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근대이전 수군(水軍)의 발달과 평택지방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6:07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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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근대이전 수군(水軍)의 발달과 평택지방
이 글의 내용 가운데 수군발달사 등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존의 자료들에 수록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근대이전 수군(水軍)의 발달과 평택지방



1. 근대 이전 수군제도의 발달


1)고대의 수군제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군의 활동에 대한 기록으로는 고조선 말 한나라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나라 군사 7천을 거느리고 지금의 산둥반도를 출발하여 열구(大同江)를 통과 수도 왕검성을 치다가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 후 삼국시대 들어 수군활동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다.

고구려는 5세기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남북조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하는 수군의 존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612년 수나라의 침략이 있을 때 수나라 장수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을 평양성 밖 60리 지점에서 섬멸하였는데, 여기서 호라약한 군대가 수군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644년 당태종의 침입이 있을 때도 당이 동원한 5백 척의 함선과 4만 3천의 병력을 맞서 싸운 고구려군도 수군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전후 중국 및 일본과 해상교류를 하여 일명 해상왕국으로 불렸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바다를 건너 탐라(제주도)를 정벌하였고,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 요서지방을 공격하여 거점을 마련했다는 사실도 백제의 수군력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통일전쟁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백강(금강)을 통하여 들어오려고 할 때 입구에서 당군을 맞아 싸운 백제군도 수군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해상교류 및 무역을 위해 일정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 수준의 전력을 갖췄을 것이라 짐작된다.

신라에는 선박과 관련된 일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 문무왕 18년(678)에 설치된 선부(船府)가 있었다. 삼국시대처럼 전쟁이 빈번했을 시기 배를 관장했다면 그 배는 전함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함을 건조하는 부서가 있었다면 수군이 존재했을 것인데, 단서가 되는 사건이 지증왕 13년(512)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일이다. 그 후에도 통일 후 당항성이나 영암을 중심으로 해상교역과 민간인의 왕래가 잦았다는 것은 수로나 해로교통의 발달 뿐 아니라 수군의 양성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고대 수군의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은 장보고의 활동이다. 장보고는 흥덕왕 때에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수군을 양성하여 해적들을 소탕한 뒤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였던 인물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해진과 같은 진(鎭)의 존재다. 진(鎭)은 군사요충지가 되는 군진(軍鎭)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 말에는 해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대에도 설치되었다. 청해진은 곧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밖에도 남양(南陽)의 당성진(唐城鎭)과 강화의 혈구진(穴口鎭) 등이 있었다.

이처럼 고대에도 각 나라에는 수군이 존재하였으며 기록은 없지만 이들의 활약이 동남아시아까지 뻗쳤을 것이라는 짐작도 쉽게 할 수 있다.


2)고려의 수군제도

고려의 수군제도는 분명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태봉 때부터 왕건이 바다에서 크게 활약했고 벽란도를 중심으로 대외무역이 발달했던 점을 고려할 때 상당한 수준의 수군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태봉 시기의 수군활동으로는 궁예의 부하장수였던 왕건이 903년 수군을 동원하여 후백제의 금성을 공격했던 일을 들 수 있다. 또한 909년에는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으로 수군을 이끌고 광주(光州) 관내 염해현(鹽海縣)에서 견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사신의 배를 사로잡아 개선하였으며 군사 2,500명으로 진도(珍島)와 고이도(皐夷島)를 빼앗았다. 이듬해에는 견훤이 나주를 위협하자 영산강 포구에서 능창이 이끄는 후백제 수군을 크게 무찌르고 적장을 사로잡아 궁예에게 보내어 목 베었다. 이처럼 태봉은 강력한 수군력을 보유하였으며, 이 수군은 건국 후 고려의 수군으로 편입되었다.

고려는 건국 후 법제상 체계적인 수군제도를 확립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해적의 침입이 잦거나 해상경비를 필요로 한 곳에는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가 설치되어 유사시 침입하는 왜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선병도부서는 일종의 수군 군단으로 해상방어와 경비를 담당했던 부대로 생각된다. 선병도부서는 동계(東界)의 진명(鎭溟)과 원흥(元興)에 있었고, 북계(北界)의 통주(通州)와 압강(鴨江)에도 있었으며, 남해지방에 동남해선병도부서가 있었다. 이 부서가 활약한 기록으로는 고려 전기 동해안지역에 자주 침입한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을 동계의 선병도부서의 수군이 쳐부수었고, 북계의 선병도부서의 수군은 거란(契丹) 등 외적이 압록강 부근의 강을 건널 때 큰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병도부서 중심의 수군의 규모와 능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예종 때 윤관(尹瓘)이 여진정벌 할 때에 동계의 선병도부서 수군 2,600명이 동원되어 크게 활약하였다는 기록과,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 군사 5,300명, 함선 9백 척 그리고 초공(梢工)과·수수(水手) 6,700명이 참전하였다는 기록으로도 짐작된다. 또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 때에도 병선 9백 척, 초공과 수수 1만 5천명, 정군(正軍) 1만 명, 군량 11만석을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어 내용과 질에 있어 상당규모의 수군력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태풍으로 두 차례의 일본정벌이 실패하면서 고려의 수군은 크게 타격을 입었고, 일본정벌 후에도 고려의 해상능력을 경계한 몽고의 견제로 수군력을 복구할 수 없었다.

고려의 수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반원개혁운동이 실효를 거두고 왜구의 침입으로 불가피하게 수군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였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수군양성을 주장하던 정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 수군을 부활하게 하였고 고려 말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의 수군 100척이 금강하구 진포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선단 5백 여 척을 화포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후에도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가 되어 진포·군산도(群山島) 등에서 왜선을 쳐부수었고,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러 왜선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밖에도 우왕 때 박위(朴輹)는 병선 1백 척으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왜선 3백 척을 불사르는 등 큰 전과를 거두어 고려 수군의 위용을 자랑하였다.




3)조선의 수군제도

조선의 수군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재건되었다. 수군은 연해(沿海)의 각 포(浦)에 복무하였는데 기선군(騎船軍) 또는 선군(船軍)으로도 불렸다. 제도인 정비는 대체로 세종 때였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병역은 주로 양인층으로 충당하였다. 규모는 조선 성종 6년(1475)의 기록에 따르면 총군병 14만 8849명 중 수군이 4만 8800명, 정병이 7만 2109명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봐어 약 5만 명 내였을 것으로 보인다. 군역은 해안가에 거주하는 상민층 뿐 아니라 산군(山郡)인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진무, 지인, 영사, 사관으로 불리며 연해민으로 구성된 격군보다 우대받았다.

수군은 번을 설 때 군량을 짊어지고 들어가 선상(船上)에서 근무하며, 둔전(屯田), 어염(漁鹽), 해산채취(海産採取), 병선수리(兵船修理), 조운(漕運), 축성(築城) 등의 잡역(雜役)에 동원되었다. 성종 때부터 대립(代立)과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일반화되면서 수군의 무거운 역은 대립가(代立價)의 과중한 부담으로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상민층들은 역이 무거운 수군을 꺼려 세력 없는 사람만 충원되더니 나중에는 천한 역(役)으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로 조선 후기에는 수군이 부족하여 숙종 때 수군 강화를 위해 수군속오법(水軍束伍法)을 실시하였다. 수군속오법은 양인과 천인을 혼성해 종래 2교대에서 3영(領)으로 나누어 3교대로 복무기한을 완화한 것이다.

수군의 편제는 조선 초에 각 포(浦)와 진(鎭)마다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 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를 두었다. 세종 때 수군도절제사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가 되었으며, 휘하에 도만호(都萬戶)와 만호(萬戶)가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에 따라 주진(主鎭)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거진(巨鎭)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제진(諸鎭)에는 만호가 배속되도록 규정하였다.

원래 수군은 해상근무가 원칙이었으나 병선 관리와 고달픈 훈련 때문에 성종 때부터 진(鎭)에 성보(城堡)가 설치되었다. 이 같은 조처로 수군의 해상근무 원칙이 무너지고 육상근무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수군(水軍)과 정병(正兵)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종 때는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 즉 왜군은 수전에 능하고 조선군은 기병을 잘하니 육군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으로 수군의 감축이 이루어져 조선 수군은 더욱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이 발생하면서 경상도에만 실시되었던 제승방략체제가 전라도로 확대되었고 이 같은 체제는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1592)이 발생하자 조정은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을 내세워 수군의 폐지를 검토했다. 그러다가 이순신, 원균, 이억기의 연합함대가 연전연승을 하여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자 입장을 바꾸어 하삼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통제영’을 신설하였다. 통제영은 신설된 뒤 통제사 이순신의 앞선 전략과 조선함선의 우수성, 화포의 우위를 앞세워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정묘호란(1627) 뒤 후금과 전쟁의 기운이 강화되자 수도권 방어를 위해 강화도에 통어영(統禦營)이 설치되었다. 통어영은 서울의 입구에 해당하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군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병선(兵船)이다. 조선 초기에는 해전을 위한 병선과 조운(漕運)을 위한 조운선이 구별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병선으로 대선(大船), 중선(中船), 쾌선(快船), 맹선(猛船), 왜별선(倭別船), 중맹선(中猛船), 추왜별맹선(追倭別猛船), 별선(別船) 등이 기록되었다. 세조 11년에는 중국과 일본 등의 배의 모양을 참조하여 병선과 조운선을 겸용할 수 있는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되었고, 성종7년에는 신숙주에 의해 맹선이 개발되어 맹선제(猛船制)가 마련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경국대전에는 각 도(道) 및 각 포(浦) 별로 대, 중, 소맹선(大中小猛船)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 전국의 병선 수는 대맹선 81척, 중맹선 195척, 소맹선 461척으로 합계 737척을 보유하게 되었다. 명종 때에는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었다. 판옥선은 수심이 낮은 우리나라 해안에 적합하도록 배 밑이 평평하고 소나무로 건조하여 견고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배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수군의 주력 함대로 거북선과 함께 맹활약하였다.


2. 평택지방의 역사와 교통


1)평택지방은 민중들의 땅

평택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다. 이것은 포승면 원정리 멍거니유적을 비롯하여 희곡리, 홍원리, 석정리, 안중면 현화리, 대반리, 송담리, 고덕면 방축리, 오성면 양교리, 포승면 원정리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 유적으로 증명된다.

사회와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정복활동이 활발했던 삼한시대는 마한의 영역으로 북으로 수원의 모수국과 직산의 목지국의 변방에 위치하였다. 또한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변방으로 연달부곡, 송촌활달부곡(진위지역), 하팔현(평택지역), 용성현(청북면), 광덕현(현덕면) 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백랑부곡, 송장부곡, 천장부곡, 감미부곡, 육내미부곡, 포내미부곡과 종덕장, 오타장, 신영장 등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들어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이 강화됨에 따라 그동안 존재했던 향, 소, 부곡,장, 처와 같은 특수행정구역이 없어지고 중앙집권이 강화되었다. 평택지방은 안성천을 경계로 북쪽은 경기도 진위현, 남쪽은 충청도 평택현으로 편재되었으며, 진위천을 경계로 서쪽은(현덕, 포승, 청북지역) 수원부, 직산현, 양성현 지역으로 나눠 편재되었다.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택현(지금의 팽성읍)은 호수(戶數)179호에 인구 704명, 토지가 2,234결이었는데 기름지고 메마른 땅이 반반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1,524호에 인구 5,742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이 수치는 전국 350여 개 현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었다. 진위현은 평택현에 비하여 규모가 컸지만 생활이 팍팍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박, 가뭄, 해일 등 자연재해가 많았다는 기록과 함께 평택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자주 눈에 띄며, 또한 궁벽지고 작은 현이어서 수령들이 부임을 꺼렸다고 쓰여 있다. 그만큼 외지고 척박하여 사람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땅을 개간하고 가꾸어 옥토를 만든 것은 민중들이었다. 고향 땅에서조차 살 수 없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은 길도 없고 식수도 구하기 어려운 벌판에 마을을 이루고 수해와 싸워가며 농사를 지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의 평택지방을 만들어 낸 것이다.


2)근대와 함께 형성된 평택(平澤)과 송탄(松炭)

갑오개혁 후 조선은 기존의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바탕으로 전국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공주부로 이속하여 진위군으로 개편되었으며 평택현도 평택군으로 바뀌어 공주부에 이속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하면서 옛 경양현이었던 계양지역이 평택군에 이속되었고, 안중 일대가 수원군에 편재되었다. 평택지방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다. 이로써 평택군과 수원군에 속하였던 포승면, 현덕면, 안중면, 오성면, 청북면, 고덕면 일부지역이 진위군에 통합되었다.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교통과 통신의 변화도 있었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평택지방의 주요 교통시설은 도로와 조운(漕運)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 철도역이 병남면 통복리에 ‘평택역’이라는 이름으로 신설되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이 평택역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되자 철도역 주변에는 일본인인 거리가 조성되고, 시장과 함께 조선상인, 중국상인들이 모여들었으며, 나중에는 봉남리에 있었던 군청과 경찰서 등이 하나 둘씩 옮겨왔다. 이 같은 발전에 따라 초기에 설치된 평택리가 1926년 4월에는 평택면으로 개편되었고 1938년에는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바뀌면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구 평택시는 1946년 병술년 대홍수와 한국전쟁의 폭격을 겪은 뒤 군청과, 겅찰서, 철도역을 비롯한 주요기관의 중심이 철도역 동쪽으로 옮겨왔다. 나중에는 평택시장마저 통복동으로 이전하여 ‘통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와 같은 평택시의 모양이 갖춰진 것이다.

평택지방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송탄(松炭)과 팽성읍 안정리에 주둔한 미군기지다. 송탄은 구한말에는 탄현(炭峴)면과 송장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송장의 송(松)과 탄현의 탄(炭)을 합하여 "송탄(松炭)"이라고 지명을 개편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송탄에 미군기지가 설치된 것은 한국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2년경이다. 신장동 남산과 서탄면 적봉리 일대에 들어선 K-55 미군기지는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기지가 확대되었다. 미군기지가 건설되자 부대 정문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구 송탄시가 그것이다.

팽성읍 안정리에는 일제 말 일본군 시설보급대가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였다. 이것을 해방 후 미군이 접수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재 주둔하여 K-6 미군기지가 되었다. 196, 70년대 기지촌은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도시팽창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72년에 안정출장소가 설치된 후 1979년에는 팽성읍으로 승격하였다.

근대 이후 철도 및 미군기지와 함께 성장한 신흥도시 평택과 송탄은 1986년과 1981년에 각각 시로 승격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두 도시와 기존의 평택군 지역을 통합하여 도농복합도시인 ‘평택시’가 되었다.


3)근대이전 평택지방의 육로교통

평택지방은 옛부터 도로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 그것은 한양과 가까운데다 충청, 전라, 경상도로 내려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도로를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누고 10여 개의 대로(大路)를 두었다. 이 가운데 평택지방을 지났던 큰 길은 제6대로인 삼남대로와 제8대로인 충청대로다.

도로는 여행자를 위한 길이었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최단거리와 여행의 안전성을 고려하여 만들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수원, 평택, 천안, 공주, 전주, 남원을 거쳐 경상남도 삼랑진(또는 통영)까지 가는 도로로서, 부산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영남로, 한양에서 의주까지 연결된 의주로와 함께 조선시대 가장 큰 도로였다. 실학자 신경준의 도로고와 김정호의 대동지지 그리고 춘향전에 나오는 내용에 나타난 삼남대로(三南大路)는 다음과 같다.


한양 → 수원 → 오산(신점) → 진위면 갈곶리(이방원) → 견산리(산직촌) → 봉남리(진위현 읍치) 진위목교 → 샛뚝거리 → 마산리 숲안말(수촌) → 염재(장고개) → 백현원(염재와 동막 사이) → 흰치고개 → 감주거리(도일동 네거리) → 칠원동(갈원) → 칠원동 쇠물뿌리 마을 → 가내(주막) → 재빼기(죽백1동) → 배다리(배다리방죽) → 소사동(소사원, 소사점) → 유천동(양성유천) → 성환읍 가룡리 아교(애기다리) → 홍경원 → 성환역말 → 공주 → 강경 → 전주 → 남원 → 삼랑진(통영)


충청대로는 한양에서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있었던 충청병영을 연결하는 대로였다. 이 길은 삼남대로 평택시 칠원동(갈원)에서 갈라져 군문동(군물포)을 지나 충청도 땅으로 넘어갔다. 충청대로의 노정(路程)은 다음과 같다.


칠원동(갈원) → 동삭동 상서재 → 하서재 → 동삭교(징검다리) →통복동(통복점) → 군문동(군물포) → 신호리 원봉나루 → 신호리 새터말 → 근내리(그네골) → 객사리 → 서거리 → 둔포 → 온양→보령시 오천수영


대로에는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여 교통의 편의와 지방통치에 이용하였다. 역(驛)은 말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나 파발을 위해 두었고, 원(院)은 걸어서 여행하는 보행자를 위해 두었던 일종의 국영 여관이었다. 역원(驛院)은 30리마다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원(院)의 경우 지형적 조건이나 보발의 특수성 때문에 15리~20리 간격으로 두는 경우도 많았다. 평택지방의 역원은 다음과 같다.

역(驛) : 청호역(진위면 청호리), 화천역(팽성읍 추팔리)

원(院) :이방원(갈곶리) → 장호원(신리부근)→ 백현원(송북동 동막) → 갈원(칠원동 원칠원) → 소사원(소사동 원소사) →상원(팽성읍 대추리)


4)평택지방의 지형과 수로교통

해로 및 수로교통은 인마(人馬)와 조세(租稅) 그리고 물화(物貨)의 운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산만 유역의 수로교통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혹자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했던 곳이 아산만 유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마한을 이끌었던 목지국이 직산에 있었던 것도 아산만 유역의 수로교통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국가는 수로교통로 확보와 운영을 위해 하천의 조수가 드나드는 곳에 포(浦)를 설치하고, 강변의 요충지에는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하였다. 포(浦), 진(津), 도(渡)는 고려시대만 해도 뱃사공(진척)들이 집단 거주하는 행정구역의 하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반적인 나루터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나루와 포구는 곡물이나 해산물, 어물 등의 교역이 이뤄졌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조창이 설치되어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평택지방은 지대가 낮은 지형적 조건으로 충척토가 쌓이고 수로와 해로가 발달하였다. 중심 하천인 안성천과 진위천에는 크고 작은 40여 개의 지천(支川) 이 발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 충청대로 등 육로교통과 연계하여 나루와 포구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의 나루로는 포승면의 대진, 한나루, 호구포, 현덕면의 계두진과 구진, 신왕포, 팽성읍의 경양포, 곤지나루, 고덕면의 해창포와 다라고비진, 동청포, 이포, 군문동의 군물포, 신덕포, 서탄면의 항곶포, 청북면의 토진, 옹포, 신포 등이 대표적인데, 이 나루들은 수로(水路)와 해로(海路)가 연결된 나루였다. 그러면 대표적인 몇 몇 나루를 살펴보자.

대진(大津)은 포승면 만호리의 옛 지명으로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해안 포구였다. 만호리는 지형이 만(灣)으로 형성되어서 우리말로 ‘느지’ 또는 ‘느새’라고 불려지고 있어 천연적인 항구의 입지조건을 보유한 곳이다. 신증여지승람 수원부 조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하였다. 포내미는 포승지역에 있었던 고려시대 지명(포내미 부곡)이다. 통상 대진(大津)이라고 기록되었지만 다른 기록에는 한진, 또는 대포진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 나루 부근은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지만 바다 쪽으로 열려있어서 일제강점기에는 당진이나 서산 사람들이 이곳으로 드나들었으며, 안중장에서 소를 사서 대규모 선단을 이루고 떠났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후 대외무역항으로의 기능을 상실했다가 1996년 이후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국제무역항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양포는 팽성읍 노양리의 계양마을 일대는 고려시대 편섭포로 조창이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고려시대 이곳은 경양폐현이며 하양창이 있었다. 경양현의 수령은 염(鹽)장관을 겸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하양창은 고려시대의 전국 13조창 중하나이며 경기남부와 충청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건국 후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경기지역의 세곡에 대한 직접운송이 실시되면서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운송을 담당하는 해창으로 역할하였다.

고덕면 해창리는 조선시대에 진위현의 해창(海倉)이 있던 마을이다. 이곳에 조창이 설치된 것은 진위천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창은 해창3리 에 있었지만 현재는 간척되어 흔적이 없다.

다라고비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수원부에 속한 나루로 수원부 관문 남쪽 67리 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 나루는 항곶천(황구지천)과 장호천(진위천)이 합류하여 흘러온 물이 홍경천(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만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이었다. 나루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뒤 서정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옹포는 청북면 삼계리에 있다. 19세기 전반에 작성된 청구도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독개"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고려 때 감미부곡이 있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땅이어서 양성현의 해창으로 "양성독개"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벼 2백 섬을 싣는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 갈 정도로 큰 나루였고, 일제 말에는 강제 공출된 곡식들이 이곳으로 반출되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는 이곳의 거래품목이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등 생선과 미역, 대합, 김 등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 생대합 등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포구주인(객주나 여각)들에게 조세를 걷은 것으로 봐서 상업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나루터는 1970년대 남양만 방조제 건설 후 간척되었다.


3. 평택지방의 관방(關防)유적과 전쟁

1)평택지방의 관방유적

평택지방의 관방유적(關防遺蹟)은 안중면 용성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지역과, 진위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지역 그리고 옛 폐현(廢縣)의 치소(治所)나 내륙의 수로(水路)와 관련된 성곽 등으로 나누어 분포되었다.

먼저 서부지역의 관방유적은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거성현(車城縣)이 존재하였을 때 그리고 고려의 용성현(龍城縣)시기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축성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삼국의 경쟁 지역이었던 한강 남쪽인데다, 백제와 고구려의 북상통로 또는 남하통로였고, 남양만의 당항성으로 대표되는 대 중국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전반 고이왕 때로 판단된다. 이 시기 백제의 한강유역 진출로는 천안방면에서 육로로 지금의 직산인 사산성(蛇山城)을 거쳐 평택, 양성, 용인이나, 평택, 진위 수원을 거치는 교통로와, 천안에서 평택, 안중을 지나 남양만에서 배로 화성군 쪽으로 건너가 발안방면으로 가는 교통로가 있었다. 또 해양으로는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안중을 거쳐 발안방면으로 나가는 통로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백제는 성(城)을 축조하고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용성리 부근의 자미산성, 무성산성 그리고 안성천과 진위천변의 기산리 산성, 백봉리산성, 지제동 태미산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에 의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5세기 말을 거쳐 6세기 전반에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이었던 용성리 주변은 경덕왕 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성현(車城縣)으로 불리며 화성군에 있던 당은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이 시기 자미산성(慈美山城)은 거성현(車城縣)의 치소(治所)로 추정된다. 경기도박물과 지표조사보고서에는 그 근거로 첫째, 이 곳에서 6세기 신라의 특징적인 토기인 단각고배(短脚高杯)가 발견되는 점, 둘째, 무문토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점, 셋째, 자미산성과 한 지역에 모여 잇는 비파산성과 용성리성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비파산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치소(治所)의 동쪽 입구에 해당되는 곳에 용성리성과 강길마을성을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지역은 해안과 가까워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이와 같은 해양방어기지로서의 기능의 필요성은 본래 토성으로 축조되었던 자미산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와 같은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세운송과 국가 방위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한강유역의 입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성곽의 수리와 관리가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북부지역의 산성(山城)은 옛 진위현의 치소인 진위면 봉남리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진위현은 삼국시대에 백제지역에 속할 때에는 연달 또는 송촌활달로 불렸다가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지배하면서 부산(釜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위(辰威)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진위(辰威)지역도 용성(龍城)지역과 마찬가지로 삼국의 경쟁이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로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된 시기는 475년 직후라고 판단되며, 신라의 지배는 진흥왕 때 이뤄졌다. 이 시기 진흥왕은 한강 하류의 6군을 얻었는데, 진위는 이 6개 군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주변의 수원, 화성, 죽산 지역이 여기에 포함되고, 남양만의 당항성이 신라의 대당 교류창구였으며, 한강유역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진천을 거쳐, 직산, 진위, 수원이었기 때문에 군사, 행정적 목적으로 볼 때 거점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견산리를 감싸고 축조된 견산리성은 읍성(邑城)의 성격을 가졌으리라고 판단된다. 또 같은 시기의 산성(山城)인 무봉산성과 봉남리성도 진위현 읍치(邑治) 및 교통로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곡마을 산성(山城)은 규모가 180m로 소규모인 점과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성(城)들은 옛 폐현(廢縣)과 관련되어 축성되었거나, 조운(漕運)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덕목리 성(城)은 동, 서로 2개의 성(城)이 마주보고 축조되었는데, 덕목리가 고려 초 수주(水州)의 영현(領縣)이었던 광덕현의 치소(治所)였으므로 읍성(邑城)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삭동 두리봉성(城)과 지제동 울성마을의 태미산성은 고려 현종 때 수주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신현의 치소(治所)와 관련된 것으로 태뫼식의 작은 성(城)이지만, 축성(築城)시기는 고려 초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던 산성(山城)으로 판단된다. 동령마을 성(城)은 아직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고려시대 이 곳에 송장부곡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송장부곡의 치소(治所)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안정리 농성(農城)은 축성(築城) 시기에 대한 여러 가지 설(說)이 있지만, 나말여초 당나라에서 팽성읍 안정리로 건너와 평택 임씨의 시조가 된 임팔급이라는 지방호족이 재물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승면 원정리 목장(牧場)토성과 석정리, 성해리 장성(長成)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포승면 홍원리와 원정리에 설치된 홍원목장괴 괴태목장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평택지방의 성곽들은 대부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진위천 상류인 동북부지역과, 안성천 하류 및 진위천 중 하류지역인 서부지역 그리고 옛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축성된 읍성류와 산성(山城)들로 구분되었다. 이 지역은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점이지대로 군사적으로 중요했을 뿐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에는 수도(首都)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전략적으로 뿐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요긴한 지역이어서 매우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2)평택지방의 봉수(烽燧)

봉수(烽燧)란,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국가의 위급상황을 신속히 중앙에 전달하던 고대의 통신방법이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불을 피워서 불빛과 연기로 신호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전달할 때는 보통 야화주연(夜火晝煙)이라고 해서 밤에는 불빛을, 낮에는 연기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봉수는 국방상의 급보(急報) 뿐 아니라 경비(警備)와 전신(電信)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다. 그래서 봉수제도는 국방강화정책과 맛 물려 정비되었으며, 조선말까지 중요한 통신수단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평택지방의 봉수(烽燧)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한양의 목멱산(남산)까지 이어지던 제5횃불(第五炬)의 직봉(直烽)과 서천과 보령을 거쳐 당진으로 올라오던 간봉이 만나는 곳이었다. 이 봉수로는 순천의 돌산도 방답진에서 시작되는 봉수로, 직봉(直烽)의 경우 장흥의 천관산, 진도의 여귀산, 부안의 월고리, 함열의 소방산, 공주의 월성산, 천안의 대학산, 아산의 연암산을 거쳐 직산의 망해산 봉수로 이어졌다. 망해산 봉수는 조선시대 양성의 괴태곶 봉수로 이어졌으며, 이 곳에서 서천, 보령, 홍주, 서산, 해미, 당진, 명천 창택곶이 봉수를 거쳐 올라왔던 제5횃불의 간봉과 합류하였다. 또 괴태곶 봉수는 다시 수원의 흥천산 봉수, 남양의 염불산, 해운산 봉수를 그리고 인천, 강화, 김포, 양천의 개화산 봉수를 거쳐 한양의 목멱산 봉수에 도달하였다.

괴태곶 봉수는 평택시 포승면 원정7리 봉화재(봉우재, 해발 83m) 정상에 있다. 지리적으로 봉화재는 동쪽으로 원정리 8개 마을이 있고, 서쪽은 1996년 이후 해군 제2사령부가 자리잡았으며, 서쪽과 북쪽은 멍거니산을 중심으로 LNG기지와 남양만 하류가 있다. 봉화재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아산만과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대진나루와 충남 당진군 송악면의 한진나루, 평택항과 포승공단이 지척으로 보이며, 북쪽으로는 남양만 하류와 화성군 남서쪽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된다.

문헌상으로 괴태곶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성군지, 그리고 일제가 편찬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등에 소개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서쪽 1백리 지점에 있으며, 양성군지에는 괴태산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포승면 원정리 동서 50간(間) 남북 20간(間)의 석항 안에 1간(間) 반, 높이 1간(間)의 돌로 쌓은 2개의 봉돈이 있으며, 이전에 5개였다”고 기록되었다. 또 1977년에 편찬된 문화유적총람에는, 봉화재, 용수지로 불리는 이곳은 해발 250m 지점의 산정(山頂)에 설치되어 봉화수가 상주하면서 북쪽으로는 화성군 쌍봉산 봉수, 남쪽으로는 평택시 팽성읍의 망해산 봉수, 그리고 간봉(間烽)인 당진군 면천봉수와 호응한다고 쓰여 있다. 이곳의 봉수는 전라남도 여수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출발하여 한양 목멱산 봉수까지 연결된 조선시대 제5로(횃불)에 해당하는 해안봉수였다. 이 봉수는 직산(팽성읍 신대리)의 망해산 봉수를 거쳐 북상하는 직봉(直烽)과 전북 옥구의 화산에서 갈라져서 서천과 보령, 서산, 당진 면천봉수를 거쳐 올라온 간봉(間烽)이 만났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망해산 봉수는 공주 쌍령산, 천안 대학산, 아산 연암산을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는 제5로(路)의 직봉에 속한다. 문헌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직산현 조에 기록되었고, 19세기 초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옛 경향현인 직산현의 망해산에 있으며... ”라고 되어있다. 또 19세기 초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직산 땅인 경양면 지역에 망해산 봉수가 그려져 있다. 또 일제가 편찬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丙南面 碑前里 私有 용峰山 烽燧 徑約五間 土壘頭一”이라고 소개되어 그 존재를 알려준다. 망해산은 고려시대 경양현지역으로 현재는 팽성읍 신대2리 동쪽 봉우재산을 말한다. 이곳은 안성천 하류와 가깝고 고려시대에는 하양창이 설치되어서 군사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봉수를 설치하여 군사적인 위급상황을 전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3)고려후기 몽고와 왜구의 침입

몽고군의 평택현(팽성읍) 주둔은 몇 차 침입 때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2차 침입 때 용인 처인성전투가 있었고, 3차 침입 때 죽주산성 전투가 있었던 것을 상기할 때 이 시기가 아닐까 짐작된다. 몽고군이 쳐들어 오면서 아산만 유역의 백성들은 가까운 아주(아산시) 신성산성(현 영인산)으로 입보(入保)하였다. 그래서 아산사람들은 조선시대까지 이 산성을 “평택성”(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불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몽고군의 주둔 이상으로 두려움과 피해를 주었다. 통상적으로 왜구란 여말선초의 일본 해적집단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규모가 컸을 뿐아니라 산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농성전을 펼치거나 기병을 육성하여 기습작전을 펼치는 등 일정한 지휘체계를 갖춘 군대와 다름없었다. 특히 고려에 침입한 왜구는 초기 해안지방의 약탈에서 벋어나 조창과 조운선의 약탈, 내륙에 위치한 고을의 약탈 등 정도가 심해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고려 고종 때였지만 충정왕 2년(1350)까지는 간헐적으로 출몰하였다. 그러다가 충정왕2년 고성, 죽림, 거제, 합포에 침입한 이래 점점 빈번해지더니 충정왕 3년에는 평택과 가까운 남양군(화성시)과 쌍부현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며, 공민왕과 우왕 때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고 민심이 불안해지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공민왕 때의 개혁으로 부흥의 기미를 보였던 고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원나라 지배기간 동안 두 차례의 일본원정으로 보유하고 있던 함선과 훈련된 수군, 조련된 선원과 기술자를 상실한 고려는 그 후에도 반란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전라도에 몽골인 역전관을 상주시키며 함선의 건조와 수군의 양성을 방해하는 바람에 수군의 재건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고려 후기 고려가 해상강국으로의 능력을 상실하자 왜구는 고려의 해안을 마음대로 노략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입은 해안에 위치한 평택지방에 큰 피해를 주었다. 예컨대『고려사』에 공민왕 7년(1358) 면주(당진군 면천면)를 거친 왜구가 용성현(안중읍 용성리)에 침입하자 고려가 군대를 파병하여 싸워 적선 2척을 빼앗았으며, 공민왕 9년(1360) 5월에는 양광도 평택, 아주(아산), 신평에 침입한 뒤 용성현(평택시 안중읍) 등 에 침입하여 10여 현을 불태웠다. 공민왕 21년에는 양광도 순무사 조천보가 용성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우왕 3년(1377)에는 평택현과 경양현(팽성읍 본정리, 노양리 일대)을 노략질하였다. 그 후에도 종덕, 송장, 영신현 등 평택지방의 여러 고을에 침입하였는데, 최공철, 왕빈, 박수경 등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4)정유재란 때의 소사벌 전투

임진왜란은 병자호란과 함께 조선이 겪은 가장 큰 전란이다. 전 후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인구가 급격하게 줄었으며, 지배체제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은 정권이 교체되었고, 조선과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한 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淸)을 세웠다.

이 전쟁은 크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뉜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만반의 갖춘 왜군에게 수군을 제외하고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임금과 지배층도 항전의 의지를 상실한 채 백성을 버리고 몰래 의주로 도주하였으며, 육군 주력부대도 신립이 충주전투에서 패하면서 모두 흩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구한 것은 의병들의 결사항전과 명의 원군이었다. 왜군은 수군과의 병진정책이 실패한데다 의병들의 항전으로 퇴로가 막힐 것을 두려워하여 주춤거렸고, 이 틈을 타서 전열을 정비한 조선군과 명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결과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의 승리로 평양과 한양이 탈환되었으며, 남쪽으로 밀린 왜군과 명나라 사이에 강화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강화교섭은 실패하였고, 1597년 왜군은 재침하였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왜군은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북상을 시도하였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수군도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하여 재해권이 왜군에게 넘어갔다. 왜군이 집중 공격한 곳은 호남과 호서의 곡창지대였다. 결과 모리를 대장으로 하는 왜군에게 호남의 요충지인 남원성과 전주성을 빼앗겼으며, 가토군과 합류한 뒤 공주, 전의, 진천을 점령하였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한양에서는 민심이 동요하고 피난민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조정은 또 다시 피난준비를 하였다.

위기상황이 거듭되자 명군(明軍)은 한강을 지키면서 평양에 있던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시켜 왜군의 북상을 막게 하였다. 양호는 해생, 우백영에게 군대를 주어 수원을 거쳐 평택에서 적의 북상을 막게 하였다. 1597년 9월 5일 아침 명나라 군대는 소사벌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 전투에서 명군(明軍)은 군대를 소사하 다리 밑에 숨겨두고 원숭이에게 갑옷을 입혀 말에 태워 적진에 뛰어들게 하는 교란작전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한다. 소사벌 전투 후 10일이 지난 9월 16일에는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소사벌과 명량해전 두 전투에서의 승리로 왜군은 기가 꺾였으며 북상을 포기하고 남해안에 집결했다가 토요토미의 사망 후 패퇴하였다.


5)아산만과 청일전쟁

안성천은 5.C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의 싸움, 18.C 이인좌의 난(무신 난), 청일전쟁 등 여러 차례의 큰 전란을 경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게 패하여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가 수원에서 있었던 최후의 일전마저 패하여 아산만과 안성천 이남으로 밀려났던 장소이며, 정유재란란 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조,명 연합군이 해생 등이 이끄는 철갑기병 4천으로 소사벌에서 왜군과 대규모 전투를 전개하여 승리한 장소이다. 또 18.C 초에는 영조와 노론정권에 불만을 품은 이인좌와 소론 급진파가 교통의 요충이며 소론세력이 많았던 진위현(평택)의 소사벌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방향을 돌려 청주성을 점령했던 역사적 장소였다. 안성천과 관련된 가장 가까운 사건으로는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명분삼아 출병한 청, 일 양군이 조선침략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한반도내에서 전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먼저 아산만과 안성천, 소사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예컨대 1894년 6월 21일 육군과 전함을 이끌고 중국 텐진을 출발한 북양함대가 아산만 입구 풍도해전에서 일본연합함대와 교전을 벌여 크게 패하면서 일본이 전쟁의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자 청군은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 백석포와 군문포 등으로 상륙한 뒤 차령산맥을 뒤에 두고 성환과 안성천 평택부근에 진을 쳤다. 반면 히로시마와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일본군은 육군을 인천항과 원산항에 상륙시키고, 해군은 풍도에서 청의 해군을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군은 한양과 수원을 거쳐 청군이 상륙한 성환부근으로 남하하여 평택부근에 진을 치고 결전을 기다렸다. 드디어 7월 27일 소사벌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적으로나 화력에서 앞섰고 사전에 단단히 준비하고 출전한 일본군과, 상대를 앝보며 자만에 빠진 청군의 싸움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한 청군은 뒤이은 평양싸움에서 다시 패하였고, 만주의 심양, 요동반도의 대련, 산뚱반도의 웨이하이전투 등에서 패하면서 항복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세계에 일본의 힘을 드러낸 사건이면서 미국과 영국의 지원하에 향후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평택에는 청일전쟁에 대한 흔적이 군문포(軍門浦), 망군대, 청망평과 같은 지명과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와 같은 말로 남아있다.




4.수군(水軍)장수로 이름을 떨친 인물

1)한온

한온(? ~1555)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군수(君粹)로 서탄면 금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과거급제 이전에도 중종이 6진을 설치(1536)하고 격구를 실시할 때 2등으로 아마(亞麻)를 상으로 받은 적이 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54년(명종 9) 장흥부사가 되었다.

1555년 삼포왜란 이후 세견선(교역선)의 제한조치에 불만을 품은 일본이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을묘왜란을 일으켰다. 강진, 장흥, 진도 일대를 침입한 왜군은 달량포, 어란포, 금갑 등 여러 포구를 칩임하여 보루를 불태우고 행패를 부렸다. 장흥부사였던 한온은 절도사 원적, 영암군수 이덕견 등과 달랑진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왜적의 전술에 말려 거짓으로 도망가는 적을 쫓아 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도망갔던 왜군이 재차 반격하자 적은 군사와 부족한 식량으로 견디지 못하고 성(城)이 함락되었다. 한온은 절도사 원적과 함께 칼이 부러질 때까지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고 133년 뒤(1683)에야 장흥백성들의 발의로 사당 충렬사가 건립되어 제사를 받들었으며, 1696년에는 나라에서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충의(忠義)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졌다. 서탄면 금암리에 있는 정문 현판에는 철장석선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창자는 쇠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다. 일심으로 나라를 위해 순국하였다)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고, 정표에는 ‘충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 의금부사, 지 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 통정대부 장흥도호부사 한온의 문’이라고 쓰여 있다.

2)이대원

이대원(1566~1587)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이 함평, 자는 호연이다. 7대조는 좌리공신으로 개성부윤을 지냈던 온(氳)이고, 증조부는 군수 석필, 조부는 진사(進士) 인고(仁考)이며, 부친은 춘방으로 1566년(명종 21년) 포승면 내기리 정문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라서 1583년 불과 18세에 무과에 급제, 21세에 전라도 고흥의 녹도만호가 되었다. 그는 1587년 2월 10일 고흥 앞바다 손죽도에 왜선 20여 척이 출몰하자 이를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투가 끝난 뒤 전라좌수사 심암이 장군의 공을 탐내었으나 응하지 않자 마음에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 후 2월 17일 왜적 큰 부대가 다시 침입하자 심암은 앙심을 품고 이대원에게 무리한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장군은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밝은 뒤 출정하자고 간언하였지만 심암은 피로한 병사 1백 명을 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병사 100여 명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에 출정한 이대원은 3일 동안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약속했던 구원군이 오지 않으므로 속적삼에 절명시를 지어 종을 시켜 본가로 보낸 뒤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본가에서는 속적삼을 유품삼아 묘를 썼으며, 1592년 우계 성혼의 건의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전남 흥양 확충사에 제향되었으며, 왜란 중 흥양 확충사가 소실된 뒤에는 1668년 포승면 내기리 정문동에 다시 건립하였다. 장군이 죽은 뒤 고흥 연안의 백성들은 ‘녹도가’를 지어 불러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정철의 아들 정기명이 지은 ’녹도가‘와 정협이 지은 ’손죽도 조사‘가 전해온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심암은 조정에 불려가 파직된 뒤 나중에 무악재(혹은 당고개)에서 처형당했다. 현재 정문동에는 확충사와 재실인 충렬재, 그리고 장군의 동상과 신도비, 무덤 등이 전해온다. 사우(祠宇)인 확충사는 장군이 죽은 뒤 고흥 손죽도에 건립하였는데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탔으며 1668년 고향인 내기리 정문동에 다시 세운 것을 쇄락하여 1978년 중건하였다. 확충사란 왜군이 사당에 불을 지를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불이 꺼졌으므로 그 날의 신묘한 뜻을 기려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장군의 영정과 위패, 해전도가 모셔졌다. 동상은 2002년 3월에 다시 세운 것이며, 재실 왼쪽에 세워진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년)에 건립된 것으로 소론의 영수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썼으며 김진규가 전액(全額)하였다. 제향은 본래 2월 20일에 제를 올렸으나 현재는 4월 6일에 지낸다.


3)원균

도일동은 원주(原州) 원(元)씨의 동족마을이다.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入鄕祖)였던 원임(元任)(또는 원몽이라고도 함)을 비롯하여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무인이었고, 원균의 형제인 원전, 둘째 원연의 아들 원사립,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였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원준량의 장남으로 도일동 하리 안말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한 인물이었다. 무과급제를 한 뒤 조산만호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功)을 세웠다. 이와 같은 용맹함을 인정받아 특진을 거듭하였고 임진왜란 두 달 전(1592년)에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

경상우수사에 부임한 후 원균은 군비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두 달 후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대군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원균은 가져올 수 없는 전함과 군량을 불태우고 전라좌수영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경상우수영이 보유한 3척(?)의 전함만으로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축한 뒤에는 당포, 당항포, 옥포, 한산도 대첩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많은 공(功)을 세웠다. 그러나 전과를 보고하는 장계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더니, 나중에는 이순신이 먼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 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을 능멸한 죄로 처벌을 받아 백의종군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하지만 왜군 간첩 요시다의 흉계에 말린 조정에 의해 무리한 부산포 공격을 명령받고는 참전했다가 칠전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원균의 묘는 담뱃대와 신발 등 유품으로 쓴 가묘다. 이 가묘에는 그가 전사할 때 애마(愛馬)가 신발과 담뱃대를 물고 천리길을 달려와 유품을 내려놓고 길게 울음을 운 뒤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가족들이 이것으로 묘를 쓴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내리 원균의 옛 집 터를 울음밭이라고 하고, 원릉군 원균 묘 아래에는 애마총이 있어 이 같은 전설을 대변한다. 갓골에서 여의실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사당(향토유적 제1호)이 있으며, 선무1등공신 교서는 보물 제 1133호로 지정되었다.


4)방덕룡

방덕룡(1561∼1598은 본관이 온양으로 명종 16년(1561)에 팽성읍 원정리에서 태어났다. 원정리는 옛부터 온양 방씨의 동족마을이다. 그의 조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호의(好義)이고 아버지는 원복(元福)이며, 어머니는 안악 이씨(安岳李氏)다.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방덕룡이 무관이 되려고 한 것은 증조부였던 방윤이 동북면 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변방에서 싸우다 죽을 때 창(槍)을 내려주면서 앞으로 국난(國難)이 있을 때 나라를 지키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덕룡은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원균(元均)의 휘하에 들어가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원균이 이순신과의 갈등으로 충청병사 등으로 전직하면서 이순신의 휘하에 들에가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방덕룡은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재임하면서 부사 이영남(李英男), 만호 안여종(安汝棕)과 함께 절이도(折爾島)에서 매복한 뒤 적을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이듬해에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부대의 선봉이 되어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죽은 뒤 형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선무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