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토기의 변천사
신석기 토기 <<< 자료---동아샘 >>>
점렬무늬 토기, 겹아가리 토기
(북촌리 출토토기)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들이 발견.
남해안 지역 토기 문화를 반영.
북촌리 바위 그늘유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들이 발견되었는데, 대체로 남해안 지역 토기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으로는 點列무늬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口緣部에 2~4열의 점렬무늬가 누르기 혹은 갑인수법으로 장식된 것으로 월령리 한들굴, 사계리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점렬무늬는 그 모양에 따라 삼각점렬, 원형점렬, 그리고 기타점렬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삼각점렬무늬는 조각칼처럼 끝 부분이 삼각형을 이루는 施文貝(무늬를 새기는 도구)를 비스듬히 눌러 만든 것으로, 이 중에는 다시 시문구를 세로로로 하여 누른 것과 가로로 하여 누른 것, 그리고 삼각점렬무늬 자체가 정연하지 못하고 들쭉날쭉한 것이 있다.
원형점렬무늬는 둥근 막대 모양의 시문구를 수직으로 눌러 시문한 것이 기본이나, 이를 비스듬히 눌러 자체가 타원형으로 변형된 예도 있다. 삼각과 원형점렬무늬 이 외에 눌러 찍힌 무늬 모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살짝 훑듯이 찍어낸 점렬무늬 토기편도 있다.
이와 같은 압인점렬무늬는 동해안 지방에서 신석기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유행하던 형식이나, 그 지방 토기의 바닥이 거의 전부 편평한 것과는 달리 북촌리 토기는 둥근 형태를 갖고 있다. 또한 점렬이 2~3줄 있는 예는 보이나, 북촌리 토기처럼 정연한 삼각형 혹은 원형점렬은 보이지 않는다.
북촌리에서는 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도 발견되는데 전체 기형은 전형적인 우리 나라 신석기 시대 토기의 砲彈型, 半卵型을 이루면서 구연부가 이중으로 된 겹아가리 형식이다. 이런 형식의 토기는 부산 동삼동, 금곡동, 암남동과 김해 수가리, 범방리와 양산 신암리, 거제 산달도 등의 경남 해안 지방과 전남 흑산도 유적 등 지금까지 남해안과 도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토기이다.
이 외에도 빗살무늬 토기 퇴화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短斜線무늬, 斜格子무늬, 조갯날무늬 토기 등도 발견되었다.
토기는 진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어 말린 뒤 불에 구워 낸 것을 말한다. 진흙을 빚어 600∼800℃ 정도의 온도에서 구우면 진흙 속의 광물은 녹지않지만 진흙에는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어느 정도 단단해지면서 그릇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토기의 기원은 서기전 5천년경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시작되며 이후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원삼국시대의 연질토기, 타날문토기와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넘어가면서 삼국시대 단단하게 만들어진 경질토기의 모체가 된다. 토기는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서민들의 질그릇으로 전통이 이어진다.
선사시대의 토기는 가마 지붕이 없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웠다. 이때는 굽는 과정에서 충분한 산소공급이 이루어지는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웠기에 진흙 속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흔히 적갈색을 띄고 있다.
<토기를 만드는 3가지 방법>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며, 덧무늬토기도 일부 발견된다. 토기는 주로 저장용과 조리용으로 이용되었는데, 신석기 시대의 정착생활 및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빗살무늬토기는 전국적으로 발견되지만, 토기에 표현된 기하학적 무늬를 기준으로 중서부·남부·동북지역별로 구분되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가장 큰 특징은 빗살무늬가 토기 표면에 보이며, 대체적으로 계란과 같이 밑부분이 뾰족한 형태(尖底)를 취하고 있다.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보이는데 , 문양의 구성요소는 점과 선이며, 곡선보다는 직선이 많다.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는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가늘게 돋게 하여 주둥이와 몸통부분에 무늬를 표시한 토기이다. 남해안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며 북쪽으로는 양양 오산리까지 분포하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 빠른 시기의 것이다. 한편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는 주둥이 밑에 한가닥 덧띠를 붙인 덧무늬토기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난다.
청동기 철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적으로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으며, 중국토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민무늬토기(無紋土器)는 그릇에 아무런 무늬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나, 주둥이에 구멍무늬나 짧은 빗금무늬가 표현된 토기, 가지무늬 토기도 여기에 포함되며 실제로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제작된 토기를 지칭한다.
민무늬토기에는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 공귀리형토기, 미송리형토기, 동북지방의 구멍무늬토기, 꼭지손잡이토기, 붉은간토기, 서남부지방의 송국리형토기 등이 있다. 중부이남에서는 위 지역의 영향을 받다 변형 팽이형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후기에는 검은간토기, 쇠뿔잡이토기, 덧띠토기 등이 새롭게 제작된다.
민무늬토기는 진흙에 모래알이 섞인 바탕 흙으로 대략 800∼900℃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밑이 평평한 평저이고 간 혹 밑이 좁은 것도 있으며 주둥이는 빗살무늬토기처럼 직립해서 넓게 벌어진 것도 있으나 목의 형상의 뚜렷이 구분되는 것들이 많다. 몸통에는 단지형, 쇠불형 등의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것이 많고, 기종은 화분형단지·장경호·단경호·독·작은 단지 등이 있다.
민무늬토기 중에서 팽이형토기는 밑부분이 작고 몸통(胴部)이 부푼 팽이처럼 생긴 토기로 2∼3줄의 짧은 사선(斜線)이 그어진 2겹의 주둥이가 특징이다.
구멍무늬토기(孔列紋土器)는 주둥이(口脣) 바로 아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무늬를 가로로 배치한 깊은 바리형토기 (深鉢形土器)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민무늬토기 시대의 전기와 중기를 대표한다.
붉은간토기(紅陶)는 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한 후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갈아 소성함으로써 붉은 색의광택이 나는 토기로 단도마연토기·홍도 등으로 불린다.
검은간토기(黑陶)는 표면에 흑연, 망간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갈아 광택이 있는 검은색으로 긴 목이 달린 목항아리가 많은데 민무늬토기 후기의 유형이다.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유행한다.
삼국시대의 토기
가야
일반적으로 신라·가야 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토기, 서쪽은 가야토기로 분류되며, 예외적으로 성주(星州)지역은 서쪽이지만 신라토기로 규정되고 있다. 이 토기는 4세기를 기준으로 1~3세기의 전기단계와 4~6세기의 후기단계로 나누어 변천하고 있다.
전기는 웅천(熊川)조개무지의 토기가 중심이 되어 '웅천기(熊川期)'라고도 하며, 적갈색의 연질토기(軟質土器:瓦質土器)가 많이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이것이 4세기대에 이르면 종래의 연질 또는 와질계 토기가 쇠퇴하여 회갈색의 경질(硬質)토기로 대체되며, 굽다리접시[高杯]·각종 항아리류 등 여러 기종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가야토기라 하면 바로 4세기 이후에 새로운 제도술(製陶術)에 의해 1,000℃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낸 단단한 질의 도질토기(陶質土器:硬質土器)를 말한다.
당시 김해·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타지역과 다른 독특한 토기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지역권이나 시간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굽다리접시 등의 경우, 소위 부산·김해식의 토기와 이들 지역을 제외한 다른 영남지역의 토기가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4세기대에 있어서 영남지역의 토기는 2대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항아리[壺]나 그릇받침[器臺] 등은 와질토기로도 계속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면 종래 가야식 토기와 신라양식 토기로 부르던 토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이후 이들 토기는 당시의 정세변화에 따라 크게 낙동강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은 신라양식의 토기(낙동강 동안양식)가, 서쪽 지역은 가야양식의 토기(낙동강 서안양식)가 널리 사용된다.
신라양식의 토기는 2단 투창(透窓)이 상하 엇갈린 굽접시를 표지로 하며, 대부분의 토기가 직선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반면 가야양식의 토기는 2단 투창이 상하 일직선으로 나 있는 굽접시를 표지로 하며 대부분의 토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토기가 양식적으로는 크게 둘로 구분되어 있으나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킬 때까지 각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토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함안식(咸安式), 사천(泗川)·고성식(固城式), 고령식(高靈式), 부산식(釜山式), 창령식(昌寧式), 대구식(大邱式) 등으로 불리는 토기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가야의 토기에는 항아리·목항아리·단지·그릇받침·잔·시루·굽다리접시 등 신라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가야토기는 같은 종류의 토기라도 신라토기에 비해 날렵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져 있으며 신라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동물·집·신발·배·수레·등잔 등의 상형토기(象形土器)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이형토기(異形土器)들이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죽은 자를 위한 음식물이 담겨져 있었다. 이와 함께 기마인물형토기·뿔잔·배모양토기·집모양토기 등 각종 이형토기는 사자(死者)를 명부(冥府)세계에 보내는 장송(葬送)의 의미를 가진 것들이 많다.
이 밖에 적갈색의 연질토기도 함께 만들어져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질의 토기는 주로 실생활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토기의 용도에 따라 색깔이 달랐는데, 항아리형토기·바리·시루 등의 음식을 끓이는 데 쓰는 토기는 주로 적갈색으로 만들어졌고, 굽다리접시 등 저장용 토기는 주로 회갈색 경질토기로 만들어졌다.
또 음식 공헌용(供獻用)의 소형 항아리나 잔은 적갈색이 많았다. 한편 가야지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그릇모양과 무늬 등의 세부적인 면에서 서로 차이를 보여 고령군·함안군·김해시 등 여러 지역군으로 구분되는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가야토기는 원삼국시기 회색 경질토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며,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
주구토기(注口土器)라고도 한다. 신석기시대와 원삼국시대 및 백제시대의 토기에 이런 토기의 예가 보인다. 신석기시대의 것으로는 부산의 동삼동 패총과 영선동(瀛仙洞)패총에서 출토된 것이 있으며, 모두 그릇 입술 일부를 밖으로 내밀어 놓은 형태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지그재그 덧무늬나 짧은 생선뼈무늬가 시문된 아가리의 한쪽에 작고 짧은 귀때가 만들어져 있다. 원삼국시대의 것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郡谷里)패총에서 발견된 것이 있으며, 그릇 상단부에 입술형 받침이 달린 큰 구멍을 뚫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한편, 백제의 것은 바리[鉢]와 주기(注器)의두 가지 형태가 있다. 전자는 바가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고, 후자는 넓은 어깨와납작한 바닥을 가진 토기의 몸통 어깨부분에 귀때가 내밀어져 있다. 신석기시대·원삼국시대·백제시대의 것은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떨어져 있고, 형태면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어 상호간의 관련성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가야
흙을 빚어 구운 모든 기물을 도자기라 말하며 구울 때의 온도에 따라 태토(胎土)의 굳기가 각각 다르다. 그릇의 굳기에 따라 일반적으로 토기, 도기, 석기, 자기로 구분한다.
토기는 점토질의 태토를 사용하여 섭씨 700 ~ 800도 정도에서 구운 것을 말하며, 유약을 씌우지 않았고, 표면색은 적갈색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이에 속한다.
[세무늬토기]
도기는 섭씨 800~1000도 정도로 토기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구워 물이 스며들기는 하나 몸이 비교적 단단하다. 대체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이에 속한다.
석기는 섭씨 11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燒成)하기 때문에 태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장석이 녹아서 유리질로 변해 태토 사이로 흘러 들어가 그릇의 몸이 매우 단단하며 표면색은 회청색을 띤다. 그러므로 두드리면 쇠붙이 같은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질토기가 곧 그것이다. 자기는 섭씨 1200~1400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태토의 유리질화가 더욱 촉진되어 강도가 매우 높은 그릇을 말하며, 태토로는 고령토를 사용한다
고구려
빗살무늬토기
대체로 나무 ·뼈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 ·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鉢]처럼 생긴 것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 ·단지 ·대접 ·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 ·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로 섭씨 600~700°C 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의 독과 같이대형은 저장용, 중형은 취사용, 소형은 식기와 음식준비 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빗살무늬그릇은 형태와 무늬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이며, 크게 북동 ·북서 ·중서부 ·남북 지방의 4지역군으로 구분된다.
북동 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납작바닥의 깊은바리모양[深鉢形] 토기가 대부분으로,이른 시기에는 짧은 선과 점으로 구성된 무늬를 몸통 윗부분 또는 아가리 둘레에 새겼고, 중기 이후에는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면서 새로이 타래무늬[渦文]가 등장하며, 후기에는 돌림무늬[雷文]토기 ·붉은칠[朱漆]토기와 함께 민무늬토기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웅기 서포항과 송평동, 나진 초도, 청진 농포동, 무산 범의구석과 두루봉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청천강 이북의 북서 지방에서는 아직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이 조사되지 않아 토기의 양상이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후기 유적인 용천 신암리와 쌍학리 ·용연리에서는 북동 지방과 특징을 달리하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잔[高杯], 그리고 바리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이 뚜렷하다. 특히 청천강 유역의 정주 당산과 영변 세죽리 유적, 강원도 지역의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 납작바닥[平底]과 둥근바닥[圓底]의 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이 지역이 두 문화의 접변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둥근바닥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방과 남부지방의 토기로 구분된다. 중서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尖底]을 기본으로 하면서 바닥 ·몸통 ·아가리에 각각 서로 다른 무늬를 새긴 초기 단계에서, 점차 바닥 ·몸통의 순서로 무늬가 생략되다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넘어간다. 남부지방의 토기는 바닥이 뾰족하지만 약간 둥근편이고, 처음에는 아가리 부분에만 무늬를 넣다가 전면무늬로 바뀌게 되며 차츰 중서부지방과 마찬가지로 무늬가 생략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중서부지방의 토기에서는 볼 수 없는 눌러찍은무늬[押捺文] ·심선문(沈線文)계통의 토기, 붉은칠토기, 귀때토기[注口土器], 겹아가리토기 등이 출토되며, 부산 ·김해 ·남해 도서지방 등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빗살무늬그릇은 신석기시대의 거의 전기간에 걸쳐 쓰였으며, 그 전통은 청동기시대의 일부 질그릇에까지 계승되었다. 특히 한국에 특징적인 빗살무늬그릇은 한국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둥베이[東北]지방과 옌하이저우[沿海州] 등 주변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한국의 빗살무늬토기는 그 기형, 무늬 수법으로 보아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북유럽 일대에 번영한 캄케라믹(Kammkeramik:櫛文土器)이 동쪽으로 전파되어 시베리아를 지나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견해인데, 그 전래경로는 먼저 옌하이저우지방에서 한반도 북동해안으로 유입되어 동해안을 따라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와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제작방법, 문양의 구성방법 등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크며,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치가 옌하이저우보다 더 오래된 연대를 나타내는 점 등을 들어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의 자생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토기의 기형과 무늬를 보면 중서부지방의 문화는 시베리아 계통의 주민이 내몽골 발해만을 통해 대동강 하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문화가 다시 한강으로 내려가 남부지방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남부지방은 원래 살던 돋을무늬[細線隆起文]토기의 토착민이 중서부지방과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교류 속에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며, 북동지방은 중국 둥베이지방, 두만강 이북의 산림지대, 옌하이저우지방의 주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양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북서지방은 신암리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서 볼 때 랴오닝[遼寧] 및 지린[吉林] 지방과 같은 계열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백제
세발토기
청동제(靑銅製)의 것을 포함하여 삼족기(三足器)라고도 한다. 서아시아 ·중국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 선사(先史) 내지 원사(原史)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상호의 관련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을 주장하는학자도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양사오[仰韶]문화기의 산시성[陝西省] 반포[半坡] 유적, 허난성[河南省]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 등에서 짧은 다리가 붙은세발토기가 출현하였다. 룽산[龍山]문화기가 되면 대상(袋狀)의 다리가 붙은 역(졌) ·언() 및 봉상(棒狀)의 다리가 붙은 정(鼎) 등의 세발토기가 사용되었다. 은(殷) ·주(周) 시대에는 일상생활 용구로서의 역 ·언 등 외에 제례용(祭禮用)의 정 ·가() ·작(爵) 등의 세발토기가 청동으로 주조되었고, 같은 모양의 것이 토기로도 만들어졌다.
생활용구로서의 역 ·언 등의 세발토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 급격하게줄어들지만 예기(禮器)로서의 정은 껴묻거리[副葬品]에 사용되는 등 한대(漢代)까지 널리 토기로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백제의 토기에서만 볼 수 있는 토기형태인데,세 발의 형태는 원형(圓形)과 뿔형[角形]이 있다. 뿔형으로 된 세 발은 칼이나 대나무 같은 공구로 6각이나 7각을 냈는데, 원형의 것과 같이 뾰죽하다. 직립한 아가리[口緣] 부분에 뚜껑을 받기 위한 턱[凸帶]이 주위에 돌려 있으며, 뚜껑에는 꼭지가 달린 것도 있고 달리지 않은 것도 있다. 꼭지의 모양은 뚜껑의 정상부에 굽을축소시킨 것과 같은 모양과 단추 같은 모양이 있다. 뚜껑은 대개 표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드림새가 곧게 내려오거나 안쪽으로 쏠린 것, 그리고 밋밋하게 이어져내려오기도 한다. 한편 원래 뚜껑 없이 사용된 무뚜껑식이 있는데, 발견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 뚜껑 없는 세발토기의 대표적인 것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것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공을 반으로 절단한 것과 같은 형태의 둥근 밑 용기에 짧은 원형의 세 발이 달려 있다. 또한 그릇의 깊이가 다른 세발토기에 비해서 깊고, 아가리 부분은 넓은 음선대(陰線帶)와 함께 입술부분이 둥글게 잘 마무리되었다.
세발토기를 다시 몸통의 형태에 따라 구분한다면 몸통이 편평하게 생긴 것과 바닥이 둥글게 생긴 것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바닥이 둥글고 그릇의 깊이가 깊은 세발토기가 시기적으로 선행된 양식이고, 몸통이 편평한 형태가 후에 출현한 양식으로 생각된다. 크기는 비교적 다양하며 출토지와 형태 등으로 보아 일상생활용기가 아닌 의례용(儀禮用) ·식품공헌용(食品供獻用) 그릇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발토기는 백제지역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기종으로 충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백제 고지(故地) 전역에서 출토된다.
신라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서봉총(瑞鳳塚) ·천마총(天馬塚)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등 주로 경주 노서동 일대의 중형(中形) 단독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부장품으로 금관 등의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토기는 별로 매장되지 않았으며, 토기 자체도 전기의 강건 ·소박 ·고졸함이 없어지면서 후퇴하였다. 전기의 특색이었던 기대 ·파배 등이 소멸하였고, 무늬도 전기의 파상집선문(波狀集線文)에서 밀집직선(密集直線) ·문살무늬[格文] ·삼각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로 바뀌었다. 토기가 용기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떠나 외관에 중점을 두는 의기화(儀器化)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후기는 6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이전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 소멸하여 경주에 돌방무덤[石室墳]이 등장하고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증가하면서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가 크게 줄었다. 형태상으로는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계속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 통일신라 토기로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토기가 이전 시기처럼 고분에 일괄 부장되는 일이 드물어 토기자료가 극히 영세하다. 경주 이외의 외곽에서 간혹 나타나는 부장 토기와 단독으로 출토되는 뼈단지[骨壺] 등이 있는데, 근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7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의 토기로서 민무늬토기와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 두 종류가 나왔다. 그 동안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적인 토기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도장무늬토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이것은 특수목적의 토기이며 일상생활에 쓰이던 토기는 아니다. 이 시기 토기는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신라토기의 형태가 점차 소멸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부터 도장무늬토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유약을 입힌 것이 나타난다. 유약은 고온에서 증발하기 때문에 유약을 입힌 토기는 700~800 ℃의 저온에서 구워졌다. 이러한 토기들은 고려 초기 회흑색토기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청자의 발달로 곧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
통일신라의 토기에는 낮고 넓은 굽이 달려 있는 굽다리접시나 유개합이 많이 보여 기본적으로 신라의 토기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본격적 교류와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병 종류나 뼈항아리와 같이 새로운 형태의 토기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뼈항아리는 8세기 이후에 화려한 무늬가 토기 전면에 베풀어지며 색깔도 녹, 황, 록으로 다양해지며 그 기형 또한 다양해진다. 병 종류에는 입큰병, 목긴병, 자라병 등 여러 형태의 것들이 제작되며 그 표면에는 도장무늬 외에 점토띠를 붙여 장식한 것도 제작된다.
안압지에서는 실용적인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접시, 토기뚜껑, 화덕, 벼루, 병 등 중국의 청동기와 도자기에 유사한 것들이 많다.
통일신라 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어지고 입큰병 등 청자에 유사한 것들이 제작되어 고려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통일신라의 궁성문화는 신라최대의 인공 못인 안압지와 주변의 건물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그 우수한 수준을 엿볼 수가 있다. 유물들은 대개 못의 서편에 있는 건물터와 이곳과 인접된 못 속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는데 그 수량이 3만여 점에 달하여 그 당시 문화연구를 위한 보고가 되고 있다
6세기 중엽이후 (진흥왕대)에 고구려, 백제의 돌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유개합 有蓋盒)이 나타나는 것이다.
통일신라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도장무늬이다. 그릇에 도장무늬를 찍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장무늬만으로 그릇의 표면을 장식한다.또 다른 특징은
굽다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의 구멍 뚫린 높은 굽다리는 진흥왕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고 굽다리의 구멍도 작아진다.그리고 그릇의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바르는
녹유(연유)토기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토기들을 통일신라의 토기와 구분하여 통일양식의 토기라고 부른다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는 불교문화가 그 중심이며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한 불국사, 석굴암이
그 대표라 하겠다. 이밖에도 상원사종과 봉덕사종은 공예기술에서뿐만 아니라, 소리의 극치라는
점에서도 공예문화는 절정기에 이른다. 도자기공예에서도 여러가지 변화와 발전을 보인다.
통일신라신대의 토기는 몇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첫째, 횡혈식 석실분토기가 연구의 대상이 되며 통일 전기양식을 대표한다.
둘째, 통일 이후 왕들이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는 화장법을 사용했으므로, 장골
용기로서의 뼈항아리(골호骨壺)에 대한 연구이다. (뼈항아리는 시대에
따라 형식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하다.)
세째, 생활용기이다. 1975~76년에 발굴한 안압지 출토유물과 대중12(858)년명
토기편이 출토된 미륵사지 출토 토기로 알수 있다.
네째,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했던 가마터 출토 토기편에 대한 조사이다.
무덤 출토 토기
경주지방에서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 무덤인 석실무덤이 조사된 예로 충효동 무덤 10기, 서악동
석실무덤, 정래동 방형무덤, 장산 토우총, 황성동 무덤등이 있다.
경주 이외의 지역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에 속하는 울릉도에 20여 기의 무덤이 있다.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종류별로 보면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 뚜껑있는 합, 완,
울릉도 천부동 출토 토기 등이 있다. 신라시대의 석실무덤은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사실상 석실무덤으로부터 출토된 토기의 변천 과정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뼈항아리
뼈항아리는 불교식으로 화장을 한 후 그 재를 담는 장골용기이다.
통일신라의 뼈항아리는 대체로 기형, 무늬, 제작 기법등으로 미루어 보아 다음과 같이 세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식 -- 통일신라 초기의 뼈항아리로 삼국시대 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탑모양뼈항아리,
각선무늬뼈항아리, 돌대무늬뼈항아리등이 이에 속한다. 이형식은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많이 유행되었다.
제2형식 -- 8세기에 유행한 각종 인화무늬뼈항아리를 말한다.
8세기의 통일신라는 조각, 공예, 건축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 준 시기이다. 뼈항아리
표면이 더욱 화려 정교하여져 역시 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인화무늬
뼈항아리에는 황갈 혹은 황록의
연유계통의 유약 쓰여진 예가 많다.
제3형식 -- 대체로 9세기에 유행한 뼈항아리로 인화무늬는 사라지고 민무늬가 되며 뚜껑에는
돌대선이
부착되는 경우도 있으나 뚜껑과 몸에 1~2줄의 음각 횡선이 돌려지는 것이 특색이다.
생활용기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용기에 대해서는 안압지 출토 토기편, 미륵사지 출토 토기편, 그리고 최근
발견되고 있는 경주 월성 해자 부근 건물자리에서 출토된 토기편 등을 들 수 있다.
안압지(雁鴨池) 임해전의 정원이었던 안압지의 발굴은 통일신라의 일상용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안압지 출토 토기의 특징과 종류를 보면, 태토는 정선된 흙을
사용했으며 대체로 소성 온도가 높은 흑회색의 석기질이고 표면장식은 음각무늬, 인화무늬,
그리고 민무늬 등의 종류가 있다.
기형의로는 굽다리접시, 사발, 접시, 항아리, 병, 등잔, 벼루등의 생활용기가 대부분이다.
통일신라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어지고 입큰병 등 청자와 유사한 것들이
주로 제작되어 고려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고려
고려도자의 특징은 청자의 비색(翡色), 상감 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에 있다.
첫째, 비색은 청자의 푸른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비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청자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송대에 와서 그 전성기를 이룩하고 고려청자는 송 청자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나 청자의 발색 효과는 송 청자와는 다른 푸른색을 개발하였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의 푸른색을 가리켜 비색(秘色)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고려인들은 독자적으로 비색(翡色)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중국의 청자색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송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의 『수중금(袖中錦』 천하 제일조에는 송청자를 제쳐 놓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천하 제일로 들고 있다.
12세기 순청자의 푸른색은 빙열(氷裂) 없이 깊고 차분한 비색의 절정을 보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인종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으로서 1123년에 고려에 온 송나라 시절의 한 사람이었던 서긍이 『비색(翡色)』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마도 이같은 작품을 보고 한 말이 아닐까 한다. 청자는 철분이 약간 함유되고 곱게 수비(水飛)된 태토에 2∼3%의 철분이 함유된 유약을 발라 환원염(還元焰)상태에서 굽게 되면 청자가 된다
고려자기 高麗瓷器
한국의 도자기는 고려 건국 초인 10세기에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토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로 이어져오는 가운데서도 7세기경부터 연유계 시유도기(鉛釉系施釉陶器), 회유계 경질시유도기(灰釉系硬質施釉陶器)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자기가 발달하는 터전이 되었다. 국내의 자체적인 노력과 발전도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4세기경의 청자의 조형(祖形)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월자(古越瓷), 당나라 말기의 정요(定窯)에서 제작된 백자, 저장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웨저우요[越州窯]에서 만든 오대(五代) 때의 세련된 청자, 베이징 부근의 정요백자(定窯白瓷)와 양쯔강[揚子江] 하구 남쪽의 웨저우요 청자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고려자기라면 흔히 청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이 고려시대 귀족들의 기호에 맞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백자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수효가 적어서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1. 10세기의 고려자기
청자와 백자가 탄생되는 시기지만, 역시 토기가 더 널리 쓰였다. 이 토기의 형태가 청자의 형태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청자와 토기제작이 병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청자는 993년(성종 12)에 만든 순화사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가 지금까지 전한다. 이 항아리는 고려 태조의 태묘(太廟)에서 제향(祭享) 때 쓰던 그릇이다. 이 항아리의 유약(釉藥)은 담록조(淡綠調)의 황회색계(黃灰色系)여서 청자로 보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것은 백자로 보아야 옳다는 주장이 있다. 즉, 태토(胎土)가 회백색의 자질(瓷質)에 가까워서 불완전 백자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제작은 당 말의 정요백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한다. 이 무렵 청자의 발달을 추측케 하는 자료가 있다. 11세기 초 거란(契丹)의 성종(聖宗) 영경릉(永慶陵)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음각문편(高麗靑瓷陰刻文片)이 바로 그것이다. 11세기 초 외국 왕실에 선물로 청자를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청자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아직 청자가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며 재래식 토기나 도기가 점차 자질(瓷質)로 바뀌어가는 시대였다. 따라서 초기 수준의 청자류가 제작되는 가운데 반자질(半瓷質)로 된 백자기술도 개발도상에 있었음은 순화사년명 항아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2. 11세기의 고려자기
이 시대에 송나라의 도자기는 그 정교·치밀함과 의장(意匠)의 세련됨이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이 무렵 거의 40년간 왕위에 있었던 문종(文宗)은 현명한 왕으로 송나라의 문물과 직접적이고 폭넓게 접촉하여, 고려문화 진작(振作)의 새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고려자기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당시에 제작된 자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에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양각(陽刻)·음각(陰刻), 또는 무늬가 없는 소문(素文)의 순청자(純靑瓷)·퇴화문청자(堆花文靑瓷)·회청자(繪靑瓷)·철회백자(鐵繪白瓷) 등이 있다. 소문 순청자는 그릇 표면이나 안에 장식 없이 청자유약만 발라서 구운 것이다. 그것이 너무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당초문·인동문 등을 선으로 파서 장식한 것이 음각 순청자이며, 더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문양을 도도록하게 부각(浮刻)한 것이 양각 순청자이다. 퇴화문은 청자 태토 위에 백토니(白土泥)로 도톰한 점을 찍어 장식하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흰 점이 튀어나와 보인다. 회청자는 청자 태토 위에 백토니나 자토니(爪土泥)로 화초나 동물들을 대범한 필치로 그려서 유약을 발라 구우면, 백토는 흰색, 자토는 검은색 그림으로 나타난다. 백자철회문 그릇은 석고와 같은 백색의 질감을 나타내는 연질계(軟質系) 고려백자 태토 위에 철사(鐵砂)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푸른 기가 도는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운 것이다. 철사로 그린 철회 위에는 유약이 탈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3. 12세기의 고려자기
12세기의 고려자기 전기는 순청자시대였고, 후기부터 상감청자시대에 들어간다. 1123년(인종 1)에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를 수행해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당시의 청자를 묘사한 글이 나온다. “도준(陶尊), 도기의 푸른 빛깔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리 같으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도로(陶爐), 즉 사자 모양을 한 향로 역시 비색이며,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위로 향한 연꽃)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청자와 유사하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청자류는 상감이 없는 순청자류였다. 전기에 만들어진 것은 양각이나 음각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소문 순청자였고, 《고려도경》에 언급된 것과 같은 어떤 물상의 형을 취한 것들이다. 그리고 퇴화문·회청자·청자진사채퇴화문(靑瓷辰砂彩堆花文)·철채백퇴문(鐵彩白堆文)·청자철채(靑瓷鐵彩) 등이었다. 어떤 물건의 형상을 취한 도범(陶范)으로 만든 것으로는 동철기(銅鐵器)의 모양을 그대로 딴 것, 인간과 새·동물의 모양을 본뜬 것, 표주박·참외·석류·죽순 등 화초의 형태를 취한 것 등이 다양하고, 또 투각(透刻)의 기법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철채백퇴문은 그릇 전체에 철채를 입히고 백토로 퇴화문 점을 찍은 위에 얇게 청자유를 시유(施釉)한 것으로, 흑유(黑釉)나 천목(天目)과 같은 질감을 나타낸다. 인종 때는 고려청자가 장족의 발전을 하였으며, 이 12세기 전반기가 순청자의 전성시대였다. 이런 청자를 만든 곳은 전남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였다. 신안(新安) 앞바다에서 원나라 청자를 실은 배가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황해의 대안(對岸)에 있던 웨저우요와의 내왕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발달된 송나라 청자의 직접적인 영향을 거기에서 받아, 고려의 독자적인 청자를 만들어내는 자극제로 삼았을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순청자들은 태토가 고르고 얇으며, 만듦새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유약이 티없이 아름답다. 비취와 같은 옥색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 청자유의 광택은 고요하며, 식은테[釉裂:氷裂]가 나타나지 않는 그 시대 청자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란한 장식무늬가 없는 소문의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유약의 아름다움에 집약시키듯, 어느 때의 유약보다 아름답고 안정되어 있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의 개발은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123년의 고려청자를 이야기한 《고려도경》에 상감기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46년에 죽은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순청자 그릇은 나왔어도, 청자상감은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대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감기법으로 만든 청자는 1159년에 죽은 문유(文裕)의 무덤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나온 청자 대접에는 유려한 보상당초(寶相唐草)무늬로 된 흑백상감이 원숙하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이때 이미 상감기법이 상당히 발달한 셈인데, 인종이 죽은 뒤 13년 만에 이렇게 발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인종 때도 벌써 상감기법을 쓰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종 때 훌륭한 청자상감이 많이 나오지 못하여 장릉에 부장품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13년간에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 같다. 상감기법은 태토 표면에 그리고 싶은 문양을 음각으로 파고, 거기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爪土泥)를 붓으로 발라서 메운다. 그것이 마른 다음에 그릇 면에 넘쳐 묻은 이토(泥土)를 깎아내거나 닦아내면, 음각한 곳을 메운 것만 분명하게 남는다. 거기에 청자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나 유약을 통해 비쳐보인다. 이 상감문양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의 투명도가 더 높아지고, 유약은 차차 얇게 입혀지게 된다. 1157년(의종 11)에는 청자기와[靑瓷瓦]도 만들었다. 명종 지릉(明宗 智陵:1197)에서 출토된 일군의 청자상감들은 정교하고도 세밀한 최상질의 상감이었다. 이러한 상감기법을 도입한 고려청자에는 금이나 은을 상감한 동기(銅器)의 입사기법(入絲技法)을 응용한 것 같고, 또 나전철기(螺鈿漆器)에서 옻칠 속에 자개를 상감한 기법을 따른 것으로도 보인다. 이 2가지는 모두 같은 시대에 우수한 제품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문양도 이 2가지와 유사한 것이 많다. 특히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등은 상감청자의 그것과 그릇의 형태나 문양이 흡사하다. 청자의 상감기법은 이 무렵에 매우 번창하였지만, 한편으로 회청자(繪靑瓷)·진사채(辰砂彩)·청자철채(靑瓷鐵彩)·철사상감(鐵砂象嵌) 등도 만들어졌다. 백자도 꾸준히 만들어졌으며, 거기에 상감을 한 백자상감도 있었고, 철채백퇴화(鐵彩白堆花)무늬·연리(練理)무늬·철사유(鐵砂釉) 등 다양한 기법의 자기들이 만들어졌다. 진사채 그릇은 태토에 진사로 채색한 위에 청자유를 입혀 구운 것으로 연한 팥죽색이 난다. 청자철채 그릇은 역시 그릇 표면에 철채를 하고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백자에 상감한 것은 주로 자토로 흑상감한 것이지만, 때로는 윤곽 부분에 청자 태토를 메꾼 다음 그 위에 청자와 같이 흑백상감을 하기도 한다. 연리문 자기는 태토를 백자의 태토인 백토와 청자토·자토(爪土)를 합쳐 반죽한 것으로, 그릇을 빚으면 3가지 빛깔이 마치 복잡한 나뭇결무늬[木理文]처럼 나타난다. 철사유는 유약에 철분이 많이 들어가게 해서 구운 것이다. 철분의 농도나 불길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지만, 갈색이나 흑갈색이 나타난다.
4. 13세기의 고려자기
12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청자상감은 1231년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미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감기법의 개발과 발전에 따라 청자질은 변화해왔다. 상감문양이 잘 보이게 하는 효과를 위해 유약의 투명도가 높아지고, 유약의 색감은 회청계(灰靑系)로 담소화(淡素化)되었으며, 유약이 고르고 얇아져서 순청자보다 식은테가 많이 생긴 것이 그것이다. 묵직하고 가라앉은 안정감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중국의 자기도 원의 지배로 침체기에 들어갔듯이, 고려청자도 국운의 쇠퇴에 따라 그 기교적인 정교하고 치밀한 성격을 점차 잃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강화천도(江華遷都)가 끝난 13세기 후반에 더욱 짙어졌다. 상감문양도 덜 익숙한 듯 설고 대범하며 거칠어졌고, 그릇의 곡선도 매끄럽고 우아한 맛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단정함과 우아함보다는 실용성과 안전성이 점차 강조되어가는 변화를 일으켰다. 13세기 후반에는 청자진사채(靑瓷辰砂彩) 기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화금청자(畵金靑瓷)가 나타났다. 1249년에 죽은 최우(崔瑀)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진사채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砂彩蓮華文瓢形注子)는 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진사채가 뛰어나다. 진사채는 상감을 하지 않고 문양을 음각이나 양각한 것도 부분적으로 채색하거나, 흑백상감한 것도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채색해서, 청자유를 입혀 구워서 그 아름다운 색감을 나타낸다. 이때부터 14세기의 전반에 이르는 동안에 많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도 만들어졌으나 이 시기에 제작이 활발하였던 것이다. 화금청자는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깨어진 조각이나 화금이 거의 마멸된 상태로 조금 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조인규(趙仁規)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화금청자를 바치면서 문답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가 “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쓰는가”라고 하자, “다만 장식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럼 그 금은 뒤에 다시 쓸 수 있느냐”라고 묻자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라, 금도 따라서 없어지니, 어찌 다시 쓰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세조는 “지금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리지도 말고 바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 시기는 1280년에서 1290년 사이이다. 그리고 97년 충렬왕이 황서(黃瑞)를 시켜 원나라 성종에게 역시 화금청자를 바친 기록이 나온다. 이 화금청자는 상감청자의 문양에 따라, 유약 위에 그리고 싶은 문양의 선이나 점을 그려 음각하듯 홈을 파고, 이 오목한 홈에 이금(泥金)을 그려넣어 장식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단하지만 긴 세월을 두고 쓰다 보면, 차차 닳아서 없어져버린다. 또, 이 시대의 자기로는 상감청자 외에 흑유계자기(黑釉系瓷器)들과 철사유자기류(鐵砂釉瓷器類) 등이 만들어졌다. 철사유류는 청자태토 위에 철유(鐵釉)를 씌워 구운 것이어서 금속질감을 나타낸다. 청자태토에 백토상감을 하고, 상감부분 이외의 태토에는 철유를 모두 꼼꼼히 칠해서 구운 철채백상감자기류(鐵彩白象嵌瓷器類) 등이 만들어졌다.
5. 14세기의 고려자기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말, 즉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퇴화해가는 고려청자의 질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청자의 태토는 거칠고 두꺼워지며, 상감기법도 발전하지 못하고 섬세한 맛이 없어 전성기의 상감청자를 연상하게 하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청자의 세 가지 특이한 장점은 바로 정제된 그릇 곡선의 빈틈없이 매끄러운 균형, 정교하고 세련된 상감기법, 그윽하고 우아한 비색(翡色)의 유약에 있다. 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고려가 날로 쇠망의 길을 걸을 때에, 청자의 아름다움도 그 쇠운을 함께 해갔다. 이렇게 정교하지 못한 청자상감 그릇들은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할 조짐이 되었다.
6. 청자 靑瓷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으며, 한국에도 전해져 고려시대에 꽃피웠다. 유약 가운데 미량의 철분이 있어, 환원염(還元焰)에 의해 구워지는 과정에서 청록색의 유조(釉調)를 띠게 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으면 유색이 녹황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라 부른다. 다만 구리성분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청자는 산지와 시대에 따라 갖가지 구별이 있다. 기원은 은(殷) ·주(周) ·전국(戰國) 시대 무렵에 중국 각지에서 만들어진 회채도(灰彩陶)에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이 특히 중국 남부지방에서 발달하여 삼국 ·서진(西晉) 무렵에는 회녹색의 고월주요(古越州窯:古越窯)라 불린 원시적인 청자가 저장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말기에 이러한 청자는 중국 북부에서도 제작되어 화려한 대작도 나타났다. 당대(唐代)에는 각지에 명요가 생겼고, 특히 웨저우요[越州窯]의 청자는 유명하였다. 당말오대(唐末五代)에는 질과 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제품은 비색청자(翡色靑瓷)라 하여 시문(詩文)에도 구가(謳歌)되었다. 송대(宋代)에는 웨저우요의 흐름을 이어받은 룽취안요[龍泉窯]나, 화북(華北)의 야저우요[耀州窯]에 아름다운 청자가 구워지고, 또 그 영향을 받아 각지에 청자요가 생겼다. 북송(北宋) 말기에는 수도인 변경(폣京:開封)에 관요(官窯)가 설치되었다 하나 제품은 불명이다. 오늘날 여관요(汝官窯)라 불리는 것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남송(南宋)에서는 수도인 항저우[杭州] 근교에 관요가 설치되어 절묘한 청자를 구워냈다. 그 무렵 룽취안요에서도 침청자(砧靑瓷)라 불리는 분청색의 아름다운 청자가 양산되어 해외에 다량 수출되었다. 송대에서 원대(元代)에 걸쳐서 침청자의 색조는 녹색조가 강해지고, 천룡사청자(天龍寺靑瓷)로 바뀌었다. 명대(明代) 초기는 천룡사청자의 전성기이며, 명대 중기 이후 작조(作調)는 저하되고, 투명성이 강한 칠관청자(七官靑瓷)로 이행되었다. 이 밖에 청조(淸朝)가 되면서 징더전[景德鎭]의 어기창(御器敞)인 연요(年窯)라 불리는 담청색 청자에서 수작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 초기(10∼11세기),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에서 독특한 청자를 만들어내었고, 급속도로 성장하여 12세기 무렵에는 비색청자(翡色靑瓷)라 불리는 중국의 청자를 능가하는 뛰어난 청자를 구워냈다. 또 백토(白土) ·자토(裏土)를 밑바탕에 상감하여 청자유를 씌워서 굽는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내놓았다. 그리고 유하(釉下)에 철회문양(鐵繪文樣)을 그린 회청자(繪靑瓷)도 있다. 고려는 상감청자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크게 발전하였다. 13세기에는 금채(金彩)를 가한 화금청자(畵金靑瓷), 진사(辰砂)를 시유한 청자진사채(靑瓷辰砂彩) 등 기교적인 청자가 나타난다. 13세기 후반부터 유조(釉調) ·작풍(作風)이 점차 저하되어 고려 말기에는 쇠미해졌다. 이 밖에 일본 ·베트남 ·타이에서도 13세기 무렵부터 청자를 구웠으며, 특히 타이의 스왕카로크[宋胡錄窯]에는 유색이 아름다운 가작(佳作)이 있다.
7. 상감청자 象嵌靑瓷
자기가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陰刻)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裏土泥:붉은 흙)를 메꾸고 예번(豫燔)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바르고 본번(本燔)하는 자기(瓷器) 장식기법이다. 고려청자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다른 나라의 도자기제품에는 유례가 없는 기법으로, 의종대(毅宗代:1147∼1170)에 창안되어 고려청자에 응용되었다. 상감청자의 문양으로는 운학(雲鶴)·양류(楊柳)·보상화(寶相華)·국화(菊花)·당초(唐草)·석류(石榴) 등 여러 가지가 쓰였으며, 특히 운학무늬와 국화무늬가 가장 많이 쓰였고, 국화무늬는 조선시대에도 애용되었다. 상감청자의 특징은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는 데 있으며, 상감문양을 전면적으로 쓴 경우에도 배경으로서의 공간은 여유있게 남기고 있다. 또한 문양이 단일문양의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죽(竹)·유(柳)·화(花) 등이 중심이 되는 문양을 전경(前景)에 크게 내세우고, 수(水)·조(鳥)·암(岩)·인물 등을 배치하여 하나의 화폭과 같은 화면의 효과를 내고 있으며, 운학무늬의 경우에도 문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 또한 모란꽃이나 보상화의 경우에도 넓은 화판(花瓣)을 백토상감(白土象嵌)하고 배경을 흑토상감해서 흑백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대표적인 상감청자로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소장된 죽문병(竹文甁),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모란문매병(牧丹文梅甁),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천학문매병(千鶴文梅甁) 등이 있다.
조선
백자 白瓷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① 소문백자(素文白瓷), ② 양각백자(陽刻白瓷), ③ 음각백자(陰刻白瓷), ④ 투각백자(透刻白瓷), ⑤ 상형백자(象形白瓷)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소문백자: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항아리는 달걀색과 비슷한 순백색의 항아리이다. 얕은 입과 우묵한 받침, 부드럽게 벌어진 몸에서 무한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릇 일부에 가는 빙렬(氷裂)이 있으나, 조선시대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양각백자: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양각 매화무늬 장방형연적(長方形硯滴)은 네 귀를 안으로 접은 뒤 한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
③ 음각백자: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④ 투각백자: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 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十字形)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
⑤ 상형백자: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죽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2) 청화백자: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廣州郡)을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 ·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 ·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 ·소상팔경(蕭湘八景) ·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 ·접시 ·사발 ·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 ·주전자 ·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 ·연적 ·필세(筆洗) ·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 ·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山水) ·십장생 ·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酸化鐵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墓誌)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洗鍊美)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廣州官窯)와 지방민요(地方民窯)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水飛)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瓷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 ·대나무 ·운룡(雲龍) ·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 ·죽(竹) ·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 ·철화(鐵畵) ·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石間褓)라고 하였다. 가마터[窯址)로는 경기 광주군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 ·천안 ·괴산 ·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군 분원리요(分院里窯)와 함남의 영흥(永興)일대가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