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평택지방의 산(山)과 하천(河川) 지명(地名)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6:08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이메일   kimsea6@naver.com 홈페이지   
파일첨부    조 회   186
제 목   평택지방의 산과 하천지명
평택지방의 산(山)과 하천(河川) 지명(地名)




김해규(한광중학교 교사)




1.머리말

지명은 자연환경과 인간 삶의 표현이다. 인간은 지명을 통하여 소통하고, 생활하며, 삶의 편리함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지명은 역사이며, 지리이고, 사상이다1).

근대 이전 평택지방은 낮고 저습한 곳이 많아 육지와 개펄이 반반이고 경작지가 적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유입되었으며, 민중들은 식수를 비롯하여 농업용수 부족과 수해, 염해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와 함께 바다가 가깝고 경기지방에 속해있어 지배층의 수탈과 외적의 침략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금 굽는 일에 종사하는 집이 수백 호(戶)나 되고 뱃길이 편리하지만, 거친 땅과 기름진 땅이 반반이고 목화재배에 알맞지 않아서 사람살기에는 크게 유익하지 않는 곳”이라고 표현하였다2).

예나 지금이나 평택지방을 특징짓는 것은 산이 적고 들이 넓으며 도로 및 수로교통이 발달한 고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고장의 산들은 해발고도 200m이내의 낮은 구릉이며 들은 수 백 만평에서 수천만 평에 이르는 광활함을 자랑한다. 또한 교통, 통신은 조선시대의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를 비롯하여 나루와 포구를 이용한 수로교통 그리고 서부지역에는 봉수(烽燧)로를 중심으로 통신시설이 발달하였다. 이 글에서는 평택지역의 산(傘)과 하천(河川) 지명 가운데 특징적인 몇 가지를 조명하려고 한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하여 우리고장의 역사적 변천과 삶의 환경의 변화가 실증적으로 규명되기를 바란다.




2.산(山)과 관련된 지명

평택지역은 동고서저형의 우리나라 지형에서 서쪽 끝에 위치하여 산이 적고 저습한 평야가 많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경작지가 부족하고 척박하여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형적으로 동북쪽에는 산이 많고 서남쪽에는 들이 넓다. 산이 많은 동북쪽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배경으로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고 농경지가 발달하였다. 간석지가 발달한 서남쪽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비옥한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무봉산, 부락산, 덕암산, 백암산, 팔룡산, 오봉산, 마안산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대략 200m에서 30m 사이의 낮은 구릉들이다.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산은 무봉산(208.6m)이다. 무봉산은 진위면 봉남리, 동천리, 가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세가 ‘봉황이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하여 유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편에는 ‘만의산’이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무봉산 외에도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말에 편찬된 진위군읍지에는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용인 부아산에서 나오는데 현(縣)의 주봉(主峰)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무봉산이라는 지명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쓰였으며3) 1843년(도광 23), 1891년(광서 17), 1899년(광무 3) 읍지(邑誌)에도 기록되었다. 이 산에는 조선 전기의 문장가 서거정, 최수성4) 등 유력한 시인 묵객들이 올라 시를 읆고 글을 썼으며, 진위현의 성황사, 여단, 기우단이 설치되어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부산(釜山)은 진위면 봉남리 향교말 뒷산이다. 그동안 부산(釜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다. 예컨대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5)에서는 일제가 발행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6)를 토대로 견산리산성을 일컬어『부성(釜城)』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진위군읍지(1899)에도 “부성(釜城)은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리를 넘지 못한다. 고려 때 읍(邑)의 터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견산리산성의 뒷산이 부산(釜山)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 현(縣)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라고 기록하였고, 조선후기에 제작된 팔도군현도(1760), 팔도지도(1785~1800), 해동여지도(1800)에도 읍(邑)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그렸다. 비록 조선시대의 읍지도가 실측지도는 아니었지만 관아 및 산과, 강의 위치, 도로 등을 비교적 정확하게 그렸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부정하기는 곤란하다. 부산(釜山)이란 ‘솟뫼’의 한자지명이다. ‘솟뫼’란 ‘솟아 오른 산’으로 장호들에서 볼 때 부산(釜山)이 불쑥 솟아오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다, 고구려 때에는 산성 내에 읍치(邑治)가 있었으므로 유래된 지명으로 판단된다.

부락산(負樂山)은 송탄의 주봉이다. 현재 각종 체육시설이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산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먼저 1843년에 간행된 진위현읍지에는 부락산(負樂山)이라고 쓰였으며, 1891년에 간행된 진위현읍지에는 조락산(鳥落山), 1899년 진위군읍지에는 다시 부락산(負樂山)이라고 기록되었다. 이것만으로 본다면 1891년 읍지의 조락산(鳥落山)은 부락산의 오기(誤記)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옛 지도를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컨대 팔도군현도(1760)와 해동여지도(1800), 해동지도(18세기 중엽), 광여도(1767~1776), 경기도지도(18세기 중엽)에는 불악산(佛樂山),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에는 요악산(仸樂山), 1975년 지도7)에는 불악산(佛岳山)이라고 기록8)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본래지명에 가까울까? 필자는 불악산(佛樂山)의 손을 들고 싶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행적구역이 개편될 때 지역의 대표적인 산들은 우선적으로 한자화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우선 고려된 것은 기존의 자연지명의 한자화였지만, 산의 형세나 모양, 절의 위치도 매우 비중 있게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락산의 경우 절의 존재나 불교적 영향으로 불악산(佛樂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가 발음이 어려워 구개음화된 것을 19세기 읍지(邑誌)가 편찬되던 시기에 소리 나는 대로 부락산(負樂山)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삼각산, 덕동산, 매봉(산)은 일명 평택 삼봉으로 일컬어진다. 이 산들은 해발 30미터 내외의 낮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평야지대인 평택남부지역에서는 제법 높은 봉우리에 속하기 때문에 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평택중학교 뒷산인 삼각산은 몇 년 전 지역주민들이 ‘자란산으로 부르기 운동’을 하여 요즘에는 자란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산은 역사적으로 자란마을(재랭이 마을, 당재마을)의 당산(堂山)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산중턱에 일본 신사(神社)9)가 있어서 ‘재랭이산’, ‘삼각산’으로 불렸던 점을 상기할 때 ‘삼각산’으로 불러야 옳다고 본다. 삼봉 가운데 중간에 있는 덕동산은 절이 있어 ‘부처님골’ 또는 함지박을 업어 놓은 것 같아서 ‘함박산’으로 불렸다10).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순국한 무명용사를 봉안한 현충탑이 건립되면서 ‘충혼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1986년 산 정상부에 평택시 승격을 기념하여 ‘덕동루’라는 누정이 건립된 후에는 ‘덕동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덕동산이라는 이름이 역사적 근거 없이 만들어진 지명이고 보면 함박산이라는 옛 지명을 되살려 정체성을 바로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동쪽에 위치한 매봉(산)은 ‘매가 날아드는 봉우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11)에는 용봉산(龍鳳山)으로 표기하였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까지 기록하였다. 하지만 용봉산은 ‘응봉(鷹峰)’의 오기(誤記)로 보이며 봉수대가 있다는 것은 ‘기우단’의 존재를 착각하여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3.하천(河川)과 나루, 포구(浦口) 지명

근대 이전의 하천은 인마(人馬)의 통행과 물자의 유통, 세곡의 운송에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수로(水路)는 육로에 비해서 전세(田稅)나 공납(貢納)의 운송에 유리했기 때문에 해운로와 수운로의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강(京江)과 서남해안, 강과 하천의 수로를 중심으로 선상(船商)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우리나라의 선박은 밑이 평평한 사각 통 모양의 평저선(平底船)이어서 해안이 길고 수심이 낮은 서남해안에 출입이 자유로웠고 항구가 아니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할 수 있어12) 하천이 발달한 곳이면 내륙 깊숙한 곳까지도 상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었다.

평택지방은 바다가 가깝고 지대가 낮아 하천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하천으로는 안성천과 진위천이 있고 오산천과 황구지천, 통복천 등 약 30여개의 지류가 그 뒤를 잇는다. 하천에는 나루와 포구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조세(租稅)운송, 선상(船商)들에 의한 상업활동, 인마의 통행이 활발하였다.

안성천은 안성시 삼죽면 배태리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의 아산만까지 총연장 73㎞, 유역면적 1,722㎢의 하천이다13). 이 하천은 삼국시대에는 웅천강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 전기로 들어오면서 구간에 따라 안성군에서는 남천(南川), 양성현에서는 홍경천, 직산현에서는 대천(大川)으로 불렸고14), 조선후기에는 남천과 대천이라는 지명은 그대로 쓰였지만 양성현 구간은 ‘소사천’으로 바뀌어 통용되었다15). 안성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9월 25일 일제가 하천의 명칭, 각 하천의 수해상황, 관개면적, 하천공작물을 조사하고 하천의 본류와 지류를 확정지어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나타났다16). 이후 모든 공식문서에 이 같이 사용되면서 오늘날에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진위천은 용인 무네미고개 등 여러 곳에서 발원하여 오산천,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오성면 창내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한다. 총 길이는 50㎞이며 유역면적은 201.5㎢이고 모두 13개의 지류를 갖고 있다. 이 하천은 일반적으로 장호천(長好川)17)이라고 불렸지만 귀천(龜川)18)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진위천이라는 지명은 안성천과 마찬가지로 1914년 일제의 하천지명 개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오산천은 ‘토현천(兎峴川)19)’으로 불렸다. 이 같은 명칭은 18, 19세기의 지도(地圖)와 읍지(邑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진위면 갈곶리 쯤으로 판단되는 토현(兎峴, 토끼고개)이라는 지명20)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별칭으로는 호미모양으로 휘어져 흐른다고 하여 서천(鋤川)이라고도 불렀다21). 수원의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황구지천은 구간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예컨대 수원구간에서는 대천(大川)22), 서탄면 내천리에서는 ‘내천(奈川)23)’, 항곶포(진)에서는 포구의 이름따라 불렸다. 이 하천이 황구지천이라고 불리게 된 시기는 1899년 진위군읍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다른 하천과 다르게 발원지가 아닌 하류의 항곶포의 이름을 빌려 지명을 삼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통복천은 조선시대에 ‘통복포’ 또는 ‘통복보’로 불렸다. 근대 이전에는 작은 하천일 경우 특정한 이름보다 나루나 포구, 제언의 명칭으로 지명을 삼는 경우가 있었는데 통복천이 그런 경우다.

평택지방의 하천과 바다에 발달한 나루와 포구는 무수히 많다. 주요 나루만 해도 조창(漕倉)이었던 경양포, 해창포, 옹포가 있고, 인마의 통행과 선상(船商)들의 활동이 잦았던 항곶포, 동청포, 다라고비진, 이포, 군물포, 곤지진, 구진, 계두진, 대진, 호구포, 한진이 있다.

이 가운데 팽성읍 노양리에 있었던 경양포(慶陽浦)는 고려시대 전국 13조창 가운데 하나였던 ‘하양창’이었다24). 그러다가 조선 태조5년에 고을을 폐하여 직산현에 붙이면서 하양창도 함께 편입되어 ‘경양창’이라고 바뀌고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관장하는 해창(海倉)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양현의 수령은 염(鹽)장관을 겸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소금 굽는 집이 수 백호나 되고...25)”라는 기록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안성천 변의 마을에 염(鹽)자를 표기하고 있어 고려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소금의 생산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경양포는 ‘계양(桂陽)’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계양(桂陽)이라는 이름은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해동지도, 광여도(1767~1776), 여지도(18세기 중엽)에 ‘계양해구(桂陽海口)’라는 지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계양해구란 어디를 말할까?. 그것은 안성천과 둔포천이 합류하는 경양포 앞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경양’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19세기 말 경양포가 가졌던 해창(海倉)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경양’을 대신하여 불려지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군문포(軍門浦)는 평택시 군문동에 있었던 포구다. 정확한 위치는 안성천 변을 가로지르는 군문교 아래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이다. 이 포구는 평택현 영역이면서 조선시대 전국10대로26) 가운데 하나인 충청수영로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며 안성천을 건너 경기도 진위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5년 1월 경부선 평택역이 군문포와 인접한 통복리(동)에 세워진 것도 포구를 통하여 서해의 물산이 유입되고 평택평야에서 생산되는 양곡의 집적이 쉬웠기 때문이었다27). 일반적으로 군문포는 ‘청일전쟁(1894) 때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주둔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전에도 안성천의 가장 중요한 수로교통로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 같은 지명이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軍勿浦)’다. 군물포라는 지명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고 18세기에 편찬된 『팽성지』28)에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895년에 편찬된 『평택현 읍지』에도 쓰였는데 1899년에 편찬된 『진위군 읍지』에는 ‘군문포(軍門浦)29)’라고 기록하여 4년 사이에 지명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4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주목되는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이다. 앞서 청일전쟁은 아산만과 소사벌 일대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의 풍도를 거쳐 아산의 백석포와 군물포로 상륙하여 주둔하였음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바뀌었을 것이다.




4.맺음말

지금까지 평택지역의 산과 하천, 나루와 포구 지명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우리고장에 있는 수 십 개의 산과 32개 이상의 하천을 모두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논쟁이 되고 있는 중요 지명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고구려 지배시기의 읍치(邑治)로 논의되었던 부산(釜山)의 위치에 대한 고증이나 부락산(負樂山, 佛樂山)의 명칭에 대한 객관적 검토, 안성천, 진위천, 오산천, 황구지천의 역사적 검토, 경양포와 군문포의 고증은 다른 하천이나 나루, 포구의 고증에 전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실증적이며 객관적인 지명연구를 통하여 우리고장의 역사적 정체성과 의미를 바로 세우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