에서 일본인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먼저 일본 사족(士族)출신인 이시카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철도의 서쪽에 둘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논리는 서쪽에 둘 경우 군물포나 신덕포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의 수로 및 해상교통과의 연계성이 좋고, 개간이 가능한 광활한 황무지와 수용가능한 궁방전 및 역둔토가 서쪽에 집중된 점을 강조하였다. 반면 평민출신의 다카사키 등은 동쪽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동쪽에 둘 경우 안성과의 상품유통에 유리하고 안성, 장호원, 이천 등 내륙의 농산물 유통에 편리한 점을 주장하였다. 결국 사족출신의 이시카와의 주장대로 철도역은 철도의 서쪽, 지금의 원평동에 설치되었다. 평택역을 병남면 통복리에 설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의문은 ‘철도역의 이름을 왜 '평택'으로 하였는가’이다. 명칭이라는 것은 위치가 갖는 역사성을 담보해야 하고,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야 하며, 지역민의 공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만한 사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상황으로 유추할 때, 당시 역(驛)이 설치된 병남면 통복리가 1896년 행정구역 정리로 진위군이 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군물포와 함께 평택현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4.평택역의 설치와 식민지형 소도시의 발달
철도역이 건설되면서 역(驛) 주변에는 식민지형 소도시가 건설되었다. 식민지형 소도시의 특징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상권이나 도시구조와는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부선 대전역 주변에 형성된 대전(大田)이다. 대전은 본래 "한밭"이라고 불릴만큼 넓다란 밭농사지역이었는데 경부선 철도역이 건설되면서 도시화한 지역이다. 철도역이 건설되자 역(驛) 주변에는 일본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었고, 일본인 상권을 벋어난 지역에는 조선인 상권이 자리잡았다. 이어 식민지 수탈의 첨병인 금융기관이 자리잡았고, 한 쪽에는 물류창고와 식민통치기관들이 들어섰다.
이 같은 현상은 경부선 평택역도 마찬가지였다. 평택역이 설치되자 가장 먼저 역(驛)을 중심으로 십자형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역(驛)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울에서 목포까지 연결된 1번 국도가 지났고, 동서방향으로는 본정통(혼마찌)이라고 부르는 중심대로가 자리잡았다. 또 현재의 시장로터리 부근에는 평택, 안성, 장호원 간 신작로가 건설되었으며, 서쪽으로는 평택과 둔포 간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사통팔달의 도로망이 형성되면서 급속히 도시가 확장되었다. 먼저 본정통을 중심으로 노른자위 땅에는 일본인들의 상점이 들어섰다. 철도 건설 후 역 주변에 형성된 식민지형 도시의 중심상권에 일본인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역세권의 토지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1914년 전통적 상권이 강했던 안성시장과 신흥상권인 평택시장의 현황을 보면, 안성장에는 일본인 잡화상이 2개인데 비하여 평택역은 5개였고, 미곡상도 안성이 2개인데 비해 4개나 되었다. 일본인 상점거리가 끝나는 본정통 끄트머리에는 ‘평택장’이 신설되었고, 상점들 사이에는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도시가 확대되면서 도로의 동서방향, 즉 1번국도 변에는 금융기관과 물류창고, 각종 회사의 대리점이 자리잡았다. 예컨대 1920년대 에 발행된 “경기도 도세개요(道勢槪要)”를 보면, 이 시기의 평택역 시가지에는 군청과 경찰서, 우편소, 학교조합, 지방 금융조합(현 농협), 조선상업은행지점, 조선흥업주식회사 파출소, 진위흥농주식회사, 미쓰이물산 대리점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 같은 발전에 따라 행정구역이 개편디었다. 먼저 역(驛) 주변 신 시가지에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가 신설되었다. 평택리는 도시규모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1926년 4월에는 평택면(平澤面)으로 승격하였으며, 이 시기에 진위군 현내면 봉남리에 있던 진위군청과 진위경찰서 등 주요 행정관서가 옮겨왔다. 이로서 평택시가지는 교통과 통신, 상업이 발달한 경제도시에서, 행정과 사법, 교통과 경제가 발달한 근대도시로 발전하였다. 결과 1938년에는 기존의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평택면은 평택읍(邑)으로 승격되었다. 1915년에 일제가 발행한 "경기도 안내"라는 간행물에는 경기도의 저명한 시가지(市街地)로 인천, 수원, 개성, 영등포, 안성과 함께 평택을 들고 있을 정도로 평택은 새로운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5.평택역의 설치와 유통구조의 변화
경부선 평택역의 설치는 주변 상권과 유통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평택역이 신설되기 전 주변 상권은 홍성과 예산, 아산, 평택을 잇는 충청북부상권과 안성과 장호원, 여주, 이천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남부 상권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철도가 건설되면서 점차 상권의 중심이 평택역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형 근대도시 평택의 주요 상품은 미곡을 비롯한 곡물류와 소금이었다. 평택지방은 예로부터 아산만 연안과 안성천 하류를 중심으로 화염(火鹽)과 천일염이 많이 생산되었고,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 평택평야의 간척으로 미곡생산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곡은 비단 평택평야의 생산물만 집산 된 것은 아니었다. 평택역은 1번국도를 비롯하여 38번 국도 등 주변 재래상권과 연결되는 교통망이 잘 발달되어서 기존의 쌀 집산지로 유명했던 안성이나 둔포의 미곡이 평택역을 통하여 중계되었고, 아산만 연안의 소금이나 어물들도 이곳을 통하여 외부로 반출되었다.
이와 같이 평택역이 상품유통의 중심으로 급부상함에 따라 근대도시 평택에는 상품유통 및 금융기관과 시장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성공동창고 평택출장소의 설립이다. 한성공동창고는 1905년 9월 공동창고회사장정에 따라 종로상인 38명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회사로 평택출장소를 연 것은 1907년이었다. 이 회사는 설립 후 주로 보관업과 유통업을 하였는데, 1907년에서 19011년까지의 영업실적 보고서를 보면 현미와 식염의 보관량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조와 대두, 백미 순으로 집산되었다. 그 외에도 마포, 백목, 양목, 명태, 해산물 등이 보관되었다. 상품의 보관을 의뢰한 화주의 국적별 비율은 초기에는한국인이 90%에 달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인의 비율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 같은 결과는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인 이주자가 급증하고, 상업 뿐 아니라 농업에 있어서 생산수단을 일본인이 장악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곡과 식염, 잡곡과 해산물의 중계유통이 발달함에 따라 평택역 주변에는 시장과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평택시장은 1913년에 개장되었는데, 본정통 일본인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형성되었다. 개장 초기 평택시장은 싸전거리가 가장 컸고, 생선을 파는 진전거리가 그 뒤를 이었다. 1914년의 기록에 의하면 시장 안의 조선인 미곡상은 15개에 달했고 일본인 미곡상은 4개였다. 현 평택초등학교 자리에는 우시장이 있었다. 이곳의 우시장은 평택지역 뿐 아니라 안성인근과 아산인근의 소들까지 취급하여 주변에서는 규모가 컸다. 우시장과 시장통 사이에는 주막과 1915년을 전후해서 미두검사소와 진위흥농주식회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근대도시 평택은 미곡의 중계상업 뿐 아니라 가공, 판매까지 담당하는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평택시장은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철도교통의 비중이 커지면서 급속히 성장하여 매출액에서 1920년대 후반에는 인근의 둔포장을 완전히 능가하였고, 안성장에 근접하는 수준이 되었다. 1928년의 일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평택장의 거래액수는 34만원으로 전국 1천 3백 여 개 장시 중에서 상위 10%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고 기록한 것은 이와 같은 현실을 바영한 결과였다.

6.해방 후 철도역의 이전과 신도시의 개발
해방 후 평택읍은 대규모 수해와 한국전쟁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수해는 1946년 병술년에 있었다. 본래 구 평택시는 안성천 변에 위치하고 지대가 낮아 수해의 피해가 예견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도시 전체를 감싸는 2미터 높이의 제방을 쌓아 수해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946년 6월 장마철을 맞이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려 모래보 등 안성천의 물을 가둬두었던 제방이 일시에 터지면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다.
1946년 6월 26일과 7월 17일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6월 26일 현재 수원, 평택, 안성 등에 한꺼번에 400미리 이상의 폭우가 내려 가옥 수백채와 농지가 유실되고, 인명이 손실되는 사고가 발생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평택은 사망자 11명에 농경지 1,816에이커가 유실되어 최대의 피해를 나타냈는데, 이것은 안성천과 진위천의 하류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물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수해는 구 평택 시가지를 완전히 침수하였다. 이 때문에 상점에 보관된 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상점과 민가들도 대부분 유실되거나 파괴되어 1905년 경부선 철도역이 설치된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근대도시 평택은 앙상한 몰골만 남게 되었다.
또 한 번의 피해는 한국전쟁 중에 발생하였다. 인민군의 공격으로 대구와 부산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을 시도하면서 구 평택시에도 인민군이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폭격 당시 인민군은 통복동 방면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고, 육군보다 먼저 미군전투기가 나타나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철도역에는 국군에 자원입대한 병사 1백 여 명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미군기가 나타나자 거리로 나와 손을 흔들어 환영하였다(전 평택교회 송두규 목사 증언). 하지만 미군 전투기는 상공을 한바퀴 선회하더니 갑자기 포탄을 쏟아부었다. 미군의 초토화 작전이었다. 기차역에 대기중이던 지원병과 시민들은 영문도 없이 거의 몰사했고, 구 시가지는 80%이상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을 토박이 김동섭(68세)씨 증언)
도시가 파괴되자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 관서는 평화병원, 일본인 창고 등 파괴되지 않은 건물에 입주하여 몇 년 동안 업무를 봤다. 그러다가 1953년 기차역이 가장 먼저 철도 동쪽으로 이전하였고, 1955년, 58년에는 군청과 경찰서가 건너편으로 이전하였다. 시장상인과 본정통에서 상업을 하던 상인들도 주요 행정관서를 따라 함께 이주하였다. 그리고 파괴되고 이주한 자리에는 각 지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자리잡았다.
철도역과 관공서가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신도시는 구 시가지를 모방하여 철도역을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망을 만들고 역(驛)과 일직선상에 군청과 경찰서를 두었다. 또한 도시의 서북쪽에는 시장을 두었고, 경찰서와 역(驛) 사이의 중심도로에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이로써 평택시는 약 50년 동안의 구 시가지 시대를 종료하고 신 시가지를 중심으로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이메일   kimsea6@naver.com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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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우리나라의 봉수(烽燧)제도와 괴태곶 봉수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이메일   kimsea6@naver.com 홈페이지   
파일첨부    조 회   132
제 목   평택지방의 길-삼남대로와 충청대로
삼남대로 - 평택(平澤) 구간
-경인일보에 기고한 글


1) ‘춘향이 길’ 이라는 애칭이 살가운 삼남대로

길은 국토의 핏줄이다. 몸이 대동맥과 대정맥 그리고 가는 실핏줄로 나뉘었듯이 근대이전의 길도 대로와 중로, 소로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었다.

평택지방은 조선시대 제6로인 삼남대로가 지나는 요충이면서 제8로인 충청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이 길은 평택을 지나 천안과 공주를 거쳐 전라도 삼례에서 제주로(호남대로)와 갈라지고 전주와 남원을 거쳐 경상도 삼랑진까지 이어졌다. 영남대로와 함께 한반도 남서부를 대표했던 삼남대로는 춘향전에도 나와 있다. 예컨대 정든 님을 남겨두고 한양에 올라갔다가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전라도 암행어사를 제수 받고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목에 삼남대로의 행로(行路)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애칭이 ‘춘향이 길’. 춘향전을 사랑했던 민중들의 정서가 만들어준 이름이다.




2)길은 강(江)을 건너고 사람은 산(山)을 넘는다

한양을 출발하여 과천과 수원을 거친 삼남대로는 진위면 갈곶리 백치(白峙)를 넘어 평택지방으로 들어왔다. 갈곶리는 오산신점에서 진위현의 중심지 봉남리와 직선거리에서 약간 비껴나 있지만 오산천을 통한 수로교통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이었다.

갈곶리를 지나면 가곡리와 견산리다. 이 길은 근대 이후 철도가 놓이고 1번 국도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제외되어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은 근대교통에서 소외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간신히 우마차가 다녔고 송탄에서 택시를 타면 잘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삼남대로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진위천을 건넜다. 진위천은 조선시대에 장호천 또는 구천(龜川)이라고 불렀는데 봉남리 앞에는 목교(木橋)와 은산리 방면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근대이후 철교(鐵橋)나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육로교통의 가장 큰 장애물은 하천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무다리가 되었든 징검다리가 되었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시설 주변에는 인마(人馬)와 물자가 몰렸다. 그래서 봉남리 관문 앞에는 주막과 장시가 열렸고 마을 앞 장호들에는 장호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설치되었다.

봉남교를 건너 마산리 샛둑거리와 마산2리 숲안말을 지나면 염봉이다. 염봉은 장고개라고도 하고 작은흰치고개라고도 한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고개는 근대 이전에는 소금의 유통로였고 경부선 서정역 주변에 서정장이 발달하면서는 장보러 넘나들던 고개였다. 염봉 남쪽에는 백현원이 있었다. 백현원은 존폐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후기 몽고침입 때 처인성 전투를 이끌었던 김윤후가 백현원의 승려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곳은 갈원과 큰 흰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숲안말길과 오룡동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여행객들의 중요한 쉼터였다.

사람이 머물다 가는 역원에 사연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조선 초 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고불 맹사성의 공당문답이 백현원에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맹씨행단’이 아산 배방면에 있고 그곳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삼남대로 갈원과 백현원을 지나야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감이 간다. 백현원을 지나면 큰흰치고개를 넘었다. 큰흰치고개는 한자로 대백치(大白峙) 또는 백현(白峴)으로 삼남대로 평택구간에서는 가장 험한 고개였다. 그래서 백현원에서 다리쉼을 한 여행자도 큰흰치고개를 넘으면 기진하였다. 힘이 빠져 기진한 사람에게 탁배기 한 잔은 보약보다도 달고 맛있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감주거리’. 지금의 평택시 장안동과 도일동의 경계, 엄나무 성황목이 버티고 선 사거리이다.




3)삼남대로 평택구간의 중심 갈원(葛院)

지금은 칠원으로 지명이 바뀐 갈원은 삼남대로와 충청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며 평택지방에서 가장 오래 남아 있었던 역원(驛院)이다. 그래서 남겨진 이야기도 많고 역사의 흔적도 다양하다. 예컨대 중종 때 김안로가 세도를 부리자 갈원의 벽에 이를 비방하는 벽서가 붙은 일이 있었고, 왕이 온양 행궁으로 남행할 때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령했다는 이야기라든가, 남행을 하던 중 목이 말랐던 왕이 옥수정의 물을 마시고 감탄하여 옥관자를 내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해방정국에서 송탄동 출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 김현욱이 농민폭동을 일으켜 갈원(칠원) 일대를 장악했다는 이야기는 역원이라는 특수촌락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내용이다.

삼남대로는 갈원을 지나면 도로에서 벋어나 자동차 한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시골길로 접어든다. 이 구간은 평택지방의 옛길이 택지개발 등으로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길은 여기에서 충청로와 갈라져 칠원동 쇠물뿌리 마을과 물방아거리 마을 사이의 들판을 지나 통복천을 건넌다. 통복천을 건너면 가내주막이다. 이곳을 지나면 평택-용인 간 45번 국도를 가로질러 죽백동 재빼기 마을의 긴 능선을 지나서 배다리에 이른다. 배다리는 현재 저수지가 축조되었지만 일제강점 이전만 해도 배다리가 있었다.

배다리방죽에서 소사동 구간은 1990년대 초 택지개발과 산업도로건설로 옛길이 사라졌다. 굳이 옛 기억을 되살린다면 동부공원 동쪽으로 난 산업도로를 끼고 굿모닝병원을 지나 소사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사동은 조선시대만 해도 양성현 영통면에 속했고 그 뒤로는 안성시였다가 1981년에서야 평택시에 편입된 지역으로 충청도 직산현과 경계를 이루는 관문이었다. 도(道)의 경계를 이루는 관문은 교통과 국방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곳에는 소사원이 설치되었고 조선말기에는 장시도 발달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1651년(효종 2)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잠곡 김육을 기려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불망비(不忘碑)가 이곳에 있게 된 것도 충청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4)도로와 구별되었던 역로(驛路)

평택지방의 역로(驛路)는 도로와 구별되었다. 본래 걸어다니는 길과 말이 달리는 길이 엄격하게 구분되기는 쉽지 않지만 평택지방의 경우 도로가 최단거리를 감안하여 흰치고개와 염봉, 백치(白峙)와 같은 구릉을 넘도록 하였기 때문에 역로(驛路)로 이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원에서 공주까지의 역로(驛路)는 성환도라고 해서 성환 찰방이 관할하였다. 이 가운데 평택지방에는 청호역과 화천역 등 두 개의 역(驛)이 있었다. 청호역은 조선시대에 진위현 청호리였다가 몇 년 전 역말만 오산시로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출발한 역로(驛路)는 현재의 387번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가 안성시 원곡면 성은리에서 우회전하여 지문리를 거쳐 가천역에 당도했다. 가천역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원곡면 내가천리 역말인데 조선시대 양성현과는 천덕산을 경계로 하고 있어 교통이 불편하였고 현재에도 안성시보다는 평택시와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어 옛부터 행정구역 조정논란이 많았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끝내 조정이 이뤄지지 못했는데, 아마 평택지방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견아상입지와의 관련성 때문으로 생각된다. 가천역을 지나면 소사교와 천안시 성환읍 가룡리의 아교를 넘어 성환역에 당도했다. 역로(驛路)는 이곳에서 삼남대로와 충청로로 갈라졌는데, 충청로의 첫 번째 역(驛)이 평택시 팽성읍 추팔리의 화천역이었다.




5)철도(鐵道)가 길을 바꾸다

평택지방의 도로망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다. 변화의 요인은 구한말 철도의 가설이다. 철도의 가설은 전통적인 수로교통을 약화시켰으며 육로교통도 철도와의 연계를 고려하여 재정비되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평택역을 철로의 서쪽인 평택시 원평동에 건설한 것은 순전히 일제의 식량수탈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에도 안성방면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동쪽에 철도역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평택 서부지역이 가진 광활한 궁방전과 역둔토, 군문포와 둔포를 통해 유입되는 아산만 유역의 풍부한 어염의 이익에 견줄 만큼은 아니었다. 철도가 건설되면서 역(驛)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재정비되었다. 평택역과 오산, 평택역과 성환을 잇는 새로운 1번 국도가 건설되었으며, 안성천 변에는 망근다리라고 부르는 철교와 콘크리트로 가설되어서 흰다리라고 부르는 유천교 그리고 군문교가 놓였다. 철도가 놓이고 기차역을 중심으로 도시와 도로가 발달하자 철도교통에서 멀리 떨어진 삼남대로는 점점 쓸모없는 시설이 되었다. 간간히 소사장이나 서정장을 보러다니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의 등하교 길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잊혀진 도로가 되었다.

1백 년 동안 잠을 자던 삼남대로 평택구간이 다시 깨어 난 건 최근의 일이다. 잠을 깨우는 일은 여론이 하였지만 도로의 건설은 전 시장(市長)의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새로 건설된 삼남대로는 자동차도로가 갖는 직선의 편리성을 강조하면서 곡선의 미학이 돋보이던 옛 도로의 특징을 사라지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