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평택 다라고비진, 옹포, 대진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6:04

글쓴이   김해규 날짜   2007/03/03
이메일   kimsea6@naver.com 홈페이지   
파일첨부    조 회   147
제 목   평택지방의 조창(漕倉)과 조운(漕運)제도
평택지방의 조창(漕倉)과 조운(漕運)제도


1.근대 이전의 조운제도와 경기지역

1)고려시대의 조운제도
조운(漕運)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국가에 수납하는 세곡(稅穀)을 배를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京倉)까지 운송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 근대 이전에는 바다와 가까운 강변이나 해안에 조창을 설치하였다. 조창(漕倉)의 기능은 지방의 조세를 수취하여 보관하였다가 선적(船積)하여 서울의 경창까지 운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독자적 영역을 갖고 있었으며, 중앙에서 해운판관이나 수운판관과 같은 외관(外官)이 파견되었다 이정숙 『아산만 연안 포구취락의 변화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과 석사논문, 2000
이와 함께 세곡을 수납하거나 운송을 담당했던 향리, 초공, 수수, 잡인 등도 조창 주변에 거주시켰는데, 이들의 거주지를 진촌이라고 하였다.
세곡은 추수가 끝난 11월경에 거둬들였다. 조창에서는 이것을 거리에 따라 이듬해 2월부터 5월 사이 예성강 유역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였다. 고려는 세곡운송을 위해 해운선이 출항하는 해창(海倉)에 세곡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과, 경강(京江)유역에는 세곡 2백 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 20척 내외를 배치하였다.
조운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은 고려 초 충주의 덕흥창을 비롯하여 전국에 12개의 조창(漕倉) 고려 때 설치된 13 조창(漕倉)은 경남 사천의 통양창(通陽倉), 경남 마산의 석두창(石頭倉), 전남 순천의 해룡창, 전남 영암의 장흥창, 전남 나주의 해릉창, 전남 영광의 부용창, 전북 옥구의 진성창, 전북 부안의 안흥창, 충남 서산의 영풍창, 경기도 평택의 하양창, 충북 충주의 덕흥창, 강원도 원주의 흥원창 그리고 문종 때 설치된 황해도 장연의 안란창이다.
을 설치면서다. 이 조창은 문종 때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설치되면서 13조창으로 정비되었다 손태현,『한국해운사』, 아성출판사, 1982
. 이후 조세제도의 변화나 외적의 침입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었지만 고려 후기까지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13세기말 왜구의 노략질로 수운 및 해운로가 황폐화하면서 부실해졌다가 1376년 모든 세곡운송을 육운(陸運)으로 대체하면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육운(陸運)은 길목마다 출몰하는 도적들의 노략질로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려 말 재정악화의 원인을 제공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2)조선 전기의 조운제도와 조창
조선은 건국 후 신진사대부의 경제기반 마련과 국가재정 및 사회의 안정을 위해 과전법을 통한 토지제도의 개혁을 실시하고 조운제도의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서남해안의 조창을 보수 및 증설하고, 조선(漕船)을 건조하여 조운체계를 정상화하는데 많은 공력을 들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5세기 초에는 황해도에서 남해안 섬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과 수로에 조창(漕倉)이 설치되었고, 한양에는 경창(京倉)이 세워졌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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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초의 해운 및 수운창은 모두 9개였다. 이것을 지역별로 나누면 남한강과 북한강 수로에 3개, 예성강 연안에 2개, 서남해안에 4개가 설치되었다. 그 후 세곡 수송의 여건이 변함에 따라 수로 연변에 5개의 조창이 추가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의 실시 등 운송해야 할 조세의 양(量)이 증가하고 운송조건이 변함에 따라 증설되기도 했고 폐지된 곳도 생겼다 대동법의 실시는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전국적 유통 등 조세정책 이면에 끼친 영향도 많았지만, 조세운송에 있어서도 운송량의 증가에 따라 조창의 증설을 가져왔다. 대표적인 예가 호남에 설치한 군산창과 함열의 성당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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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조운제도에서 국가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삼남(三南)의 세곡운송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전라도와 충청도의 세곡운송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데, 두 지역의 세곡이 전체 조세에서 50%를 넘었기 때문이다. 세곡의 징수는 추수가 끝난 11월 1일에서 이듬해 1월까지 하였다. 징수된 세곡이 조창에 쌓이면 이듬해 2월부터 5월까지 관선이나 사선을 이용하여 한양의 서강, 용산, 광통교 등에 있었던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통상 가까운 곳은 4월, 먼 곳은 5월까지 운송하여야 했는데, 기일을 엄수하지 못하면 처벌받았다.
조세를 관장하고 운반을 주관하는 관청은 호조, 주교사,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선혜청 등이 담당하였지만 직접 담당자는 전국의 대 조창에 파견된 해운판관이 담당하였다. 세곡이 모이면 운송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운송에 대한 규정을 엄격히 세웠는데 그 내용을 보면, 30척이 하나의 선단을 유지해야 하고, 역풍이 불어 휴박해야 할 때는 지방 수령은 관찰사와 호조에 보고한 뒤 임시감독관을 임명하여 지켜야 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 조운선은 800석, 경상도는 1000석 이상을 싣지 못하였고 이것을 어긴 경우에는 중벌을 받았다『해운항만청사』, 한국해사문제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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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관선(官船) 운송체계와 조운제도의 변화
조선시대 조세운송은 국가가 책임지는 관선조운체계였다. 국가는 전국의 조창에 해운판관과 수운판관이라는 외관(外官)을 파견하였으며, 관선(官船)을 건조하여 공급하였고, 주변 마을의 백성들에게 역(役)을 부과하여 운송에 필요한 조군(漕軍)을 확보하였다. 조선(漕船)의 규모는 해운의 경우 500∼600석, 수운의 경우 200석을 선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초마선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경쾌하고 속도가 빨랐으며, 유사시에는 전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선박이었다. 조군(漕軍)은 배 1척당 14∼17명이 승선하였다. 조군의 우두머리는 무상조군, 차석은 격조군이라고 하였고 선장은 사공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조난으로 생명을 잃을 위험도 많았지만, 그럴 경우 피해를 본 조세를 물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충이 많았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역(役)이 천하다고 하여 낮은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조군(漕軍)들은 이를 기피하여 도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세곡운송에 사선(私船)이 등장한 것은 15세기 초 전라도의 조운선 66척이 난파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15세기 중엽에는 그 비율이 점점 높아지더니 16세기 들어 부역(賦役)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증가하였고, 조선후기 대동법 이 실시되면서 대부분의 조세와 공납 운송을 사선(私船)에 의존하게 되었다. 운송은 대부분 경강상인들의 경강선(京江船)이 맡았다. 이들은 삼남의 미곡운송 뿐 아니라 나루나 포구에서의 상업활동을 주도했던 선상(船上)들로, 영리추구를 위해 기술과 자본의 확대에 힘썼으며 뛰어난 항해술과 내륙 수로까지 접근하여 조세를 운송하는 능력 때문에 국가의 조세확보에 도움이 되었다.

2.평택지방의 수로교통과 조창

1)안성천과 진위천 유역의 나루와 포구
해로 및 수로교통은 인마(人馬)와 조세(租稅) 그리고 물화(物貨)의 운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산만 유역의 수로교통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혹자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했던 곳이 아산만 유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마한을 이끌었던 목지국이 직산에 있었던 것도 아산만 유역의 수로교통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국가는 수로교통로 확보와 운영을 위해 하천의 조수가 드나드는 곳에 포(浦)를 설치하고, 강변의 요충지에는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하였다. 포(浦), 진(津), 도(渡)는 고려시대만 해도 뱃사공(진척)들이 집단 거주하는 행정구역의 하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반적인 나루터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나루와 포구는 곡물이나 해산물, 어물 등의 교역이 이뤄졌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조창이 설치되어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평택지방은 지대가 낮은 지형적 조선 대문에 충척토가 쌓이고 수로와 해로교통이 발달하였다. 중심 하천인 안성천과 진위천에는 크고 작은 50여 개의 지천(支川) 이 발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 충청대로 등 육로교통과 연계하여 나루와 포구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의 나루로는 포승면의 대진(한진), 신전포, 현덕면의 계두진과 구진, 팽성읍의 경양포와 원봉나루, 곤지나루 고덕면의 해창포와 다라고비진, 동청포, 이포, 군문동의 군물포, 신덕포, 서탄면의 항곶포, 청북면의 토진, 옹포, 신포 등이 대표적인데, 이 나루들은 수로와와 해로교통이 연결된 나루였다. 이 가운데 주요 나루만 살펴보자.

?대진 : 대진(大津)은 포승면 만호리의 옛 지명으로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해안 포구였다. 만호리는 ‘느지’ 또는 ‘느새’라는 자연지명이 있는 곳으로 천연적인 항구의 입지조건을 보유한 곳이었다. 신증여지승람 수원부 조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하였다. 포내미는 포승지역에 있었던 고려시대 지명(포내미 부곡)이다. 통상 대진(大津)이라고 기록되었지만 다른 기록에는 한진, 또는 대포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나루 부근은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지만 바다 쪽으로 열려있어서 일제강점기에는 당진이나 서산 사람들이 이곳으로 드나들었으며, 안중장에서 소를 사서 대규모 선단을 이루고 떠났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후 대외무역항으로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가 2000년대를 전후하여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또 다시 국제무역항으로 주목받고 있다.

②경양포 : 팽성읍 노양리의 계양마을과 노산마을은 고려시대 편섭포로 조창이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고려시대 이곳은 경양폐현이며 하양창이 있었다. 경양현의 수령은 염(鹽)장관을 겸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 “경양폐현 : 고려 때 아주의 하양창이었다가 경야현이 되었다, 뒤에 영(令)을 두고 염(鹽)장관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 하양창은 고려시대의 전국 13조창 중하나이며 경기남부와 충청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건국 후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경기지역의 세곡에 대한 직접운송이 실시되면서 대 대조창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운송을 담당하는 해창으로 기능하였다.

③해창포 :고덕면 해창리는 조선시대에 진위현의 해창(海倉)이 있던 마을이다 경기도박물관,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 평택시, 1999
. 이곳에 조창이 설치된 것은 진위천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루는 해창 4리 "뱃말"에 있었고, 조창은 해창3리 서북쪽 창말에 있었다. 현재 나루는 간척으로 흔적이 없어졌으며, 창고 터와 배를 묶어두었던 자리만 남아있다.

④다라고비진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라고비진은 수원부에 속한 나루로 수원부 관문 남쪽 67리 지점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조
. 이 나루는 항곶천(황구지천)과 장호천(진위천)이 합류하여 흘러온 물이 홍경천(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만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이었다. 나루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뒤 서정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는데, 궁안교가 소청교로 불렸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이 나루를 다루지나루라고 하고 있으며, 진위천 변에 위치한 궁1리 마을 이름이 다루지 마을이라는 점도 위치 고증에 확신을 준다.
주민들에 따르면 다루지나루는 1930년대 말까지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 배들이 돛대를 쓰러뜨리고 황구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새우젓 배들은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을 가지고 와서 곡식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 궁안교가 놓이고, 1970년대 초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나루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⑤옹포 :청북면 삼계리에 있다. 19세기 전반에 작성된 청구도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독개"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고려 때 감미부곡이 있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땅이어서 양성현의 해창으로 "양성독개"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벼 2백 섬을 싣는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 갈 정도로 큰 나루였고, 일제말에는 강제공출된 곡식들이 이곳으로 반출되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는 이곳의 거래품목이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등 생선과 미역, 대합, 김 등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 생대합 등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포구주인(객주나 여각)들에게 조세를 걷은 것으로 봐서 상업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만의 갯벌』, 경기문화재단 앞의 책 190쪽
. 나루터는 1970년대 남양만 방조제 건설 후 간척되었다.

2)하양창과 고려시대 평택지방의 조운
경기지역은 서울과 가까워서 직할지의 성격이 강하였기 조세의 징수와 운송에 있어서도 삼남지방과는 다르게 수운(水運)이나 육운(陸運)으로 직접 운송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평택지방은 안성천 북부지역은 양광도 수주(水洲)의 속현이었으며, 남쪽의 평택현은 천안부의 속현이었다. 서부지역의 광덕현이나 용성현, 포내미부곡, 육내미 부곡 등 여러 고을도 대부분 수주의 영현들이어서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상, 2001
이 지역의 세곡은 지역의 작은 조창에 모아져서 해창으로 옮겨진 뒤 경창(京倉)으로 운송되었다.
고려시대 평택지방의 조창으로는 전국 13조창 가운데 하나였던 하양창(河陽倉)과 종덕장의 세곡을 모았던 종덕창이다 『고려사절요』15, 고종 4년 정월 이곳에 보면 고종 4년 거란이 침입하자 진위사람 영동정 이장대와 직장동정 이당필이 별장동정 김예와 함께 최씨 무신정권이 거란의 침입에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종덕창과 하양창을 공격하였다.
. 하양창은 현재 팽성읍 노양리로서 고려시대에는 타이포 또는 편섭포라고 불렀다. 이곳에 조창이 설치된 것은 10세기 초 전국 12조창이 설치되면서다. 고려사를 보면 이곳에는 한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있었다10)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5쪽 재인용
11)고려시대에는 하양창 외에도 무한천변의 장포(長浦, 아산시 선장면 장곶리)에도 당성창이 있어서 내포지방의 세곡은 이곳에서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지역의 세곡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이곳의 세곡을 관리하고 운송하기 위해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속하였고, 운송책임은 세곡의 징수와 관리를 책임졌던 향리와 조창이 있던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뱃사공, 소공, 수수와 같은 조군(漕軍)들이 맡았다. 이와 같은 중요성으로 고려는 이곳을 경양현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감독케 함과 동시에 아산만 연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관장하는 염(鹽)장관을 겸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직산현 조
. 하지만 하양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해운이 끊기고 세곡운송이 육운으로 대체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안성천 이북지역이 경기도에 편입되고, 인근 아산의 공세리에 공세곶창(공진창)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종덕창은 고덕면 두릉리 종덕장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장(莊)은 처(處)와 함께 최고 특권기관인 왕실이나 왕족, 사원 등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지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장은 특권층의 경제기반으로 지급된 수조지로서 행정조직의 하부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종덕장도 특정 왕족의 수조지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종덕창은 이곳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모아두고 경창으로 운송하던 조창이었다.

3)조선시대 평택지방의 조창(漕倉)과 조운(漕運)
조선시대에는 조운체계의 변동이 있었다. 조선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뒤 경기지역의 세곡은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직접 운송토록 하였고, 한강수로를 통하여 수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선 후기 경강상인들이 운영했던 사선(私船)들이 세곡운송을 대부분 담당하면서 전기에 설치된 조창들 외에도 내륙 깊숙이까지 사창이 세워졌다.
이 시기 평택지방은 진위현, 평택현, 수원부의 일부지역, 양성현과 직산현의 일부지역으로 나눠졌기 때문에 조창에 이와 관련되어 설치되었다. 진위현 지역에는 봉남리 관아의 읍창과, 고덕면 해창리에 해창(海倉)이 있었다 김정호 『대동지지』, 진위현 조
. 그 외에도 대동여지도 등에는 합정동 통미부근에 남창(南倉)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존폐여부는 알 수 없다. 평택현에는 초기에 시포의 남창을 이용하였지만 후기에는 직산현 관할이었던 경양포의 경양창(현 팽성읍 노양리)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성현에는 사창 6고(庫)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구룡동면 창리(현 용이동 구룡동 마을)에 남창(南倉) 3개가 있었다. 이곳의 남창은 육면세와 대동미를 수세(收稅)하여 보간하였는데, 1872년에 대청 6칸, 창고 12칸, 신당 1칸, 대문 1칸, 헛간 2칸을 새로 지었다 『양성군지』, 광무3년(1899)
. 또한 청북면 삼계리 옹포에는 해창이 있었다. 옹포 해창은 양성현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는데, 이 같은 역할을 일제강점기 강제공출된 곡물을 출하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승량동면(포승면)과 서신리면(청북면), 도일동 상리에도 조창이 있었다. 수원부에는 칠창(七倉)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안중읍 용성리 설창마을에 있었다 『대동지지』앞의 책
. 이 조창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와 있어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직산현은 팽성읍 노양리의 경양창을 해창으로 이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앞의 책
. 앞서 말했지만 경양창은 본래 고려의 하양창으로 조선초 경양현이 직산현에 편입되면서 직산현의 해창(海倉)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안중읍 황산리에 안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존폐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조선시대 평택지방에는 경창(京倉)과 연결된 해창(海倉)이 3개였고, 남창(南倉)이 6개, 읍창(邑倉)이 2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조창에는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위해 주변 마을에 조군(漕軍)의 역(役)을 부과했으며, 물산이 집산되면서 교역이 이루어져 대처로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