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임존산성(任存山城)--예산 대흥면/광시면/

吾心竹--오심죽-- 2008. 12. 2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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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黑齒常之, 630?~689]
요약
삼국시대 말기 백제의 장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전세가 약화되자 유인궤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로 가서는 여러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무고로 옥사했다.
활동분야 군사
본문
삼국사기》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서부(西)출신으로서 키가 7척(175cm?)을 넘었으며 날쌔고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벼슬은 제2품인 달솔()에 이르렀고, 풍달군() 군장()을 겸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백제 무왕() 31년(630)경에 태어나 서기 689년( 원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는 원래 부여씨()였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졌으므로 성씨를 흑치로 바꿨다고 한다. 증조부의 이름은 흑치문대(), 조부는 흑치덕현(), 아버지는 흑치사차()이며, 흑치상지의 어릴 적 이름은 항원()이었다.

서기 660년에 백제의
사비성이 신라·당 연합군에게 함락 당하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흑치상지도 역시 항복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의자왕을 가두고 노략질하자 흑치상지는 임존산(: 지금의 예산)에 의지하며 군사를 모아 당나라 군대에 대항하였다. 저항 초기에는 신라와 당에게 빼앗겼던 200여 성을 회복하는 등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은 유인궤()에게 항복하였으며, 오히려 백제의 부흥운동세력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로부터 인덕(: 664~665) 초년에 절충도위()라는 벼슬을 받고
웅진성()에 주둔하였다. 함형()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로 승진하고 상주국()을 제수 받았다. 이후 좌령군장군() 겸 웅진도독부 사마()가 되었으며, 부양군() 개국공()과 식읍() 2천 호()를 더 받았다.

이어서 서기 678년경에는 돌궐과의 전투에 조하도경략부사(洮使)로 참가해 공을 세우고 좌무위장군()이 되었으며, 다시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에 임명되었다. 684년에는 서경업()의 모반을 평정하여 좌무위대장군()과 검교좌우림군()으로 승진하였다. 687년에는 연연도대총관()으로서 돌궐을 쳐서 공을 세워 겸국공(=)과 식읍() 3천 호를 받고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뒤 회원군경략대사(使)로 자리를 옮겨 찬보벽(爨)과 함께 돌궐을 토벌하였다. 이때 찬보벽이 혼자 무리하게 돌궐을 공격하여 크게 패하였는데, 흑치상지도 이에 연루되어 공이 없어졌다. 그리고
측천무후() 때인 서기 689년에 혹리()로 유명한 주흥() 등의 무고로 조회절() 등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다. 교수형을 당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하는데, 사형이 확정된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서 자살하였으므로 달리 전하는 듯하다.

죽은지 10년째인 698년에
맏아들 흑치준() 등의 노력으로 억울함이 인정되어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 상주국() 연국공()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좌옥검위대장군()을 더해주고 훈봉()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였다.

 
<김기섭

 ***대흥동헌(大興東軒)...//

 

 

 

 

 

 

 

 ***의 좋은 형제의 주인공...이성만 형제 효제비...대흥현 //

 

 

 

 

 

 

 

 

 

 

 

 

 

 

 

 

 

 

 

 

 

 

 

 

 

 

 

 

 

 

 ***예산읍...//

 

***홍성읍 //

 

***오서산 //

 

***덕산의 가야산과 용봉산...//

 

***온양의 좌측...설화산.../ 우측...광덕산(태화산)

 

***예당저수지...//

 

***당진~상주간 고속도로...//

 

 

 ***봉수산 정상...//

 

 

 

***광천의 오서산이 한 눈에...//

 

***예산~대흥~광시~청양 가는 길...//

 

 

 

***홍주현...홍성...///

 

 

 

 

 

 

 

 

 

 

 

 

***임존산성의 남쪽 성벽...//

 

 

***봉수산 임존성 //

 

***임존산성에서 본 예당평야...//

 

***예당저수지와 대흥현 읍치...//

 

 

 

 

 

 

 

 

       <<< 임존성-任存城 >>>----吾心竹 詩---

 

 

 

임존성 높은성벽  칼바람 지나는데

홍주벌 예당벌을  한눈에 굽어보며

성벽을 베고누워  옛일을 생각하네

 

 

나라는 망했어도  네놈들 죽이리라

처자식 부모형제  내집을 불태우고

피맺힌 피의복수  맹세코 죽이리라

 

사비성 웅천성이  백리길 저승길에

나혼자 살고지고  희망이 무엇인가

칠갑산 굽이굽이  곡소리 들리는가

 

농기구 팽겨치고  창칼활 둘러메니

험로에 난공불락  임존성 우뚝한데

부질타 삼년수성  인생사 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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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저수지...봉수산 자연휴양림...//

 

 

 

***봉수산 임존산성의 전경...///

 

***역대 대흥현감의 공덕,송덕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대흥현(大興縣)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금주(今州)라고도 했다. 이었는데, 신라 때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임존성(任存城)ㆍ금주(今州)ㆍ임성(任城).
【성씨】 본현 이(李)ㆍ한(韓)ㆍ장(張)ㆍ오(吳)ㆍ백(白). 거변(居邊) 홍(洪)ㆍ이(李).
【산천】 봉수산(鳳首山) 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자산(獅子山)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현 남쪽 19리에 있다. 금롱산(金籠山) 현 남쪽 16리에 있다. 당산(堂山)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박산(朴山) 현 동쪽 12리에 있다. 가차산(加次山) 현 동북쪽 11리에 있다. 송림산(松林山) 현 동쪽 19리에 있다. 비도현(飛到峴) 현 동쪽 14리에 있다. 내천(奈川) 현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청양현(靑陽縣) 어호동(於乎洞)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홍주(洪州) 여양현(驪陽縣)에서 나와서 신창현(新昌縣) 정포(井浦)로 들어간다. 경결천(京結川) 현 동북쪽 6리에 있다. 바로 내천(奈川)의 하류이다. 죽천천(竹遷川) 거변소(居邊所)에 있다. 현에서 동쪽으로 17리 떨어져 있으며, 청양현 어사현(於士峴)에서 발원하여 경결천으로 들어간다. 달천(達川) 현 동쪽 17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게[蟹]ㆍ지황(地黃).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천 1백 15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정사】 포정정(布政亭)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안침(安琛)이 견사정(見思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광시역(光時驛) 현 남쪽 19리에 있다. 가방원(加方院) 현 남쪽 2리에 있다.
【교량】 내천교(奈川橋) 현 동쪽 2리에 있다. 거변교(居邊橋) 달천에 있다. 금막천교(金莫川橋) 현 북쪽 19리에 있다.
【불우】 대련사(大連寺) 봉수산에 있다. 용흥사(龍興寺) 사자산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백월산에 있다. 은사(銀寺) 금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봉수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사당의 신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본읍에서 제사하였다 한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임존성(任存城) 이곳이 바로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 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와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현 서쪽 13리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천 1백 94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 부여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後百濟)의 임존성을 공격하여 형적(刑積) 등 3천여 명을 죽이고 잡았다. 거변소(居邊所) 옛날에는 거질물소(居叱勿所)로 불리웠으며, 현 동쪽 21리에 있다.
【인물】
고려 한문준(韓文俊) 천성이 고아(高雅) 정직하고 작문(作文)에 능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외임[外重]을 중히 여기던 시대였는데 장주(長州)ㆍ장흥(長興)ㆍ남원(南原) 3개 군의 부사(副使)와 남경 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면서 모두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才)의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는 세 군의 사람들을 소식(蘇息)하게 하고, 동쪽으로 한 주(州)의 백성을 무애(撫愛)하였다.” 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하였다.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한취(韓就)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성사(門下省事)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이성만(李成萬) 성만이 그 아우 순(淳)과 더불어 모두 지극한 효성이어서 부모가 죽자, 성만은 아버지의 분묘를 지키고, 순은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면서 각각 애통과 경근(敬謹)을 다하였으며, 3년의 복제를 마치고는 아침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형이 아우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의 음식이 생겨도 서로 모여 만나지 않으면 서로 먹지 않았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 되자 되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열녀】 고려 곽씨(郭氏) 나이 19세에 박근(朴根)에게 시집갔는데, 23세에 근이 죽으니, 3년간 여묘(廬墓)를 살고는 상을 마치고도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를 효성껏 받들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되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관어지북인한천(觀魚池北引寒泉)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포정정(布政亭) 동쪽에선 흰 달을 맞이하고, 관어지 북쪽에는 찬 샘물 끌어왔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지분촌(只分材)이었는데, 당(唐)이 지심(支潯)으로 고치고 지심주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인데, 청정(靑正)ㆍ고산(孤山)이다. 숙종 7년에 현종의 어태(御胎)를 묻어 군으로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 끝이 7리. 일남(一南)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이남(二南) 처음은 6리, 끝은 20리. 거변(居邊) 동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근동(近東)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원동(遠東)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내북(內北) 처음은 10리, 끝은 19리. 외북(外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원】 소도독사(蘇都督祠) 대잠도(大岑島)에 있으며 고려 때부터 춘추로 향축(香祝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소정방(蘇定方) 당 고종 때 백제를 평정하였다.


 

 

 

***광시면... 한우 암소전문집...600g 35,000원...1인당 구워 먹는데 5천원(된장국 제공...공기밥 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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